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참아 내는 사람이 나뿐이더냐

94번 highway를 타고 시카고로 내려가던 아침에 교통사고가 났다. 그 복잡한 러시아워에 5차선 도로에서였다. 차가 충돌한 후 에어백이 터지고 잠시 정적이 흐르고 흐릿한 차 속에서 잠시 머물렀던 시간이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살아 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며칠 후 차는 폐차되었다. 평생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물리치료를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받았다. 꾸준히 받은 덕인지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다.     오늘은 치료를 받은 후 근처 공원에 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봄바람이 아직은 차지만 푸릇푸릇 올라오는 잔디, 느린 걸음으로 흐르는 시내, 막 잎사귀들을,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물오른 나무들이 싱그럽게 어깨를 감싸고 봄을 부르고 있다. 낮게 드리운 솜사탕 같은 구름이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끊이지 않게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정점을 찍어준다. 혹한 겨울을 지나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그 당연하고도 신기한 풍경 속에 앉아 나도 신비로움 속으로 돌아가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며칠 전 봄비가 내렸다. 메마른 나뭇가지마다 물기를 머금고 촉촉이 봄을 준비하고 있다. 유리창에 맺혀 있는 빗방울, 크기도 다르고 맺혀 있는 모양도 다르지만 하나 같이 하늘에서 빚어낸 물방울이다. 구름은 셀 수도 없는 수억 수만의 물방울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추운 날엔 눈으로 내리고 때론 온 대지를 하얀 세상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가랑비로 세상 모든 것들의 얼굴을 말끔히 씻어주기도 하고 때론 앞을 볼 수 없이 퍼부어대는 소낙비로 변하여 작은 시내를 굽이치는 강물로 불어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은 물방울이다.     나와 너의 걸음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의 걸음도 그렇다. 누군가의 길을 막기도 하고 막힌 길을 터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추측하고 예증으로 그 과정을 추론할 뿐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길을 걸을 뿐이다. 내 앞에 펼쳐진 오늘이라는 시간과 풍경과 상황을 자연스럽게 내 것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당연한 듯 인정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밖에. 어제를 접은 사람만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다. 신비롭고 기대로 가득 찬 또 하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차를 주차하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와서 나를 통과해 나로부터 멀어져 간다.     잠든 자를 흔들어 깨우고 감은 눈을 뜨게 하고 정지된 걸음을 춤추게 한다 물방울 속에 하나씩 맺혀있는 풍경이여 방울져 맺힌 시간이여 그리운 이의 눈망울이여     소원을 빌고 하늘을 보았다 봄비가 살포시 내리고 있다 저 비가 들었을 소원은 사랑을 지키는 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지나 보면 보인다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날려 보내는 그리운 이의 가슴이여     그 안에 살고 있다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당신에게 온 것을 빼면 당신께 받은 걸 갈무리하면 세상은 텅 빈 것이 된다 버린 후 찾아드는 아픔 참아내는 사람이 나뿐이더냐     살다 보면 잠깐씩 길이 끊어질 때가 있다. 날아갈 때는 뒤 돌아보지 않는다는 새들의 길도 끊어질 때가 있다. 때로 기대를 저버린 두려움으로 끝이 없는 길을 힘들게 날았을까? 땅의 길도, 호수의 길도, 새들의 길도, 하늘의 길도 언젠가 끊어질 날이 있겠지. 눈을 뜨면 걸어야 하는 나의 길은 또한 어떨까? 마음으로 다짐하지만 때로 맥없이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던 날도 있었다. 그건 다만 밖으로부터 오는 어려움과 고통 때문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내 안에 여러 갈래 갈라진 길 때문일 것이다.     넓은 길을 버리고 굳이 좁은 길을 택해 걸어야 할 때도 있다. 평탄한 길 대신 가파른 경사길을 택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할 때도 있다. 모두가 힘겨운 걸음 때문에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실패를 경험하고서야 깨닫게 되는 진리. 다만 겨울을 참아내는 자만이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살을 에이는 바람과 눈보라를 온몸으로 부딪쳐본 사람만이 따뜻하고 싱그러운 봄볕에 앉을 수 있다는. 생명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손이 늘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벤치에 앉아 봄을 느끼며 들었던 생각은 봄의 구석구석에서 품어내는 생명의 에너지, 어느 하나에도 혹독한 겨울을 참아낸 후 가질 수 있었던 긴 호흡이었다는 사실. 유독 나에게만 닥쳐온 고통이 아니었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게 공평하게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고통은 통과한 후에야만 가질 수 있는 축복의 통로라는 것을. 겨울을 지나 봄의 문턱에서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삶의 희열이라는 사실을….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혹한 겨울 빗방울 크기 이의 눈망울

2025-04-1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봄의 향기

햇빛 쨍한 날에 비가 내려요 잠시 생각이 지나쳤을 뿐인데 내 마음에 당신이 있네요   홀로 남아 지난 일 떠 올리면 무엇하겠어요 엎드리는 겨울 호수가 서글퍼요 물새가 낮게 물결 위를 날아가요 속삭이는 파도는 마음 빼앗는데 당신은 무엇 하나요 노을 지는데   석양이 내려앉은 붉은 보라 하늘 하나둘 부서지는 물살의 구애 며칠 밤낮으로 찬비로 내리고 호수는 맘껏 깊어만 가요 당신은 잘 지내죠 바람도 심한데   홀로 남아 지난날 떠올리면 무슨 소용 있나요 떨어지는 가을 낙엽이 애처로워요 뱃길 비추는 등대의 따뜻한 불빛 당신 머물렀던 시간이 꿈같아요 물결도 그리움마냥 출렁이는데 당신은 잠들었나요 별 뜨는데   대학을 마치고 시카고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 묘지를 다녀왔다. 대전에서 온양을 지나 문이라는 작은 마을에 선산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 되면 늘 찾아갔던 반가운 곳이다. 큰아버지 병원이 대전역 맞은편에 있었고 그곳에서 차로 이동하면 멀지 않은 곳에 할아버지 소유의 포도 과수원이 있었다. 사촌 형들이 여러 명 계셨고 사촌 누나들도 여럿 있어서 늘 대전은 내 마음의 고향 같기도 하였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기억엔 3시간이 넘어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전역에서 문이 가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한적한 도로변에 버스는 나를 내려놓고 흙먼지를 날리며 멀어져 같다. 얕은 언덕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얼마만큼이나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드문 보이는 농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밭일을 나가셨는지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언덕길 위로 낮게 드리운 구름이 무겁게 느껴졌다. 한동안 걷고 있던 나를 휩싸였던 적막. 거대한 유리병 속에 갇힌 듯한 내 모습에 가던 발길을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홀로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조심스레 다시 발걸음을 띄었지만,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묘한 감흥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에 두 배를 이곳 시카고에서 살고 있다. 세 번의 이사를 갔고 그때마다 짐을 싸며, 내 마음에 깊숙한 곳에 담겨져 있던 기억을 사진첩을 정리하듯 정리하곤 했다. 매해 봄날이 다가올 때쯤에는 늘 지난 겨울의 혹독한 이야기들마저 언제 그랬었나 내 몸을 따뜻하게 녹이는 봄날이 다가오곤 했다. 홀로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두려움에서 언제부터인가 그리움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라고 있다. 어제는 종일 봄비가 내렸다. 틈새로 간간이 햇빛도 볼 수 있었다. 비가 내려도, 미시간 호수에 물새가 낮게 날아도, 서쪽 하늘에 붉은 보라 노을이 져도, 늘 마음 한구석을 자리 잡고 있는 그리움이라는 실체. 별이 뜨고, 달빛이 내려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볼 수 없기에 더더욱 궁금해지는 당신을 나는 이제 향기라 부르겠다. 계절마다 다른 향기를 품고 아침을 여는 당신을 기억한다. 사람은 주저하고 때로 망설이기도 하지만 계절은 망설이지 않는다. 매번 처음 다가오는 날들인 양 너의 향기는 여기까지 깊숙이 실려 왔다. 새싹을 내밀며, 새 가지를 키우며, 꽃을 피운다. 어떤 상황이 향기처럼 몽롱하다. 음악이 들려오듯, 바람에 온기를 담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 연두로, 초록으로 뒤란에 가득 향기를 쏟아 놓는다. 홀로 남은 것들에게 봄은 쓸쓸함이란 찻잔에 그리움의 차를 오래 끓여 만든 향기를 풍기며 어느새 내 안 가득히 피어나고 있다. 세상을 다 아우르는 봄의 향기로 오는 당신은.   봄의 향기 향기는 여기까지 실려 왔다   꽃이 피어나듯 강물이 흐르듯 바람이 불어오듯 음악이 흐르듯 너는 그렇게 오고 있다   걸어 잠근 겨울 뒤로 혹독한 것의 속으로부터 닫힌 문지방 사이로 너는 그렇게 가까이 왔다   향기는 오래 머물렀고 까닭도 없이 바람이 춤추고 놀란 가슴 쓸어내듯 봄비가 내렸다   잔디가 살아나고 언덕이 푸르게 다가오고 살아나는 기억 속 향기 함께 걷는 행간을 좁히며 어느새 내 안에 가득한 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물결도 그리움 대전역 맞은편 미시간 호수

