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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이슬람 문명의 이해와 존중

이번에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편협된 고정관념을 벗어나 그들의 찬란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예찬하고 싶다. 그동안 튀르키예, 알람브라 궁전 그리고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유명한 모스크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장대하고 웅장한, 섬세한 기교에 머리로는 경외감이 일었으나 마음에 감동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아마 내 마음에 그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해할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들에게 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준비된 만큼 배우기 마련이다. 이번에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를 읽고 나니 그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혹자는 그 위험한 곳을 왜?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은 한국을 훨씬 더 위험한 나라로 알고 있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이기에 언제 북한이 공격해 올지 불안하다는 말이다.     전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57개국 나라의 20억 인구가 이슬람교도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역시 내면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를 지향한다. 실제로 테러 집단은 이슬람교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중동 이슬람권과 적대적인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당연히 미국이 제공하는 미디어만 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갖게 되었다. 상업을 중요시하고 생활과 종교가 밀착된 이슬람 교인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이슬람 문명의 뿌리를 내린다. 도시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문화유산인 건축물과 그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이슬람 도시의 매력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적어냈다.     저자는 이슬람을 대표하는 도시탐방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시작한다. 20억 이슬람 교인들이 평생 꿈꾸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아야 하는 순례지이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공동 성지로 겸손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회개의 공간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당시의 찬란한 기독교(동로마교회) 전통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5000년 전 고대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로마와 이슬람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이고 중동의 진주로 불린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는 사막에 세계 최대의 스키 리조트를 만들고 뉴욕과 파리를 넘어 세계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향로의 도시, 오만의 살랄라, 시가지 전체가 박물관인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이슬람의 종교적 영성이 가득한 신비주의 도시인 코나, 페르시아 문화의 당당한 후예인 이란의 테헤란, 17세기에 세상의 부와 문화를 다 모아들인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는 이스파한, 지식과 문화가 넘치는 실크로드를 자랑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파키스탄의 고도, 라호르 성채는 이슬람과 힌두문화의 만남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타지마할은 화려하고 우아한 무굴예술의 극치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카이로는 고대문명의 집산지, 리비아의 트리폴리는 로마 시대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튀니스는 이미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카뮈와 지드의 소설의 산실인 알제리, 모로코의 마라케시, 스페인의 코르도바, 그라나다는 인류 최고의 보석으로 알려진 알람브라 궁전을 자랑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력에 무너져가던 위기감 속에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숭배가 금기되어 있어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 대신 모든 건축물에 기하학적 문양이나 꽃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또한 수학, 건축학, 천문학, 과학을 고대 시대부터 생활에 적용해 왔으며 종교와 생활의 일치를 주장하고, 인류의 공존과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중동의 전쟁은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이슬람 문명 이슬람 문명 이슬람 문화 이슬람 도시

2025.10.06. 21:53

[열린광장] 오렌지 글사랑, 함께 읽고 쓴 30년

얼마 전 가든그로브 오렌지카운티 한인회관에서 뜻깊은 모임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문학 동호회인 ‘오렌지 글사랑’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고, 회원들의 작품을 모은 책 ‘오렌지 문학’의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회원들과 LA 지역의 문인 대표들이 모인 것이다.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 모여 2시간씩 시와 수필을 공부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작품을 썼는지를 읽으며, 생각하고, 설명을 듣고, 느낌을 말한다. 자신이 직접 시나 수필을 써 와서 회원들과의 워크숍(workshop)을 통해 다른 회원들의 진솔한 피드백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운다. 이런 과정은 영어를 말하기 위해 input과 output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세컨드 에이지(Second Age)’ 이후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좋아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공부하고,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계속 성장하게 하고 충실해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유하고,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해 왔을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일이다. 생각의 세계를 작가의 세계까지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은퇴 후를 보람 있게 보내는 일이 글을 쓰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하고 이웃과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본다. 글을 쓰는 일도 그중의 하나이고, 책을 읽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 AI의 의존도를 줄이고 어린이들에게 다시 독서를 장려한다고 한다. AI가 빠르게 정리된 기술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힘, 사고력을 기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사고의 깊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독서가 유일한 방법이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면 덤으로 여러 가지 선물도 따라온다.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공부하면 뇌가 다시 활성화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스노든 박사는 미국의 수녀 295명을 연구했다. 85세 이상에서도 계속 공부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매 환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밝혀내어 발표했다.   80세에 호주 멜버른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로나 프렌더가스트도 “공부를 못 할 정도로 늙은 사람은 없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꿈을 꾸게 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새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히 글을 쓰고 싶고, 자신의 생각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진다. 최성규 / 베스트영어훈련원장열린광장 오렌지 글사랑 오렌지 글사랑 가든그로브 오렌지카운티 오렌지 문학

2025.10.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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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은퇴에도 나만의 티샷이 있다

골퍼라면 누구나 골프에 대한 자신만의 매력 포인트가 있다. 스코어를 낮추기 위해 차곡차곡 노력해가는 것도 즐겁고 의미 있지만, 어떤 이들은 벗과 4시간 이상 대화하며 우애를 나누고, 새로운 동반자와 서로를 알아가는 매력에 골프를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주말골퍼라면 프로 골퍼를 따라 하는 전형적인 스윙이나 공략법도 중요하지만, 바로 자신만의 독특한 준비 동작, 스윙 예열, 퍼팅 라인 읽기 노하우 등이 골프의 매력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결국 모든 골퍼가 타이거 우즈나 로리 맥길로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체형과 스타일에 맞춰 습득한 스윙과 스코어 관리방식이 필드에서 의미 있는 스코어로 돌아온다면 그 뿌듯함은 매우 클 것이다.   우리가 모두 언젠가 해야 하는 ‘은퇴’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인들이 자주 접하는 신문, 방송, 블로그와 SNS 등을 보다 보면 마냥 재단된 은퇴 시기와 방식을 소개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소셜연금 신청 시기, 메디케어 선택 사항, 은퇴 연금 인출, 상속과 양도의 방식 등 천편일률적인 경우가 많다.   은퇴 시기부터가 그렇다. 가장 많은 연금을 받고 가장 혜택이 많을 때 은퇴해야 한다고 권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지인 중에는 70세 중반이 넘어섰지만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일을 보고 정기적으로 출장에 나서는 분이 있다. 건강이 허락하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고 목표를 정해 일해가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설명을 듣게 된다. “내가 즐겁고 편하면 그것이 바로 은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선출직으로 일했던 한 한인 1세는 이미 메디케어를 시작한 지 8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후배들을 만나고 참여와 투표를 주창한다.   이제 좀 쉬어도 되는 연배가 아니냐는 질문에 솔직한 답변이 돌아온다.   “그래서 좀 쉬어보려고도 했는데 2~3개월 손주들보고 여행 다녀오니 다시 좀이 쑤셔서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은퇴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경계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부동산으로 성공해 사우스베이 저택에서 살던 한 지인도 경제 활동은 끝나도 ‘인생 활동’을 멈출 수 없다며 그림과 사진을 배워 늦깎이 예술가가 됐다. 관련된 모임에 나가 더 많은 이들과 만나고 배움을 이어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던 한 분은 60대 초반에 경제 활동을 중단하고 해외 봉사 길에 올랐다. 그는 쉽지는 않겠지만 힘겨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젊을 때의 각오를 드디어 실천하게 됐다며 기뻐했다. 돈을 벌지 않으니 은퇴했다고 해야 하지만, 비영리 봉사를 시작해 또 다른 커리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참고로 각종 조사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미국인들의 평균 은퇴 시기는 60~62세 사이다. 62세에 소셜연금을 조기 인출할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이민사회 한인들의 은퇴는 ‘정답이 없는’ 시대가 됐다. 은퇴의 시기와 방식, 성격과 조건은 모두에게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에는 모두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누가 더 잘한 은퇴인지 판단하는 것도 무색하다. 각자의 상황과 조건에 맞춘 최선의 선택일 것이니 말이다.   간혹 티박스에서 멋지게 공을 날리고 그린 근처까지 잘 가서 버디나 파를 눈앞에 두고 마지막 칩샷에서 생크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더블이나 트리플을 적기도 하는데, 은퇴도 마찬가지 아닐까. 잘 가꿔온 인생과 가족이어도 은퇴를 앞두고는 여러 불편함과 위기가 도사릴 수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 불필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즐겁고 편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과 시기가 답이 아닐까. 은퇴한 한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여러 경로로 잘 소개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최인성 / 경제부 부국장중앙칼럼 은퇴 티샷 은퇴 시기 은퇴 인출 평균 은퇴

