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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별빛은 사랑을 싣고

칼 세이건은 광활한 우주에 인류만이 유일한 생명체라면 창조주는 엄청난 공간을 낭비한 것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우주는 너무 넓어서 한 항성계에 문명이 생기고 사라지는 동안 그 거리 때문에 다른 항성계의 문명을 만날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은하에는 약 4천억 개나 되는 많은 별이 있다. 그 중 우리가 속한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 빛조차 약 4년 반이나 걸린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에 사는 친구와 간단한 카톡을 주고받는데 9년 걸린다는 말이다. 지금 태양계를 막 빠져나가고 있는 보이저 1호에게 NASA에서 어떤 명령을 내리면 전파가 약 하루를 날아 보이저호에 도착한다. 빛(전파)이 하루 걸려 가는 거리를 보이저 1호는 지난 50여 년을 쉬지 않고 날았다. 이것이 우리 과학기술의 현주소다.   우주의 규모로 미루어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보다 월등히 발달한 문명을 이룬 존재에게 우리를 찾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망망대해에서 조난하여 무인도에서 넋 놓고 구조를 기다리기보다 불을 피워 연기를 올리든지 모래밭에 돌무더기로 글자를 써서 멀리서도 잘 보이게 하면 혹시 근처를 지나는 비행기나 선박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9세기 초 우리가 화성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때 실제로 그런 계획을 세운 과학자도 있었다. 사막에 아주 긴 도랑을 파서 기름으로 채우고 불을 피운다거나 거울로 햇빛을 반사해서 화성인들이 우리의 존재를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벌써 200년이 지났지만 무심한 화성인에게서 아직도 연락이 없다. 반세기 전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를 발사할 때 지구와 인류를 소개하는 금속판을 실어 보냈지만, 꿩 구워 먹은 소식이다.   우주에는 우리 말고도 수많은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생명이 시작하여 문명을 이룰 정도로 진화하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우주에는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별이 있다. 그 중 지적 생명체를 품은 별은 확률적으로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문제는 거리다. 서로 떨어진 거리를 극복하는데 한 문명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우주 최대 속도인 광속으로 날아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혹시 저쪽에서도 우리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기원한 인류 조상은 메소포타미아를 지난 후 한 무리는 지중해를 따라 유럽 쪽으로 가고 다른 한 패는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는 땅으로 연결되었던 베링 해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며 헤어졌다. 그 후 기온의 변화로 두 대륙을 잇던 길이 끊어졌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유럽에 정착한 인류는 정복자가 되어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던 형제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혹시 오래 전에 헤어진 우리의 다른 짝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태초부터 우리는 하늘을 동경해왔는데 귀소 본능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얼마 전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쩌면 오래 전에 흩어진 우리도 별빛은 사랑을 싣고 다시 만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작가)         박종진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별빛 사랑 지적 생명체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대륙

2024-12-20

[사설] 탄핵 혼란, 외교·안보 진공 상태부터 해소해야

━ 계엄·탄핵 인한 경제·외교·안보 3중 후폭풍 현실로 ━ 트럼프 행정부 접근, 기업인 네트워크 적극 활용을 ━ 여야 협의로 새 국방장관 임명하는 방안 검토해야 12·3 비상계엄 사태의 후폭풍이 거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9일 “올해 경제 성장률이 11월 전망치인 2.2%보다 낮은 2.1%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을 자처한다던 윤석열 대통령이 초래한 정치 리스크에 가뜩이나 어렵던 경제가 휘청거리는 모양새다. 문제는 위기가 경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급변하는 대외 환경에 대처해야 할 한국 외교는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라는 의사결정 구조의 한계 속에서 사실상 공백 상태다. 정부와 여당이 어제 국정안정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효율적인 대미 접촉을 추진키로 했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한 달 뒤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측이 한국을 ‘패싱’할 것이라는 우려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6일(현지시간)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에 대해 언급했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을 각각 “나와 잘 지내는 사람”, “내 친구였고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와의 회동 가능성엔 “그들(일본)이 원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한국이나 윤 대통령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 트럼프가 최근 중국과 일본의 차기 대사를 지명했지만, 주한 미 대사 후보는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지난 18일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로 한미 간 소통의 동력이 약화한 것은 사실”이라며 “회복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여름부터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문이 이어졌지만, 정부의 소극적 대응에 탄핵 정국까지 겹쳐 사실상 손을 놓은 실정이다. 외교 당국은 트럼프 당선인과 교감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일본을 참고하길 바란다. 일본은 트럼프와 특별 관계였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를 내세워 취임 전 일본 총리를 만나지 않겠다던 트럼프의 마음을 돌렸다. 손정의 소트프뱅크 회장은 1000억 달러(약 145조원)의 대미 투자 계획 선물을 들고 트럼프의 기자 회견장에 배석했다. 우리 정부도 기업인·경제인 등 미국의 새 행정부와 선이 닿는 네트워크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계엄 모의 및 실행 과정에서 흐트러진 군심을 수습하고 안보 태세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군의 구심점인 국방 장관부터 조속히 임명해야 한다. 김용현 전 국방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특수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방첩사령관 등 비상계엄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 군 수뇌부가 줄줄이 구속되는 바람에 현재 우리 군은 ‘직무 대행군’이란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급박한 안보 상황이 터졌을 경우 지휘 체계의 혼란이 현실화할 우려마저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 대행은 어제 “한 치의 안보 공백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보는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권한대행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8일 첫 회동에서 국방 장관의 조기 임명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여야가 조속히 협의해 군 내외로부터 두루 신망받는 인물을 찾아 장관 후보자로 정하기 바란다. 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시한부 내지 ‘땜질성’이 아니라 새 장관이 최소한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라도 소신있게 일할 수 있도록 충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필요하다. 안보 문제만이라도 여야가 협치한다면 탄핵으로 인한 국민들의 안보 불안을 달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안보는 최후의 보루다.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한다.

2024-12-20

[우리말 바루기] ‘옛부터’ ‘예부터’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에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쌓인 치료법도 많지만 잘못 알려진 것들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옛부터 시골에서는 벌에 쏘이면 민간요법으로 쏘인 부분에 된장을 바르기도 한다” “예부터 화상을 입었을 때는 소주를 부어 열을 빼곤 했다” 등이 잘못 알려진 대표적 민간요법이다.   지나간 과거를 가리킬 때 ‘예’와 ‘옛’ 중 어떤 걸 써야 할지 헷갈린다는 이가 많다. ‘예로부터’를 ‘옛로부터’라고 쓰진 않지만, ‘~부터’가 바로 뒤에 올 경우 ‘예부터’라고 써야 할지, ‘옛부터’라고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예’와 ‘옛’은 지나간 과거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품사가 다르므로 주의해 써야 한다. ‘예’는 아주 먼 과거를 뜻하는 명사이므로 조사나 접사와 결합할 수 있다. ‘옛’은 ‘지나간 때의’를 의미하는 관형사로, 뒤에 오는 체언(명사·대명사·수사)의 내용을 꾸며 주는 역할을 한다.   ‘~부터’는 어떤 일이나 상태 등에 관련된 범위의 시작임을 나타내는 보조사이므로 명사 뒤에 붙일 수 있다. 따라서 관형사인 ‘옛’이 아닌 명사 ‘예’와 결합해 ‘예부터’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예스러운’과 ‘옛스러운’ 중 올바른 표현은 무엇일까. ‘~스러운’은 ‘그러한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스럽다’를 활용한 표현이므로, 이 역시 명사와 결합할 수 있다. 따라서 ‘옛스러운’이 아닌 ‘예스러운’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옛’은 ‘옛 추억’ ‘옛 친구’ 등과 같이 뒤에 체언이 올 때 쓸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우리 조상들

2024-12-19

[열린광장] 메리 크리스마스 vs 해피 할러데이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부활절은 3대 명절이다. 그중에 크리스마스 축일 성격에 대해선 그 주장이 둘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인 및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측에선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예수 탄생 축일로 지키고 있지만, ‘다양성’ 및 ‘포용성’을 중시하는 ‘리버럴’(liberal)한 측에선 ‘문화적 휴일’(Cultural Holiday)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미국의 설문 조사 기관 NWR이 성인 1000명에게  ‘당신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축일인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36%는 ‘예’, 43%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현재 미국인 약 절반 정도가 크리스마스를 기독교적 축일로 보지않고, 단순히 국가 공휴일로 생각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생일로 지키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주장도 확산하고 있다. 한 크리스천 월간지에서 설문 조사한 결과를 게재했는데, 성인 1000 명 중 46%는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생일로 지키는 것은 ‘부적합하다’(irrelevant)라고 대답했으며, 51%는 ‘적합하다’(relevant)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미국인의 약 절반 정도가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 축일로 지키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Merry Christmas’ 인사보다 ‘Happy Holiday’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면 왜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 축일로 지키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위의 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크리스마스를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 연관 짓지 않고 단순한 국가 명절로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2월25일을 예수의 생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점점 많아져 가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12월25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면 여러 가지 이유로 2000년 전,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 축일은 없었고, 그래서 예수 생일은 잊혀 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원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칙령(The Edict of Milano)’ 이후,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자리 잡게 되자, 자연히 예수의 탄생일을 국가적 축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 등에서는 태양이 12월25일에 다시 태어나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고 보고, 그날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예수가 태양에 비유되면서 자연히 이날이 예수의 탄생 축일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로마문화 흡수 혹은 ‘토착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12월25일 크리스마스’ 축일이 역사적으로, 로마에서 시작되기 전부터 교회에서 시작된 전통이라는 근거나 주장들도 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가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2월25일,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부적합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생일을 모르거나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1년 중 의미 있는 어떤 축일을 자기 생일로 정하고 그날을 생일로 기념한다면 그것이 부적절한 것일까?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지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크리스마스는 전통적으로 예수 탄생 축일이다. 그날이 역사적으로 예수 탄생일이 아니라고 해도, 1700여 년 동안 교회와 사람들이 예수 탄생일로 지켜온 날이다.   성탄 계절을 맞이하여, 그 예수의 ‘낮은 자리에 오심’, ‘섬김’, ‘희생,’ ‘사랑’, ‘평화’의 크리스마스 정신이 더욱 널리 전파되기를 염원한다.  김택규 / 전 감신대 객원교수열린광장 크리스마스 할러데이 예수 탄생일 크리스마스 축일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2024-12-19

