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검색조건
키워드
기간
-
검색대상
검색조건
키워드
기간
검색대상

"거듭 외친다, 친일자 추궁 말라…지금은 파괴보다 건설할 때" [김성칠의 해방일기(7) - 청년대 결성식 강연 요지]

일본인이 인정 있다는 말] 세상에서 흔히 걱정하는 만주 북중국의 조선사람 아편장수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들은 조국을 쫓겨나다시피 해서 아무런 희망을 잡지 못하는 보헤미안으로 정치적 배경이 없으매 이국에서 정상적인 경제적 발전을 기할 수 없고 더욱이 민족적 훈련이 용허되지 않으매 도의적 견제도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해외 발전의 길만 열리었다면야 누가 즐겨서 사기와 협잡을 하겠습니까. 사기와 협잡을 해도 좋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고국을 등진 민족이 이역에서 생활의 방도가 끊이매 좋지 못한 상로(商路)에 물드는 거야 그 사람 개인을 탄할 수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민족적으로 비관할 재료는 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웅비하는 나라 중에서도 정상적 해외무역의 길이 끊기면 곧 해적으로 변한 실례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당파성. 우리는 이로써 나라를 말아먹은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도 아직 그 못된 버릇을 개를 주어버리지 못했음인지 오늘날도 무슨 당 무슨 단 하고 여러 가지 당을 모아서 대동단결에의 길이 요원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조 후년 사색당론의 고질화는 극단적 쇄국주의 하에 국민의 감정이 밖으로 산화하지 못하고 안으로 발효한 때문이 아닐까요. 그건 우리네들 가정에서 형제, 부부, 부모자식의 지친간일지라도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이 없이 밤낮으로 서로 얼굴만 치어다보고 앉았으면 감정의 격화를 초래하기 일쑤인 것과 마찬가지 경향이 아닐는지요. 또 물이 처음엔 골짝골짝이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다가도 결국은 합쳐서 큰 강을 이루는 거와 같아서 오히려 그게 자연발생적일는지도 모를 것이며 또 경쟁은 발전의 모태라고도 하니 그러한 각당 분립의 세가 악성화하지만 않으면 도리어 반가워할 현상이 아닐는지요. 모쪼록 그러하기를 염원하는 바이며 또 그리되도록 우리들의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일국일당(一國一黨)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니다.] 또 우리들은 천성으로 비겁하고 나약한 민족인 것처럼 배웠고 따라서 우리들 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역사를 들춰 보십시오. 수군(隋軍) 백만을 청천강에서 무찌른 을지문덕은 우리들의 조상이 아닙니까. 당 태종의 십만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치고 안시성에서 그 오만한 이세민의 눈을 뺀 것도 일본사람이거나 미국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다시 거란을 막아낸 강감찬은, 일본을 몰아낸 이순신은 어떠했습니까. 임진란을 그네들은 이겼노라 하지만 정작 이겼을진댄 삼백 년 전에 우리들의 조상은 이미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임란은 이번 일미(日米)전쟁과 같이 육군은 침략의 준비를 완성한 일군이 아닌 밤중의 화적떼처럼 삼천리강산을 파죽지세로 밀어 갔습니다마는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연거푸 전멸을 당해서 보급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7년 대역(大役)에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다만 그 침략을 좋아하는 그 악독한 천성을 보였을 뿐 흐지부지 군대를 되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필법으로 간다면 수백년 후에 또 일미전에는 일본이 이겼노라고 안간힘 쓰는 축이 생길는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키나와전 후에 “오키나와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하던 깜찍한 그들이 아닙니까. [동아 약소민족 해방이라는 일본의 전시(戰是)가 실현했으니 나는 그러한 의미로 대동아전에 일본이 이겼다고 본다.] 일천 년 전의 을지문덕과 삼백 년 전의 이순신은 그만두고라도 문약(文弱)의 폐풍이 민족의 고질이 되다시피 한 최근세에 제정 러시아의 남하세력을 흑룡강에서 막아서 만주로 하여금 오늘날의 만주로 만든 사람들이 그 뉘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청국(淸國)에서 그 우수한 기술 때문에 요청해 간 삼백 명의 조선 조총사(鳥銃士)였다고 합니다. 이건 앞날의 만주의 운명과 아울러 생각해 볼 때 재미있는 사료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조상은 집단적으로 우수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퍽이나 꿋꿋하고 늠름했습니다. 저 단종조 사육신이 불에 벌-겋게 달군 쇳가치로 배를 지질 때 이윽고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고 외쳤다는 사실이나 [南秋江의 말] [해설 : 유응부(? - 1456)가 고문받으며 한 말로 남효온(추강, 1454-1492)의 〈육신전(六臣傳)〉을 통해 전해진다.] 가까이는 대원군 시절에 순교한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신인(神人)이 공읍(共泣)할 초인의 의지력, 그중에서도 남상교(南尙敎)가 그 아들 남종삼(南鍾三)에게 용감한 최후를 가지라고 타이른 일이며 남 승지의 누이가 충주 목계강(牧溪江)에서 몸을 던졌단 이야기며 더욱이 홍봉주(洪鳳周) 김장운(金長雲) 등이 형사(刑死)할 때의 형조의 계문(啓文)에도 “堅如鐵石, 雖遭慘刑, 示死靡悔, 自顧所犯, 萬死無惜(굳건함이 철석과 같아 참혹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죽음 앞에 후회함이 없고 저지른 일을 스스로 돌아봄에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 운운”이라고 쓰여 있음으로 보아 불과 7-80년 전에 우리의 동포 중에 이처럼 용맹과감한 사람들이 있었음은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일인은 조선사람은 노래조차 망국적이라고. 아리랑타령의 애조(哀調)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따위의 퇴폐적 기분이 그 대표적인 것일까 합니다. 그러나 왜 그것뿐이겠습니까.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찌타 능연각(凌煙閣) 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 김종서(金宗瑞) 라든가 [해설 : 능연각(凌煙閣)은 당 태종이 공신들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벽상(壁上)에 칼이 울고 흉중(胸中)에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뚝이 밤낮으로 들먹이니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만 하여라” 하는 시조도 틀림없는 우리 조상의 지은 것이고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날이 있으랴” 하는 포은(圃隱) 선생의 단심가(丹心歌)는 일본의 우미유카바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는 노래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해설 : “우미유카바”는 8세기 중엽 편찬된 〈만요슈(萬葉集)〉에 실린 글로 1937년 곡이 붙어 해군 군가로 널리 알려졌다. “海行かば水漬く屍 / 山行かば草生す屍 / 大君の / 辺にこそ死なめ / かえりみは / せじ (바다로 가면 물에 잠기고 / 산으로 가면 풀에 덮입니다. / 님이시여, 곁에서 죽겠습니다. / 돌아보지 않겠습니다.)”] [녹이상제(騄駬霜蹄)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을 들게 갈아 둘러매고, 장부(丈夫)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까 하노라. / 최영(崔瑩)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단아장(斷我腸)을 하는고. / 이순신(李舜臣) 군산(群山)을 삭평(削平)턴들 동정호(洞庭湖) 넓어지며 계수(桂樹)를 버이던들 달이 더욱 밝을 것을 뜻 두고 이루지 못하니 늙기 설허 하노라. / 이완(李浣) 대붕(大鵬)을 손으로 잡아 번개불에 구워먹고 곤륜산(崑崙山) 옆에 끼고 북해(北海)를 건너뛰니 태산(泰山)이 발길에 차이어 웨각대각 하더라.] 그러나 조선사람이 천성으로 순한 민족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까 합니다. 역사상으로 보아도 남의 침략을 받은 일은 비일비재하나 이쪽에서 나아가 남을 침략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묘청의 북벌칭제론(北伐稱帝論)이, 최영의 공요안(攻遼案)이, 효종의 북벌 계획이 모두 역사상의 꿈이 되어버리고 윤관의 여진 정벌이거나 세종의 대마도 정벌은 모두 동아의 대국에 큰 변동을 가져오지 못했고 그나마 저쪽의 산발적인 도적질과 북새통에 시달리다 못해서 한 번 혼내 주려고 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조상이 지극히 순하고 또 침략적이 아니었다고 조금도 비관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설사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가난하달지라도 우리들의 조상이 도적질할 줄 몰랐고 또 도적질할 념의를 내지 않았다고 털끝만치도 우리 조상을 원망하지 않으렵니다. 이즈음 이웃나라에 닥친 일을 볼지라도 침략의 업보가 만만치 않음을 알 것 아닙니까. “천하비수검(天下匕首劒)을 한 데 모아 비를 매어 남만북적(南蠻北狄)을 다 쓸어 버린 후에 그 쇠로 호미를 만들어 강상전(江上田)을 매리라.” 하는 것이 우리 조상의 티피컬한 심경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조상이 유난히 잘났고 모든 일을 다 잘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디든 얼빠진 구석이 있었기에 4천 년 역사를 말아 자시었겠지요. 또 우리들은 오죽 못났기에 4십 년 동안 남의 노예 생활에 감심(甘心)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 이러한 오점이 찍히었다고 조금도 슬퍼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다는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는 항상 융체(隆替)와 기복(起伏)의 연속이어니 우리에겐 이제 오랫동안의 겁운(劫運)이 물러가고 새로운 희망이 우리를 손짓해 부르지 않습니까. 더욱이 골로브닌의 말을 듣더라도 천성(天成)으로 강하고 우수한 민족도 없으려니와 그와 반대로 천성으로 비겁하고 나약한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도자의 훈련과 교육 여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그는 러시아의 댜뉴브 강변의 어떤 마을이 전에는 한두 사람의 화적이 들어온단 말을 듣고 온마을 사람들이 산중에 피란을 갔었는데 그후 적절한 지도자의 훈련을 받아서 60년 후엔 서구의 침략군에 대해서도 까딱 아니하고 감연히 일어나서 마을을 지켰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장래의 운명도 금후의 훈련과 교육 여하에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바입니다. [일본유수기] 조선사람이 해양에 약하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한 말입니까. 신라 말년에 동양의 제해권을 잡고 당시의 천하를 제패하던 청해진 장보고는 일본사람도 중국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 조상이었습니다. 청해진에 관한 기록은 조선 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記) 같은 그네들의 정사(正史)에서 더 자세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일의 일본사람들이 당나라에나 신라에 유학하려면 내왕에 청해진의 신세를 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일본의 중 엔닌(圓仁)이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기타의 당시의 일본 측 기록에 명백한 바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장보고가 미구에 망하고 따라서 청해진이 흐지부지되어 버린 일이지요마는 조선사람의 바다에의 진출은 비록 조직적이 아니나마 그 후에도 오래 계속되었고 고려 시절에도 배 타는 기술이 유난히 능란했기 때문에 당시의 동양무역의 중심지 유구(琉球)엔 고려 선인(船人)이 많았다는 사실이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저 17세기 영국 최초의 중국 사절 매카트니의 사행 기록에도 싱가포르 말라카 등지의 무역선에 코리아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청해진의 끄나풀이 비록 조국에는 용납되지 않았을망정 대대로 동양의 바다를 횡행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이순신 장군이 세계서 제일 먼저 군함을 만들어 일본의 침략을 무찌른 역사가 어찌 우연으로 생기었으리까. 나는 이걸 청해진 천년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해설 : 매카트니 사행을 “17세기”라 한 것은 착오다. 18세기 말 중국과의 무역 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은 1787년 캐스카트 대령을 첫 사절로 보냈으나 항해 중에 병사하고, 1793년에 조지 매카트니를 사절로 보냈다. 매카트니를 통한 영국의 요청은 모두 거부되었으나 중국 사정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을 늘리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金澤庄三郞]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메이지시대 일본 언어학자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제창자의 하나다. 필자가 일선동조론을 언급할지 생각하며 이 이름을 적어놓은 듯. 그뿐만 아니고 조선사람은 문화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 줍니다. 우리 한글이 세계에서 제일 나은 건 우리 아닌 일본과 서양의 학자들이 입을 갖추어 말해주는 바입니다. 모든 문화의 근원인 문자(文字)가 세계에서 뛰어나게 탁월하다는 것은 자다가 문득 생각해 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일입니다. 만약 한글이 없는 조선을 떠올린다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칠 노릇입니다. 독립의 의의도 반감할 것이외다. [가나(假名)과의 비교. 한문을 숭상함은 불가. 문자는 문화의 초석.] 나는 전에도 말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이조 5백 년의 공죄(功罪)를 따진다면 다른 모든 허물을 세종대왕님의 한글 하나로 상쇄하고도 오히려 혜택이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세계에서 군함을 제일 먼저 만든 나라가 조선이란 건 아까도 말씀드렸지요마는 활자와 천문대와 측우기도 역시 조선이 제일 먼저 만들었습니다. 경주의 석굴암은 1200년 전의 조선의 물리학의 수준이 오늘날의 세계 학자로 하여금 경이의 탄성을 발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의 문화도 그 근원을 캐면 조선이 스승이었습니다. 왕인 박사와 담징화상은 조선사람일시 분명합니다. 우리 조상은 어릴 적 일본의 훈장이었고 그때 우리의 조상이 그린 그림은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로 끔찍이 떠받드는 국보가 된 것입니다. 저네들의 고대문학의 첫 번째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보더라도 야마토(大和)시대의 일본인에겐 조선사람을 천상인(天上人)처럼 높이 우러렀고 조선에서 건너간 문물은 선진국의 수입문화로 백번 절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린 모양입니다. 나는 겐지모노가타리를 읽으면서 고려 관상가(こまの相人)니 고려 피리(こま笛)니 고려 음악(こま樂)이니 하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었습니다마는 그 반면에 오늘날의 현상에 생각이 미치면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습니다. 옛날 글 배워준 아이들의 종이 되었으니까요. 개인이거나 국가 민족이거나 향상에의 지향이 무뎌지고 침체 윤락하면 참혹한 구렁에 빠지게 되는 예를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그러한 실수가 없도록 다시 마음을 도사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옛날만 문화적 소질이 높았을 뿐 아니라 최근에도 일본-조선인의 교육에 다년 종사한 일본 심리학계의 태두 구로다 아키라(黑田亮) 박사가 자기의 교육 경험과 또 심리학적 실험의 결과로 조선사람이 일본사람보다 훨씬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직접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체력은 어떠할까요. 그건 손기정 씨가 무엇보다도 단적으로 세계에 입증한 것이니 더 이러니저러니 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조금이라도 위구를 품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민족적 자신(自信)을 붙잡으십시오. 우리들의 조상은 결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우수한 민족이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천재적 독창력이 있고 세계를 제패할 체력이 있습니다. 세계사의 필연으로 독립이 이루어진 오늘날 우리는 이 문화의 묵은 터전에 그 체력으로 그 독창력으로 찬란한 새 조선 문화를 창조하여 세계문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독립이 되면 과연 무엇이 좋을까, 나는 전날 다섯 가지 조목을 들어서 학교 아이들에게 들려준 일이 있습니다. 나 개인으로 말하면 이때까지 죄인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살던 것이 한 사람의 자유시민으로 일생을 보낼 수 있고 또 언제 잡혀갈까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꿈에도 가위눌리던 것이 인제 네 활개 뻗고 살 수 있으니 눈물겹도록 반가워할 일입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나도 이 민족이 국가의 일원이 되어 세계에 우뚝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 생각하면 미칠 듯 즐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훌륭한 국가를 이룩하여 문화의 높은 탑을 쌓는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뿐이지 된다는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때까지보다도 한층 마음을 도사려 삼천만 동포에 한 사람의 빠짐도 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야겠습니다. 이때까지는 우리가 남의 배를 타고 있은 셈이니 낮잠을 자도 좋고 흥떵거려도 좋았겠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 배를 타고 우리가 키를 잡고 망망한 대양을 건너가야 하니 한눈팔아서는 못쓰고 만일 흥떵거린다면 큰일입니다. 우리가 한 수 잘못해서 파선해 버리고 다시 남의 배를 타게 되는 신세가 된다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칠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제 역사적으로 중대한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천만년 조선의 운명이 우리의 두 어깨에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성과 모든 힘을 기울여 이 대업을 완성해야겠습니다. 그리함에는 공연히 좋다고 날뛰는 일 없이 제각기 제가 맡은 직책에 최선의 심혈을 경주하고 한시라도 자기완성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질없이 정치계에 분주(奔走)하지 말고 자기 역량의 함양에 모든 정신을 기울여야 합니다. 조선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질적 향상이 조선의 질적 향상의 유일한 길이고 그래야만 조선의 앞날에 광명이 비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까딱 잘못하면 만년대계를 그르칩니다. 천추만대의 자자손손에게 우리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에 일본의 채찍으로 움직인 우리가 아닙니까. 그 채찍이 물러난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만일 남의 채찍이 있었으니까 부지런했고 오늘은 그것이 없으니 게으른다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조선 민족의 수치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내 자신의 마음속에 그러한 점으로 접히는 일이나 없을까. 이러한 반성을, 나는 일본 시대보다 더 부지런한가 더 성실한가 하는 반성을 누구나 하루에 세 번씩 하기로 합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다 그러하고 가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낮이면 제각기 부지런히 일하고 밤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이 모두 머리를 모아서 가갸거겨를 외이고 그 대문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시 진정한 조선사람이 되기 위하여 모든 조선학의 수련에 힘쓰고 그리고 이러한 모든 노력이 일본의 채찍으로 움직일 때보다 몇 배나 더한가 항상 마음속에 가늠해보고 이러하면 조선의 앞날엔 우리들과 및 우리들의 자손에겐 무궁한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유학생과의 문답. 농민조합의 나갈 길 공산당이 외치는 8시간 노동 문제] 김기협([email protected])

