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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금메달 뒤엔, 전술 쓰인 종이만 10㎏

중앙일보

2026.10.12 08:02 2026.10.1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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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호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 김경록 기자

박수호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 김경록 기자

그에게는 과거가 없는 것 같다. 포털에 이름을 쳐 봐도 선수 시절 활약은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중앙대 시절에도 코트보다 벤치가 익숙했다. 프로농구 SBS를 거쳐 LG에서 1999년 은퇴했는데, 남은 KBL 공식 출전 기록은 1경기 1분이 전부다. 키 1m83㎝의 평범한 슈팅가드였다.

‘무명 선수 출신 명장’은 스포츠계의 흔한 클리셰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에는 대개 공식이 있다. 선수로는 빛을 못 봤어도 지도자로 10여년 열심히 하면 인정받고, 어느새 스타 감독이 된다. 박수호(57)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은 그 공식에서도 비켜나 있었다. 2001년 수원여중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수원여고·명지고·분당경영고·중앙대, 프로 삼성 썬더스와 구리 KDB생명, 여자 청소년대표팀을 거쳤다. 주로 코치와 감독대행이었다. 지도자로 일한 4반세기 동안에도 이름을 알린 적은 없었다. 선수로도, 지도자로도 무명이었다.

그런 그가 박지수·박지현이라는 차·포를 떼고 나선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중국과 일본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한국 여자농구의 경쟁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던 때라 더 놀라운 결과였다.

비결은 그의 등에 있었다. 지난 9일 만난 박 감독은 선수용 백팩을 메고 나타났다. 작전일지와 전술 그림이 빼곡히 든 가방은 10㎏을 훌쩍 넘었다. 그는 “25년 노하우가 담긴 물건”이라며 “자동차는 잃어버려도 되지만 이건 안 된다. 외국에 갈 때도 비행기에 들고 탄다”고 했다. 집이든 호텔이든 그의 침대 곁에는 늘 볼펜과 농구 코트가 그려진 종이가 놓여 있다.

중국을 깬 비책들도 그 가방에서 나왔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아니었다. 한국은 올해 월드컵 예선과 본선에서 세계랭킹 8위 나이지리아를 두 차례 꺾었다.

그는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는 지도자다. 선수들은 그를 친구처럼 대한다. 박 감독은 “본인들 말로는 아빠 같다고 한다. 물론 좋을 때만 그런다”며 웃었다. 주장 강이슬과 이소희·이해란은 최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즐기면서 하면 농구가 제일 잘 된다”며 대표팀의 유쾌한 분위기를 전했다. 이소희는 박 감독 성대모사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의 인터뷰 영상에는 ‘로테이션 수비의 귀재’ ‘농구계의 카이사르’ ‘제갈량 뺨친다’는 찬사 댓글이 쏟아진다. ‘홍명보 감독 연봉을 여기 줘야 한다’ ‘다른 나라가 채가기 전에 빨리 장기 계약하라’는 성화까지 나온다.

벤치의 설움을 아는 그는 모든 선수를 뛰게 한다. 이번 대회 엔트리 11명은 중국전과 일본전에서 모두 코트를 밟았다. 박 감독은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선수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다. 선수들이 스스로 좋은 플레이를 하면 그 패턴을 기록해 훈련에 적용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기록한 종이가 한 장씩 백팩에 쌓인다. 1분짜리 선수 시절과 25년의 무명 세월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그의 가방은 해마다 무거워지고, 그의 농구는 점점 단단해진다.





이해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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