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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사이클연맹 이상현 당선..."대한민국 으뜸 종목으로 발돋움시키겠다"

뜻을 잘 수렴해 앞으로 4년간 클린사이클 문화 조성을 바탕으로 생활체육 저변 확대, 능력 있는 인재 등용, 적극적인 재원 유치를 통해 안정적인 연맹 운영을 이루겠다. 동시에 아시아 사이클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되찾기 위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과 LA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겠다"며 연맹 운영 방침을 밝혔다. 외조부인 고(故) 구태회 LS 전선 명예회장(전 대한역도연맹 회장)과 아버지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전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이어 대한하키협회 회장을 맡아 한국 체육계 사상 처음으로 3대째 종목단체장을 맡아 화제가 됐던 이상현 회장은 대한체육회 이사, 한국체육학회 부회장으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국립합창단 이사장, 국립극장진흥재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만큼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 간의 협력과 조화가 중요한 시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줄 대표적인 스포츠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주식회사 태인의 대표로서 지난 35년간 이어온 태인장학금 사업을 통해 양궁 임시현, 김우진, 사격 오예진, 탁구 신유빈, 그리고 한국 사이클 유망 선수인 박준선(2023년 34회 장학생), 최태호(2024년 35회 장학생) 등 지금까지 741명의 체육 유망주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며 체육 인재 육성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상현 당선인은 2025년 대한사이클연맹 정기대의원총회 날부터 2029년 정기대의원총회까지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상현 당선인의 주요 이력 現 ㈜태인 대표이사 대한사이클연맹 회장 아시아하키연맹 부회장 국립합창단 이사장 국립극장진흥재단 이사 한국체육학회 부회장 한국체육대학교 올림픽연구센터 고문 2036 제36회 하계올림픽대회 국내 유치도시 선정 평가위원회 위원장 (사)한국청소년문화광장 대표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前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사)대한하키협회 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제19회 항저우 아시아경기대회 국가대표 선수단 부단장 제33회 파리 하계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부단장 대한체육회 남북체육교류위원회 위원 경기도체육회 이사 서울특별시 생활체육발전위원회 위원 대한산악연맹 국제교류위원회 위원 수상내역 국무총리 표창 중소벤처기업부장관 표창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대한체육회 윤리경영 스포츠 가치 우수상 /[email protected] [사진] 대한사이클연맹 정승우([email protected])

2025-01-09

"사이클 인구 1300만 시대, 발돋움시키겠다" 태인 이상현 대표, 대한사이클연맹 회장 당선

뜻을 잘 수렴해 앞으로 4년간 클린사이클 문화 조성을 바탕으로 생활체육 저변 확대, 능력 있는 인재 등용, 적극적인 재원 유치를 통해 안정적인 연맹 운영을 이루겠다. 동시에 아시아 사이클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되찾기 위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과 LA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겠다"며 연맹 운영 방침을 밝혔다. 외조부인 고(故) 구태회 LS 전선 명예회장(전 대한역도연맹 회장)과 아버지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전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이어 대한하키협회 회장을 맡아 한국 체육계 사상 처음으로 3대째 종목단체장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이상현 회장은 대한체육회 이사, 한국체육학회 부회장으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국립합창단 이사장, 국립극장진흥재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만큼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 간의 협력과 조화가 중요한 시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줄 대표적인 스포츠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태인의 대표로서 지난 35년간 이어온 태인장학금 사업을 통해 양궁 임시현, 김우진, 사격 오예진, 탁구 신유빈, 그리고 한국 사이클 유망 선수인 박준선(2023년 34회 장학생), 최태호(2024년 35회 장학생) 등 지금까지 741명의 체육 유망주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며 체육 인재 육성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상현 당선인은 2025년 대한사이클연맹 정기대의원총회 날부터 2029년 정기대의원총회까지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email protected] 홍지수([email protected])

2025-01-09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명분 없는 전쟁에 염증, 피 대신 문화국 귀화

뜻이 없고 당신들을 괴롭힐 뜻이 없소이다. 나는 본디 동토(東土, 조선)가 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들은 바 한 번 와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구경하러 조선에 왔다는 그는 닷새 후인 4월 20일에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강화서(講和書)를 보내 조선으로 귀화할 뜻을 전한다. 임란 선봉장 일주일 만에 결심 조총·화포 제조법 전수 혁혁한 공 “성은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여진족 방어 공로 정2품 올라 우록김씨 시조, 일가 이뤘지만 말년에 육친 그리움 토로도 이순신이 화포 제조법 문의 사야카에 의하면 자신의 귀화는 지혜가 부족하거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재능이 모자라거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또 군사가 정예가 아니거나 무기가 불리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조선에서 펼쳐지는 예의문물의 아름다움과 의관풍속의 번성함을 우러르며 예의지국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 무장들이 대의명분은 고사하고 자신의 권력 확장을 위해 조선을 침략하는 행위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降倭)의 수는 적게는 1000에서 많게는 1만에 이른다고 한다. 적지 않은 수의 귀화인들에서 유독 사야카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인으로 산 50년의 역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자아실현인 동시에 자신이 꿈꾼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를 구체화하는 의지와 실천의 여정이었다. 왜장으로서 조선의 신민이 된 사야카는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상응하는 성과를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귀화 직후인 1592년 9월 그는 동래와 양산의 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4월에 국왕 선조는 권율 장군의 주청으로 그에게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벼슬을 내린다. 일본인 사야카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조선의 무반 관료로 편제된 김충선은 임진왜란 동안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을 뿐 아니라 조총(鳥銃)과 화포 제조 기술을 전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총과 화포 제조법을 묻는 이순신 장군의 편지에 이미 제조해서 쓰고 있다는 김충선의 답장(‘答統制使李公純臣書’)에서 보듯 임진왜란에서 그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자 김충선은 서른의 나이로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을 하고, 그 이듬해에는 대구도호부 우록동(友鹿洞)에 집을 지어 정착한다. 당호를 모하당(慕夏堂)이라고 하여 중하(中夏) 문명의 신봉자임을 분명히 했다. 조선을 제2의 고국으로 선택한 것도 중하적 문화가 실천되는 소중화(小中華)의 사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거(安居)를 누릴 새도 없이 그는 북로(北虜, 여진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한 북방 방어를 자원하는 ‘잉방소(仍防疏)’를 올리고 변방으로 향한다. “신은 국외의 천한 포로로 두 조정(조선과 明)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성덕을 갚고자 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 한 몸으로 장성(長城)을 삼고 한 자루의 칼로 백만 병(兵)을 대적하여 오랑캐를 멀리 내쫓고, 내 나라를 받들어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잉방소’) 1613년에 우록동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10년 동안 변방에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그 공으로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의 난에서도 공을 세우는데, 그 대가로 사패지를 받게 되자 나라(守禦廳)에 환납하는 결정을 한다.(‘환사패소·還賜牌疏’) 사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재물보다는 사람됨의 가치를 중시한 그의 인생관은 자녀 교육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도 눈여겨 볼만하다. “항왜 장수 김충선의 사람됨은 용기가 출중할 뿐 아니라 성품 또한 공손하고 신실하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부모형제 두 아내 저버리고 귀화 김충선의 자전적 기록에 의하면, 동토(東土)의 예의방(禮義邦)을 구경할 겸 흔쾌히 부대의 선봉장을 맡으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결심을 한다. 부모님 산소에 하직 인사 올리고 친척들과 일곱 형제 그리고 두 아내와 이별하는데, 그 슬픈 마음 서러운 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섬 오랑캐(島夷之人)’로 일생을 마치느니 대륙인 중하(중국)나 동토(조선)에서 문화인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는 조선에 상륙하여 귀화를 청할 때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예의의 나라 동방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 자손을 남겨 예를 아는 수준 높은 가문을 만드는 것이다.(‘녹촌지·鹿村誌’) 물론 김충선이 학술과 지식 욕구가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문화적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고국을 버리고 타국을 선택했다는 것에는 뭔가 미진한 감이 있다. 당시 일본 사회는 힘이 지배하는 반문명의 상태로 침략 전쟁을 자행하는 권력가들의 야욕에 염증을 느낀 그룹이 팽팽했음을 관련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년 사야카도 이러한 일본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충선은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고 그들로부터 25명의 손자녀를 얻었다. 생전에 이미 자손 30명을 이끄는 가족 대표로 그들을 교육할 교재로 가훈(家訓)을 짓는다. 그 핵심 내용은 이런 것이다. “효제충신을 업(業)으로 삼고 예의염치를 가풍(家風)으로 하여 자자손손 서로 전하며 화목하게 지내라, 부귀영달을 탐하지 말고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갈고 닦으라. 재물(財物)로 가족 관계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인문 가치를 실천하는 가족 공동체를 지향하며 대대손손 전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구상은 혈연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우록동 주민에도 눈을 돌리는데, 그 화합과 상부상조의 방법들을 15개 조의 조약(條約)에 제시했다. 가훈과 조약을 비롯하여 조선의 명사들과 교환한 서신들, 시(詩)와 가사(歌辭) 등의 문학작품, 그를 기리는 후손들의 글이 『모하당문집』(규장각 소장)에 실려있다. 김충선이 뜻한 바 그를 시조로 한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 또는 ‘우록김씨(友鹿金氏)’의 가계와 가풍이 형성되고 전해졌다. 이 가문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을 뿐 아니라 김충선을 배향한 녹동서원 인근에는 현재까지도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충선도 인정한 바 50년 조선인의 삶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다만 두고 온 고국의 가족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들 김경원이 지은 ‘행록’에 의하면, 조선 참전 후에는 일본에서의 일을 말한 적이 없고 씨족의 내력을 말한 바도 없었다. 다만 건너올 때 소지한 신묘년(1591)의 호적에 부친 사익(沙益)을 비롯 조부와 증조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김충선은 여덟 형제의 막내였다. 친일과 반일 너머 김충선의 삶 “남풍이 불 때면 고국이 생각나니 선분(先墳)은 평안한가 칠형제 무사한가. 지친골육들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간운사(看雲思) 춘초몽(春草夢)이 어느 때인들 없을까마는 국가에 불충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 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 아마도 세상의 흉한 팔자 나뿐인가 하노라.”(‘모하당술회·慕夏堂述懷’) 죽음을 앞둔 칠순의 무장(武將) 김충선(1571~1642)은 두고 온 고국과 형제들의 소식에 애가 닳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나온 고국이지만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은 의지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친일과 반일의 이념, 그 너머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면 김충선이 조선을 보는 시선도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5-01-09