2025-02-14

장도연, 튀르키예 냥플루언서 '톰 빌리' 국민적 인기에 "쟤 어쩜 좋아" (동훌륭)[종합]

길고양이 천국 튀르키예 이스탄불이 소개됐다. 이스탄불의 쿠즈군죽은 고양이 주의 표지판과 고양이 사료 자판기를 길거리에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청이 운영하는 이동식 동물 병원의 모습에 김효진 훈련사는 "우리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라며 부러워했고, 김명철 수의사 역시 "복받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맞장구쳤다. 튀르키예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냥플루언서 '톰 빌리'의 이야기도 공개됐다. '톰 빌리'는 복부 암 통증으로 인해 계단에 기대앉는 시그니처 포즈를 선보였고, 장도연은 "쟤 어쩜 좋아"라고 반응을 보였다. 특히 SNS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전 세계의 관심을 받은 '톰 빌리' 사망 이후 그를 기억하기 위한 동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연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이어 고등학생 김태우 군의 개구리 사랑이 공개됐다. 개구리만 약 30마리, 올챙이까지 총 80여 마리를 키우고 있으며, 국제 멸종 위기종 2급인 '리머 리프 프록'과 희귀 개체인 '프린지드 리프 프폭'을 번식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국내외 브리더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에 장도연과 데프콘은 "꼼꼼히 공부하고 키운다. 배울 점이 너무 많다", "우리나라 양서류 학계의 미래를 봤다"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국내 최초 순례견 '루카'의 세 번째 순례길도 공개됐다. 800km 완주에 도전하는 '루카'의 모습에 김효진 훈련사는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지만, 훈련과 애착 물건 등을 통해 최대한 줄이는 게 중요하다"라며 꿀팁을 전달했다. 33일간의 여정 끝에 완주에 성공한 '루카'를 향해 애니벤저스와 MC들은 "너무 행복해 보인다", "대단하다"라며 박수를 보냈다. 특히 조찬형 변호사는 "반려동물과 해외여행시 유의할 점과 필요 서류가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라고 당부했다. 보호자는 '루카'와의 다음 목표로 반려견 동반 여행의 끝판왕 일본 여행을 예고하며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고조시켰다. 이밖에도 '애니퀴즈' 코너에선 김명철 수의사가 제보한 퀴즈가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이번 '애니퀴즈'의 주인공은 하마로, 하마는 수영이 아닌 잠수를 해 물속을 걸어 다닌다는 사실에 은지원은 "정말 무식한 애들이다"라는 말로 웃음을 안겼다. 이어 김명철 수의사는 "하마의 땀은 붉은색"이라고 밝히며 "땀 성분이 자외선 차단제 역할은 물론 소독, 방충 효과도 있다"라고 유익한 정보를 전달했다. 한편 유일무이 무공해 동물 전문 프로그램 KBS2 '동물은 훌륭하다'는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30분 방송된다. /[email protected] [사진] KBS2 '동물은 훌륭하다' 방송 캡처 김채연([email protected])

2024-12-24

여행자의 버킷리스트, 그곳에 가고 싶다

순례인 이들이라면 미슐랭 레스토랑을 비롯해 중식, 일식, 멕시칸 쿠진 등 다양한 맛집을 경험할 수 있다. 해변과 도시, 하이테크 기업과 예술이 공존하는 샌프란시스코 여행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봤다.     ▶여행 계획   샌프란시스코는 단연코 미식의 도시다. 샌프란시스코 도심과 인근 베이 지역을 포함해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 수만도 62곳에 달하고 이중 7곳이 미슐랭 3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다. 미 전국에 미슐랭 스타 3개를 받은 레스토랑이 14곳인데 이중 절반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미슐랭 레스토랑에 관심이 있다면 일찌감치 예약을 서둘러야하고 꼭 미슐랭 레스토랑이 아니더라도 이 도시엔 워낙 맛집이 많으므로 출발 전 맛집 방문 계획표를 세워보는 것도 좋겠다.     ▶시내 교통   만약 차를 이용해 여행한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항공편이나 기차를 이용할 계획이라면 도착 후  렌트카 혹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샌프란시코 가장 일반적인 대중교통으로는 BART(Bay Area Rapid Transit)가 있는데 BART는 총 길이 131마일의 샌프란시스코 인근 5개 카운티, 50개 역을 연결한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올 때도 이 BART 트레인을 이용하면 된다. 또 SFMTA(San Francisco Municipal Transportation Agency)는 LA메트로처럼 기차와 버스, 전차 등이 포함된 도심 교통 시스템인데 여행객은 일일 교통권인 무니 패스(Muni Pass)를 구입하면 버스와 철도를 무제한 사용할 수 있다. 가격은 5달러. 케이블카 이용이 포함된 일일 패스는 7달러다.   ▶숙소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관광지답게 샌프란시스코엔 세계 최고급 호텔 체인부터 비즈니스 호텔까지 다양한 등급의 호텔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비싼 물가만큼 호텔 숙박비도 만만치 않다. 샌프란시스코 최대 번화가인 유니언스퀘어에 위치한 5성급 포시즌 호텔이나 기라델리 광장(Ghirardelli Square)의 페어몬트 호텔, 하프문베이 소재 리츠칼튼 호텔은 5월 중순 평일 요금도 1박에 600~900달러에 이를 만큼 비싸다. 다운타운 인근 호텔 역시 3성급 이상은 150~300달러 정도다. 따라서 승용차나 렌트카를 이용한다면 공항 근처나 도심 외곽에 자리잡은 저렴한 호텔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만약 보다 특별한 숙소를 원한다면 체인 호텔이 아닌 부티크 호텔을 이용해볼만 하다.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부티크 호텔 중 하나인 프로퍼 호텔(San Francisco Proper)은 4성급 호텔로 프렌치풍 인테리어와 미슐랭 스타 셰프인 제이슨 폭스가 운영하는 '샤메인(Charmaine’s)’이 입점해 있다. 만약 실리콘밸리 인근에서 숙소를 찾는다면 팔로알토 소재 노부 호텔(Nobu Palo Alto)이 유명한데 이 호텔은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일시당 노부가 운영하는 호텔로 일본 미니멀리즘 인테리어가 반영된 하이엔드 호텔이다.     ▶가볼만한 곳   샌프란시스코 여행의 출발은 백화점과 멋진 카페, 식당들이 밀집돼 있는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서 시작하면 좋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서 인근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 들고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절로 힐링이 된다. 그리고 관광객이라면 꼭 들러야 할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를 둘러본 뒤 인근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 된다.   또 샌프란시스코에 갔다면 반드시 해봐야 할 투어가 바로 자전거로 금문교를 건너 샌프란시스코 대표 부촌이며 영화 '소살리토(Sausalito)'의 배경이기도 한 소살리토까지 가보는 것. 자전거는 노스비치 쪽 쇼핑몰인 피어39에서 대여할 수 있으며 돌아올 땐 페리를 이용해 도심으로 돌아오면 된다. 소살리토까지는 총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소살리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마지막 배는 오후 5시50분이므로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놀멍쉬멍 소살리토까지 갈 수 있다. 소살리토는 조용한 타운이지만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해 거리를 걷다 이른 저녁 식사 또는 커피를 마시며 오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진다.   이주현 객원기자버킷리스트 여행자 미슐랭 레스토랑 샌프란시스코 인근 샌프란시스코 여행