2025-04-0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리 살다 보면

그래 그래야지 그리 살다 보면 슬픔도 견디는 아름드리나무 되겠지 외로움도 손 젓는 다소곳한 들꽃 되겠지 내 자리인 양 푸른 싹 보듬는 구름 한 점 되겠지   그래 그래야지 그리 살다 보면 오라 손짓하는 그대 앞에 서겠지 옷가지 매만지며 뒤돌아보겠지 굽이굽이 걸어온 길 손잡고 함께 걷는 꽃길 보이겠지   그래 그래야지 그리 살다 보면   문학 단체 카톡방엔 하루에도 상당한 양의 글들이 올라온다. 글 하나 하나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무엇 하나 가볍게 지나칠 글은 하나도 없지만 며칠 전 올라온 소식이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 삶과 죽음 사이로 흐르는 강은 그리 깊지 않을 거야. 그래서 누구도 어렵지 않게, 슬프지 않게 건너갈 수 있겠다고 생각할거야. 그러나 사실 그 문턱에 한발을 디디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쓸쓸함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 두려움 없이 강물을 건널 수 있겠단 생각. 죽음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게 그런 절실한 상황이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부로 껴안고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득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지 생각했다. 준비된 삶을 살고 있다면 눈을 떠 맞이하는 하루의 삶은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다가올 것이다.   입안이 헐어서 며칠을 고생했다. 혀가 상처에 닿아 분명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작은 상처가 이렇게 온 몸을 찌푸리게 할 줄 몰랐다. 이 상황만 지나면 무엇이든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깊이 잠들지 못했다.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안됐다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그 말에 시원하게 대답도 못 하고 씩 웃고 말었다. 당신도 한번 아파보라 하며 속으로 혼자 대답하고 말았다. 고작 혓바닥에 불거진 좁쌀만 한 상처 때문에.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의 부인께서 세상을 달리하셨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을 오가며 투병하셨기에 마음이 더 더욱 아프다. 아직도 앞길이 길게 펼쳐져 있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셨다. 아픔을 당한 가족들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극정성으로 병상의 아내를 간호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늘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친구가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투명할까? 서로에게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이 이리도 덤덤하고 아름다울지 생각했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가난하든 혹 부유하든, 건강하든 혹 병상에 누워있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언덕이 되어준다면 긴 삶이든, 짧은 삶이든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죽음은 언제일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내 마음가짐의 문제일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부끄러워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입안에 난 작은 상처로 일주일 내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창피스러웠는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내게 남겨진 소중한 날들을 따뜻하게 안아 내 체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나는 진정 죽음을 준비하고 살고 있는가?라고.   잎눈에 맺힌 이슬방울 속에도 본향으로 돌아가는 숨 가쁜 걸음 위에도 막 피어난 목련의 눈부심 속에도 당신은 그곳에 있네요 노을 속 빛의 섞임같이 어우러져 살고 싶어요 죽음이 나를 건드려도 오늘 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당신은 용기를 주네요 하루가 지는 고요 속에 내 한 몸 누울 수 있을까요 덤덤히 맞아들여야 할 죽음이라는 유혹마저 소중히 꽃피우고 싶어요 내일 깨어날 기대는 하지 않아요 그저 함께할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손길이 나를 흔들고 있어요 깨어나 봄날 새벽을 맞이해야 하겠지요 주섬주섬 옷 챙겨 입고 오늘 가야 할 길 떠나야겠어요 한껏 사랑하지 못한 부끄러운 봇짐 챙겨 새싹 보리 나가야겠어요 저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인생의 날들이 보여요 봄날처럼 아름다워요 그날이 오면 이곳에 머물고 싶어요 당신 품에 안겨서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상처 때문 봄날 새벽 시인 화가

2025-03-3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창가에 앉아 뒤란을 바라보고 있어요. 초록빛을 띠는 잔디가 봄을 성큼 데리고 온 느낌이어요. 나뭇가지 끝에는 도톰한 잎눈이 맺혀 있어 언제라도 연둣빛 잎사귀를 내밀 준비를 마친 듯해요. 릴리와 부추는 손가락만큼 씩이나 벌써 싹을 내밀었어요. 테크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봄바람이 얼굴을 스쳐요. 이만큼 가까워진 봄의 생기가 뜰 안 가득 퍼져와요. 노랗게 꽃 피울 달맞이 꽃무덤이 보이는 듯해요. 하얀 꽃잎을 기지개 켜듯 피워낼 데이지의 가느다란 줄기가 서로에게 기대며 바람에 흔들리는 꿈을 꾸어요. 뭉쳐 있는 낙엽을 줍고, 흙을 고르며 봄날 아침을 마음에 담고 있어요. 기다림의 끝에서 꽃신 신고 오는 당신을 만나요.   당신 손길 같은 봄날   1  아직 멈추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게 해준 봄 / 끝이 있으면 시작이 찾아옴을 알려준 / 기억이라는 선물을 펼쳐 보여준 봄 / 작은 관심에 큰 기쁨으로 되돌려준 / 조용한 침묵의 기다림을 알게 해준 / 성실하게 반응하는 법을 가르쳐준 /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도,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음이 당연함을 알게 해준 봄 / 나를 상실할 수 있었음에도 대지의 몸으로 다시 뜨겁게 달궈준 / 신비한 생명의 끈질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 / 창조주의 손길이 엄마의 손길과 닮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 잃어버릴 뻔한 색깔들을 되찾게 해준 / 흉내와 진심을, 죽음과 삶을, 구별해 보여준 / 방황과 포기의 날에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해준 봄 / 울타리를 열고 다른 세상의 문을 들여다보게 해준 / 느낌과 감정에 자유의 언어를 부여해 준 /  우주 속 소우주가 펼쳐지는 뒤란의 / 그리운 사람의 마음을 마구 훔쳐 가는 / “뭐야 이거?” , “이게 뭐지?” 하면서 빠져드는 봄 / 온통 당신 눈물로 맺힌 봄, … 봄   2 엄마 부르면 먼 길 가셨는데 눈 녹듯이 마음속에 피어나 종일 가슴에 삽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엄마 부르면 가슴부터 웁니다 봄이 다소곳이 기대와 두 눈에 눈물 고입니다   엄마 목소리 들려 동구 밖으로 나가보니 출렁이는 백열등 아래 엄마 손이 약손이다 아픈 곳 쓸어주는 봄바람   엄마 부르면 먼 길 가셨는데 봄 오듯이 뒤란 가득 피어나 평생 가슴에 삽니다   3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다 / 살아가는 반경은 작고 심플하게 / 포용과 사랑의 온도는 더 높고, 뜨겁고, 빛나게 / 감성은 꽃을 피우듯 풍요롭지만 절제되게 / 삶의 무게는 날아 오르는 새의 무게만큼 가벼웁게 / 내 마음을 물들인 단풍처럼 더 붉게 타오르면서 / 촛불같이 자신을 태워며 사라져도 환하게 비추면서 / 땀을 비 오듯 마지막 구간을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 끝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다시 사는 것처럼 / 해와 달이 함께 떠 있는 날에도 슬퍼하지 말고 / 무슨 일이 일어난 듯 허둥대지 말고 / 이슬로 깨어나는 당신의 아침을 맞으면서 / 연두의 입눈을이 터지는 설레임으로   4 나에게 오셔요 반짝이며 날 이끌어 주셔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사라질 어둠을 나는 알지요 이제 먼동이 트면 당신은 원래의 모습으로 녹아질 테니 오시려거든 빛으로 오셔요 당신을 쳐다볼 수 없지만 천지에 가득한 봄은 공허한 가슴을 채워주네요 소리 없이 다가와 바람 속에서도 나를 흔드는 하늘 가득 당신이어요   내 안에 살게 가만두셔요 지난겨울 눈꽃처럼 흐드러지게 필 시간이어요 한겨울 죽은 듯 숨죽여 봄을 피운 당신 아닌가요 삶의 흔적, 기대의 자리마다 흐른 시간이 거름 되어 가지마다 터질 듯 피어날 봄 내 안에 살게 가만두셔요 흔들릴수록 아픔은 희망으로 움 틀 터이니 가만히 바라만 보셔요 일제히 눈꽃처럼 피어날 봄날 기적앞에 당신이 있어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엄마 목소리 봄날 기적앞 흔적 기대