[문화산책]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 열풍

2024년에도 K-문화의 뜨거운 열기가 이어져 우리를 자랑스럽게 했다. 미국사회에서 그 열기가 시작된 것은 K-팝, 영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였다.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파급력도 클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적 스토리나 정서는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 그 배경에는 〈미나리〉 〈기생충〉 〈파친코〉 〈오징어게임〉 등이 있다. 이 작품들 덕분에 한국어 영화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2024년 할리우드에서 큰 관심을 모은 K-문화 콘텐츠의 대표적 작품은 드라마 〈성난 사람들〉과 저예산 독립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였다.   이성진 감독, 스티븐 연 주연의 〈성난 사람들(BEEF)〉은 골든 글로브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3관왕에 이어,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무려 8개 부문을 휩쓸며 돌풍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 화제를 모았다. 특히 스티븐 연은 이외에도 미국 비평가협회상, 미국 배우조합상에서도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한국계 이민자의 삶에 밴 현대인의 고독과 분노를 그려내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낸” 드라마가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다.   한편,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은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의 데뷔작이다.   전생(前生)의 인연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베를린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영국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어서 2024 필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고, 미국 독립영화상인 고섬 어워즈 작품상을 받았다. 젊은 여자 감독의 첫 작품이 이렇게 큰 주목을 받은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다.   이와 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열풍을 반영하여,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윤여정 회고전〉을 마련해 〈미나리〉 〈화녀〉 등 대표작 8편을 상영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코너를 마련해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고 있는 영화인들을 집중 조명했다.   할리우드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숨은 한인 인재들도 기대를 모은다.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K-뮤지컬의 미국 무대 진출도 주목된다. 대표적인 예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위대한 개츠비〉다. 한국의 제작사 오디컴퍼니가 현지 제작한 이 작품의 의상을 담당한 린다 조는 토니상 의상상을 수상했다. 올해 토니상에서는 하나 김이 〈아웃사이더〉로 조명상을 받았다.   남가주에서는 한국에서 제작된 뮤지컬 〈프리다〉가 USC 빙 시어터에서 공연되어 화제를 모았다.   한편, 남가주 한인 연극계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뮤지컬 도산〉이 윌셔이벨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선교극단 이즈키엘의 성탄공연이 있었다. 한편, 〈모임극회〉는 50주년을 맞아 자축행사를 가졌다.   K-콘텐츠의 세계적 위상으로 한국인이 세계 문화 속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아카데미상, 에미상, 골든글로브, 토니상 등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최근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열풍은 미국에 사는 한인인 우리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심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이민자의 정체성을 담아낸 화제의 작품들은 이민 온 한인들의 삶을 역사적 맥락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열린 시각을 통해 백인 주류사회의 한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성난 사람들〉의 이성진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감동은 우리 안에 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코리안 콘텐츠 문화 콘텐츠 한국계 이민자 어워즈 작품상

2024-12-19

[오픈 업] 결혼·이혼·졸혼·사후 이혼

'아이고, 진저리난다! 이 인간 죽고 나서도 애먹이네!’   중년에 남편을 잃은 먼 친척이 있다. 그 친척은 여성이다. 사연인즉, 남편이 소천하고 나서도, 시집 식구들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처럼  명절, 제사 때 몰려와서(!), 명절 상 차리라 하고, 기일에는 제사상에 ‘콩 놔라, 팥 놓아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시동생, 시누이들은 환갑을 넘은 나이임에도, 죽은 형제의 부동산이 얼마나 되는지 과도한 관심을 두고 간섭하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 같다고 했다. 슬퍼할 틈이 없는 그녀다. 죽음 준비 없이 죽은 남편이, 청산하지 못하고 남긴 빚을 감당하여야 한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부부 중에 한쪽이 죽은 후에 이혼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사후 이혼, 다른 말로 ‘인척(姻族) 관계 종료 신고’ 추세는 2012년부터 작년까지, 11년 사이에 약 43%나 증가했다고 한다.   죽었는데, 왜 이혼이 필요할까?   바로 나의 친척이 겪는 것 같은 어려움을 배제하려는 뜻으로 법제화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근래 세대 차이와 세대 간 인식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면서 필요한 개혁을 앞서가며 시행한 것 같다. 일본 민법(728조)에 따르면 생존한 배우자가 ‘사후 이혼 신고서’를 관공서에 제출하면 인척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다. 죽은 후 일정 기간에 서류 제출을 해야 한다는 시간제한은 없고, 배우자 부모의 동의도 필요 없다고 한다. 일반적 이혼과 달리 배우자의 유산 상속이나 유족연금 수급에도 배우자 부모에게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홀아비보다 과부가 많은 것은 동양, 서양이 비슷하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후 이혼 신청자는 대부분 여성이고, 일반적으로 가족 봉양은 여성에게 요구되므로, 배우자 가족에 대한 봉양 부담이 과부에게 돌아올 수 있다. 한국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졸혼은 불문율로 받아들이는 상황이고, 이혼은 법적으로 허락하지만, ‘사후 이혼’이라는 법은 아직 없다.     미국에 살면서도 ‘사후 이혼’이라는 단어조차 접한 적이 없다. 이혼 중에 상대편이 죽으면, 유언 검인 법원으로 케이스가 넘겨지는 예는 있다.   이 친척이 겪고 있는 ‘일’은 남의 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다. 이 ‘일’이란 한 종목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 아니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가정할 때, 살아서나 죽음의 산을 넘고 난 후에라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할 중요한 이슈이다. 기간 내에 플랜 해 둘 과제이다. 죽음의 준비, 나와, 내 가정의 영역에 대한 정의, 이에 따른 의무, 지켜야 할 권리 내지는 예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이혼을 생각해 본다. 미국건강센터(US National Center for Health) 통계에 의하면 일 년에 약 450만 명이 결혼하고, 이의 42~53% 정도가 언젠가는 이혼으로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 통계는 정확한 방법으로 축출하지 못했다는 주석이 붙어 있다. 데이터 집계 방법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명은 너무 길어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미국인들의 이혼율이 세계 10위 안에 들지 않는 것이 좀 의아했다. 세계 인구 리뷰(World Population Review)는 조지아, 몰도비아 나라의 이혼율이 제일 높고, 스리랑카, 과테말라, 베트남이 제일 낮다고 보고했다. 나의 예측과 무척 달랐다.   흥미롭게도 나라별 이혼율은 성불평등 지수(GII·Gender Inequality Index)와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과테말라, 베트남은 성불평등 지수가 4.01 이상으로 세계에서 제일 높게 계산되었다. 반대로 이혼율이 높은 스위스,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같은 나라의 성불평등 지수는 아주 낮다는 것이다.   이혼율이 낮다면, 일반적으로 평탄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가정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통계에서 배울 점은 이혼율이 낮다고 행복한 결혼한 가정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이혼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경우가 많은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이혼율은 한 해 동안 이혼한 가정 수를 1000가정을 기본으로 계산한 것이다. 정확하게 계산하려면, 이혼한 가정들을 그들이 결혼하였던 해로 돌아가, 같은 해에 결혼한 가정 중에서 이혼으로 끝난 가정과의 비율을 따져보아야 하는데, 통계를 잡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 일본에선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 성(姓)을 따르는데, 현재 추세로 볼 때, 과부가 된 여성들이 본래 자기 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복씨(復氏) 신고’도 증가 추세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혼인해도 여성들이 본래의 자기 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씨 신고 같은 것은 필요 없는 나의 친척이지만, ‘사후 이혼 제도’가 없는 한국이라도 그녀 남편의 친척뿐 아니라, 모든 한국분이 알아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 전문의오픈 업 이혼 결혼 나라별 이혼율 사후 이혼 일반적 이혼

2024-12-19

[기고] 쿠데타 콤플렉스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은 518을 거쳐 결국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을 방문한다. 1981년 1월 28일의 일이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1월21일이니 일주일 만에 가장 먼저 인사(?)를 드리러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환영을 받았지만 독재자 전두환의 미국 방문에 대해 미국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언론은 그를 ‘Military Strong Man’으로 칭했고 정계의 반응도 차가 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치명적인 콤플렉스에 빠진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모두 그랬다.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승부를 걸었다. 국민을 잘살게 만든다면 정통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장기집권의 욕심에 빠지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전두환은 목숨을 걸고 수행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국민에게마저 총칼을 들이대고 나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쿠데타의 콤플렉스를 해결하려 했을까? 어떻게 하면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올림픽을 유치하고 프로 스포츠 리그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국민적 지탄과 내란의 수괴라는 판결을 받았다.     쿠데타의 콤플렉스는 국민을 힘들게 만든다.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서 우두머리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누가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했던가? 그 순간부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쿠데타의 명분과 정통성을 찾는 작업에 들어간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피곤함은 국민의 몫이다.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에게는 군부 쿠데타가 단골 메뉴이다. 내전도 불사한다. 그들에게 쿠데타의 명분은 혼란과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다 쓸어버리고 새로이 시작하여 번영을 이루자는 것이다.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성공했다면 원래 콤플렉스가 심했던 인물에게 더 큰 콤플렉스가 추가되면서 국가가 혼란에 빠질 뻔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와 비호세력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한진 / 알토스 비즈니스그룹 대표기고 콤플렉스 쿠데타 쿠데타 콤플렉스 군부 쿠데타 레이건 대통령