2023-05-18

“차별화된 투어에 격이 다른 숙식 제공” 미래관광 남봉규 대표

길에 올랐다. 유학 중 성지순례 투어 가이드 통역에 나서면서 여행업계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서울 올림픽 이후 여행 자유화로 유럽 투어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한국과 LA지역 여행사 대상으로 현지 투어를 담당하는 랜드사를 로마에서 12년간 운영했다. 목회자인 부친 영향으로 2000년 미국에 왔고 여행클럽을 운영하던 중 9·11테러가 발생해 여행업을 접었다. 이후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여행 동호회를 병행했으나 2016년에 10개팀의 투어를 담당하게 되면서 환자들에 불편을 주는 것 같아 2017년 1월 윌셔길에 미래관광을 설립했다.”   -미래관광만의 특장점, 차별화 전략은   “미래관광은 유럽에서 온 여행회사다. 유럽 현지 랜드사로 시작했기 때문에 현지사정에 정통하다. 투어 루트는 물론 숙박, 음식도 최고를 고집한다. 또한 현재 유럽 지역 랜드사의 가이드들이 미래관광 출신이 많아 최신 정보와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여행만큼은 한인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좀 더 친숙하게, 좀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드리고 있다. 다녀온 고객들 입소문으로 모객이 이어지고 있다. 자체 자료에 따르면 북유럽, 서유럽, 이탈리아, 성지순례 투어는 업계 1위를 수성하고 있다. 팬데믹 여행 재개 이후 재개된 모국 관광 모객 역시 업계 2위를 기록했다. 구글의 고객 평점도 4.8점을 기록해 다른 업체들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다.”   -올해 여행업계 트렌드 전망은   “소비자들이 전문 여행사를 찾고 있으며 소그룹 투어가 확산되고 있다. 5~8월 북유럽뿐만 아니라 업계 최초의 이탈리아 시칠리 섬 투어도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2세들을 위한 영어 가이드가 포함된 모국방문 겸 일본 관광에 가족 단위 맞춤 여행이 몰려 1월에만 73명이 예약을 끝냈다. 예전과 달리 한류열풍에 힘입어 젊은이들이 한국 방문을 더 원하고 있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향후 포부와 계획은   “저렴할수록 손님이 몰리기 때문에 저가 상품을 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차츰 여행객들이 가격보다는 여행의 질과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여행의 고급화를 선도하고자 한다.”   -한인들에게 새해 덕담 한 말씀   “한의사로 진료하다 보니 화병,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더라. 여행을 떠나면 옥시토신,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우울증 치료와 근육통 완화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여행은 행복의 종합 선물 세트다.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는 일인 만큼 안 좋은 면을 보기보다는 다른 것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좋은 여행을 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새해에도 여행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글·사진=박낙희 기자미래관광 차별화 미래관광 출신 여행업계 전망 유럽 투어

2023-02-12

코안도르 베이커리 & 카페 "코안도르에서 전국 빵지순례하세요~"

순례를 하듯 전국의 유명 빵집을 찾아다니는 '빵지순례'가 인기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빵지도에 이름을 올린 빵들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어 미주 빵돌이ㆍ빵순이의 성지로 불리는 베이커리가 있다. 이름하여 '코안도르(COIN DE RUE 대표 이효상) 베이커리 & 카페'.     코안도르는 프랑스어로 '길모퉁이'를 뜻한다. 그 이름처럼 LA 한인타운 길모퉁이에서 대전의 성심당 부산 옵스 목포 코롬방제과 등 한국의 10대 베이커리 명물 빵들을 모두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코안도르는 6개월 전 이효상 명장이 오픈했다. 코안도르의 역사는 짧지만 베이커리의 무려 120개나 되는 메뉴가 35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효상 명장의 역사를 증명한다.     그는 가주제과제빵학교를 설립해 남가주 한인사회에 베이킹 열풍을 일으킨 인물이다. "한국은 전국에 걸쳐 각 지역별 명물 빵집이 있다. 미국에서는 맛보기 힘든 데다가 특히나 코로나19로 한국 왕래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았나. 미주 한인들도 빵지순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LA 한인타운에 코안도르를 오픈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빵들을 선보이게 됐다"고 이 명장은 밝혔다.     코안도르의 시그니처 메뉴는 대파와 치즈의 조합이 환상적인 '대파빵' 생크림ㆍ밤ㆍ팥 앙금이 가득한 추억의 '맘모스빵' 빵가루까지 직접 만들어 더욱 바삭한 '수제 고로케' 등이다. 또한 꾸덕꾸덕한 마늘 바게트인 '웨스턴 바게트' 오징어 게임의 인기에 맞물려 내외국인들에게 골고루 인기인 '오징어 먹물 블루베리 크림치즈빵' 등은 없어서 못 파는 '완판' 메뉴가 됐다.     이와 함께 코안도르는 매주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출시하고 있다. 주말마다 테이스팅을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 이곳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신메뉴를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 명장은 "이번주에는 새우 바게트와 크림치즈 바게트를 선보인다. 새우 바게트는 새우깡을 씹어 먹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재미있는 메뉴이고 크림치즈 바게트는 일본 동경 베이커리에서 근무 시절 인기가 많았던 메뉴를 재현했다. 36프로짜리 우유 크림과 크림치즈가 담백하게 어우러지고 껍질이 누룽지처럼 바삭한 것이 특징"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빵집 아들로 태어났고 세 아이에게도 베이커리 기술을 전수해 함께 빵을 만들고 있다. 신생 베이커리지만 차별화된 맛과 메뉴로 무장해 코안도르를 LA 한인사회의 '백년가게'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덧붙였다.   코안도르는 연말을 맞아 크리스마스 스페셜 케이크도 제공한다. 라즈베리 블랙베리 블루베리 등의 과일과 크림을 아끼지 않은 '쓰리 베리 케이크'와 '레인보 케이크' 등에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올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달콤한 케이크를 선보일 계획이다.     코안도르 베이커리 & 카페는 LA 웨스턴길 올림픽 남단 코리아타운갤러리아 뒤편에 위치한다.     ▶문의: (323)840-3971   1110 S Western Ave #101 LA코안도 베이커리 베이커리 명물 베이커리 기술 동경 베이커리

2021-12-05

[삶의 한 가운데서] 살며 사랑하며 적응하기

일본제 물건을 사지 않고 일본 방문도 하지 않는 모국인들의 반일 불매운동에 동조해 달라는 강력한 부탁이었다. 조카가 사용한 격한 언어에 움칫해서 인터넷으로 한국과 일본의 상황을 찾아봤다. 나나 남편이 전혀 모르는 그곳의 실정에 황당했다. 특히 일본계 남편을 가진 나는 살면서 정기적으로 고질병을 치른다. 바로 한국과 일본의 마찰로 일어나는 갈등이다. 태평양 건너에서 한국과 일본이 벌리는 고래 싸움에 미국 남부에 사는 우리 부부는 새우처럼 등이 터진다. 각자 무조건 자신의 모국을 편들어 마치 도토리 키 재기 같이 아웅 댄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이곳에 살았어도 태평양 건너의 일에 무관할 수 없으니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각자의 모국을 응원하며 티격태격할 것이다. 일본 주재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점심을 함께 먹는 남편이 집을 나설 적에 그들은 뭐라 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그들로부터 아무 뉴스도 듣지 못하고 돌아온 남편은 전혀 의의가 없었다. 그냥 계획대로 일본으로 가자는 남편과 일주일 실랑이를 벌였다. 일본 여행은 2020년 봄으로 미루자고 제안하고 나는 눈길을 다시 유럽으로 돌렸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성지순례나 하자고 남편을 부추겼다. 패키지여행을 찾아서 남편에게 보여주고 남편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얼른 여행사에 연락해서 등록했다. 그리고 바로 항공권을 구매했다. 마음이 흔들릴 적에는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따르는 것이 순리라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타고 우리는 포르투갈, 스페인과 프랑스를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고 멋진 곳들을 보며 역사 공부를 했고 신앙의 바탕을 단단하게 다진 기회를 가졌다. 올해는 5월 초에 출산하는 딸의 스케줄에 맞추어서 3월에 베니스를 다녀와서 4월에는 홋카이도를 간다고 벼르고 있었다. 지인의 문을 두드려 놀라게 하려고 크리스마스 편지에도 전혀 우리의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항공편과 호텔을 예매할 시쯤에 베니스는 홍수로 물에 잠겼고 한국과 일본은 코로나바이러스로 혼란했다. 이번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봄 여행을 취소시켰다. 올봄엔 집에서 조용히 보내려나 했는데 웬걸 평화롭고 한적한 남부 소도시도 코로나바이러스로 휘청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할 수 있을 적에, 갈 수 있을 적에, 그리고 가고 싶을 적에 다니자고 작정한 여행 계획은 연기되어 사라졌고, 이제는 지인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나 사는 작은 환경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한다. 채소밭의 흙을 만지고 오래전에 중단했던 퀼트를 꺼내어 바느질하고 책을 읽으며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무엇에도 안정을 찾지 못한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는 세상살이와 곧 첫 아이를 낳을 둘째 딸이 안쓰러워 마음이 복잡해서 잠을 설친다. 자다가 깨어나면 주로 새벽 2~3시다. 그런 날은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고 어슬렁거리다 새벽을 맞는다. 불과 2달 전의 일상이 어느 사이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되어버렸고 새롭게 정착한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내일이 불안하다. 성주간을 엉성하게 보내고 부활절 전야부터 온라인으로 중계해주는 여러 지역의 미사를 줄곧 보니 남편이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다. 신부님과 주교님 그리고 교황님의 강론에서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구했다. 내 속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기쁨과 희망을 가지니 현 상황의 혼란도 견딜만하다. 홋카이도에 사는 지인은 올해 87세다. 그녀만 아니라 우리도 나이 든다. 하루라도 젊었을 적에 보고 싶은 그녀를 찾아가려고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며 오늘도 새롭게 적응한 쳇바퀴에 오른다. 영그레이 / 수필가

2020-04-16

[시카고 사람들] 시카고 첫 한인 매니저급 간호사 박순길씨

길(사진•70)씨는 전남대 간호학교를 나왔다. 이민 초기 양로원에서 일하다 1977년 스웨디시 병원으로 옮겨 27년 이상 재직했다. 이어 어빙팍 길의 Thorek 커뮤니티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4년 넘게 일한 후 험플 팍 지역의 노리지언 아메리칸 병원 응급실에서도 5년여 재직했다. 일과 자녀 양육을 하면서 노스팍대학에서 간호학 학사도 취득했다. “49년간 간호사로 일했죠. 조금의 후회도 없어요. 아픈 사람을 돕고 환자에게 조언을 해주는 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은퇴한 지금도 주말에는 에이전시를 통해 병원에서 일한다는 그는 “의사도 중요하지만 간호사도 잘 만나야 합니다. 환자 증상에 대한 대처를 누구보다 신속하게 하고 의사에게 보고를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39년간 살아온 나일스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남쪽 상가에서 뷰티 서플라이 비즈니스를 운영하던 남편은 200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박 씨는 남매를 뒀는데 큰 딸은 얼리 챠일드후드 석사를 마치고 프리스쿨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아직 미혼으로 시카고에 살고 있다. 아들은 결혼해 10살 된 손자와 7살 된 손녀를 안겨주었다. 시카고대에서 경영학을 전공, 다운타운 하이얏 호텔에서 컴퓨터 관련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한다. 직장에서 만난 미국 며느리(간호사)와 우드스탁에 살고 있다. 뉴비젼 언약교회에 출석하는 박순길씨는 6년 전부터 찬양을 하기 위해 예울림합창단에 가입했다. 서로를 배려하고 모두 다 교회에서 나름대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편안하고 좋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는 미국 내 웬만한 곳은 다 다녀왔다. 플로리다 키웨스트,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그랜드 캐년 등 동서남북 전국을 거쳐 하와이, 알라스카, 캐나다의 록키산맥 등 2번 이상 다녀온 곳이 수두룩하다. 크루즈 여행으로 일본, 중국도 다녀왔으며 유럽의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 러시아까지도 둘러봤단다. 그 사이 캄보디아, 볼리비아는 선교 차 방문해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는 “내년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3번째 가려고 해요. 특히 터키가 인상이 좋았고 그리스, 요르단 등도 거칠 계획”이라며 설레는 마음을 내비쳤다. 박 씨는 “평범하게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항상 갖게 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농사도 짓고 빵굽기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냉장고에는 그린 콩, 고추, 토마토, 부추, 깻잎 등으로 만들어 놓은 반찬이 즐비하다.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하고 긍정적 마음을 지니고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그의 건강 비결인 듯하다. James Lee

