"이란, 美 핵합의 요구 들어주느니 전쟁이 낫다고 판단" (이스탄불=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이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위협에도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수준의 협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레바논의 친헤즈볼라 매체 알아크바르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란 외무부의 한 소식통은 "이란은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며 "트럼프가 제시한 합의와 전쟁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이란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대가가 더 적은 전쟁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란은 언제든 상호 이익을 보장하고 전쟁에 이르지 않는 균형 잡힌 합의에 도달할 준비가 돼 있었다"면서도 "미국은 진정한 협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란에 서명을 강요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합의에는 이란의 핵프로그램 해체와 국방력 제한,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국가) 승인이 포함될 것"이라며 "이는 균형 잡힌 합의가 아니라 이란의 항복을 뜻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이란 지도부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는 강경 메시지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이란 국영 IRIB방송에 따르면 이날 이란군은 총 1천대의 전략 무인기(드론)가 전력에 추가됐다며 "어떠한 침략이나 공격에도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모하메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마즐리스) 의장은 이날 보도된 미국 CNN방송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은 진정한 대화를 원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 뜻을 타국에 강요하려 할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트럼프가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어도 전쟁의 결말은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정치고문인 알리 샴카니는 엑스(X·옛 트위터) "제한적 공격이라는 것은 망상"이라며 "미국이 어디에서든 어떤 수준에서든 군사행동에 나설 경우 이는 전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에 대한 대응은 즉각적이고 전면적이며 전례없는 수준이 될 것이고 텔아비브(이스라엘 정권) 등 침략자를 지원하는 모든 세력을 목표로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란 당국의 반정부시위 탄압으로 최소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개입 의지를 거듭 밝혔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전단이 중동에 배치된 것을 두고 "거대한 함대가 이란으로 향하고 있다"며 "신속히 협상 테이블로 나와 공정하고 공평한 '핵무기 금지' 합의를 협상하기 바란다"고 압박했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김동호
2026.01.29. 8:26
서부 발칸 트럭 기사들, 유럽 새 출입국시스템 항의 시위 솅겐 지역, 작년 10월부터 체류일수 전산으로 자동 추적 EU 집행위, 이동 잦은 직종 위한 새로운 비자 전략 마련중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유럽 솅겐 지역과 국경을 맞댄 서부 발칸 지역의 트럭 기사들이 유럽의 새로운 출입국시스템(EES)에 반발하며 국경 화물 터미널을 나흘째 봉쇄하고 있다. 29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의 트럭 기사들은 26일부터 유럽의 새 EES 시행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세르비아와 유럽연합(EU) 회원국 크로아티아 사이의 바트로브치 국경 검문소에는 약 1.6㎞에 달하는 트럭 행렬이 화물 터미널 진입로를 막았다. EU와 튀르키예, 중동을 잇는 주요 통로의 화물 운송도 중단됐다. 이들은 솅겐 지역이 지난해 10월 도입한 EES가 운전사들의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방해한다며 규정을 조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EES가 가동되면서 EU(아일랜드·키프로스 제외)를 포함한 솅겐 조약 가입국을 무비자로 단기간(90일) 여행하는 비(非)EU 국적자의 출입국 기록이 전산화된다. 여권에 도장을 찍는 대신 여권번호, 지문 확인, 얼굴 사진 촬영을 통해 출입국 시간과 솅겐 지역 체류 일수를 전산으로 자동 추적·기록한다. 이를 통해 솅겐 외부 국경 보안을 강화하고 불법 이주를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솅겐 지역 밖 트럭 기사의 경우 업무상 반복적으로 입국을 하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 무비자 체류 기간을 넘겨 구금이나 추방, 재입국 금지를 당할 우려가 크다. 트럭 기사 시위에 세르비아 상공회의소 마르코 차데즈 회장은 "4개국 수출의 93%가 차단돼 하루 약 9천200만 유로(약 1천500억원)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몬테네그로의 야코브 밀라토비치 대통령은 전날 EU의 마르타 코스 확장 담당 집행위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몬테네그로 운송업체들의 일상적 필요 사항을 고려해달라고 촉구했다. 마르쿠스 람메르트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지난 26일 트럭 운전사, 운동선수, 예술가 등 이동이 잦은 직종을 위한 새로운 비자 전략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세르비아 상공회의소 차데즈 회장은 세르비아가 특별 비자나 허가증 같은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EU 집행위에 회담을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송진원
2026.01.29. 8:26
푸틴, 우크라 평화협상 앞두고 중재국 UAE 대통령과 회담 "우크라 위기 해결 노력에 감사…이란 문제 면밀히 주시 중"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우크라이나 종전안 논의를 위한 3차 협상이 열릴 예정인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UAE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회담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알나하얀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UAE 측의 우크라이나 위기 맥락의 노력, 포로 교환에 대한 기여, UAE 영토 내 다양한 형태의 접촉 조직 지원 등을 특별히 언급하고 싶다"며 감사를 표했다고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또 "지난주 아부다비에서 열린 안보 분야 실무그룹 3자 회담 개최를 위해 노력하고 우리 대표단에 관심을 기울인 점에도 개인적으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알나하얀 대통령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포로 교환을 촉진하려는 우리의 작업에 기여해준 점에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지난 23∼24일 아부다비에서는 미국이 마련한 우크라이나 종전안을 둘러싸고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협상하는 3자 회담이 열렸다. 다음 달 1일에는 후속 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UAE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포로 교환을 지원하는 등 주요 중재국 역할을 하고 있다. 알나하얀 대통령은 "필요한 외교적 해결을 촉진하기 위한 건설적 대화와 노력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문제뿐 아니라 이란 상황,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 등 국제 정세를 논의하자고 알나하얀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특히 "우리는 모두 현재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러시아와 UAE의 수교 55주년이라면서 무역, 에너지 등 분야의 양국 관계도 논의하자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엘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 게르만 그레프 스베르 은행 최고경영자(CEO), 람잔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수장,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협상에 관여하는 이고리 코스튜코프 러시아군 총정찰국장, 키릴 드미트리 특사 등이 참석했다고 리아노보스티 통신이 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회담에서 다음 달 1일 아부다비 3차 회담 조직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아부다비 회담이 지난해 3차에 걸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진행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직접 협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회담이라고 강조했다. 전날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정책 보좌관이 푸틴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하는 데 열려 있으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준비된다면 모스크바에서 회담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관련해 페스코프 대변인은 "젤렌스키 대통령 측의 반응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회담할 수 있는 장소로 모스크바만 보고 있으면 장소에 대한 다른 논쟁은 적절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우샤코프 보좌관은 현재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 유일하게 미해결된 문제가 영토 문제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부인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완전히 철군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이런 조건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이날 양국 간 전사자 유해 교환이 이뤄짐에 따라 사망한 우크라이나 군인 1천명의 시신을 인도받았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38명의 러시아 전사자 시신이 반환됐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최인영