달라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특별한 8.15 광복절

조부들이 독립운동 일선에서 싸웠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홍은실 회원은 오현경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1933년 중국 훈춘에서 출생했다. 홍은실 회원이 어렴풋이 기억하는 할아버지 오현경 독립운동가는 젊어서 부터 독립군으로 활약했고, 교회 장로였던 할아버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고 한다. 당시 훈춘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평화·문화 공동체를 형성해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마을을 이룬 곳이다. 할아버지의 영향속에서 성장한 홍은실 회원은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이주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다. 홍은실 회원은 “할아버지께서는 사람이 알아야 한다며 공부를 중요시 여겼다”며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기 때문에 원수의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아들들을 다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우리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오현경 독립운동가의 활동은 독립운동 인명사전에 기록돼 있다.   이창엽 회원은 이인순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충남 홍성에서 1928년 출생했다. 2006년 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인순 독립유공자에 대해 국가유공자증서를 발부했다. 이창엽 회원은 할아버지인 이인순 독립유공자가 일본군 기마대를 피해 산으로 도피를 했던 일화를 회고했다. 은혜복지센터 장하운 이사장은 독립유공자 장병준 선생의 후손이다.   1958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한 장하운 이사장은 할아버지인 장병준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1990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1993년에는 고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을 받았다고 밝혔다. 장병준 선생은 1919년 3월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만세 시위 때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 장산면으로 내려가 만세 시위를 조직했고, 그 후 상해로 망명했다.   장병준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을 지냈고, 의원을 지내면서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는 일을 했다. 장병준 선생은 1920년 2월 한국으로 다시 잠입해 3.1 만세운동 1주년 기념 전국 시위를 조직하던 중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장병준 선생은 출옥한 후 고향에 내려가 전국적으로 수탈당한 농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후 전국적으로 형성된 신간회에 참석해 목포 지회장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장하운 이사장은 회고했다. 장하운 이사장은 “8.15를 기념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그분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게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은혜복지센터는 지난 15일(목) 제79주년 8.15 광복절 경축식을 개최했다. 경축식은 기념 시 낭송, 홀로 아리랑 중창, 결의문 낭독, 광복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토니 채 기자독립유공자 광복절 독립유공자 장병준 이인순 독립유공자 광복절 경축식

2024-08-16

[글로벌 아이] 어떤 아름다운 ‘취미’

조부가 한 마디 던졌다. “돈이 얼마가 있든 취미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다.” 서른살, 그가 도전한 취미는 도예였다. 동경예술대 학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뜻하지 않게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척박한 환경에 귀 기울이게 됐다. ‘학교를 졸업해도 작업실도, 돈도 없으니 꿈을 이루기 어렵다’는 거였다.   스사키는 그 길로 집 근처 대밭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1985년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세웠다. 마루누마 예술의 숲 레지던스의 시작이었다. 무명의 젊은 작가들을 이곳에 불러와 작업공간 제공은 물론, 재료비 지원, 전시회 지원을 하기를 올해로 40년. ‘아시아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타카시도 20년간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인구 14만여 명의 작은 도시 아사카시의 마루누마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꼭 한 번 가고 싶은 곳이 됐다. 8년 전부턴 한해 3명씩 한국 젊은 예술가를 초대하면서 한국 작가들의 발길마저 이어지고 있다. 전시회에서 만난 스사키 대표는 “취미로 인해 세상이 넓어졌고, 이젠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이 내 취미가 됐다”며 활짝 웃었다. 평소 유니클로를 입고 다니면서도 반평생 낯선 예술가들을 선뜻 후원해온 아름다운 ‘취미’를 가진이를, 우리 사회에서도 볼 날이 오길 바라본다. 김현예 / 도쿄 특파원글로벌 아이 취미 동경예술대 학생 스사키 대표 재료비 지원

