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신세를 졌어요
오래전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했던 친구들을 플러싱에서 만나기로 했다. 뉴저지에서 버스를 타고 한양 슈퍼마켓 앞에서 내리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반가웠다. 암 투병으로 아팠던 친구는 건강해 보였고 멋쟁이 친구는 여전히 젊음이 넘쳐흘렀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는 오늘따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플러싱 먹자골목을 다니면서 구경도 했다. 음식점에 앉았는데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을 로봇이 왔다 갔다 하면서 운반해준다. 로봇이 직원들의 손을 대신했다. 음식도 맛있고 양도 많았다. 뉴저지 식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콩나물도 아삭아삭하고 양념도 느끼하지 않고 생선도 많이 들어있고 생선 자체 맛이 일품이었다. 4명이 먹고 많이 남았다. 내가 가지고 가기로 하고 식대를 계산하려고 하니 벌써 다른 친구가 내 버렸다. 커피숍에 갔는데 한 친구가 계산대 앞에 서 있으면서 맛있는 빵을 골라오라고 손짓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하다가 한 친구가 일터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셋은 발 마사지하는 곳으로 향했다. 1시간 발 마사지를 해주는데 어머 좋은 것. 장딴지부터 발가락 하나하나 문지르는데 피로가 확 풀리고 발이 보드랍다. 꺼칠꺼칠했던 발바닥이 어린아이 살결처럼 부드러워졌다. 움츠리고 일어나 기분 좋게 계산대로 다가갔는데 다른 친구가 벌써 계산을 해버렸다. 온종일 즐기면서 한 푼도 내지 않아서 먹먹했다.신세 지기 싫다. 빚지고 사는 일은 불편하다. 받았으면 돌려줘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잘 받는 게 어려웠다. 겉으로 티 내지 않아도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다. 나는 언제나 갚아야 할 일들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공짜로 받으면 불편했다. 공짜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격표가 붙어있는 것 같다고 할까. 갚아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작은 호의가 호의로 다가오지 않는다. 친구 눈에는 그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티가 났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 이틀 볼 것도 아니고 이번에 못 내면 다음에 내면 되지 뭐.
지금의 세상은 호의 대신 편의를 요구한다. 의도나 숨겨진 목적 없는 호의 대신 목적이 선명한 편의를 제공하게끔 변해가고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할수록 더 그럴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호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분명한 목적은 마음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지만 호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은 가당치 않다. 그게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여유를 가지기란 어렵지만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꿔볼 수 있다. 받았다는 사실보다 친절한 마음씨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도를 기억해 보는 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친절에서 비롯한 마음이다.
나는 그래서 마음의 출발지만 기억하기로 했다. 일생은 길고 유별나게 굴 필요는 없다. 딱 맞게 떨어지는 관계는 없다. 더 줄 때도 있고 덜 받을 때도 있는 법이다. 주고받는 과정에 익숙해지면 그냥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 돌려줄 마음이 빈한해 옹색한 모양새가 부끄러울지라도 가까이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는 갚는 일이 싫어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오고감에 익숙해져야 한다. 무뎌져 익숙할수록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시간은 관계에서 의미 있던 순간들도 희미하게 만드니까.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꼭 밥을 사야겠다. 헤어지면서 작년에 아카시아 꽃을 넣어 만든 와인을 한 병씩 주면서 무슨 향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넌지시 숙제를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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