2026.01.29. 8:26
트럼프 이름붙인 워싱턴 대표 공연장서 멜라니아 다큐 시사회 '은둔'의 영부인, 적극적으로 영화 홍보…뉴욕증시 개장종 행사도 참석 (워싱턴=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멜라니아 여사가 출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시사회가 29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 이름을 붙인 워싱턴 DC의 '대표 공연장'에서 열린다. 백악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는 이날 오후 워싱턴 DC의 트럼프-케네디 센터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멜라니아' 시사회에 함께 참석한다. 트럼프-케네디센터는 원래 이름이 '케네디센터'였으나 지난달 개명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센터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기에 개명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았다. 영화 멜라니아는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을 앞둔 지난해 1월 당시 멜라니아 여사의 20일간 일정을 보여준다. 아마존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프라임 비디오'는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라이선스 비용으로 4천만 달러(약 573억원)를 지급하는 계약을 맺었는데, 이 중 멜라니아 여사의 몫이 70%에 이른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한 바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이례적인 수준의 거액 개런티였다. 이를 두고 사업관계로 트럼프 행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사업상의 '혜택'을 기대하며 트럼프 일가에 제공한 '호의'라는 시각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공개 활동이 드문 멜라니아 여사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모처럼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영화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28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개장 벨을 울렸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조준형
2026.01.29. 8:26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흑백요리사2’에서 안성재 셰프가 말한 “어니스트(honest)한 음식”이라는 심사평이 화제가 됐다. 재료의 맛을 살리면서 과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요리사의 의도가 요리에 구현돼 먹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규제가 아니라, ‘어니스트’한 정책이다. 양도세 중과 재시행, 정상화 아냐 집값 급등에 따른 고육책일 뿐 과도한 도덕적 의미 부여는 위험 지난 23일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의 X(옛 트위터)에 5월 9일로 끝나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를 연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25일엔 하루에만 4건의 글을 연이어 올렸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습니다. 버티는 이익이 버티는 비용보다 크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청와대는 이를 두고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27일 국무회의에서 “비정상적으로 부동산에 집중된 자원 배분 왜곡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눈앞의 고통과 저항이 두렵다는 이유로 불공정과 비정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문제의식 자체는 공감한다. 그러나 접근 방식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먼저 양도세 중과 유예 중단과 관련해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지난해 10·15 부동산 대책으로 조정대상지역이 서울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양도세 중과 대상 범위도 넓어졌다. 이 상태에서 유예를 종료하는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중과세를 확대 시행하는 것이다. 청와대도 이를 인식한 것 같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28일 기자간담회에서 “되돌아보니 5월 9일도 좀 성급하게 결정된 날짜더라. (지난해 조정대상지역 확대로) 그분들은 갑자기 범위가 넓어져 중과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종료는 하겠지만 좀 더 기간을 주는 내용을 포함해 논의하고 있다는 게 김 실장의 설명이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는 할 수 있다. 하지만 3주택자 최고세율이 82.5%(지방소득세 포함)나 되는 것을 어떻게 정상화라고 할 수 있나. 집값 과열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결과적으로 이재명 정부 초기의 부동산 정책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반증에 가깝다. 지금 서울 전역의 아파트는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실수요자가 아니면 집을 살 수 없고, 다주택자는 처분도 어렵다. 어떤 상황이 되면 이를 해제할 것인가. 이 대통령이 지난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부동산 세금 규제에 대해 “가급적 안 하는 게 바람직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하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마지막엔 세금 정책을 집값 대응 수단으로 쓰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다. 집값을 이유로 한 정책 선택에 과도한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정책은 퇴로를 잃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한 언어가 아니라, 차분한 설계다. 한국의 부동산 세제는 조세 원칙에 충실하기보다 시장 상황에 대응하느라 누더기가 됐다. 조세의 기본은 납세자가 납득할 수 있는 예측 가능성과 지불 능력에 맞는 적정한 부과에 있다.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통합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정부도 용역을 주는 등 개편 방안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메시지는 엇갈린다. 김용범 실장은 “한두 달 안에 발표할 내용이 아니다. 많은 조합이 가능하고, 종합적인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이 대통령의 메시지는 ‘비정상’과 ‘불공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도덕적 언어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지난해 조정대상지역 확대로 졸지에 양도세 중과 대상이 된 이들의 반발을 ‘버티기’나 ‘압력을 넣어 정책을 흔들려는 시도’로 바라보는 시선이 적절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향후 정부가 부동산 세제 개편안을 낸다면 시장 대응용 조치와 흔들리지 않는 기본 원칙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이를 뒤섞어 정의로운 것으로 규정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부동산 정책이 성공하려면 어니스트한 음식처럼 내놓아야 한다. 조세의 기본 원칙(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하게, 과장하지 말고, 세금을 내는 사람(먹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으로 포장하지 말라. 그것은 재료 본연의 맛을 가린 채, 강한 양념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대통령의 말처럼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부동산 정책에서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책 목표 설정과 집행에 이르는 과정이 어니스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원배([email protected])
2026.01.29. 8:26
━ 2026 동계올림픽 D-7 피겨 스케이팅 국가대표 이해인(21)은 이제 안다. 어떤 행복도, 불행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벼랑 끝 시련을 딛고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그는 나직이 고백했다. “난 피겨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한 시간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 흉터까지 품은 지금의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그의 변화는 은반 위에서 가장 먼저 감지된다. 이번 시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선택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파격 그 자체다. 이해인은 사랑에 휘둘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여전사’로서의 카르멘을 택했다. 삶이 백만 조각으로 깨지고 부서졌던 경험이 연기에 투영된 덕분일까.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캐릭터의 호소력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처연해졌다. 이해인은 본래 ‘포스트 김연아’의 선두주자였다. 2023년 4대륙선수권 우승과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따내며 한국 피겨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2024년 5월, 이탈리아 전지훈련 중 불거진 성추행 의혹은 평탄하던 선수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연인 사이였던 후배와의 관계를 비밀로 하려다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빙상연맹으로부터 자격정지 3년이라는 가혹한 징계를 받았다. 1년여의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2025년 5월 비로소 누명을 벗었지만, 마음엔 이미 깊은 금이 간 뒤였다. 