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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도깨비 나라

버지니아주 소도시 ‘Falls Church’ 가는 길에 폭우가 왕창 쏟아진다. 차들이 꽉 막히고 윈드쉴드 와이퍼가 끽끽 요동치고 짙은 안개가 장대비에 합세한다. 날씨가 도깨비 같다.   2025년 재미 서울의대 컨벤션 길. 내가 맡은 강의에 ‘귀신(鬼神)’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귀신 鬼는 그렇다 치더라도, ‘귀신 神’은 좀 난처하다. ‘하느님’을 귀신이라 부르는 것은 불경스럽다. 신을 도깨비라 할 수도 없는 노릇.   민속설화에 「혹부리영감」, 「도깨비방망이」가 있지. 전자는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는 관용어가 나올 지경으로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스토리.   도깨비들이 사는 집에 무단 투숙한 혹부리영감은 자기의 구성진 노래가 목에 달린 혹에서 나온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영감의 혹을 떼어주고 방망이의 요술로 재운(財運)도 준다. 이 소문을 듣고 다른 혹부리영감이 똑같은 수법을 시도했지만 이미 사태를 파악한 도깨비들은 혹을 떼어 주기는커녕 전에 입수한 혹까지 붙여준다.   「도깨비방망이」는 혹을 거론하지 않지. 주인공은 육체적으로 건전할뿐더러 정신적으로 이기성(利己性)보다 애타성(愛他性)이 돈독한 나무꾼. 나무를 하는 중, 첫 번째로 굴러온 개암 열매를 아버지에게, 두 번째 개암은 어머니에게 드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것을 자기 몫이라며 주워 넣는다.   그는 날이 저물어 도깨비들이 외출하고 없는 집에 들어가 자려 한다. 집에 돌아온 그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요술을 부리는 광경을 숨어 본다. 그가 개암을 딱! 하고 깨물자 그 소리에 놀라 방망이를 놓고 도망치는 도깨비들. 나무꾼은 도깨비방망이를 하나 얻어 곧 부유해진다.   다른 나무꾼에게도 개암 열매가 굴러온다. 그는 첫 개암을 자기 것, 두 번째를 자기 아내에게, 세 번째를 부모 몫으로 할당한다. 각본대로 개암을 딱! 깨물자 도깨비들은 방망이로 그를 실컷 두들겨 팬다.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하지 않는 도깨비들.   어릴 적 부르던 ‘도깨비 나라’가 떠오른다. -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들기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와라 뚝딱/ 은 나와라와라 뚝딱. - 한국이 도깨비 나라라는 생각, 이 순간에도 많은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 숱한 나무꾼들이 도깨비방망이를 차용해서 재운(財運)을 타기도 하지만, 이기성과 애타성이얽히고설킨 대인관계의 우선순위가 비틀어진 흉내쟁이 나무꾼들이 흠씬 두들겨 맞는 시나리오를 예감한다.   영어로 도깨비는 ‘goblin’이라 하지. 고대 영어로 ‘화내다, 짜증 내다’라는 뜻이었단다. ‘goblin’은 방망이 대신 초승달 모양의 고대 무기로서, 길이 2m 정도의 ‘scimitar 언월도, 偃月刀’를 들고 다닌다는 기록.   내 첫 시집 『맨해튼 유랑극단』(2001)에 「도깨비 하나」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 // 내가 좋아하는 친구 하나 있더니/ 사실은 이 친구가 도깨비다/ 낮에 자고 밤에 찾아온다/ 초승달 등 넘어 내 옆에 온다/ …(중략)… 잔뜩 눈알만 부라리다가/ 이윽고 키득키득 웃어대는 도깨비 자식/ 그때 밤하늘 별무리 금싸라기가/ 온통 내 눈까풀 위에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아도 그냥 뜬 채로 였다//   도깨비는 참 외로운 존재로 보인다. 도깨비는 내 친구. 서구적 도깨비보다 우리의 도깨비가 마음에 든다니까.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 욕심으로 혹부리영감의 거짓말에 한 번쯤 슬쩍 넘어가는 우리의 얼떨떨한 도깨비들이.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도깨비 나라 도깨비가 방망이 도깨비 나라 도깨비가 마음

2025-04-15

[우리말 바루기] 구어체 표현 삼가야

요즘 들어 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이 ‘~거’라는 말이다. “괜히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다”처럼 ‘거’나 ‘거다’ 표현이 많이 쓰인다. 여기에서 ‘거’ ‘거다’는 ‘것’ ‘것이다’를 입으로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즉 구어체 표현이다. 구어체(口語體)란 글이 아닌 일상적인 대화에서 주로 쓰는 말을 가리킨다. 말할 때는 편리하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것’이나 ‘것이다’ 대신 ‘거’나 ‘거다’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주의해야 한다. 글에서 이런 표현이 나오면 맛이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글의 문장은 말보다 완전하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글에서 말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표현이 나온다면 글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글을 쓸 때는 “괜히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처럼 적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자 메시지에서 줄임말을 많이 쓰거나 받침을 잘 적지 않는 버릇이 든 것도 이 같은 현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자 메시지에서는 속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의미 전달만 가능하다면 정확성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해논 것이 없다” “따논 일이나 마찬가지다”처럼 ‘놓은’을 줄여 ‘논’으로 표현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해논’은 ‘해놓은’, ‘따논’은 ‘따놓은’의 줄임말이다. “재밌는 이야기들을 옮겨놨다”처럼 ‘재밌는’이나 ‘옮겨놨다’도 마찬가지다. 각각 ‘재미있는’과 ‘옮겨놓았다’의 축약어다. 우리말 바루기 구어체 표현 구어체 표현 문자 메시지 의미 전달

2025-04-15

[열린광장] 빛바랜 오욕

불교는 인간은 오욕(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을 지니고 산다고 풀이했다. 늙으면 이 오욕이 쪼그라지고 빛바래진다. 물욕, 은퇴한 사람은 사회보장 연금 이외에 수입이 없다. 명예욕, 내가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자화자찬으로 끝난다. 식욕, 맛있는 음식이 없어 덜 먹는다. 수면욕, 초저녁에 한잠 자고나면 정신이 똘똘해져 만리장성을 쌓는다. 색욕, S라인이 뚜렷한 미녀가 앞을 지나가도 ‘소가 닭 보듯’ 한다.     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이다. 먹는 것이 힘이다. 밥이 보약이다.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을 수 있을까. 반찬이 좋아야 한다. 나는 은퇴하고 집에서 반찬 만들기를 시작했다. 구글 요리사에게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우리 집 밥상에 한 끼도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 물김치다. 좋은 배추를 사다가 잘라서 소금물에 절인다. 절이는 시간을 잘 조정한다. 약간 덜 절인 배추를 건져 씻어서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양념은 비방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 각자 양념을 만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힌트를 준다. 고추 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빵도 만들어 먹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이스트를 넣고 두 번 발효해서 건포도를 넣고 스팀 냄비에 찐다. 산양 젖 가루를 넣어 빵을 만들어 보았다. 각양각색의 빵을 만들어보았다. 요즘은 실증이 나서 집에서 빵을 만들지 않는다. 시장에 맛있는 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맛있는 김치가 있으면 김치찌개는 자연히 만들게 된다. 콩나물과 두부만 넣으면 된다. 양파와 마늘 그리고 식물성 고기인 버섯도 넣는다. 요즘 새로운 메뉴가 등장했다. 찐 비트(홍당무), 보혈강장제와 시금치 무침과 시금치 된장국이다. 매운 풋고추를 넣고 만든 멸치 볶음도 빼놓지 않는다.   후식으로 새로 등장한 과일이 파파야다. 이 파파야는 혈당도 별로 올리지 않고 시원하고 맛있다. 멕시칸 마켓에 가서 방금 수입된 파파야 열 개를 카트에 넣으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러진다. 우리 아이들과 친지에게 파파야를 선물하면 모두 좋아한다.   아내가 3년 전 뇌졸중을 앓고 나서 내가 식모, 아니 식부가 되었다. 반찬 만드는데 익숙해졌다. 아내에게 삼시세끼 상을 차려준다. 지난 60년을 받아먹었으니 내 차례다. 새로 반찬을 만들어주면 맛있다고 덥석덥석 집어먹으면 좋으련만. 고양이 밥 먹듯 깨작거린다. 맛이 없다고 불평한다. 주먹으로 꿀밤을 주고 싶지만 참는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오욕 수면욕 색욕 물욕 명예욕 시금치 무침과

