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경제관, 이재명과 상극…‘쿠폰경제’만 꺼내면 질색했다
뜻밖의 방향전환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생산성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든지, 재계 총수들을 오찬에 초대해 “(나를) 믿고 용기를 내서 투자해 달라. 최선의 서비스를 하겠다. 노사 문제와 규제 문제를 직접 챙기겠다”고 말한 것 등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노무현 경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집권 첫해는 정신차릴 겨를이 없었다. 개혁을 외치고 각종 로드맵을 쏟아냈지만 SK 사태에 이어 화물연대, 공기업 파업, 전교조 문제 등으로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첫해를 경험한 참여정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경제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상식이 허물어졌다”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 경제 5년』,134쪽). 2003년의 경제 성적표를 받아든 노무현은 충격이 컸다. 경제가 3.1% 성장했는데 고용이 늘기는커녕 3만 명이 줄었다는 통계가 믿기지 않았다. 고용 없는 성장이라니…. 그러나 참여정부가 몰랐거나 외면했을 뿐,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산업구조 변화가 몰고 온 회오리였다.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경제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고용 효과가 큰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물러가고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집약적, 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바뀌었으니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다만 고용 감소라는 부작용이 이처럼 심각할지 몰랐던 게 문제였다. 결국 경제 지휘권을 이헌재에게 맡겨서 궤도 수정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투수’ 이헌재 기용했으나… 참여정부 경제 정책을 정리함에 있어 노무현과 이헌재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헌재야말로 참여정부의 모든 장관들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었고, 길지 않은 재직 기간 동안 노무현 경제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헌재는 알려진 대로 김대중 정권에서 IMF 위기 극복을 주도했던 능숙한 해결사. 실제로 부총리 취임 이후 참여정부 초반의 난제였던 카드대란과 신용불량자 사태 수습, 일자리 대책 등에 솜씨를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이나 행보는 ‘노무현 경제’를 거스르는 점이 적지 않았다. 명백히 보수 쪽 사람이고 시장주의자다. 노무현도 그 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2004년 초 정찬용 인사보좌관을 앞세워서 “싫다”는 이헌재를 삼고초려 끝에 경제부총리로 데려왔다. 취임 후 이헌재의 발언이 거침없었던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노무현이 경계해 온 ‘단기 부양책’을 언급했다. " 비록 일시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못 되더라도 당장에 일자리를 늘리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과도기적인 연계 정책이 시급합니다. " 청와대의 개혁 세력들로서는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참여정부의 경제 철학 선생 격인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인 이정우는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 성장에 연연해서 개혁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개혁을 통해 성장을 이뤄야 한다. 성장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개혁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하다. 일시적 부양책이나 몇 발짝 못 가서 발병하는 성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2004년 5월 12일). " 이헌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의도에 포진한 386그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 경제발전의 주역을 맡아야 할 386세대가 1980년대 초 대학 시절 정치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경제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2004년 7월, 여성경영자 모임) " 는 말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는가 하면, “한국 경제는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진 환자 같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주역들에게는 죄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시장은 헷갈렸다.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참모의 말이 다르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참모들만 다른 게 아니었다. 대통령도 그랬다. 때로는 이헌재의 손을, 때로는 개혁파의 손을 들어줬다. 노무현 경제가 극복하지 못한 이중구조라고 할까. 이런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기용된 이헌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구체적 내용은 차치하고 정책을 세워도 일사불란하게 펼쳐나갈 수가 없었다. 걸핏하면 청와대나 여당에서 발목을 잡았다. 양도소득세 인하를 비롯해 종합부동산세 입법, 연금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소위 ‘한국판 뉴딜 정책’ 등 여러 정책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이헌재는 13개월 만에 물러난다. 막판엔 출처 불명의 ‘부동산 투기’ 스캔들로 좌파 언론의 집중 공격까지 받았다. 노무현은 이 부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해일에 휩쓸려가는 장수를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놓쳐버린 심정”이라고 했다. 미안했던 것이다. 방대한 분량의 『참여정부 국정운영 백서』에는 어디서도 노무현 경제의 고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집권 기간에 대한 자화자찬 일색이다. 부동산 정책마저도. (부동산 정책은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노무현과 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Q : 노무현과의 인연은. A : IMF 외환위기 이후 내가 DJ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할 때 부산에서 대우조선 사태와 삼성자동차 부산대책위원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노무현을 접촉하면서 호감을 가졌다.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 언론계 출신의 지인과 함께 여러 조언을 했다. Q : 왜 참여정부 두 번째 부총리로 들어갔나. A : 첫해 조각 과정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지만 고사했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많기도 했고. 이듬해 초에 정찬용 인사비서관 등 여러 사람의 권유로 입각하면서 연말까지만 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Q : 취임사에서 노무현이 금기시하던 단기부양책의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A : 나는 경제부총리의 사명이 단기적으로는 시장관리, 중기적으로는 성장과 고용이며, 그다음에 구조개혁의 틀을 만드는 데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께도 얘기했다. 나는 당시 한국은행이 추정한 잠재성장률 5% 수준을 유지하려면 연간 50만 명 정도 고용이 늘어나야 한다고 봤다. Q : 노 대통령 주변의 개혁파, 386그룹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A :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오버 액션이 있었다. 386이 경제 공부가 부족하다는 얘기처럼 자극적인 말을 굳이 해야 했나, 생각이 든다. 내가 좀 더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노 대통령의 경제 성과도 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Q : 노무현과 김대중 정부에서 일했다. 두 대통령의 차이점은. A : DJ가 노무현보다는 훨씬 준비도 많았고 생각도 깊었다. 숙성 기간의 차이라고 할까. 노무현은 갑자기 큰 인물 아닌가. 너무 잘하려고 하는데 매몰돼 있었다. 탄핵에서 복귀한 후로는 그런 강박이 더 심해졌다.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그때가 참 좋은 기회였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도 늘려갈 수 있었는데, 개혁 과제에만 집착했던 것이 안타깝다.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20년 전 노무현 탄핵 사유, ‘윤석열 탄핵’ 비하면 경범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8813 고건 대행, 11일 만에 거부권…盧 눈치 봐도 호락호락 안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2154 대통령 호출 거절한 檢총장…3초 정적 후 노무현 한마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954 “참 나쁜 대통령” 개헌론 역풍…여당조차 반대 “난 정치실패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5780 강금실 “난 ‘죽었구나’ 싶었다”…노무현-평검사 115분 맞짱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6129 이장규.손병수.고성표.박유미([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