2025-03-2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관찰

가만히 너를 들여다보네 /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거기 보이네 / 그리움을 하나씩 숨기고 있네 // 그리움 속에는 / 흔들리는 들꽃의 반가움도 있고 / 나비의 날갯짓도 봄을 향해 펄럭이고 있네 // 들길을 걷는 너의 행복한 발걸음도 / 창가에 앉은 너의 심장 뛰는 소리도 / 내가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도 // 새벽공기를 가르며 그리움 앞에 서 있네     그냥 살았던 세월이 있었네. 햇살에 눈이 부셔도, 달빛이 그윽하여도 내 눈엔 보이지 않았네. 땅만 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네. 눈 덮인 벌판에 더운 입김을 뿜어내며 싹이 자라는 시간에도, 나뭇가지마다 움이 트고 꽃망울을 맺는 기가 찬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네. 그렇게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내 가슴은 쪼그라들었네. 심장의 박동 소리는 아련해졌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었네. 살았다고 사는 게 아니라네. 감사가 없었고 소중함이 사라졌었네. 고요한 시간은 낭비 같았고 무엇을 얻지 못하는 모든 시간은 공허했었네. 그러니 하늘로 향해 헛손질만 했었네.     언제부터인가 내겐 이상한 습관 같은 것이 내 속에 자라고 있었네. 그것을 나는 관찰이라고 말하고 싶네. 세상을 향한 기척이라고 생각하네. 어느 한 지점을 두고 사는 것과 살아가는 것의 미세한 차이를 알게 되었네. 거리를 걷다가도, 차를 타고 어디를 가다 가도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 풍경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는 일이 잦아졌네. 차를 한길에 세우고 들꽃을 바라보며 길가에 앉아 있기도 하였네. 모르는 길을 찾아 생소한 걸음을 나서기도 하였네.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색깔과, 밝기와 느낌에 마음을 빼앗겼었네.     같은 장소를 수도 없이 찾았지만 그때마다 선물처럼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었네. 비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은 바람이 부는 대로, 눈발이 날리던 날은 눈이 오는 대로, 자세히 보면 색깔도 밝기도 느낌도 다 달라 보였네. 다가오는 풍경은 지금 지나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단 하나의 풍경이기에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태웠네. 혹시라도 이 시간 가슴을 치는 단어 하나가 있다면 땅바닥에라도 적어 놓아야 했네. 한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졌네. 이 관찰의 습관은 나에게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네.     움직이지 않는 나무도, 저 하늘에 떠 있는 해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도, 지그시 내려다보는 달빛도 모두가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었네. 다가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지금 내가 들어야 할 말들을 하고 있었네. 간혹 들리기도 하였지만 아직 더 가까이 귀 기울여야 들리는 많은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네. 실패의 아픔도, 따뜻한 위로도, 넘치는 사랑도, 때론 헤어짐의 고통마저 그 모든 것은 감사이고, 소중함이고, 축복이 아닐 수 없었네. 세상을 바라보는 가슴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들풀처럼 자라나는 것이었네.     푸른 문장에 손을 베었다 / 노을처럼 내 눈 속으로 붉게 물들어 왔다 / 눈을 비벼도 떼어지지 않는 하늘소리였다 / 살아있는 것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내내 / 아득한 밤하늘 너머 아직 빛이 있는 그곳에서 /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의 행간을 따라 나도 걷고 있다 // 죽지 않았기에 함께 볼 수 있다는 노을이 운다 / 그것은 내가 버릴 뻔했던 날 선 푸른 문장이었다 / 손을 베이고 찾았던 노을이었다 / 눈보라 쏟아지던 밤 / 집으로 가라며 보내온 푸른 문장 // 언덕 아래 세상은 빗장을 걸고 잠들었는데 / 베인 손에서 자맥질하는 핸들이 눈길에 미끄러진다 / 나이 들어 함께 기대 보자던 석양이 슬프다 // 단풍 같은 눈이 내린다 / 새들은 날아 오르고 즈믄 밤바람 소리 / 뒷모습의 이름과 물결 소리를 듣는다 나 지금(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밤바람 소리 시간 가슴 물결 소리

2025-03-1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날 이후

글 속에 숨고 그림 속에 번질게요 / 익어가는 시간들이 쓸쓸해져요 / 마주하는 모든 시간 내내 웃지만 / 다가오는 모든 풍경들은 아픔인 걸요 / 놓칠 수 없는 시간의 간극 속에 머무를 뿐 / 닫을 수 없는 밤은 늘 추위처럼 스며오는 것이죠 / 달이 지고 나면 아침은 늘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와요 / 거기 계세요 / 손짓하는 나를 보시면요 // 늘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어요 / 잎이 흔들리고, 자동차 경음이 울리고 / 신호등 파란불을 따라 그리로 가고 있어요 / 커피 향을 닮은 하늘을 올려다보아요 / 잡은 손을 놓친 것보다 더 기대고 싶어져요 / 돌아선 뒷모습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려 와 /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 잘 가세요 / 환한 대낮을 등지고 걷고 있어요 / 바람에 밤나무 꽃이 아래로 떨고 있었고요 / 강물을 바라다보는 일이 서로 편해진 오후 / 흐르는 물속에 그대 웃음 소리가 들려요 / 내가 힘들어도 그대가 기쁘다면 / 나는 강물이 되어 멀어져도 슬퍼할 리 없어요 // 낯선 방에 누워있어요 / 집을 받들고 높게 옷 벗은 나무들 / 천근의 눈꺼풀을 껌뻑이며 / 지탱하려고 수십 번을 뒤척였어요 / 한번은 어린아이 마냥 천진한 마음으로 / 또 한번은 천천히 누르는 아픈 통증으로요 /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 강물은 까마득히 멀어져 / 낯선 이의 뒷모습으로 흐르고 있어요 / 귀를 막고 싶은 옆자리가 추워요 / 바다로 흐르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 무너뜨려야 할 짐을 건네주는 밤은 너무 검어요 / 두리번거려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새벽 /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의 느린 걸음에 지쳐가고 있어요 / 지나간 어제도 맞이할 오늘도 꿈같은 내일도 /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 흐트러진 걸음을 여미게 해요   오랜 세월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구들이 많아졌다. 이제는 세밀한 기계까지 만져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모양을 입력하면 그 모양 그대로 두꺼운 철판을 자른다. 나무를 깎아 목판화처럼 작업을 하기도 한다. 글자를 접어 만들어 내기도 하고 큰 사이즈의 이미지를 컬라로 출력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시간 그 장소에 그 도구와 기계들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아울러 시안을 입력하고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함께여야 모든 상황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다. 작은 들꽃도, 언덕을 오르는 오솔길도 그렇다. 눈이 오는 것도,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미시간 호수가 출렁이는 것도, 하늘이 푸르른 것도 모두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야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 아픔이 몰려오기도 하고 사랑이 꽃피기도 한다. 잠을 설치기도 하고 밤하늘 별빛을 보러 창을 열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한다.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야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우리의 걸음도 수많은 길들을 만나지 않았던가. 용감하게 직진할 때도 있었지만 우회할 때도 있었다. 어찌할 수 없어 멈춰서서 움직일 수 없었던 날들도 있었다. 마음을 다독이며 뒤돌았던 시간들도 있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쁨 속에 뛰었던 날들도 있었다. 뒤돌아보며 그 길들을 걸으며 만났던 사람들, 다가왔던 풍경들, 예기치 않았던 상황들, 갈등과 화합, 슬픔과 행복, 좌절과 용기가 그날 그 시간에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없다면. 우리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고 있는 뒷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시간 제 자리를 지키고 싹을 내고 잎을 내밀 나무의 대견한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좌절했던 많은 사람들의 슬픈 마음을 연둣빛 희망으로 바꿔 줄, 그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을 풍경들과. 불행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손짓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과, 메마른 땅에 희망을 전하는 예쁘고 앙증맞은 꽃들에게 올해도 그 자리를 지켜 주어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미시간 호수 밤하늘 별빛 행복 좌절

2025-03-1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삶에 대하여     너무 촘촘히 그리지 말자   삶은 캔버스 위 붓질과 같은 것   말이 뭉뚱그려질 때   희미해져 읽을 수 없을 때   원초적 색깔을 사용해 보라   빛과 그림자가 분명해질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고단해지면   울음을 참고 다시 떠나보라   참아내는 사람이 나뿐이더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참고 살아가나니   두려움은 밤낮으로 찾아오겠지만   견디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숲정이 처럼 함께 어우러지자   한 나무가 아니라 여러 나무가 모여   서로의 향기를 뿜어 사랑하듯이   삶의 시간은 숲의 시간처럼 한 색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날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평안, 평안과 기쁨은   스스로 찾아드는 선물 같은 것이다     견뎌내는 이가 나뿐이더냐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깊은 슬픔 속에 묻히다가도   어느새 밝은 햇살 앞에 앉아 있지 않터냐   너무 촘촘히 삶을 채우지 말자   해가 지면 별이 뜨고 별빛이 지면   먼동이 하늘에 가득할지니   밝은 대낮에도 이운 낮달처럼   내려다보고, 또 올려다보며   이우는 부분마저 그리워하자     주위를 돌아보면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기회가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놓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 삶을 즐길 만한 시간이 찾아왔는데 홀연히 죽음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루가 저무는 창가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으로 나의 빈 마음을 채우고 있는가?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아니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시는가?라고.     행여 슬픔으로 가득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냈다면 밤하늘 별빛으로 그 마음을 지울 수는 없는가. 수천 광년의 빛으로 이제야 나의 눈에 비쳐오는 기적 같은 이 순간에도 괴로워하겠는가? 눈물마저 말라버린 한낮을 걷다가 빛을 잃어가는 낮달의 선물 같은 반가운 손짓을 외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바람에 눕는 갈대가 눈에 뜨일 리 없을 터이고, 미시간 호수의 밀려오는 파도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찌 내 귀에 들려오겠는가. 말라 부석이며 부서지는 들풀의 긴 대궁에 맺힌 검은 씨앗 속에 감춘 연둣빛 새싹이 어찌 보이겠는가.     우리가 추구하고 은근히 자랑했던 부와 권력 속에서는 시인은 태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눈으로 시인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존재이지 않더냐.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이야기하고, 슬픔으로 눈물짓기도 하는, 잃어버릴 수 있는 험한 길을 대책 없이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귀하고 사랑스럽다. 온밤을 지새워도 지치지 않는 연약하지만 내면으론 솔처럼 외롭고 높고 곧게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미시간 호수 밤하늘 별빛 시인 화가