2025-04-15

[가정 행복통신문] 성폭력 인식의 달, 한인 사회의 과제

4월은 ‘성폭력 인식 및 예방의 달(Sexual Assault Awareness and Prevention Month)’이다. 이 달은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서비스를 알리며, 예방 활동을 장려하고 생존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마련됐다.   성폭력은 국경, 문화, 사회경제적 배경을 초월하는 세계적인 문제지만, 각 커뮤니티마다 고유의 어려움을 안고 있으며 한인 커뮤니티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투(#MeToo)’ 운동과 함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한국 문화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한 성폭력에 대한 낙인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다. 많은 생존자들이 사회적 압박과 피해자 비난 문화 속에서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고 있다.   한인가정상담소(KFAM)는 2010년부터 한인 커뮤니티 내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성폭력 예방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지우는 경향이 짙다. 옷차림, 야간 만남, 모호한 신호 등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   KFAM 핫라인에 전화한 한 성폭행 피해자는, 고민을 나눈 목회자로부터 “가해자들과 술을 마신 것이 문제였다”고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국 문화에서 성(sexuality)은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폭력 피해는 곧 수치심으로 이어지며, 개인은 물론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KFAM은 지금까지 성폭력 생존자 520여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이 중 88%는 영어가 서툰 이들이다. 피해 유형은 가족 내 비(非)친밀 파트너에 의한 폭력이 11%, 직장·교회·학교 등에서의 지인에 의한 폭력이 39%, 낯선 이에 의한 폭력이 40%, 성매매 피해가 10%를 차지했다.   전체 피해자 중 70%가 종교를 통해 도움을 구하는 만큼, KFAM은 한인 목회자 및 교회들과 협력해 지금까지 2500명 이상의 한인 종교 지도자에게 성폭력 대응 교육과 훈련을 제공해 왔다.   KFAM은 지역사회 리더들이 피해자를 도울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인식을 제고할 뿐 아니라, 생존자를 위한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피해자 비난 문화를 없애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문화를 조성하며, 법적 보호 강화를 위한 정책을 옹호하고, 남성들이 동반자로 나설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많은 담론이 침묵과 오해 속에 갇혀 있다.     연예계나 정치권에서 불거진 고위급 사건들은 주목을 받았지만, 동시에 피해자들이 침묵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줬다. 대중은 종종 가해자의 편에 서거나 피해자의 과거 이력이나 행실을 근거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의 보도 방식도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고위층 사건이 선정적으로 다뤄지거나 피해자의 ‘인격’에 초점이 맞춰질 때, 오히려 왜곡된 인식을 강화시킨다. 특히 여성의 행실에 따라 ‘무고한 피해자’와 ‘자초한 피해자’로 구분짓는 이분법적 시각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침묵하게 만든다.   성폭력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범죄다. 한인 커뮤니티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깨고 함께 나설 때, 보다 안전하고 지지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믿고, 비난이 아닌 공감으로 함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피해자 중심의 문화 조성과 법적 개혁, 가해자 책임 강화, 그리고 존중과 공감의 가치 확산이 필수적이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 없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오는 4월 30일(수) ‘데님 데이(Denim Day)’에 청바지를 입고, 성폭력 생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함께 전하자. 캐서린 염 / 한인가정상담소 소장가정 행복통신문 성폭력 인식 성폭력 인식 성폭력 생존자 성폭력 피해

2025-04-15

[이아침에] 생일이 뭐길래

동년배의 여자들과 매주 월요일 밤에 줌 미팅이 있다. 한 명의 인도자와 다섯 명의 팀원이다. 성경 공부를 주로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아니면 평범한 일상도 나눈다. 모임이 끝나면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기보다 작은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이 되곤 했다. 물론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단톡방 모임의 리더가 생일 축하한다며 축복의 문구와 덕담을 날렸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핑크 케이크 이모지를 보내서, 고맙다고 답례했다. 모두가 축하하지 않았지만,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더는 마음에 담지 않았다.   생일날이 평상시처럼 지나갔다. 달리 별다른 계획이나 약속이 없어서, 가족과 생일 케이크를 함께 먹으며 보냈다. 생일은 특별한 날이지만, 나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또 ‘계절이 한 바퀴 돌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 되자, 세 사람이 축하 메시지를 안 보낸 것이 떠올랐다. 섭섭했다. 그동안 위로와 공감, 조언 등 그냥 함께 있어 힘이 되어주던 모임이어서, 아니면요즘에 직장 일로 예민해서 무리한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은 상중이라 경황이 없겠고, 두 사람은?’으로 시작된 사고로 마음이 꼬여갔다. 약간 마음을 열어놓은 이들에게 받은 충격은 예상 밖으로 컸다.   어차피 적잖이 각각 살아온 날이 다른데, 무슨 기대를 했을까. 한 살을 먹어가는 위로였을까. 가치관, 성격, 살아온 생활 환경이 판이한데, 같은 관점과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암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도, 다 터놓을 수 없는 인생사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팍팍한 타인의 삶이나 상황을 과연 내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는지.   하긴 축하 메시지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남의 생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보내지 않은 적도 있다. 하루 종일 몇 명이 메시지를 보냈느냐는 데이터로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흘려보내기로 했다. 내 행복의 결정권을 누군가에게 맡겨두고 싶지 않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한 사람이 생일 축하한다고, 자꾸 잊어버려서 지금 보낸다며, 늦게 해서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냈다. 괜찮다며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답장했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넓어지는 감정은 아마 여유로움이지 않을까.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다. 상식만천하(相識滿天下) 지심능기인(知心能幾人). 얼굴 아는 사람이야 세상에 가득해도 내 마음 알아줄 이는 과연 몇 명인지. 아직도 내가 세상에 나온 날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셋이나 있으니, 그동안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다. 이리나 / 수필가이아침에 생일 생일 케이크 축하 메시지 핑크 케이크

2025-04-15

[중앙칼럼] 지브리 열풍의 불편한 진실

일본 도쿄의 한 번화가에서 열린 통신사 프로모션 행사에 우연히 참여한 일이 있다. 전화카드를 구매하면 즉석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바로 카드에 인쇄해준다는 말에 이끌려 줄을 섰다. 몇 분 뒤 건네받은 그림 속에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닮은 또 다른 내가 담겨 있었다.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일반 프로필 사진과는 달리 특이하다는 생각에, 그 이미지를 지금까지도 내 모든 소셜미디어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얼굴이 아닌, 나를 투영한 또 다른 자아의 이미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요즘 SNS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기업 '스튜디오 지브리’의 오리지널 화풍으로 그려진 프로필 사진(프사)들이 넘쳐난다. 챗GPT나 AI 이미지 생성 앱을 통해 클릭 한 번이면 누구나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따뜻하고 익숙한 그림 스타일, 세월의 흔적 없는 미화된 용모. 현실과는 살짝 거리감이 느껴지는 감성에 사람들은 만족감을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프사들 속에서는 현실의 자기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익명의 캐릭터 하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감추는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는’ 이 모순적인 심리가 지브리 프사 열풍의 불씨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 프사 열풍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가 있다. 갈수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정교한 AI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40년 넘게 사진을 찍어온 입장에서는 그 정밀함과 기술력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위기감을 느낀다.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창조해낸 따뜻한 세계가 단 몇 초 만에 재현되는 현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지난 2016년 NHK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AI로 만든 보행 동작 애니메이션 샘플을 관람했다. 개발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것을 만든 사람은 (신체 부자유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며 “생명에 대한 모욕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의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건, 당시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에 그쳤던 AI가 이제는 원본의 오리지널리티와 미감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가 지브리 화풍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데이터에 저작권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점은 법적, 윤리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지브리 프사 열풍을 보며 더 걱정스러운 건, 많은 이들이 이런 이미지를 무심코 사용하는 사이에 원작자의 권리 보호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AI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기존 작품과 실질적으로 유사할 경우 이는 저작권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아직도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화풍’이나 ‘스타일’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스타일이 한 예술가의 수십 년에 걸친 땀과 집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군가의 예술적 결실을 AI가 아무 제약 없이 흡수하고 재가공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창작의 의미는 물론, 창작자라는 존재감이 무색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기술의 발전이 창작자의 권리를 무시해도 될 만큼 정당한지, 빠르고 편리한 결과물이 진짜 예술보다 우선일 수 있는지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는 AI 시대인 만큼, 이제는 기술이 아닌 사람의 창의력을 중심에 두고 창작물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AI 이미지를 규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원작자의 노력이 정당하게 존중받는 환경을 지금 우리가 만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늦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브리 프사에 열광하는 우리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이상화된 자아 속으로 도피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계의 근간이 되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피와 땀, 그리고 영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지브리 열풍 지브리 애니메이션 지브리 스타일 스튜디오 지브리

2025-04-15

손원임의 마주보기 - 종합 놀이 선물세트

오래 전에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의 목판 유채화 중에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바로 1560년, 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의 작품인 〈Children’s Games〉(어린이 놀이)라는 그림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놀이들을 다 종합적으로 모아 놓았고, 아이들의 다양한 노는 모습을 어느 사소한 공간의 낭비 없이 아주 빼곡하게, 그렇지만 꽤 유쾌하게 잘 묘사했다. 다시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따뜻한 느낌의 배경에 어린이들이 실제로 바로 눈 앞에서 노는 것처럼 느껴지고, 매우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포착해서 여러모로 재미있게 감상할 수가 있다.     브뢰헬의 풍속화에 표현된 어린이 놀이들의 종류를 잠깐 들여다보자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물론 그림 뒷부분에 작게 그려진 놀이들은 도저히 (나로서는!) 무슨 놀이인지가 파악이 잘 안되고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이 작품에 실린 80여 가지 놀이 중에는 소꿉놀이, 굴렁쇠놀이, 가마태우기, 말타기놀이, 춤추기, 기마전놀이, 자치기놀이, 술래잡기, 씨름 등등 혼자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누구나 매번 이 그림을 볼 때면, 이 네덜란드 화가의 거장다운 재능에 놀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종합 놀이 선물세트’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내 어린 시절, 아이들이 특별한 날에만 선물로 받기를 기대(!)할 수 있었던 ‘종합 과자 선물세트’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솔직히 놀이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 자체로 갖가지의 달콤하고 바삭바삭한 과자들처럼 여전히 우리네 마음을 흥분케 하고 들뜨게 하며 즐겁게 해준다.     이제 우리 다같이 브뢰헬의 그림에서 모든 종류의 놀이와 게임의 모습을 한번 지워보자. 말하자면, 텅텅 빈 ‘종합 과자 선물세트’ 상자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아마도 무척 속상하고 심심하고 허전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의 빈 그림에 홀로 컴퓨터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를 그려보자. 마치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과자 하나가 있는 상자처럼 말이다. 여전히 허전하다. 마음에 썩 차지 않는다. 아마도 어딘가 모르게 중립적이고 차고 딱딱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내 마음이 별로 신나지 않는다!   시카고 지역의 어떤 카페에서 본 일이다. 자매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상당한 시간 동안 전자매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는 자신의 태블릿으로 드라마를 열심히 시청하며 웃고 있었다. 때때로 볼륨을 더 높여서 옆에 앉은 동생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 여동생은 언니가 방해하지 않는 한 시종일관 귀에 이어폰을 끼고서 빈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쓰며 여러 가지의 낙서를 하고 있었다.     또 한번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장에서 본 일이다. 엄마는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며 무척 바빠 보였고, 옆 좌석에 앉은 어린 딸아이는 태블릿으로 자신의 아바타(avatar)에 귀엽고 예쁜 옷들을 갈아입히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처럼 직접 손으로 그리고 오려서 애써 만든 것이 아니라, 아주 쉽게 ‘검지 손가락’만 움직여서 매우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혔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놀이는 그 모양과 모습이 매우 달라졌고, 그 성질과 속성 또한 많이 다르다. 게다가 인류는 로봇과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가정에서나 식당에서 그리고 학교에서도 “다재다능한” 전자매체가 급격히 일상화되고 있다. 말하자면 요새 아이들은 점점 더 밖에 나가서 놀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에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딱딱하고 차가운 전자매체를 벗어나 안전한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현명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굳이 예쁘고 팬시하고 비싸고 많은 장난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놀이 종합 선물세트’에서 볼 수 있듯이, 때로는 혼자 때로는 친구와 함께 직접 경험과 관찰과 실험을 하고, 전신을 움직여서 마음껏 뛰어 놀고, 또 꿈꾸고 생각하고 몽상을 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선물세트 손원 어린이 놀이들 종합 놀이 놀이 종합