2024-12-19

[삶의 뜨락에서] 한강 노벨문학상

2016년에 영국의 맨부커 상을 받았었을 때,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생육을 먹는’ 꿈을 꾼 후 주인공 영혜는 고기를 안 먹는다. 채식주의자가 된다. 형부는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영혜의 몸뚱이에 꽃을 그린다. 영혜는 자기 몸에 그려진 꽃을 보고서 자신을 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형부도 자기 몸에 꽃을 그린다. 영혜는 형부를 꽃이라고 여긴다. 처제와 형부는 알몸으로 서로 껴안는다. 이런 행위를, 영혜는 꽃과 꽃의 결합이라고 보았다. 형부는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한 행위로 보았다.     영혜 언니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영혜의 아파트에 온다. 남편의 예술작품을 본다. 작품 속에서, 남편하고 영혜하고의 섹스를 본다. 이것은 불륜(不倫)이다. 남편을 쫓아내 버린다. 그리고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병원에서, 영혜는 자기 자신이 나무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다. 양손은 뿌리다. 몸뚱이는 나무줄기다. 두 다리는 가지들이다. 나무는 물만 먹는다. 나무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녀는 나무이기에 음식을 안 먹는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영혜는 처음에는 고기를 안 먹는다. 채식하다가 꽃이 된다. 그리고 나무가 된다. 이처럼 채식에서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해놓은 소설 ‘채식주의자’를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올해에(2024), 전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한강이 노벨상을 탔다. 하도 기뻐서 얼른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내용은 1980년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소설이었다. ‘정대’라는 소년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정대의 시신은 다른 시신들과 함께 놓여있다. 정대의 유령은 자기 시신이 다른 시신들과 함께 군인 트럭에 실리는 것을 본다. 트럭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자기는 밑에서 두 번째로 깔려있다. 자기 위에 다른 시신이 놓여있다. 정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만, 사람들은 정대의 말을 듣지 못한다. 그는 답답해한다. 다른 유령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줄도 모른다. 당황해한다. 트럭은 숲속 어느 빈 곳에 멈춘다. 군인 상사가 시신을 끌어내리라고 명령한다. 휘발유를 뿌리라고 한다. 군인들은 시신에 불을 지른다. 시신은 다 타버린다. 정대는 소리 지른다. 육체가 없어졌으니, 나는 더는 정대가 아니구나. 어떻게 내 누이를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육체가 있어야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가 있는데, 이제 육체가 없어졌으니, 누이가 나를 어떻게 알아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절망한다.   위의 소설을 읽어보고서, 한강의 사고방식이 아주 특이하고 독특함을 알았다.     한강이, 아니, 한국이 노벨상을 탄 것이 하도 자랑스러워, 어느 모임에서, 옆 사람에게,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어요!”하고 흥분해서 말했다. 그 사람이 “한강이 누군데요? 하고 반문한다. 말문이 확 막혀버린다. 더 놀란 일은, 스웨덴 한림원까지 가서 한강의 노벨상을 취소해달라고 시위까지 했다는 한국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한강을 좋아하니까, 모든 한국인이 다 한강을 좋아하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오스카의 최우수 작품상을 탔을 때는,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갖고서 즐겼었다. 그런데 이번 노벨상에는 왜 모든 한국인이 한마음으로 즐기지를 못하고 있을까? 조성내 /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삶의 뜨락에서 노벨문학상 한강 한강 노벨문학상 자기 시신 군인 트럭

2024-12-19

[삶과 믿음]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

  필자는 중학교 시절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1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그 영화 주제곡을 듣고 어떤 무상함이 강하게 일어났고, 내가 누구이며 과연 마음의 실체가 무엇일까 하는 답답함과 강한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무상한 경계를 대할 때마다 그런 의심과 답답함이 일어났는데, 당시 필자의 심경은 마치 좁은 통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의심이 해결되기 전까지 그 좁은 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외적 구속이건, 내적 구속이건 내가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결코 내 ‘마음’으로 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필자가 원불교로 출가하고 난 후에야 그 좁은 통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고,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야만 그 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고요해지고 번뇌가 사라지면 이런저런 의심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호수의 물결이 잠잠해지면 호수 밑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진리가 우리를 참 고향으로 오라는 부름이자 손짓입니다.   다음은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입니다.   “수도하는 이가 큰 발심이 나 가지고 공부가 어느 정도 깊어지면 자연 큰 의심 하나가 생겨나서 일체 의심이 그 의심 아래 잠을 자고, 자나 깨나 보나 들으나 어묵동정이 다 의심으로 화하여 온 천지가 그 의심 안에 들어 있다가 홀연히 한 생각을 얻어 그 의심을 부수고 나면 일체의 의심이 다 풀어지고 그로 좇아 참 지혜가 발하나니, 지금 그대들 가운데 보고 듣고 생각해서 아는 지혜는 참 지혜를 얻어 들어가는 첫 문에 첫걸음이 되나니 그것으로써 만족하지 말라.”   수도인에게이런저런 의심이 생기다가 나중에는 그 의심들이 하나의 큰 의심으로 귀결된다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강물이 결국 하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불교 수행인들에게 궁극의 의심은 주로 ‘이뭣고’가 됩니다. 내가 말하고 보고 생각하는 그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심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음, 의식, 성품 등이라 말하지만 이는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 우리는 그 실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큰 의심이 걸리면 그 의심을 통해 큰 입정에 드는 것입니다. 큰 의심이 있고 난 뒤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의심이 있는 뒤에 큰 정성이 나고, 큰 정성이 난 뒤에 크게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아 아는 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 만통이 있나니라.”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선진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다 저절로 입정에 들어 온종일 그대로 서 계신 적이 있습니다. 큰 의심이 걸려 대정(大定)에 든 것입니다. 만공 스님께서도 스승님으로부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화두를 받고 처음에는 이를 그냥 개념적으로 되뇌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가 참으로 깊은 의심이 되었고, 그 의심 속에 먹고 자고 걸어가는 것을 거의 잊을 정도의 동정 간 입정이 몇 달 지속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 불붙은 나무가 ‘딱’ 하며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일체의 의심이 해결되고 깨달음을 얻었다 합니다.   큰 의심을 통해 큰 정(定)에 들고 이가 깨달음의 경로입니다.     그러나 보통 수도인에게는 이런 의심이 깊게 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많은 선지식은 제자들에게 어떤 진리적인 의심거리를 주었는데 이를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화두를 때때로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은 글자 그대로 ‘관공서의 공식문서’라는 뜻입니다. 관공서의 법적 문서처럼 공안이 공부의 기준, 깨달음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선가의 대표적 화두 혹은 공안입니다. 한 수행자가 중국 조주 선사에게 “인도의 달마대사가 서쪽 즉 중국으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마침 뜰앞에서 있었던 조주 선사는 “뜰앞의 잣나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한 학인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살아있다고 하셨는데 개에게도 과연 불성이 있을까 그 학인은 의심이 되었나 봅니다. 조주 선사는 “무(無), 즉 없다.”고 답했습니다.   학인들의 어떤 물음에 대해 선지식들이 진리를 직관적으로 바로 학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해 왔습니다. 선지식들의 이러한 답은 엉뚱한 답, 비논리적인 답변으로 보이는데, 이는 생각 논리로서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많은 화두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화두는 근본적으로 수수께끼와 다릅니다. 수수께끼의 답은 생각으로서 논리적 사고로서 얻을 수 있지만, 화두의 해결은 생각이 끊이진 자리에 들어가야 그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라는 말이 화(話), 즉 말과 글과 생각 이전의 자리(머리 頭)라는 뜻입니다. 말과 생각 등 모든 관념 이전의 세계로 들어가야 성품을 본다는 것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마음 자유 의심 하나 의심 아래 마음 의식