하지만 그 모진 공백과 고통은, 어쩌면 독이 아닌 새로운 성장의 자양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련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말은 자칫 상투적인 위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 이해인은 자신의 연기로 그 말을 실재하는 증거로 바꿔 놓았다. 안돼도 끝까지 해내려는 고집은 은반 위에서 성숙함이라는 깊은 색채로 피어났다. 이달 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과거의 정교함을 넘어선 서사적 깊이가 느껴졌다. 우아하면서도 힘차게 뻗는 손끝엔 간절함이 실렸고, 표정엔 풍파를 견뎌낸 자만의 단단한 아름다움이 투영됐다. 4년 전 선발전 탈락의 아픔까지 묵묵히 소화해낸 그는 선발전에서 대역전극을 쓰며 밀라노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러한 내면의 단단함은 쇼트프로그램 ‘세이렌(Seirenes)’에서도 이어진다. 유혹하는 인어를 표현한 의상 위로 알알이 박힌 진주는 그간 흘린 눈물의 결정체처럼 빛난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가사처럼, 그는 이제 “깨진 유리 조각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본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무대의 일부로 받아들인 순간, 그의 연기는 비로소 완성됐다. 이해인의 시선은 이제 나를 넘어 타인을 향한다. 팬들을 향한 고마움을 담아 직접 굿즈를 제작하고 수익금을 영아원에 기부하며 마음의 근육을 키웠다. 올림픽 갈라쇼 무대를 위해 갓과 부채를 챙기겠다는 그는 벌써 갈라쇼 주제곡으로 케데헌의 OST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지난해 10월 첫 선을 보여 화제가 됐던 그 곡이다. 갈라쇼는 메달리스트 및 상위 선수들만 초대받는 귀한 무대다.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한 별이 비로소 제 빛을 찾듯, 시련을 통과하며 한층 투명해진 이해인의 연기는 이제 더 큰 세계를 향한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검정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상처 입어 더 아름다운 한국의 선율을 각인시킬 그의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찬란한 극복기다. 박린.김효경([email protected])
2026.01.29. 8:24
‘저평가만 부르짖다 내가 먼저 죽을 주식.’ ‘희망고문의 끝판왕.’ 개미 투자자들은 현대자동차를 오랫동안 이렇게 불러왔다. 실적과 전망에 상관없이 주가는 늘 박스권이었기 때문이다. 반전이 일어난 건 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2026 무대에 차세대 전동형 휴머노이드 ‘아틀라스’가 등장했을 때였다. “문화적 토양에서 사업 성장” 테이트모던 등 10년간 후원 최근 로봇 혁신과 무관치 않아 투자든 후원이든 길게 봐야 아틀라스가 네티즌 표현대로 “최소 3년 짬밥 직장인의 출근 모습”으로 인간적으로 걷다가 돌연 인간에게 불가능한 360도 회전 관절을 선보이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CES 공식미디어 파트너인 C넷은 “가장 자연스러운 보행과 양산 모델에 가까운 완성도”를 언급하며 아틀라스를 ‘베스트 로봇’으로 선정했다. 곧 현대차 주가는 폭등하며 사상 처음으로 40만원 선을 넘겼다. (29일 종가 52만8000원) 시장이 현대차를 ‘자율주행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전통 자동차 제조사’에서 ‘로보틱스와 인공지능을 결합한 피지컬 AI 분야의 선두주자’로 재인식한 결과다. 2014년 시작된 공격적 미술 후원 필자가 현대차의 변화를 감지한 계기는 다소 특이하다. 산업부 기자가 아닌 문화부 기자로서 2014년부터 시작된 현대차의 공격적인 현대미술 후원 프로젝트들을 보며 ‘진부한 자동차 회사가 아니네?’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2021년 현대차가 독일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협업 전시에서 당시에 막 인수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 개 ‘스팟’과 초기 아틀라스를 선보였을 때, 그리고 2022년 아트선재센터 전시 ‘서울 웨더 스테이션’에 현대차 로보틱스랩이 참여해 스팟을 뛰놀게 하는 것을 보며 ‘이 회사는 그냥 자동차 제조사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특정 기업을 홍보하거나 주식 매수를 권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미 투자자들의 추격 매수에 의한 단기간 급등은 오히려 불안 요소라고 본다. 또한 피지컬 AI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다. 현대차 아틀라스가 하드웨어 완성도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았고 소프트웨어는 구글 딥마인드와의 협업으로 보완 중이지만, 라이벌인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옵티머스’는 자동차 수백만 대에서 수집한 자율주행 데이터로 인공지능을 빠르게 고도화하고 있다. 게다가 “노사 합의 없이 단 한 대의 로봇도 현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노조와의 협의 및 AI와 인간의 공존에 대한 사회적 책임 등 여러 산적한 과제가 있다. 그럼에도 현대차의 사례를 주목하는 이유는 기업의 예술 후원이 그 기업의 철학과 정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후원으로 미술 생태계를 지탱해온 기업은 많다. 삼성그룹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한국 문화사의 한 획을 긋기 전부터 다양한 문화사업을 펼쳐온 것이나, BMW가 1970년대부터 ‘아트 카’ 시리즈로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럭셔리 패션 그룹인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는 재단 미술관 및 아티스트 협업을 통해 예술을 제품에 이식하고, 구글은 ‘아트 앤 컬처’ 프로젝트로 인류 문명을 데이터화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후원이 장기적이며 기업의 본질적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차의 미술 후원 프로그램에서 눈여겨볼 것은 장기 전략이다. 자체 미술관을 세우는 대신 국내의 국립현대미술관 및 영국 테이트모던,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 등 세계적 거점 미술관들과 10년 장기 파트너십을 맺고 전시와 연구를 후원하는 길을 택했다. 2014년 당시 영국 BBC방송 미술 에디터였던 유명 저자 윌 곰퍼츠가 “10년 넘게 장기 계약으로 예술 후원을 하는 건 매우 드물고 리스크가 크다”며 “기대만큼 브랜드 이미지 상승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썼을 정도였다. 당시 현대차 관계자에게 그 우려를 전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좋은 자동차 모델 하나 개발하는 데 최소 5년이 걸리듯 우리는 장기 사이클로 움직인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아트 컬렉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향후 10년간의 세계 미술사를 새로 쓰는 것이다. 비즈니스 결정은 결국 그 시장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토양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현대차는 지난해 11월, 테이트 미술관과의 파트너십을 2036년까지 추가 연장했다. 브랜드 이미지 등에서 성과를 거뒀다는 방증일 터이다. 이렇게 해외 영토로 스며들어 가 그 지형을 바꾸는 전략이 보스턴 다이내믹스 인수를 감행한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현대미술은 인문학부터 공학까지 아우르는 다학제적 영역이다. 지난 10여년간 실험적인 현대미술 현장을 후원하며 축적한 안목은 현대차의 모빌리티와 로봇 디자인 철학에도 유연한 토양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잭 재코우스키 부사장이 아틀라스에 대해 “인간의 동작을 단순히 베끼지 않고, 그 장점을 취하되 때로는 인간 이상의 기능을 구현한다”고 밝힌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2000년대 이후 현대미술계의 화두인 ‘포스트휴머니즘’ 즉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AI나 로봇 같은 비인간과의 공존 및 결합을 추구하는 사고와 맞닿아 있다. 물론 장기적인 예술 후원이 계속 실적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BMW는 전기차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장에서 부침을 겪고 있고, 오랜 기간 디지털 아티스트 생태계를 지원해온 어도비 역시 생성형 AI의 거센 파고 속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기업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닌 ‘철학의 맷집’ 때문이다. 위기 속에서도 브랜드가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회복탄력성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자산에서 비롯된다. 미술 투자도 뚝심 있어야 그래서 지인들이 미술 투자를 물어올 때마다 기자는 두 가지로 답한다. “미술사 공부를 할 시간이 없다면, 작품을 사기보다 미술을 제대로 장기 후원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세요.” 그리고 덧붙인다. “작품을 사고 싶다면 정말 좋아하고 후원하고 싶은 작가의 것을 사세요. 작가 10명의 작품을 사면 그중 한두 작가의 작품만 가격이 오를 것입니다. 모두 오르지 않는다고 해도 애정을 가진 작품이기에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기업 투자든 미술 투자든 그 본질은 같다.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애정, 그리고 자신의 가치 판단을 믿고 견디는 뚝심이다. 특히 미술 투자는 기업의 사이클보다 훨씬 긴 호흡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소영([email protected])
2026.01.29. 8:24
정당 득표율이 3%를 넘지 못하거나 지역구 선거에서 5석 이상을 차지하지 못한 때에는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없도록 규정한 공직선거법(군소정당 저지) 조항이 위헌이라고 헌법재판소가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29일 노동당·진보당 등 군소정당이 공직선거법 189조 1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한 사건에 대해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공직선거법 189조 1항 1호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의 3% 이상을 득표한 정당에 대해 국회의원 의석을 배분하도록 정한다. 헌재는 헌법소원 청구 대상인 1호뿐 아니라 비례대표석 배분 대상을 ‘지역구 선거에서 5석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으로 규정한 2호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현행 비례대표 의원 의석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따라 배분된다. 이때 비례대표석 배분 기준은 전국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3 이상을 득표(공직선거법 189조1항1호)했거나 지역구에서 5석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공직선거법 189조1항2호)에 한정된다. 이번 위헌 결정에 따라 ‘비례대표 3%, 지역구 5석 룰’이 사라짐에 따라 군소정당의 원내 진입의 문턱이 낮아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헌재는 저지조항에 대해 “투표의 성과 가치를 차별하고 사표의 증대와 선거의 비례성 약화를 초래하며, 새로운 정치세력의 원내 진출을 막는 부정적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군소정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례대표 의석배분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할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보름([email protected])