2025-04-1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뼈와 흙의 대결

뼈와 흙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백전백패 뼈가 이긴다. 흙은 던지면 흩어지지만 뼈는 여간해서 부스러지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힘으로 하면 남자가 이길 것 같지만 끝까지 가면 여자가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남자가 호랑이 가죽 뒤집어쓴 동물이라면 여자는 꼬리 열 개 달린 여우라서 대적이 불가능하다.   후배 한 사람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아내 맘을 알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하면 아내를 이길 수 있는지 고민했다. 결론은 간결하다. ‘무조건 져라. 항복 선언해라. 그러면 가정과 자식, 부모 형제, 이웃과 친구들, 삼대가 평온해진다’고 답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여자는 마음이 한 번 틀어지면 원한을 품고 독하기 그지없다. 불똥이 튀기 전에 평화조약 맺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부부 싸움은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가정의 여신 헤라는 파뿌리가 하얗게 되도록 부부 싸움을 했다. 신들은 선악의 개념 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제우스는 무녀의 딸 이오에게 흑심을 품어 겁탈한 뒤 증거 인멸을 위해 암소로 둔갑시킨다. 제우스가 바람 피운 사실을 눈치챈 부인 헤라는 암소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 뒤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감시 임무를 맡긴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피리 소리로 아르고스를 잠재워 죽인 뒤 이오를 구출해낸다.   ‘헤르메스와 아르고스(드레스덴 미술박물관, 1635~1638)’에는 헤르메스의 피리 소리에 잠든 아리고스 옆에 암소가 된 이오가 처량한 눈으로 보고 있다. 루벤스는 불륜과 부도덕으로 가득 찬 신들의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포착했다. 그리스 신화가 매혹적인 이유는 욕망과 힘의 논리가 지배한 인간세계의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창세기 7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21장)’ 흙과 뼈로 된 인간이 인류 최초의 가정을 만드는 장면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는 원리를 추정해 볼 단서다.   여자와 남자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서로 타협하기 힘들다. 부부간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남자가 목숨 거는 건 자존심이고 여자는 사랑이다. 여자에게 사랑이 없으면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악착 같고 치밀하다. 자존심은 타협으로 보수가 가능하지만 사랑은 파장이 광대하고 자기 중심적이라서 대처하기 불가능하다.   여자와 남자는 다르게 태어난다. 죽었다 깨어나도 남자는 여자를 알지 못한다. 여자는 외출할 때 몇시간 전부터 야단법석을 떨지만 남자는 약속시간 될 때까지 컴퓨터만 한다. 철이 바뀌면 여자는 옷이 가득한 옷장을 보며 입을 옷이 없다고 한다. 남자는 텅 빈 옷장을 보고 입을 게 거뜬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말로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 주길 바라지만 남자는 말 안 해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자기가 마지막 사랑이길 원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첫사랑이길 바란다. 여자가 용의주도 하고 남자가 천진난만 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자는 비정상적 인간의 정상화 방법을 탐구한다. 하늘 향해 침 뱉으면 내 얼굴만 더러워진다. 아담이 갈비대로 만든 여자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으니 남자가 여자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여자를 알려고 노력하지 하지 말라. 이해 불가능해도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여자는 뼈를 깍는 아픔을 견디며 흙으로 믿음의 반석을 세운다. (작가,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가면 여자 여호와 하나님 그리스 신화

2025-04-15

[사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협상, 신중 또 신중할 필요

━ 한·미 관세 우선협상서 핵심 변수로 떠올라 ━ 난공사에 수익성도 의문…서두르다간 낭패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그제 “한국과 다음 주 무역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을 일본·영국·호주·인도와 함께 ‘최우선 목표’ 5개국에 넣어 관세 우선협상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도 베센트 발언 직전 열린 경제안보전략TF 회의에서 “하루이틀 사이에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와 관련해 한·미 간 화상회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혀 한·미 간 관세 협상이 본격화하고 있음을 예고했다. 수출로 먹고살기 때문에 관세 불확실성 제거가 절실한 한국으로선 피할 수 없는 협상의 시간이 왔다. 그러나 한·미 관세 협상에서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가 고차방정식을 푸는 난제로 떠오르고 있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거절하기도 어려운 형국이어서다. 알래스카 북부에서 남부까지 1300㎞에 걸쳐 가스관을 연결하는 이 사업은 기후 특성상 1년 내내 얼어 있는 영구 동토층을 파는 어려운 공사다. 1년 중 공사할 수 있는 날도 많지 않다. 미국계 엑손모빌과 영국계 BP 등 대형 유전 개발회사들이 도전했다가 발을 뺀 이유다. 중국도 트럼프 행정부 1기 때 개발에 나서려다 수익성이 낮아 접었던 사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총사업비만 440억 달러(약 64조원)로 추정되는 이 사업이 시작되면 알래스카에 건설투자 붐을 일으키고, 완공 이후 LNG 수출 사업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은 한국·일본·대만 3개국에 투자를 요청하고 있다. 지난달 알래스카 주지사가 한국을 방문해 투자 유치전을 펴기도 했다. 한국으로선 투자에 참여하면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는 물론 방위비 논의에서도 유리한 협상에 나설 수 있다. 하지만 협상의 레버리지로 쓰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대형 유전 개발회사들도 발을 뺀 사업인 데다 화석연료 개발에 부정적인 미국 민주당이 3년여 뒤에 정권을 되찾기라도 한다면 자칫 사업이 중단되고 투자금을 날릴 수도 있다. 한 대행의 신중한 접근이 중요해졌다. 최고 통상 전문가로 꼽히는 만큼 국익을 위한 협상에 나서겠지만, 혹여 성과를 과시하려는 의욕이 앞서 정부 차원에서 덜컥 개발을 약속하면 뒷감당이 어려워진다. 미국의 무차별적 요구의 끝을 모르는 상황에서 자칫 차기 정부에 부담만 될 수 있다. 특히 한 대행은 대통령 출마설이 회자하고 있는 만큼 정치적 논란을 피해야 한다. 미국은 최근 국면 전환 조짐을 보인다. 무차별적 관세 부과가 미 국채시장 불안을 야기하고, 중국이 맞불 관세와 함께 희토류 수출 금지에 나서자 관세전쟁의 안정화가 시급해졌다. 한국 등 5개국과의 조기 협상도 이런 흐름에서 나왔다. 우리까지 조급증을 보일 필요는 없다.

2025-04-15

[사설] 이미 늦은 추경, 국회도 협력해 실기하지 말아야

━ 정부, 통상·AI 등에 2조원 늘린 12조 규모 제안 ━ 문제는 속도…효과 극대화 위해 신속 합의 중요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제(15일) 12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 편성 계획을 밝혔다. 정부의 당초 계획 10조원보다 2조원 증액한 규모다. 지난달 최악의 산불 피해와 관련해 산림 헬기 6대, 다목적 산불 진화차 48대 등 재해·재난 대응에 3조여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통상·인공지능(AI) 경쟁력 강화와 소상공인·취약계층 지원에도 각 4조원씩 배정할 방침이다. 정부가 추경안을 조만간 국회에 제출하면 본격 논의가 시작될 텐데, 더불어민주당에서도 15조원 규모를 언급하고 있어 예전보다 견해차가 좁혀진 듯하다. 민주당은 지역화폐를 포함한 35조원 규모의 수퍼 추경을 주장해 왔다. 최 부총리가 누차 강조했듯 추경은 타이밍이 관건이다. 정부와 국회는 여·야·정 협의회 등을 통해 추경 문제를 협상했으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국면에서 서로 겉도는 주장만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기대했던 ‘벚꽃 추경’은 이미 물 건너갔고, 부지런히 이견을 좁혀야 다음 달 초께 집행이 가능할 전망이다. 올해 경제 상황은 관련 지표가 발표될 때마다 근심이 쌓일 정도다. 기재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2월까지 재정집행 속도는 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내수 경기 침체 우려 속에 정부는 집행 속도를 높이겠다고 했으나 전년보다 2.6%포인트 낮아진 17.5%로 집계됐다. 올해 1분기 도소매·숙박음식점업 취업자 수가 552만7000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만5000명 감소하는 등 고용시장에도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 현대제철이 만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절차를 시작하는 등 대기업마저 흔들린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관세전쟁까지 몰아치면서 우리 경제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신세다. 기업이 몸을 움츠리고 가계가 소비 여력이 없는 상황에선 재정지출이 내수 진작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추경이 집행돼도 실제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 최적의 시기는 놓쳤다고 봐야 한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2조원을 증액한 안을 제시했으니 민주당도 적극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곳간에 여력이 있다면 추경을 대폭 늘려도 좋겠으나 지난해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104조원을 넘는 등 나라 살림에도 경고등이 켜진 실정이다.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포퓰리즘성 예산에 서로 욕심낸다면 협상이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내수를 살리고 관세 전쟁에 몰린 기업에 도움이 되는 분야에 집중한다면 12조원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문제는 속도다. 경제 주체들이 관세 리스크를 비롯한 위기에 대응해 갈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는 추경안을 신속하게 합의하기 바란다.