2024-04-14

[김형석의 100년 산책] 절대 ‘꼰대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조부 얘기를 소개했을 때였다.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손자 결혼에 반대한 할아버지   E군은 대학을 끝내고 군에 입대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약속했다. 자기가 군에서 제대하고 여친도 대학을 졸업하면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결혼하기로 했다. 그 뜻이 이루어져 두 젊은이는 인생의 아름답고 행복한 꿈을 간직하게 되었다. 남은 문제는 E군 할아버지의 허락이었다. 할아버지는 E군이 장손이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두 가지 문제만 없으면 결혼하라고 했다. 우선 사주가 좋아야 하고, 또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이 천민 직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사주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상대방 집안도 명문가인데 양가 선조들이 한양에 살았을 때 서로 원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놈의 집안과는 혼인을 맺을 수 없다. E군 증조할아버지가 유언까지 남겼다는 것이다. 그런 사태에 직면한 E군 부친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 끝에 E군 여친 아버지를 찾아가 양해를 얻었다. 할아버지 연세가 높으시니까 아들·딸들의 장래를 위해 좀 기다리기로 하자는 합의였다.   극단적 이념대립의 부작용   이런 얘기를 끝냈는데 내 강연을 들은 몇 사람이 ‘그런 꼰대 할아버지’가 아직도 있을까, 라면서 웃음 반, 걱정 반이었다. 나는 속으로 가정을 위해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꼰대 기성세대’가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부터 한동안은 ‘꼰대’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 유행했다. 꼰대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부하들, 생각과 사고방식에 융통성 없는 지도자들, 뜻밖에도 꼰대가 없는 사회를 책임져야 할 일부 종교계 지도자들까지도 정신적 꼰대를 면치 못하는 사례가 떠올랐다.     종교 국가라고 볼 수 있는 인도나 중동지역에 가면 그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꼰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보수 진영이나 좌파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극렬한 정치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그 꼰대 정신을 정치적 수단이나 상품화하기도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관계도 그렇다. 두 민족이 불행했던 과거의 원한과 적개심을 다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우호 관계나 친일외교를 할 수 있느냐고 국민을 선동한다. 개인 간에서도 원수는 끝까지 갚아야 하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편 가르기를 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와 젊은 세대 장래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21세기   나같이 일제강점기를 산 사람은 ‘꼰대 관념’을 벗어나기 힘들어도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부터는 국민 장래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회라면 몰라도 21세기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사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반(反)사회, 반(反)역사적인 꼰대 정신은 극복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일본의 아베 정권과 우리 문재인 정부 때를 연장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런데 예상 못 했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꼰대라는 말은 줄어들고 있는데 새로운 꼰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한때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노사모’가 생겼고, ‘박사모’가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좋은 일은 아니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빠’가 등장하고 ‘개딸’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새로운 ‘젊은 꼰대’가 사회의 혼란과 폐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국민 다수가 ‘내로남불’이 되니까 무감각한 사회병이 되었는데, 지금은 꼰대 정신이 더 넓게 번지는 것 같다. 공산사회에서 흔히 보던 현상이고 독재정권이 조작해 정치 수단으로 삼았던 나라병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꼰대 할아버지’는 자연히 사라지겠지만 꼰대 정치 세력은 앞으로도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걱정하는 젊은 세대의 꼰대들은 관념의 한계를 넘어 행동화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꼰대가 깡패 행태까지 겸하게 되면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조성한다. 정치 지도자들까지 그런 꼰대 정신, 폭력 의지를 수용하면 국가적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도 같은 길을 따르지 않았는가.   폐쇄적 사회는 오래가지 못해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는 두 가지 주어진 목표가 있다. 자유를 각자가 누리면서도 윤리적 가치가 유지되는 사회, 인간적 가치가 인간애의 정신으로 공존이 존중시되는 세계 역사의 길이다. 고정관념이나 집단적 이기적 절대가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꼰대 정신이 지배하는 국가와 사회는 그 폐쇄적 사고와 가치관 때문에 스스로 종말을 자초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애국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선한 가치와 질서를 창조 육성하며, 휴머니즘을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책임이다. 보편적 가치를 역행하는 노동운동,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목적의식, 인간의 가치와 생명력을 훼손하는 허위와 위선 모두가 꼰대 정신과 연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진실·자유·인간애는 자유민주 정신의 근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할아버지 사회 e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연세 좌파 정치인들

2023-06-23

[워싱턴 읽기] 트럼프 처리에 관한 역사의 교훈

뜻에 동조했다. 남부가 차례로 연방을 탈퇴했지만 그는 연방에 남아있었다. 노예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남부 출신이면서 연방 탈퇴에 반대해 북부에서는 정치인으로서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출신 지역인 테네시 등 남부지역으로부터는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링컨 대통령은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는 차원에서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른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존슨은 부통령이 되었지만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정치적인 포지션이 너무나 어중간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취임식에 참석하기 어려웠던 그는 위스키를 잔뜩 마시고 취임식장에 입장했다. 그에게 주정뱅이 부통령이란 말이 생긴 이유다. 그런데 그를 부통령으로 만들고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링컨이 불과 취임 한달 만에 포드 극장에서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링컨의 사망으로 존슨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100년 후인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제럴드 포드가 또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 되었다)     존슨은 현직 대통령임에도 경선에서 패해 일찌감치 재선에 실패했다. 의회에 정치적 기반이 없어 재임 동안 수차례 탄핵을 당하는 등 시달림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늘 최하위에 머문다. 노예제도를 고수하는 남부 보수파에 힘을 실어줘 흑인 인권을 100년 뒤로 미룬 원흉이라고 지적받는 대통령이다.     존슨의 후임으로 남북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스 그랜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존슨은 그랜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던 공화당과의 관계가 험악해져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이후 152년 뒤인 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는 기록을 이어받았다) 존슨은 탄핵 소동으로 인해 재선은 꿈도 못 꾸고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난 상태에서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지만 명예를 회복한답시고 정계에 남았다. 이후 테네시주의 상원의원이 되긴 했지만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 존슨은 몸이 마비 상태가 된 상황에서도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는 고집불통의 면모를 보이면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숨졌다.     지난 12월19일 연방의회내 ‘1월6일 위원회( House  Jan.6  Committee )’의 마지막 청문회장엔 150여년 전의 존슨 대통령이 소환되었다. 위원회의 부위원장인 리즈 체니 의원이 남북전쟁 당시 북군 오하이오 보병연대의 중대장으로 싸운 자신의 고조부 사무엘 플리처 체니를 소개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존슨과 2021년 1월 의사당 반란을 조장하고 공모하고 방관한 트럼프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하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했고 반란을 조장했으며 국가적 위기를 방관한 대통령으로 존슨과 트럼프는 닮은꼴이다.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같다.     ‘하원 1·6 위원회’의 마지막 청문회가 150여 년 전의 존슨 대통령을 소환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을 다시는 공직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2021년 1월6일 연방의사당을 공격한 폭도들의 반란을 조사한 ‘하원 1·6위원회’는 트럼프 대통령을 ‘반란 또는 선동에 관한 법률(Violating 18 USC 2383)’에 의해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냈다.  2000년 1월23일 발효된 이 법은 누구든지 미합중국의 권위 또는 법률에 반하는 반란이나 폭동을 선동하거나 가담 또는 지원한 자는 벌금을 물거나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미합중국에서는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트럼프는 중대범죄 행위로 인해 하원으로부터 탄핵당한 바 있고 ‘1·6 위원회’의 형사 처벌 권고도 있었다. 트럼프가 다시는 선출직, 또는 임명직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트럼프 역사 존슨 대통령 역사상 대통령 링컨 대통령

2022-12-27

"나는 찰스 3세와 커밀라 왕비의 아들이다"