2025.10.0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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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시선] 백남준의 당부, 강익중의 실천

‘요즘처럼 한국인임이 자랑스럽게 생각될 때가 없었다’는 한인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한결같이 ‘모국 사랑으로 가슴이 뜨겁다’고 실토한다. 나도 그렇다.   지난 9월 4일 일어난 조지아 현대차 LG 에너지 솔루션 합작공장 건설현장 급습 사태를 충격 속에 지켜보며 마치 내 가족이 그 끔찍한 일을 당한 듯 분노가 차 올랐다. 특별히 미국에 사는 모든 한인이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모국 떠나 살면 모두 ‘열혈 애국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문화담당 기자로 일하던 2000년 4월,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이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 ‘The World of Nam June Paik’을 열고 있을 때 그의 뉴욕 소호 스튜디오에서 가졌던 인터뷰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당시 백남준 선생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라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어렵게 인터뷰 승인을 받았는데 며칠 앞두고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백선생의 컨디션이 갑자기 나빠져 불가피하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있다는 통보였다.     항공편에 호텔 예약까지 마치고 세계적 대가와의 만남을 들뜬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 눈 앞이 캄캄했다.   나름대로 이쪽 상황을 설명한 후 재고해 주기를 요청하고 기다렸는데 다음날 비서가 다시 전화를 주었다. “백남준 선생께서 모든 일정을 취소해도 한국신문사 기자는 만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만난 백남준 선생은 신체적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신문 기자라는 사실 만으로 너무도 다감하고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인터뷰 중에도 계속 그는 한국 소식을 궁금해 했으며 이런저런 모국의 어려움에 마음 아파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백선생이  당부했다. “미국에 살아도 한국인임을 잊지 말고, 멋있게 잘 살아요.”   2006년 73세의 나이로 이 거목 아티스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속 모든 한인에게 전하는 듯했던 ‘한국인의 정체성’ 당부가 더욱 크게 다가왔던 기억도 새롭다.   뉴욕에 거주하며 전세계에 한글을 홍보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강익중(65)씨야 말로 백선생의 당부를 실천하고 있는 작가다.   홍익대학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미국에 유학, 미술명문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그는 가로 세로 3인치 조각에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 인간의 삶과 희로애락,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담는 유명 아티스트다.   그는 독특한 작품으로 이미 세계적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1994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멀티플/다이얼로그’전을 함께 열기도 했다.   그가 지난해 맨해튼 뉴욕 한국 문화원 벽에 설치한 대형 한글 벽화(가로 26피트, 높이 72 피트)는 이미 한국을 상징하는 뉴욕의 대표적 작품이 됐다. 이 작품은 전세계 50여 나라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보내온 다양한 한글을 한 글자씩 써넣은 2만 개의 작은 조각작품으로 제작됐다.   그가 올해 한글날을 앞두고  또 하나의 근사한 한글 홍보 이벤트를 펼친다.   캠핑용 에어스트림 트레일러에 한글 조각 6000여 개를 붙이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순회하며 한글 홍보 행사를 갖는다. 9월 26일부터 10월9일까지 보스턴을 시작으로 브라운, 예일, 유펜, 프린스턴, 코넬 등을 방문한다. 그리고 한글날인 10월9일 뉴욕 문화원으로 돌아와 학생들과 함께 한글의 우수함, 철학적 의미를 나눈다.   그는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가 담긴 철학이며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 하나의 소리를 내는 한글 이야말로 조화와 균형, 연결의 의미를 품고 있어 분열된 이 시대를 치유하는 약”이라는 것이 그가 작품으로 보여주는 한글의 정의다.   올해는 유난히 강익중의 한글 사랑과 한글 순회전시가 아름답게 마음에 다가온다. 유이나 / 칼럼니스트무대와 시선 백남준 강익중 백남준 선생 설치미술가 강익중 당시 백남준

2025.10.0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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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내게 로스엔젤레스는

제2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LA라 말한다. 60평생 이곳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 정확히 35년을 거의 같은 지역에서 뱅뱅 돌았다. 내 반평생 넘는 세월이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주는 깊이를 제2의 고향이 대신 해주진 못한다. 더 좋은 기회를 찾아 고향을 떠났고 풍요로운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 맘이 맹숭맹숭한 건 뭔지 모르겠다. ‘제2’란 말이 주는 차선의 이미지 때문일까.   이곳에선 저절로 얻어지는 게 없다. 정을 쌓아가는 데도 힘써야 한다. 집안에서 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니 해찰할 일도 없고 스치는 인연도 없다. 너무나도 깔끔한 사람 사귐이 재미없다. 이리저리 얽힌 관계 속에서 사람 노릇 하기 골치 아프다는 한국 친구들의 불만조차 부럽다.   언어 문제도 크다. 자연스레 익힌 모국어와 달리 제2 외국어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영어로 치고 들어온 사람한테 스스로 주눅 들어 버린다. 담담한 표정으로 아는 척해보나 어색함이 남는다. 한국에 산다면, 하는 애먼 생각이 올라와 눈길을 먼 곳으로 돌린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이방인이라 여겨진다, 무심히 지나쳐도 아는 말이 들리는 거리를 짝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남가주는 하루 한 번도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곳이기는 하다. 이곳 한인이 타지역 동포들보다 영어가 서툴다는 말을 들었다. 해외에서 남가주에 한인이 제일 많다고 한다. 200만 넘는 미국 이민자 중 60만 정도가 남가주에서 생활하고 있단다. 한인은행과 마켓이 여러 개가 있어 골라 다니며 일을 본다. 한국 생활을 미국제도 안에서 편리하게 하고 있다. 미국 내 여러 지역에서 살아본 내 이웃은 남가주가 살기 제일 좋은 곳이라며 엄지척한다.   젊은 날, 미국에서 학위 받으려 공부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한 친구들은 귀국 후 미주 지역으로 다시 왔다. 형편 따라 이민이 된 친구도 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한 기러기 가족으로 산 친구도 있다. 자녀만이라도 미주에서 터 잡아 살기 원했다. 친구보다 남편들의 열망이 컸다. 한국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은 이곳 사는 나를 부러워하지만 나는 돌아갈 곳 따로 있는 손님 같기만 하니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면 그들은 손사래를 친다. 어디서 사나 마찬가지란다. 가족과 친지 문제로 힘든 것은 이곳 사는 사람들 생각 이상으로 크단다. 당일치기 교외 나들이라도 해야 숨통이 트인단다. 낀 세대인 우리 나이가 문제라며 화살을 세월 탓으로 돌렸다. 한결 맘이 가벼워졌다.   우리는 모두 제2의 고향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고향에서 삶이 시작됐고 제2의 고향에서는 현재를 살아내야 한다. 나는 제2의 고향 LA 땅에 발을 굳건히 딛고 있다. 이왕이면 잘 살아야겠다. 김현실 / 수필가이 아침에 로스엔젤레스 한국 친구들 한국 생활 타지역 동포들보