2026.01.29. 8:22
“비싸도 너무 비싸요! 아예 켜지도 못하겠다니까요!” 지난 20일 중국 허베이성 랑팡시 한 농촌 마을에서 만난 노인이 소리쳤다. 기자와 대화를 나누며 손으로는 주방에 설치된 가스 난방기를 가리켰다. 안방에선 어린 손녀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안에서도 두꺼운 점퍼 차림으로 생활한다는 그는 “낮에는 난방기를 틀 엄두조차 않는다”면서 “밤에 켜두더라도 동이 트자마자 곧바로 끈다”며 한숨 쉬었다. 곁에 있던 그의 부인은 기자를 향해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100가구 남짓 사는 이 마을 입구에선 석탄금지구역(禁煤區)이라고 적힌 파란색 표지판이 외지인을 맞는다. 허베이성 당국은 2017년부터 석탄 연료 사용을 줄이는 정책을 폈다. 대기 환경을 보호한다는 이유에서다. 그 이후 집마다 노란색 가스관이 외벽에 달라붙었다. 투박하게 구멍을 낸 뒤 시멘트를 발라 마무리한 흔적도 보였다. 온 마을을 돌아봐도 배기관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2~3곳에서만 뽀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날은 낮에도 기온이 영하 10도를 오갔다. 혹한에도 가스난방은 언감생심이다. 돈 때문이다.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한 농민은 “겨우내 가스비로만 4000위안(약 82만원)을 넘게 내야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허베이성 농가의 연 소득은 400만원 정도다. 당국 정책 비판에 인색한 관영 매체들마저 비판에 나선 이유다. 한 매체는 “돈을 태워 난방하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드론까지 띄워 단속하는 터라 예전처럼 석탄을 쓸 수도 없다. 불만은 중국 수도이자 ‘높은 분들’이 몰려 사는 베이징으로 향한다. 허베이는 베이징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다. 농가가 앞장선 ‘푸른 하늘’ 정책에 힘입어 베이징 공기는 관측 이래 가장 맑은 수준을 기록했다. 고생은 허베이가, 혜택은 베이징이 본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 공공 서비스 차별 문제로까지 확산한다. 그러나 고작 며칠 사이 아이러니함을 짚어낸 관영 매체 기사는 연이어 사라지고 일부 지방 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확대하기로 발표했다는 보도가 ‘허베이 난방’ 키워드를 뒤덮었다. 베이징 특파원으로선 익숙한 장면이다. 하지만 가리고 지운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비싸고 좋은 반창고를 붙인다고 근본적 치료가 될 순 없는 노릇이다. 비단 중국만의 문제일까. 희망 회로를 돌리는 한국 경제는 무엇을 가리고 있을까. 새파란 베이징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멀리서 왔으니 식사하고 가라”던 노인의 입김 섞인 미소를 떠올린다. 이도성([email protected])
2026.01.29. 8:22
급변하는 한반도 안보 환경 최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둘러싼 한·미 간의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해 8월 현 정부 임기 내 전환이 목표로 제시되고 지난해 11월 한·미 국방장관은 전작권 전환에 필요한 검증 절차를 확인했다. 지난 2일에는 올해를 전작권 전환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국방부 장관 신년사가 나오기도 했다. 미국도 전작권 전환을 마다치 않는 분위기다. 지난 23일 발표된 미국의 국방전략(NDS)은 북한 억지에 대한 ‘주도적 책임’을 한국에 맡기고 미국은 ‘결정적이지만 제한적인 지원’을 담당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진전에도 향후 전작권의 안정적 전환을 위해서는 풀어가야 할 과제들이 많이 쌓여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억지 차원에서 제기되는 ‘사이버-인공지능(AI)-핵 넥서스’ 역량의 구축이 시급하다. 국방장관 “올해는 전작권 전환 원년”…미국도 마다치 않는 분위기 북, 핵-사이버 공격 연계 전략…AI는 ‘결합의 고리’ 역할 수행 ‘핵은 핵으로 막는다’는 기존 개념 넘어 ‘비대칭적 억지’ 개발해야 ‘사이버-AI-핵 넥서스’ 전략적 중요성 이해하고 담론 형성 시급해 ‘연결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nectere’에 어원을 두는 넥서스(nexus)는 단순한 ‘연결의 상태’라기보다는 여러 요소를 엮어주는 ‘결합의 고리’를 의미한다. 넥서스는 어느 한 요소가 다른 요소에 의존하면서도 서로 제약하는 양(陽)과 음(陰)의 피드백을 통해 생성된다. 각 요소 간의 긴장 관계로 인해 시스템을 구성하는 각 요소의 최적화를 동시에 달성하기 어려운 관계의 결합이 넥서스다. 어느 하나를 강조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고, 이를 메우면 다른 데가 뚫리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최근 미래전(戰)의 새로운 양상으로 주목받는 사이버-AI-핵 넥서스는 그 대표적 사례다. 특히 이 구도에서 AI는 핵과 사이버가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창발하는 결합의 고리 역할을 한다. ‘AI 있는 핵’과 ‘AI 없는 핵’의 차이 우선 주목할 것은 최근 강대국들의 핵전략 경쟁 과정에서 추진되는 AI와 핵의 결합, 즉 ‘AI-핵 넥서스’다. AI가 도입돼 핵무기 체계의 스마트화를 통해 핵 지휘통제체계(NC2)가 고도화되고 조기경보, 표적탐지, 미사일 방어, 정밀타격 등의 역량이 증대됐다. AI와 핵의 결합은 공격우위의 상황을 조성해 1차 선제공격의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과거 핵 균형의 기반이 됐던 상호확증파괴(MAD)의 관념도 흔들어 놓고 있다. AI-핵 넥서스의 군비경쟁으로 촉발된 안보 딜레마의 심화는 기존에 핵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제질서의 안정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견된다. 결국 ‘AI 있는 핵’과 ‘AI 없는 핵’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서 AI-핵 넥서스의 역량을 확보하지 못한 국가의 핵은 그 효용성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AI-핵 넥서스를 역방향으로 읽으면 AI의 도입은 핵 역량을 제약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방어의 시각에서 보는 AI는 핵 공격을 억지하는 수단이 된다. 특히 한국과 같이 ‘핵은 없지만 AI는 있는 나라’에 주는 전략적 함의가 크다. AI의 도입은 킬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 방어(KAMD), 대량응징보복(KMPR)으로 대변되는 ‘3축 체계’를 업그레이드해 그 억지 효과를 높일 것이다. 한·미 동맹도 과거 미국의 핵우산을 활용하는 ‘확장 억지’ 또는 ‘재래식-핵전력 통합(CNI)’의 발상을 넘어 미국의 AI-핵 넥서스 역량을 활용하는 ‘디지털 확장 억지’로 나아갈 필요성이 제기된다. AI 활용한 북핵 억지 효과 이러한 ‘AI 억지’의 구체적인 효과는 흔히 의사결정의 프레임으로 원용되는 탐지(sense)-이해(make sense)-실행(act)의 세 단계에 걸쳐서 나타난다. 첫째 AI를 활용한 우주 감시·정찰 역량의 증대, 즉 ‘AI-우주 넥서스’의 억지 효과다. AI 기반 센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주 공간의 인공위성 기반 ‘탐지’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핵 자산의 비닉·엄폐·기동이 쉽지 않아졌다. AI와 결합해 능력이 향상된 한·미의 군사 정찰위성과 다출처 영상융합체계가 북한 전역을 실시간 감시·정찰하게 되면서 북한은 자기의 이동식 발사대와 지휘통제 시설, 핵탄두 저장시설 등이 언제 어떻게 탐지·추적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자신의 도발이 즉각 탐지·추적될 수 있다는 인식은 일종의 ‘감시와 훈육의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상황은 은닉비용을 높이고 기습효과를 낮춰서 북한의 선제공격을 억지하는 효과를 기대케 한다. 둘째 AI를 기반으로 데이터를 통합한 지휘통제체계의 구축, 즉 ‘AI-데이터 넥서스’의 억지 효과다. 최근 미국은 다영역작전(MDO)의 수행을 위해 기존에 각 군으로 분절된 지휘통제체계를 통합해 ‘합동 전 영역 지휘통제체계(JADC2)’로 알려진 차세대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JADC2 구축의 목표는 AI를 활용해 탐지에서 타격에 이르는 지휘관의 의사결정 주기를 극적으로 단축함으로써 적이 예측할 수 없는 속도와 패턴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있다. 사실 더 빨리 ‘이해’하고 더 나은 결심을 하는 역량은 북한에 자신들의 핵 사용 시도 자체가 사전에 무력화될지도 모른다는 ‘시간의 압박’을 부과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형 JADC2 구축과 한·미 간의 연동성 확보를 통한 ‘거부 억지’의 효과를 기대케 한다. 끝으로 AI를 활용한 재래식 무기 역량의 증대, 즉 ‘AI-재래전 넥서스’의 억지 효과다. 전통적으로 비핵 전력은 핵무기의 보조적 ‘실행’ 수단으로만 여겨졌으나 최근 AI와 결합해 핵무기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는 전략비핵무기(SNNW)가 출현했다. SNNW는 핵 문턱을 넘지 않으면서도 즉각적이고 정밀한 재래식 공격을 통해 ‘보복 억지’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전개는 재래식 무기를 활용해 북핵에 대한 비대칭 억지력을 고민해야 하는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SNNW는 아니지만 최근 공개된 장사정포 갱도 타격용의 전술지대지유도무기(KTSSM, 일명 우레)나 초심도 지하시설 타격용의 현무-V 탄도미사일과 같은 재래식 무기는 보복 억지의 효과를 기대케 하는 전술·전략 자산이다. 사이버 위협 대응에도 AI는 필수 더 나아가 AI와 핵의 사이에 ‘사이버’ 변수가 들어오면 그 넥서스의 구도는 더 복잡해진다. ‘사이버-핵 넥서스’는 핵무기 체계에 AI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디지털 네트워킹, 소프트웨어 의존성, 원격 접속 기능 등이 확대되면서 생성되는 사이버 취약성에 주목한다. 핵무기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핵 지휘통제체계 해킹 이외에도 악성코드 설치와 데이터 조작, 시스템 오작동 등을 통해 핵무기 체계 자체의 손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이버 공격의 경우보다 더 위협적이다. 