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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일제강점기·전쟁…간송 전형필은 어떻게 문화유산 지켰을까

중앙일보

2026.05.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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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 땅에선 사람과 물자뿐 아니라 문화유산 또한 대거 수탈당하고 있었습니다. 1922년 일본인들은 조선 최대 미술품 경매회사 경성미술구락부를 세워 우리 문화유산의 거래·유통을 장악했어요. 1945년 광복까지 260여 회에 달하는 경매가 열려 무수한 서화·도자기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됐죠. 당시 일본인이 아니면 참여가 거의 불가능했던 이곳에서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일본인 중개인을 내세워 일본인 골동상·수장가와 경합을 벌였고, 1930~44년 350여 건의 우리나라 작품을 낙찰받았어요.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 기록과 해당 유물을 중심으로 ‘간송컬렉션의 형성과 구축 과정’을 보여주는 3개년 기획의 5번째 기획전 ‘문화보국文化保國: 신념으로 지켜낸 우리의 얼’이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보화각에서 열립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시절 정성껏 보살펴준 제자 침계 윤정현에게 보답으로 써준 추사체의 정수를 담은 ‘침계(梣溪)’. 간송미술문화재단

추사 김정희가 유배시절 정성껏 보살펴준 제자 침계 윤정현에게 보답으로 써준 추사체의 정수를 담은 ‘침계(梣溪)’. 간송미술문화재단

14년에 걸친 우리 문화유산 수호의 기록은 총 36건 46점(국보1, 보물1)을 통해 전시장에 펼쳐집니다. 조선 미술사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전 시기에 걸쳐 수집한 조선회화, 근대 고미술 시장에서 주목받은 조선백자, 추사 김정희와 추사학파 관련 서화, 한국전쟁으로 유실돼 재입수한 작품 등 크게 넷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요. 전시가 시작되는 2층에서는 조선회화·백자를 아우르죠. 가장 눈길을 끄는 건 1936년 일본 수장가들과 숨 막히는 경쟁 끝에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가인 1만4580원에 낙찰받은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입니다. 청화·철화·동화 세 안료를 모두 사용한 조선 최고 수준의 도자 기술이 집약된 이 백자병 낙찰가는 군수 월급이 70원 정도였던 당시 기와집 15채 가격에 상당했죠. 이를 소개하는 1973년 중앙일보 기사와 1974년 『월간 문화재』 발췌본이 함께 전시돼 생생하게 그때 그 경매 현장을 그려볼 수 있어요.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국화와 난, 그 사이를 노니는 곤충을 청화·철화·동화를 모두 써서 구현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국화와 난, 그 사이를 노니는 곤충을 청화·철화·동화를 모두 써서 구현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1930년대 수많은 서화·도자가 팔려나가던 경매장에 온 것처럼 둘러보면 신선처럼 자유분방한 필치로 이름을 날렸던 김명국의 ‘비급전관’,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이인문의 ‘산거독서’, 조선 말기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이 그린 말 그림 ‘팔준도’ 중 2폭을 비롯해, 현재 심사정과 표암 강세황이 그림과 감상·평가를 결합·구성해 조선 후기 문인들의 특별한 감상 문화를 보여주는 화첩 『표현연화첩』 등이 걸렸죠. 이들 작품 설명에는 어떤 이의 소장을 거쳐 유통돼 간송에게 왔는지 기록도 실려 흥미를 더합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1930년대 고미술 시장에서 “가격이 병적으로 높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인 수집가들이 앞다퉈 사들였던 조선백자 12건 13점이 놓였어요. 소 모양 제기인 ‘백자희준’과 함께 전설 속의 신수 해태를 형상화한 ‘백자해태형연적’ ‘백자청화해태형연적’, 사자 모양의 ‘백자청화사자형연적’, 조선 기와집 모양의 ‘백자청화철채산수문가형연적’ 등 다양한 형태의 연적과 문방구가 한자리에 모였죠.
작지만 대와 받침, 굽이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꽃잎 표현도 일정하여 전체적으로 단정한 자태의 ‘백자화형향꽂이’. 간송미술문화재단