2019-11-25

취향 따라 골라 떠나는 여행

순례길ㆍ일본 일본의 영적인 고향으로 불리는 구마노에서도 단연 이곳을 빼놓을 순 없다. 유네스코가 세계 유산으로 지정한 두 개의 순례길 중의 하나인 구마노 고도(옛길)는 그 역사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미에현과 와카야마현의 기이반도 남부 일대를 지칭하는 구마노는 죽은 자의 영혼이 깃드는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구마노 고도는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른바 '지상과 천계가 만나는 곳'을 방문하기 위해 왕족과 귀족들이 옛 수도 교토에서 출발해 30~40일 동안 이곳까지 힘든 여정을 해왔던 것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특히 하야타마 타이샤, 나치 타이샤, 혼구 타이샤의 구마노 3대 신사를 통칭하는 구마노 산잔이 있는 곳으로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명상을 찾는다면 파크슐로센·독일 30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전체적인 치유 시스템은 이제 인도만의 것이 아닐 정도로 세계적인 정신 수양의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독일의 파크슐로센의 치유 호텔 '아유르베다 파크슐로센'(Ayurveda Parkschloesschen)에서는 몸에서 독소를 없애면서 두피 마사지, 육체와 정신과의 미묘한 균형을 잡아주는 차크라 정렬, 에너지 균형 등을 제공한다. 휴식 시간에는 인근의 마을 트라벤-트라바흐를 찾아 부처 박물관(Buddha Museum)을 방문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버마와 캄보디아에서 유래한 2000여 개의 부처상과 조각상들을 만날 수 있다. ▶물을 좋아한다면 메콩강 크루즈ㆍ캄보디아 전체 길이 2700마일이 넘는 메콩강은 동남아시아에서는 가장 긴 강이며, 지구상에서도 12번 째에 든다. 중국에서 발원해서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6개국을 지난다. 그런 만큼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문화를 비롯해서 메콩 삼각주에 이르러서는 열대 과일과 물고기 등이 화려한 수상시장을 만난다. '아쿠아 익스퍼디션'(Aqua Expedition)의 5성급 크루저 상품인 아쿠아 메콩은 메콩 델타 지역을 호화롭게 경험해볼 수 있다. 배는 5성급에 걸맞게 20개의 스윗룸으로 구성되며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창문을 통해 찬란한 문화를 한눈에 즐길 수 있다. 300개 이상의 사찰로 구성된 세계유산인 앙코르 와트 방문 등 자신에 맞는 일정을 조절할 수 있다. ▶오지 마니아라면 아마존 별장·페루 SNS와 Wi-Fi 연결에 신경쓰느라 지친 이들이라면 이곳이 답일 수도 있겠다. 페루 아마존의 '잉카테라 레세르바 아마조니카'(Inkaterra Reserva Amazonica). 페루 아마존의 대표적 관문도시 푸에르토말도나도의 우카얄리강 최상류에 해당하는 마드레데디오스에 자리한 리조트다. 강변에 자리한 30여 개의 리조트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이 리조트는 문명과는 동떨어진 에코 체험의 베이스캠프라고 할 수 있다. 창문과 지붕은 뻥 뚫려있고, TV를 비롯한 가전기기도 일체 없다. 전기도 아침과 저녁 시간에만 잠깐 공급된다. 나머지 시간은 촛불과 손전등에 의존한다. 당연히 휴대전화와 인터넷도 먹통이 된다. 이곳의 체험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좁고 길쭉한 카누를 타고, 나무와 식물, 새와 곤충 등을 관찰하는 것도 있고, 농장 찾아가 열대의 꽃을 보고 열매 따 먹는 일정도 있다. 야간에 악어 찾아 유람선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다. ▶항해 모험을 꿈꾼다면 하버뷰 호텔·미국 1891년 매사추세츠주 에드거타운의 마샤 빈야드(Martha's Vineyard)에 문을 연 하버뷰 호텔(Harbor View Hotel)은 항해 모험을 위한 이상적인 거점이라 할 수 있다. 코드곶 남쪽에 자리한 섬 마샤 빈야드는 오바마 대통령의 여름 휴가지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이 호텔은 다이닝룸에서 감상하는 등대와 항구의 전망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고품질의 와인과 현지 어부가 제공하거나 섬 안의 농장에서 공수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 또한 식욕을 돋운다. 이 항구는 에드거타운 요트클럽이 주최하는 올해 96회째의 요트경주대회를 비롯해서 인 Round the Island, Round the Sound 및 Buoy 경주 라운드를 개최하기도 한다. 사진=해당 웹사이트 백종춘 객원기자

2019-05-30

[커뮤니티 포럼] "나도 사람이오" 3·1 정신이 영성입니다

길들여진 한반도에서 나라의 주인이 백성임을 밝히는 첫 민주공화제가 3.1 운동의 열매인 임시정부를 통해 실현되었다. 3.1 운동은 사람으로 대접받고 사람 노릇을 하겠다는 깨달음이다. 이민자교회도 3.1운동 열매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도 "우리도 사람이오" 마음의 깨달음이며, 사람으로 대접받고 사람 노릇을 하려는 사람회복 운동이다. 사람의 가치를 정치적 이익에 손쉽게 수장시키는 시대 속에서 "이민자들도 사람이오" 주창하는 것이 이민자보호교회 영성이다. 소수일지라도 그 소수는 역시 사람이다. 피부색이 다를지라도 모두 사람이다. 물론 서류미비자 일지라도 그들의 가족 또한 사람이다. 이민자가 경제적 손익계산의 대상이 되어 사람 본연의 가치를 강탈하는 차별속에서 이민자보호교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각자의 눈길 회복을 제안한다. 이런 의미에서 120개 교회가 가입되어 있는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는 3.1 운동의 열매이다. 그러나 숭고한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떨쳐 일어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유약하지 않은가?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절박한 위기 앞에서 자기보호를 위해 변절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사람은 가변적이고 유약하다. 이런 맥락에서 궁금했다. 3.1 운동의 사람가치를 외쳤던 이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물론 두려움 없이 '우리도 사람이오' 외쳤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거룩한 얼이 되었다. 3.1 운동의 기폭제인 기미독립선언문의 서명자들인 민족대표 33인을 보자. 대표 33인 중 기독교인 16명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16명의 기독교인 중에서 2명은 이후에 변절한다. 박희도와 정춘수이다. 이들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도 못했으며, 독립기념관 전시물 안내문에도 이들의 친일 행적을 밝혔다. 숭고한 신심이 어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길 앞에서 우리를 반복적으로 절망하게 하는 것이 사람에 대한 절망이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박희도는 1934년 친일단체 시중회에 참여하며 친일을 선언했고 1936년 이후 조선인을 징병하여 태평양 전쟁에 파병하는데 앞장섰다. 정춘수는 1941년에 교회의 철문을 일본에 헌납하는 결의를 주도하며 교회 박해에 앞장선다. 3.1 운동에 기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남다른 자긍심으로 품던 나에게 이런 기독교인의 변절은 충격이었다. 물론 3.1 운동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 민주와 인권의 가치를 외친 선언이자 실천의 최고봉이다. 하지만 3.1 운동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색깔은 단색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순교자, 애국계몽운동가 뿐 아니라 변절한 친일파들의 다양한 색깔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이룬 역사의 자기 고해이다. 실재로 사람에 대한 좌절은 여전히 정치와 사회 심지어 신앙공동체에서 선한 양심의 추동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주요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 사람은 여전히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독립선언문 사람의 가치에 대한 희망을 한결같이 저버리지 않았던 한 사람을 소개한다. 예수이다. 그분은 숱하게 변절과 배신의 상처 앞에 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삶의 주제를 사람으로 설정한다. 또한 기독교인에게 예수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인데, 그 예수의 목표가 초지일관 사람의 구원과 해방이다. 다음은 예수의 공적생애 첫 설교이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울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18~19) 이것은 나에게 예수의 독립선언문이다. 억눌린 사람들의 독립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돈보다 우선인 사람의 가치를 예수는 주목했다. 포로된 사람들 안에서 포로로 만들 수 있는 권력보다 우선인 사람의 가치를 예수는 잃지 않았다. 눈먼 사람들의 가치, 눌린 사람들의 가치를 예수께서는 최우선 순위로 두셨다. 변절하는 사람들로부터 절망할 수 있는 숱한 상황에서도 예수는 여전히 사람회복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람 안의 깊은 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현미경 없이 어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도 사람이오' 깨우친 마음을 담은 기미독립선언문은 예수의 독립선언문에서 나오지 않았겠는가?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도 철저하게 예수의 독립선언문 위에 기초해야 한다. 차별과 소외 속에서 주류의 힘에 종속될 수 있는 이민자들의 진정한 자리잡기를 돕는 것이 이민자보호교회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이민자보호교회는 포로 되고, 억눌리며,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한다. "이민자들도 사람이오" 센터교회, 후원교회, 복지교회로 네트워크를 이룬 이민자보호교회는 예수의 독립선언문의 메아리인 셈이다. 차별과 억압의 골짜기를 사이에 둔 2개의 봉우리인 예수의 독립선언문은 3.1 독립선언문으로 이어진 봉화였다. 그리고 3.1 독립선언문은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로 이어진 산봉우리 위의 봉화가 되길 기대한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아팔라치아 산맥을 타고 조지아를 거쳐 로키산맥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이민자를 보호하는 하나님 나라 만세 운동이 일어나길 바란다. 그래서 이민자보호교회는 예수 때문에 사람에게 희망을 거두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일지라도 순수하게 사람의 가치 앞에 서려고 한다. 나는 2014년부터 해마다 여름이 되면 청소년들과 함께 조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평화기도 도보순례를 했다. 처음에는 24명이 시작했고 작년에는 미국 동포 청소년, 한국 청소년, 독일, 인도네시아, 일본 청소년들까지 50명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시작했을 때는 북한에서 핵실험과 미시일 발사를 다반사로 했었다. 우리의 기도실천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교했었다.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는 민족 평화의 획기적인 전환기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실천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3.1 독립운동은 한반도 평화운동으로 승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군사무기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주변국의 이익보다 민족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기대하게 했다. 이제 한반도에 새로운 100년이 시작되어야 한다. 3.1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을 비롯해 세계의 많은 독립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이제 3.1 운동은 4.27 판문점 선언을 지나 새로운 백년으로 뻗어나가길 기대한다. 한민족 다음세대들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100년이 품고 있는 가슴 시린 사연들을 헤치고 3.1 운동은 도도한 강물이 되어 우리들의 허리춤까지 차오른다. 일제의 총칼 앞에 선연한 피를 흘리면서도 비폭력 무저항의 결연한 모습으로 "나도 사람이오" 외쳤던 순결한 마음은 오늘 이민자인 우리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다. 100년이 되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3.1 운동이다. 새로운 100년을 꿈꾸는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는 예수의 삶이었던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동포사회 곁에 늘 설 것이다. 우리에게 사람은 여전히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3.1 정신은 사람으로 인한 실망에도 여전히 사람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다시 사람회복 운동이 들불 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귓전에 새로운 만세운동의 소리가 울린다. "이민자들도 사람이오." 뉴욕우리교회 담임목사 조원태 / 이민자보호교회 대책위원장

