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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늦은 나이에 찾은 노래의 날개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나는 성가대에 입문했다. 단순히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음악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오랜 세월 기피하던 음악과의 정식 대면이 더는 두려움이 아닌 설렘이 되어 노래의 선율 위로 기쁨의 나래를 편다.   사실, 나는 음치였다. 음악 앞에 서면, 온몸에 돋는 긴장의 가시가 바짝 세워져 경계 태세가 되었다.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그 아름다운 세계 안으로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이 심리적 외상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다.   한국전쟁 시기에 이북에서 내려온 우리 가족은 부산 피난민 촌에 살았다. 그곳에서 어린 유년기를 보냈지만 내 기억은 서울로 이사 온 날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중심부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담임선생님은 전학서류의 내 성적을 보고 반 친구들에게 ‘우수한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남달리 음악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음악 수업이 있는 반을 따라 옮겨가는 풍금은 거의 매일 우리 반에 머물렀다.   그날도 풍금이 우리 반에 놓였다. 선생님은 나를 부르더니 음악책이 펼쳐진 풍금 곁에 세워두고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노래는커녕 계명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바래보이며 안개 속에 고립된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심장만 요동칠 뿐 목소리는 납덩이처럼 굳은 몸과 함께 뭉뚱그려져 버렸다.     꼼짝없이 서 있는 나를 고의로 노래하지 않는다고 보았는지 선생님은 채근 끝에 회초리를 들었다. 내 손바닥 위로 열 번의 매가 내리쳐 졌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아픔이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 모멸감과 함께 참담한 상처를 남겼다.   그날, 내 안의 음악을 향한 문이 굳게 닫혔다. ‘나는 음악을 모른다’는 절망의 각인이 마음 판에 무겁게 내리 찍혔다. 그 후, 음악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전환점을 맞았다. 새로운 거처로 이사하면서 찾게 된 교회에서 성가대의 찬양이 가슴 깊이 울려왔다.   안내하던 분 앞에서 무심결에 ‘나도 성가대원이 되고 싶네요’ 라 말했다. 단순한 감탄의 표현이었지만, 성가대 연습에 참여해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권유는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같았다. ‘연습이라면 해 보리라’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나는 그 부름에 순응하고 있었다.   음치인 내가, 노래를 두려워하던 내가 과연 성가대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대원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는 지휘자의 손짓과 표정 하나하나에 열중하며 배워 나갔다. 연습을 거듭하며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노래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침내 부활절 날, 나는 성가대의 일원으로서 첫 찬양을 올렸다.   ‘할렐루야’를 부르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음악은 이제 강박의 사슬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날개가 되었다.   성가대원이 된 것은 내 노년의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찬양은 나를 치유하는 기도이고, 내 영혼을 두드리는 축복이다. 오늘도 나는 감사와 기쁨을 실어 찬양한다. ‘할렐루야!’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나이 노래 성가대 연습 음악 수업 손바닥 위로

2025-03-30

"함께 노래하며 봉사해요"…아리랑합창단 단원 모집

아리랑합창단(단장 김경자, 지휘 김정민)이 정기 연주회를 앞두고 단원 모집에 나섰다.   오렌지카운티의 대표적 여성 합창단 중 하나인 아리랑합창단은 오는 9월 27일 정기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김경자 단장은 “2년마다 정기 연주회를 열고 있다. 곧 장소와 시간을 확정하려고 한다. 더 멋진 화음을 들려주기 위해 일찌감치 단원을 모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등록된 단원은 34명이지만, 평소 연습에 참가하는 이는 27명 정도다. 김 단장은 “단원 모집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느냐다. 노래를 사랑하고 단원들과 가족처럼 화목하게 지내면서 지역 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50~70대 한인 여성은 누구나 환영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창단 28년째를 맞은 아리랑합창단은 한인 단체 행사 출연, 양로병원 위문 공연, 불우이웃 돕기, 장학금 전달 등 다양한 봉사 활동에 앞장서왔다. 또 연주회 수익으로 한인 단체와 교회를 돕기도 했다.   오랜 봉사 활동으로 지난해 4월엔 김 단장을 비롯한 단원 6명이 대통령 평생봉사상을 받았다. 이들은 각자 누적 4000시간 이상 봉사 실적을 인정받아 수상했다.   아리랑합창단 임원은 김 단장과 김영순, 심라윤 부단장, 차귀옥 총무, 린다 노, 박오현 재무, 박자원 악보부장, 김춘자 감사, 데이지 김 소프라노 팀장, 최혜숙 봉사 부장 등이다.   아리랑합창단은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가든그로브의 성공회 가든그로브 교회(13091 Galway St)에서 모여 연습하고 있다.   문의는 김경자 단장(714-915-2399)에게 하면 된다. 글·사진=임상환 기자노래 봉사 대통령 평생봉사상 봉사 활동 봉사 부장

