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침에] 황태 미역국

이현인 시인·수필가
큰며느리가 아파서 일요일 내 생일 축하 파티에 못 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서운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 생일이 평일이라서 두 아들 내외와 손주가 일요일 오후에 오기로 했었다. 이주 전부터 흑마늘을 만들어 주려고 보온 밥솥에 발효시키기 위해 넣어 두었다. 또 배추와 무를 사서 동치미를 담그고 김치도 만들었다. 맛있게 먹을 아들 식구들을 위해 꼬박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다듬고 절이고 무채 양념을 만들어 야들야들한 배춧속에 먹음직스럽게 집어넣어 김치통에 차곡차곡 돌돌 말아 넣고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
일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샌디에이고와 토런스에서 이곳까지 오는 것이 고생이라고 하면서 안 와도 된다고 한 수 더 뜬다. 남편마저 내 편이 아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한 번도 잊지 않으시고 꼭 생일을 챙겨 주셨는데 남편과 아들 내외는 그저 그들 편한 대로 밀고 나간다. 마음 갈피에서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꺼내어 나의 서러움을 달랬다.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나흘이 지나자, 내 생일날 아침 7시에 영상 전화가 울렸다. 아이패드 화면 속에서 여섯 살 손녀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생신 축하해요!”라고 말하며 생긋 웃는다. 나도 모르게 “고마워, 우리 공주!” 답하고 나니, 또 옆에서 “할머니 생신 축하해요.” 3학년 손자가 머쓱하게 웃고는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간다.
연이어 며느리와 작은아들이 축하한다고 인사한다. 선물은 현금을 송금앱으로 보낸다고 했다. 출근 전 영상통화라도 축하해 주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어서 준비하고 직장과 학교에 가라고 재촉하며 서둘러 끊었다.
아래층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그머니 내려와 보니 남편이 황태로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생일 축하한다면서 새빨간 튤립 한 다발을 내게 안겼다.
엉겁결에 받고 식탁에 앉았는데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뽀얀 미역국 한 그릇을 퍼서 내 앞에 갖다 놓는다.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풍경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생일 축하 기도를 오랫동안 했다. 감기 걸려서 내 생일에 못 온다는 아들의 전화에 매우 섭섭했는데. 덕분에 최고의 생일상을 받은 셈이다. 유난히 깊은맛을 내는 황태 미역국에서 남편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만약에 두 아들이 방문했다면 남편이 맛깔스러운 미역국을 끓이지 않았을 텐데.
점심은 일식집에서 연어 초밥을 사 와서 남편과 오붓하게 먹었다. 아들이 안 와서 섭섭했던 마음을 조금씩 떨쳐버렸다. 면역력이 없는 우리 부부를 위해 두 아들이 처음으로 함께 못 했는데.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영상 전화 벨이 울렸다. “어머니, 못 가봐서 죄송해요. 생신 축하해요.”
샌디에이고에 사는 큰며느리가 코맹맹이 소리지만 힘겹게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감기가 심한가 보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마음이 짠했다.
지금까지 나는 생일이면 온 가족이 모여 북적거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생일의 의미도 달라졌다. 꼭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나마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마음이 귀하게 다가온다.
사랑은 값비싼 선물이나 거창한 축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상통화 너머에서 전해지는 손주의 축하 웃음, 아픈 중에도 축하 인사를 건네는 진심 어린 아들과 며느리의 마음, 정성스레 끓여준 미역국 한 그릇, 이 모두가 내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다. 생일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을 뛰어넘어,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날임을 깨닫는다.
이현인 /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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