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침에] 늦은 나이에 찾은 노래의 날개

이영신 수필가
사실, 나는 음치였다. 음악 앞에 서면, 온몸에 돋는 긴장의 가시가 바짝 세워져 경계 태세가 되었다.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그 아름다운 세계 안으로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이 심리적 외상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다.
한국전쟁 시기에 이북에서 내려온 우리 가족은 부산 피난민 촌에 살았다. 그곳에서 어린 유년기를 보냈지만 내 기억은 서울로 이사 온 날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중심부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담임선생님은 전학서류의 내 성적을 보고 반 친구들에게 ‘우수한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남달리 음악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음악 수업이 있는 반을 따라 옮겨가는 풍금은 거의 매일 우리 반에 머물렀다.
그날도 풍금이 우리 반에 놓였다. 선생님은 나를 부르더니 음악책이 펼쳐진 풍금 곁에 세워두고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노래는커녕 계명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바래보이며 안개 속에 고립된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심장만 요동칠 뿐 목소리는 납덩이처럼 굳은 몸과 함께 뭉뚱그려져 버렸다.
꼼짝없이 서 있는 나를 고의로 노래하지 않는다고 보았는지 선생님은 채근 끝에 회초리를 들었다. 내 손바닥 위로 열 번의 매가 내리쳐 졌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아픔이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 모멸감과 함께 참담한 상처를 남겼다.
그날, 내 안의 음악을 향한 문이 굳게 닫혔다. ‘나는 음악을 모른다’는 절망의 각인이 마음 판에 무겁게 내리 찍혔다. 그 후, 음악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전환점을 맞았다. 새로운 거처로 이사하면서 찾게 된 교회에서 성가대의 찬양이 가슴 깊이 울려왔다.
안내하던 분 앞에서 무심결에 ‘나도 성가대원이 되고 싶네요’ 라 말했다. 단순한 감탄의 표현이었지만, 성가대 연습에 참여해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권유는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같았다. ‘연습이라면 해 보리라’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나는 그 부름에 순응하고 있었다.
음치인 내가, 노래를 두려워하던 내가 과연 성가대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대원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는 지휘자의 손짓과 표정 하나하나에 열중하며 배워 나갔다. 연습을 거듭하며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노래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침내 부활절 날, 나는 성가대의 일원으로서 첫 찬양을 올렸다.
‘할렐루야’를 부르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음악은 이제 강박의 사슬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날개가 되었다.
성가대원이 된 것은 내 노년의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찬양은 나를 치유하는 기도이고, 내 영혼을 두드리는 축복이다. 오늘도 나는 감사와 기쁨을 실어 찬양한다. ‘할렐루야!’
이영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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