2025-03-13

비극적인 삶에 바탕 둔 ‘디바’의 사랑과 노래

1977년 사망 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오페라 역사에서 그녀의 위상을 넘어서는 디바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마리아 칼라스만큼 앨범 판매가 많은 음악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은 그녀의 변덕스러운 행동, 레나타 테발디과의 숙명의 라이벌 관계,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로맨스를 보도하는데 더 열을 올렸다. 그녀의 위대한 예술가적 면모는 가려져 있었던 경향이 있다.     안젤리나 졸리는 끊임없는 사회공헌으로 현존하는 할리우드 배우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로 꼽힌다. 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으로 그녀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안젤리나 졸리가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한다. 졸리는 칼라스를 연기하기 위해 7개월 동안 오페라 발성 훈련을 받았다. 질곡 어린 삶의 절규와 사랑을 노래했던 칼라스와의 ‘동질감’이 그녀의 연기를 돋보이게 했는지 모른다.   칼라스의 예술적 업적은 그녀의 비극적인 삶에 바탕을 둔다. 1923년 뉴욕 맨해튼에서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세상에 나와,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오페라 최고의 디바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장기의 칼라스는 아들을 원했던 어머니로부터 구박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13세 딸을 음악학교에 입학시켰고 그녀의 운명적 대성에 밑거름이 됐다.     이탈리아에서 경력을 쌓아가던 칼라스는 1950년 2월 꿈의 무대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 처음 서게 된다. ‘아이다’ 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병이 난 테발디의 대타로서였다.     칼라스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테발디의 질투와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차별을 받았지만, 굳건히 자신만의 독자적 아성을 구축했다.     칠레 출신의 영화감독 파블로 라라인이 연출한 영화 ‘마리아’는 지난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놓고 경쟁했다. 초연 후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리스를 비롯해 파리, 밀라노 등 전 세계를 돌며 촬영을 마친 ‘마리아’는 마리아 칼라스가 1977년 파리에서 사망하기 전 7일 동안의 삶을 되돌아본다.     2016년 재클린 케네디의 전기영화 ‘재키’, 2021년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의 삶을 영화화한 ‘스펜서’에 이은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20세기 주요 여성 전기영화 3부작 중 세 번째 영화로 앞의 두 작품처럼 주인공의 잠재 심리를 쫓는 심리 드라마의 형태로 전개된다.     1977년 9월 16일, 프랑스 파리의 외곽 한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마리아 칼라스가 그녀의 집사 페루치오(피에르 프란체스코 파비노)와 하녀 브루나(알바 로르바허)에 의해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녀 나이 55세.     일주일 전, 건강 악화로 오페라 출연을 중단했던 마리아는 다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싶어한다. 페루치오는 마리아에게 의사를 만나 약을 처방받자고 제안한다. 반면, 마리아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수면제 맨드렉스를 과다하게 복용한다.     마리아는 페루치오와 브루나에게 텔레비전 제작진이 자신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집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한다. ‘맨드렉스’라는 젊은 영화 감독이 이끄는 제작진이 도착한다. 맨드렉스 과다 복용으로 인한 마리아의 환각! 페루치오와 브루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텔레비전 제작진. 마리아는 일주일 동안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와 만나 그녀가 다시 공연할 수 있는지를 타진한다.     마리아의 환상에 나타나는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1957년 그의 첫 구애를 거절했지만, 곧 그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오나시스와 세기의 사랑 행각을 벌인다. 늘 대중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그의 임종을 지켜봤다.     지속하는 마리아의 맨드렉스 과다 복용. 환상과 현실을 오간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어머니가 돈을 받고 이탈리아와 독일 장교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했던 10대 시절의 기억,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분노. 비관적이기만 했던 그녀가 언니 야킨티를 만나고 두 사람은 어머니가 자신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돌아본다.     마리아는 마침내 의사 퐁텐블로 박사를 만난다. 그러나 자신의 약물 사용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퐁텐블로는 마리아가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진단한다.     마리아는 그녀의 운명적 라이벌 레나타 테발디와도 재회한다. 테발디의 마지막 세션에 참여,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오디오 레코더를 가져간다. 그러나 더는 전성기 시절의 노래를 부를 수 없음을 깨닫고 슬픔에 잠긴다. 한 기자가 세션을 몰래 훔쳐봤다며 무례한 질문을 던지자 페루치오가 그를 밀쳐 낸다.     마리아는 페루치오와 브루나에게 오랫동안 곁에 있어 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 페루치오와 브루나는 식료품 쇼핑을 위해 외출한다. 비어있는 아파트에 홀로 있는 마리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 삶의 마지막 노래!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마리아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좀 더 가까이 듣기 위해 몰려든다.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페루치오와 부루나, 멀리서 들려오는 마리아의 노랫소리에 발길을 멈춘다. 잠시 후 아파트로 돌아온 그들은 삶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다 바닥에 쓰러진 마리아를 발견한다.   영화의 종반부는 삶을 마감하기 전 오나시스와의 못다 한 사랑으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던 마리아의 슬픈 삶에 집중한다. 옛 연인의 사망은 약물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이어졌고 1977년 9월 16일 심장마비로 55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노래와 사랑에 살았던, 인류사의 영원한 아이콘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가고 없지만, 전설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칼라스는 진정 ‘라 디비나’(오페라의 여신)였다. 그녀의 삶 자체가 드라마였고 오페라였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노래 사랑 영화감독 파블로 소프라노 오페라 오페라 역사

2025-01-29

YMCA 노래 함께 부르며 ‘USA’ 연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전날인 19일 워싱턴 D.C.의 실내 경기장 캐피털 원 아레나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집회를 열었다.     오후 3시부터 시작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보다 3시간 전인 12시부터 대기줄은 네 블록 이상 이어졌다. 눈과 비가 내린 추운 날씨에도 지지자들의 모습은 밝았다. 트럼프의 얼굴과 MAGA 등이 적힌 티셔츠와 모자, 털모자, 깃발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보였고 트럼프 집회에 단골로 나오는 ‘YMCA’ 노래를 튼 지프차와 인력거 등이 행사장 인근을 돌아다녔다.     줄을 선 시민들은 ‘USA’, ‘싸우자(Fight)’ 등의 구호를 외쳤고 YMCA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람들도 보였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집회에서 이 노래에 맞춰 그의 상징처럼 된 엉거주춤한 춤을 췄고 지지자들도 그의 춤을 따라서 췄다. 조지아주에서 왔다는 신디아 브라운은 “취임식엔 밤을 새워서라도 연설을 직접 듣고 싶다”며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내일 해가 질 때쯤 되면 미국을 향한 모든 침략 행위가 멈출 것”이라고 지지자들 앞에서 밝혔다. 이어 “내일 정오가 되면 미국의 4년간의 쇠락이 멈추고 미국의 힘과 번영, 자존심이 새롭게 발현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추방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의 상황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움직임”이라며 “내일부터 미국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도 워싱턴 D.C.에서 대규모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을 한 것은 2021년 1월 6일 의회 난동 사태 이후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사태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거나 기소된 사람들 1500명 이상을 사면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그는 이들을 ‘인질’이라고 표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취임하는 즉시 “바이든 행정부에서 발동한 급진적이고 멍청한 행정명령을 취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실패하고 부패한 워싱턴의 정계 기득권을 끝장낼 것”이라고도 했다.  김영남 기자노래 연호 트럼프 대통령 트럼프 집회 도널드 트럼프