2025-04-15

[염재호 칼럼] 제 7공화국은?

전두환 군사정권 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개헌으로 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6공화국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정치·사회 민주화를 이뤄냈다. 전 세계는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유일한 국가라고 극찬했다. 21세기 들어 K팝, K드라마, K푸드 등 K문화가 지구 곳곳을 휩쓸면서 문화강국의 면모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학 석학 최장집 교수가 지적하듯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우파 산업화 세력과 좌파 민주화 세력 모두 국가 미래를 위한 공화 정치보다 정권쟁탈에만 몰두했다. 6공화국 내내 퇴행은 거듭됐다. 파탄에 이른 6공화국 정치시스템 정권쟁취 골몰 미래 잊은 정치권 기술패권 패러다임 대전환 절실 제7공화국 개헌으로 새출발해야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로 재정수입이 확대되면서 국가권력은 끊임없이 팽창했다. 1988년 정부 예산 17조원, 부채 19조원 정도 되던 것이 2024년 정부 예산 657조원, 부채 1196조원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모두 권력을 잡으면 비대해진 정부재정을 미래지향 정책 디자인에 활용하기보다 산업정책과 복지정책을 통한 재정 배분에만 매달렸다. 단임 대통령제는 재정지원과 행정규제라는 양날의 칼을 시장에 휘두르는 것만 즐겼다. 정권을 잡으면 막강한 권력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위해 활용할 수 있기에 정권쟁취에 혈안이 되었다. 정권변화의 위험성으로 행정은 무사안일과 책임회피로 일관했다. 민주화 이후 행정의 비효율과 나눠먹기 예산은 도를 넘었다. 2023년 저출생 관련 예산만 해도 약 48조원으로 그해 태어난 신생아 23만명 한 명당 2억원 이상 나눠줘도 될 예산이 소진되었다. 이제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 계엄사태까지 겪고, 건국 후 21번밖에 없었던 탄핵발의가 지난 2년 반 동안에만 30건에 달하는 극단적 정치현상을 보여 6공화국 체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탄핵 후 곧 대선국면이다. 소 잃고 망가진 외양간은 고치지 않고 외양간 지기만 뽑겠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제는 외양간부터 고쳐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만 한다. AI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2016년 알파고로 이세돌을 꺾은 수학 천재 데미스 허사비스가 알파폴드(AlphaFold)라는 AI로 지난해 노벨 화학상을 손에 쥐었다. 하나의 단백질 구조와 기능을 밝히려면 실험실에서 여러 달에 걸친 연구가 필요한데 알파폴드는 수초 만에 이를 수행할 수 있다. 유럽바이오정보과학연구소(European Bioinformatics Institute)에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밝혀진 19만개의 단백질 구조식의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그런데 알파폴드는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단백질 구조인 약 2억 개의 단백질 구조를 순식간에 밝혀냈다. 앞으로 AI가 모든 실험실에 도입되면 연구의 가속화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2017년 중국의 바둑천재 커제가 알파고에 세 번 연속 패하자 시진핑 주석은 두 달 후 ‘차세대AI발전계획’을 수립하여 2030년까지 세계 최고 AI 강국이 되겠다는 국가전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최근 우리에게 충격을 준 딥시크의 출현이다. 마치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충격으로 케네디 대통령이 최초로 인간을 달나라에 보내는 NASA 아폴로계획을 추진한 것과 같다. 중국의 과학기술 투자는 총력전이다. 2020년 중국 R&D 투자는 미국의 90%에 이르렀고, 우주선 창어 4호는 2019년 세계 최초로 달나라 반대편에 착륙했다. 최근에는 신형 양자 통신위성으로 1만㎞가 넘는 세계 최장 양자통신에 성공했다. 우주에 폭 1㎞의 태양광 전지판을 설치하여 싼샤댐과 맞먹는 1000억㎾h 우주 태양광발전소 건설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우주에서 태양광 전기를 생산해 레이저 기술로 지구에 송출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이어 AI 국력 3위를 자랑하는 싱가포르는 십년 전부터 국가AI개발전략을 차분히 추진했다. 올해 싱가포르는 AI 전공 박사과정 학생에게 월 670만원의 생활비를 주는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외국인도 가능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영주권도 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논쟁 후 빠르게 꼬리를 내린 것도 미국 우주 정보통신망 스타링크를 통한 통신 지원이 없으면 드론 무기 활용 등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무기가 됐다. 전 세계가 AI, 바이오, 양자, 우주 등 기술패권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6공의 후예들은 적폐청산, 검수완박, 반공이념 논쟁으로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다. 더 이상 6공 정치시스템으로 미래의 기술패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시스템을 바꾸는 개헌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지만, 개헌 없이 정치가 발목만 잡는 6공의 패러다임으로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군사혁명으로 산업화를, 민주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뤘던 것처럼 또 하나의 혁명으로 기술패권 국가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국가AI위원회 부위원장

2025-04-15

[안혜리의 시시각각] 국힘 경선은 이재명 도우미 뽑기?

" "다 이기고 돌아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 서초동 사저로 돌아간 지난 11일 이웃 주민에게 한 말이다. 자멸적인 계엄 발동에 따른 필연적인 탄핵 인용으로 그를 대통령으로 세우고 뽑은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전체가 궤멸적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탄핵당해 정권 내줄 위기에 처했는데 대체 누구를 상대로 뭘 이겼다는 걸까. 무엇보다 그는 특정 정파 수장이 아니라 국민 통합과 안녕, 국가 번영을 최우선으로 둬야 할 대통령이었다. 당초 의도가 무엇이었든 계엄이란 무모한 결정의 후폭풍 탓에 무고한 국민이 극심한 사회 갈등과 민생 위기 속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일단 고개부터 숙이는 게 범부라도 알 법한 최소한의 도리다. 그런데 일말의 미안함을 표시하기는커녕 마치 영역 싸움 나선 골목 대장마냥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서, 어쩌다 국민이 이 정도 그릇을 대통령으로 뽑았나 다시금 복기해봤다. 국민·비전·반성 없는 국힘 경선 '이재명 포비아'만으로는 부족 대통령을 경력 종착역 삼지 않고 국민 위한 출발점 삼을 인물 필요 사실 답은 뻔하다. 일등 공신은 지난 대선 때부터 줄곧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다. 비단 보수층뿐만 아니라 적잖은 친노·친문 세력 사이에서도 '이재명 포비아'가 워낙 심하다 보니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며 서로 손 잡았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당선된 그가 잘해주길 바랐지만, 불운하게도 그에겐 국가 지도자로서 꼭 필요한 역량도 비전도 없었다. 그가 "다 이기고 왔다"며 덧붙인 "어차피 (임기 채워) 5년 하나 (탄핵당해) 3년 하나"라는 발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작금의 위기 극복을 넘어 미래 세대 번영까지 챙기려는 진정한 리더였다면 감히 그런 말을 내뱉지 못했을 거다. 오히려 남은 임기를 잃어버린 게 정말 아프고 안타까워 조바심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미 최고 권력인 대통령직은 누려봤으니 계엄이라도 해서 국회든 언론이든, 심지어 의사든, 자기 맘대로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호령하지 못할 바에야 5년이든 3년이든 큰 차이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한마디로 그에게 대통령 자리는 검사 윤석열 경력의 화려한 종착지였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려는 정권의 출발점은 아니었다. 그의 이런 인식은 앞서 지난 1월 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체포되기 직전 관저에서 나경원·윤상현 의원 등 지지자들과 만나 "나는 대통령까지 했기 때문에 더 목표가 없다"고 말한 대목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지난 14일 출마 선언한 홍준표 전 대구시장 말마따나 윤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정리된 마당에 다시 장황하게 그의 철학·비전 부재를 얘기하는 건 속속 출마 선언 중인 국힘 대선 주자들에게서 윤 전 대통령 모습이 그대로 겹쳐 보여서다. 여전히 비호감이 큰 이재명 후보 때리기로 대통령 돼서 본인의 정치 경력에 화려한 종지부를 찍겠다는 사람만 가득해 보인다는 얘기다. "12가지 죄목으로 재판받는 피고인 이재명 상대엔 가진 것 없고 깨끗한 김문수가 제격", "위험한 이재명 꺾고 대한민국 구할 유일한 필승 후보는 나경원", "피고인이자 화려한 전과자 이재명과 홍준표의 대결"…. 자기 당 출신 대통령의 과오로 막대한 세금 들여 치러지는 대선의 예비 후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모두들 국민은 안중에 없고, 미래 비전 제시 없이, 반성조차 없는 3무(無) 출마 선언을 했다. 탄핵에 찬성한 한동훈 후보 역시 사과는 있지만 '이재명'을 8번이나 언급한 판박이 선언을 했다. 지난 대선 국힘의 승리는 "뭘 해도 이재명보단 낫겠지"라며 최악 대신 차악 고르는 심정으로 투표한 국민이 많아 가능했다. 윤 전 대통령이 그런 기대마저 꺾어놓은 터라 이젠 "누군 절대 안 된다"로는 안 통한다. 그런데도 국힘은 이 전략만 답습하고 있으니 참 딱하다. 이대로라면 누가 국힘 대선 후보가 되든 결국 이재명 당선 도우미가 될 수밖에 없으니 하는 말이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5-04-15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단독] "6.3 대선, 사전투표자수 1시간마다 공개”