2024-12-19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한 남자는 조직의 보스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그의 부하다. 부하는 보스가 시킨 모든 일을 참 잘 해냈다. 보스는 그런 부하를 크게 신임한다. 어느 날, 보스는 부하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긴다. 보스가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자신의 젊은 애인을 감시하라는 임무다. 부하는 임무 도중에 보스의 애인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보스에게 알리지 않고, 보스의 애인과, 그녀가 만나는 남자를 살려준다. 보스는 이 사실을 알아내고, 다른 부하들을 시켜 배신한 부하를 제거하려고 한다. 부하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권총을 구해 보스의 일당에게 복수를 한다. 2005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 ‘달콤한 인생’의 줄거리다. 영화 마지막에 부하는 보스에게 울며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 이 질문에 대한 보스의 답은 이렇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고국의 계엄령 소식을 들었다. 12월 3일, 그것도 2024년에 말이다. 처음에는 고국의 인터넷방송이 해킹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세계의 모든 뉴스 보도를 보고 곧 사실임을 확인했다. 도대체 윤대통령은 왜 계엄을 선포했을까? ‘술을 매일 먹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라서’ ‘부인을 특별검사의 수사로부터 지키려고’ ‘극우 유투버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봐서’ 아니면 본인 주장대로 ‘야당이 예산을 너무 많이 삭감하고,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탄핵을 계속해서, 정부가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일까?   그가 계엄령을 선포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주 일부를 구성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모욕감’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하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면 보스는 ‘모욕감’이 든다. 보스는 이런 모욕감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있는 일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 아직 죽지 않았다.’             ‘달콤한 인생’이란 영화가 만들어진 즈음인 2005년경에, 서울 법대 출신의 두 검사가 만나서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1960년생인 윤석열은 아홉번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열번째인 1991년에 합격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의 부하였던 1973년생 한동훈은 대학생 시절인 1995년에 일찍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늦깎이 검사 윤석열은 술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소년급제한 한동훈은 술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윤석열이 다른 검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동안, 부하였던 한동훈은 조서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윤석렬의 책상에 올려두고 퇴근했단다. 다음날 출근한 윤석열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자 다들 그가 한동훈을 자신이 역임했던 서울지검장이나 검찰총장에 임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윤석열은 한동훈을 자신도 역임해보지 못한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다. 그가 한동훈을 얼마나 믿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윤석열은 한동훈을 정치에 너무 깊숙히 끌어드린 것이다. 선배를 따라 보수진영에서 정치를 시작했지만, 한동훈은 진보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잘 알았다. 선배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자신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선배는 배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배로서 실력과 성실함으로 이미 선배에게 보상을 다했다고 믿었다. 두사람의 첫 마찰은 선배의 여자 때문이었다. 그녀의 메시지를 후배가 무시한 것이다. 게다가 후배는 그녀가 받은 명품백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보스의 여자 문제는 보스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모욕감 계엄령 소식 늦깎이 검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2024-12-19

[사설] 정국 혼란 줄이려면 내란·김여사 특검 수용이 현실적

━ 논란 조항 있지만 거부 땐 소모적 정치 공방 불가피 ━ 한 대행은 수용하고, 야당은 중립적 특검 추천해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어제 임시 국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등 6개 쟁점 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한층 민감한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해선 연말까지 고민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두 특검법은 특별검사 후보자 두 명의 추천권을 모두 야당이 행사하는 논란 조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거부권 행사를 반복하기엔 어려운 상황이다. 내란 수사는 검찰과 경찰·군·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초반부터 혼란을 빚었다. 내란 피의자 구속은 검찰이 하고 압수수색은 경찰에서 나섰다. 대검이 윤석열 대통령 수사를 공수처로 넘기기로 하자 검찰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는 등 신경전이 이어진다. 여기에 윤 대통령은 검찰과 공수처의 소환 요구에 불응할 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청구서까지 수취를 거부하고 있다. 수사기관의 신뢰성과 역량에도 문제가 제기된다. 야당은 검찰 수사를 믿지 못한다는 입장이며, 경찰과 군은 수뇌부가 비상계엄 사태에 깊이 연루돼 있다. 공수처는 지난해 착수한 채 해병 사망 관련 수사도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을 만큼 인력난을 겪어 왔다. 대통령과 군경 지휘부의 유고 상태를 장기간 방치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특검 이외에 대안이 없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윤 대통령이 그동안 세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비슷한 법안을 반복해 밀어붙인 야당도 문제지만, 국민의 의혹이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정치공세도 가능했다. ‘디올백 사건’과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등 김 여사 관련 의혹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다. 수사 결과와 과정 모두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수사를 지휘하던 서울중앙지검 간부들이 좌천성 인사를 당하는가 하면 새로 온 수사팀은 김 여사에 대한 ‘황제 수사’와 ‘검찰총장 패싱’ 논란까지 일으켰다. 지난 10일 네 번째 특검법에 여당 의원 일부가 동조하면서 195명 찬성으로 본회의를 통과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 권한대행은 두 특검법의 거부권 행사 시한인 내년 1월 1일까지 충분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내란 수사를 둘러싼 혼란과 윤 대통령 부부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게 최선일지 숙고해야 한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거대 야당이 한 총리 탄핵에 나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도 짙다. 야당도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만큼 특검 추천 등에 있어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비록 추천권이 야당에 있다 하더라도 널리 신망받는 중립적인 인물로 특검 후보를 추천함으로써 정치적 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책임 정당으로서의 자세다.

2024-12-19

[사설] 미국발 금리 충격에 중국도 불안…첩첩산중 한국 경제

━ 미 내년 금리인하 속도 조절에 우리 금융시장 요동 ━ 외부 시선 중요…추경 준비하고 반도체법 등 처리를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정치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제가 휘청거리는 와중에 미국발 금리 충격까지 터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18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리면서 내년 기준금리 인하 속도를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연준의 속도 조절은 달러 강세 요인으로 작용했고, 한국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어제 한국 증시는 2% 가까이 하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한때 1450선을 넘어섰다. 장 중 환율이 1450원 선을 웃돈 것은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이후 15년9개월 만이다. 달러 수급 자체는 문제가 없고 이미 대외자산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지금 같은 고환율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은 우리 경제 주체의 불안감을 키울 수 있다. 중국 경기 부진도 심상치 않다. 중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인 1%대까지 하락했다. 중국이 일본처럼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 지표금리 하락은 위안화와 한국 원화의 약세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국 내수 부진은 한국 수출에 걸림돌이다. 시야를 중장기로 넓히면 성장 잠재력 부재라는 난제가 버티고 있다. 한국은행이 어제 발표한 보고서에는 우리 경제 잠재성장률이 내년 이후 5년간 연평균 1.8% 수준까지 떨어지고, 적극적 구조개혁이 없으면 2040년대에는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분석이 나왔다. 우리 경제에 당장 중요한 것은 정치와 경제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대내외에 정부가 위기관리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치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화할 경우 신용등급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내수 회복을 위해선 적극적인 재정·통화 정책이 필요하다. 내년 1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기 위해선 외환시장 안정과 가계빚 추이가 관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통화정책에 앞서 선제적 추경 편성을 통해 재정을 보강하는 방안부터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추경은 빠를수록 좋다”고 했고, 예산실장·경제부총리를 지낸 김동연 경기지사는 30조원의 수퍼 추경을 요구했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미인대회 우승자를 맞히려면 자기가 아니라 남들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투자자와 글로벌 신용평가사의 눈높이를 의식해야 한다. 반도체특별법을 비롯해 경제계가 요구하는 입법은 서두르고 상법 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입법은 자제해야 한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챙겨야 할 건 챙기는 것이 국회의 책무 아니겠나.

2024-12-19

[중앙시평] 이번 계엄 사태를 ‘좋은 위기’로 만들어야

지난주 국회의 대통령 탄핵의결은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드러난 윤석열 대통령의 상황인식, 행동 양태 등을 보았을 때 하루라도 더 그에게 국가안보와 국정을 맡기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헌법재판소는 명백한 이번 탄핵사유에 대한 심의에서 인용 결정을 하게 되고, 내년 봄 경에는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을 탄핵하여 파면하고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으로 우리는 지난 12월 3일 한밤중에 벌어진 이 엉뚱한 사태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할 수 없다. 대통령의 현실 인식과 행동은 어이없었지만 이번 비상계엄령 사태는 단순히 대통령 자리에 있는 한 개인의 일탈이 빚은 한편의 광소극이라 치부해 버리기에는 보다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문제가 그러하듯 이번 사태도 사람, 제도, 문화의 요인들이 겹쳐져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이번 사태에는 여러 얼굴이 있어 사람, 제도, 정치문화가 함께 작용 대통령 탄핵은 하나의 해결책 불과 개헌과 정치문화 개선안 제시돼야 이번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먼저 정치지도자로서의 성장과 검증, 선출 과정에 대한 것이다. 국가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편협된 인식과 판단 능력, 충동적 결정 성향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거대 정당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게 되었으며, 우리 국민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국가지도자로 선출하게 되었는가? 둘째는 국가지배구조에 대한 것이다. 현 제도상 여소야대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둘 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이 충돌하여 서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무기처럼 상대방 제압을 위해 최대한 휘두르게 될 때 야기되는 극단적 정치대립, 입법교착, 국가 정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셋째는 정치문화에 대한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 중에서도 왜 유독 우리에게 더 극단적 여야 간 대치, 보복 정치의 악순환, 대통령들의 불행이 반복되고 있는가? 이번에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찰 없이 국민과 여야가 단순히 눈앞의 정권 투쟁과 보복 정치에 몰두하려 한다면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 큰 국가적 비용은 허비되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많은 한계와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제도로서 도입한 민주주의는 유리처럼 쉽게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정부수립 후 여러 번 목도했다. 그것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견제와 균형을 갖춘 국가지배구조, 타협과 절제를 익힌 정치문화, 사실과 지성에 기반한 언론, 깨어있는 시민정신, 포용적 사회문화가 아우러져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당혹스러운 정치 현실의 저변에는 이와 관련된 취약점들이 함께 깔려 있다. 이 모든 것을 일거에 개선할 도리는 없다. 그나마 제도적 개선은 빠르게 이룰 수 있는 분야다. 이번 사태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지적과 권력 분산이 답이란 견해가 많다. 그러나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이 서로 다른 정당에 의해 분점된 것이 이번 사태를 초래한 측면도 있다. 행정권력을 총리와 대통령 간에 나누어 행사해야 한다는 것도 오늘날 개방국가에서 내치와 외치 등 모든 정책이 연결된 상황에서 갈등과 대립, 교착의 소지를 더 키울 수도 있다. 제도 개선은 이념적 접근보다 우리의 역사와 사회적 관습에 대한 성찰과 이에 기반한 실용적 접근을 요한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해 여소야대가 될 기회를 줄이고, 대통령의 권력이 여러 자문기구나 심의기구를 통해 정제되고 견제되는 기제를 세우는 것이 더 좋은 방도일 수 있다. 정치문화는 훨씬 더 어려운 부분이다. 민주제도는 우리에게 내생적으로 발전한 제도가 아니라 이식되어 온 제도다. 매사가 정쟁거리가 되는 몰가치적 정치대립과 보복 정치는 권력구조 개편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정당들이 단순히 정권쟁취 목적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가치와 비전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우리 국민이 지역주의에서 벗어난 투표를 행사해 나갈 때 더 나아질 수 있다. 지역 기반에 따른 ‘묻지마’ 당선은 결국 정당을 국가 미래보다 정권과 이권 쟁취만을 위해 모여든 집단으로 부추기게 된다. 이참에 정당 구성과 정당제도의 개편, 기존의 투쟁적 정치 관행에 덜 젖은 세대로 여의도 정치 주역들의 교체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 이번 사태의 진행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우리 국민의 힘과 시민 정신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정치가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야 할 때다. 예상치 않게 일찍 다가온 대선으로 또다시 실패할 대통령을 뽑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후보들은 국가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 시간표, 정치문화 개선을 위한 각오와 그의 실현 방안들을 국민에게 제시하길 바란다. 그것이 국가적으로 큰 비용을 치르고 있는 지금의 위기를 허비하지 않고 ‘좋은 위기’로 만드는 길이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2024-12-19