2025-01-20

[아름다운 우리말] 시절을 노래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읽다가 놀란 점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일본의 시 장르인 ‘하이쿠’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도 일본 ‘바쇼’의 하이쿠를 읽은 적이 있고,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하이쿠의 예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책 속의 여러 강의 내용이 하이쿠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고, 시를 소개하면서 하이쿠를 아주 매력적인 장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서양에서 하이쿠의 위력 또는 매력을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된 작은 도서관에서 ‘하이쿠’ 창작 모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로 하이쿠를 읽고 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무엇이 서양인에게 하이쿠가 매력적으로 다가갔을까요? 하이쿠에 나타나는 선시(禪詩)의 분위기가 작은 깨달음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우리 시조(時調)와 가사, 고려가요, 향가 등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시는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요? 어떤 매력으로 소개되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대부분의 시조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김상헌)’ 같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노래가 많았습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정철)’이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황진이)’ 같은 교훈성이 있는 시조가 많았습니다.     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만 학생들은 시조의 매력에 빠지기 어려웠습니다. 문학 교육이 오히려 문학 향유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절묘한 가락을 담은 시조를 가르치고 기억하게 한다면 시조를 즐기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겁니다. 여러 작가가 노력하고 있지만, 시조는 우리 문학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좋은 시조나 가사, 고려가요, 향가를 문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라 향가가 일본의 만엽집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요. 현존하지 않는 향가집 삼대목이 발견되기 기대해 봅니다.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향가 14수에서 향가의 매력을 다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저는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음에 나는 간다고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제망매가)’에서 누이를 잃은 깊은 슬픔에 동감합니다.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고려가요는 우리의 감정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민요와 이어지는 깊은 연계도 느낍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가시리)’나 ‘살어리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청산별곡)’의 운율과 솔직함을 만납니다. 시조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등의 묘사에서 낭만을 만납니다.   향가에서 고려가요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우리 노래들입니다. 시조의 매력을 잘 살피고,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에게도 알리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넘어서는 공통의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알리지 못한 매력을 찾아내어 세계 속으로 잘 소개해야겠습니다. 좋은 번역이 필요한 이유도 되겠습니다. 시조(時調)의 시는 때라는 뜻입니다. 한 시절을 노래하는 시(詩)가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노래 우리 시조 향가집 삼대목 가사 고려가요

2025-01-19

[이 아침에] 추억의 옛 가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운동하거나 산보를 하며 노래 듣기를 좋아하셨다. 허리에 워크맨을 차고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옛노래를 헤드폰을 끼고 듣곤 하셨다. 카세트는 30분 한 면이 다 돌고 나면, 테이프를 바꿔 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한번 충전에 몇 시간이고 중단 없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아이팟을 여동생이 사 드렸는데, 그 자그마하고 생소한 기기가 불편하셨던지 얼마 후에는 다시 워크맨으로 돌아갔다.     20여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한창 유행하던 해바라기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지인이 CD를 선물하겠다고 했다. 한데 그때 내 차에는 CD 플레이어가 없었다. 카세트테이프를 사달라고 했다.     그 후 장만한 차에는 CD를 6장 넣고 들을 수 있는 CD플레이어가 있었고, 지금 타는 차에는 USB를 꽂아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다. 요즘은 블루투스로 스마트 폰을 연결하여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전화기에 담을 필요도 없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 연결해서 듣는다.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모아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연결해서 들을 수도 있다.     요즘 미국 음원 사이트에는 웬만한 한국노래는 다 있다. 최근에 애플 뮤직에서 ‘추억의 옛 가요’ 음반을 찾았다.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같은 옛 노래가 원곡 그대로 들어 있다. 아버지가 즐겨 듣고 부르시던 노래다.     내가 ‘세시봉’의 노래를 즐겨 듣던 무렵, 아버지는 나이 든 가수들이 등장하는 가요무대를 즐겨 보곤 하셨다. 재미없는 노래를 지그시 눈을 감고 듣는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지곤 했었다.     음악은 취향이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노래가 다를 수 있지만, 대개는 젊은 시절 들었던 노래, 또는 이와 유사한 성격의 노래를 즐겨 들을 것이다. 나 역시 7080 노래를 즐겨 듣는다. 하지만 최근 발견한 ‘추억의 옛 가요’도 이제 즐겨 듣는 플레이 리스트에 올려놓고 가끔 한 번씩 듣곤 한다.     처음 이 음반을 듣던 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내 몸은 이 노래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리워서, 지난 세월이 아쉬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50-60년 전에 들었던 노래가 전해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     봄날 파랗게 싹을 틔워 나오던 새싹이 어찌 가을을 알고 낙엽을 알겠는가.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비바람을 겪어야 다가올 가을을 예감할 수 있을 터.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어 온갖 호사를 누린 사람이나, 허름하고 소박한 삶을 산 사람이나, 결국 가을이 되면 다 비슷한 길에 들어선다.   옛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추억하고, 지금은 사라진 이들을 생각하고, 내게도 다가올 마지막 잎새를 기다린다. 가을은 그렇게 깊어 간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추억 가요 노래 듣기 음원 스트리밍 cd 플레이어