2019-02-28

안익태ㆍ쇼팽의 안식처…스페인 마요르카섬

일본으로 유학한 뒤 미국을 거쳐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던 불세출의 거장 안익태 선생이 20년을 머물렀던 곳이다. 팔마 데 마요르카 외곽 남쪽 해변 지역에는 '안익태 거리(Carrer D'Eaktai Ahn)'가 있다. 제주도보다 조금 더 큰 섬으로 '지중해의 하와이'라고 불릴 만큼 유럽인들이 사랑하는 휴양지 팔마는 이름처럼 팜트리가 낯설지 않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일년 내내 햇볕이 따사로운 이곳은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유럽의 왕족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섬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또 다른 거장 쇼팽이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와 함께 절박했던 생애의 일부를 보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팔마에서 북쪽으로 40여 분 떨어진 발데모사(Valldemossa)는 작고 조용한 산골 마을이다. 따사로운 봄햇살을 머금은 올리브밭에는 잔잔한 여유가 흐른다. 아기자기한 상점과 레스토랑, 그리고 고색창연한 수도원이 어우러져 동화 속 마을의 정취가 물씬하다. 이곳 카르투하 수도원은 또 다른 음악계의 거장 쇼팽의 발자취가 생생한 곳으로 1836년 쇼팽이 리스트의 소개로 알게 된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도피 행각을 벌인 곳이다. 그러던 중 폐결핵으로 건강이 나빠진 쇼팽은 상드의 열정적이면서도 모성애적인 사랑과 보살핌으로 김이 음악에 빠져들어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어느 날 쇼팽의 결핵약을 구하러 팔마로 나간 상드가 폭우로 귀가가 늦어지자 이를 걱정하며 작곡한 '빗방울 전주곡'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수도원은 현재 '쇼팽 전시관' 역할도 겸하고 있어 전세계에서 매년 30만여 명이 이곳을 찾는 쇼팽애호가들의 성지로 꼽히고 있다. 현재 쇼팽이 사용했던 피아노와 손으로 적은 악보가 전시돼 있으니, 그것만으로 이곳을 찾아야 할 이유가 된다. 지중해의 한 섬, 그것도 산골마을의 수도원에서 맞는 투명한 공기는 달콤하기까지 했다. 쇼팽의 흔적을 찾아 미로같은 작은 방들을 순례하다 피아노가 놓여진 음악당(?)에 이르렀다. 자리를 잡으니, 초로의 연주자가 커튼 뒤에서 나타나 연주를 시작한다. 예의 그 빗방울 전주곡이다. 이어서 쇼팽의 걸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번호 64번의 두 번째 왈츠인 7번 왈츠를 연주한다. 내게는 대학간 딸의 연주로 익숙한 이 곡은 서정성과 비극성에 치중해 있다. 그는 37살에 이곡을 작곡한 뒤 2년 후 폐결핵으로 39살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당시 그는 10년 이상을 같이 보냈던 연인 상드와 결별한 상태였고, 지병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던 터라 죽음의 불안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이 섬은 온화한 기후 못지 않게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이 도시 곳곳에 녹아 있다. 먼저, 팔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한 벨베르성. '아름다운 전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원형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에서는 360도의 파노라마 전망이 압권이다. 14세기 초 발레아레스 제도를 통치하던 하이메 2세의 별궁으로 지어진 성이다. 팔마항에 인접한 알무다이나 궁전과 팔마대성당은 각기 다른 건축양식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1281년 이슬람 궁전으로 지어진 알무다이나 궁전은 이후 몇 차례 내부 개조를 통해 현재 스페인 국왕의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이 궁전과 마주하고 있는 대성당은 14세기 모스크 위에 세워진 것으로 마요르카섬의 랜드마크이다. 고딕양식이 주를 이루지만 17세기까지 계속된 건축으로 여러가지 양식이 혼재한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지진으로 훼손된 성당의 재건이 결정되면서 가우디가 복원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조 진주로 유명한 마요르카섬은 그야말로 지중해의 진주다. 영롱한 햇살이 그렇고, 거장들의 음악이 그랬다. 중세의 담장에 내리쬐는 햇살이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다. 백종춘 객원기자

2018-05-09

[태종수 칼럼] 혼밥이 어때서

순례 보내고 홀로 있는 나에게 한국의 친구가 보낸 문자 메시지다. 나이 들수록 부부는 뭐든지 함께 하라고 하지만, 여행은 괜찮아도 성지 순례 가는 데는 나는 늘 ‘자발적 열외자’다. 혼밥이 처음에는 잡곡밥인가 했는데 문맥으로 따져 혼자 먹는 밥으로 짐작했다. 신조어와 줄임말이 범람하는 요즘 세상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노년에 혼자 해 먹기가 귀찮은 것은 사실이다. 안사람이나 아랫사람이 차려주는 것이 우리 전통 식사 문화 아니던가. 내가 어려서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늘 따로 독상을 받으셨다. 그래서인지 혼자 먹거나 혼자 마시거나 뭐 그리 대수인가 싶다. 은근히 부럽기조차 했고 내가 어른이 되어 독상을 받는 상상을 하기도 했으니까. 좀 찾아보니 혼자 먹는 밥 말고도 혼자서 술을 마시는 ‘혼술’, 혼자서 여행을 가는 ‘혼행’, 혼자서 영화를 보는 ‘혼영’이 있으며,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혼족’이란 단어도 있다.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여럿이 함께하는 식사는 ‘떼밥’이라고 한다는 말도 처음이다. 떼 지어서 같이 먹는 밥을 줄인 것인데 그 어감이 별로 좋지 않다. 가족이 둘러앉아서 하는 식사를 떼밥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들이 무리 지어 먹으려고 아귀다툼하는 연상을 준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먹는 ‘둘밥’이라는 말도 쓴다. ‘신조어의 행진’은 끝이 없다. 미국에서 살면서 애들 다 자라 제 갈 길 간 후에 두 내외만 살면서 둘 중 하나가 일이 생기거나 집을 비우게 되면 혼자 먹게 된다. 특히 내 집사람처럼 교회 일에 열성적이지 못한 나는 혼자 밥 먹는 일이 꽤 잦은 편이다. 집사람이 아는 어느 지인은 며칠 집을 비울 일이 생기면 떠나기 전에 미리 그동안의 남편 식사를 끼니 맞춰 냉장고에 챙겨놓고 간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더니 그 친구 호강하네.” 그 얘기 듣고 내가 아내에게 한 말이다. 나야 스스로 알아서 자체해결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혼밥이 크게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나 홀로 문화’가 도래했다는 신호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세 가구 중 한 가구가 1인 가구라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밥을 혼자서 먹는 것은 궁상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보아 왔지만, 이제는 혼밥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보다 일찍 1인 가구 시대를 맞이한 옆 나라 일본에서는 혼밥 문화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 실제로 많은 소규모 일본 식당은 식당 내부가 혼밥족을 고려해서 꾸며져 있다. 주방을 마주 보는 일직선으로 된 긴 테이블이나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쳐진 따로 있는 1인 식당도 흔하다. 식사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교류, 인간끼리 소통의 장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혼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혼밥은 소통이 빠진 ‘자폐 행위’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킨 ‘맛 칼럼니스트’가 있는가 하면 전 대통령 박근혜의 혼밥이 그녀의 ‘불통’과 직무상 태업의 원인이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 식사 문화는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는 식사 중에는 되도록 말을 않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일이고 식사 자리에서 떠드는 것은 무례한 짓으로 여기는 문화다. 그런데 최근 20대 신세대 간에 유행하는 혼밥 열풍에 주목하여 이를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구세대들처럼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해서 혼자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혼밥이다. 요새 한국에도 1인 고객을 위한 식당이 늘고 있는 것은 밥 먹으며 스마트 폰이나 노트북을 놓지 않으려는 디지털 신세대의 혼밥 취향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제는 우리 식사 문화에도 사이버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의 장이 도래한 느낌이다. 그 소통의 상대는 헤아리기 어렵고 그 폭은 사이버 공간만큼 광대하다.

2018-02-02

'움직이는 집' 타고 자연으로 떠난다…'오토 캠핑'

순례하듯 둘러보고 풍광과 사람이 아름다운 오리건 해안을 지나 자유로운 시애틀을 만끽했다. 중국의 어느 도시처럼 변한 밴쿠버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태고 이래 자연이 그대로인 백야의 알래스카 하이웨이를 달리던 때가 눈에 선하다. 도로 보수로 길이 막혀 1시간씩 기다려도 즐거웠다. 흙먼지 속 자갈길을 달려도 펼쳐진 자연에 감동하며 피곤한 줄 몰랐다. 일주일이 넘는 긴 알래스카 하이웨이 구간을 지나며 지루할만 하면 들소 떼와 곰, 여우가 우리를 반겨줬다. 캐나다 유콘 준주의 주도인 화이트 호스 시는 오토캠핑족의 북극지방 탐험 전진기지 같았다. 미국 및 유럽의 오토캠핑족들이 몰고온 다양한 RV들이 마치 범세계 RV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알래스카의 산과 빙하 밤바다 그리고 자정에도 밝은 백야는 몽환적이었다. 서울 명동같이 사람이 많았던 캐나다 로키에서는 자연이 훼손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인간의 끝없는 물욕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미대륙 종횡단을 수 차례 하면서 자연의 파괴자는 인간임을 절감 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아우터 뱅크스 섬을 덮고 있는 파티하우스들도 자연파괴의 현장이었다. 얄팍한 상혼과 공허한 인간의 허영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었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이 봤다. 아이오와주의 끝없이 넘치도록 펼쳐진 들판의 곡식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미국 남부의 도시들은 잘 정돈돼 보였지만 몇 군데의 도시는 아직도 인간을 가축처럼 팔고 사던 노예시대의 의식이 남아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게 했다. 아직도 카트리나 태풍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서 토네이도를 만났다. 두려움에 하늘만 올려다봤다. 자연이 보존되고 풍요로운 곳은 사람들의 얼굴 표정도 밝고 친절하다. 세상은 숨가쁘게 돌아간다. 한걸음 뒤에서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아침을 여는 이 생활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유를 억제하는 삶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다. 자연에 묻혀 사는 캠핑생활을 당분간 영위하고 싶다. 각종 생활설비를 차내에 갖춘 차량을 한국에서는 캠핑카라고 부르고, 북미에서는 RV라고 부른다.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캐러밴, 오토 캐러밴, 캠퍼 밴, 모터 홈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미국과 캐나다는 캠핑문화가 발달돼 있고 장비와 제반 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북미에서 캠핑이라고 하면 대부분 캠핑카나 트레일러를 이용한 오토캠핑을 의미한다. 캠핑카와 트레일러는 침대와 주방, 욕실이 갖춰진 '움직이는 집'이다. 오토 캠핑장은 오폐수를 처리할수 있는 시설과 전기와 상수도를 연결하는 시설이 되어있다. 그리고 테이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틀, 공동화장실, 샤워실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곳에 따라서는 놀이시설, 당구장 , 수영장, 연회실 등을 갖춘 곳도 있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오토 캠핑장은 국립 공원, 주립공원 등에도 많고 정부 또는 민간이 운영한다. 도시 인근과 관광지 주변에도 많다. 캠프장 이용료는 보통 일주일 머물면 하루치를 빼주고 한 달이면 2주치 정도를 받는다. 6개월을 머물면 저렴하게 캠핑장을 이용할 수 있다. 캠퍼들은 며칠 길게는 몇 달씩 캠프장을 이용한다. RV에서 사는 사람들을 '풀 타이머'라고 하는데 미국과 캐나다의 추운 지방 사람들이 겨울에 따듯한 플로리다 등 남쪽으로 내려와 길게는 6개월을 지내며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RV캠핑 생활을 한다. 지난 2월 일주일 머물렀던 플로리다 주 템파의 한 캠프장은 작은 퀘벡이라고 부를 정도로 캐나다 사람들이 많이 산다. 매해 새로운 캠핑카와 장비를 선보이는 RV 전시회가 플로리다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열리고 있다. 사람들은 형편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RV를 구입한다. 오토캠핑은 복잡하고 바쁜 사회생활을 잠시라도 접고 자연에 가까워 지려는 인간의 의지가 담긴 문화다.