2025.10.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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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보답이 아닌 감사

16세기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프랑스 오롱 강에 친구와 함께 놀러 나온 한 청년이 있었다. 친구들은 술에 취한 채로 강을 건너려고 배를 탔고, 그만 배가 뒤집혀 버렸다. 물에 빠진 친구를 본 이 청년은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지만, 자신도 물에 빠져 버렸다.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마침 강둑에 있던 한 하인이 자기 주인인 줄 알고 그를 구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 청년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나를 구해 주신다면 독일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목숨을 잃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유명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헤르만 루트비히였다. 그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 청년을 기억하고, 당시 박해받던 그를 궁정 설교가로 부른다. 그리고 청년은 그와는 전혀 다른 소심했던 청년 우르시누스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다. 이 열정과 소심이 만나 프리드리히 3세의 부탁을 받고 어린아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들게 되니,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   이런 섭리 속에서 태어난 이유이리라. 문답 안에는 구원뿐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가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명시되어 있다. 바로 “감사”다. 우리말 감사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 혹은 마음”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감사는 하나님께 고마움을 보답하는 인사나 마음이다. 반면에 성경의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기쁘게 이를 따라 사는 것을 감사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부담과 짐이 아니라 즐겁게, 기꺼이 따라가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역시 자신의 신앙을 공격했던 여러 제후들 앞에서 성경을 탁자 위에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연령, 신분, 계급의 사람이든, 심지어 가장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으로부터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제게 가르쳐 준다면, 저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하고 그 신적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그 말을 이제 제국의 회의 앞에서 다시 말합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추석이다. 풍요의 시간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감사에 있다. 그렇다면 문답이 말하듯,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추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보답 감사 우리말 감사 하이델베르크 문답 선제후 프리드리히

2025.10.06. 17:52

[열린광장] 후회로 남은 유품 정리

사촌 동생이 “다 쓰레기들 이네(They are all Garbages)”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러 앉았다. 그리고 10여 전 전 내가 한 행동들이 어제일 인양 눈앞에 펼쳐졌다. 후회의 아픔이 밀려왔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정리할 걸….   우리 집안의 요셉과 같은 분인 숙부님과 숙모님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집과 양로시설과 병원을 오가시며 살아가고 계신다.   이제 때가 되었는지 자식들이 부모님을 가까이서 돌보겠다고 모시고 간다. 아들 둘이 숙부님 집에 와서 이사 준비를 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실 때 당신들께서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 이제 자식들이 부모의 거주지를 옮기고 있다. 그 살림살이를 보며 사촌동생이 한 말이 “They are all garbages”였다.   13년 전 부모님이 7주 간격을 두고 사이좋게 귀향하셨다. 텅 빈 집을 정리해야 했다. 며칠 동안 큰 박스를 옆에 두고 부모님의 흔적들을 쓰레기처럼 던져 넣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받은 모범직장인 상패도 있었고 매일 생활을 기록한 손때 묻은 수첩도 있었다. 한국에서 평생을 교직원으로 살아오신 어른의 미국 첫 직장은 맥도날드 밤 청소였다. 영업시간이 끝난 후 밤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혼자서 청소하셨다.     곧은 성격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정리한 것이 보스에게 전달되어 ‘Employee of the month’, 이달의 종업원으로 선정되어 작은 선물과 상패를 받으셨다.     사실 그 상패는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 낮과 밤을 바꾸어 살아온 아버지의 존재와 생활의 증거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버렸던 그 상패가 내 가슴에 남아 생각만 하면 아버지 모습과 겹쳐져 가슴이 꽉 메인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하며 정리했어야 했는데….   숙부님은 6.25의 화약 냄새가 없어지기 전 유학을 오셨다. 첩첩산중에서 태어나 대구라는 도시로 중학교 유학을 가고 대학은 미국으로 이어졌다.     유학시절의 미국 생활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흑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요구를 받기도 하였으니 지금 이민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행이 숙부님을 후원하신 닥터 밀러라는 분은 영향력이 있어 한국인으로는 처음 법대에 입학하도록 도와 주셨고 이후 뉴욕 변호사가 되었다.     대법관 고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고문이 되기도 하셨다. 그래서 작은집에는 공로패들과 프레임 되어있는 증서들이 많다.   한 생을 마감하며 살아온 자취들이 남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촌 동생의 말 “They are all garbages”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맥도날드 식당의 모범 종업원 상패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가 그립고 추모할 때에, 그리고 자식들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전해줄 때 귀한 유품이 될 텐데 버린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아쉽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무교병을 먹는다. 그들은 4000년 전 조상의 출애굽과 어려웠던 삶을 오늘도 잊지 않으려고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는다고 한다. 역사를 알고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고 내일을 계획하는 추진력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 집안의 어른이시고 우리 가족 모두가 이 미국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 숙부님이 저물어 가신다. 남기고 가는 증거들은 대체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다.   쓰레기는 절대 아닐 터다. 사촌 아우들이 내가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효섭 / 동서장례 대표열린광장 후회로 유품 후회로 유품 모범직장인 상패 할아버지 얘기

2025.10.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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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애국심과 현실 사이, 한인들의 딜레마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서류미비자부터 영주권자까지 강경 반이민 정책을 시행하면서 ‘시민권 취득’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동안 ‘고향 그리움, 뿌리와 정체성, 조국 사랑’ 등 정서적 이유로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했던 한인 영주권자들이 하나 둘 시민권 신청에 나서고 있다.   “시민권을 신청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선 비슷한 내적갈등이 엿보인다. 한국 등 여러 나라 교육기관이 저학년 때부터 애국심을 강조한다. 그만큼 국적을 포기하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굳이 애국심을 들이밀지 않아도 된다. 이역만리 조국과 연결된 ‘마음속 탯줄’이라는 끈을 유지하려는 마음과 애착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단일(單一) 국적주의, 시민권을 신청하는 한인이 비슷한 내적갈등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 국적법(제 15조, 외국 국적 취득에 따른 국적상실)상 ‘자진하여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는 그 외국 국적을 취득한 때에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다. 쉽게 말해 나의 조국 한국은 자국민이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내 나라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LA총영사관 민원업무 처리 현황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2500~3800여 명이 자발적 국적상실 신고를 했다. 한국 법무부가 처리한 최근 5년 동안 국적상실 건수는 매년 2만1000~2만5000명에 이른다.   2023년 기준 재외동포는 약 708만 명(외국 국적자 461만 명)이다. 지난 한 세기 사연 많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결과물이다.   재외동포청이 지난해 다산경제연구원에 의뢰한 ‘재외동포 복수국적 허용 연령 하향의 영향 분석’에 따르면 재외동포 응답자 90%가 ‘복수국적 신청연령에 해당한다면 신청하겠다’고 답했다. 복수국적 신청 이유로는 ‘한국에서 사업, 투자 등 경제활동을 위해서’가 36.5%로 가장 높았다.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꼭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특히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복수국적 허용 연령을 현재 65세에서 40세로 낮추면 한국은 연간 7조6967억원 소비증가 등 총 12조4853억 원(약 85억 달러)의 생산 효과를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한국 정치권은 복수국적 허용연령 완화 어려움으로 국민정서(권리만 행사, 복지 예산 증가 및 일자리 경쟁)를 꼽았다. 21세기 글로벌 시대, 시야를 넓혀야 한다. 한국 정부와 국민은 700만 명 이상의 해외 인적자산을 ‘집토끼’로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한인 1.5~2세들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재외동포의 조국을 향한 그리움과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로 인한 경제·문화적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복수국적 허용은 세계적 추세”라며 “인력부족 현상을 국내 저출생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면 경제가 파탄 난다. 복수국적 허용 문제가 이민정책에 포함됐고 결단을 내릴 때”라고 강조했다.   최근 제19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도 “(일제강점기) 임시정부를 돕고 독립자금을 마련한 동포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있었기에 빼앗긴 빛을 되찾았다”면서 “동포사회의 염원인 복수국적 연령 하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은 복수국적을 폭넓게 허용하며 인적자산을 활용한다. 복수국적 허용은 시대적 흐름이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정서를 핑계 삼아 미온적 자세를 고집하기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한 ‘서생적 문제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실천할 때다. 김형재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애국심 딜레마 복수국적 신청연령 외국 국적자 재외동포 복수국적