2024-10-30

“시카고서의 첫 공연 최고였다”

한국 최고 여자 솔로 가수로 꼽히는 아이유(31)가 시카고를 매료시켰다.     자신의 첫 월드투어 'HEREH'에 나선 아이유는 지난 25일 4번째 미국 공연을 위해 시카고를 찾아 서 서버브 로즈몬트 소재 올스테이트 아레나에서 2만2000여명의 팬들과 함께 했다. 아이유의 콘서트 티켓은 지난 3월 프리세일을 시작하자마자 단 몇 분만에 매진됐다.     오후 7시30분 시작한 콘서트는 3시간 넘게 진행됐고, 아이유는 수 차례 앵콜 곡을 부르며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겼다.     '홀씨'로 오프닝을 연 아이유는 '어푸', '삐삐', '셀러브리티', '블루밍', 'Coin', 'Eight', 'Strawberry Moon', '너랑나' 등 20개 넘는 히트곡을 차례로 선보였다. 이어 앵콜에서 'Shh', '스물셋'을 선보인 아이유는 최종 앵콜곡으로 팬들이 현장에서 요청한 '라일락', 'Love Poem', '이 지금'을 부르고 '팔레트'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아이유는 이날 팬들에게 "지금까지 방문한 4개의 도시가 모두 훌륭했지만, 시카고 팬들이 정말 잘 놀고, 유독 오프닝부터 내가 사랑 받는 느낌이다"라고 첫 인사를 건넸다. 그는 "특히 공연장이 위치한 로즈몬트라는 도시 이름이 너무 로맨틱하면서 예쁘고, 뭔가 장미가 곳곳에 피어 있을 것 같다"며 "그래서 시카고 로즈몬트를 위해 오늘 입을 모든 의상은 특별히 장미 테마로 맞춰봤다"고 설명했다.     아이유는 공연 도중 '블루밍'에서는 꽃을, 그리고 'Coin'할 때는 코인 기념품 등을 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 날 공연장을 찾은 팬들에게 유에나(아이유 팬클럽)는 아이유 노래 '바람꽃'의 가사를 인용한 '바람의 도시는 지은꽃(아이유 본명 이지은)의 마음에 흩어져 날리며'라고 문구가 적혀 있는 플래카드를 나눠줬다. 아울러, 좌석마다 아이유 얼굴이 프린트 되어 있는 자석, 열쇠고리, 포토카드, 케이스 등이 선물로 제공됐고, 아이유는 콘서트 도중 "엄마가 팬 분들께 나눠주라고 직접 준비하셨다"고 밝혔다.     오하이오 주에서 방문한 태국계 멜린다 리(26)는 "아이유가 그냥 말할 때는 목소리가 쉰 것 같아 걱정했는데, 노래 부를 때는 정말 놀라울 만큼 대단했다"며 "따라부르는 게 민망할 정도로 아이유의 가창력이 뛰어났고, 정말 콘서트를 오길 잘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애리조나에서 왔다는 일본계 메이 아오이(24)는 "아이유를 너무 보고 싶어서 날아왔다. 다른 가족을 보러 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이유 때문에 왔다"며 "하지만 가족들에겐 비밀이다"라고 말했다.     시카고에 거주하는 김희성(33)씨는 "한국에선 아이유 티켓을 구하는 게 하늘에 별따기인데, 시카고에서라도 실제 접하게 돼 굉장히 기쁘다"라고 말했고, 그와 함께 온 이주이(32)양은 "아이유가 무대에 나타나자마자 요정이 나온 줄 알았다. 정말 너무 예쁘다"고 밝혔다.     아내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벤 에반스(56)는 "아이들 때문에 아이유를 처음 알게 됐다. 가사를 100%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분위기와 편안해지는 마음으로 인해 아이유 팬이 됐다"고 말했다.   콘서트를 마무리하며 아이유는 "시카고는 처음이지만, 여러분들은 정말 최고였다"며 "여러분들 덕분에 더 힘을 낼 수 있었고, 곧 다시 또 오겠다"고 말했다.   2008년 데뷔한 아이유는 지난 3월 2일 HEREH 월드투어를 시작했고, 시카고에 이어 오는 30일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투어 일정을 이어간다.   Jinju Yi•Soyoung Lee시카고 공연 시카고 팬들 아이유 노래 아이유 티켓