2017-06-20

[영그레이칼럼] 어제와 오늘

일본 음식이다. 프라임 립 로스트에 남부 새해 음식인 블랙 아이 콩요리와 일본의 오뎅국은 한국의 동치미와 썩 잘 어울렸고 식탁 중앙에 자리잡은 연어 샐러드와 우니 스시는 환상이었다. 켈리포니아에서 특별히 주문해온 생선은 신선해서 입안에 사르르 녹았다. 그리고 자정 가까이되자 새우튀김과 뜨거운 국물의 소바를 먹으며 장수를 빌었다. 음식들이 거북스럽지 않고 잘 어울린 것이 재미있었다. 마치 사람살이가 서로 다름을 지키면서 어울려서 화목하게 사는 것임을 일깨운것 같다. 마음 편한 지인들이라 스스럼없이 수다하며 먹고 마시며 깊은 친분을 쌓았다. 풋볼게임을 보고 보드게임을 하다가 자정에는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축배를 들고 축하인사를 나눴다. 특히 대학 풋볼의 준결승인 ‘코튼 볼’에서 미시건 주립대학을 38대 0으로 압승하고 결승전에 나서는 앨라배마 대학팀의 열기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새벽 4시쯤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어제와 오늘.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새해 첫 순간에 든 축배는 무슨 의미였나. 쉽게 잠들지 못하고 집안을 서성였다. 2015년의 하루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크고 작은 많은 일이 내 생활을 차지했다. 받은 축복에 감사함도 많지만 지난해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긴 그림자를 남겼다. 그러나 나를 흥분시킨 기쁨이나 세상 바닥에 던져졌던 아픔은 퇴색했다. 사랑과 미움의 빛바랜 감정의 찌꺼기는 어스름한 새벽 하늘빛을 닮았다. 세밑에 무섭게 내리던 폭우에 쓸려가서 과거가 되어버린 어제를 생각하며 숨죽이고 창밖을 주시하니 낯익은 정경이 조금씩 모습을 갖추며 형색을 들어낸다. 작년 봄, 두번째 책 출간을 준비하다가 중단했다. 책의 내용에 무엇인가 부족해서 주춤였다. 다시 시도한 여름에도 결단을 못내리자 훌쩍 집을 나섰다. 남쪽 바닷가를 헤매며 고심했지만 평소 내 감정의 진정제였던 바다는 도와주지 않았다. 꿈쩍하지 않던 바다를 보며 나도 꿈쩍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배낭을 매고 스페인으로 떠났다.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천연덕스럽게 걸었던 시간들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오감으로 느끼게 해줬다. 한달의 순례길이 나의 영육에 끼친 영향은 내 삶의 반전이었고 동시에 2015년의 정수다. 크리스마스가 끼인 주에 우리 가족은 노스 케롤라이나 산속의 캐빈에 모였다. 특이한 인연의 고리로 맺어진 우리 부부와 딸들 부부는 모두 다문화 결합이라 관습이 좀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며 화목하게 단합하는 것이 모두의 임무였다. 머리를 맛대고 보드 게임을 하거나 둘러앉아 얼굴을 마주보며 모든 주제를 자유롭게 토론했다. 세상의 화합과 평화는 평범한 개인의 포용과 배려에서 시작됨을 인식하니 유엔 특사가 따로 없다. 유머 감각이 다른 사위들과 적응하며 현시대의 어수선한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의논했다. 딱하게도 나는 실수도 했다. 딸의 삶에 콩나라 팥나라 참견했다. “아차!” 싶어 사과했지만 은연중에 나는 어머니를 닮아 나의 아이인 딸을 걱정했다. 그러나 숲에 둘러싸여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8일동안 화끈하게 쿰바야한 가족휴가는 모두에게 평안을 줬다. 오늘은 새로운 시작을 한다.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새해 첫날이다. 흥분으로 마음이 설렌다. 앞길을 모르는 인생에 불안감은 뒤로 밀고 미지의 순간에 다가올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타진하니 신이 난다. 철부지 소녀되어 펄떡이는 심장소리를 듣는다. 이어서 해마다 신년초에 각오로 열거하던 새해소망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옛 목록들에 새로운 의미를 첨부하니 신선하다. 그렇게 끝없이 욕심을 내는데 창밖의 밝은 세상이 완연히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는 희비가 가미된 착잡한 나의 마음에 아일랜드 신부님 세분이 부르는 ‘아이리쉬 축복’이 가슴을 채운다. ‘당신에게 길이 열리고/ 바람은 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기를/ 햇살은 당신의 얼굴에 따스하게 비추길/ 그리고 비는 당신의 밭에 부드럽게 내리길/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신이 당신을 보호해 주시길’ 얼마나 근사한 축복송인가. 2016년, 새해는 더욱 맹렬히 살리라 각오하며 커피를 내린다.

2016-01-06

[영 그레이 칼럼] 까미노의 묘미(2) 천사들의 기도

순례길을 걸었을 적엔 호텔과 팬션에 묵어서 다른 순례자들과 교제할 기회가 없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침낭을 가져가서 주로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 묵으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새벽에 제각기 출발하지만 도중에 만나거나 또는 다른 지역에서 같은 숙소에 머물면 아주 반가웠다. 외톨이 순례자들은 임시가족이 되어 은연중에 서로 의지했다. 비슷한 복장에 등에 짊어진 배낭 하나가 전 재산인 간단한 삶을 사는 순례자들은 권세나 명예,부귀에 관심없이 배낭속에 든 최소한의 생필품에 만족했다. 체면과 가식없이 가진것은 나누고 상대방에게 도움만 주려는 선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서‘까미노의 천사’로 변한다. 그리고 가슴속에 간직한 아픔과 소망도 자연스럽게 털어놓는다. 매일 낯선 순례자를 만나고 또한 그 사람을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람 사귀기가 엉뚱하게 나를 웃고 울렸다.거울앞에 서면 나와 동질인 많은 인간의 모습이 콜라주되었다. 65세인 영국인 롸버터는 런던에서 38년간 교직생활을한 후 고향으로 귀향했다.외아들인 그에게 자식도 없다. 3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작년 12월에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 그야말로 혈혈단신이다.외로워 방황하는 그에게 누가 까미노를 제안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재를 조금씩 가져온 그의 가슴은 구멍이 송송 뚤려서 썰렁했다.그는 산티아고로 향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안을 구했다.아일랜드에서 온 노인은 오래전 순례길을 걸었다.당시 7살이던 아들은 콩팥 제공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상황이었다.그가 순례길을 걸으며 기도했더니 제공자가 나타나서 아들은 살았다.이제 28세인 아들은 다시 콩팥이식이 필요해서 아버지가 다시 순례길에 나섰다.역시 배낭에 항암치료를 받는 여동생 이름을 적어서 산티아고로 찾아가는 스페인 노인은 자신의 고초는 아랑곳 없었다. 오랫동안 소식없던 친구가 연락해서 까미노 하잖다고 3일만에 배낭을 챙겨서 순례길 나선 아버지를 따라온 이탈리안 청년은 영어가 유창했다.두 노인이 앞장서고 나와 조금 뒤처져 걷던 그는 아버지의 보호자 였다. 줄곧 아버지의 사진을 찍더니 책자로 만들어 아버지께 선물할 계획이라해서 내 콧등이 시큰했다. 80대 할아버지와 함께 온 독일 여대생이 정성껏 할아버지를 모시는 모습은 아름다운 그림이었다.뒤따라 걸으며 그들의 정겨운 모습을 부러워했는데 저녁에 식당에서 다시 그들을 보아서 인사했다. 수줍은 손녀가 내 말을 통역해주자 할아버지는 굵게 패인 주름에 행복꽃을 활짝 피웠다. 캐나다에서 온 두 여자는 재미난 인연이었다.한 남자의 첫번째 부인과 두번째 부인이었다. 하나씩 낳은 딸들이 가까이 지내다보니 순례길을 함께 나설 정도로 친해졌다. 20년 전에 사귀었다가 최근에 다시 만나 결혼한 네델란드 부부는 질긴 인연을 감사하며 신혼여행으로 까미노를 결정했다.호주에서 온 부부는 협조가 좋았다. 잘 걷는 아내는 앞장서 떠나고 남편은 걷다가 지치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가서 아내와 합류했다.프로방스에서 온 프랑스 부부는 밀레의 ‘만종’을 상기시켰다.소박한 농민인 부부는 나에게 스페인의 농촌을 설명해줬다. 네델란드에 있는 집에서 25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3개월 반 걸어서 프랑스의 생장으로 와서 까미노를 계속하는 남자는 매일 블로그를 통해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신의 여정을 알렸다. 일본에서 온 코스케는 사람들이 쉽게 부르라고 이름을‘크리스’라 바꿨고 한국서 온 현정씨도‘소니아’란 이름을 지었다. 자신에게 주는 70세 생일선물로 까미노를 하는 오레곤주에서 온 캐런이나 막상 나이 60이 되니 겁이나서 아직 젊었음을 확인하러 까미노 한다는 벨지움 여자,대학입학 허락을 받지못해서 순례길 나선 독일 청년, 단순해지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트레킹에 좋은 코스 찾아온 한국 여인,그들에게 까미노는 평안과 휴식을 구하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천주교인이었지만 지금은 불교신자가 된 영국인 제리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바라는 것은 모든 종교는 같다는 확신이듯이 캐나다에서 온 아미쉬인 피터는 아미쉬교와 가톨릭교의 공통점을 찾았다. 나와 옷깃을 스친 많은 순례자들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성경구절을 철석같이 믿었다. 무슨 연유로 까미노를 하든 기도를 하며 자연속에서 영육을 새롭게 재충전 받는 과정에서 되돌아보고 심사숙고해서 스스로 모든 의문의 해답을 찾아갔다.

2015-11-17

(중앙논단) 이산가족 상봉 언제 빗장을 열 작정인가?