헌법재판관 두고 인질극 벌이나 [강주안의 시시각각]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결정할 헌법재판소에서 두 달 넘도록 인질극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타깃은 헌법재판관 세 명이다. 이 셋만 붙들면 헌재는 무력화한다. 아이디어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나왔다. 헌법재판소법 23조의 ‘재판부는 재판관 7명 이상의 출석으로 사건을 심리한다’는 ‘심판정족수’ 조항이다. 국회·대통령·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추천한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3명이 공석이면 재판관이 6명만 남게 돼 정족수에 미달한다. 민주당은 헌법 65조 탄핵소추 조항을 악용해 현 정부를 괴롭혀왔다. 국무위원·법관·검사·감사원장 등에 대해 국회에서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하면 바로 직무가 정지된다. 헌법학자들조차 "역사적인 의미 이상의 실효적인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허영 ‘헌법정신과 헌법’)고 믿었던 이 조항을 민주당이 남용하기 시작했다. 검사들을 잇따라 직무 정지시킨 민주당은 지난 10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소추에 즈음해 국회 추천 재판관 3명의 임기가 끝나는 사실에 착안했다. 재판관 공백이 없도록 국회는 후임자를 추천해야 하지만, 시간을 끌면 재판관 6명 상태가 지속해 정족수 7명을 못 채운다. 이 위원장의 직무 정지가 한없이 길어진다. 민주당은 이 위원장을 인질로 잡은 채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국회 추천 재판관은 여야가 1명씩 추천하고 1명은 여야 합의로 인선하는 게 관례다. 그런데 민주당은 2명 추천권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감사원장까지 탄핵소추를 하겠다고 나섰다. 재판관 임명이 절실한 여당은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이때까진 민주당이 여유로웠다. ━ 재판관 6명이 대통령 탄핵 결정? ━ 법 무시한 국민의힘 우기기 전략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상황이 반전됐다. 탄핵 심판대에 윤 대통령이 올랐는데 재판관이 6명뿐이다. 정족수 7명이 안 된다.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마냥 늘어질 수 있다. 탄핵 심리가 길어지면 그사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 2, 3심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 1심대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이 확정되면 이 대표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못 나간다. 이제 속이 타는 쪽은 민주당이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인질극에 들어갔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젠 민주당이 펄펄 뛴다. 민주당 인질극을 겪으며 헌재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헌재법의 심판정족수 7명 조항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재판관 6명으로 심리를 진행했다. 그러나 대통령 파면 여부 결정은 다르다. 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탄핵이 인용되는데 만장일치만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국민의힘 주장이 억지라는 사실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을 돌아봐도 명확하다. “8명의 재판관만으로는 탄핵심판 결정을 할 수 없고 9인의 재판부로부터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건 박 전 대통령 측이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결정문은 재판관 7명 이상이 필수라고 적었다. “7명 이상의 재판관이 출석하면 사건을 심리하고 결정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헌재는 재판관 7명도 대통령 탄핵 심판엔 부족하다고 봤다. 재판관 8명 체제에서 이정미 당시 재판관의 퇴임 예정일(3월 13일)보다 사흘 전으로 선고 날짜를 잡았다고 공개했다. ‘7인 재판관 체제하에서 현직 대통령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할 경우 대통령 측과 소추위원 측 모두 승복하지 않아 정당성 논란이 거세게 제기될 게 분명했다’고 기록했다(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한민국의 변화’). 하물며 6명 체제로 결정한다니, 어불성설이다. ━ 공직자 인질 발상은 민주당 원조 여당의 인질극이 군색하지만, 민주당도 거울을 보라. 지난 두 달간 인질극이 어땠나. 상황이 역전된 마당에 이제라도 여당과 협의해 원칙을 따르는 게 좋다. 이참에 여야로부터 “다시는 헌법재판관을 놓고 인질극을 벌이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받아야겠다. 강주안([email protected])

2024-12-19

[리셋 코리아] 무너진 대통령제…내각제가 답이다

탄핵 이후의 길 ⑤ 12·3 비상계엄 사태가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소추됐고, 계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군경 고위 간부도 연이어 구속됐다. 계엄의 위헌성과 위법성에 대해서는 법조계의 의견이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정치 개혁 문제다. 사법 처리가 결과에 대한 응징이라면, 정치 개혁은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한 처방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심지어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치 제도의 결함과 무관치 않다. 여당의 역할만 봐도 그렇다. 국민의힘은 계엄 선언에 관해 대통령에게 완전히 패싱 당했다. 그러고도 상당수 의원이 탄핵 소추안 투표에서 ‘대통령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데 정당이 무엇이던가. ‘비전’과 ‘규율’을 갖추고 나라를 통치할 집단적 힘을 형성하는 조직이다. 현대 정치는 정당으로 조직된 집단 지성을 통해 지도자 개인의 기질적 특성이나 일탈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이번 계엄 사태에서 여당은 정당 본연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양당, 민주주의 규범 파괴 심각 여소야대에선 정치 내전 필연 이중정부 혼란 원천봉쇄 필요 야당은 어떤가. 따져보면, 헌법의 안정성을 먼저 흔든 건 더불어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지난 2년 반 동안 자그마치 18명의 공직자를 상대로 탄핵소추를 남발했다. 심지어 당 대표의 부패 수사를 방해하려는 의도로 탄핵 소추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탄핵은 “형사 재판적 처분이 어려운 조건에서 헌법 침해로부터 헌법을 보호하는 수단”이다. 민주당은 헌법이 전제하는 이런 암묵적 규칙을 무시했다. 두 정당의 상태가 이렇다. 불행하게도 여야 위치를 서로 바꿔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일극 체제’란 평가를 받는 민주당이 여당이 되면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안 봐도 뻔하다. 명백한 헌정 파괴를 두고도 ‘의리’를 앞세우는 국민의힘이 헌법에 충실한 야당이 될 리도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상황을 보면, 여소야대 기간이 여대야소보다 길었다. 대통령과 야당이 갈등했지만, 그럼에도 헌법적 권한을 극단적 방법으로 사용하진 않았다. 그래서 정부가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상호 존중이란 대통령제의 규범이 사라졌다. 탄핵은 일상이 될 터이고, 비상계엄까지는 아니더라도 헌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권한 행사도 난무할 것이다. 대통령제는, 잘 작동하긴커녕, 유지조차 불가능해졌다. 과도한 예측이라고 타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탄핵은 사전에서나 찾아보는 단어였고, 계엄 선포는 10여 일 전만 해도 망상의 영역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다면 여소야대 상황에서 내전을 방지할 방법은 없을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정당 혁신이다. 두 정당이, 합리적 야당으로, 책임을 다하는 여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안은 현실 가능성이 매우 낮다. 정치가 결투가 되었는데, 결투에서는 옳은 말이 아니라 장전한 총을 먼저 뽑아야 살아남는다. 둘째, 여소야대 상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이다. 국회 다수당이 행정부 수반을 함께 책임지는 의원내각제로 정부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내각제는 정당 정부를 지향하며, 행정 수반 교체도 유연하다. 물론 총리가 자주 교체될 경우 정부 정책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약점은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같은 대통령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의 최우선 과제는 여소야대 상황의 극단적 불안정을 해결하는 것이다. 일부는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제의 문제점은 임기나 재선 유인이 아니다. 앞서 봤듯 여소야대를 견디지 못하는 결함이다. 더 긴 임기의 대통령을 만들어 해결할 일이 아니다. 대통령을 그대로 두고 총리를 국회에서 뽑는 이원집정제도 오답이다. 여야의 극단적 갈등이 심화한 상태에서 여당 대통령과 야당 총리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 작금의 상황에서 정치 개혁은 이중정부 또는 여소야대 상황을 원천 봉쇄하는 데 집중돼야 한다. 좋은 정부를 만드는 고차원적 개혁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정부와 무정부 사이에서 최악을 막는 개혁이 시급하다. 한지원 작가·전 새로운선택 정책위 의장

2024-12-19

[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지금 한국 현실 겹쳐 보이는 과대망상 ‘코’의 희비극