한반도 맥락에서는 핵무기 체계에 대한 공격이 아니어도 핵무기 변수와 연계된 북한의 사이버 공격이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핵과 사이버는 양날의 보검’이라며 핵 개발과 사이버 공격을 연계하는 사이버-핵 넥서스의 전략을 펼쳐왔다. AI 기술이 사이버 공격에 활용되는 ‘AI-사이버 넥서스’는 더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킨다. 최근 생성형 AI를 활용한 시스템 공격, 악성코드 생성, 알고리즘 조작, 데이터 오염, 영향력 공작 등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AI 활용 사이버 공격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핵무기 체계의 교란과 마비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AI에 의한 자율화된 사이버 공격이 사용자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혹은 AI 알고리즘에 내재한 기술적 오류와 편향이 불거져서 발생할 비의도적 위험까지 상정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향후 북한의 사이버 공격도 AI를 활용하여 그 규모와 속도를 키우고 그 정교성도 더해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AI-사이버 넥서스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방어자도 마찬가지로 AI를 활용한 사이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억지 차원에서 추구할 사이버-AI-핵 넥서스 역량의 구축은 향후 전작권 전환의 과정에서 풀어가야 할 큰 과제 중의 하나다. 전작권 전환이 끝내 완수해야 할 목표라면 사이버-AI-핵 넥서스 역량의 구축은 핵심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핵뿐만 아니라 AI와 사이버 변수를 엮어서 보는 넥서스의 발상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핵은 핵으로 막는다’라는 ‘대칭적 억지’의 개념도 넘어서야 한다. 이미 한반도 안보 환경은 사이버와 AI·핵이라는 변수가 형성하는 비대칭적 위협의 구도를 펼쳐놓고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넥서스의 난제를 풀어갈 ‘비대칭적 억지’ 개념의 개발이다. 특히 사이버-AI-핵 넥서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를 추진할 담론의 형성이 시급하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6.01.29. 8:20
2027학년도 대학 입시부터 지역의사제가 도입되는 가운데 기존 지역인재전형과 농어촌전형까지 3중 지원이 가능한 고등학교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학생 수가 많아 내신 성적 확보에 유리하면서도 서울·수도권과 가까운 충청 지역 학교로 수험생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29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지역의사제 적용을 받는 일반고는 전국 1112곳으로 집계됐다. 지역별로는 282개 학교가 있는 부산·울산·경남이 가장 많았다. 호남(230개), 충청(188개), 대구·경북(187개), 경기·인천(118개), 강원(85개), 제주(22개) 순이었다. 지역의사선발전형으로 의대에 입학하면 정부로부터 등록금·생활비를 모두 지원 받은 뒤 10년간 해당 지역에서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종로학원은 지역의사 적용 고교 중 학생 수가 많아 내신 성적을 받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곳의 선호도가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2026학년도 기준 3학년 학생 수가 400명 이상인 학교는 전국 14곳(1.4%)이었다. 충청 9곳(이순신고·천안두정고·배방고·천안쌍용고·설화고·천안불당고·천안중앙고·천안오성고·천안청수고), 경기·인천 3곳(동화고·서인천고·인천아라고), 부산·울산·경남 2곳(경일고·정관고)이다. 특히 충남 아산의 이순신고·배방고·설화고는 농어촌 지역 학교로 분류된다. 이들 고교를 졸업하면 지역의사 전형으로 충남대·건양대·을지대·단국대·순천향대 의대에 지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인재·농어촌전형으로도 의대 지원이 가능하다. 이들 고교를 포함해 3개 전형을 모두 활용해 의대에 지원할 수 있는 학교는 전국 404곳으로 조사됐다. 지역인재전형은 비수도권 대학에서 대학소재 지역 출신 고교를 입학·졸업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다. 지방 소재 대학의 의약학 계열의 경우 모집정원의 20~40%를 이 전형을 통해 선발하도록 하고 있다. 농어촌전형은 정원 외 모집으로 운영되는데 유형에 따라 초·중·고교 교육과정을 해당 지역에서 이수해야 지원 가능하다. 경인권 중 지역의사제 적용 일반고가 가장 많은 남양주권(38개)의 동화고(비평준화) 역시 올해 학생 수 463명으로 상대평가에서 내신 1등급을 받기 수월한 학교로 분류됐다. 남양주는 해당 지역 소재 중·고교를 졸업하면 성균관대·아주대·인하대·가천대 등 수도권 의대에 지원할 수 있는 지역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지역의사제 지원이 가능한 학교 중 일부는 지역인재·농어촌전형 등 다양한 지원 기회를 쓸 수 있어 실제 의대 입시에서 상당히 유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보람([email protected])
2026.01.29. 8:18
이재명 정부의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였던 이혜훈 전 국민의힘 의원이 인사청문회 이후 지명 철회됐다. 충격·실망·분노의 여의도 인사청문회 드라마가 28일 만에 막을 내렸다. 통합·탕평·실용을 명분으로 3선 의원 경력의 야당 출신을 신설된 정부기관의 수장으로 임명하려던 이 대통령의 인사는 후보자의 보좌관 갑질 논란, 주택 부정 청약 의혹, 자녀 특혜 입학 의혹 등에 막혀 좌절됐다. 개인정보 내세워 자료 거부 남발 무용론 있지만 이원화 검토하고 본인·가족 자료제출 법에 못박길 이번 인사청문회 파행은 후보자에 대한 자격 논란과 함께 자료 제출 미비 문제를 드러냈다. 후보 지명 발표 당일 국민의힘은 “현 정권에 부역”, “사상 최악의 해당 행위” 등 거친 비난에 이어 이 후보자를 즉각 제명했고, 핵심 자료 제출 미비 등을 이유로 인사청문 보이콧을 선언했다. 하지만 후보자가 자료를 일부 추가로 제출한 데다 “소명 기회는 줘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지난 23일 가까스로 청문회가 개최됐다. 그런데도 의혹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증폭되면서 지명 철회로 이어졌다. 파행적 인사청문회 문제는 단지 이 후보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가고, 개인정보를 빌미로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후보자의 미꾸라지 행태는 반복됐다. 야당은 후보자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흠집 내고, 여당은 자기편 감싸주기로 일관하는 식상한 청문회 진행 패턴도 여전하다. 성난 여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권만 고집하는 대통령의 독선적 행동은 2000년 6월 인사청문회 제도 도입 이래 반복됐다. ‘귀 막고 며칠만 버티면 된다’ 식으로 대응한 후보자들이 실제로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공직을 차지하는 사례가 많았다. 과연 이런 인사청문회가 필요한지 의구심이 커지고, 무용론조차 제기된다. 그런데도 권력분립 및 견제와 균형을 표방하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고치자는 개헌 요구가 분출한 국가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도입된 인사청문회를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직선 대통령제라는 수직적 민주화의 성취만큼이나 국회와 대통령의 견제·균형이라는 수평적 민주화도 성숙한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필수불가결해서다. 그렇다면 현실적 과제는 국회가 대통령 인사권을 좀 더 실효적으로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유능한 공직 후보자 군을 발굴하기 위해 개선안을 찾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이번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자료 제출과 후보자 윤리 관점에서 개선 방안을 모색해보자. 먼저 후보자의 자료 제출을 실질적으로 강제하려면 인사청문회법을 개정해 자료 제출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후보자 개인과 가족의 사생활을 적정선에서 보호하면서도 제출 의무가 있는 자료 범위를 지금보다는 더 확대해야 한다. 현행 인사청문회법 5조 1항에 따르면 후보자는 직업·학력·경력, 병역, 재산신고 사항, 납세, 범죄경력 등 5개 영역에서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많은 경우 후보자 자신에 관한 정보로 국한한다. 그러나 후보자의 청렴성·도덕성·준법성을 엄격하게 검증하려면 부동산 거래, 세금 납부, 자산 증식 과정 등 넓은 영역에서 본인은 물론 배우자·자녀·부모 관련 정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처럼 검증에 필수불가결한 정보들이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제공되지 못한다면, 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실효적인 도덕성 검증은 부실해진다. 따라서 여야는 인사청문회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후보자의 도덕성 검증에 필요한 자료라 판단되면 지금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제출하게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 다만 사생활 침해를 우려해 최적의 인물이 공직 진출을 꺼린다면 이는 국가적으로 손실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청문회 이원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도덕성 평가는 비공개로 하고, 전문성과 역량 평가는 공개로 하자는 것이다. 현행 인사청문회법 14조 2항에는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부당하게 침해할 우려가 명백한 경우’엔 위원회 의결로 비공개로 진행할 수 있다. 비공개로 진행하는 도덕성 검증 청문회에서 후보자와 가족이 관련 자료를 충실하게 제출하도록 필요하다면 법적 근거를 보강하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손병권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2026.01.29. 8:18