2024-07-26

[문화산책] 천개의 바람이 되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다. 내 개인적 느낌이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크게 줄어든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말아요/ 거기에 나는 없어요/ 잠들어 있지도 않아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어/ 저 드넓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어요”   몸은 죽었지만 넋과 얼은 천개의 바람이 되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이 노래는 사후세계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종교적인 관점이다.   “가을에는 햇살이 되어 들녘에 내려 비춰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되지요/ 아침엔 새가 되어 당신을 깨워주고/ 밤에는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드려요.”   일반적인 장송곡이나 추모곡은 산 자들이 죽은 이를 애통해하고 위로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노래는 그와 반대로 죽은 이가 산 자들을 위로하는 관점의 시라는 점이 신선하게 돋보인다. 그래서 설득력도 강하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일본의 소설가이자 작곡가, 그리고 가수로도 활동한 아라이 만(新井滿, 1946~2021)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이를 위한 추모곡은 많았지만, 죽은 이가 산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노래는 이게 처음이지요.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이 수십억 광년 떨어진 곳에 간 게 아니라 바람이 돼서 내 곁에 있다는 가사는 사람들에게 위로는 물론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줍니다. 그게 이 노래의 힘이죠. 나도 얼마 전 장례식장에서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노래는 아라이 만이 암으로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친구를 위해 만든 노래로, 2003년에 일본에서 발표되어 사회적 신드롬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모든 장례식장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전국 각지에 노래 연구모임이 생겨났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물론, 작곡가인 아라이 만의 장례식에서도 이 노래가 울려퍼졌다.   한국에서도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이 노래를 불러 김수환 추기경 추모곡, 노무현 대통령 추모곡으로도 사용이 되었고,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 조계종을 비롯한 여러 추모행사에서 이 노래가 추모곡으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적신 것은 가사의 울림 때문이다. 이 가사는 작자 미상의 영문 추모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시는 마릴린 먼로 25주기 추도식(87년)과 9·11테러 희생자 1주기 추도식 등에서 낭독됐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노래로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   이 노래 가사의 원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전래하여 오는 시(詩)라는 설에 공감한다.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 때문이다. 인간은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노래 가사처럼 나도 죽은 뒤에 무덤 속 관 안에 누워 있지 말고, 바람이 돼서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죽음이 두렵지만은 않다.   불어오는 바람도 전과 달리 새삼스럽다. 오래전 세상 떠난 그리운 사람들이 바람이 되어 찾아온 것 같아 엄청 반갑고 고맙다. 그런데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참 안타깝다.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이 떠오른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바로잡습니다=지난 5일자 문화산책 '미국에 감사하는 마음' 내용 중 ‘6·25재단 설립자'는 구성열씨로 바로잡습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바람 노래 가사 대통령 추모곡 팝페라 가수

2024-07-11

[문예 마당] 내가 노래하는 국가<國歌>

  ‘숙녀, 신사 여러분! 모두 모자를 벗으시고, 기립해 주십시오. 오늘은 OOO-미준-류-OO 양이 국가를 부를 것입니다.’   지난 5월 초 LA를 떠나, 뉴멕시코로 이사 간 손주들을 만나러 갔을 때 마침 ‘아시안·태평양 문화유산의 달’을 기념하는 야구 경기가 아이소토프 (동위원소라는 뜻) 경기장에서 열렸다.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기보다는 손녀가 미국 국가를 독창하는 모습을 관람하기 위한 참석이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운동 경기를 직접 관람한 경험이 많지 않고, 관심도 없었던 편이다. 그렇기는 해도 선수들이 온 힘을 다해서 팀을 위해 뛰는 모습은 그들이 하늘로 쏘아 올리는 정열의 함성과 함께 희망을 약속하는 것 같아 흥분된다. 그뿐 아니라 관중석에 앉아서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간에 선수들을 응원해 주는 정서가 부럽고, 아름답다.  야구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시안·태평양 문화유산의 달’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태평양계 여성들이 빨간 꽃으로 머리단장을 하고, 하와이안 훌라 춤을 추었다.     5월이 아태 문화유산의 달이 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본인이 미국에 첫발을 디딘 것이 5월(1843년)이었고,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져 있던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어 완성된 것이 5월(1869년)이었는데, 이 공사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7년에 걸쳐 일 한 것을 기리는 의미도 있다. 1978년 카터 대통령 때 일주일 동안 축하하는 것에서 시작했던 것이 1992년에 한 달로 연장되었다. 아태계는 아시아, 폴리네시아 등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한다.     경기가 시작된다고 방송이 울리자, 아이는 투수판에 섰다. 가족들이 있는 곳을 향해 돌아서서, 손 키스를 날린 후, 제가 선 자리에서 400피트는 족히 넘을 듯한 경기장 다른 쪽 끄트머리에서 늠름하게 휘날리는 미국 국기, 뉴멕시코 주기를 향해 반듯하게 차렷 자세로 섰다. 두 옥타브를 아우르는 미국 국가가 아이의 약간 굵고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음성을 타고 편안하게 마이크를 통해서 야구장과 객석을 넘어 세상으로 퍼졌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남녀노소 관중들, 자리를 찾아 이동 중이던 사람들, 솜사탕과 초록색 드링크를 팔러 다니던 상인들도 모두 멈추어 섰다. 객석에서 내려다보이는 경기장 잔디 위 곳곳에는 팀별로 모여 선 선수들이 우리처럼 차렷 자세로 펄럭이는 국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리와 다른 점은 그들은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국기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의, 국가를 부를 때의 경건함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지켜지는 에티켓이다. 공식적인 자국 행사나 국제 행사 때에 관련 나라의 국기를 게양하고, 해당 국가의 국가를 제창한다. 이 때, 남자는 모자를 벗어서 오른손으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모자와 오른손을 얹는다. 제복을 입은 경우, 거수경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여자는 모자를 벗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어린 시설을 서울 용산구에서 보냈는데, 근방에 미군 부대가 있었다. 오후 5시, 혹은 6시쯤에는 미국 국가와 애국가가 들렸다. 어린이들도 놀이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는 어른들을 본떠 엄숙하게 차렷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런데, 만약, 국가를 합창으로 무대에서 부른다면  이때도 관객은 기립해야 할까? 실제로 합창단이 무대에서 국가를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관객의 절반 정도는 기립했고, 나머지는 어정쩡하게 결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객석에 있던 우리 가족의 의견도 갈렸다. 애국이라는 의미를 갖고 부른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음악 작품의 하나로 불렀던 4부 합창곡이었다. 기립해서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강세였다.   야구장이 있는 공원에 아이소토프라는 이름이 붙여진 내막은 TV 시리즈 ‘심프슨 가족’시즌 2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역사적, 정치적으로 그 지역에는 핵 연구소가 있기에, 아이소토프라는 이름을 밑받침하기도 한다. 아이소토프는 과학과 의학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번 방문으로 ‘핵’, ‘과학’, ‘실험’이라는 말들은 서로 줄 긋기를 하면서,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종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모든 치료의 공정성, 전쟁 방어의 정당성, 그 외에도 전쟁 종결을 유도하는 역사적 타당성도 보여 주었다.     나의 전공인 종양 방사선학은 ‘동위원소’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이다. 그래서 암을 완치할 수 있는 동위원소를 발견했던 과학자들에게 감사하다. 핵 때문에 인류가 고통을 당했다는 말도지만, 반대로 핵 때문에, 집단적인 고통이 종결된 예도 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나가사키,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조선인, 중국인들의 고통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지속하였을 것인가?     아이소토프 공원, 국기와 국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의 숨겨진 세상에서 잠자고 있다가 안개를 걷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위원소들과 에너지, 핵, 암 치료 기계들을 세상 밖으로 초대해 주지 않았던 과거 수십 년 동안, 우리 대중은 파편적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손녀는 별들이 장식된 국기를 칭송하는 국가를 부르고, 나는 내 아버지의 나라, 내 모국의 애국가를 손녀의 국가에 덧붙여 부른다. 그리고 더는 새로운 전쟁이 없기를, 지금 진행 중인 전쟁들이 빨리 종식되기를 기원한다.   류 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국가 노래 경의 국가 해당 국가 경기장 잔디