2025-03-0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또 내리고   눈을 감아도 고개를 숙여도   땅끝까지 눈은 길게 드리우고   한 사람의 눈빛도 스며 오는데   이미 세상은 하얘진 지 오래다   생각은 푹푹 빠져 깊어지는데   눈은 사물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눈과 눈빛이 어우러져 깊어지는 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혹은 네가 소리치다 목마른   설렘은 눈 속에 덮이고 또 덮이고   고립된 섬처럼 눈은 쌓이고   거인 나라 난쟁이가 되어버린 뒤란   나무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 가득   다시 피어난 얼음 꽃송이   눈은 내리고   너와 나의 슬픈 울타리   버티고 있는 높낮음도 사라져간다     옆집과의 경계에 4피트 높이의 나무가 울타리로 자라고 있다. 촘촘히 자란 잔가지 때문에 옆집 뒤란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날씨가 좋은 주말에 서로의 정원을 가꾸다 지나치듯 몇 마디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날씨가 추운 겨울날엔 마주칠 리 없다. 더구나 눈 오는 날엔 그림자조차 만날 리 없다. 나도 창가에 의자를 바짝 끌어 놓고 눈 덮인 뒤란의 고요를 즐기고 있다. 오랜 시간 바라 보고 있노라면 평상시 때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눈에 잡힌다. 촘촘한 가지 사이로 분주한 새들의 움직임을 인지 하게 되었다. 초점을 맞추고 들여다본 나뭇가지에는. 열 마리도 넘는 새들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가벼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날아들기도 하고. 어디론가 날아가기도 했다. 몇 마리는 가지 끝 꼭대기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듯했다. 나뭇가지 사이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듯 무엇인가를 입에 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집과 집 사이 나무울타리는 새들에게는 보금자리가 되기도 하고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내 어린 기억 학교 가는 언덕길에 울타리를 높이 올린 집이 있었다. 그 울타리 끝에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박아놓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유리 조각은 어린 나에게도 섬찟한 두려움이었다. 누구도 그 울타리를 넘을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높은 울타리는 안과 밖을 철저히 분리해 놓았다. 누구라도 그 울타리를 통해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장벽을 쌓아 놓았다. 울타리 안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집 정원에서는 무슨 꽃이 피어 있는지 짖어대는 개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울타리는 안정과 평안을 주기도 하지만 깨어진 유리 조각을 박아놓은 그 높은 울타리는 속박과 두려움을 주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울타리가 슬프게 기억되는 이유가 된다.     눈 내리는 눈길을 걷고 있다. 하얗게 덮인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면서 길을 내고 있다. 돌아보면 이내 길은 사라지고 다시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 길은 애초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면 길이 되는 것이다. 발길이 뜸해지면 길은 희미해지다 사라져 버린다.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물어보며 길을 찾아 가면 된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인하며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걸어가야 할 목적지를 잃게 되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길을 내다보면 언젠가 마른 땅이 되고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내가 나를 찾아가는 인생길이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눈길에도 길을 내고 다시는 나를 속박하는 슬픈 울타리가 되지 말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사이 나무울타리 속박과 두려움 유리 조각

2025-02-2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목과 겨울눈

1   안간힘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때로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구기도 하면서요 오늘은 하늘을 올려다보아요 어제와 사뭇 다른 하늘은 눈이 부셔요 눈이 내리고 있어요 솜털같이 날리는 눈이 점 점 점 하늘에 가득해요 두 팔을 가능한 넓게 펼치고 우리 눈을 맞으러 가요 몸 구석구석 흰 눈 속에 파묻혀 한 폭의 겨울 풍경이 되기로 해요     2   곧게 뻗은 평행선 그 위를 걷고 있어요 추억한다는 것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지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처럼요 차츰 하얗게 변해 가는 세상 속으로 여리고 투명한 나비의 날갯짓이 보여요 그 날갯짓이 무겁게 느껴짐은 웬일인지요 얼마나 펄럭이고 날아야 꽃향기에 도착할까요 밖은 춥고 초록은 모습조차 감추었는데 겨울과 봄사이 무게의 간극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여러 차례 눈은 더 내릴 테고 매서운 바람은 살을 에일터인데 이제 보이지 않는 세월의 무게를 안고 어느 순간 날개를 접고 하얀 풍경으로 박제되겠지요       3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어요 하얗고 시린 초승달 실날같은 그 빛에 잠들려고요 제 몸을 누운 들의 고요 소란함을 떠난 마른 풀잎의 새벽을 맞이하고 있어요 푸른 어둠이 창문에 내릴 때 눈을 뜨렵니다 눈은 내리고 하얗게 사라지는 들길이 끊긴 겨울 숲도 잠들지 못하네요 벌거벗은 나무들 흰 향기를 안개처럼 뿜어내고 있어요 뿌리는 하나같이 봄을 향해 흐르고 겨우내 나무는 제 몸을 감싸안고 잎눈과 꽃눈을 움트기 위해 뒤척이고 있어요 아픈 줄도 모르고 제 몸을 찌르고 있어요     4   깊은 잠에서 눈을 뜨면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아요 겨울 풍경은 순하고 거대한 하얀 동물 같아요 웅크리고 숨 쉬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동물의 머리 위로 흰 눈이 쌓여요 봄으로 가는 겨울은 춥고 매서운 바람 때문에 사람들의 걸음은 빨라져요 숨을 내쉬면 하얗게 변하는 작은 기포 그 주위를 돌아보면 가지마다 숨겨져 있는 봄의 향기가 차갑게 느껴져요 한 호흡에 한 움을 트고 있어요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될 반가움에 두 팔을 벌려요 당신은 어느새 품에 안겨 연두의 그림자를 드리워요      5   바짝 마른 들풀의 생각은 어떨까요 눈을 맞으며 견디는 걸까요 검은 씨앗 깊은 곳을 흐르는 꽃망울의 기억은 즐거울까요 눈을 뜨고 바라보는 전나무의 가시같은 푸른 잎들은 추위에 떨고 있을까요 눈길을 걸으며 하염없이 다가오는 눈송이와 친해지며 아침을 맞이해요 눈 오는 날 눈길을 걸으며 새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지나온 날들의 아픔을 덮고 새날의 소망을 담아낸다는 의미가 있지요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하얀 세상이 펼쳐지고 있어요     6   길을 걷다 옷 벗은 나무를 올려다보아요 뽀족이 솟아오른 꽃눈을 담은 나무 죽은 듯 보이는 가지 속으로 부터 생명이 자라고 있어요 나무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입들을 다 떨어뜨리고 빈몸으로 엄동설한을 맞이하네요 나무가지를 관찰할 시기는 겨울이지요. 입을 내고 꽃을 피우는 모든 나무는 그 가지에 겨울 눈을 맺어요 그 겨울눈이 나목을 봄까지 연결해 주어요 겨울눈이 겨울에 만들어진다구요 한여름 무성한 잎 사이로 가지는 내년에 피어날 꽃과 잎들을 준비한답니다 겨울 눈 속에는 입으로 자랄 작은 눈과 꽃으로 자랄 큰 눈이 비닐 같은 껍질에 쌓여 봄으로의 긴 여정을 견디어내고 있지요     7   겨울눈을 통해 우리를 보아요 풍요로운 인생의 시기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 하나요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요 여름부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의 지혜를 배우기로 해요 추운 겨울을 견디는 나무의 신비로움은 겨울눈에 있어요 겨울눈 속에는 나무의 모든 것이 담겨있어요 새로 뻗어나갈 가지와 연둣빛 잎사귀와 꽃들이 될 여리고 연약한 것들이 함께 자라고 있어요 나무들이 새봄을 준비하듯이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품고 있어요 겨울나무의 견딤의 시간과 다가올 봄의 충만한 개화를 보아요 우리 삶에도 겨울눈의 기적을 가슴에 담고 시린 겨울을 당당히 걸어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겨울눈 겨울 풍경 겨울 숲도 잎눈과 꽃눈