윌리엄 켄트리지의 ‘나는 내가 아니고…’ 마음이 어수선한 요즘 같은 시기에 말을 걸어오는 작품은 따로 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제목은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馬)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이다. 1955년생인 윌리엄 켄트리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0년대까지도 아파르트헤이트, 즉 차별적인 인종분리정책이 시행된 나라이다. 켄트리지의 부모는 흑인 인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법조인이자 활동가였다. 특히 아버지는 남아공 현대사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반역죄로 재판을 받을 때 변호인단을 이끌었고, 감옥에서 사망한 흑인 인권 운동가의 죽음이 경찰이 발표한 단식 농성이 아니라 고문 때문이었음을 밝혀낸 변론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변호한 사람 중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세 명이나 된다. 얼굴 일부인데 얼굴 부정하는 코 본분 잊은 권력욕 비판 영상 설치 만델라 변호한 백인 변호사 아들 남아공 차별정책 비판해 명성 드로잉 반복하는 작품 제작 과정 과거 실수 답습 역사와 닮은꼴 유대인 후손 관찰자 성향 생겨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켄트리지의 어린 시절은 특별했다. 물론 흑인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백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관공서는 백인과 유색인의 입구가 분리되어 있고, 해변에도 전용 구역이 나뉘어 있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다른 백인 친구들의 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린 시절, 켄트리지는 부모의 서재에서 노란 초콜릿 상자를 발견하고 기대에 차서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살해당한 흑인들의 처참한 시신 사진이 있었다. 1960년에 일어난 학살 사건의 중요한 증거사진이었다. 인종 분리를 당연시하는 당시 백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가족이 오히려 소수에 속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의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조부모는 차별과 박해를 피해 남아공으로 이주해 온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배경과 정체성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특권층이라기보다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삼자이자 관찰자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특혜를 받는 입장에서도 폭력과 불합리를 지속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하네스버그는 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도시였다. 금광 개발에만 몰두한 국가 정책 때문에 풍경은 삭막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켄트리지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드로잉을 좋아했던 그는 벽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 후 배우가 되기 위해 파리의 연극학교를 다니기도 하고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일을 배우기도 했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껴 그만두었다. 좌절의 순간, 켄트리지는 남아프리카 원주민 화가들의 목탄 그림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빠른 스케치의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던 목탄이 삶의 불확실성과 임시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켄트리지는 빠르고 거칠게 그린 목탄 드로잉에 요하네스버그의 삭막한 풍경과 비극적인 역사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로잉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흑백의 스톱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에는 설치와 퍼포먼스로 영역을 확장했다. 미술을 포기했던 시절에 연기와 연출을 공부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켄트리지의 예술은 1980년대 후반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의 통제가 심해 어떤 형태의 체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사전 검열 때문에 신문의 한 면이 통으로 검정으로 찍혀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시기에 켄트리지는 역사적 소재를 통해 남아공의 부조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점차 국제적 명성을 쌓아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러시아의 문학과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상 설치 작품이다. 제목은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거나 책임을 회피할 때 쓰는 러시아 속담에서 따온 것이다. 왜 러시아일까? 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켄트리지는 종종 다른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특히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일화들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사회의 진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좌절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코’라는 단편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기겁한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이 매끈한 피부만 있는 것이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 그는 뜻밖에도 거리에서 고급스러운 제복을 입고 마차에 올라타는 자신의 코를 발견한다. 게다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계급의 차림새를 하고 있다. 미친 듯이 뛰어서 쫓아가지만, 막상 코를 마주한 순간에는 멈칫한다. 보아하니 자기보다 높은 신분인 것 같아서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망설이다가 말을 빙빙 돌리며 아주 공손하게 묻는다. 실례지만 혹시 제 코가 아니신지요…? 하지만 뻔뻔하게도 코는 “저는 제 자신입니다”라며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코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날 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코를 되찾은 주인공은 높은 사람에게는 절절매고 낮은 사람에게는 호통치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골 소설 ‘코’에서 착안 니콜라이 고골의 이 소설은 권력과 계급, 체면과 허세를 지나치게 중시한 당시 러시아 사회를 풍자한 것으로 해석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코를 괘씸해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코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바쁜 척하며 돌아다니는데, 높은 계급을 과시하며 하는 일은 지체 높은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코일까? “내 코가 석 자”, “콧대가 높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코는 대표성이 강한 신체기관이다. 몸 전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작지만 얼굴 중앙에 자리 잡아 온전함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코가 스스로 독립된 존재라는 과대망상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돌아다니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망상과 욕심의 조합은 나는 내가 아니라는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현실 세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괴함이다. 켄트리지의 작품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여덟 개의 짧은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자극(劇)을 연상시키는 흑백의 화면 위로 다리 달린 코가 걸어 다닌다. 사다리를 열심히 올라가다가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코. 말을 타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단상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코. 권력과 계급에 대한 집착은 우스꽝스럽지만 집요하다. 한편 다른 화면에서는 러시아 혁명기의 일화를 담은 이미지들이 빠른 리듬으로 흘러간다. 인간과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열망이 순식간에 좌절된 비극의 역사이다. 남아공의 유명한 작곡가가 만든 웅장한 배경음악이 작품에 서사를 부여한다. 초반에는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빠른 연주로 혼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이내 남아프리카 원주민의 조화로운 합창으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처럼 느껴져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켄트리지의 작품은 우리가 역사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부조리함에 대한 우화이다. 그는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 없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세상의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체득한 관찰자의 관조적 시선으로 눈앞의 불합리한 현실을 견뎌왔기 때문일 것이다. 켄트리지의 고향 요하네스버그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만성적 범죄와 경제 침체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상황이 악화되자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떠났다. 그러나 켄트리지는 지금도 요하네스버그에 남아 역사와 정치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실과 밀착된 그의 작품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역사·미래 낙관도, 비관도 경계해야” 그렸다가 지우기를 거듭하며 만들어지는 켄트리지의 스톱 애니메이션처럼 역사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이어진다.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기도 한다. 실수는 그대로 되풀이된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파멸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반복 재생된다.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기 분열과 책임 회피의 모습도 전에 본 적 있는 장면이다. 역사와 미래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켄트리지는 이렇게 답한다. 낙관주의는 위험하고 비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고. 혼돈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2024-12-19