김용빈 선관위 사무총장 - 대선까지 48일…선거 관리 준비는 6월 3일 치러질 제21대 대통령 선거까지 48일밖에 남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김용빈 사무총장을 만났다. 대선 당일 전국 254개 투·개표소를 관리하고 사전투표 10만7000명, 본 선거 14만명, 개표 사무원 7만명 등 32만명을 지휘하게 될 그의 어깨는 무겁다. ‘소쿠리 투표’로 상징되는 부실 선거 관리 오명을 씻고, 부정 선거 논란을 일소하면서, 가족 회사란 비아냥까지 들은 특혜 채용 등 내부 비리를 척결해야 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다. “사전투표 CCTV 24시간 공개 방침” Q : 이번 대선에서 선관위가 신경 쓰는 대목은 무엇일지요. A : “부정선거 의혹 일소인데, 이 의혹은 늘 사전투표와 관련해 제기돼왔어요. 그래서 사전선거투표함 24시간 CCTV 영상을 공개하고 기계가 분류한 표를 사람 손으로 재점검하는 수검표 도입 등으로 부정선거 의혹을 원천 차단할 방침입니다. 특히 국민의힘 김민전 의원은 ‘사전 투표 숫자가 진짜 투표수보다 부풀려져 발표된다는 뻥튀기 의혹이 끊이지 않으니, 실질적으로 몇 명이 투표했는지 알 수 있는 확인증이 도입되면 좋겠다’고 제언했어요. 사전 투표하러 온 유권자 전원에게 투표지와 함께 ‘사전투표 확인증’을 발급해, 투표지는 투표함에 넣고, 확인증은 옆에 마련된 별도의 함에 넣게 하면 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의미 있는 제안이긴 한데 국민 입장에선 확인증 투함 의무가 추가되는 것이니 관련 법부터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실행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신 이틀간의 사전투표 기간 내내 사전 투표자 수를 시간대별로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투표소마다 투표자수 공개하면 ‘뻥튀기 의혹’ 해소에 도움될 것 특혜채용 이달말 임용 취소 추진 고교생 상대 선거교육 강화 필요 Q : 사전 투표자 수 시간대별 공개 방안이요? A : “대선 사전투표 기간인 5월 29~30일 양일간 전국 3500여 사전투표소별로 시각마다 사전투표 숫자를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와 언론사 등을 통해 공개하는 거죠. 예를 들어 29일 오전 ○○시 현재 서울 ××동 투표소에선 관내 ○○○명, 관외 ○○명이 투표했다고 공개하고, 1시간마다 업데이트하는 겁니다.” Q : 이렇게 하면 부정선거 논란 차단에 도움이 될까요. A : “부정선거론은 뻥튀기된 사전투표자 숫자만큼 허위 투표지를 투입한다는 주장이거든요. 이런 우려를 하는 부정선거론자들이 사전투표 참관인으로 투표소에 들어가 시간대별로 사전투표자를 카운트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선관위는 사전투표 종료 뒤 투표소 별로 사전 투표지 총수만 발표해오다 보니 부정선거론자들에겐 ‘우리가 카운트한 건 ○○명인데 선관위 발표는 ○○○명’이란 식으로 오인될 우려도 있었습니다. 투표소마다 시간대별로 투표자 수를 공개하면 이런 오인이 일소될 수 있을 겁니다. 서버 용량 등 기술적 측면에서 매시간 공개가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사전투표 관리관 날인 땐 더 큰 혼란” Q : 본 선거와 달리 사전투표에선 투표관리관이 투표지에 날인하지 않는 것도 부정선거 시비가 이는 이유인데요. A : “지난해 총선 때 서울 강남구 역삼동 투표소를 직접 가봤는데,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몰려 줄을 섰다가 투표를 포기하고 투덜거리면서 떠나는 걸 목격했어요. 이런 마당에 현장 날인 절차를 도입하면 투표시간이 더욱 지연될 게 뻔합니다. 또 인천공항 같은 대형투표소는 관리관이 여러 명인데, 날인하게 되면 도장이 각각 달라 조작 시비 우려가 오히려 가중돼요. 게다가 사전투표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특히 첨예합니다. 사전 투표함을 까면 젊은 층 표가 확실히 많이 나옵니다. 이건 검증이 끝났어요. 대학생·직장인들은 주민등록지와 생활 근거지가 다르니까 사전투표를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현장 날인을 도입하면 대기시간이 늘어나면서 투표율이 떨어질 우려가 있고 ‘선관위가 의도적으로 사전투표를 막으려고 현장 날인을 도입했다’는 논란마저 부를 수 있어요.” Q :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 혐의 2심 무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 선관위의 허위사실 유포 단속 기준이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A : “1심에선 유죄 선고를 받았죠. 1심과 2심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으니 선관위로선 대법원 최종 판단을 지켜보고, 거기 맞춰 단속 기준도 정리가 될 거로 보입니다.” Q : 선관위는 얼마 전 ‘이재명은 안됩니다’는 현수막을 단속하겠다고 했다가 뒤집는 소동을 빚었는데요. A : “그래서 단속 기준을 명확히 했습니다. 레드(불법), 블루(합법), 합법인지 불법인지 모호한 그레이(회색)등 3단계 분류법이죠. 레드는 엄격히 단속하되, 회색 지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발언은 가급적 약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선관위원회에서 의결했어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취지입니다.” “나였다면 딸 사퇴 설득했을 것” Q : 지난달 전직 고위급 간부 11명의 자녀가 특혜 채용 의혹으로 감사원의 고발을 당했는데, 그 의혹은 중앙일보 보도로 2년 전 드러났습니다. 그동안 선관위는 무얼 했습니까. 늦장대응 아닌가요. A : “문제의 11명 중 10명을 직무 정지시키고 청문 절차를 진행 중인데, 가급적 이달 말까지 임용 취소를 추진할 겁니다. 1명은 이미 사직했고요. 채용 비리와 관련해 감사원이 지난 1년 8개월간 감사를 했는데, 이 기간에는 자체 징계가 안 돼 늦장대응이란 오해가 생긴 듯합니다. 어쨌든 감사원이 요구한 중징계 대상자 8명 중 6명을 중징계하는 등 감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신속하게 징계를 했고, 현재 거의 모든 조치가 행해졌다고 보면 됩니다. 또 감사와 무관하게 선제적으로 8명에 대해 수사 의뢰도 했어요. (박찬진·김세환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이 채용 비리 의혹 핵심인데, 그들도 포함됐나요?) 예, 그들을 가장 먼저 수사 의뢰했죠.” Q : 지난달 국회에 출석한 박찬진 전 총장은 채용 비리 의혹을 받아온 딸을 사퇴시킬 뜻이 있느냐는 질문에 “본인 의사에 맡겨야 한다”는 취지로 답변해 논란을 빚었는데요. A : “나였다면 딸에게 (사퇴하라고) 설득했을 것 같습니다. 사퇴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지만, 선관위가 처한 상황이나 채용 비리에 민감한 청년층의 정서를 고려하면 가혹하게 느껴지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Q : 선관위 직원들이 고위직 자녀 채용을 위해 평정표를 비워두는 등 비리를 저지른 뒤 후임 직원에게 관련 파일을 폐기하게 하고 “너도 공범”이라고 협박했다는데,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 아닌가요. A : “당연히 그 비리를 저지른 직원들은 징계가 됐어요. 발견되는 대로 족족 중징계했습니다. 나름대로는 더는 채용 비리는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논란의 업무폰, 9대만 남기고 정리” Q : 김세환 전 사무총장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컨드폰을 만들어 정치인들과 통화한 의혹이 불거졌는데요. A : “‘어떻게 이런 경우가 다 있지’라고 생각했어요. 김 전 총장은 선관위 내부 특정 과에 배정된 업무폰을 끌어당겨 자신의 명의를 숨기고 그 과 명의로 썼으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그 얘기를 듣고 ‘업무폰 관리 대장이 있느냐’고 직원들에게 물으니 ‘없다’는 겁니다. 이것부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21년 말 기준 22대가 등록된 것으로 집계된 업무폰을 공보과·단속지도과 등 업무상 꼭 필요한 부서용 9대만 남기고 전부 정리했습니다.(본인은 차명폰이나 업무폰 쓰시나요?) 저는 없어요. 오래전부터 써온 개인폰만 씁니다. 저 말고 3급 이상 고위 간부들 전원이 업무폰 안 씁니다.” “선관위, 투명한 감사 가능…믿어달라” Q : 헌법재판소가 “감사원의 선관위 감사는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니, 선관위의 비리는 자체 감사 외엔 파헤칠 길이 없게 됐는데, 감사 시스템이 그럴 만큼 독립적일지 의문입니다. A : “사무처로부터 독립된 감사관을 뽑은 만큼 그럴 우려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사무총장은 감사관의 보고만 받지, 지휘권이 없고, 감사 부서 직원들 인사도 반드시 감사관의 의견을 듣고 해야 합니다. 감사관이 반대한다면 인사 못 하는 거죠. 지난 연말 인사도 감사관 의견을 듣고 했어요. 만일 총장이 감사관 말 안 듣고 인사를 강행하면 감사관은 선관위원회에 직보할 수 있어요.” 그는 인터뷰 말미에 “선거 교육을 의무화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선거법 개정으로 투표연령이 18세로 내려갔잖아요. 고교생들이 선거권을 행사하는데, 우리나라 교과과목에 ‘선거’가 빠져있어요. 미국 등 선진국들은 전부 선거제도 교육을 의무화했는데 우리는 없는 거죠. 고교 1년생 교과목에 선거의 의미와 절차를 최소한 1시간 필수과정으로 지정하면, 선거와 관련한 편향된 정보를 검증하고 선관위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견제하는 시민이 양성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04-15