2024-06-20

[문화산책] 전쟁의 아픔, 통일 염원

6월 하순이면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진다. 내가 삼팔따라지의 후손으로, 험난하고 설음 많은 피난살이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70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인데, 아직도….   두 동강으로 쪼개져 오물 풍선 날아오고, 대북 전단 날리고 확성기 왕왕 틀어대며 으르렁거리는 현실에서는 잊었던 아픔마저 되살아난다. 답답하다.   이런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으로 나는 좋은 음악이나 시 같은 예술작품을 찾아 기댄다. 거창하게 작품감상이랄 정도는 아니고, 그저 전쟁의 아픔을 상기시키는 작품 중 몇 가지를 집중적으로 듣고 읽는 정도이다.   예를 들자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카잘스의 ‘새의 노래’, 시벨리우스의 ‘필란디아’ 같은 음악, 채플린의 ‘독재자’ 같은 영화, 문학작품으로는 윤석중 선생님의 통일시, 장용학의 소설 ‘원형의 전설’ 도입부, 노래로는 ‘삼팔선의 봄’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단장의 미아리고개’ 같은 유행가,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 등등….   미술작품 중에는 찾아보고 싶은 작품이 뜻밖에 많지 않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고야의 학살 같은 작품은 오히려 전쟁의 상채기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는다. 케테 콜비츠의 조각작품 ‘피에타’ ‘비통한 부모’, 한운성의 ‘매듭’ ‘월정리역’ 같은 작품을 다시 본다.   전쟁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 모두 살벌하고 참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성도 높고 아름다운 작품이 오래 가슴에 남는다. 윤석중 선생의 시 ‘되었다 통일’도 그런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산맥들, 강들, 꽃들, 새들, 모두 이미 통일되었고, 이제 사람만 남았다는 안타까움….특히 마지막 구절이 아프다.   ‘통일이 통일이/ 우리만 남았다. 사람만 남았다.’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도 동화처럼 쉽고 정겨운 노랫말로 겨레의 아픔과 극복의 의지를 절절하게 노래한다.   ‘거기 서 있는 그대 숨소리 들리는 듯도 해/ 이렇게 가까이에 이렇게 나뉘어서/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쳐다만 보네.’   이 노래는 ‘시인 김민기’의 빼어난 재능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겨레의 가장 큰 아픔과 통일 염원을 이토록 명징하고 아름다운 서정으로 담아낸 김민기는 뛰어난 시인이다.   김민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 노래는 1992년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 예술단 교류사업의 남측 공연단 기획팀으로 일하면서, 대단원을 장식할 노래가 필요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행사는 열리지 못했지만, 노래는 남아서 널리 알려졌다. 노래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고 아름다워서 많은 후배 가수들이 다시 불렀고, 많은 행사에서 불리면서 매우 유명해진 노래다.   아무튼 이런 노래를 듣고 좋은 글을 읽으면, 마음이 한결 푸근해지고, 통일의 꿈도 한층 절절해진다. 하지만, 통일문제를 이렇게 감성적으로 대하는 건 나이 든 세대들뿐이고, 젊은 세대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다. 그저 짐작이 아니라, 각종 통계 숫자나 학문적 연구로 밝혀진 현실이다.   젊은 세대에서는 통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기성세대에서도 세월이 갈수록 통일 염원이 식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은 북한대로 살고, 한국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잘 살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물쭈물하다가는 두 나라로 완전히 갈라져, 끊임없이 마주 보며 으르렁거릴 것 같다. 답답해서 큰 소리로 노래한다.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 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가둬버려요/ 녹 슬은 철망을 거두고 마음껏 흘러서 가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전쟁 통일 통일 염원 통일시 장용학 도입부 노래

