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날 이후
글 속에 숨고 그림 속에 번질게요 / 익어가는 시간들이 쓸쓸해져요 / 마주하는 모든 시간 내내 웃지만 / 다가오는 모든 풍경들은 아픔인 걸요 / 놓칠 수 없는 시간의 간극 속에 머무를 뿐 / 닫을 수 없는 밤은 늘 추위처럼 스며오는 것이죠 / 달이 지고 나면 아침은 늘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와요 / 거기 계세요 / 손짓하는 나를 보시면요 // 늘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어요 / 잎이 흔들리고, 자동차 경음이 울리고 / 신호등 파란불을 따라 그리로 가고 있어요 / 커피 향을 닮은 하늘을 올려다보아요 / 잡은 손을 놓친 것보다 더 기대고 싶어져요 / 돌아선 뒷모습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려 와 /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 잘 가세요 / 환한 대낮을 등지고 걷고 있어요 / 바람에 밤나무 꽃이 아래로 떨고 있었고요 / 강물을 바라다보는 일이 서로 편해진 오후 / 흐르는 물속에 그대 웃음 소리가 들려요 / 내가 힘들어도 그대가 기쁘다면 / 나는 강물이 되어 멀어져도 슬퍼할 리 없어요 // 낯선 방에 누워있어요 / 집을 받들고 높게 옷 벗은 나무들 / 천근의 눈꺼풀을 껌뻑이며 / 지탱하려고 수십 번을 뒤척였어요 / 한번은 어린아이 마냥 천진한 마음으로 / 또 한번은 천천히 누르는 아픈 통증으로요 /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 강물은 까마득히 멀어져 / 낯선 이의 뒷모습으로 흐르고 있어요 / 귀를 막고 싶은 옆자리가 추워요 / 바다로 흐르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 무너뜨려야 할 짐을 건네주는 밤은 너무 검어요 / 두리번거려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새벽 /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의 느린 걸음에 지쳐가고 있어요 / 지나간 어제도 맞이할 오늘도 꿈같은 내일도 /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 흐트러진 걸음을 여미게 해요![[신호철]](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3/11/c012a43e-c269-432a-bc5f-e107961a251c.jpg)
[신호철]
오랜 세월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구들이 많아졌다. 이제는 세밀한 기계까지 만져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모양을 입력하면 그 모양 그대로 두꺼운 철판을 자른다. 나무를 깎아 목판화처럼 작업을 하기도 한다. 글자를 접어 만들어 내기도 하고 큰 사이즈의 이미지를 컬라로 출력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시간 그 장소에 그 도구와 기계들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아울러 시안을 입력하고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함께여야 모든 상황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다. 작은 들꽃도, 언덕을 오르는 오솔길도 그렇다. 눈이 오는 것도,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미시간 호수가 출렁이는 것도, 하늘이 푸르른 것도 모두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야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 아픔이 몰려오기도 하고 사랑이 꽃피기도 한다. 잠을 설치기도 하고 밤하늘 별빛을 보러 창을 열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한다.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야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우리의 걸음도 수많은 길들을 만나지 않았던가. 용감하게 직진할 때도 있었지만 우회할 때도 있었다. 어찌할 수 없어 멈춰서서 움직일 수 없었던 날들도 있었다. 마음을 다독이며 뒤돌았던 시간들도 있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쁨 속에 뛰었던 날들도 있었다. 뒤돌아보며 그 길들을 걸으며 만났던 사람들, 다가왔던 풍경들, 예기치 않았던 상황들, 갈등과 화합, 슬픔과 행복, 좌절과 용기가 그날 그 시간에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없다면. 우리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고 있는 뒷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시간 제 자리를 지키고 싹을 내고 잎을 내밀 나무의 대견한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좌절했던 많은 사람들의 슬픈 마음을 연둣빛 희망으로 바꿔 줄, 그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을 풍경들과. 불행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손짓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과, 메마른 땅에 희망을 전하는 예쁘고 앙증맞은 꽃들에게 올해도 그 자리를 지켜 주어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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