일본 등 인접국들의 고향을 향하는 귀성객을 모두 합치면 지주 촌의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고향 방문객들의 최대민족 대 이동이라 말할 수 있겠다. 명절 설날에는 먼저 조상중심, 제사중심의 명절에서 그 동안 만나보지 못한 친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임으로, 서로 모여 한 핏줄임을 확인하고 떡만두국을 나누며 건전한 덕담을 나누는 것이 한국인의 전통문화가 되었다. 필자는 한 세상에 태어나서 몇 번이나 미풍양속에서 설날을 맞이하고 있는지 그저 세월의 두께만 세어본다. 한 계절이 또 한 세월을 밀어내는 것을 앞으로 몃 번이나 더 맞이 할지 조금씩 어두어져 가는 여울을 금할 길 없다. 우리의 만남과 우정을 어느 곳에 있든지 새로운 추억으로 간직했으면 한다. //인생은 뿌리도 없이 태어나/길가에 먼지처럼 날여다니며/ 흐터져 바람 따라서 굴러다니니/ 인간은 원래가 무상한 몸인 것을/땅 위에 태어난 것은 모두가 형제이니 어찌 골육지친 만 사랑하라 하리오.// ( 도연명의 난시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구정을 며칠 앞두고 통일위원회 석상에서 “설 연후가 시작되는데 올해도 이산가족들이 북녘 땅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가슴 아픈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고 안타가운 심정을 드러냈다. 우리의 설은 넉넉한 어머니의 품만 같다. 어머니의 품속엔 미움과, 원한도, 긴장도 없다. 오로지 포근함과 반가움만 있을 뿐이다. 그저 군불이라도 따뜻하게 지핀 고향의 안방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또 한 해의 풍요를 빌고, 한 겨울 곡간에 쌓아놓은 알곡을 가지고 떡과 만두를 비롯해 각종 음식을 만들어 조상께 차례를 지내며, 웃어른에게 세배를 하는 날이 한민족의 특유한 설날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들은 지난 캐나다 50년의 한인 이민역사가 지나오는 동안 이민이라는 이질문화권에 들어와서 한갓 살아온 인생여정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고향을 상실한 반전(反轉)의 인생여정을 걸어왔다’ 말할 수 있겠다. 이민생활의 남은 흔적이 있다면 [물질적 욕망과 투쟁] 속에서 성함과 쇠함, 사랑과 미움, 웃음과 슬픔, 만남과 헤어짐, 성취와 상실 등 별 볼장 없는 ‘속물인간’으로 전락하여 깨어진 꿈을 안고 살아야 할 반전(反轉)의 인생여정(人生旅程)이 되고 말았다. 올해도 구정 설날을 맞아 많은 국민들은 제각기 조상께 차례를 지내려고 고향을 찾는데, 실향민들만이 오갈 곳이 없어 비애에 잠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찌 생각하면 캐나다 땅 광야에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저마다 고향을 상실한 순례자요 실향민이라 말할 수 있겠다. 2월19일은 민족 대명절이다. 설날을 맞이하여 중앙일보 발행인이 한식코리아 식당에서 토론토에 65세 이상 되는 한국노인들을 설날에 초대하여 떡국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이다. 지난 수년간 한인사회에서 그 많은 요식업을 하는 사람 중에 오랫동안 블루어 코리어타운데서 일번지 식당을 경영하는 장모씨가 남다른 노인공경에 마음을 지니고 매주 캐슬뷰양로원에 한국노인 어른들께 따끈한 국밥을 선사한 기억이 난다. 금번 민속의 명절 설날에는 한 신문인이 한식코리아 식당에 초대하여 모든 한국노인들에게 떡국을 대접한다는 일은 ‘떡국’ 한 그릇이 전부가 아니라고 본다. 그 떡국 속에는 한 신문 발행인이 지역사회 노인들을 향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과 효친의 미덕이 담긴 사랑의 음식이 아닐 수 없다. . 지치고 지친 노인들의 마음과 마음이 모두 한데 모여, 사실상의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을 마음껏 즐기며, 가슴 맞대고 우리 태여난 그 땅을 향한 그리움을 한껏 풀어 헤쳐보자. 합창단의 노래 속에 순례자들인 우리 실버들만이 쌓이고 쌓인 삶의 스트레스를 다 풀어버리고, 사물놀이의 신명 나는 노래가락에 올해의 장수무병도 함께 빌어보자. 노인들을 위한 지극정성이 남다른 중앙일보와 한식의 명문으로 태어난 ‘한식코리아’ 대식당에서 배푸는 사랑의 떡국잔치의 즐거움과 기쁨이 일찌감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노인들이여, /우리 모두가 그날 한번 주인공이 되어/ 다 함께 장고와 꽹과리를 치고/ 해금을 팅기면서/ 한마당 춤판으로 덩실덩실!/ 이제야 어깨춤으로 손에 손을 마주잡고 있구나,/ 손 마주잡고 있구나./ 세세년년(歲歲年年)! 윤방현 논설위원

2015-02-17

[이승남 칼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일본과 독일 선수들 과의 차이를 크게 벌렸다. 그리고 1위로 골인한 뒤 쓰러진 그는 ‘몬주익의 영웅’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사상 첫 마라톤 금메달이었다. 지금도 황영조 선수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몬주익 올림픽스타디움 앞 광장에 있다. 스페인에서 두번째로 큰도시인 바르셀로나는 뉴욕이나 리오데자네이루, 호주의 시드니처럼 유명한 관광지이다. 바르셀로나가 유명해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중해의 밝은 태양과 오랜 도시 역사의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 가우디, 피카소, 미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잘 보존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은 본격적으로 바르세로나 시내로 들어갔다. 이 도시의 관광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카탈루냐 광장에서부터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항구까지 이어지는 1.2㎞의 람부람스거리로 갔는데, 이곳에는 어김없이 거리의 예술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길은 바르세로나 시민들뿐만 아니라 해외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람부람스 거리를 걸어보지못한 사람은 바르세로나 낭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며, 세상 끝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이곳의 한 광장 오픈카페에서 유럽에서 제일 맛이 좋다는 커피를 마시며 시내를 구경하였다. 그 다음으로 바르세로나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가우디의 천재성이 응축된 ‘성가족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주변은 수많은 기념품 상가와 식당이 즐비한 도로에는 엄청난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거대한 옥수수 모양을 한 첨탑 4개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듯 한 독특한 모양의 이 건물은 최고 높이가 170m나 된다. 가우디는 건물의 정면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영광으로 장식했다. 약 120년 전에 착공했지만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또다른 가우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는 구엘공원이다. 어린이 테마파크에 들어온 것같은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곳으로, 일부는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 많다. 가우디가 우리에게 전해준 교훈은 평생 가슴이 이끄는 방향으로 비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완의 작품으로 신화가 된 가우디는 우리에게 여전히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완성은 없다. 삶은 미완성일 때 가장 아름답고 빛난다.’ 한 사람의 집념, 의지, 끈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존중되는 바르셀로나에는 앞으로도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찾아올 것이다. 오후 늦게 우리들을 10여 일간 휴식하며 즐겁게 보낼 바르세로나 항구에 정박중인 크루즈에 승선하였다. 필자는 내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떠나는 꿈을 꾸며 배 안의 방에서 아내와 함께 깊은 잠에 들었다.

2014-11-28

[열린 광장] 북녘 땅을 걷는 시인

순례의 길 그 대장정의 마무리를 위해 북한 땅을 걷고 있는 중이다. 북한 땅을 골고루 찾아가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이기에 정찬열 시인은 더욱 집착하더니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답지역을 걸어서 간다고 한다. 물론 북한사회의 특수성과 제한된 일정으로 때로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할 것이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개성에서 출발해 황해도와 평안도로 올라가며 정주 영변 강계를 거쳐 백두산에 이르고 거기서 함경도로 내려간다고 한다. 동해안을 따라서는 김책 신포 함흥 흥남을 들러 마식령과 금강산에 오르고 정주영씨의 고향 통천에도 가는 머나먼 길이다. 계획대로라면 북한 땅을 거의 일주(一周)하는 셈인데 작가나 통일운동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가보고 싶은 길이다. 북한 땅을 걸으면서 시인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10월의 아름다운 북녘 산천? 변화된 국토와 생경한 도시의 풍경? 다른 것 같기도 하나 다르지 않은 그곳 백성들의 모습?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기가 내 땅이고 내 민족임을 그리고 남북이 언젠가 하나가 되기로 꿈틀거리고 있을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담아오기 바란다. 지난 주말 10.4 선언 7주년을 맞았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8개항과 별개 2항 등의 10.4 선언이 이행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정해 본다. 서해평화협력지대가 만들어져 군사적 긴장이 줄어들고 남북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협력이 크게 발전되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어 통일 기반이 조성되고….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은 허망한 일이다. 지난달에 열린 한반도포럼학술대회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북핵 해결은 이제 단계적이며 장기적으로 다룰 일이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더 이상 미국과 중국의 역할에 기대할 수 없다면 남북한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5.24조치의 해제가 필수라고 말했다. 최근 북한은 활발한 대외활동에 나서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초청한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일본도 러시아도 바쁘다. 한국정부가 남의 인권문제나 이야기하면서 뒷짐만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찬열 시인이 북한 땅을 걷고 돌아 올 때쯤에는 그의 뜨거운 염원 따라 남북문제가 큰 변곡점을 돌고 있게 되기를 바란다.

2014-10-06

[기고] 북녘 땅을 걷고 있는 시인

순례의 길, 그 대장정의 마무리를 위해 북한 땅을 걷고 있는 중이다. 북한 땅을 골고루 찾아가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이기에 정찬열 시인은 더욱 집착하더니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 진 것이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답지역을 걸어서 간다고 한다. 물론 북한사회의 특수성과 제한된 일정으로 때로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할 것이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개성에서 출발해 황해도와 평안도로 올라가며 정주, 영변, 강계를 거쳐 백두산에 이르고 거기서 함경도로 내려간다고 한다. 동해안을 따라서는 김책, 신포, 함흥, 흥남을 들러 마식령과 금강산에 오르고 정주영씨의 고향 통천에도 가는 머나먼 길이다. 계획대로라면 북한 땅을 거의 일주하는 셈인데 작가나 통일운동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가보고 싶은 길이다. 북한 땅을 걸으면서 시인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10월의 아름다운 북녘 산천? 변화된 국토와 생경한 도시의 풍경? 다른 것 같기도 하나 다르지 않은 그곳 백성들의 모습?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기가 내 땅이고 내 민족임을, 그리고 남북이 언젠가 하나가 되기로 꿈틀거리고 있을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담아오기 바란다. 때마침 10·4 선언 7주년을 맞는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8개항과 별개 2항 등의 10·4 선언이 이행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정해 본다. 서해평화협력지대가 만들어져 군사적 긴장이 줄어들고, 남북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협력이 크게 발전되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어 통일 기반이 조성되고….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은 허망한 일이다. 과거를 그렇게 허송세월했으면서 박근혜 정부마저 전혀 요지부동인데 문제가 있다.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빙빙 돌아 '창의적이며 다원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신뢰프로세스'나 '통일대박론'만큼 무책임하고 애매모호한 수사다. 지난 달에 있었던 한반도 포럼 학술대회에서 비교적 정확한 진단이 나왔다. 포럼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북핵 해결은 이제 단계적이며 장기적으로 다룰 일이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더 이상 미국과 중국의 역할에 기대할 수 없다면 남북한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5·24조치의 해제가 필수라고 말했다. 최근 북한은 활발한 대외활동에 나서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초청한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일본도 러시아도 바쁘다. 한국정부가 남의 인권문제나 이야기하면서 뒷짐만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찬열 시인이 북한 땅을 걷고 돌아 올 때쯤에는 그의 뜨거운 염원따라 남북문제가 큰 변곡점을 돌고 있게 되기를 바란다.

2014-10-02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당선작] '사건'의 문학, 성찰적 글쓰기