2024-06-20

[음악으로 읽는 세상] 벼룩의 노래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벼룩의 노래’라는 것이 나온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담보로 그에게 젊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젊어진 파우스트를 데리고 라이프치히의 한 선술집으로 간다. 여기서 대학생 브란더가 ‘쥐의 노래’라는 재미있는 노래를 부르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재미있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이 바로 ‘벼룩의 노래’다.   “옛날에 벼룩을 기르는 아주 괴짜 임금이 있었어. 그 벼룩을 왕자처럼 예뻐했지. 임금은 어느 날 재단사를 불러 벼룩에게 멋진 외투를 만들어주라고 명령했어. 벼룩은 비단옷을 걸치고 궁전을 휘젓고 돌아다녔지. 임금은 벼룩을 대신으로 삼고 훈장까지 주었어. 벼룩의 친구들도 모두 출세를 했어. 이들은 거들먹거리며 궁전 안을 돌아다녔지. 그러면서 왕비든 시녀든 가릴 것 없이 궁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따끔따끔 물어댔어. 하지만 아무리 가렵고 따가워도 어쩔 수가 없었어. 벼룩을 죽이면 안 된다는 임금의 엄명이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그냥 하하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만약 우리라면 벼룩 따윈 대번에 죽여 버릴 텐데 말이야.”   이 가사에 베토벤, 무소륵스키, 베를리오즈 같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는데, 그중에서 제일 음악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무소륵스키의 ‘벼룩의 노래’다. 재미있는 가사를 빈정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피아노 반주에 얹어 부르는데, 중간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어가기도 한다.   ‘벼룩의 노래’는 일종의 풍자다. 능력 없는 벼룩에게 벼슬을 준 어리석은 임금,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거들먹거리는 벼룩과 그 일당들, 그들에게 아무리 괴로운 일을 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는 비겁한 신하들의 모습이 자유분방한 선율에 담겨 있다. 그런데 만약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노래처럼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겠지.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벼룩 노래 벼룩 따위 괴짜 임금 베토벤 무소륵스키

2024-06-10

[뉴스 포커스] ‘강남 스타일’에서 김밥까지

싸이가 부른 ‘강남 스타일’의 위력은 대단했다. 미국 전체가 난리였다. 인기 절정일 때는 하루에 한두 번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같다. 미국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한국 노래를 듣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강남 스타일 열풍’ 소식을 전하던 뉴스 앵커가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였다. 미국에서 ‘K팝’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강남 스타일’ 상륙 이후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지나 이제 ‘K’라는 이니셜은 ‘한국 것’의 상징이 됐다. K팝을 넘어 다양한 종류로 분화가 이뤄지고 있다. 요즘엔 K푸드, K뷰티, K드라마, K무비, K패션 등 수 많은 분야가 K라는 이니셜로 소개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케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국 것’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덕이다. 이미지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흔한 골목길 분식 메뉴인 김밥도 화제가 될 정도다. 이젠 어딜 가도 어렵지 않게 ‘한국 제품’을 찾을 수 있다.     문화 콘텐트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소재들이 영문으로 소개되고 한류 스타 관련 뉴스는 거의 실시간 전달된다.       ‘한국 것’을 즐기는 층도 다양해진다. 젊은 층 중심에서 이제는 그들의 부모 세대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필자의 최근 경험도 이런 트렌드를 반영하는 듯하다. LA한인타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에서 발레파킹했던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엄마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여성을 가리켰다. 얼떨결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 답이 돌아왔다. 10대 여학생이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중년 여성이 한국어를 배운다니 호기심이 생겼다. “왜 배우느냐”고 물었더니 K드라마 팬이란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 차가 먼저 오는 바람에 짧은 인터뷰를 마쳐야 했다.  ‘K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경제적 발전과 문화 콘텐트의 영향력 확대는 자긍심으로 이어진다. 이제 한국에서 ‘문화 사대주의’ 운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자긍심이 지나쳐 소위 ‘국뽕’의 단계까지 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한국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별것 아닌 일에도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게 그런 예다. 맹목적 믿음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미국 시장은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다. 워낙 다양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뛰는 곳이다 보니 순식간에 판도가 바뀌곤 한다. 반면에 고객의 충성도 역시 높다. 한 번 마음에 들면 웬만해선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K푸드’의 현주소를 확인해 보자. K푸드의 인기가 많이 높아졌지만 아직은 다른 유명 아시아 음식에 뒤진다. 중국,일본,베트남,태국 등 아시아계 음식의 선두 주자들이 먼저 미국 시장 개척에 나섰기 때문이다. 단순히 식당 숫자로만 봐도 한식당은 아직 열세다. 경제정보 전문 업체인  렌텍 디지털의 자료에 따르면 미 전국에 중국 식당은 3만5000여개나 된다. 이어 1만8000여개인 일식당이 두 번째로 많다. 이어 1만500여개인 태국 식당, 6500여개의 베트남 식당이 뒤를 잇고 있다. 반면 한식당은 5200여개로 집계됐다.   ‘K의 인기’가 지속하려면 생명력이 필요하다. 분화만 해서는 생존 기간이 짧아질 우려가 있다. 누군가 내게 “‘K’를 관통하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우둔한 탓인지 몰라도 ‘한국 것임을 의미한다’는 답 정도가 고작일 듯하다. 분명 현상은 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답답함이라니.  김동필 / 논설 실장뉴스 포커스 스타일 강남 강남 스타일 한국 노래 한국 제품