2025-02-1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회상

세월이 참 빨리 흐릅니다 /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도 /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 흐르는 것은 흘러가게 두어야 하기에 / 바람도 담아두면 온몸을 흔들고 / 햇살도 담아두면 마음을 새카맣게 태울 때가 있기에 / 안부를 묻기가 참 버거운 날입니다 / 계신 그곳은 평안하신지요 //여든한 해의 겨울이 지나가고 / 여든두 해의 겨울이 한참일 때 / 아름다운 한 얼굴에 깊은 주름 하나 페입니다 /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화려함이 아니라 /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걸어온 소박한 길 위엔 / 바래지 않는 당신의 너털웃음 소리 /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 아름다움은 어디로 기울어지나요 / 슬픔과 고통은 어디로 잠겨오나요 / 여든두 번의 흰 눈이 하얘진 눈썹을 에워쌀 때 / 겨울 흰색 같은 한 영혼이 일어나 / 먼지뿐인 세상일 툭툭 털고 본향으로 돌아갑니다//여든두 해의 별이 뜨고 / 여든두 해의 강물이 흐르고 / 여든두 해의 꽃이 피고 / 여든두 해의 눈이 내립니다 /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지요 / 그토록 갈망하던 당신의 품에 안깁니다 / 여든두 해의 삶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 흰빛으로 날아갑니다    “새로운 영어 선생님이 오신데. 우리 학교 졸업생인데, 연대 영문과를 졸업하신 분이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혼이시래.” 10분의 휴식 시간이 지나고 수업을 알리는 벨이 긴 복도의 반대쪽까지 올렸다. 학생들은 서둘러 교실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 앞으로 구두 발소리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교실 안의 눈이 문 쪽으로 쏠렸다. 불쑥 교실 안으로 들어온 건 사람이 아니라 긴 막대기에 걸쳐진 영어 교과서였다. 뒤이어 명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가지런히 빗질하여 올리셨다. 교실에 살포시 퍼져오는 향수 냄새. 신혼이라고 퍼진 소문을 확인해주었다. 왼쪽 손목에 찬 다소 큰 듯한 금딱지 시계도 그러했다. 짤막한 키에 경상도 악센트가 영어 문장을 읽을 때도 살짝 배어 있었다. 그렇게 대광고등학교 영어 시간 교실에서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대학 졸업 후 시카고에 정착하게 되면서 눈 뜨면 일과 학교를 병행하여야 하는 고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친구 김호관이가 시집을 낸다고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표지 그림과 편집을 부탁했다. 오랜만에 우리는 마음이 뭉쳐 시카고 밤거리를누비며 다녔다. 83년 겨울 그의 첫 시집〈이어지기 사랑법〉이 출간되었다.     출판기념회 당일날 예상치 못한 많은 시카고 교포들이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명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글을 쓰냐고 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씀드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글을 쓰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출판기념회가 열린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시카고문인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간간히 신문 지상을 통해 명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지면을 통해 〈문학 창작 교실〉기사를 봤는데 명 선생님이 강의를 하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당장 등록을 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매주 한 번씩 삼 개월을 지나는 동안 나는 문학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림과 글을 병행한다는 기쁨에 밤을 새워 글을 쓰기도 하고 운전하다가도 차를 세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를 쓰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나의 글쓰기 배경에는 늘 명 선생님이 그곳에 계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 평안한 날이라더니 갑작스레 영 선생님의 부고가 전해졌다. 마지막 만남이 2주 전 문인협회 정규 모임일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살아서 천당, 죽어서도 천당.“을 삶의 목표로 사셨던 명 선생님은 본인이 늘 말씀 하시던 그대로 살아서도 또 죽어서도 천국의 삶을 이루셨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가족들만 모여 이 땅에서 마지막을 원하셨지만,시카고 문인회는 그를 기억하며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너털웃음을 남기고 가셨다. 천국에서의 삶을 영원히 누리실 선생님 사랑합니다. 부디 본향으로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관초 고 명계웅 선생님께 드립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영어 선생님 명계웅 선생님 대광고등학교 영어

2025-02-0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춤추는 나무

언덕에 바람이 불어올 때면 / 주체할 겨를도 없이 하늘로 흩어지는 낙엽 / 그곳엔 나무 한 그루 춤추고 있었다 / 감춘 것들을 드러냈다가도 / 이내 다 덮어 버리기도 하면서 / 돌아오는 길에 지워지지 않는 / 더 잊어야 할 것들은 없는지 / 그렇게 물어보며 집으로 왔다 // 너무 느리거나 서두르면 / 서로에게 부딪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 평면보단 입체로 봐야 더 이해할 수 있듯이 / 같은 곳에 있어도 다르게 보일 수 있듯이 / 밤하늘 가득한 별빛의 머물 곳을 / 이젠 지켜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 눈을 감고 바라보고 있어도 /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사람들 사이로 / 말하고 싶지 않았기보다 말할 수 없었던 / 낯선 세상이 아닌, 마음으로 꿈꾸던/ 보지 못한 세상을 느끼고 싶은 건/ 두 손으로 모으며 드린 기도 / 나무의 뿌리 깊은 소원이었다 // 아름다운 세상이 보고 싶어서 / 사막에 날리던 모래바람보다 / 풀들이 춤추고 꽃이 노래하는 / 다른 세상을 매일 맞이하고 싶어서 / 먼 나라의 동화처럼 들릴지라도 / 흥에 겨워 바람에 춤추는 언덕 나무처럼 / 팔을 뻗어 너를 힘껏 안아 주면 되는 것을 / 너를 붙잡고 함께 춤추면 되는 것을     문 하나가 닫히면 문 하나가 열린다. 해가 지면 잠깐의 시간을 두고 다시 해가 뜨고, 별이 지고 나면 하루가 지나고 다시 별이 뜬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구부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쓰고 있던 모자를 허리 아래로 내리며 답례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언덕 구릉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나는 언덕을 내려오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이별을 아쉬워했고, 그는 바람에 잔가지를 흔들며 나에게 다음 약속을 기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가 춤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장 남지 않은 잎사귀를 안은 채로, 좌우로 가지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가 춤추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눈 내리던 어느 날에는 눈꽃을 피우며 둥글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종일 피운 눈꽃은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셨다. 평면으로 내린 눈을 입체로 꽃피우는 나무는 신기하리만큼 깊이가 있었다. 펼쳐 보이기도 하고 담아 내기도 하는 언덕 위 나무는 해마다 키가 자랐고 이제는 내 키를 훨씬 넘어서 그의 끝까지가 하늘에 닿았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춤추고 있다. 호수의 파도도 춤추고 있고 하늘에 구름도 춤추고 있다. 꽃이 피어나는 것도, 나뭇잎이 움트는 것도, 비가 내리는 것도 춤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들길을 걷다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세찬 바람에 꺾이지 않는 갈대를 보다 결론지은 것은 ‘갈대는 춤추고 있다’였다. 왜 우리는 춤추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반응하지 못하는가? 봄이 온다고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무수한 봄이 지나가도 내 안에 봄은 꽃 피지 않을 것이다.     흥에 겨워 바람에 춤추는 언덕 나무처럼, 바람에 눕는 갈대의 춤사위처럼 우리도 춤추면 된다. 나무의 밑동을 껴안고 같이 흔들리면 된다. 너와 나 부둥켜안고 춤추면 된다. 춤추며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모래를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추면 된다. 그러면 동화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니까.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언덕 나무 언덕 구릉 시인 화가

2025-01-2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 꽃눈

하얗게 덮인 눈 속에서도 움을 트려고 / 몸을 뒤척이는 나목이 되자 /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 /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는 자 /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이 보이지만 / 모든 꿈을 다 가진 한 그루 나목처럼 살아가자 / 버리면 얻게 되고, 낮아지면 높아지는 빈들 / 겨울나무가 속으로 속으로 뿌리내리며 / 찬바람에 울었던 것처럼 / 속으로 속으로 우리도 울자   눈 덮인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쓴다 / 썼다 지워버린 편지를 다시 쓴다 /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가슴으로 쓰고 있다 / 눈이 녹고 봄이 오면 / 그때도 편지를 쓸 수 있을까 / 연두의 잎눈이 보석처럼 어리울 때 / 목련이 긴 목을 내리고 / 슬피 나를 바라볼 때도 나 그대 앞에 / 엎드려 목 놓아 울 수 있을까 / 호흡으로 겨울 숲은 잠드는데      새해를 맞은 지 두 주가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면 내게 허락된 삶의 마지막이 코앞에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창밖엔 가는 눈이 벌써 몇 시간째 내리고 있다. 나무의 잔가지를 채우고 차가운 땅을 부드러운 손길로 덮어 주고 있다. 저기 먼 하늘도 건너편 집 지붕도 멀리 보이는 숲도 언덕으로 오르는 좁은 길도 하나같이 하얀 풍경 속에 잠겨 있다. 사람의 마음속보다 더 깨끗하고 환한 눈이 내리고 있다. 무엇을 덮으려 하는 것일까? 상처 나고 주름진 깊은 골을 천천히 어머니의 손길처럼 쓸어내리고 있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작고 큰 상처들로 인해 깊은 흔적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상처는 때로 나를 혼돈과 방황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고난을 극복하고 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성경 갈라디아 6:17에 단 1번 나오는 단어이다 ”흔적“으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낙인“이란 말로도 옮겨져 있다. 흔적이나 낙인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바울이 그 스티그마란 말을 통해 자신이 예수의 종이요. 예수가 그의 주님임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닥친 견딜 수 없는 고난 그 자체가 바로 스티그마라는 단어이고 그리스도의 흔적이 고난이라는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도 깊은 골로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 되어 견디어내고 마침내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있게 됨을 말하고 있다. 여전히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세상은 온갖 아픔과 고통의 깊은 골을 하얀 눈에 맡기고 있다. 내 안에 새겨진 스티그마, 그리스도의 흔적 같이.     지쳐 잠드는 것이고   흔들려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다   짜맞추는 게 아니라   가슴을 치는 일을   받아 적는 일이다   깨달음을 위해 애쓰기보다   길을 걷다 눈에 띈 들꽃을   노래하고 그리는 것이다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쓰이는 것이다   지나온 걸음 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에 흐르는 노래를   그저 부르는 것이다   사랑과 그리움, 절망을   아파하고 안아주는 일이고   널 보내지 못한 나를   꾸짖는 일이다   세상을 향한 날 선 독백마저   오늘 부딪치며 살아가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요   당신께 드리는 용서인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성경 갈라디아 시인 화가 보호 아래

2025-01-1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 올려다보고, 가끔 내려 보기도 하면서