양조부모인 위니프레드와 어네스트 보울든은 두 사람 모두 영국 왕실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그의 부군인 필립 공을 위해 살림을 돌보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어네스트 보울든은 왕실봉사상을 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충직한 신하였다. 왕실에서 이들 부부에게 도란트-데이의 입양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양조모가 그의 딸에게 부탁해 입양이 성사됐다는 것이다.   도란트-데이는 최근 찰스 국왕과 자신의 55세 때 사진을 비교할 수 있도록 언론과 SNS에 함께 공개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영국 왕실 문제에 관심 있는 호사가들 중에는 두 사람이 상당히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SNS 방문자들은 사진을 확인한 뒤 “당신의 아버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반응을 나타냈다.   도란트-데이 역시 스스로 이런 사진들이 자신과 찰스 3세 국왕과의 부자 관계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사진을 나에게 보내는 다수의 지지자와 팔로워가 전 세계적으로 존재한다”면서 “이들은 끊임 없이 나를 놀라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검사, 즉 DNA 검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는 “DNA 검사에 앞서 이런 사진이 사람들에게 유전적 유사성을 구별하게 하는 한 중요한 방법이다”라면서 “명백히 나는 찰스∙커밀라 부부와 함께 DNA 검사를 받기 원하고 이를 위해 싸울 것이지만 법정에서 이를 확인하기까지는 기나긴 과정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도란트-데이는 자신이 찰스와 커밀라 부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단지 사진 비교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그는 또 “나는 분별력 있고, 지성적이고 아주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사랑스러운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며 남편”이라고 말하고 “내 이야기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말한 어떤 것도 확인 가능하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그들이 나의 가족임을 믿기 때문에 그들과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해 영국 왕실에 입성할 뜻을 강력히 내비치고 있다.   도란트-데이는 커밀라가 1965년 자신을 임신했을 당시 출산 때까지 약 9개월 동안 영국 사교계에서 사라져 있었고 찰스는 호주로 가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한 역사가는 도란트-데이의 출생증명서에 기록된 병원을 조사했으나 그 병원에서는 도란트-데이 출생연도 기준 10년 동안 한 명의 아기도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으며 서류에 적혀 있는 그의 부모 이름도 가명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란트-데이는 뿐만 아니라 자신의 퍼스트 네임과 미들 네임인 '사이먼 찰스(Simon Charles)'가 생물학적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라면서 그 배경으로 자신의 양어머니가 입양 조건 가운데 하나가 아이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었다고 말해줬으며 자신이 태어날 당시 찰스와 커밀라에게는 사이먼이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란트-데이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는 의견과 외모적으로 닮은 것이나 양조부모의 왕실 근무 경력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으로 갈린다.   찰스와 커밀라의 숨겨진 아들 이야기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영국 왕실에 왕자의 난을 몰고 올 수 있는 엄청난 태풍으로 성장할 지 지켜볼 일이다.      김병일 기자찰스 국왕 커밀라 왕비 아들 도란트-데이 입양 왕실 출생증명서 양부모 양조부모

2022-09-22

[살며 생각하며] 한글날 생각하는 자랑스러운 한글

조부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개국했으니 겨우 50년 역사, 신생국으로 아직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자리잡혔다고 보기는 어려운 시기, 세종대왕이 그 많은 할 일 중 특별히 한글 창제에 사활을 걸었음은 높이 평가됨이 마땅하다. 무엇보다 최만리 같은 위인이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며 기를 쓰고 반대했고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리는 가운데 탄생한 한글의 우수성을 뽑아보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글은 세종대왕의 경천애민사상의 발로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문)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함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쉬이 익혀 날마다 씀에 평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왕이 서민 대중의 편리함을 헤아려 양반들의 극한 반대 속에 문자를 만든 예가 있을까? 오히려 백성을 우민화시켜 철권통치를 공고히 하였다는 기록만 난무하지 않는가? 이 모습은 종교도 마찬가지로 가톨릭은 최근까지 평신도가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을 금했다. 따라서 세종이 단지 국민의 편리를 위해 안질까지 앓아가며 새로 28자를 만든 것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한 표징이 아닐까. 둘째 한글은 독창성과 과학성을 두루 갖춘 창조품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하면,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모음은 세상 만물의 근간인 천(하늘), 지(땅), 인(사람)에서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즉 자음은 모든 소리의 기본인 5행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금닛소리글자(ㄱ), 혓소리 글자(ㄴ), 입술소리 글자(ㅁ), 잇소리 글자(ㅅ), 목청소리 글자(ㅇ)를 기본으로, 모음은 둥근 하늘의 모습을 닮은 아래아(.), 평평한 땅의 모습(ㅡ), 서 있는 사람의 모습(ㅣ)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한글은 사물의 형상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우주관을 포함한 음운학적 원리가 글꼴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글꼴들은 마치 원자와 전자가 만나 물질의 기본을 이루는 것처럼 오행 사상의 자음에 천·지·인을 상상하는 모음이 상합된 문자 과학의 정수를 지닌 자랑할만한 만고 유산이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2021-10-08

인류는 위대했다…불후의 걸작들

뜻의 메사 베르데(Mesa Verde)라고 부르기 시작했지만, 이곳 중턱의 주거지가 발견된 건 그 후 200년도 더 지나서의 일이다. 채핀 고고학 박물관과 10km에 이르는 '메사 탑 루프 로드 드라이브', 암각화들을 만나볼 수 있는 '페트로글리프 포인트 트레일' 등 명소가 많다. 홀리크로스 채플, 애리조나 붉은 산, 기묘한 형상의 바위, 황홀한 낙조가 어우러지는 애리조나의 세도나는 종종 세계 10대 관광지의 하나로 꼽히곤 한다. 자연풍광만을 자랑하는 관광지와는 달리 자연이 만들어낸 에너지, '기(氣)'가 세기로 유명하다. 독특한 형태의 붉은 사암이 병풍처럼 둘러싼 이곳에선 실제로 지구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기 에너지 '볼텍스(Vortex)'가 제일 강하다고 한다. 이 세도나 시내에서 트롤리로 15분 걸리는 곳에 홀리크로스 채플(Chapel of the Holy Cross)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 바위산을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 위에 지어진 성당은 신비롭고 경건하다. 18개월간 30만 달러를 들여 1956년 완공됐다. 네무르 맨션, 델라웨어 다이너마이트와 무연 화약 등을 제조, 19세이 이래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의 하나인 듀퐁가의 알프레드 듀퐁이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알리시아에게 선물로 지은 프랑스 루이 16세 시절의 로코코 스타일의 저택이다. 네무르는 그의 증조부의 출신지인 프랑스 북중부의 도시 이름에서 따왔다. 1909~10년 이 지역 출신 건축가 스미스와 그의 아들에 의해 지어진 102개의 방을 갖춘 저택과 정원은 그 면적이 300에이커에 달한다. 정원은 듀퐁이 여러 차례 다녀왔던 유럽의 정원을 본 따 만들어졌다. 여러 개의 정원과 미술품을 갖춘 프랑스 스타일의 저택은 종종 델라웨어주의 숨은 보석으로 간주된다. 관람객은 개별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데, 곳곳에 가이드들이 상주해 관람객들에게 설명과 안내를 해준다. 페린 브릿지, 아이다호 미국 성인 1인당 연평균 111파운드를 소비하는 감자의 97%가 생산되는 아이다호 주의 도시 아디아호폴스에 자리한 다리다. 다리 아래로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 스네이크 리버(Snake River)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옐로스톤 호수에서 발원하여 티턴 국립공원을 거쳐 워싱턴 주의 콜럼비아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1735km에 달하는 강이다. 이 페린 브릿지(Perrine Bridge)는 이 강의 협곡 중에서 가장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스네이크 리버 캐년에 걸쳐 있는 아치형 다리로 전체 길이 457m, 아래 수면까지의 높이는 148m에 이른다. 다리 아래로 펼쳐지는 경관도 멋지지만, 모험을 추구하는 베이스 점퍼(낙하산을 메고 뛰어 내리는 레저)들에겐 한번쯤 도전하고픈 명소다. 조지 피바디 도서관, 볼티모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웅장한 도서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조지 피바디 도서관(George Peabody Library)는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의 도서관이다. 1857년 피바디 연구소로 시작한 이 도서관은 미국 최초의 국제금융인이며 대규모 자선사업의 선구자로 꼽히는 조지 피바디가 볼티모어 시민들에게 헌정한 도서관이다. 18~19세기의 장서 30만여 권을 보유한 이 도서관은 휴일이면 결혼식과 피로연 등으로 일반인들에게 개관하는 시민의 도서관이다. 각 대학들에 아낌없이 돈을 대 하버드와 예일, 존스 홉킨스, 밴더빌트 대학 등에 그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적지 않다. 독신이었던 그가 당시 금융기업이었던 주니어스 모건을 파트너로 받아들였다가 임종을 앞두고 피바디은행의 경영을 주니어스 모건에 넘겨 오늘날의 세계적인 금융제국인 J.P. 모건의 신화가 있게 됐다. 게이트웨이 아치, 미주리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인공구조물로 꼽히는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는 미국의 60번째 국립공원이다. 1965년 미시시피강 너머 서부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1965년 준공됐다. 스테인리스강으로 제작된 192m 높이의 이 아치는 서부로 향하는 관문을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정상부의 전망대로는 내부의 트램을 닮은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다. 지하에는 서부개척 박물관을 비롯해서 3-D영화관, 케이블카 승강장이 자리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세인트루이스 시가지의 전망이 시원하다. 정면의 구 재판소를 포함한 타운타운과 남서쪽으로 메이저리그 야구단 카디널스의 홈구장도 보인다. 미리어드 식물원, 오클라호마 오클라호마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미리어드 식물원(Myriad Botanical Gardens)은 '오아시스'라고도 불린다. 1998년에 개장한 17에이커 규모의 식물원은 중앙에 68m 높이의 원통형 '크리스털 브릿지 열대 온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야자나무들을 비롯해서 이국적이고도 아름다운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곳은 식물원뿐만 아니라 산책로에서의 산책, 잔디밭에서의 소풍 등 다양한 즐길거리를 선사한다. 공원 곳곳에 어린이 정원, 강아지 공원 등이 마련돼 있어 가족 나들이에도 좋다. 이외에 매년 오클라호마시와 함께 다양한 아트 페스티벌이 열린다. 사진=위키피디아·MSN 백종춘 객원기자