2024-05-30

[문예 마당] 속삭임의 삶

  ‘거룩한 천사의 음성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이/어두운 밤  지나고 폭풍우 개이면 동녘엔 광명의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 앞에 어린다.’   멀고 먼 추억 속 무대에서 짐 리브스의  ‘희망의 속삭임’이 맑고 구수한 음성으로 들려 온다.  이 노래는 원래 셉티머스 위너가 1868년 에 발표한 곡이라고 한다.   늘 가족들에게 미소와 사랑을 나누어 주신 처형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들은 처형의 90세 생일 축하 특별 이벤트로 임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합창하기로 했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배우려 유튜브의 노래 교실을 통해 수십번 따라  불렀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음을 잡을 수가 있게 됐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흥얼거리며 잠을 청하고 가사를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또 얼마나 필요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날 믿고 따라준 사람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지만 인생이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늘 위기의 연속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다리 밑은 강물이요, 뒤로는 갈 수가 없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넘어야 하는 항상 아슬아슬한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     노년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건강이 가장 문제다. 나는 아내의 깊은 숨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물론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몇 년간 계속한 투석이 너무 힘에 겨워 중지하고 한동안 주사와 약으로, 그리고 또 다른 치료법으로 몇 년을 견디어 왔다. 팔순이 넘어 병들고 부자연스러운 몸이 되다 보니 과거의 강인한 개척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누군가 도움을 받을만한 인연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쉰다고 하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리 왕년에 잘 나갔다 하여 큰소리를 쳐봐도 세상엔 독불장군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나야  행복하고 주변을 살피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우리 부부도 예외 없이 건강상의 이유로 그 기고만장하던 패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딸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엄마, 아빠 함께 살자”고 권유했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궁리한 끝에 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라스베이거스 레드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딸의 권유가 고맙기만 할 뿐이다.   팔순이 넘다보니  왜 이리  신체의 고장이 많은지. 청력이 약해지다 보니 아내와  주고받는 대화도 늘 반문이 따르게 되고 아내는 그것이 불만이다. 아내도 몸이 쇠약하다 보니 자연히 목소리가 잦아져 좋게 말해서 우리 부부는 속삭임의 대화가 계속된다.     최근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비대면 접촉이 권유되면서 기업들의 재택근무 도입이 늘었다. 이렇게 도입된 재택근무는 팬데믹이 끝난 요즘도 더욱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도 한 사람은 아래층에서, 또 한 사람은 이층에서  재택 근무를 하고 있어 우리 부부는 업무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한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작아진 이유도 있지만  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습관이 생겼다. 늘 조용조용 사랑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화한다. 속삭임의 삶을 사는 셈이다.     귀가 밝은 딸은 우리 부부의 대화 내용을 다 알아듣고도  모른척 빙그레  웃곤 한다. 가끔 “네 흉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딸에게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귀가  밝은데 우리  시니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나의  속삭임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반드시 우리에게  거룩한 천사의 음성이 내 귀를 두드려, 어두운 밤이 지나고 광명의 햇빛이 눈 부시게 비칠 때, 아슬아슬한 인생의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왜 이리 눈물이 나요.’ 오늘 밤도 콧노래를 부르며 잠을 청해 본다. 백인호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재택근무 도입 노래 교실 건강 문제

2024-04-18

[아름다운 우리말] 따라 부르기를 통한 치유

저는 요즘 경기잡가 중 집장가(執杖歌)를 배웁니다. 집장가는 경기민요 12잡가 중 하나입니다. 소춘향가(小春香歌), 출인가(出人歌), 형장가(刑場歌), 십장가(十杖歌)와 함께 판소리 춘향가에서 따온 노래입니다. 춘향가의 내용 순서로 보면 오리정의 이별을 노래하는 출인가와형장가의 중간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장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형장을 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집장 군노(軍奴)는 형장(刑場)을 치는 군졸을 의미합니다.   노래의 내용은 춘향을 형틀에 묶고, 사또의 분부를 들으라고 하는 집장군노, 사또 앞에서 죽여달라는 춘향, 살살치겠다고 속이는 집장군노, 형장을 매우 세게 치는 집장군노, 고통스러워하는 춘향, 말을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집장군노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형틀에 묶여서 매를 맞는 장면은 매우 무서운 장면이지만, 경기민요에서는 이 장면을 해학적으로 풉니다. 따라서 집장가 노래를 듣는 청중이나 집장가를 따라 부르는 제자는 슬픔과 분노, 해학과 풍자를 넘나들게 됩니다. 이는 판소리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웃음이 있는 우리 예술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희망 또는 웃음을 찾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실제로 인생의 고락(苦樂)이 오가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과 일치시키는 겁니다. 춘향전은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이별, 고통을 거쳐 만남과 행복의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각 부분 속에서도 희로애락이 엇갈리며 자리하게 됩니다. 집장가는 이런 우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부르는 이’나 ‘따라 하는 이’, ‘듣는 이’가 모두 공감합니다.   집장가 가사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요? 우선 한국어의 주요 특징인 음성상징어 즉, 의태어의 사용이 두드러집니다. ‘쫑그라니, 덥석, 좌르르, 느긋느긋, 는청는청, 허허, 풍기덩실, 지두덩실’과 같은 의태어는 모양을 흉내 낸 말로써 다른 언어로 번역이 어려운 표현입니다. 의태어는 동작이나 모습을 눈앞에 보듯이 나타내는 말이어서 이야기에 매우 잘 어울리는 언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집장가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는데 풍자와 해학의 대표적인 장치로는 속담과 과장법을 들 수 있습니다. 때리면서 ‘골 부러질라’라고 하는 장면, ‘지옥문 지키었던 사자가 철퇴를 들어 메고 내닫는 형상’이라고 집장군노를 묘사하는 장면, ‘좁은 골에 벼락 치듯 너른 들에 번개 하듯’과 ‘십 리만치 물렀다가 오 리만치 달려들어’와 같이 때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극히 과장스러운 모습으로 듣는 이에게 해학의 즐거움을 줍니다.   주로 스승께 민요를 배울 때는 가사를 보는 경우도 악보를 보는 경우도 없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부르며 스승을 모방하는 것이 민요 배우기인 겁니다. 이는 우리 민요가 악보로만 전달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을 겁니다. 음의 세밀한 변화는 악보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민요를 배우는 과정은 철저히 스승을 따라 부르는 과정입니다. 즉, 모방 속에서 자기 완성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민요 배우기는 노래를 배우는 과정뿐 아니라 스승의 감정을 배우고 함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밀한 감정의 변화가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고, 이러한 감정의 전이를 통해서 민요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집장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이 담겨있는 민요의 경우는 더욱 감정의 전수가 중요합니다. 민요 따라 부르기는 스승과의 감정 공유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스승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희로애락의 감정변화를 겪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치유 장면이지만 경기민요 집장가 노래 집장군노 형장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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