1 한없이 가라앉았던 날이 있었네 / 여름이 막 시작되었고 초록의 세상이었지 / 귀 언저리 초록의 작은 기포 떠다니고 / 침잠해 가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네 / 맑은 유리잔에 물 한 잔 건네주었네 / 물 한 모금의 삼킴이 목 너머 흐를 때 / 너는 내게로 와 출렁이는 호수가 되었지     2   꽃이 진 곳에 빨간 열매 맺히고 있었네 / 바람에 꽃잎처럼 떨어지던 가을이 오고 있었고 / 손잡으려다 놓쳐버린 날들도 가고 / 새장을 빠져나온 가슴이 아픈 새들은 / 긴 날개 펼치며 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네 / 내려다보이는 호수 위, 푸른 실핏줄 같은 은하 / 너는 내게로 와 흐르는 푸른 별이 되었지     3   창밖엔 눈 내리고, 찬 바람 불고 / 맑고 향기로운 언덕은 흰 눈을 쓰다듬고 / 손이 얼고 발이 붙어도 파도치는 미시간 호수가 좋았네 / 홀로여도 외롭지 않은 빈 해변 동무 되어 놀다가 / 너를 담고 돌아오는 길, 올려다본 하늘 가장자리 / 한 편의 시가 눈처럼 날리며 가슴을 파고들었지 / 너는 내게로 와 선물처럼 흰 눈으로 뿌려졌지     4   봄은 고양이 걸음처럼 살며시 오고 / 뿌리로 자란 만큼 손톱만큼씩 움튼 새싹 / 무채색 세상 속에서 연둣빛으로 변해가는 언덕 너머 / 긴 얼굴 목련이 서럽고, 널 향해 살기로 작정한 / 꽃이 피던 그날, 꽃잎 떨어지던 아픈 날도 / 널 가슴에 품고 걸었던 / 나의 숨 쉬는 동안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이었지 하늘 향해 뻗은 소나무야, 움츠린 솔잎아 / 그 푸른 정수리, 빨간 열매, 찬 바람 겨울 오면 / 흰 눈 위 각혈처럼 쏟아놓은 후회 같아 / 거울 앞에 서면 나이 먹는 것들의 이유가 서러워 / 그중 깊은 주름 몇 개, 깊은 발자국 따라 / 썰물처럼 눈물 지우며 네게로 간다     또 한 살이라는 명패와 함께 푸른 뱀의 해를 맞은 지도 여러 날이 지나간다. 살처럼 날아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었지만 바라볼 수는 있었다. 이제는 쉼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좇아 뛰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땀 흘리는 내게 물 한 잔 건네주던 손길이 있었다. 쉬어 가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자유라는 명제를 슬며시 내 손에 쥐여주고 뒤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을 보고 알았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시간을 거슬리는 삶은 바른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시선을 시간에만 집착해 있다면 시간은 우리와 함께 걷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시간을 놓아준다? 그리고 내 삶에 자유 한다? 시간에 얽매이면 마음도 초조해져서 되는 일도 그르칠 때가 많이 있다. 시간을 잃어버릴 때가 나에게 주어진 일에 집중 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지난 며칠 써 놓았던 시들을 정리했다. 이곳저곳에서 시를 찾아 모으는 일에 집중하다보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저물어왔다. 시계의 초침 소리를 귀담아들어 본 적이 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를 밀어 넣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무료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놓아주어 자유케 하라 그리하면 하루는 내게 기대하지 못한 선물을 준비하고 나의 걸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루는 나에게 한송이 꽃으로, 쏟아 내리는 비로, 출렁이는 호수로, 흩날리는 흰 눈으로, 밤하늘 흐르는 푸른 별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깊은 숲, 작은 집에 불이 켜질 것이다.    깊은 숲,   작은 집엔   너의 별,   너의 음악,   너의 눈물,   너의 떨림,   너의 웃음 가득하고    나를 비추고,   나를 설레이고,   나를 토닥이고,   나를 재우고,   나를 안아주는,   같은 하루가 아닌   새날을 맞이한다     하얗게 내려지는   기대와 설렘으로 받은 도화지   산을 보다 산이 되고   호수를 보다 호수가 되고   별을 보다 별이 되어지는   도화지 가득 하루가 담겨   깊은 숲,   작은 집에   불이 켜진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미시간 호수 하늘 가장자리 언저리 초록

2025-01-0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꽃 향기

시간을 촘촘히 채우며 / 나비가 꽃에 앉듯 사뿐이 내렸다 / 마른 갈대 숲에도, 앞집 지붕 위에도 / 우리집 벚나무 붉은 열매 위에도 / 잠들은 당신의 창가에도 소리없이 내렸다 / 어디에나 누구에든 / 소음과 함성과 절제된 어느 상황에도 / 공평히 내렸고 같은 무게로 쌓였다 // 하늘 가득 흰 꽃이 내렸다 / 사랑이 떠나고 미움이 가득한 세상 / 아무것도 모르는듯 흐트러짐 없이 내렸다 / 우리 모두는 제 길로 떠나 갔지만 / 같은듯 다른 생각으로 멀어졌지만 / 너에게도 나에게도 눈이 내렸다 / 거리에도 나무에도 소복이 쌓였다 / 들에도 언덕에도, 저 편백 나무 숲에도 / 하얀 하늘이 내려 앉았다 / 솜털같은 포근한 세상이 내렸다 // 눈을 뜨고 나갈 채비를 한다 / 먼길 떠나는 새들의 울음도 멈친 새벽 / 어둠은 채 가시지 않았는데 / 검은 때를 벗고 하얀세상으로 걸어야겠다 / 너의 향기 가득한 눈꽃 세상으로      창가에 앉아 바깥 세상을 바라 본다. 온 땅을 덮은 하얀 눈은 바라보는 나의 마음까지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하얀색은 무색이 아니다. 어느 곳에 칠해져도 하얀색은 새로운 여백을 창출해낸다. 답답한 풍경을 시원한 한폭의 수묵화로 바꾸어 놓는다. 색이 아니면서도 가장 강렬한 색이기도 하다. 나무를 온통 눈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지붕의 색을 순식간에 하얗게 바꾸어놓아 온 동네를 눈세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잠 못 이루는 당신의 창가에도 소복히 쌓인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당신의 시야에서 색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온통 백색의 세상이다. 이렇듯 단번에 세상을 바꿔 놓는 것은 아마도 눈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유기적인 힘도, 어떤 힘센 사람의 노력도, 첨단 장비의 효과도 아닌 그저 부드럽고 소리 없이 천천히 세상을 바꾸어 놓는 하얀 눈. 참으로 놀랍다. 패인 웅덩이를 덮어주기도하고, 꺾인 가지를 감싸기도 한다.   하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의 미움도, 상처도 하얗게 차유되는 듯하다. 높낮이도 없고 밝고 어두움도 없는듯, 눈은 우리에게서 공평과 절제와 겸손을 말없이 가르치고 있다. 저기 서 있는 편백나무도 새롭게 흰꽃을 피웠다. 가지마다 소담히 피워낸 눈꽃은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도 꽃을 피운다. 잠깐 피었다. 사라질 꽃이지만.그 꽃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과 고요함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찌든 불신과 허망한 묵은 때를 하얀 눈으로. 씻어야겠다. 하얀 눈꽃향기로 가득 채워야겠다.      어떤 말은 굴러 가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마음에 와 박히는 말이 있더라   어떤 말은 생각 위로 떠 다니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생각 속으로 잠겨오는 말이 있더라   어떤 말은 숨겨 지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꿈에서라도 들려지는 말이 있더라   셀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돌아오는 길   가슴에 남겨진 말 하나 거둘 수 없더라   창가에서 마주한 눈꽃세상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더라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꽃 향기 눈꽃 향기 눈꽃 세상 우리집 벚나무

2024-12-2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림자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네 /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거기 보이네 / 그리움을 하나씩 숨기고 있네 // 그림자 속에는 // 흔들리는 들꽃의 반가움도 있고 / 나비의 날갯짓도 노을 속에 사라지네 / 들길을 걷는 한 사람의 발걸음도 / 창가에 앉은 그의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네 // 그림자 속에는 없는 것이 없어서 /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 그 몸에 그림자를 달고 다니게 되네 / 자동차 바퀴는 그림자로 달리고 / 구름도 땅 위에 그림자를 그리고 있네 / 나무는 그림자 밑으로 뿌리 내리고 / 꼬리 흔드는 강아지는 흔들리는 그림자를 물고 가네 // 그림자는 시작도 되지만 끝도 되어 / 점 아래로 모이는 정오엔 사라지기도 하네 /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은 순식간이어서 / 한 번도 그 순간을 바라본 사람은 없네 / 그 순간 그림자는 제 몸으로 돌아가 제 몸이 되네 // 숨바꼭질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 제 발밑의 그늘을 찾지 못하네 / 빛이 있어야 그림자로 살아나고 / 내 생각이 네 생각과 다를 때에는 / 서로의 자리를 바꿔 나타나기도 하네 / 그림자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없기에 / 붉은 해 수평선으로 기울고 긴 여운을 만드네 / 사람들도 그림자로 살아가네 / 온종일 그림자로 살다가 어둠이 오면 / 그림자를 어둠에 숨기기도 하네 // 이제 너는 내 그림자로, 나는 네 그림자로 살기로 하네       빛이 있고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은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 빛이 눈부신 햇빛이 될 수 있고, 달빛이나 별빛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미한 초롱불이나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미한 빛만 있으면 그림자는 어느새 생겨납니다. 어쩌면 사물속에 저마다의 그림자를 품고 사는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기한 것은 그 사물이 흔들리면 그림자도 같이 흔들리고 사물이 뛰기 시작하면 그림자도 같이 뛴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본체보다 몇 배나 크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로데스크한 모습으로, 본체를 삼켜버릴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림자를 보면 사물의 모습이나 상태가 그대로 투영된다는 말이 됩니다.     사물과 그림자는 한 뿌리에서 나온 한 몸입니다. 사람도, 동물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도,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미한 생물체 모두 다 그림자를 가집니다. 하늘의 구름도, 낙하하는 낙엽도, 달리는 자동차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림자는 사물의 배경으로 살아가는 듯 보여집니다. 철저히 사물의 움직임대로 가고 순순히 사물이 가고자 하는 의지대로 함께 따라갑니다. 그림자는 처음부터 자기를 내려놓아 사물의 배경으로 만족합니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것.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림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방향대로 걸어갈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막무가내의 삶 모두는 자기 뜻과 성취를 위할 뿐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배경이 되려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림자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요, 자기를 내려놓는 삶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어두운 새벽이었는데 어느새 안개가 자욱한 초겨울 아침이 왔습니다. 햇빛이 없어 그림자가 없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비추면 그림자와 함께 모두 행복하시길요. 커피 조금 더 내려야겠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림자 순간 그림자 자동차 바퀴 시인 화가