대장암 환자 2차→3차병원 '급행' 타니 12일만에 수술[신성식의 레츠 고 9988]

한국 의료의 고질적 병폐는 대형병원 쏠림이다. 지방·수도권 할 것 없이 몰린다. 큰 병원도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중증 중심 의료나 연구에 집중할 수 없다. 중증 환자도 긴 대기 줄 앞에서 치료 시기를 놓친다. 의대 증원 2000명 파동의 비상 상황이 닥치자 지난해 10월 비로소 '바로 펴기' 작업이 시작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시작한 의료개혁의 일부이다. 6개월 지나자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장암 환자 "급행 탄 것 같다" #서울 영등포구 김정남(58)씨는 지난해 9월 대변에서 피가 나왔다. 올 2월 대림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 대장 내시경 검사, 이어 CT(컴퓨터 단층촬영) 검사를 했다. 지난달 20일 샘암종 진단을 받았다. 거기서 진료가 어렵다면서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의뢰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대장항문외과 강상희 교수 진료를 받았다. 대림성모의 검사 자료가 활용됐다. 대장암이 확진됐고, 지난달 30일 입원해 이달 1일 수술 받았다. 의료개혁 6개월, 현장서 성과 2차 병원 의사가 환자 의뢰 예약 별도 배정해 신속 진료 "1차-3차 병원 트랙도 필요" 김씨는 "대학병원은 오래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진료받고 열흘 여만의 수술 받을 줄 생각도 못 했다"며 "급행열차를 탄 것 같다. 운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끼리 주고받고 외래 진료를 잡아주니 편하다. 대림성모에서 대학병원 세 군데를 추천했는데 고대 구로를 선택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한다. #30대 A씨는 갑자기 옆구리가 아프고 다리가 부었다. 부산의 B종합병원에서 신장에 이상 증세를 발견했다. 병원 측이 지난달 13일 부산대병원 비뇨의학과로 의뢰했다. 전자 의뢰 시스템에 따라 진행됐다. 지난달 27일 진료 받았고, 양성신생물(혹)로 판정됐다. 암이 아니어서 경과를 두고 보기로 했다. 상급종합병원 구조조정 사업의 하나인 전문의뢰제가 이렇게 작동한다. 작은 병원 의사가 큰 병원에 환자를 의뢰하는 게 핵심이다. 진료기록부, 상세한 소견서 등을 온라인으로 보낸다. 2차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으면 끝내고, 중증환자는 상급병원에 의뢰한다. 환자가 상급병원 진료를 예약하고 동네의원의 진료의뢰서를 형식적으로 끊는 지금의 관행과는 다르다. 2차 병원은 종합병원(330개)이나 30~99병상의 중소병원(1400개)을 말한다. 11개 권역으로 나눠 운영 전국을 11개 권역으로 나눠 상급병원과 2차 병원이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권역 내에서 하되 인접 지역도 된다. 고대 구로병원은 486개, 부산대병원은 86개 2차 병원과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2차에서 상급병원으로 환자를 보내면 소위 패스트 트랙(급행 진료)을 탄다. 상급병원마다, 대학교수마다 전문의뢰 환자를 위한 전용 진료 시간을 별도로 할당한다. 그래서 김씨는 다음날, A씨는 일반 예약보다 48일 당겨 진료받았다. 협력관계가 아니면 전문의뢰 대상이 아니다. 가령 부산의 2차병원→서울 상급병원은 인정되지 않는다. 조희윤 고대 구로병원 진료협력팀장은 "경증환자가 상급병원으로 몰리면 급한 중증환자가 진료 시기를 놓칠 수도 있는데 이런 걸 막는 데 전문의뢰가 활용된다. 2차 병원의 전문의가 중증 정도를 판단해 우리 병원으로 보낸다"고 말한다. 조 팀장은 "전문의뢰 환자는 최대한 빨리 진료를 잡는다"고 덧붙였다. 이 병원의 평균 대기기간은 8.7일인데 전문의뢰 환자는 4.1일(1월)로 줄었다. 고대 구로병원의 정형외과 서승우 교수는 척추측만증 명의이다. 지금 예약하면 1년 반~2년 기다리는데, 전문의뢰를 활용하면 훨씬 줄일 수 있다. '빅5' 병원도 전문의뢰가 뿌리내린다. 흉선암 환자 C씨는 지난달 18일 김포우리병원에서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전문의뢰 됐다. 다음날 흉부외과 외래 진료가 잡혔고, 25~26일 입원해 폐 조직을 떼는 생체검사(CT 가이드)를 받았고, 이달 10일 CCRT(동시 항암 방사선 치료) 치료를 시작했다. 전문의뢰제가 정착되면 2,3차 병원의 역할 찾기에 도움이 된다. 지난해 11월 859건이던 전문의뢰 건수가 올 1월 7076건으로 증가했다. 상급병원의 중증환자 비율이 지난해 1월 45%에서 올 1월 52%로 올랐다. 상급병원에서 치료가 끝나면 2차 병원으로 환자를 돌려보낸다. 전문회송도 4565건에서 1만8923건으로 늘었다. 전문의뢰를 비롯한 진료협력 체계 마련에 연간 3300억원, 상종병원 구조조정엔 3년간 10조원이 지원된다. 동네의원 기능 정립도 시급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의료정책연구실장은 "상급병원 환자의 30~40%는 2차 병원에서 진료할 수 있는 병이다. 지금은 무조건 3차 병원으로 가는데, 전문의뢰제가 확대되면 의료 전달 체계를 바로잡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 실장은 "사업의 성과를 평가해 잘 하는 병원에 지원금이 더 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업의 맹점도 있다. 1-2-3차로 이어지는 의료전달 체계의 큰 축인 1차 의료기관(동네의원)이 빠져있다. 강정화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은 "1차 의료기관에서 중요 이상 증세를 발견하면 3차로 보내는 전문의뢰 트랙이 필요하고, 그럴 정도가 아니면 2차로 보내도록 1-2차를 연결해야 한다"며 "1차 의료기관이 환자를 지속적·포괄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성식([email protected])

2025-04-15

[시론] 한국·시리아 수교와 북한 정권의 외교 고립

193개 유엔 회원국 중 대한민국의 유일한 미수교국이던 시리아.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지난 10일 극비리에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방문했고, 마침내 양국 수교가 성사됐다. 외교 첩보극 같은 장면이었다. 시리아 과도 정부를 이끄는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지난해 12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가능해진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다. 2011년 ‘아랍의 봄’을 계기로 알아사드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HTS는 지난해 12월 수도 다마스쿠스를 단숨에 장악했다. 정부군이 제대로 저항도 못 하자 혼비백산한 ‘다마스쿠스의 도살자’ 알아사드는 후원국인 러시아로 도주했다.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이래로 54년의 부자 세습 독재 정권이 막을 내렸다. 쿠바 이어 시리아와도 수교 성사 북한의 중동 핵심 거점 상실 의미 미·러 밀착, 북한에 태풍 될 수도 한국은 북한과만 수교해 온 쿠바와 지난해 2월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번에 시리아와 수교에 성공하면서 북한을 제외한 모든 유엔 회원국과 수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조태열 장관은 그 순간을 “마무리 홈런”이라고 표현했다. 북중미와 중동의 해외 공작 핵심 거점을 잃은 북한은 외교적 고립에 빠질 것이다. 실제로 혈맹인 알아사드 정권 붕괴 당시 현지의 북한대사관은 허겁지겁 철수했다. 북한과 닮은 점이 유달리 많은 시리아 독재 정권의 몰락은 북한에 실존적 불안감을 줄 것 같다. 알아사드 정권과 북한은 김일성 시대부터 대를 이어 친분을 이어왔다. 1970년대부터 시리아군은 북한제 무기로 무장했고, 1990년대에는 대량살상무기(WMD)를 함께 개발했다. 2010년대 들어 양국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러 유엔 인권조사위원회가 구성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알아사드 정권의 최대 후원국이 러시아였던 것처럼 북한 정권도 지난해 6월 북·러 동맹 조약(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을 맺으며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까지 포함해 러시아에 명운을 걸었다. 알아사드와 김정은은 해외 유학파라는 공통점도 있다. 시리아 내전 기간에 자국민을 화학무기로 학살한 알아사드 정권은 붕괴 직전까지도 러시아·중국·이란의 비호를 받았다. 예컨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유엔 안보리가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에 대해 진상조사를 하려고 12차례나 제출한 결의안에 대해 러시아는 매번, 중국은 여섯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란은 친이란 노선의 레바논 군사 정파 헤즈볼라까지 시리아 내전에 투입하며 알아사드 정부군을 도왔다. 러시아는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습으로 시리아 정부군에 화력을 지원했다. 아랍연맹은 알아사드 정부군이 내전에서 승기를 잡자 2023년 시리아를 연맹 회원으로 12년 만에 다시 받아들였다. 견고해 보이던 알아사드 정권이 순식간에 무너진 계기는 예상치 못한 중동 정세의 급변이었다. 2023년 10월 친이란 성향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그것이다. 당시 아랍과 이스라엘의 데탕트 움직임에 따라 궁지에 몰린 하마스가 흐름을 뒤엎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제2의 독립전쟁’을 선포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를 제압한 데 이어 레바논의 헤즈볼라 세력까지 제거했다. 그 과정에서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뒷배 역할을 해온 이란 혁명수비대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HTS가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할 때 이란은 알아사드 정권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발이 묶인 러시아도 무기력했다. 친이란 하마스의 기습 도발이 친이란 알아사드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으니 ‘중동의 나비효과’인 셈이다. 외부 세력의 수 싸움으로 점화된 시리아 독재 정권의 급격한 몰락을 지켜보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러 행보와 강력한 대중 압박이 북한에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궁금해진다. 북·러 군사동맹을 생존전략의 핵심으로 삼는 북한은 미국과 러시아의 밀월관계가 어디까지 진전될지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트럼프의 친러·반중 대전략이 북한과 한반도에 초대형 태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한국과 시리아의 수교는 분명 자축할 외교적 사건이지만, 국제정세는 갈수록 예측 불가다. 외교·안보 당국이 경계하고 다각도로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장