2025.10.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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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쌍화차에서 마차까지, 성공의 DNA

차(茶) 한 잔에 담소를 나누고 정을 쌓아온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면에서 1980년대 초반 문을 연 8가 옥스포드 센터의 ‘여왕봉 다방’은 한국의 다방 문화를 그리워하던 한인들에게 어쩌면 필연과도 같은 존재였다.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와 달달한 ‘다방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위로와 향수 그 자체였다. 전복죽으로 유명했던 ‘산’ 식당과 숯불집을 성공시킨 박부생 사장의 손에서 탄생한 이 공간은 한인 커뮤니티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윌셔길의 한방 찻집 ‘화선지’는 다방과는 결이 다른 멋을 선사했다. 한국 전통 인테리어 속에서 진하게 달인 쌍화차에 꿀을 타고 잣과 대추를 띄워 마시는 여유, 여름날 곶감호두말이와 곁들이는 시원한 수정과는 이민 생활의 작은 쉼표가 되어주었다. 올림픽길의 ‘다루’, 가주마켓 3층의 ‘카페 예’ 등도 떡볶이와 팥빙수, 붕어빵 같은 추억의 메뉴를 한방차와 함께 선보이며 한인들의 발길을 붙들었지만, 이제는 모두 기억 속에만 남게 됐다.   전통 찻집의 시대가 저물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대만에서 건너온 ‘보바티(Boba Tea)’였다. 1990년대 초 ‘난다랑’ 쇼핑센터에 문을 연 ‘롤리컵’을 필두로, 물담배(후카)를 곁들인 ‘보바베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한인타운 음료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이는 한인 2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비층이 형성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인들의 도전 정신은 빛을 발했다. ‘I Love Boba’는 한인타운 곳곳에 지점을 내며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시험했고, 7가와 버몬트의 ‘보바로카(Boba Loca)’는 보바티 사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글로벌 프로즌 요거트 브랜드 ‘요거트랜드(Yogurtland)’를 탄생시키는 신화를 썼다. 필립 장 대표의 작품이었다. 전 세계 350개 지점을 거느린 요거트랜드 성공의 단초가 바로 보바티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보바로카’가 떠난 자리에 들어선 ‘잇츠 보바타임(It’s Boba Time)’ 역시 100여 개에 달하는 가맹점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하며, 이 자리가 ‘성공의 명당’임을 입증했다.   최근 한인타운에는 프룻티와 흑당 버블티를 앞세운 중국계 보바숍들의 2차 공습이 거세다. ‘이팡(Yi Fang)’, ‘선라이트 티(Sunright Tea)’, ‘타이거 슈가(Tiger Sugar)’등이 연이어 문을 열었고, 특히 ‘3 Catea’는 타운 내 1등 보바숍으로 자리매김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Matcha)’의 시대가 도래했다. 8가에 문을 연 ‘다모’와 ‘스테거’, 버몬트의 ‘온이스케이프 카페’ 등 타운의 최신 핫플레이스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마차를 가장 인기 있는 메뉴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올림픽길 라성순부두 코너에 자리한 ‘Rok’에는 매일 수십 명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곧 샌게이브리얼밸리와 풀러턴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다방의 쌍화차에서 보바티를 거쳐 오늘의 마차에 이르기까지, 한인타운의 인기 음료는 시대의 흐름과 세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왔다. 하지만 그 형태가 어떻게 변하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고국의 맛을 그리워하던 1세대부터,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고 소비하는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한인타운의 차 음료 열풍은 유행을 넘어, 이민 사회의 변화하는 정체성과 끈질긴 생명력, 그리고 무엇이든 성공 신화로 만들어내는 한인 특유의 ‘DNA’가 담겨있는 문화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도 한인타운은 여전히 ‘차’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쌍화차 마차 한인타운 음료 요거트랜드 성공 한인타운 곳곳

2025.10.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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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한글날, 언어 접촉의 현장에서

한국에서 우리는 한국어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이미 수많은 언어가 들어와 있습니다. 비공식적으로도 들어와 있지만, 공식적으로도 들어와 있습니다. 많은 곳에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이 섞여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길의 표지판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작은 표지판에 네 언어가 쓰여있는 게 답답해 보이지만 친절함이나 배려의 상징으로도 보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늘 여러 언어의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간판의 경우는 훨씬 심각한 접촉의 현장입니다. 예전에는 이태원을 중심으로 보였던 영어 간판이 도시를 뒤덮은 지 오래입니다. 최근에는 급속도로 일본어 간판도 늘고 있습니다.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약해진 탓으로 보입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는 중국어 간판이 아주 많습니다. 중국인 유학생이 많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외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는 오히려 한국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때로는 한 간판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이 섞여 있기도 합니다. 언어 접촉의 현장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는 방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홈쇼핑과 같은 채널에서는 수많은 외국어와 외래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패션에 관한 프로그램에서는 외국어가 한국어보다 더 많은 듯합니다. 모르는 말투성이입니다. 화장품이나 미용에 관한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료와 관련된 드라마를 보면 아예 자막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대부분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입니다. 뉴스, 스포츠, 드라마, 피디 등의 단어가 다 순우리말이 아니니 외국어 범람의 현상은 놀랄 일도 아닐 겁니다.     케이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가끔 들어갔던 외국어 가사가 이제는 주를 이룹니다. 오히려 한국어 가사가 맛보기처럼 들어갑니다. 사실 케이팝의 정의 자체가 어렵습니다. 작곡가, 가사, 가수, 기획사 등에 한국적이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도 많고, 심지어 팀원 중에 외국인도 여럿입니다. 어쩌면 케이팝 자체가 접촉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관점을 돌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일본에 가면 지하철에서 한글 안내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리마다 한국어 안내가 있어서 종종 여기가 어디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간판에도 한글이 보입니다. 미국 등의 한인타운에는 그야말로 영어가 드뭅니다. 한동안 한국어 간판에 영어를 같이 써 달라는 현지의 요구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무슨 가게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항의였습니다.     외국인은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에 열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한글을 접합니다. 자연스러운 언어 접촉의 현장입니다. 한국어로 된 간판이 드라마에 나오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고, 케이팝에 한국어로 된 가사가 나오면 뜻을 찾아보고 따라 부릅니다. 이제 한글과 한국어는 더 이상 외국인에게 낯선 문자, 낯선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외국어가 엄청나게 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어도 세계 속으로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언어 접촉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언어 접촉은 쌍방향이고, 다방향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한 언어가 여러 언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시대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한자어가 한국과 일본, 베트남, 태국 등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근대에는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가 역으로 한국이나 중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어가 일본어나 중국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앞으로 베트남어나 태국어가 우리말 속으로 더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래서 언어 접촉의 현장은 궁금함의 현장이어야 하고 배려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과정에서 교류가 생깁니다. 혹시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배려가 생깁니다. 그래서 언어 접촉의 현장은 상호 문화교류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촉의 현장에서 문화적으로 더 성숙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현장에서 한글날 언어 접촉 한국어 영어 한글날 언어