2020-03-19

17년만에 안중근 의사 흉상 LA에

증조부)는 30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자신만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가셨다. 안 의사는 한국만이 아닌 세계를 걱정하고 위하셨다. 그의 뜻을 이어받아 코로나19의 위기도 함께 극복해 나가자”고 전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최석호 가주 하원의원, 김완중 LA총영사, 박성수 LA상공회의소 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과 100여 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특히 흉상 건립을 꾸준히 추진해온 윤 회장에게 입을 모아 감사를 전했다. 최석호 의원은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당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애국자라고 배웠다. 하지만 우리 후세들은 얼마나 우리의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염려스러웠다. 다행히도 오늘 이 제막식을 통해 이 건물을 드나드는 많은 어린이들이 우리 역사의 한 토막을 가깝게 배우게 되어 한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김완중 총영사는 “흉상건립위원회가 2003년 발족된 지 17년 만에 교육원에서 제막식을 하게 되었다”며 “이번 제막식을 준비한 윤 회장과 교육원 관계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장상근 성악가가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영웅’의 장부가를 불러 참석자에게 감동을 안겼다. 2부에서는 방아린, 김민서, 김지윤 학생이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뚜렷한 역사 의식과 소신을 볼 수 있는 웅변을 펼쳐 박수를 받았다. 오수연 기자 [email protected]

2020-03-08

[역사의 창]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 깬 아베

외조부 2명은 총리, 고조부는 구한말 조선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아베 총리가 군국주의 일본의 적손이라 불리는 이유다. 한국 언론으로 접하는 분위기와는 달리 아베 총리의 일본 내 지지율은 꾸준히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정치 특성상 이는 한국의 대통령 지지율 70~80%대에 비견될 만큼 높은 수치라고 한다. 이유가 있다. 우선 경제다. 한국의 불매운동으로 큰 타격을 받았을 것 같지만 사실 지금도 일본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일을 할 수 있는 완전고용 상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국제 관계도 한국 하고만 껄끄럽지 별로 흠잡을 것이 없다는 것이 외교가의 중론이다. 거기다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짓눌려 있던 일본인들이 아베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멍에를 벗어던졌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아베의 최장수 총리 기록 경신은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역사를 보면 재임 기간이 길면서 큰 업적까지 남긴 지도자들이 왕왕 있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올려놓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재임 1933~1945)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4선에 성공하며 12년간 재임했다. 청나라 4대 황제로 천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다는 뜻의 천고일제(千告一帝)로까지 불린 강희제(재위 1661~1722)는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긴 61년이나 보위에 있었다. 60년 간 황위에 머물렀던 건륭제(재위 1735~1796) 또한 중국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강희제의 손자였던 건륭제는 존경하는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보위에 있을 수 없다 하여 60년 만에 퇴위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 백성들의 의식주 걱정을 덜어주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 가치를 발굴하고 문화를 융성 발전시킴으로써 인류 역사에 기여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일본은 내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21세기 새로운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 보이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다. 이에 더해 아베 총리는 '대 일본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필생의 과업으로 공언해 온 평화헌법 철폐 및 개헌을 통한 군사 재무장을 마무리하고자 매진 중이다. 그 결과에 따라 아베는 최장수 총리에서 더 나아가 가장 추앙받는 일본 총리로 남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일본을 넘어 세계적 리더가 되려면 피해 가서는 안 될 과제가 하나 더 있다. 공존과 공영이라는 현대 세계의 보편적 가치 구현에도 깊은 이해와 실천을 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과거사 무시하고, 이웃 짓밟고, 오로지 자기 나라 이익만 추구하는 한 그 번영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지도자란 얼마나 오래 권좌에 머물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이종호 편집국장 [email protected]

2019-11-20

“3.1 독립만세의 함성, 100년이 지나도 우렁차게 들린다!”