2025-04-15

[천인성의 시선] 직선제 18년, ‘묻어 가는’ 교육감 선거

교육감 직선제의 첫 무대는 부산이었다. 2007년 2월 14일, 중도 퇴진한 전임자를 대신할 새 교육감을 뽑기 위해 전국 최초로 주민 직접 선거를 치렀다. 언론과 교육계의 이목이 부산에 쏠렸지만, 정작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는 드물었다. 투표율은 15.3%. ‘소중한 1표’를 행사한 유권자가 6명 중 1명에도 못 미쳤다. 역대 최저급 투표율의 원인으로 매체들은 홍보 부족과 서툰 선거운동을 꼽았다. 법 개정 50여일 만에 치러 선거를 몰랐던 시민도 많고, 후보들의 준비도 부족했다. 마냥 비관적이었던 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선거가 정착되면 ‘자녀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공감대가 확대될 거고, 투표도 활발해질 거라 기대했다. 재보선 투표율 저조, 20%대 그쳐 인물·정책 대신 단일화가 변수로 교육 정치화 초래…대안 마련 시급 지난 2일, 부산에서 직선제 이후 여섯번째 시교육감 선거가 치러졌다. 교육감의 당선무효형 확정에 따라 실시된 재선거였는데, 투표율은 22.8%에 그쳤다. 18년 전 첫 선거보다 조금 낫긴 하나, 선거 때마다 나오는 직선제 무용론을 되레 커진 듯하다. 투표율을 학교 성적에 빗댄다면 교육감은 낙제감이다. 같은 날 치른 5개 기초단체장 선거 중 1등인 전남 담양군수(61.8%)의 3분의 1에 그쳤고, 꼴찌인 서울 구로구청장(25.9%)보다 약 3%p 더 낮았으니까 말이다. 부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치른 서울교육감 보궐선거의 투표율(23.5%)도 같은 날 실시한 구청장 선거(부산 금정, 47.2%), 군수 선거(인천 강화, 전남 곡성, 영광 각각 58.3%, 64.6%, 70.1%)에 한참 뒤졌다. 2007년 직선제 도입 후 광역단체장·대통령 선거와 겹치지 않은 교육감 단독 선거가 총 8번인데, 투표율은 죄다 15~26%에 머물렀다. ‘교육자치의 꽃’으로 불려야 할 교육감 선거가 여전히 ‘(시장·도지사 선거에) 묻어가는 선거’란 조롱을 받는 신세란 얘기다. 2006년 12월 여야 합의로 관련 법을 개정할 때와는 딴판이다. 당시엔 정치권 줄대기, 돈 선거, 밀실 선출로 지탄받던 간선제로부터 교육자치를 구출할 대안으로 부각됐다. 시행 15년 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지방의회·교육위원회 중심 간선제를 직접 선거로 대체하면 교육의 자율성과 선거·행정의 투명성 모두 높일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하지만 지난 18년 간 국민이 목격한 직선제의 모습은 ‘깜깜이 선거’, ‘정당 없는 정당 정치’, ‘무늬만 무소속인 여야의 대리전’에 머물렀다. 교육감 선거의 최대 변수는 인물도, 정책도 아니다. 이념 성향에 따라 진행되는 단일화다. 후보의 관심과 노력도 공약 개발과 홍보 대신 진보 혹은 보수 진영의 ‘단일 후보’ 되는 데 쏠린다. 규칙도, 심판도 애매한 단일화 과정은 정당 경선보다 더 혼란스럽고 혼탁하다. 법은 정당인 출마, 정당 공천, 정당 지지를 금지하나 정작 후보들은 자신을 정당과 연결지으려 안간힘을 쓴다. 학생이 볼까 민망한 ‘색깔 마케팅’이 대표적이다. 2022년 교육감 선거에도 상당수 진보 후보는 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 점퍼, 보수 후보는 국민의힘을 연상케하는 빨간색 점퍼를 입고 유세했다. 특정 정당의 ‘텃밭’에선 후보들이 너도나도 같은 색 옷을 입고 다닌다. 직선제가 선거와 교육 행정의 투명성을 높였는지도 의문이다. 지금까지 선거 부정, 특혜 시비, 측근 비리로 법정에 섰거나 수사받은 직선 교육감의 수가 20명이 넘는다. 지난 12일에 선거 재판과 관련한 위증교사 혐의로 기소된 전북교육감의 처남이 숨진 채 발견됐다. 정당 지원도, 조직도 없는 아마추어가 도지사급 선거운동을 하니 선거법을 어기거나 ‘검은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렇게 민주적이지도, 교육적이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직선제를 개선하자는 논의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2년 전 정부와 여당은 ‘시도지사-교육감 러닝메이트제’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야당은 미온적이다. 직선제만 진짜 민주주의라고 믿는 건지, 흠은 많아도 ‘내 편’ 승률이 높아 괜찮다는 건지, 가장 많은 직선 교육감을 배출한 전교조의 입김 탓인지 기자는 잘 모르겠다. 2000년 3월 헌법재판소는 교육위원 선거운동 제한에 대한 결정문에서 “지방교육자치는 민주주의·지방자치·교육자주란 세 가지 헌법 가치를 골고루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 가운데 민주주의의 요구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간선제 시절 나온 선고이나, 직선제 시대에도 유효한 듯 싶다. 직선제가 직접 민주주의란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일지라도 당초 목표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면 더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안타깝지만, 직선제 실험의 실패를 선언하고 서둘러 대안을 모색할 때다. 천인성([email protected])

2025-04-15

[안병억의 브뤼셀의 창] 중국과 거리 두던 유럽, 트럼프발 관세전쟁에 ‘밀착 모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전쟁은 단순히 관세 부과에 그치는 게 아니다. 관세를 무기로 가치가 고평가된 달러의 약세를 유도해 미국 제조업을 부활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 이어 세계 경제의 2·3위인 중국과 유럽연합(EU)은 트럼프발 글로벌 경제 ‘리셋’ 정책에 어떻게 대응 중인가. EU와 중국은 미국의 관세 전쟁이 확전하지 않게 해 세계 경제의 안정에 보탬이 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의 통상 전쟁이 과도한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려 했던 유럽을 다시 중국에 다가서게 한다.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전기차 중국과 통상 협력 가능성 충분 인권 문제와 충돌은 EU 딜레마 지난해 말 EU는 중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3045억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 반면 미국과의 상품 무역은 2356억 유로의 흑자를 냈다. 즉 대중국 무역 적자를 미국과의 무역 흑자로 메우는 셈이다. 트럼프가 대중국 관세를 125%로 더 올린 지난 9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중국의 리창 총리와 장시간 통화했다. 집행위원회는 EU의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며 27개 회원국을 대표해 통상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다. 두 사람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부과에 맞서 글로벌 경제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 유지에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 시장 수출이 어려워진 중국 수출품이 유럽으로 대량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이를 모니터링하고 해결할 메커니즘 설립도 논의했다. 자유무역 체제 유지에 유럽과 중국이 힘을 쏟기로 합의한 것이다. 중국과 유럽은 서로에게 관세를 올리지 않았고 다른 통상 파트너에게도 기존의 정책을 유지 중이다. 그러면서 유럽은 만성적인 대중국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고려해왔다. EU는 중국산 전기차가 과도한 보조금을 받았다며 지난해 10월 말부터 최대 45.3%의 관세를 부과했다. 그런데 트럼프의 관세 전쟁으로 EU는 이 관세 인하를 검토 중이며 중국 기업의 유럽 현지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나섰다. 중국 기업이 유럽에 투자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2차 전지 특허를 보유한 중국의 CATL에게 관련 지식재산권을 유럽 각국으로 이전하기를 요구한다. 전기차 확대에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EU-중국 관계 정상화 50년 게다가 올해는 EU와 중국의 관계 정상화 50년이 되는 해다. EU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브뤼셀로 초청해 미국의 보호무역에 맞서는 유럽의 이미지를 강화하고자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이후 재건 사업에서도 EU와 중국은 서로 이익을 증진할 수 있다. 중국은 벌써 우크라이나 정부와 접촉해 전후 재건 사업 참여를 타진하고 있다. EU는 지난해 6월 말 우크라이나와 가입 협상을 개시했고 1000억 달러가 넘는 대규모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제공해왔다. 전후 복구 사업에도 EU의 예산 지원은 물론이고 독일과 프랑스 등 회원국 기업이 참여를 준비 중이다. 유럽이 주도할 수 있는 재건 사업에서 중국 기업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들과 협력할 수 있다. 물론 중국과 유럽의 통상 관계 강화는 규범적 권력으로서 EU의 이미지를 손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럽이 저성장에서 벗어나려면 중국 시장을 더 공략하고 중국의 유럽 투자를 추가로 확대해야 한다. 트럼프 발 관세 전쟁으로 단일 화폐를 쓰는 유로존의 경제 성장률은 다시 하향 조정됐다. 투자은행 ING는 최근 올해 유로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0.7%에서 0.6%로, 내년 전망치는 1%로 0.4%포인트 인하했다. 관세 전쟁이 내년 성장률을 더 크게 끌어내리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 각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시장 개척에 힘을 쏟는다. 1970~2023년 글로벌 상품 교역 증가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증세를 보였다가 2020년부터 하향세로 전환했고 2023년에 18%를 차지했다. 미국은 2001년(17.9%) 최고치를 기록한 뒤 크게 감소했고, 2023년에 12.4%로 소폭 상승세다. 유로존은 2018년부터 증가세로 전환했고 2023년에 25.7%를 기록해 미·중보다 상품 교역 증가 비중이 크게 높다. EU 경제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경제 대국 독일의 무역의존도는 2023년 말 83%, 프랑스는 71%다. 미국은 25%에 불과하다. EU 회원국 상당수가 경제 성장을 위해서 무역을 확대할 수밖에 없는 반면 미국은 내수 비중이 크고 국내 시장이 커 무역 의존도가 주요 7개국(G7) 회원국 중 가장 낮다. 대외 의존적인 경제 구조 때문에 경제 성장에 매진해야 하는 EU가 이전처럼 신장 지구나 홍콩에서 중국의 인권 탄압을 드러내놓고 비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경제 성장 위해 무역 확대 필수인 EU 구조적인 원인도 있다. 통상 정책은 EU 집행위원회의 권한이기에 EU 회원국이 단일 정책으로 중국과 협력할 수 있다. 반면 외교 안보는 회원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유럽 통합을 견인해 온 독일과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대중국 유화 정책을 선호해왔다. 반면에 발트 3국은 대중국 강경 정책을 견지해왔다. 그렇기에 외교 안보 정책에서 회원국의 중국에 대한 상이한 정책은 계속해 표출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EU의 딜레마가 있다. EU는 2년 전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며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완화)’을 제시했다.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처럼 중국과 교역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희토류 등 의존도가 높은 품목부터 시작해 ‘필수 원자재법’을 만들어 수입선 다변화를 추진했다. 그런데 트럼프발 충격으로 EU는 이제 중국과 리커플링(Re-coupling·재동조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향후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경제적 이익 증진과 규범적 권력으로서 위상 유지 간의 적절한 균형 잡기가 EU의 큰 과제로 떠올랐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2025-04-15