2025.10.05. 16:40

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지구의 공전과 자전

달리는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모든 것이 기차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지만, 정작 기차에 탄 승객은 그런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다. 기차가 아무리 고속으로 달려도 편안히 앉아서 음식을 먹고 마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지구는 마치 기차 내부처럼 고요할지 몰라도 사실 지구는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저 스스로 자전도 한다. 우리는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것, 즉 한 번 자전하는 것을 하루라고 하고 중심성인 태양 주위를 한 번 도는 기간을 1년이라고 정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한 번 공전하는 동안 365.25번 자전하므로 1년은 365일이다. 그런데 소수점 이하 자투리(0.25)가 4번 모이면 하루가 되므로 네 번째 해의 2월 마지막 날에 그 하루를 추가하여 그 해를 윤년이라고 하며, 그러므로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은 2월이 29일까지 하루가 더 있어서 1년이 366일이 된다.     빨리 달리는 기차 안의 승객이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지구에 사는 우리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저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변하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지구는 동그란 공 모양이어서 지구상의 위치에 따라 자전하는 속도가 전혀 다르다. 북극점이나 남극점에서는 자전 속도가 0이지만, 가장 불룩한 적도에서는 지구의 회전 속도가 무려 시속 1,600Km를 넘는다. 참고로 마하 1은 시속 1,235km니까 음속으로 나는 전투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돈다는 말이다. 한국이 위치한 중위도 지역에서는 소리의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돈다니 갑자기 현기증이 난다. 하지만 자전 속도는 공전 속도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공전 속도는 시속 10만km를 웃도는데 이는 소리보다 무려 88배나 빠른 속도다. 그렇게 부지런히 태양 한 바퀴를 날아서 완주하는 것을 1년이라고 한다.   달과 지구, 태양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천체는 자전과 공전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지구의 위성인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태양이란 별의 행성인 지구는 자신의 형제 행성들과 함께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물론 태양도 자전하며 동시에 자기가 속한 은하수 은하의 중심을 기준으로 공전하는데 태양이 은하수를 한 번 공전하는 기간을 은하년이라고 하며 우리 시간으로 약 2억2천5백만 년 정도 될 것으로 추측한다. 참고로 태양이 은하수 주위를 공전하는 속도는 시속 80만km 정도 된다고 하니 천체 움직임의 속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잘 알다시피 태양계에는 지구를 포함하여 총 여덟 개의 행성이 있는데 그 중 금성만 자전 방향이 거꾸로다. 태양계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할 때 다른 행성들은 시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자전하는데 유독 금성은 시계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자전한다. 바꿔 말해서 금성에서는 해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 세상 모든 것에는 청개구리가 있는가 보다.   우주 공간에는 저항이 없어서 천체의 자전과 공전은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속도가 변하기도 한다. 지구의 형제 행성이라고 불리는 화성의 자전 속도는 아주 조금씩 빨라지고 있으며, 지구는 달의 인력으로 인한 조석력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늦어진다고 한다. 물론 아주 미미한 차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관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자전과 공전 지구 태양 공전 속도

2025.10.0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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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여야, 무슨 염치로 귀성객에 인사하나

━ 강성 지지층만 의식한 막장극 국회 ━ 수백만원 추석 떡값은 안 부끄럽나 ━ 추석민심 경청해 협치 복원 나서야 한가위 연휴가 시작됐다. 2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조국혁신당 서왕진 원내대표는 용산역,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서울역을 찾아 귀성객들에게 인사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서울 동대문구 노인종합복지관과 경동시장을 찾아 봉사활동을 했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경은 착잡하다. 더불어민주당은 검찰청을 없애는 정부조직법을 비롯해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설치법과 국회 증언·감정법 등 4개 쟁점법안을 강행 처리하고, 조희대 대법원장 청문회를 밀어붙이는 등 헌정 질서 위협 수준의 폭주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로 맞서면서 대구·서울에서 장외집회를 가졌으나 ‘윤 어게인’ 세력이 집중 참여하면서 중도층 확장에는 실패했다. 여야 모두 강성 지지층만을 의식했을 뿐 대다수 국민은 뒷전이었다. 그럼에도 추석이 되자 귀성객들 앞으로 달려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입법 폭주와 장외투쟁, 욕설·추태가 난무한 ‘법사위 전쟁’, ‘용산 실세 김현지’ 출석 논란으로 국회를 막장으로 만든 이들이 태연하게 귀성객 손을 잡고 명절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국민 눈에 낯설고 불편하다. 이런 와중에 국회의원 300명은 그제 추석 휴가비로 425만원씩을 챙겼다. ‘명절에 월급의 60%를 지급한다’는 공무원 수당 규정에 따른 것이지만, 민심은 곱지 않다. 현재 국회에는 70개 민생법안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계류돼 있고, 이재명 대통령이 협치 카드로 제안했던 여야민생협의체도 넉 달째 출범조차 못 하고 있다. 민생은 팽개친 채 한국 직장인 평균 월급(422만원)을 웃도는 추석 떡값을 챙기는 데엔 여야가 한몸이었다. 그나마 단 한명,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이 “무슨 낯으로 떡값을 받나”며 425만원 전액을 기부했다. 의원으로 재임해온 6년간 명절 때마다 휴가비를 꼬박꼬박 기부해왔다는 그는 “처음엔 다른 의원들이 ‘혼자만 잘났나’고 할까 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이젠 해야 할 일은 하면서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옳은 일도 욕먹을 각오 안 하면 못하는 곳이 요즘 국회다. 이러니 여론조사마다 국회가 ‘가장 불신받는 기관’ 1위에 오르는 것이다. 추석 연휴에 의원들은 지역구로 달려가 ‘명절 민심’을 듣는다. 그러나 입에 발린 얘기, 듣고 싶은 얘기만 모아 ‘민심’이라고 포장하는 일은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민주당은 김어준, 국민의힘은 고성국이 상왕이란 비아냥이 나올 만큼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휘둘려온 양당의 행태에 대다수 국민은 염증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추석만큼은 여야 모두 ‘개딸’과 ‘윤 어게인’ 세력 같은 극렬 지지층이 아니라 다수의 중도층 국민을 만나 진짜 민심을 듣기 바란다. 특히 여당 의원들의 민심 청취가 중요하다. 쓴소리를 가감 없이 대통령에게 전해야 한다. 대통령 심기만 살피다 민심 전달을 포기한 결과 집권 3년 만에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의 전철을 밟아서야 되겠는가. 나라 안팎이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한·미 정상회담 한 달이 넘도록 관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져 경제와 안보 모두 불안하다. 여당은 폭주를 멈추고 야당과 타협하며 입법을 추진하고, 사법부 흔들기 같은 위헌적 행태는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주 연속 하락세인 대통령과 당 지지도는 더 깊은 추락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힘 역시 필리버스터와 장외 투쟁만으로는 ‘내란 정당’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70개 민생 법안 처리에는 협조하고, 쟁점 법안은 여당을 설득해 독소조항을 걸러내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2025.10.03. 8:24