권력자와 결탁해 활개친 무뢰배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불행하다.” 10대 학창 시절에 톨스토이의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지나쳤다. 그런데 살다 보니 참 옳은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나름대로 불행하다는 대목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세상에 걱정거리 없는 집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동서고금에 불행 요인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나. 다만 그것을 찾아서 큰 문제가 되지 않게 관리하면 국운이 연장되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큰 혼란에 빠지거나 심한 경우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국민 다수가 법을 경시하고 공공연히 어기면 어떻게 될까? 법을 어기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불법이 만연하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말이다. 계림공 집권 도운 척준경이 첫 사례 권력과의 공생 관계 갈수록 심해져 정중부 죽이고 권력 잡은 경대승 집 안의 사병조직 무뢰배로 채워 국왕 타락하자 무뢰배 온갖 난동 불법 판치는 나라에 미래는 없어 몰락한 집안 자제들의 일탈 고려시대에 무뢰배(無賴輩)란 말이 있었다. ‘성품이 막되어 예의와 염치를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대개는 젊은 사람들이어서 악소(惡少·나쁜 젊은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길 가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고, 대담하게 관청에 불을 지르고 공공 재물을 훔치기도 했다. 법이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뢰배로 이름이 드러나는 첫 인물은 척준경이다. 그는 곡주(황해도 곡산)의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난한 탓에 공부를 하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고려시대 향리 자제들은 대개 과거 급제를 목표로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탈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척준경을 비롯한 무뢰배가 등장하는 시기는 12세기, 고려 중기부터였다. 그때 고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12세기에 고려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앞선 11세기 100년의 평화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1019년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데 이어 적극 외교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킨 것이 주효했다. 국내 정치도 안정되었다. 11세기 후반 문종의 치세(1046~1083년)에는 각종 제도가 완성되는 등 모든 면에서 국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반란이나 정쟁, 민란 같은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 안팎이 편안한 가운데 농경지가 개간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는 등으로 농업 생산이 늘었고, 그 성과는 다음 세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어두운 뒷면도 있었다. 경제 발전의 국면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권력을 앞세운 지배층의 수탈이 일상화되었다. 기회는 누리는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발전의 성과는 소수에게 독점되었으며, 정치적 안정기에 권력을 강화한 지배세력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몰락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중에서 무뢰배가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향리 계층에 속한 척준경이 공부를 못 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걸 보면 어떤 사정인가로 몰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회를 살리지 못해 빈곤해진 사람들, 권력자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지만 모두가 무뢰배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수는 소작인이 되거나 심지어 노비가 되기를 감수하고 살길을 찾았다. 어떤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타처에서 떠돌며 불안정한 삶을 이어갔다. 무뢰배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히려 극히 소수였다. 그럼에도 무뢰배가 한때의 현상으로 그치지 않은 것은 다른 한 편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11세기 말에 벌어진 왕위 쟁탈전이 그 시작이었다. 14대 헌종이 어리고 병약하자 왕의 이복동생인 한산후를 옹립하려는 이자의와 왕의 숙부인 계림공이 후계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때 두 사람 모두 무뢰배로 구성된 사병을 동원했다. 지방의 한낱 무뢰배였던 척준경은 계림공을 따랐고, 계림공이 승리해서 왕위에 오르자(15대 숙종) 벼슬을 얻는 데 성공했다. 무뢰배의 출셋길이 처음 열린 것이다. 그 뒤로는 전쟁이 이어졌다. 12세기 초부터 여진과 전쟁이 시작되자 무뢰배들이 군인이 되어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척준경은 공을 세웠고, 윤관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 끝에 이자겸과 권력을 다투는 이인자의 자리까지 올랐다. 무신 권력자 이의민도 무뢰배 출신이었다. 고향 경주에서 불량배 짓을 해서 온 고을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처형되기 직전 그의 완력을 아깝게 여긴 관리의 추천으로 군인이 되어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무신정변 이후 무뢰배 세상 1170년 무신정변은 무뢰배들에게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과도 같았다. 정변 당시 이의민이 사람을 많이 죽인 공으로 승진했다고 하니, 무신들이 만들어준 무대에서 얼마나 많은 무뢰배들이 활개를 쳤을지 짐작이 간다. 정변이 성공한 뒤로는 권력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쓸모는 더욱 커졌다.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은 자기 집에 도방(都房)이라는 사병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무뢰배로 채워졌다. 이들은 온갖 불법을 저질렀지만, 경대승의 비호 덕에 처벌받지 않았다. 무신집권기에는 권력자와 연결된 무뢰배가 높은 관직에도 올랐다. 김의원이란 사람이 있었다. 젊을 때 집이 가난해서 무뢰배가 되었는데, 글을 몰랐지만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평장사까지 올랐다. 권력자와의 관계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변과 전쟁이 기회를 만들어준 데 이어, 무신정권 아래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무뢰배의 진출이 점점 더 활발해졌다. 권력자가 무뢰배를 포섭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불법 행위를 비호하거나 관직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 경대승은 도방의 사병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합숙하면서 친밀함을 과시하고 충성을 유도했다. 당시 이런 사람을 ‘호협(豪俠)’이라고 불렀다. 본래는 호방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그 호방함이란 실은 법을 어기면서 호기부리는 것을 의미했고, 의협심이란 고작 아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거나 청탁을 들어주는 것을 뜻했다.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자가 된 김준도 호협을 자처했다. 그는 최씨가의 노비였지만 최우의 후원으로 고위직에 올랐는데, 평소 아랫사람에게 공손하고 베풀기를 좋아해서 인심을 얻었다. 날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바람에 집에 저축이 없었다고 하는데,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술을 좋아하는 것도 호협의 겉모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자기 재산은 돌보지 않되 국가를 사유화하고 사치를 일삼았으니 이 또한 위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호협과 무뢰배의 결합은 14세기 들어 더욱 심해졌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국왕이 자기가 총애하는 폐행(嬖幸)을 앞세워 왕권을 부지했고, 여기에 무뢰배가 끼어들 틈이 생겼다. 국왕이 호협처럼 굴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28대 충혜왕이 특히 그랬다. 이 타락한 국왕은 무뢰배들과 어울리면서 온갖 난동을 부려 백성들을 괴롭혔다. 오죽하면 원에서도 발피(潑皮)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호협 또는 무뢰배를 가리키는 저속어였다. 공민왕에 의해 잠시 정상을 되찾는 듯했던 정치 질서가 우왕 때 다시 무너졌다. 우왕의 국왕답지 못한 행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어느 집 딸이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그 집에 쳐들어가기까지 했다. 국왕이 무뢰배가 되었으니, 왕조의 운명은 불문가지였다. 민중 저항의 길, 무뢰배의 길 무뢰배가 등장한 근본 원인은 가난이었다. 그 배후에는 경제적 양극화와 지배층의 수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모두 무뢰배가 된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제각각 살길을 찾았고, 정 안되면 힘을 모아 저항했다. 12세기 후반 전국에서 일어난 민란이 그것이다. 이 경우는 사회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변혁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 민중의 저항은 지배층을 자극해서 위민(爲民), 민본(民本)을 이념으로 새 나라를 만드는 결실을 얻었다. 반면 무뢰배의 행위는 불만을 분출하는 데 불과했다. 왜 그러는지 명분도,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자기만 잘살겠다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약탈해서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었다. 무뢰배에게 오염된 정치도 고려가 망한 이유 중 하나이다. 법이 경시되고, 법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채웅석(가톨릭대) 교수의 ‘고려 중·후기 무뢰와 호협의 행태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 8, 1992)을 참고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2026.01.29. 8:16