[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생명의 근원, RNA 이용해 암·유전병·치매 잡는다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74〉 알지노믹스 이성욱 대표 ‘바이오 빙하기’. 최근 국내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적 긴축으로 투자 심리에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특히 신약 개발 바이오 스타트업들에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긴 임상 기간을 거치는 동안 시간은 물론, 천문학적인 돈도 쏟아부어야 하는 현실을 투자자들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뛰어난 기술력 덕에 코스닥에 상장했다 하더라도, 매출을 일으키지 못해 관리종목 지정의 위기에 처한 바이오 스타트업들이 최근 속출하고 있다. 단국대 연구실 창업 스타트업 RNA 이용 유전자 치료제 개발 국가전략기술 보유·관리 기업 미 FDA, 희귀의약품 지정 지원 그래도 K-바이오의 도전은 만만치 않다. 2017년 설립된 알지노믹스는 유전물질인 RNA(리보핵산)를 이용한 유전자 치료제를 연구·개발하는 바이오 스타트업이다. 미국 코넬대에서 RNA 치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성욱(61) 단국대 생명융합공학과 교수가 창업자이면서 대표다. 그는 RNA를 이용해 종양과 유전성 망막색소 변성증, 치매 등의 치료제를 연구·개발하고 있다. 특히 간암 및 뇌종양 치료제 후보인 RZ-001은 올 1월과 10월, 각각의 병증에 대해 미국 식품의약품안전국(FDA)으로부터 임상 진행 및 허가 등에 다양한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는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았다. 지난 9월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관하는 ‘국가전략기술 보유·관리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같은 성과 덕분일까. 알지노믹스는 ‘바이오 빙하기’에도 불구하고 최근 마감한 상장 전(프리 IPO) 투자유치에서 203억원을 모으는 등 총 누적 투자가 812억원에 이른다. 궁극의 질병 치료, RNA 치환 알지노믹스는 국내 유일의 RNA 편집 기반 유전자 치료제 스타트업이다. 질병의 치료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세포 속 유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궁극의 치료다. 이 때문에 유전자 치료는 암·치매 등 난치병은 물론, 유전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인간 유전체 속 모든 염기서열을 풀어낸 휴먼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된 게 21세기 초에 불과하다. 2010년대 중반에서야 DNA 기반 유전자 치료제가 나오기 시작했고, RNA 치료제는 그 뒤를 잇고 있다. DNA 치료제가 장기·영구적 효과를 보인다면, RNA 치료제는 일시적이라 완치될 때까지 여러 번 약물을 주입해야 한다. 두 치료제는 일장일단이 있고, 쓰임새 또한 다르다. 유전자 자체를 편집해 영속적으로 유전질환을 치료한다고 할 때는 DNA 치료제가, 질병을 보다 안전하게 치료하고 싶다고 할 때는 RNA 치료제가 유리하다. 경기 판교에 있는 알지노믹스 부설연구소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본사는 죽전 단국대 캠퍼스 안에 있다. Q : RNA 연구자가 왜 험난한 신약 개발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나. A : “창업에 대한 생각은 미국 유학 때부터 심어졌던 것 같다. 코넬대 의과학 대학원에서 RNA 유전자 분야 박사과정을 했는데, 그곳은 이미 기초과학을 넘어 치료 연구로 넘어가고 있었다.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면 연구에만 그칠 게 아니라, 치료제를 만드는 스타트업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학위를 마치고 1997년 귀국해 20년 이상 연구를 통해 RNA 치환 효소 기술을 최적화해오면서 이걸 이용한 치료제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사명감이 굳어졌다. 그렇게 신약 개발 스타트업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처음엔 창업을 않고 기술만 이전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끝까지 추진할 기업을 찾기 어려워 직접 창업에 나섰다.” Q :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인가. A : “핵심 기술은 RNA 치환 효소 플랫폼이다. 어떤 병을 일으키는 a라는 RNA가 있으면 이것을 우리가 원하는 치료용 RNA로 교체·교정하고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이다. 질병이 되는 바이러스의 RNA를 잘라서 없애고, 여기에 항바이러스 같은 치료용 RNA로 교체한다. 돌연변이로 인한 유전병의 경우는 정상적인 RNA로 바꿀 수 있다. ” 미국 임상에서 패스트트랙 지정 Q : 어떤 질환을 치료할 수 있나. A : “암과 희귀질환을 중심으로 신약 파이프라인을 개발 중이다. 대표적인 파이프라인은 RZ-001과 RZ-004이다. RZ-001은 간암, 악성 뇌종양 등의 암세포 RNA를 표적으로 삼아 암세포를 사멸시킨다. 암세포가 무한정 증식하는 원인이 되는 효소의 RNA를 잘라 없애고, 동시에 항암 RNA로 교체해 암세포를 죽인다. RZ-004는 유전성 망막색소변성증 치료제다. 돌연변이로 인해 점진적으로 시력을 잃는 희귀 유전 질환을 대상으로 한다. 이외에도 연구·개발 초기이지만 알츠하이머 치료제인 RZ-003도 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유발하는 유전자를 교체해 병의 진행을 막고 치료까지 하는 게 목표다.” Q : 국내외에 RNA 편집 기반 유전자 치료 기업이 없나. A : “알지노믹스의 RNA 문장 편집 기술은 현재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도 독보적이다. RNA 속 염기 일부를 교체하는 게 아니라 특정 구간 전체를 바꾸는 거다. 이렇게 하면 여러 가지 돌연변이 염기들을 한꺼번에 정상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국내에는 우리가 유일하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에 유사한 RNA 교정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이 등장했지만, 우리 플랫폼은 이미 최적화 단계에 들어섰다.” Q : 지금 어느 단계인가. A : “RZ-001은 국내에서 1상 임상을 진행 중이고, 미국에서 2a상 임상 승인도 받은 상태다. 지난해 11월에 미국 FDA로부터 뇌종양에 대한 패스트트랙 지정도 받아 임상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FDA가 나서서 도와줄 테니 빨리 개발해보라는 의미다. RZ-004는 호주에서 임상 1상 승인을 받았다. 호주는 임상 환경이 아주 좋은 나라다. 호주 임상을 가지고 미국 임상으로 가기에도 유리하다.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밝힐 수는 없지만, 글로벌 톱 5 수준의 제약회사가 우리 플랫폼을 이용해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중이다. 기술 검증이 이미 끝났다.” 초기 임상 기술이전으로 매출 확보 Q : 상장돼도 매출 내기가 싶지 않은데. A : “기술특례 상장기업, 특히 긴 기간 임상을 해야 하는 바이오기업의 경우 매출 부족과 손실을 이유로 관리 종목에 지정하는 현재 규정은 가혹하다. 투자자가 기술력을 믿고 계속 투자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알지노믹스는 전임상 또는 초기 임상을 마친 후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이전하는 ‘라이선스 아웃’ 전략으로 매출을 일으키려고 한다. 현재 물질 이전 계약을 통해 다수의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성공하면 본격적인 기술 이전이 이어질 예정이다. 신약 완제품 출시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플랫폼 기술 자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협력과 라이선스 아웃을 통해 매출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Q : 그간에 어려움은 없었나. A : “바이오 투자 환경은 팬데믹 이후 긴축 기조와 금리 인상으로 더욱 악화했다. 특히 신약 개발 분야는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만큼 어려움이 크다. 최근 IPO(기업공개)를 앞둔 마지막 투자 유치로 203억원을 모았다. 더 모으고 싶었지만, 상장을 위해 최소 지분율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쳐야 했다. 미국 같으면 아마도 10배는 모았을 거다. 임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큰 비용이 필요한데, 최근 국내 계엄 사태 이후 환율이 치솟아 어려움이 적지 않다.” 김원제 KB인베스트먼트 바이오투자그룹 본부장 “글로벌 유전자 치료제 분야는 최근 DNA 치료제들의 허가를 통해 빠르게 성장 중이며, 곧 RNA 치료제의 시장 역시 열릴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알지노믹스는 RNA 치환 효소 플랫폼 기반 RNA 교정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업체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알지노믹스의 플랫폼에 더욱더 관심을 표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완제 단국대 산학협력단장 “알지노믹스는 대학 창업 기업으로 출발한 스타트업이다. 연구 성과를 산업화로 연결, 대학 기술이 글로벌 바이오 산업의 중요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혁신 사례이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RNA 플랫폼 기술은 난치 질환 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며 글로벌 바이오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서울대·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4-12-19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육상에선 폭파, 공중엔 오물풍선…두만강 건너 전쟁터로 떠난 북

2024년 7대 북한 뉴스 올해 한반도는 연초부터 분주했다. 지난해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을 “교전 중인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소위 ‘2국가론’을 주장한 뒤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연말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으로 어지럽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3차례 만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에 침묵하고 있다. 내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맞아 북한이 어떤 전략으로 나올지도 미지수다.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가 올해 북한 7대 뉴스를 선정했다. 뒷배 러시아 향해 올인 전략 통일 관련 부서, 상징물 폐기 트럼프 후보 당선 소식 침묵 지방경제 챙기기 나서기도 1 북한군, 두만강 건너 러 전쟁터로=올해 가장 눈길을 끄는 북한 뉴스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돕기 위해 지난 10월 초부터 1만 1000여 명의 병력을 러시아에 보냈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치고 현재 쿠르스크 지역의 전선에 투입됐다. 국가정보원은 19일 국회정보위 비공개 간담회에서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가운데 최소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는 1000여 명에 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북한은 과거 베트남 전쟁이나 욤 키르프 전쟁(이집트)에 소규모지만 조종사 등을 보낸 적이 있다. 또 아프리카 등 후진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규모 정규군을 해외에 파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임무 교대 등을 위한 추가 파병도 예상된다. 북한은 병력 파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와 정상적인 협력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2 피로 맺은 북한 동맹은 중국? 러시아?=북한과 중국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로 순치(脣齒) 관계로 여겨져 왔다. 중국은 6·25전쟁 때 ‘항미원조(抗美援朝: 미제에 맞서 조선을 도움) 보가위국(保家衛國: 가정과 국가를 지킴)’이란 명분으로 대규모 병력을 북한에 파병했다. 이후 북한은 ‘대를 이어 중국과 혈맹’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 6월 유사시 자동개입 조항을 담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북한이 중국을 대신하는 러시아를 새로운 혈맹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 밖에도 북한은 러시아와 무역, 투자, 과학기술, 식량 및 에너지 안보, 정보통신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등 전방위 밀착을 가속하고 있다. 3 유훈 뒤집은 남북 2국가론=김일성, 김정일은 남북통일을 절대 과업으로 여겼다. 김일성이 생전 마지막으로 서명한 문건이 사망 하루 전 검토한 남북정상회담 관련 문서였다. 김정일은 “통일은 애국, 분열은 매국”이라고 했다. 김정은 역시 집권 직후 이런 선대의 유훈 관철을 내세웠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김 위원장이 한국을 “제1의 적대국이자 불변의 주적”이라고 규정한 뒤 북한은 올해 들어 통일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연초부터 북한은 노동당의 통일전선부를 비롯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북한 정부와 외곽의 남북 관련 기구를 모두 없앴다. 나아가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등 선대가 건설한 통일 관련 기념물도 철거했다. 지난 10월 15일엔 휴전선을 가로질러 남북을 연결한 철도와 도로를 폭파하고, 휴전선 일대에 방벽을 쌓았다. 김정은은 헌법에 남북의 경계를 담으라는 영토조항을 신설하라고 지시했는데, 내년 1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될 가능성이 크다. 4 두엄 담은 오물풍선 살포=북한은 한국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응해 5월 28일 이후 32차례에 걸쳐 6600여 개의 대남 풍선을 날렸다. 민간단체들이 달러나 약품, 전단을 날려 보낸 것과 달리 북한은 두엄이나 퇴비, 담배꽁초 등을 담아 남쪽으로 보냈다. 국제사회가 이런 북한의 행동을 엽기적이라고 비판하자 북한은 종이 상자를 찢거나 생활 쓰레기를 담은 풍선을 지속적으로 날리고 있다. 북한의 무차별적인 전단 살포로 인천과 김포 등을 이용하는 항공기 운항이 한때 중단됐다. 특히 북한은 초창기 풍선만 날리다 최근 들어선 타이머를 장착해 특정 장소에 살포하는 ‘기술’도 선보였다. 타이머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5 괴물 ICBM 발사=북한은 올해도 크고 작은 미사일을 수시로 발사했다. 특히 북한은 지난 10월 31일 오전 7시 10분쯤 평양 일대에서 ‘화성-19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쐈다. 이 미사일은 85분 56초 동안 비행하며 최고 정점 고도 7687.5㎞를 기록했다.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 중 사거리와 비행시간에서 최고 수준인 괴물 미사일이란 평가가 나왔다. 통상 수직 발사 형식의 고각 발사를 할 경우 미사일 사거리는 최고 정점 고도의 2.5~3배가량이다. 이를 고려하면 미국 본토 전체가 이 미사일의 사정권에 들어간다. 북한은 화성-19 미사일을 최종완결판 ICBM이라고 주장했다. 6 이제는 지방이다?=북한은 지난 1월 정기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에서 ‘지방발전 20승(乘) 10(20X10) 정책’을 발표했다. 향후 10년 동안 매년 20개 군(郡)에 현대적인 지방산업기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의 군이 200개 남짓이어서 이 정책이 성공할 경우 10년 후 모든 군에 번듯한 공장 하나씩을 갖추게 된다. 김 위원장은 집권 이후 10년이 넘도록 주요 공장이나 놀이시설 현대화와 살림집 건설 등 평양 현대화 사업에 집중했다. 평양과 격차를 해소하고,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생필품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대북제재로 인해 공장 건설과 가동을 위한 원자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장의 규모 역시 한국의 중소기업 수준인 것으로 파악됐다. 7 불발된 군사정찰 위성 발사=지난해 11월 22일 군사정찰위성 ‘만리경-1호’ 발사에 성공한 북한은 이를 “무력현대화의 선결중대과업 실현에서 결정적인 전진이자 경이적인 사변”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올해 3개의 군사정찰위성 추가 발사를 최대 과업으로 꼽았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5월 27일 추가 발사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뒤 아직까지 추가 움직임이 없다. 일각에선 북한이 러시아 파병의 대가로 관련 기술을 전수 받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있다. 하지만 열흘 남짓 남은 올해 안에 북한이 과업으로 삼았던 3개의 군사 정찰 위성을 추가 발사하기란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정용수([email protected])