[구호 현장에서] UN총회, 이제 행동해야 한다

제80차 유엔총회가 ‘더 나은 함께: 평화, 개발, 인권을 위한 80년과 그 너머’라는 주제로 열렸다. 올해는 유엔 창립 80주년이자 국제 여성인권 규범인 베이징 선언 채택 3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다. 과거의 눈부신 성과를 돌아보고 밝은 미래를 설계해야 할 자리였지만, 세계 곳곳에서 불거지는 위기로 인해 회의장 안팎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올해 총회에서는 여성의 권리, 기후변화 대응, 재원 마련, 기술 활용 등 다양한 의제들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그중에서도 베이징 선언 채택 30주년을 기념하는 논의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지난 세기 동안 국제사회가 성평등과 여성 권리 확대를 위해 쌓아온 진전은 크지만, 아직도 여성과 소녀들은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사헬 지역을 비롯한 분쟁지에서는 여성과 소녀들이 희생되고 있으며, 각국에서 여성의 권리가 후퇴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성평등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임을 일깨운다. 이번 논의는 국제사회가 성평등을 ‘지난 성과’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절박한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주요 흐름은 기후위기 대응이었다. 총회와 동시에 열리는 ‘뉴욕 기후주간(Climate Week NYC)’은 이제 부속 행사가 아닌 국제 논의의 중심 무대로 자리 잡았다.   이번 기후주간에는 정부, 학계, 시민사회, 기업이 한데 모여 다양한 해법을 논의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첨단기술의 활용이 주목받았다. 데이터와 AI를 활용해 기후, 교육, 보건 등 국제개발 현장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사례들은 AI가 단순히 실험적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위기에 놓인 공동체에 새로운 해법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핵심 논의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기술 격차가 새로운 불평등을 낳지 않도록 책임 있는 관리와 규범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기술 논의를 무색하게 할 만큼, 국제개발 현장의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원조 삭감이었다. 최근 몇 년간 주요 공여국들의 해외개발원조(ODA) 예산이 대폭 줄면서, 도움이 필요한 지역의 보건소는 문을 닫고, 학교 급식이 중단돼 아이들은 학업을 포기하는 상황에 내몰리며, 전 세계 긴급구호 활동도 차질을 빚고 있다.     실제로 작년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은 전년 대비 9.4% 증가했지만,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들의 ODA 총액은 7.1% 감소했다. “ODA 삭감은 예산 축소가 아니라 생명을 지우는 일”이라는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뉴욕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이번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의 메시지는 명확하게 수렴되었다. 그것은 더 많은 선언이 아닌,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실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후위기를 늦추고, 성평등을 지키며, 기술의 혜택을 공평하게 나누고, 원조 삭감을 멈추는 것만이 무너져가는 다자주의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번 총회는 여성의 권리, 기후변화 대응, 재원 마련, 기술 활용 등 복합적인 글로벌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대’와 ‘행동’이 절실함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뉴욕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호소처럼, 각국 정부의 책임 있는 약속과 국제기구의 개혁, 그리고 시민사회의 참여가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는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최미나 / 굿네이버스 USA 사무총장구호 현장에서 총회 행동 성평등과 여성 국제 여성인권 권리 기후변화

2025.10.02.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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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

‘숲 속의 두 갈래 길(The Road Not Taken)’이란 명시를 남긴 로버트 프로스트의 다른 시에 ‘돌담 손질(Mending Wall)’이 있다. 이 시에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 Makes Good Neighbors)’ 라는 말이 나온다.     시에 등장하는 이웃은 소를 키우고 있었다. 소의 주인이 누군지, 소들이 서로 놀다가 섞이고 달아나다 보면 구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이웃은 울타리를 만들어 자기 소를 보호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은 더는 소를 키우지 않았다. 그래도 울타리는 허물지 않았다. 두 집 사이에는 여전히 경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다니엘 디포우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혼자 외딴 섬에 고립된 주인공은 큰 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동물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안에 큰 벽을 쌓았다. 섬에는 사람은 없었으나 야생동물은 살았다. 그는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잡아서 먹었다.   불과 150~200년 전만 해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국경 개념이 약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패전국의 땅을 빼앗아 말뚝을 막고는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가인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에 따르면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을 빼앗았다. 전쟁에서 이긴 후 백인 지배계급은 허허벌판에 말뚝을 박고는 자기 땅이라고 우겼고, 나중에 자기들끼리 만든 법으로 이를 합법화했다.     지주들은 오클라호마, 서부 텍사스 등지에서 이주 노동자를 모아 캘리포니아 농장에 데려다 저임금으로 착취했다. 서부 개척 시대,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포도, 목화 농장은 불쌍한 노동자들이 흘린 ‘분노의 눈물’로 재배한 것이었다. 요즘 같이 외국 노동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가뭄으로 농토를 잃은 동족을 울린 수치스러운 노동력 착취였다. 미국은 당시 군사적 위협으로 여러 섬나라를 합병하고 루이지애나, 알래스카를 각각 프랑스와 러시아로부터 사들였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 연설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허무세요” 하고 선언했다. 이후 소련연방 사이의 벽이 하나 둘 무너지고 소련연방은 붕괴하였다. 세계사에 남는 ‘가장 큰 벽’이 없어진 것이다.   프로스트는 그의 시에서 사람과 사람, 이웃 사이의 장벽은 임의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은유하고 있다. 자연은 사람이 만드는 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벽을 높이 쌓고 허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철조망을 넘어온 사람들은 검거돼 낯설고 무서운 나라로 추방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행정부 시절, 너무 많이 들어왔다. 뉴저지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밀입국했고 그중에는 범죄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두 나라 간의 울타리는 튼튼하지 못하고 구멍이 많았다. 좋은 울타리가 아니었다. 두 이웃 나라가 사이좋게 만든 좋은 울타리였다면 좋은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울타리(경계)는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남의 사생활을 침범하고, 개인 정보를 훔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없이 벽을 쌓고 이중 삼중으로 보호망을 구축해야 한다. 울타리는 단단한가. 자주 점검해 구멍이 발견되면 보수해야 한다. 울타리가 필요 없는 시대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최복림 / 시인열린광장 울타리 이웃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사람 이웃 캘리포니아 농장

2025.10.0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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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한가위 보름달에 비는 소원