뜻 깊은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큰 며느리인 신혜진 씨의 외증조부가 3.1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른 고 정희근 옹인 것으로 확인돼, 문재인 정부가 고 정희근 옹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훈장과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한 것이다. 오원성 이사장과 가족은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뿌리 찾기의 중요성을 알리고 문재인 정부의 독립운동 후손 찾기 노력에 대한 감사의 뜻을 특별기고 형식으로 본지에 전달해왔다. 이와 관련된 글을 텍사스중앙일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 고 정희근 독립운동가 = 목이 터져라 외치던 ‘독립만세!’의 함성,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들려온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고 정희근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뜻이 빛나고 있다. 해방 전에 돌아가셨고 주변에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 지금이라도 명예회복을 한 것에 커다란 의의를 느끼고 있다. 본인은 물론 가족의 안위마저 뒤로한 채 풍찬노숙 했던 독립투사들의 삶은 처절했다. 고난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가난이 대물림 되어 교육받을 기회를 잃는가 하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국가 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기록물 중 가출옥 관계 기록물 261권을 분석하여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명을 정리한 것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문서해제(행형편) 480 페이지 정희근(鄭喜根) 鄭熙根. (본적) 경남 (재판소명) 부산지방법원 (죄명) 보안법위반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취체규정위반 교사 사기 (주문) 징역 8월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훈장과 함께 수여된 대통령 표창장 제 219107 호/ 표창장/ 고 정희근 귀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9년 8월 15일/ 대통령 문재인 이름을 대통령표창부에 기재합니다./ 행정안전부장관 진 영 국가보훈처 공문/ 공적내용 훈격: 대통령표창(2019) 생년월일:1882.1.29. 사망일:1936.9.12. 본적: 하동 금양 대치 139 공적요약 : 1919년 3월 20일 경남 남해군 남해읍내 시장에서 정낙영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무죄를 받음.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신 할아버지지만, 100년 전 외치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 머나먼 이국 땅까지 이어졌다. 이런 만세운동은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가족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 선양하고 민족정기와 단결을 고취하며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에 기여할 목적으로 1982년 1월 29일,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설립되었다. 2019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는 15,511명이 해당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간 새롭게 발굴하여 포상이 이루어진 독립유공자는 역대 최대 규모이다. 국가는 국민의 관심과 호응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보훈정책은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추진배경을 밝혔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현 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 동안 소외됐던 여성독립유공자에 대한 발굴도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독립운동의 현장과 역사를 보존하는 사업도 강화하고 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법률에 따라 유공자의 자녀나 배우자 1명만이 생활지원금을 받았지만, 개선한 관련 법규에 따르면 국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은 손자녀까지이다. 독립유공자의 발굴은 중요한 역사의 기록이기에 더 많은 지원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본다. 큰며느리(신혜진)는 독립운동가 ‘고 정희근 애국지사’의 자손이라는 것에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나 또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오정호 옹’의 장남으로 부끄럽지 않게, 높은 책임감과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독립유공자 발굴, 역대 최대 현 정부에 감사”[오원성]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3대까지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현 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정희근 애국지사. ‘하동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2명 중 한분으로, 우리 큰 며느리(신혜진)의 외증조할아버지시다. 3.1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른 분이 집안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목이 터져라 외치던 ‘독립만세!’의 함성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이제 우리집안은 독립운동가로 합류하게 되어서인지, 몹시 떨리고 이보다 더한 기쁨과 감동은 없는 것 같다. ‘하동독립선언서’는 현 정부 출범이후 숨어있는 독립운동가를 한명이라도 더 찾아내려는 노력 끝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2018년 4월, 경남 하동의 읍, 면사무소 문서창고에서 잠자던 것을 찾아내어 100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예우를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분의 업적을 기리며 대통령께서 훈장과 함께 수여한 표창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고 정희근. 귀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9년 8월 15일. 대통령 문재인. 이름을 대통령표창부에 기재합니다. 행정안전부장관 진 영. ‘국가 보훈처 공훈록’에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1919년 3월 20일 남해군 남해읍 장날에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다량 등사하는 등 시위준비를 한 후,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를 주도했다’고. 이렇듯 정희근애국지사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반대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인물로, 두 차례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5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손녀이신 정순희여사(내게는 사부인)의 말에 의하면, 생전에 할머니께서 “네 할아버지는 의협심이 강한 분이었다. 만석꾼의 아들로 재산이 많았기에 8개월로 감형 받아 빨리 풀려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하셨단다. 당시 3.1만세운동의 주동자임에도 후손들이 까마득히 모를 만큼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 앞에서 가족들이 알면 분명 만류했을 터였다. 또한 대부분의 옛 어른들이 그랬듯이 지극히 겸손하여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더라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은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도 감사를 드린다. 당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를 신고하라는 정책을 펼쳤기에,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사라질 뻔했던 ‘카이지마탄광 6, 7갱 조선인광부명부’를 광운대학교 이향철교수가 발굴하면서, 그 속에 내 아버지의 ‘오정호’란 이름 석 자가 있었기에 ‘강제동원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국가관이 투철했던 아버지께서는 탄광에서 하루 15시간의 막노동으로 지친 몸에도, 저녁에는 한인들을 모아 놓고 일본의 동화정책에 맞서 싸우려면 우리말과 글을 익혀야 한다며 교육에 앞장섰고, 작지만 몇몇 분들이 독립자금을 모아 부산의 모처로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은 독립운동가의 흔적마저도 지우게 하는 등, 불행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마을 이장’을 자처하고 나서서 동네 사람들의 안전한 피난을 도왔다. 그러다 한밤중 들이닥친 인민군의 총구에 가슴을 찔리고, 끌려가다 탈출한 이후로 독립운동 당시의 자료들을 아궁이에 불태웠다고 한다. 이런 사연으로 진정한 애국자임에도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라를 지키려던 흔적은 어딘가에 존재하여 국가가 알아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굳게 믿는다. 다시 한 번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본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하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하여 최대한 예우를 하고, 후손들이 실질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상 체계를 개편하는 일이야말로 국민통합의 첫걸음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고 떳떳한 삶을 살아가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고 본다. 만약 대한민국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날이 온다면, 나의 손자 승리(8세)와 혜성(5세)이는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설까?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외고조할아버지(독립운동가 정희근옹)와 증조할아버지(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오정호옹)께서 못내 궁금해 하실 것만 같다.

2019-11-07

제74주년 광복절 기념식 ‘만세삼창’ 마무리

증조부 김가진 선생(대동단 총재), 조부 김용한 선생(의혈단 활동), 부친 김석동 선생(광복군, 상해독립신문 발행)을 소개하고 회고한 후, 광복 74주년을 맞아 한국 건국 독립유공자 유가족 발굴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독립운동을 해왔던 선열들의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잊지 말고, 계승발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휴스턴 지역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립유공자 가족과 후손들을 찾아 조국의 상황을 잊지 말고 서로 격려하며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김형길 주휴스턴총영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대독하기 전 참석자들에게 “오늘은 광복 74주년이며 올해 3. 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행사를 준비해준 휴스턴 광복회와 지역 한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휴스턴에서 광복회를 이끌어가시던 고 허도성 회장님의 불행한 사고 이후 새로 광복회를 맡으신 김웅현 회장님과 함께하신 광복회원들에게 휴스턴 동포들의 마음을 모아 격려의 박수를 보내자"고 말했다. 김형길 총영사는 ‘반일’ 대신 평화경제를 통한 ‘극일’을 강조하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천명하며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에 맞서 책임 있는 경제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며 말하고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태도와 수출보복 조치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우호와 협력의 기틀을 굳게 다지고 ‘한일간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갈 절호의 기회’로 부산에서 원진과 나진, 선봉으로 이어지는 환동해 경제는 불라디보스토크를 통한 대륙경제, 북극 항로와 일본을 연결하는 해양 경제로 뻗어나가야 할 수 있을 것, 남.북간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성과를 통해 평화를 정착시켜 나가자”는 문재인대통령의 74주년 8.15광복절 경축사를 대독했다. 이어 신창하 한인회장은 “74주년을 맞는 광복절과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된 지 71주년으로 광복 이후 74년은 국민의 피땀으로 일궈온 노력과 발전의 역사를 우리 모두가 함께 해왔다. 개인적으로도 8월 15일은 광복절과 함께 휴스턴 통합 한인회가 탄생할 날이다. 이날을 맞이하여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자유와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우리가 사는 휴스턴 한인사회는 한인회, 한인학교, 한인회관이 하나되는 통합을 이루었다. 이런 결과가 오기까지는 모든 한인들과 한인사회 단체장, 전 휴스턴 한인회장들, 차세대 한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통합을 이루었다. 이날 광복절 74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모두가 하나되어 더 큰 뜻을 같이 이루어 나가자. 자리를 함께 해주시는 내빈과 동포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광복절의 뜻 깊은 날에 모두 함께 해주심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광복절 기념사를 했다. 이어 6.25 미참전군인회 론스타챕터의 Richard Halferty회장의 축사 등이 이어졌으며 광복절 노래 합창에 이어 하호영 노인회장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 삼창이 행사장에 울려 퍼지면서 8.15광복절 기념식이 끝났다. 이덕용 기자

2019-08-19

[커뮤니티 포럼] 트럼프 이민법 변경안, 개선인가 개악인가?