2024-12-1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대어 살아야 하지

새벽이 깨어날 때면 / 꽃 한 송이 피어나듯 / 어둠의 뒤로 아침이 오네 // 힘들 때마다 우리 기억해야 하지 / 소리 없이 들길을 걸었던 일 / 바람이 우리를 마구 흔들었던 기억 / 내어준 팔의 따뜻함에 꿈꾸었던 시간 / 기억해야 하지 사는 게 쓸쓸해지면 / 마주 보며 웃음을 되찾았던 일을 // 다시 태어난다면 /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 들꽃 만개한 일몰의 언덕에서 손잡고 / 붉은 노을로 스러지는 밤하늘 가득 / 서로를 지키는 별빛이 되어야하지 / 살아있는 날 동안 눈동자같이 바라보며 / 기대어 설 서로의 든든한 등이 되어 / 기쁘거나, 슬프거나, 외롭더라도 / 새벽이 깨어나듯, 꽃 한 송이 피어나듯 / 그렇게 우리 기대어 살아야 하지 // 야윈 팔소매 걷으며 웃어줄 당신이기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서로의 등을 내어 준다는 말이다. 등을 내어 준다는 것은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연약한 한 사람의 등이 다른 사람의 등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스스로 서서 버틸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의 온몸을 의지하여 맏길 수 있는 어느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인생을 잘 산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입은 마음에 있어 생각을 마음에 담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은 입에 있어 생각을 무심코 내뱉기도 한다. 확인 되지 않은 말 확신이 없는 말들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좋았던 기억 보다 단 한 번의 서운함으로 오해하고 실망하여 멀어지기도 한다. 서운함보다 함께 한 좋은 기억을 떠올려 먼저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손 내밀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답게 바뀌어 질 것이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기대어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진정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언제인가 산행 중에 지쳐 있는 몸을 큰 나무 등에 기대어 본 적이 있다. 편안함과 안락함이 내 등을 통해 따뜻하게 전해 왔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시 힘을 얻고 정상을 향해 걸었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땅을 딛고 살고 있다. 내 발을 지탱해주는 것은 우리가 인식 하든, 인식하지 못 하든 우리가 눈을 뜨면 걷는 이 땅이 자기의 등을 내어 준 것이다. 바람이 더위와 땀을 식혀주는 것도 바람이 자기에 등을 내어 준 것이다. 나무도 서로의 등을 기대고 의지하여 든든히 가지를 뻗는다. 뿌리는 가지에게, 가지는 뿌리에게 든든한 등이 되어준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로의 등을 내어 주고 서로의 약함을 보듬어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상대방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의 든든한 등이 되어 주기도 한다.   슬플 때도, 외로울 때에도, 한없이 깊은 수렁 속에서도 지친 어깨를 안아주며, 눈동자같이 지켜 주자. 어둠의 뒤로 아침이 오듯이 서로의 손을 끌어 빛나는 아침을로 이끌어주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어둠은 사라지고 한송이 꽃이 피어나듯 우리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날 것이다.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는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청춘은 너무도 짧고 아름다웠다.“라고 박경리 작가는 말했다. 그렇다. 버리고 갈 것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서로의 등이 되어 주자.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감사하며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자. 서로의 마음 속에 꽃 한송이 피워 보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동안 눈동자 시인 화가 박경리 작가

2024-12-0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어슴새벽

첫눈 내리고 찬 바람이 불어 / 나무에 기대어 사는것도 숨이 차올 때 / 촛불 하나 불 밝히면 그게 온 세상 다인 / 당신이라는 호주머니 속에 살고 싶었네 /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픔으로 눈길을 걷네 / 낯선 어둠이 길을 막고 서 있네 / 내안에 흔들리는건 내가 아니었네 // 얼어붙은 단풍잎 하나 집어들다가 /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꿈에서 깨었네 / 맞은편 하늘도 내려앉아 새벽이 아파 오네 / 손에서 바스러지는 낙엽의 마지막 숨 / 하늘이 발밑에 무너져 내린 것이네 // 막다른 길위에도 바람이 스쳐 오네 //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맞이한 별빛도 / 하늘을 나르는 새의 깃털같은 자유도 / 뒹그는 붉은 나뭇잎 하나만도 못해 / 새벽길을 더듬으며 너의 흔적을 찿네 // 빛처럼 내리는 고요의 숲길을 걸으며 // 마지막 길을 함께 못한 회한이 나무처럼 서있네 / 창가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아침은 오는데 / 먼발치로 바라 보는, 가지 못한 길이 서럽네 // 별빛 영롱해지고 파도 잔잔한 날 / 지나온 시간과 함께 다가올 시간도 꼭꼭 싸매 / 당신 바라보는 별빛아래 놓아두기로 했네 / 안녕, 그 고통의 아름다움을 껴안네 // 내려오는 발길에 선물처럼 먼동이 트는데       설명하는 지인의 눈은 밝고 빛이 났다. 그 표정이 얼마나 진지했던지 그의 말 속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들어 보았음직한 단어이었음에도 한 번도 내 입을 통해 말해 본 적 없는 정겨운 단어였다. “맞아, 걷기 좋은 날이면 맞은편 언덕으로 달려 갔던 그 시간” 바로 그 시간이 *어슴새벽이었다.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어스레하게 밝아오는 길은 하루를 여는 가슴뛰는 시간이었다. 기대 하지 못한 풍경을 만나고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마지막 한 생명의 호흡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가지에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는 바람에 떨고 있었지만 기꺼이 가지로부터 떨어져 봄에 피어날 새싹을 위해 썩어질 준비를 마친 후 같이 비장해 보였다.     빈들이 되어버린 언덕에 첫눈이 내렸다. 순식간에 세상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보이는 풍경이 하나로 되어 세상의 불협화음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나도 소리없이 입을 막고 눈길을 걸었다. 발밑에 뽀득이는 소리가 좋아 일부러 눈길을 찿아 걸었다. 고요가 맞은 편 숲길에서 걸어 나왔다. 이 고요는 벌거벗은 나무를 껴안고, 까만 씨앗을 품은 들꽃을 쓰다듬고 있었다.     하루의 시간 중 어슴새벽은 늘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깨어나는 시간이고, 품어주는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시간이고 용서하는 시간이었다. 이 순간을 거슬릴 수 없다면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어 나도 하얀 풍경으로 남아 이시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창가에   목련노을이 지면   하루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숨쉬듯 반짝이는   별이 뜨고   내 마음 가득 담은   널 닮은 달도 오르고 말지   빈들엔 고요의 축제   하얀 풍경의 시간이   거기 멈추어 섰네 (시인, 화가)     *어스레하게 밝아오는 새벽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아 이시간 맞은편 하늘 맞은편 언덕