올해는 10월6일이 추석이다. 추석은 글자 그대로 가을(秋) 저녁(夕)이다. 밝고 둥근 보름달이 뜨는 가을 저녁…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와 감사의 계절, 온 가족이 고향집에 모여 둘러앉아 맛난 음식을 즐기는 행복한 계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윗날만 같아라.”   추석의 최고 풍경은 뭐니 뭐니 해도 가을 밤하늘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다. 한가위 보름달은 고향에도 뜨고, 타향땅 이민살이 골목길도 밝게 비춰준다. 타향살이 나그네 젖은 눈에는 보름달이 더 크고 아득해 보인다. 보름달은 바로 고향생각으로 이어지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연결된다. 태양이 아버지라면, 달님은 어머니다. 그런 마음을 담은 시나 노래가 아프게 가슴을 친다.   “현해탄(태평양) 파도 위에 비친 저 달아, 찢어진 문틈으로 어머님 얼굴에도 비추어 다오” -남일해 노래 〈이국땅〉의 한 구절   예로부터 달님은 신화와 문학예술의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달에 관한 문학작품은 동서고금을 통해 무수하게 많다. 그만큼 달님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뜻이다.   달님 관련 문학의 예를 들자면, 한국의 고전문학를 비롯해 시조나 동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 등등 세계 문학까지 실로 다양하다.   우리 고전에도 달님을 주제로 한 훌륭한 문학작품이 많다. 바로 떠오르는 것이 〈정읍사〉 〈월인천강지곡〉 같은 작품이다.   〈정읍사(井邑詞)〉는 삼국 시대의 고대가요로,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문학이며, 한글로 표기된 노래 중 가장 오래된 노래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전북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 불려서, 조선 성종 대에 〈악학궤범〉에 기록되었으며, 우리 음악 최고의 경지로 일컬어지는 〈수제천〉의 바탕이 된 가요이기도 하다.   “달님이시여, 높이금 돋으사/ 아아, 멀리금 비치시라/ 어기야 어강도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노래다.     정읍에 한 장사하는 사람이 행상을 떠난 뒤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산 위 바위에 올라가 남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달(빛)에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기다리는 아내는 망부석이 되었다고 전한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 아내 소헌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하여 직접 지으신 찬불가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짓고 활자로 간행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월인천강’이라는 말은 마치 달님이 천(千)개의 강에 비친 것과 같이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푼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업적인 달 여행을 눈앞에 둔 과학시대를 살고 있다. 미국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인간의 발자국을 찍은 것이 1969년 7월이었다. 그 후로도 과학은 눈부시게 발달하여 우주개발 선진국들의 행성 탐사 우주선은 태양계 맨 끝까지 날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를 노래하고, 달님을 향해 소원을 빈다. 우리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동심과 꿈, 희망, 그리움의 달님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나저나, 한가위 보름달을 우러르며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데, 무슨 소원을 빌까? 시인 이해인 수녀는 이렇게 기도한다.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이해인 〈달빛 기도〉 중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렇게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가위 보름달 한가위 보름달 달님 관련 유인우주선 아폴로

2025.10.02.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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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칼럼] 미국과 한국의 주식시장

최근 한국의 한 신문사가 주최한 재테크쇼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 행사에서 ‘투자 고수’들은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 인터넷, 스테이블코인 등을 유망 분야로 꼽았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새 정부 정책을 고려한 전망과 투자 전략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언은 현시점에 집중한 단기 투자에 불과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취업난에 시달리면서 빚을 내서라도 주식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사고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매매 행위가 곧 ‘투자’는 아니다. 방향을 맞히면 수익을 내지만 틀리면 큰 손실을 보는 이런 행위는 사실상 도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식 시장을 도박판처럼 만든 책임은 개인 투자자에게만 있지 않다. 금융회사들도 “누구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며 투자 열기를 부추긴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장 전망과 전략이 쏟아져 나온다.   2020년 팬데믹 초기, 주식 투자 열풍이 한창일 때 한 전문가는 “외국 기업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옆집 자식보다 내 자식에게 투자하라”며 한국 주식 투자를 강력히 권했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그럴듯한 조언이었지만, 한국 주식 시장의 수익률이 장기적으로 부진하다는 지적에는 “국내 투자자들이 한국에 투자하지 않아 시장이 크지 않았다. 투자자들의 잘못”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개인이 주식에 투자하는 이유는 시장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얻기 위해서다.   한국 주식 시장은 전 세계 시가총액의 약 1.3%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개인 투자자들은 삼성전자 등 일부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위험한 방식을 택한다. 반면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하는 미국 주식은 장기 통계의 신뢰도가 높고, 위험 분산 효과도 크다.   수익률 통계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KOSPI의 2023년, 2024년 연간 수익률은 각각 18.73%, -9.63%다. 반면 미국 S&P 500은 같은 기간 각각 24.9%, 26.51%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연평균 수익률 역시 한국 5.98%에 그쳤지만 미국은 12.84%다.   양국 시장의 수익률 차이는 무려 7%포인트다. 이는 10년마다 투자금이 두 배로 불어나는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실제로 한 기사 제목처럼 “코스피 3000 넘었지만, 수익률은 미 주식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 현실이다.   한국 주식 시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대박’을 노리는 열기로 가득하다. 이런 단기 매매는 급등락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와 같다. 순간의 짜릿한 재미는 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돈을 벌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반대로 올바른 주식 투자는 ‘사업을 키운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인내와 신중함을 바탕으로 한 장기 투자는 부를 만들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깝다.     실제로 ‘투자 고수’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가 대부분은 주식 시장에서 수익을 내기보다는 일반 투자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번다. 정말 고수라면 굳이 대중에게 비법을 공유하지 않는다. 빠른 돈을 좇는 투기적 욕심은 언젠가 반드시 좌절로 끝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인이 올바른 투자로 부를 축적해야 가정이 살고, 가정이 안정돼야 소비가 늘며, 소비가 늘어나야 기업이 성장하고, 기업이 발전해야 국가가 부강해진다. 건전한 투자가 경제의 근본임을 잊지 말자. 이명덕 / 경영공학 박사재정 칼럼 미국 주식시장 한국 주식 개인 투자자들 국내 투자자들

2025.10.0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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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하루 1회 도포’는 무슨 뜻?

손가락에 가벼운 상처를 입어 연고를 발랐다. 겉에 적힌 설명서를 보니 “1일 1~2회 적당량 환부에 도포”라고 돼 있다. ‘환부’는 알겠는데 ‘도포’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의약품에는 “경구 투여 금지”라는 표기가 있는 것도 있다. ‘경구’가 무슨 뜻인지 전혀 와닿지 않는다. 진통제 등 알약에는 ‘서방정’이라 표기된 것도 볼 수 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다.   ‘도포(塗布)’는 약 등을 겉에 바르는 것을 뜻하는 한자어다. ‘경구(經口)’는 약이나 세균 등이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서방정(徐放錠)’은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는 알약이란 뜻이다. 영어의 ER(extended release)에 해당하는 내용을 번역하면서 일본에서 만든 말이 ‘서방정’이라고 한다.   약품에는 ‘성상’이란 표기도 보인다. ‘성상(性狀)’이란 사물의 성질과 형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상은 흰색 장방형’이라고 돼 있는 것은 모양이 흰색 직사각형이란 의미다. 연고제엔 ‘소양증’이라 표기된 것도 있다. 가려운 증상을 뜻하는 한자어다.   어느 나라나 의학용어는 어렵다. 우리 의학계와 국립국어원이 어려운 용어를 쉽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의학용어의 특성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용어들은 의학이나 의약 전문가들만이 사용하는 낱말이 아니다. 일반인이 약품을 사용할 때 종종 접하는 용어이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 우리말 바루기 도포 경구 투여 흰색 장방형 적당량 환부