외국인은 지난해 한국 국채를 약 121조원어치 순매수했다. 전년도 순매수 금액 약 48조원보다 150% 넘게 늘었다. 한국 국채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앞둔 흐름으로 분석됐다. WGBI는 현재 미국과 중국·일본·프랑스 등 세계 25개국 국채로 구성됐고, 한국 국채는 26번째로 편입된다. 이 지수는 투자자에게 금융 지표의 역할을 하고, 포트폴리오 관리자에게는 벤치마크를 제공한다. 국채에 투자하는 패시브 펀드는 WGBI의 구성에 따라 국채들을 펀드에 담아 이 지수 상승률만큼의 수익률을 추구한다. 한국에 앞서 중국 국채는 2021년부터 2024년까지 4년에 걸쳐 WGBI에 편입됐다. WGBI는 시장에 충격이 가지 않게끔 신규 국채를 단계적으로 편입한다. 한국 국채 편입은 오는 11월까지 8개월에 마무리된다. 이 과정이 완료되면 한국 국채의 비중은 약 2%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각 국채의 비중은 발행된 국채의 규모에 비례한다. 중국 비중은 2024년에 일본을 추월했다. 편입 과정에서 모두 약 600억 달러가 한국 국채에 유입되면서 원화가치가 안정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최근 일고 있다.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국채 순매수 외에도 많아서 그렇게 낙관할 수 없어 보인다. 환율보다는 한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금리가 안정되면서 정부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낮아지는 효과가 더 확실해 보인다. WGBI에 편입된 국채라는 위상은 영원히 보장되진 않는다. 그리스·포르투갈·남아프리카공화국 3개국이 국가 신용등급 강등으로 2010년부터 2012년 사이에 이 지수에서 제외됐다. 이 중 포르투갈만 신용등급을 회복하면서 2024년 11월 WGBI에 다시 진입했다. 한국 국채가 탄탄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WGBI에 편입된 상태를 이어가고, 우리나라가 그 이점을 오래도록 누리기를 기원한다. 백우진 경제칼럼니스트·글쟁이㈜ 대표
2026.01.29. 8:14
2026년 새해, 국내 증시가 뜨겁다. 특히 최근에는 특정 주도주에만 머물지 않고 소외됐던 종목들까지 온기가 퍼지는 ‘순환매 장세’가 펼쳐지고 있다. 투자자들은 새로운 매수 대상을 찾기 위해 기업의 사업모델을 분석하고, 재무제표를 검토하며 상당한 인지적 에너지를 투입한다. 그러나 기존 주식을 매도할 때는 태도가 사뭇 달라진다. 매수 가격이나 수익률 같은 과거 데이터를 기준 삼아 섣불리 매도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투자에서 매도는 흔히 매수에 수반되는 부차적인 절차로 인식된다. 이론적으로 매수와 매도는 방향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사결정이라는 이유에서다. 기대수익률이 높으면 매수하고, 낮으면 매도하면 된다는 논리다. 성공적인 투자 사례를 봐도 대부분 ‘무엇을 언제 샀는지’에 초점을 맞출 뿐, ‘어떻게 팔았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성과 평가의 어려움도 매도를 소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매수는 시장 지수나 경쟁 종목과 비교해 상대적 성과를 판단할 수 있지만, 매도는 그렇지 않다. 특정 종목을 매도한 후 ‘다른 종목을 대신 팔았으면 결과가 얼마나 달랐을지’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매도 시점에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해 신속하게 판단하는 사고방식인 ‘휴리스틱(heuristic)’이 매수 시점보다 더 강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추어 투자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시카고대 알렉스 이마스 교수 등이 2023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전문적인 기관투자자들 역시 매수에서는 뚜렷한 역량을 보였지만 매도에서는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저성과에 머물렀다. 연구가 지목한 원인은 ‘주의력의 비대칭성’이다. 기관투자자들은 매수를 핵심 투자 결정으로 인식해 신중하게 접근하는 반면, 매도는 다음 매수를 위한 자금 확보 수단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단순히 현재까지 수익률이 극단적인 종목, 즉 크게 올랐거나 크게 하락한 종목이 매도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휴리스틱이 작동한 전형적인 결과다. 매도에서 이러한 오류를 줄이려면 매도를 매수와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매도를 고민할 때, “지금 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현재 가격에 새로 매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이 질문에 ‘아니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때가 매도를 고려할 시점이다. 또한 매수와 매도를 동시에 결정하는 관행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매수에 집중하는 순간, 매도는 쉽게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성급한 매도로 인한 기회비용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투자 수익률을 개선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최정혁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제금융자산관리학과 교수
2026.01.29. 8:12
“사람이세요?” 이 속도로 간다면 머지않아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만 같다. AI는 갈수록 사람을 닮아가고 사람은 점점 AI처럼 말해서 어떨 땐 실제로 혼동되기도 한다. 얼마 전 AS 수리를 해주러 온다는 기사가 통화 중에 하도 AI처럼 말해서 “혹시 사람이세요?”라고 묻고 같이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연초부터 머잖아 휴머노이드 로봇이 상용화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는데, 곧 기계들이 가사 노동에서부터 의료 행위, 그리고 각종 산업의 제작이며 설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반의 일을 도맡을 기세다. 말은 안 하지만 너나없이 예측 불가로 시시각각 압도해 오는 이 신(新)문명 앞에 전전긍긍인 것 같다. AI가 거장 화풍 복제하는 시대 ‘아직도 그리느냐’는 자조도 그럴수록 원작의 가치 귀해져 얼마 전 교외의 한 널찍한 카페에 들렸다가 사람이 하도 많아 바로 나오려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어 굳이 자리를 얻어 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소소한 이야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공간.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교외 카페에 왜들 저리도 붙어 앉아 있는 걸까?’ 하는 의문과 함께, 문득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구가 머리를 스쳤다, 웅얼거리는 소리, 36.5도의 체온들, 낮게 깔린 커피 향…. 동종의 인간들 속에 들어와 있다는 기이한 안도감과 함께, 언젠가 저런 광경도 그리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장차 어떻게 되는 걸까. AI는 우리에게 적일까, 아군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의 사회는 AI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질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AI를 잘 다루는 방법이 ‘질문을 잘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안다. 문제는 앞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이다. 혹자는 골치 아프고 고된 일은 모두 AI에 맡기고 사람은 봉사와 상담, 그리고 문화와 예술 등의 일에 주로 종사하게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예술 영역의 하나인 미술에서도 이미 AI의 영향력은 확산 일로에 있다. 생성형 AI가 거장들의 화풍을 단 몇 초 만에 복제해 내는 광경은 이제 신기하지도 않다. 사진을 보여주면 즉각적으로 초상화가 그려져 나오게 되는 것이니 몽마르트르 언덕 같은 관광지에서 거리의 화가 앞에 앉아 그 화가의 손놀림 따라 그려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던 일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겨지게 되었다. 오죽하면 미술가들 사이에서 “아직도 그리세요?”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생겨났을까. 인류는 이제껏 이러한 규모와 속도의 테크놀로지를 대면한 적이 없다. 물론 컴퓨터 출시, 인터넷 발명 등 문명의 분기점은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충격의 여파가 있었다. 20세기 전반 발터 벤야민만 하더라도 기술 복제 시대를 맞아 미술에 있어서 원작의 아우라는 소멸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하지만 대량 복제가 벤야민의 예상과는 달리 미술작품의 아우라를 소멸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더 키웠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예컨대 모나리자의 진품은 루브르에 있지만, 그 이미지가 엽서·가방·티셔츠 등에 복제되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진품을 직접 본다는 것에 대한 열망을 증폭시켰다. 가짜가 많아질수록 진짜의 가치가 상승되는 현상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효과를 AI 시대를 맞고 있는 우리도 어느새 겪고 있는 듯하다. AI 테크가 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우리는 계속 경탄하고 있지만, 동시에 AI로 대체 불가한 일들과 그 가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우라의 소멸을 예측한 벤야민의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예측대로 소수 특권층의 향유물이었던 미술작품이 그 신화의 옷을 벗고 대중에게도 널리 보여지게는 되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손맛이 나고 체온이 느껴지는 원작의 아우라는 여전히 귀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더욱 공고해졌던 것이다. 작가의 삶에서 우러나는 진정성과 독창성, 그리고 유일무이한 인간적 자취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이는 AI라고 해서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술이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기계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유 영역을 찾아 출구 전략을 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AI는 AI, 인간은 인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화가에게는 “아직도 그리세요?”가 아니라, “이제부터 그려야 합니다”라는 전제가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가끔 자동기계 응답과 채팅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상담원과의 연결에 도리어 놀란다. 그러면서 속으로 묻는다. “사람이세요?”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2026.01.29. 8:10