말뜻은 '잘못된 것, 부족한 것, 나쁜 것을 고쳐서 더 좋게 만듬' 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개악의 말뜻은 '고치어 도리어 나빠지게 함' 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최근 발표된 트럼프 이민 개혁안은 개선인가 개악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그 핵심 내용과 문제점 그리고 제안 의도를 살펴보고 현실적이며 올바른 대안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가족초청 이민 절반으로 트럼프 이민법 변경안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해 발급되는 영주권 쿼터는 현행 110만 개를 유지한다. 변경안의 기안자 2인 중 극우파 반이민론자 스티븐 밀러는 오랫동안 유색인종 이민자들의 대폭 축소를 주장하며 미국을 다시 백인들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이번에도 역시 합법이민 축소를 주장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온건파이며 트럼프의 사위인 제러드 쿠슈너의 주장에 밀려서 영주권 쿼터를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는 것이 백악관 관료들의 전언이다. 그러나 쿠슈너가 현행 쿼터 유지를 주장한 것은 결코 그가 친이민 이어서가 아니라 내년 대선때 중도층 표를 공략하기 위한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둘째, 가족초청 이민을 절반으로 축소한다.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의 배우자와 21세 미만 미혼자녀만 남기고 시민권자의 부모를 포함한 모든 가족순위를 폐지하겠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시민권자의 미혼 성인자녀 (1순위), 영주권자의 미혼 성인자녀 (2순위), 시민권자의 기혼자녀 (3순위), 시민권자의 형제 자매 (4순위)는 더 이상 신청할 수 없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영부인 멜라니아 여사의 부모도 이 개정안에 따르면 이민을 오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는 가족초청 이민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는 숫자가 매년 75만 명으로 전체의66%를 차지하고 있으나 절반으로 줄일 경우 최저 38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으로 대폭 감소된다. 셋째, 취업 이민은 4.5배로 늘린다. 현재 매년 취업 이민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는 숫자는 14만 명으로 전체의 12%에 그치고 있으나 새 트럼프 안에서는 무려 57%인 62만7000명으로 늘어난다. 넷째, 모든 이민 신청자에게 능력 점수제(Merit Based System)를 적용한다. 구체적 방법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학력이 높을수록 경력이 많을수록 연봉이 높을수록 높은 점수를 받게되며 일정한 점수를 넘어야만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모든 영주권 신청자는 영어시험과 역사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대략 시민권의 영어, 역사시험에 준하는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영주권 신청시 없었던 조건으로서 영어권 유럽계 백인들에게 유리하고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이민자들에게는 불리한 명백한 차별이다. 여섯째, 능력 점수제에 의거하여 높은 점수를 받은 신청자는 더 빨리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된다. 반면에 현재 대기중인 400만 신청자들도 새로운 능력 점수제로 새로 신청하고 통과 해야만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서 이들 대기자들은 10년을 넘게 기다렸어도 영어 미숙 등을 이유로 탈락 또는 중도 포기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또한 비영어권 이민 신청자들에 대한 교묘한 차별 조항이다. 일곱째, 잘 알려지지 않은 조항이나 난민 및 정치 망명 신청과 관련된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난민신청 중 구금된 자녀들과 부모들의 분리구금 기간을 대폭 늘일 것, 난민 신청을 미국 밖에서만 하도록 입국을 금지 시킬것, 멕시코 국경 주요 지역에 장벽을 건설할 것 등이다. 미국의 정치인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과거와 현재의 많은 중남미의 전쟁과 혼란에 미국이 개입했고 이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인도적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상기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증조부도, 쿠슈너 수석고문의 조부모도, 밀러 수석고문의 증조부도 나치 독일과 러시아의 탄압과 학살을 피해 미국에 피난민으로 입국하여 정착하였기에 당신들의 오늘이 있다는 사실을 잊기 말기 바란다. 서류미비자 조항 전혀 없어 트럼프-쿠슈너-밀러 이민법 변경안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류미비 청소년(DACA) 구제 조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기자들이 쿠슈너에게 이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 그는 DACA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답변을 했다. 그 외의 질문에도 자주 그의 보좌관에게 답변을 묻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그는 이민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서류미비 청소년들로 DACA 신청자는 현재 약 70만 명이며 드림법안 등의 구제법안이 통과될 경우 영주권 및 시민권 취득 대상자는 약 180만 명에 달한다. 또한 포괄적 이민개혁법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성인 서류미비자까지 합하면 약 1100만 명이 구제 대상이 된다. 이들에 대한 구제 조항이 포함되지 않는 이민법 변경안은 이민자 커뮤니티와 민주당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안이 될 것이며 고장난 이민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아닌 선거철 정치 공세이며 속빈 강정일 뿐이다. 둘째, 미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전문직과 비전문직 모두가 필요한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2019년 3월 노동청의 발표에 따르면 학사 이상 미취업자는 81만 명이며 학사 이상 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140만 개가 열려있었다. 반면에 고졸 이하 미취업자는 120만 명이며 고졸 수준의 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210만 개가 열려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 현실은 고학력 전문직보다 오히려 비전문직 노동력이 더 많이 필요한 상황이다. 셋째, 메릿 시스템이라고 할때 과연 메릿 즉 장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위에서 밝힌 통계가 말해주듯이 미국 내에서 부족한 비전문직, 비숙련직 노동력은 미국 경제에 장점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특히 3D 직종들 즉,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ifficult) 직종들은 미국인들에게 하라고 해도 꺼려하는 직종들이어서 이민자들의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실제로 서류미비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일하고 있는 직업군이다. 예를 들면 건설업, 식당, 청소, 호텔 및 리조트 용역, 농장, 봉재공장, 닭공장, 간병인 직종 종사자들이며 이들 이민자들이 최저 임금도 못받아가며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면서 미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것을 정책 입안자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그가 소유한 골프장과 리조트에서 오랜 동안 많은 서류미비자들을 고용해온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5월 17일 트럼프 대통령이 고용했던 19명의 전직 서류미비자들이 CNN방송 주최 타운홀 미팅에 출연하여 자신들이 트럼프 대통령 소유 골프장과 호텔 등에서 일한 사실과 차별과 착취를 당한 사실들을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최근 MSNB와의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E-Verify 시스템이 서류 미비자들을 고용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한다. 이민법은 현실성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서류 미비자들의 고용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넷째, 가족의 가치를 파괴한다. 모든 미국인들이 동의하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가족의 가치이다. 보수적인 성향일수록 공화당 성향일수록 가족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 한다.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생명권, 자유권, 그리고 행복 추구권 이며 행복 추구권에 관한 판례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가족과 함께 살 권리'이다. 그만큼 가족의 가치는 미국인들에게 법적, 문화적, 전통적으로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가치가 먼저온 이민자에게는 적용이 되고 나중에 온 이민자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요 이율배반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 하자면 먼저온 유럽계 백인 이민자들에게는 적용이 되고 나중에 온 아시아, 아프리가, 남미계 유색인종 이민자들에게는 적용이 안된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는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스며들어 있다. 이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부추기고 선동하여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백인 보수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일등 공신이 된 두 명의 스티브가 있다.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 스티브 배넌과 현 백악관 수석고문 스티븐 밀러다. 반이민과 인종차별을 선거 전략이자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며 무슬림 입국금지로부터, 서류미비자 대거 체포및 추방, 난민 자녀와 부모 분리 감금 정책 등 트럼프 행정부의 거의 모든 반이민 정책을 좌지우지 해온 장본인들이다. 이 두 사람을 알아야 트럼프 행정부 이민 정책의 속내와 방향이 보인다. 중요한 사안이니 만큼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따로 논하도록 하겠다. 2020 대통령 선거 전략일 뿐 결론적으로 이민자의 입장에서 볼 때 트럼프-쿠슈너-밀러 이민법 변경안은 내용도 의도도 개선안이 아닌 개악안이다. 고장난 이민 시스템을 고치기 위한 것도,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도, 가족의 가치를 위한 것도 아닌 2020 대선과 총선을 위한 선거전략일 뿐이다. 가족 이민을 줄이는 것으로 보수층 백인들을, 전체 이민 쿼터를 유지하는 것으로 중도층을 공략하려는 것이 쿠슈너와 밀러의 전략이다. 그러나 이 두 마리 토끼 잡기는 이미 실패하고 있다. 린지 그래험, 쉘리 무어, 팻 투니등 공화당 중진 상원 의원들과 대표적인 반 이민론자인 마크 크리코리안도 이 변경안에 반대 내지는 유보의 입장을 보이고 있고 하원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의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의원과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 의원은 이구동성으로 이 변경안은 "반이민 개악을 위한 정치적 문서이며 파당적이고 극단적인 반이민 정책"이라며 관련 법안이 "의회 도착 즉시 사망하게 될 것" 이라며 강력히 저지의사를 표명 하였다. 따라서 다행히도 이 변경안의 의회 통과 가능성은 제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공화와 민주 양당이 합의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나는 2013년 연방 상원에서 양당의 8인 위원회가 상정하고 68명 의원의 찬성으로 통과된 바 있는 '포괄적 이민개혁 법안'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 논의의 중심에 가장 첨예한 이해 당사자인 이민자 커뮤니티와 권익옹호 활동가들의 참여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이민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이민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우고 발전시킨 미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정당한 인정이자 최소한의 예의다. 그리고 공화당 정치인들과 의원들에게 같은 공화당 소속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진솔한 충언을 숙고해주길 당부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미국은 미국민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는 이민자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그들을 환영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섭씨 40.5도의 날씨에 목화솜을 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식탁에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이민 시스템은 고장난 상태이며 수리가 필요하다. 내가 하려고 했지만 못했다. 우리 경제를 위해 미국의 정체성을 위해 이민 시스템이 잘 기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서류미비 청소년 드리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미국은 그들의 조국이다." 시민참여센터 이민자 보호 법률대책위원장 박동규 / 변호사