2025.10.02. 18:45

[커뮤니티 액션] 서류미비자를 위한 사랑의 편지

최근 ‘서류미비전문인들(Undocuprofessionals)’이란 단체에서 ‘단속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서류미비 이민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란 제목의 글을 보냈다.   “당신은 폭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느리게 혹은 빠르게, 드러나게 혹은 보이지 않게. 당신이 이 나라를 일구면서도 평가절하되는 그 폭력. 당신을 노동력과 부품 이상의 존재로 보지 않는 그 폭력. 당신을 범죄자라고 낙인 찍고, 매일 비인간적으로 대하려는 그 폭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매일 깨어나 일하고, 사랑하고, 타인을 돌보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당신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꿈을 위해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을 키우고, 어르신들을 돌보며, 집과 일터를 세우고,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세상이 하루하루를 더 힘겹게 만들어도 여전히 자리를 지킵니다. 그것은 이 나라가 결코 갚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체제는 당신이 지치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여기 속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 이곳에 속해 있습니다.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비자나 종이 한장, 혹은 법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간성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폭풍 속에서, 당신이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지키세요. 영혼을 보호하세요. 정신을 쉬게 하세요. 그리고 몸이 숨 쉴 수 있도록 하세요. 당신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단순한 허용이 아니라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단순한 시민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짐이 아닙니다. 당신은 숫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불법’이 아닙니다. 당신은 범죄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인간일 뿐이며, 그 자체로 깊이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지금, 스스로를 돌보는 데 더 의식하고 정성을 기울여주세요.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곳에 속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의 기쁨을 지키세요. 당신의 빛을 지키세요. 당신을 단지 노동자나 기록으로 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봐주는 이들과 함께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어떤 정부도 빼앗을 수 없음을 기억하세요. 당신은 이곳에도 그리고 어디에나 속해 있는 존재입니다.”   온갖 증오와 차별, 불의에 지친 이민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바로 이 순간에도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은 정부 셧다운의 이유가 민주당이 서류미비자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이민자들을 공격했다. 서류미비자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연방정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민주당은 이를 추진하지도 않는다. 삭감된 미국 시민들의 의료 혜택을 복원하기 위해 맞섰을 뿐이다. 거짓말과 위선으로 가득 찬,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언젠가는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가까운 앞날은 아직 어둡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고, 격려하고, 힘을 북돋워 주고, 서로를 위해 나서주는 한인사회가 되기 바란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서류미비자 사랑 연방정부 의료혜택 서류미비 이민자들 의료 혜택

2025.10.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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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장부 속 ‘A’, 그리고 오헤어 공항

영화 언터처블(Untouchable)에는 알카포네가 배신한 부하의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 하루는 알카포네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부하 세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부하들은 두목이 아직도 자신들을 신임하고 있다고 믿고, 배부르게 먹고 술도 거나하게 취했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보니, 그들은 모두 의자에 꽁꽁 묶여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온통 알카포네의 부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중에 발견된 세 사람의 시체는 모든 뼈가 마디마디 전부 부서져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잔인했던 알카포네는 이탈리아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의 뒷골목 건달로 출발했다. 스물한 살 무렵 시카고로 건너와 존 토리오가 이끄는 갱단에 들어간 그는, 토리오의 신임을 얻으며 세력을 넓혔다. 토리오가 습격을 받아 불구가 되면서 은퇴하자, 카포네는 자연스럽게 조직의 두목이 되었다. 때마침 미국 사회에는 금주령이 시행 중이었고, 그는 밀주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겉으로는 “중고 가구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술•도박•매춘을 아우르는 거대한 범죄 제국의 지배자였다.   당시 시카고 경찰의 절반은 카포네에게 매수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의 보복이 두려워 그를 손대지 못했다. 살인과 폭력으로는 그를 법정에 세우기 어려웠다. 결국 연방정부가 찾은 돌파구는 소득세였다. 카포네는 엄청난 돈을 벌었음에도 세금을 내기는커녕 세금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그의 수입만 입증하면 됐고, 이를 위해서는 내부자의 도움과 장부 기록이 필요했다.   바로 이때 카포네 곁에 있던 에디 오헤어(Edward Joseph O’Hare)가 비밀리에 연방수사국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직의 장부와 내부 정보를 FBI에 제공했다. 특히 장부에는 ‘A’ 또는 ‘AL’로 표시된 항목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오헤어의 증언과 내부 자료 덕분에 이 기호가 곧 알카포네 본인을 지칭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결정적 단서는 카포네가 실제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더 나아가, 카포네가 배심원들을 돈과 협박으로 매수했다는 사실도 오헤어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알게 된 제임스 윌커슨 판사는 재판 당일 배심원단 전체를 다른 법정의 배심원들과 전격 교체하는 묘수를 부렸다. 결국 카포네는 1931년 유죄 판결을 받고 11년형에 처해졌다. 카포네는 처음에는 감옥에서도 편의를 누렸지만, 알카트래즈로 이감되면서 모든 특권을 잃었다. 매독이 뇌까지 침범해 치매 증세를 보였고, 결국 48세의 나이로 병마 속에 생을 마쳤다.   한편, 카포네 몰락의 숨은 주역이었던 에디 오헤어는 1939년 시카고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신의 대가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이름도 같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H. 오헤어(Edward Henry O’Hare)가 그 명성을 이어간다. 아들 오헤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해 수많은 동료의 목숨을 구하고, 해군 항공대 최초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 시카고의 오헤어 국제공항은 바로 이, 아들 오헤어의 희생과 용맹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오헤어 에디 오헤어 알카포네 본인 카포네 몰락

2025.10.0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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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화재 수습 중에 속속 드러나는 황당한 전자정부 실상

━ 공무원 12만 명 사용 G드라이브는 백업도 없어 ━ 사용 기한 10년 지난 배터리 교체 권고도 묵살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전산실에서 화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복구는 여전히 더디다. 어제(2일) 오후 기준으로 전자정부 업무 시스템 647개 중 115개(약 18%)만 복구됐다. 워낙 방대한 피해 규모를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늦다. 유엔이 칭찬한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정부라고 홍보해 왔지만, 이번에 드러난 것은 기본적인 안전 관리부터 부실한 외화내빈 ‘IT 강국’의 민낯이다. 가장 큰 문제는 데이터 백업(복사·저장) 부실과 시스템 이중화(중복 구축) 부재다. 이중화 적용 시스템은 47개(7.2%)뿐이고, 248개(38%)는 이중화와 백업이 모두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중앙부처 공무원 12만5000여 명이 사용해 온 업무용 클라우드(온라인 저장 장치)인 ‘G드라이브’가 백업조차 없이 전소됐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 말 기준 G드라이브에 쌓인 858테라바이트(TB)의 방대한 자료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정부는 G드라이브를 ‘다’급 시스템으로 분류해 외부 백업을 의무화하지 않았고, 저성능·저가형 장비로만 운용했다. 2018년 이후 업무 자료를 개별 PC가 아니라 반드시 G드라이브에 저장하도록 지침을 내린 상황이어서 피해는 치명적이다. 소속 공무원 전원이 G드라이브를 사용해 온 인사혁신처는 부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왕조실록은 다섯 곳에 나눠 보관했는데, 21세기 디지털 정부가 그보다도 못한 백업 체계를 운영해 온 셈이다. IT업계에서는 ‘3-2-1’ 백업이라는 원칙이 있다고 한다. 사본 3개, 다른 저장장치 2개, 외부 1곳 분산 보관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백업을 일부 중요 시스템에만 적용하는 접근 자체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보 인프라 관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이 밖에도 인재(人災)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 수두룩하다. 배터리 권장 사용 기한(10년)의 교체 권고를 묵살한 사실도 드러났고, 배터리 이전 작업에 영세 통신설비 업체와 아르바이트생이 투입됐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고도의 안전이 요구되는 작업을 비전문 업체와 비숙련 인력에 맡겼다면 명백한 안전 불감증이다. 무정전 전원장치(UPS)와 리튬이온 배터리 이전 과정에서 전기공사 안전 수칙을 어긴 정황도 포착됐다. 경찰은 당시 작업자들이 안전 규정을 제대로 지켰는지 등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 당초 정부는 화재 직후 4주 이내 복구를 공언했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이행이 불투명하다. 추석 연휴 동안 화장시설 예약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서비스 불편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긴 연휴 기간을 활용해 복구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국민 불편과 불안을 최소화해야 한다.

2025.10.02.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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