2024-12-0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빌려온 시간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붙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잘못된 시간이 사라지고 있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내는 일이란   내 마음의 잡초를 걷어낸 후에라도   서로의 발자국을 확인해야만 했네       꽃향을 따라 나비가 길을 내듯   불 밝힌 오두막을 향해 길을 내어야했네   머물 수 없는 어둠의 울타리를 넘어야 했네       “괜찮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네   비장한 가을 하늘은 높아만 가는데   한 걸음 발을 뗄때마다 이명은 사라지지 않네       내게는 빌려온 시간이 있네   그 시간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네   지나 보니 내 것이 아니었네       내가 어둠의 청색이 가라앉는 동안 길을 내었네   먼동이 트고, 하루가 밝아오는 언덕에 서네   바람은 지나온 시간을 밀어내고 있네         창밖을 봅니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립니다. 먼 나라, 꿈도 꿀 수 없는 하늘에서 빈들로 여린 동작으로 눈이 내립니다. 시야에 꽉 찬 풍경은 하얀 눈의 여백으로 일상의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눈입니다. 밖으로 나가 눈 내리는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목적도 없이 발끝이 닿는 곳으로 갑니다. 발자국이 찍힌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았습니다. 이 발로 그 긴 시간을 걸으며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제자리인데 나는 눈길을 걸으며 다시 태어납니다. 내 볼을 만지는 눈은 어느새 녹아 눈물이 됩니다.     내 것이라 여겼던 시간이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담을 쌓고 작은 창문을 내고 그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던 바깥세상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께라는 말을 잊어 버리고 살아왔던 시간이 거기 있었습니다. 함께라는 말. 그 말은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함께였던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차마 그 손을 놓아줄 수 없을 겁니다. 눈길을 걸으며 지나온 나의 시간으로 눈을 돌립니다. 나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살아온 날들이 보입니다. 그 시간이 낯설어집니다. 꼭 빌려온 시간같이 느껴집니다.     그리운 사람과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함께 뜨거운 커피를 나누고 싶습니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짙은 회색의 하늘을 보고, 서로의 걸어온 길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이 번쩍 뜨이는 반가운 사진을 찍고, 아쉬워 돌아오는 밤길을 함께할 수 있는 그런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참 좋아요” 활짝 웃는 그리운 얼굴이 차창을 따라옵니다. 다시 아침은 오고 또 날이 저물어 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신기한 별 하나 떠 있습니다. 잠든 나를 비추는 그 별은 아침이 되면 하얗게 부서져 무너집니다.     이별이란 단어와 이별하는 날을 꿈꾸어봅니다. 어느 날 함께였던 모든 것들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 위로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새하얀 눈이 내리고,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밤이 지나고 나면 동쪽 하늘 언저리에 당신의 아픔을 덮어줄 푸른 새벽이 올 것임을 압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시간 동쪽 하늘 가을 하늘 위로 바람

2024-11-2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겨울 찬 바람이 불기 전에 Rosehill 어머니의 묘소를 찾았다. 비석 주변에 쌓인 낙엽도 쓸어주고 얼마 전에 묘 옆에 심은 작은 도장 나무 묘목에 물도 줄 겸 어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무언의 대화였지만 역시 어머니는 내 속에 살아계셨다. 나를 안으실 땐 늘 내 손을 잡으시고 다른 손으로 등을 어루만져주셨다. 그 손이 무척 그립다. 어머니를 닮은 작고 동그란 돌멩이를 묘목 주변에 깔아주었다. 가져간 가위로 묘목을 동그랗게 멋도 내주었다.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는 것 같다. 떠나오면서 노을이 물든 서쪽 하늘을 보며 운전했다. 차가 신호등에 멈출 때마다 노을을 찍었다. 삶은 노을같이 아름답고도 처절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검푸른 하늘에 영롱한 별들을 생각했다. 귀를 자르고도, 붕대를 얼굴에 감고도 웃을 수 있었던 화가의 생과 어린 네 자녀를 앞에 두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올곧은 어머니의 생이 오버랩되었다.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당신의 이름을 오는 내내 불러보았다.     명치끝이 아파와서     1   너에게 가는 길은   더딘 걸음이어도 좋았네   당신의 손에서 빚어낸 선물처럼   감추어진 무언가 찾아낸 아이처럼   마음과 몸으로 느끼는 향기   가을이, 낙엽이, 풍경이   선물인가 했었네   자리에 누워 생각해 보니   그건 바로 당신이었네     붉은 가을 앞에 서서   온몸이 붉어져도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시선을 견디어 내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었네   오늘은 꿈꾸고 싶은 것이 되어   돌아오는 노을이 되겠네     2   나는 속이 비워 넘어진 나무같아요 명치끝이 아파와서 손으로 문지르다 보니 손바닥에 묻어나는 얼굴 달도 많이 야위었어요 제 몸을 깎아 붙인 눈썹 같아요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선 저녁 엉켜진 덤불 아래서 파도가 머물고 간 모래톱에서 실핏줄같이 엇갈린 푸른 기억을 보았어요 서 있는 시간 내내 해는 기울고 지문처럼 찍힌 발자국이 서러워요 잃어버린 것을 찾지 못한 저녁 가던 길 돌아와 자세히 보면 아! 알고 계셨네요 당신의 시간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걸 그 길을 수도 없이 지나면서 지는 꽃잎에 눈물만 훔치던 당신 하루가 저무는 저녁 내내 붉은 노을로 돌아오고 있어요 오래전 당신이 걸었던 인생길같이 구불구불 그려놓은 당신의 무늬는 당신을 찾아가는 하늘길이 되었어요     3   고요는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도 오지   흙탕물의 침잠 시간에도 오고   낙엽 쌓인 보도블록 위에도 내려앉지   꼭 고요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어느 순간 지금이라고 명명되어진 그때   고요는 불현듯 오지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슬로비디오처럼   조용히 내려오지 소리도 없이   그것이 슬픔이듯 기쁨이듯   조용히 온몸을 채우며 오지   묵직하게 뻐근하게 그렇게 오지     4 남프랑스 아를에는 고흐의 숨결이 남아 있네 미시간 호숫가 *Rosehill에 당신의 숨결이 남아 있듯이 아를의 밀밭을 걸으면 흙바닥에 묻어나는 황색 물감 라 마르탱 광장 2번지 고흐의 노란 집엔 나무 침대, 베개 둘, 의자 둘, 탁자 하나 액자 6개가 걸려 있네 침대맡에 창문도 하나 있네 그 창문을 통해 아를의 기차역이 보이네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를 보네 그 창문에 서면 그의 중얼거림이 들리네 싸이프러스 나무위로 *별이 빛나는 밤이 오네 침묵이 대답이 되는 시간들이 별빛처럼 내리고 귀를 잘라버린 아픔과 참담히 거기 서있네 붕대로 싸맨 얼굴로 웃고 있는 막무가내가 뭉클하네 겨울 찬바람이 불기 전 어머니 묘소를 찾았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등을 어루만지네 서쪽하늘 노을이 붉게 번지네 삶은 노을같이 아름답고도 처절했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일처럼 별이 뜨고 별이 지는 일처럼 하루가 오고 하루가 지고 있네 Rosehill에 번지는 붉은 노을이여 멀리서 외로움과 맞설 아를의 푸른 밤이여 무슨 수로도 잊을 수 없는 당신을 부르네 낯설은 땅에 누운 고마운 당신과 아를의 밀밭 길을 걸어 사라지는 별빛 같은 당신 내 속에서 잠들고 눈을 뜨는 긴 숨 같은 이름들이네  *어머니가 묻힌 묘지 *정신병동에서 그린 고흐의 작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서쪽하늘 노을 어머니 묘소 미시간 호숫가

2024-11-1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긴 잠

나무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낙엽 하나 두울 날립니다   두 발을 뻗고 누웠습니다   그는 등을 내어줍니다   그의 숨결이 등을 통해 들립니다       푸른 하늘이 눈부실 때까지   봄의 연두가 살아날 때까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아는 만큼만 이야기하고   모르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렵니다   새봄의 새싹을 위해   무거운 겉옷을 벗어야 할 때   힘 빼고 두 손을 모아야 할 때   지울 수 없는 사계절 기억을   나무는 제 몸 속 깊은 곳에   한줄의 그리움으로 각인합니다   잠깐 피었다 지는 아쉬움이 아니라   짧게 말하고 오래 견뎌내는   익숙함을 넘어선 그건 믿음입니다   보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는   찬란한 어느 봄날을 꿈꾸며       하늘을 밀고 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앙상한 나무는 긴 잠을 청합니다 나무는 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인내와 사랑을 보여 줍니다. 어떤 나무는 500년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나무는 우리 선조들의 살아온 시간과 환경 속에서 그 당시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말없이 한 자리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아쉬움의 순간들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나무는 심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명을 다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무는 살아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뿌리를 뻗어 나가야 합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 가지와 잎에 수분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나무는 힘들어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수분뿐 아니라 적당한 양의 햇빛도 필요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 에너지를 동물은 섭취한 음식물을 통해 몸속에서 소화함으로 얻습니다. 반면에 식물은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입의 기공에서 흡수된 이산화탄소를 재료로 햇빛을 이용해 양분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우리는 광합성작용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나무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일부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죽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동물도,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살아남기 위해 제 몸의 일부를 떼어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으로 썩어 가는 다리를 잘라 내기도 하고, 한 쪽 팔을 떼어 내기도 합니다.   언덕을 오르다 쓰러져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버티고 서 있던 그 나무가 쓰러지고만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나무의 속이 휑하니 비어 있었습니다. 아마 나무는 결심한 듯 자신을 쓰러트리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무가 보인 결단이고 마지막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나무뿌리 근처에서 물기를 먹은 새 가지들이 올라오고, 연둣빛 잎사귀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쓰러진 나무의 등을 만져 주었습니다. “이제 긴 잠을 자려무나. 윗몸을 쓰러뜨리고 뿌리를 살리기로 한 너를 사랑해. 꿈을 버리지 않은 너를 기억할게. 햇볕 따스한 어느 봄날 우리 만나기로 해. 그때 힘 있게 뻗어 나갈 너를 기다릴게.” 언덕을 내려오면서 낮은 바람에 손 흔드는 작은 잎사귀들을 돌아보며 찬란한 어느 봄날을 꿈꾸어 보았습니다. 확연히 키가 커져 알아볼 수 없을까 봐 돌멩이 하나 놓아두었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무뿌리 근처 사계절 기억 연둣빛 잎사귀들

2024-11-12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