2024-12-19

[신준봉의 시선] 장군들은 왜 ‘노’라고 말하지 못했나

서울대 강원택 교수의 말대로 “그다지 기쁘지도 개운하지도 않다.” (중앙일보 12월 17일자 35면) K팝 응원봉을 들고 국회로 몰려간 시민들의 맹활약 덕분에 최악의 역사 역주행을 기적처럼 막아낼 수 있었지만, 계엄 사태로 우리가 입은 경제적·심리적 타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계엄-탄핵 2부작 구성의 이 실시간 역사 드라마는 인기 장르물의 서사 전략에 충실한 것 같다. 개명(開明) 천지에 어떻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보편에 호소하는 상식적인 궁금증이 블랙홀처럼 시청자를, 또 시민을 사로잡는 동력이다. 계엄 트라우마 극복 노력 물거품 불법 행위 가담, 출세욕 때문인가 군 정치적 중립성 교육 강화돼야 먼저 대통령.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는 탄식이 줄을 잇는다. 알코올 중독, 그와 관계있을 법한 분노 조절 장애 등이 정치인으로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대통령의 파산을 설명하지만 충분치는 않은 것 같다. 돈키호테 같은 대통령 하나 잘못 뽑으면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는 얘기인가.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부적격자를 가려내는 데 실패했다. 안심해도 좋을 검증 방법은 없나. 한 중견 출판사 대표는 최근 “보수 성향이긴 하지만 평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원로 지식인 한 분이 부정 선거 음모론에 빠져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대통령이 불법 계엄을 감행했다는 추정이다. 악마화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대통령과 시국관이 일치하는 일정 규모의 세력을 상상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조선대 교수)씨의 진단도 비슷했다. “20~30대는 ‘소녀시대’의 노래를 합창하며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어내는 반면 대통령 주변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싹 쓸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전혀 동떨어진 시대 감각들이 공존하는 게 한국적 모더니티의 현실”이라고 했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혼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 현상이다. 죄과를 희석하자는 게 아니라, 민주화에도 기초체력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직 허약하다는 얘기다. 장군들은 왜 그랬을까. 육사 교장을 지낸 박남수 예비역 중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40여 년 전 계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군이 그동안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번 사태로 인해 그간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고 한탄했다. 상명하복에 철저할 수밖에 없는 군 조직의 특수성, 급박했던 계엄의 밤 상황은 정상참작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군들의 계엄 가담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군과 조직 생리가 비슷한 검찰 출신의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은 계엄 선포 직후 법무부 관련 회의 참석을 거부하고는 사표를 던지지 않았나. 계엄의 불법성에 대한 확신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옮긴 적극적인 항의다. 강원대 평화학과 이동기 교수는 “류혁 감찰관처럼 당장 뛰쳐나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계엄이 불법이라고 판단했다면 전출이나 휴가를 신청하는 방식으로 가담을 모면하는 길이 얼마든지 있었다고 본다”고 했다. 결국 정무직으로 분류되는 중장 계급 이상 군 가담자들의 출세욕, 이참에 이득을 누려보겠다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죄과를 엄정하게 밝혀내는 게 수사의 영역이라면 참담한 군 동원 재발을 막는 일은 정치와 제도의 영역일 것이다. 참고로, 독일 연방군은 ‘제복을 입은 시민(Staatsburger in Uniform)’을 지향한다고 한다. 국방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간단히 인터넷 번역기를 돌리는 것만으로 “독일 연방군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알지 못한다”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서 군인은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교육할 의무가 있다” 등의 원칙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 교육이라는 게 정파성 교육이 아니라는 점은 불문가지다. 반대로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교육이다. 제복을 입은 군인이지만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하는 명령에 따르지 않을 권리를 교육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립된 원칙이라고 한다. 우리 군에도 그런 교육이 시급하지 않을까. 이번 사태를 보면 비슷한 교육이 있다 하더라도 실효성이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박남수 예비역 중장은 “군 간부들을 교육할 때 군의 정치적 중립성 고취는 물론 이번 사태를 케이스 스터디 대상으로 삼아 비슷한 일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외부 위협에 대응하는 무력 집단인 군이 내부에 위협이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4-12-19

[이달의 예술] 말러의 교향곡과 ‘다시 만난 세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즈음,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음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두 번의 토요일을 경험하였다. 12월 7일 토요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다. 당시 국회의 첫 번째 탄핵 찬반 투표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콘서트홀을 꽉 채운 2000여 명의 청중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공연이 시작되면서 모두 음악에 푹 빠졌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죽음의 고독’ 등을 표현한 말러 교향곡의 장엄한 사운드는 잠시 현실을 접어 두고, 음악 그 자체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말러 교향곡이 주는 위로와 힘 여의도 국회 앞에서 부르는 K팝 음악으로 하나 된 두 번의 토요일 압도적인 사운드와 부드럽고 달콤한 선율, 우울한 민속 노래가 결합된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은 긴장감과 불편함을 풀어주며 마음의 평안함을 선사하였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말러 교향곡은 세계 운행을 고발하기 위해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며, 그 곡들이 세계 운행을 파현시키는 그 순간들은 동시에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라는 철학자 아도르노(T. W. Adorno)의 평이 보여주듯이, 말러 음악에는 세계에 대한 깊은 숙고가 담겨 있다. ‘현실은 진실이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현실에 대면하는 음악이 바로 말러의 교향곡인 것이다. 그래서 청중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에 보낸 뜨거운 박수는 말러의 음악이 고단한 현실에 한줄기 위안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으로 현실에 대면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표현으로도 읽혔다. 국회의 두 번째 표결이 진행되고 결과가 발표된 지난 토요일 14일 저녁. 여의도 국회 앞 군중들 속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들었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 K팝이 집회 현장에서 노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직접 경험하니 그 생동감이 대단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김정배 작사, 켄지 작곡)는 따라 부르기는 쉽지 않은 노래였지만, 경쾌한 리듬 속에서 활기가 넘쳐 그 음악적 흐름에 동참하게 하는 곡이었다.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등 가사가 주는 메시지는 이 노래를 소환한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알록달록한 응원봉을 흔들며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멋졌다. 뿐만 아니라 ‘삐딱하게’, ‘소원을 말해봐’ 그리고 ‘아모르 파티’도 울려 퍼졌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로 시작하여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버려둬’라는 가사가 인상적인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비롯해 노래들은 모두 신나고 경쾌했다. 사실 집회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하면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먼저 떠오른다. 1970년대 시위 현장을 주도했던 ‘아침이슬’은 나지막하게 시작하여 힘껏 목청을 높이며 결연히 부르는 노래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등의 가사 역시 진지하고 단호하다. 그런데 이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음악도 변화되고 있었다. 음악은 이렇게 사회와 함께 한다. 보통 ‘음악은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이라고 말하며 음악의 사회성을 말하지만, 음악은 단순한 사회의 반영을 넘어서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예술이다. 현실적인 삶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리얼리즘 미학의 대표주자 루카치(G. Lukacs)는 음악이 ‘외부 세계를 직접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세계인 감정을 모방하고 반영하는 이중의 모방’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음악 속 추상적인 음조의 흐름 또한 충실한 사회의 반영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지만 ‘삶의 체험이 음악으로 드러난다 해도 음악의 속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지적은 예술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고 있기에 루카치의 주장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된다. ‘예술의 힘으로 사회를 바꾸자’라는 모토를 가졌던 작곡가 아이슬러(H. Eisler)는 자신의 음악으로 혁명에 불꽃을 붙였다. 윤이상은 ‘광주여, 영원히’에서 역사적 사건을 음악에 담아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하였고, 많은 음악가가 이 시도에 화답했다. 이번 12월, 교향곡과 대중가요라는 완전히 다른 장르의 예술을 통해 음악의 사회적 힘을 실감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턴테이블에 말러의 교향곡 음반을 넣으며,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라는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를 흥얼거려 본다. 때로는 열띤 강연보다 한 곡의 노래, 한 곡의 음악이 군중을 설득하고 하나로 모으는 힘을 가진다. 음악은 그런 것이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20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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