‘거대한 컴백 투어를 통해 BTS(사진)는 10억 달러(약 1조4000억원)를 벌어들일 것 같다(BTS stand to make $1bn as they announce mammoth comeback tour).’ ‘군백기(입대로 인한 공백기)’를 마치고 3년 3개월 만에 7명 완전체로 월드투어에 나서는 방탄소년단(BTS) 소식을 전한 BBC 기사 제목이다. 미국 음악잡지 빌보드를 인용한 것인데,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3월 20일 공개하는 정규 5집 앨범 ‘아리랑’의 선주문량이 400만장을 넘어섰다. 4월 9일 고양종합운동장 공연을 시작으로 5대 대륙, 34개 도시를 도는 79회 월드투어 공연 티켓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멕시코 셰인바움 대통령의 추가 공연 요청이 압권이었다. 100만 명이 공연 관람을 원하는데 정작 15만장만 배정돼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처’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했다. 투어 도시마다 경제 특수를 누린다는 미국 여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스위프트노믹스(Swiftnomics)’ 못지않은 ‘BTS노믹스’다. BTS의 이런 활약과 위상은 우리를 흐뭇하게 한다. BTS는 새 앨범의 키워드로 한국을 상징하는 아리랑을 선택해 그 안에 담긴 이별과 그리움 같은 감정을 풀어냈다고 한다. 수천만으로 추산되는 전 세계의 아미(BTS 팬덤) 회원들의 열광은 어떻게 봐야 할까. 팬과 그룹이 성장 서사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주목받지 못하던 변방의 그룹을 세계적인 스타덤으로 끌어 올리며 형성된 강력한 유대감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노래로 불안정한 청소년기를 달래준 밴드에 대한 열광은 인종·국적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6.01.29. 8:08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은 엉터리 약장수에게 속아서 마시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묘약을 사는 시골 사람들의 한바탕 소극을 다룬다. 그러다가 왁자지껄한 전체 분위기와 사뭇 다른 진지한 아리아가 한 편 나온다. 네모리노가 부르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부터 바순의 깊은 목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아마도 바순이 맡는 오페라의 솔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면일 것이다. 오페라 내용을 모르고 얼핏 들으면 슬픈 곡이라는 오해가 생긴다. ‘남몰래 흘리는’ 이 눈물이 사랑을 보답 받지 못한 불행한 남자의 눈물이겠거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눈물은 여인의 것이다.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한 남자의 진심을 한참 뒤에야 깨달은 아디나의 눈가에 가만히 맺힌 감동의 눈물, 그리고 미안함의 눈물이다. 네모리노는 그 눈물을 알아보고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사실 이 아리아는 전체 오페라에서 외딴 섬 같다. 하지만 작곡가는 순박한 네모리노의 북받쳐 오르는 심정에 충분한 무게감을 실어주고자 했다. 그동안 그는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그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분명히 기쁜 일인데,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그동안의 외롭고 아픈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마치 고된 훈련과 힘겨운 경쟁을 이겨내고 마침내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메달리스트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기쁨도 슬픔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이다지도 미묘하고 또 깊다. 유난히 ‘튀는’ 이 단조의 노래는 엉터리 약장수에게 속아서 사랑의 묘약을 사는 저 시골 청년의 마음 안에도 못 배웠다고 무시할 수 없는 진실성이 들어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니 남몰래 우는 그의 마음을 뜨겁게 엿보고 쿨하게 모른 척 넘어가 주자. 그리고 그가 산 묘약이 진짜 효과가 있었다고 만나는 이마다 떠들어 주자.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6.01.29. 8:06
이재명 대통령이 "국회에 대한 협력 요청이든, (행정에 있어) 집행이든 신속하게 해주시길 당부드린다"며 입법과 행정 과정에서 속도를 낼 것을 주문했다. 이 대통령은 29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아 잠이 잘 안 오기도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지난 27일 주재한 국무회의에서도 "국회가 너무 느려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라며 "행정은 속도가 중요한데 기다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정부 출범 후) 7개월이 지났는데 객관적인 평가를 보면 한 일이 꽤 있어 보이지만 제 기준에선 많이 부족하다"며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속도가 늦어 저로서는 참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엄청나고 멋진 일, 획기적인 일에 집착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며 "국정이라는 것이 멋진 이상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 국민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실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빨리 해야 한다"며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생각, 우공이산 자세로 속도감 있게 일을 해나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또 통신비 부담 경감 등 생활밀착형 정책에 대한 토론이 준비돼 있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일상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성과를 꾸준히 쌓아갔으면 좋겠다"며 "지난 대선 때 내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공약 수십 개를 참고해달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정책 수요자'의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공직 생활을 하다 보면 시각이 고정되는 일이 많은데 국민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국민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듣는 게 제일 좋지만 그게 안 되면 커뮤니티 댓글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지혜([email protected])
2026.01.29. 8:04
지난 4년간 연재한 ‘숫자 읽기’의 마지막 글로 딱 하나의 개념만 더 전하고자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제시한 ‘굿하트의 법칙’이다. 굿하트의 법칙이란 특정 지표가 정책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지표가 더는 쓸모가 없어진다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예컨대 대학 입시에 봉사 활동 시간을 반영하는 건, 학생의 인성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려는 게 목적이다. 그렇지만 봉사 시간이 점수화되는 순간 모든 학생이 봉사 시간을 부풀리므로 이를 통해 인성을 평가하긴 불가능해진다. 직장인의 야근 횟수로 성실성을 평가하면 불필요한 초과 근무가 늘고, 소비가 부의 척도가 되면 빚을 내서라도 명품을 사는 것과 같은 꽤 보편적 현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재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진행 중이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우리나라는 강력한 국가부채 억제 정책을 펴왔다. 국가부채를 최대한 옥죄어 나라 살림살이를 유지하잔 목적에서다. 하지만 여기서도 굿하트의 법칙이 작동했다. 정부가 빚을 내지 않으려 허리띠를 졸라매니, 그 부족한 수요와 비용이 고스란히 민간, 특히 가계로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 숫자를 보자. 2024년 기준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같은 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59.4% 수준이다. 그런데 같은 해 가계부채는 GDP 대비 90.1%에 달한다. 가계 빚이 국가 빚보다 많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게 우리나라만의 예외적 상황이란 점이다. 우리나라와 경제 수준이 비슷한 주요국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를 비교해보면 가계부채가 국가부채보다 높은 곳은 우리나라가 사실상 유일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영국 워릭대 명예교수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이를 ‘민영화된 케인스주의’라 명명했다. 국가가 공적 자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해야 할 시점에 그 역할을 포기하고 개인에게 빚을 내어 소비하게끔 유도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국가부채란 정책 목표에 갇혀 지출을 옥죄는 동안,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격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당장 코로나19 대유행 때 많이 겪었던 일이다. 그러니 건전 재정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을지 몰라도, 그 대가로 가계 경제는 파탄의 위기에 내몰렸다. 국가부채 비율이라는 숫자는 정책 목표로서 잘 관리되었으나 나라 살림살이라는 본질은 훼손된 것이다. 이렇듯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둘러싼 맥락은 언제든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그러니 숫자 자체를 비판적으로 읽는 걸 넘어, 숫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물론 숫자가 이용되는 방식까지도 비판적으로 읽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숫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숫자 읽기 방법이란 걸 기억해주신다면 긴 연재의 마무리로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박한슬 약사·작가
2026.01.29. 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