작지만 대와 받침, 굽이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꽃잎 표현도 일정하여 전체적으로 단정한 자태의 ‘백자화형향꽂이’. 간송미술문화재단

1층에서는 조선·중국·일본을 넘나든 19세기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 추사 김정희와 그의 학예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중국 문인들의 교류사를 함께 살필 수 있습니다. 예서와 해서가 혼용된 독창적인 추사체의 정수를 담은 수작이자 보물인 ‘침계(梣溪)’와 힘차고 개성 넘치는 글씨 ‘사야(史野)’가 시선을 사로잡고요. 1930년 2월 경성미술구락부 경매회에서 최초로 입수, 간송컬렉션 수집의 시작을 알린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의 『석파묵란첩』 중 2개 면이 공개돼 추사를 계승한 석파란의 진수를 보여주죠. 추사의 제자 고람 전기(田琦)의 ‘고람유묵’ 등 4건 6점은 최초 공개됐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 부임한 중국의 팽광예와 주미공사관원 강진희가 함께 그린 ‘미사묵연’ 화첩에 실린 ‘화차분별도’. 간송미술문화재단

19세기 후반 미국에 부임한 중국의 팽광예와 주미공사관원 강진희가 함께 그린 ‘미사묵연’ 화첩에 실린 ‘화차분별도’. 간송미술문화재단

일제강점기 지켜냈던 보화각 수장품은 한국전쟁 중 일부가 유실됐어요. 광복 이후 수집을 중단했던 간송은 전쟁통에 수장품이 뿔뿔이 흩어지고 파괴되는 위기를 맞자 전쟁이 끝나고 대한고미술협회를 주요 통로로 삼아 재입수에 나섰죠.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1950년 피난하러 기차 타고 부산 도착하니 서울에 두고 온 유물이 벌써 팔리고 있더라는 말씀을 들은 적 있다”며 “보화각 인장이 찍힌 걸 보고 돌려주시기도 했다”고 했어요. 미국에서 기차를 처음 본 조선 지식인이 남종화풍에서 비롯된 간결한 필치와 여백으로 그려낸 강진희의 ‘화차분별도’ 등 재수집한 수십 점 중 2건 3점이 전시됐죠. 이와 함께 간송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회에 응찰하며 남긴 경매 도록 중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이 실린 도록 4건이 전시됐는데요. 응찰 작품의 가격을 연필로 꼼꼼히 기록한 흔적은 우리 문화유산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한 수장가의 확고한 신념과 안목을 느낄 수 있게 하죠.
1933년 일본서 열린 경매에서 구입한 뒤 88년간 보화각 앞을 지킨 청나라 석사자상은 올해 중국으로 귀향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1933년 일본서 열린 경매에서 구입한 뒤 88년간 보화각 앞을 지킨 청나라 석사자상은 올해 중국으로 귀향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보화각 앞을 90년 가까이 지켜온 한 쌍의 청나라 석사자상은 간송의 유지를 받들어 올해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뒤를 이어 1935년 3월 경성미술구락부에서 낙찰받은 석호상 한 쌍이 입구에 놓일 예정이죠. 민화풍으로 만들어져 호랑이라기보단 고양이 같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더피’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귀여운 지킴이예요. 문화유산 약탈의 통로를 수호의 현장으로 바꿔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고 광복 이후 우리 문화사를 회복하려는 문화보국의 치열했던 실천 과정은 6월 14일까지 볼 수 있습니다.

문화보국文化保國: 신념으로 지켜낸 우리의 얼
장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보화각
기간: 6월 14일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
관람료: 성인(만 19~64세) 5000원, 어린이·청소년·어르신(만 7~18세 및 만 65세 이상) 3000원, 온라인 전시+교육 패키지 예약 시 전시설명 프로그램 이용 가능







김현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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