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은 내리고
![[신호철]](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2/25/1db43740-8bf8-4aeb-9f66-24d046cf6fec.jpg)
[신호철]
눈을 감아도 고개를 숙여도
땅끝까지 눈은 길게 드리우고
한 사람의 눈빛도 스며 오는데
이미 세상은 하얘진 지 오래다
생각은 푹푹 빠져 깊어지는데
눈은 사물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눈과 눈빛이 어우러져 깊어지는 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혹은 네가 소리치다 목마른
설렘은 눈 속에 덮이고 또 덮이고
고립된 섬처럼 눈은 쌓이고
거인 나라 난쟁이가 되어버린 뒤란
나무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 가득
다시 피어난 얼음 꽃송이
눈은 내리고
너와 나의 슬픈 울타리
버티고 있는 높낮음도 사라져간다
옆집과의 경계에 4피트 높이의 나무가 울타리로 자라고 있다. 촘촘히 자란 잔가지 때문에 옆집 뒤란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날씨가 좋은 주말에 서로의 정원을 가꾸다 지나치듯 몇 마디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날씨가 추운 겨울날엔 마주칠 리 없다. 더구나 눈 오는 날엔 그림자조차 만날 리 없다. 나도 창가에 의자를 바짝 끌어 놓고 눈 덮인 뒤란의 고요를 즐기고 있다. 오랜 시간 바라 보고 있노라면 평상시 때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눈에 잡힌다. 촘촘한 가지 사이로 분주한 새들의 움직임을 인지 하게 되었다. 초점을 맞추고 들여다본 나뭇가지에는. 열 마리도 넘는 새들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가벼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날아들기도 하고. 어디론가 날아가기도 했다. 몇 마리는 가지 끝 꼭대기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듯했다. 나뭇가지 사이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듯 무엇인가를 입에 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집과 집 사이 나무울타리는 새들에게는 보금자리가 되기도 하고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내 어린 기억 학교 가는 언덕길에 울타리를 높이 올린 집이 있었다. 그 울타리 끝에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박아놓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유리 조각은 어린 나에게도 섬찟한 두려움이었다. 누구도 그 울타리를 넘을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높은 울타리는 안과 밖을 철저히 분리해 놓았다. 누구라도 그 울타리를 통해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장벽을 쌓아 놓았다. 울타리 안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집 정원에서는 무슨 꽃이 피어 있는지 짖어대는 개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울타리는 안정과 평안을 주기도 하지만 깨어진 유리 조각을 박아놓은 그 높은 울타리는 속박과 두려움을 주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울타리가 슬프게 기억되는 이유가 된다.
눈 내리는 눈길을 걷고 있다. 하얗게 덮인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면서 길을 내고 있다. 돌아보면 이내 길은 사라지고 다시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 길은 애초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면 길이 되는 것이다. 발길이 뜸해지면 길은 희미해지다 사라져 버린다.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물어보며 길을 찾아 가면 된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인하며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걸어가야 할 목적지를 잃게 되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길을 내다보면 언젠가 마른 땅이 되고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내가 나를 찾아가는 인생길이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눈길에도 길을 내고 다시는 나를 속박하는 슬픈 울타리가 되지 말자.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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