[문태준의 마음 읽기] 봄날의 일

달포 전에는 감자를 심으러 밭으로 가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밭으로 가면서 밭일을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씨감자는 재에 묻힌 후에 심는 거라고 일러 주었다. 봄날에 해야 할 텃밭의 일을 미루다 최근에 상추 모종 등을 사러 오일장에 들렀다. 오일장에는 많은 사람으로 활기가 넘쳤다. 화려한 색채의 봄꽃과 각종 채소 모종, 과실수 묘목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앵두나무와 목련 나무의 어린 묘목을 함께 샀고, 한 할머니로부터 갓 따왔다는 두릅을 샀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봄을 한가득 안은 듯했다. 텃밭에 고랑을 내고 채소 모종을 심었고, 어린 묘목에게도 자라날 터를 잡아주었다. 물을 흠뻑 뿌려주면서 이제 매일 바라보고 보살필 무언가를 가까이에 두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모종 심으며 한 계절 돌볼 생각 풀 뽑을 때는 잡념도 같이 뽑아 마음 쓰는 일 살피게 되는 봄날 허수경 시인이 산문집을 내면서 “작년에 화분에 심어둔 수국이 얼어가고 있었다. 내가 얼어가는 동안 수국도 얼 거라는 걸, 우리가 같은 계절을 산다는 걸 왜 모른 척했던가”라면서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 문장들에 깊이 공감했다. 나도 이제 이들과 함께 계절을 나게 될 것이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는 대파를 뽑아서 내 집에 갖다 주었다. 한꺼번에 먹지 않고 두고 먹을 것 같으면 밭에 묻었다 조금씩 뽑아 먹어도 좋다고 해서 반을 덜어 흙을 파서 묻어 두었다. 대파를 심고 밭 가에 앉아 있으니 먼 곳에서 꿩이 우는 소리가 들려 왔고, 해가 많이 길어졌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봄날의 해 질 무렵은 내게 조금은 묘하고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곤 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봄날의 해 질 무렵은 푸릇푸릇한 기운이 있으면서 동시에 맥이 풀리고 한없이 나른하게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다. 옛것과 옛사람이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인데, 이것이 나만의 생각인지 등에 대해 지금껏 누구와도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어쨌든 봄날이 시작되었구나, 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퍼질러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봄날이 시작되면서 어떤 지인은 하귤을 따서 하귤청을 담아 내게 선물로 주었고, 어떤 지인은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동영상으로 담아 보내왔다. 잘 익은 하귤의 빛깔과 향기에서 잠시 봄을 느낄 수 있었고, 강물이 흐르는 그 유동(流動)의 기운에서도 봄을 느낄 수 있었다. 봄날의 일 가운데에는 풀을 뽑는 일이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텃밭에서 풀을 뽑고, 마당에 돋은 풀도 뽑는다. 호미로 풀을 뽑는 시간은 비교적 마음에 소란이 없다. 반복되는, 단순한 노동이므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일만을 하면 된다. 그런데 풀을 뽑는 일을 자꾸 하다 보니 풀을 뽑는 동안에도 점차 온갖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고 심지어 시끄럽고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풀을 뽑으면서 기도를 하기도 한다. 요 며칠 동안에는 풀을 뽑으면서 ‘이것은 욕심의 풀이다’라고 생각하고 풀을 뽑았고, ‘이것은 화를 내는 마음의 풀이다’라고 생각하고 풀을 뽑았고, ‘이것은 어리석음의 풀이다’라고 생각하고 풀을 뽑았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잡념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지며 순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교하는 생각과 집착하는 생각을 약간은 뒤로 물릴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해 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에 집중해서 머무를 수 있었다. 최근에 한 스님을 찾아뵈었더니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맥락 없이 스님의 말씀을 옮기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어린이가 착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견주지 않고, 차이를 대어 본 후 간택(揀擇)하지 않고 어떤 존재에 대해서 신뢰와 사랑을 온전히 보내는 일에 대해 이르신 것이었다. 이 말씀은 마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궁리하게 했다. 언젠가 읽었던 불교 경전에는 “뜻에 맞지 않는 것과 만나고, 뜻에 맞는 것과 헤어지면서 울고불고 떨구며 흘린 눈물이 많겠느냐, 대양의 바닷물이 많겠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 질문도 어쩌면 비슷한 궁리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뜻에 맞는 것과 뜻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분간하는 마음이 괴로움과 아픔을 낳고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생(生)을 거듭하여 살면서 흘린 눈물의 양이 바닷물보다 많을 만큼 어마어마하다는 경계의 가르침이었다. 작물의 모종과 어린 묘목과 끝없이 돋는 풀과 더불어 봄의 계절을 앞으로 살아갈 것인데, 내 마음을 어떻게 간수하며 살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봄날이다. 문태준 시인

2025-04-15

[노트북을 열며] 트럼프에게 (잘) 선물하기

실로 ‘지구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세계정세를 뒤흔든 지 꽤 됐다. 그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각국에 내민 선물 청구서는 노골적이었다.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 우크라이나 광물, 계란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 각국은 (좋게 말해) 거래의, (솔직히 말해) 선물을 경쟁적으로 내밀기 시작했다. 지난 2일(이하 현지시간) 세율 25% ‘관세 폭탄’을 받아든 한국도 선물 건넬 차례를 기다리는 신세다. 굴욕적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트럼프가 한국에 원한다고 밝힌 선물 리스트는 현재까지 2개다. 조선업(군함)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 트럼프는 당선인 신분이던 지난해 11월 7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미국 조선업은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구애했다. 지난달 4일에는 “알래스카에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인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있다”며 “일본, 한국과 다른 나라가 수조 달러씩 투자하며 우리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에게 끝내 선물을 내어주더라도, 요모조모 따져 적절한 값을 치러야 한다. 먼저 조선업. 트럼프가 원한 ‘군함’과 일반 상선은 제작 과정부터 크게 다르다. 군함은 좁은 배에 각종 무기를 넣어야 해 상선보다 건조 난도가 훨씬 높다. 해군이 감독하는 ‘극한의 테스트’도 거쳐야 한다. 여름철 태풍에 맞춰 시범 운전하는 식이다. 건조 기간이 상선은 3년 이상, 군함은 7년 이상 걸리는 이유다.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도 만만치 않다. 1년 내내 땅이 얼어있는 영구 동토(凍土)에 1300㎞ 길이 가스관을 놓는 사업이다. 가스관을 놓는 데 성공하더라도 LNG선이 오갈 바닷길이 악조건이다. 북극 유빙(流氷)이 떠다니는 경우가 많아서다. 역대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를 일으킨 ‘엑손 발데스호’가 1989년 여기서 침몰했다. 알래스카 북부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한 건 1960년대다.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개발이 지지부진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제조업 실력에 묻혀서 그렇지 거래의 기술도 뛰어난 나라다. 고려 시대에 이미 청자와 인삼을 중국·일본을 넘어 아랍까지 수출한 ‘개성상인’의 후예다. 알래스카에서 냉장고, 아프리카에서 난로를 파는 ‘상사맨’이 한국 경제를 이끌던 시절도 있었다. 불굴의 한국인이 여태껏 하지 못한(안 한) 사업인데, 숨 한 번 고르고 침착하게 계산기 두드려봐서 나쁠 게 없다. 당연하지만 선물을 주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본래 선물이란 ①상대가 가장 애달플 때 ②최대한 비싼 값으로 ③밑지는 척 내밀어야 효과 만점이니까. 김기환([email protected])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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