2019-05-21

[시 론] '김일성 어록'으로 본 북한 선교 전망

뜻'이라는 말을 또 내세운다. 김일성 어록이 북조선 헌법이나 노동당의 결의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난 기독교관을 몇 가지 살펴본다. 김일성의 조부 김응우는 대동강에 정박했던 제너럴 셔먼 호를 공격하는 선봉장이었고 그 손에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 당했다. 아버지 김형직은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를 중퇴했고 기독교 학교의 교사도 지냈다. 어머니 강반석은 외가가 기독교 집안이었다.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렸다." 김일성 자신이 독립운동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을 때에도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김일성은 '3·1인민봉기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 학생들의 주도하에 면밀히 계획 추진되었다'고 썼다. 김일성 자신은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껴 교회에 잘 다니지 않았다.' 성장과정에서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 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하느님이 정말 있어서 례배당에 다니시나요?" 하고 그가 물었다.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 가서는 뭘 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고 했다. 김일성의 기독교관은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의 경우에서 절정을 이룬다. 해방 후 안신호는 조선민주녀성동맹 부위원장으로 함께 일했다. 처음에는 '밤낮 성경책만 끼고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다가 '리념이나 신앙을 초월하여 민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함께 일하자'는 김일성 권고에 순응했다. 공산당에 입당했고 '성경책 속에 당원증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새 조선 건설에 분투한다'는 보고를 들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이 김일성의 결론이다. 이런 회고록 서술들이 김일성 종교정책의 전부는 아닐 것 같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종교개혁의 본산인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통치를 하겠다는 말에 주목한다. 김정은 정권은 최소한 중국이나 월남 수준만큼이라도 종교자유의 폭을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근거가 김일성 어록에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정근 / 성결교회 목사

2018-06-29

“평창 올림픽 시기에 한인사회가 행사 주관”

뜻이다. 설 잔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행사로서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 라자 크리쉬나무티(8지구 연방하원의원) “한인 커뮤니티가 아시안 설 잔치와 같은 큰 행사를 만들어 줘 감사하다.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한국 단일팀을 감명 깊게 봤으며 꼭 다양한 출신의 아시안들이 연방 의원직에 진출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제시 화이트(주 총무처 장관) “이번 행사에서는 다양한 나라의 문화, 공연 등이 어우러져 끈끈한 단결력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런 자리가 있기까지 준비한 모든 회원들께 감사를 표한다.” 마이클 프레드리히(주 재무관) “이번 한인회에서 주최하는 아시안 설 잔치는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 함께 온 딸의 외조부 중에 선교사로 한국에 계셨던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잔나 멘도자(주 회계 감사관) “16개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모이는 설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줘 감사하다. 행사 캐치프레이즈인 ‘단합하자, 함께하자’와 같이 일리노이 주민들과 함께 할 것이다.” 대니얼 비스(주지사 후보) “아시안 커뮤니티는 삶의 질을 더 좋게 만들었으며 경제, 교육 등에서도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아시안들이 주최하는 설 잔치는 중요하다 생각한다.” 크리스 케네디(주지사 후보) “일리노이에서 매년 개최되는 아시안 설 잔치에 참석해서 영광이고 이 행사는 가족 또는 커뮤니티 멤버들 간 소통 그리고 리더십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제원·신동엽 기자

2018-02-25

신년 인터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 김은일 신임총장

외조부와 부친께서 목사셨고 사역하는 가족들이 많아서 어릴때부터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을 사모했기에 대학 졸업 후 신학을 공부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목회를 하던 중 신학교의 교수가 됐다거나 교수에서 다시 총장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했다. 그도 그럴것이 김 총장은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새 총장을 청빙하는 위원 중 한명이었다. “후보자를 물색하는 와중에 이사진들로 부터 뜻하지 않게 제안을 받았다. 부족한 부분을 들어 극구 고사했지만 재차 숙고하라는 제의에 과연 하나님께서 나의 겸손을 테스트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행하심을 몸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인지 붙잡고 기도하다보니 이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할 기회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지난 8월 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맡아온 김 총장은 복음주의, 개혁주의 중심의 장로교 신학교인 WSC가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새로운 리더십을 고민했고 일차적으로 세가지 계획를 세웠다. 첫째는 신학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리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이해가 안되는 고리타분한 것이 신학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쉽고 명확하게 가르치고 보여줄 수 있는 학교가 되었으면 한다. 두번째는 세계로 나아가는 신학교다. “WSC는 보수, 개혁, 복음주의 신학교로 유일하게 남가주에 있는 신학교인 셈인데 남쪽으로 남미가 멀지않고 서쪽으로는 아시아와 연결되는 지점에서 세계를 보게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본다”는 그는 “앞으로 5년~10년 안에 집중적으로 사역할 장소인 아시아와 남미 등 세계를 마음에 두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고자 한다. 올해는 남미와 아시아의 여러 학교들과 파트너십을 이뤄 미국의 리소스를 나누고 세계 교회로 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취합해 서로를 섬길 기회를 적극적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세번째는 남가주에 대한 계획이다. “올해부턴 오렌지카운티와 어바인, LA에서도 강의가 개설된다. 이처럼 남가주를 마음에 품고 뛸 때 특별히 이민교회들과 연계할 일이 많다고 본다. 함께 동역하는 파트너가 되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덧붙여 “한인이민교회는 정말 큰 역할을 해왔다. 일례로 최근 주류사회에서 리더로 떠오르고 있는 2세 한인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들이 이민교회를 자양분 삼아 배우고 익혔던 ‘공동체’ 의식과 ‘겸손’의 미덕, 그리고 ‘아웃사이더’로서 다른 아웃사이더의 아픔을 쉽게 이해하고 안을 수 있는 점 등이 이 시대 목회자의 바람직한 성정으로서 크게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총장은 또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맞아 한인이민교회와 함께할 일이 많고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교회와 선교지 사역이 믿음과 불신의 중간에서 싸운다면 신학자는 학술적인 측면에서 믿음없는 학자들과의 학적인 다툼으로 하나님을 선포하고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이처럼 특별한 책임을 최선을 다해 수행할 수 있도록 중보해 주시기 바란다. 또 이미 세상에는 비성경적인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고 앞으로 혼란은 가중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두려움없이 외칠 수 있는 강건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일에 온전히 정진할 수 있도록 뜨거운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은일 총장은 1982년 9살때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도미했다. UCLA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전공한 후 칼빈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LA지역 세계로 장로교회, 풀러턴 뉴라이프교회 등에서 EM 부목사로 시무했고 칼빈신학교, ITS 등에서 교수 를 역임한 후 2005년 부터 작년까지 WSC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취임식 일시: 1월9일(화), 오후3시30분 ▷장소:1725 Bear Valley Pkwy, Escondido, CA 92027 서정원기자

201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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