순례를 끝내고도, 몇 차례 현관문이 퉁탕거린 후에야 겨우 바람 분 뒷날처럼 집안이 조용해진다(16쪽). 아내가 전면에 등장하거나 화자에게 응대하는 직접적 묘사가 없는데도 화자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아내의 존재는 크다. 화자는 옷 시중을 해달라거나 차 시동을 걸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짐짓 불평하고 있지만 종종대며 집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내를 은근한 사랑을 담아 묘사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외출준비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를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에 인용한 글 서두의 아내에 대한 묘사는 우연이 아니다. 아내는 마치 새처럼 움직인다. 새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 “딸각거리고” “종종”, “퉁탕”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아내에 대한 이러한 청각적 묘사는 두 번째 일화로 연결된다. 아내가 외출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토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아내가 또 칠칠맞게 뭔가를 빠트린 것으로 넘겨짚는다. 부주의한 아내가 못마땅해서 아내를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화자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주려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그곳에 아내는 없고, 새 한 마리가 부엌창문에 붙어서 “푸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실바닥에도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화자는 두 마리의 새를 보면서 여전히 아내 탓을 한다. 정신없이 나가다 문을 열어놓았다고 넘겨짚는다. 아내는 종종 뒷문을 닫는 것을 잊곤 했다. 그때마다 벌새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고, 파섬(possum)이 들어왔을 때는 아내가 혼절까지 하지 않았던가. 화자는 지난 일을 들먹이면서까지 아내를 질책한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이었다. 나는 거실의 소파를 돌아서 현관문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제 어찌 된 영문일까?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새가 들어 왔을 만한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내 정신을 의심하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고,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18쪽). 마치 환상지대(twilight zone)로 들어간 듯하다. 눈을 비벼 볼 정도로 믿기 어려운 상황을 주체가 맞닥뜨린 것이다. 어떤 대상이 현실구조 바깥에서 들어와 글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주체가 타자와 마주치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처럼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지면서 현실적 시공간을 낯설게 만든다. 화자는 이 환상지대를 통과하면서 성찰적 자아로 변해간다. 아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심리적 착각과 달리 여기서 화자는 물리적 ‘착각’을 경험한다. 화자의 성찰은 이 착각에서 벗어나 “어쨌든 새를 먼저 집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는 현실적 판단에 출발한다. 거실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를 조심스레 손에 쥐어 들며 화자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 상황에서 ‘절대자’인 화자의 손에 잡힌 미약한 존재인 새는 화자가 안전하게 날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새는 마치 절대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과도 같다. 화자는 한때 절대자의 뜻을 모르고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새에게 압박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화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사색한다. 화자는 새를 동쪽으로 날려주고 나서 두 번째 새를 잡으러 들어온다. 종작없이 날라 다니는 새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자는 허둥댄다. 거실에서 이리저리 나는 통에 몇 번이나 유리창문을 들이받았고 가구 위의 작은 액자들을 넘어뜨렸다. 새의 소란도 파업 궐기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작은 흔들림 후에 큰 흔들림이 뒤따르는 지진처럼 여기저기서 불쑥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19쪽). 새를 잡으러 여기저기 부딪히고 소란을 떠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연쇄반응 같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화자는 멈춰서 상황파악을 한다. 알고 보니 파이어프레스 안에 들어있던 새들의 움직임이었다. 화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새가 집안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여덟 마리의 새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와 푸닥거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씩 잡기가 어려워져 뜰채로 한 마리씩 잡아 모두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날려 보낸다. 길 잃지 않고 서로 잘 만나서 함께 여행을 떠나라는 마음씀씀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일화의 끝이다. 새들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미스터리는 풀린 셈이다. 적어도 현실적 설명은 가능해졌다. 하지만, 비현실적 환상의 경험은 여전히 남아있다. 처음 새의 출현을 목격하던 순간부터 여러 마리의 새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를 화자의 심리적 상태의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텅 빈 집에 남게 된 화자가 이유 없이 아내를 트집 잡았던 마음이 새들의 출현으로 출렁인다. 화자의 사유는 아내에 대한 속 좁은 착각에서 비롯되어 새들이 불러일으킨 ‘착각(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고 나면, 수필 전체를 두고 볼 때 얼핏 사족처럼 보이는 한 대목에 이르러 환경론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점 투기대상이 되어 사라져가는 자연과 미국 초기의 식민 역사를 아우르면서(19-20쪽) 피와 편견으로 물든 미국 땅의 역사로 종횡무진 확대된다. 새들의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부딪침이 이끄는 대로 붓을 집어 들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나들며 무심한 듯 글을 써감으로써 김광섭의 ‘무형식의 형식’을 획득한 것이다. 새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다. 그놈들이 파이어프레이스 안의 그을음을 풀무처럼 날갯짓으로 마구 불어냈고, 또 몸에 묻혀서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에 거실바닥과 창문틀엔 새까맣게 그을음이 앉았고 매일 아내가 먼지를 터는 아이보리색 가죽소파 역시 온통 그을음을 뒤집어썼다(21쪽). 이제 사태는 바뀌어 화자가 아내에게 잘못을 저지른 처지가 된다. 이를 화자는 모두 순전한 자신의 착각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가 느리고 잘 잊는다는 선입견과 새들이 들어온 것을 몰라 신속히 처리 못한 자신의 탓이다. 화자의 깨달음은 개발주의자나 백인정복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도 상통한다. 모두 선입견과 편견, 상대방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해악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는 이런 사색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 고집스런 착각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그 착각이란 것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라서는 신속히 날려 보낼 수 있는 가변의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은가. 그 기미가 언뜻 보이기만 하면 나는 지체 없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 줄 테다. 후회는 행위에 매여서 끈처럼 뒤따라 올 텐데 그것에 앞서면 모두가 편안할 테니 말이다(21쪽). 3. 정옥희의「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5) 아직도 어둠이 검북청색으로 어른거리고 있는 새벽에 “물기 어린 공기”를 느끼며 화자는 산책을 시작한다. 걷기와 여행은 재미한국수필의 단골소재이다. 이미 고향을 떠나온 주체는 반복해서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새로 정착한 곳은 삶의 터전일지언정 고향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돌아갈 고향은 없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주체는 낯선 곳을 향해 정처없이 떠나고 어디에도 없는 마음의 고향을 찾으려한다. 정주하지 못하는 영혼이 생활에 묶여 떠나지 못할 땐 낯익은 거리로 나간다. 이 글에서 화자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산책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마치 산책이 일이나 의무인 듯이 말하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대한 묘사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산책이 어떤 존재의 부름에 부응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검북청색 어두움이 서성이는 신새벽에 문을 밀고 밖에 나왔다. 물기 어린 공기가 뺨에 와 닿는다. 잔디밭으로 내려섰다. 젖은 양탄자를 밟은 양 발바닥이 포근하게 물이 차오른다. 아침 이슬이 흠뻑 내려와 주었는가 보다. 싼페드로(San Pedro) 항구 쪽이 수줍은 복숭앗빛으로 물드는가 했더니 차차 오래가 붉은 색으로 넓게 번져나간다. 바야흐로 여명이 시작되는 참이다(29쪽). 해 뜨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수줍은” 복숭아 빛이 어떤 색인지 궁금해진다. 당장에라도 여명의 순간을 목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의 여명은 싼페드로 항구라는 특정 지명의 것이다. 매일 아침 세계 곳곳에서 여명이 시작되지만, 이 글에선 화자가 딛고 선 땅의 여명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물기 어린 공기”나 “포근하게 차오른다”는 표현은 구체적 장소의 시간적 변화, 자연적 변화를 생생하게 그린다. 이 지방색 짙은 여명의 순간은 이 글에 고유한 정취를 부여해준다. 흔히 수필에서 등장하는 산책하는 화자의 시선과 상념이 자신의 감흥이나 감정에 빠져있을 때 풍경이나 대상은 구체성이나 고유성을 잃게 된다. 정옥희의 글에선 풍경이 화자를 부른다. 화자는 여명의 새벽에 부딪쳐서 산책을 나간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주섬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운동화도 찾아 신었다. 집 둘레를 한바퀴 걸을 참이었다. 엊그제 주치의 오박사는 나에게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으니 걸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찰 시 매듭이 굵은 손을 내밀며 주춤거리자 젊은 의사는 서슴없이 말했다. “이 손은 자랑스러운 손이지 부끄러운 손은 아니지 않습니까?” 했다. 요즘의 젊은이 중에도 저렇게 사려 깊은 말을 할 줄 아는 이도 있구나 싶어 가상하게 느껴졌다(30쪽). 노동으로 굵어진 손을 내미는데 주춤하는 화자에게 자랑스러운 손이라고 말해준 주치의를 고마워한다. 여명의 새벽이 산책의 흥을 돋우고 그 흥이 주치의를 떠올리게 되는 과정은 맺힌 데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런 자유연상은 아이비(Ivy)줄기가 너무 변화가 없어서 싫다(30쪽)는 개인적 감정표현과 화자를 졸졸 쫓아오던 집개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 아이비와 개에 관련된 대목을 꼼꼼히 살펴보면 간단치 않은 복선이 깔려있다. 가령 아이비가 “게으른 사람의 풀꽃”이라 싫다고 하는 대목은 세상의 변화에 뒤쳐져 있는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다. 이어지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해가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화자는 변화에 사려 깊게 반응한다. 개를 쫓는 대목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으로 시작한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서걱거리며 누군가가 내 뒤를 밟는 것 같이 느껴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선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집의 점박이 작은 개였다. (...) 그렇게 개를 쫓느라고 나는 집까지 되돌아와야만 했다(30쪽). 여명이 깔린, 아직 어둑한 시간 인적 드문 길에서 산책은 불안하다. 뒤따라오는 것이 개라고 확인했을 때 두려움은 안도감으로 바뀌지만, 한적한 교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화자는 산책길에서 두어 번 사람들과 마주치고 남의 집 개도 보게 된다. 이런 대목들은 짐짓 안정된 중산층 교외 주택가의 흔한 정경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과 악, 행과 불행, 안정과 불안, 권태와 긴장 등의 이원적 가치들에 대한 화자의 예민한 시각이 스며있다. 화자는 산책 중에 두 번 ‘부딪친다.’ 한번은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뒤에서 걸어와 화자가 자리를 내어준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그들이 꺾어 돌아간 산책로를 들여다보니 두 남자가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윌로우 스프링 트레일(Willow Spring Trail) 말길로 꺾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늘 이 길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서워서 용기가 나지 않던 곳이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두 젊은이가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으며 내 인생은 늘 제자리걸음으로 살아온 것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많이 변해 있는 것을. 누구나가 스트릭(Strict)하다고 공인하는 이 산 속 오지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이미 들어와 있지 아니한가(32쪽). 집에서 나와 보니 많이 변한 세상이 하나씩 나타난다. 화자에 의하면 “스트릭(strict)” 한 “산속 오지”가 자신의 생활터전인데 그곳까지 밀고 들어온 변화의 물결-- 이 경우엔 동성애자 커플 -- 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기에는 넉넉하고 유연한 시각이 엿보인다. 두 남자가 사라진 산책로는 화자가 늘 가보고 싶었으나 무서워서 용기가 없어 가지 못했던 곳이다. 그곳은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섭지만 들어가 보면 어떤 변화를 경험할 만한 곳이다. 마치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에서 프로스트의 시적 화자와 달리 이 수필의 화자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두 남자에게 그 장소를 조용히 내어주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그 길은 손을 잡은 두 남자들을 위한 것이지 화자의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두 손을 잡은 남자들이 걸어 들어간 그곳은 화자에겐 금지되지 않은 금지구역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부딪침은 오르막길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한 여인이다. 처음 보기에 그녀는 “히스패닉 같기도 하고 동양계 같기도” 하다. 여인은 자신을 남미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계 소설가로 소개했다. 화자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와 마주할 때 남녀의 성과 인종에 근거한 구별 짓기가 몸에 밴 사람이다. 이 글에서 화자는 두 차례에 걸쳐 변해가는 세상의 타자들에 대한 무의식적 선입견을 드러낸다. 선입견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주저 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리걸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게다가 이 두 번째 일화에서는 중국계 여성과 화자 사이에 발견된 공통 이해관계 -- 작가라는 사실과 일본을 싫어한다는 점--를 찾아서 구별 짓기에 따르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한편 화자는 변해가는 세상과 부딪칠 때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쌍꺼풀 수술을 권했던 안과의사가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 눈이 시려오고 눈물이 자꾸 나오지만 화자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쌍꺼풀수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타협 불가능한 고정관념, 혹은 화자가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기 마련이다. 쌍꺼풀수술은 절대 못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난 화자는 곧이어 땀을 닦으려고 무심코 옷섶 자락을 들어 올린다. 배꼽이 보일까 걱정되지만 이 나이에 어떠랴 하면서 자신이 점점 능글맞아진다고 한다(33쪽). 김광섭은 수필이 단지 기록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머”와 “위트”가 필요하다고 했다.6) 화자가 자신을 ‘능글맞은 여인’이라 부르는 대목은 유머를 적절히 가미해 자신의 고정관념을 고집하면서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어가는 화자의 유연한 태도를 밋밋하지 않게 전달해준다. 정옥희는 노년의 처지가 손을 내보이기 어려울 만큼 부끄럽고 책을 읽기 힘들만큼 불편하며 콜레스테롤 걱정으로 억지 산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능청스럽게 삶을 관조하고 살면서 전전긍긍했던 터부와 금기도 가끔은 슬쩍 넘길 수 있는 성숙한 주체의 위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의 화자는 늙어가는 자신과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사이의 괴리와 불협화음을 긴장과 여유로 조정해간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이기 -- 이는 타협이 아니다. 포기나 굴복도 아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손마디가 굵어지고 눈꺼풀이 내려앉는 육체적 노쇠에도 화자는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훌쩍 넘지 않으면서도 서서히 시선을 밖으로 향한다. 이런 화자의 태도는 마지막에 카터대통령처럼 환하게 웃는 장면에 담겨있다. 앞뜰에 닿았을 때는 내 입에서 단 김이 뿜어져 나왔다. 두 손녀가 손나발을 불고 있었다. “하알머니이...”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진 나는 카터대통령의 웃음스타일로 앞니 열두 개가 다 보이도록 웃는다.(33쪽)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안개는 걷혔다. 새벽 안개가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터널 같은 것이라면 산책을 마친 아침 10시는 그녀가 세상과 부딪치고 돌아온 환한 시간이다. 4. ‘사건’으로서의 수필 쓰기 수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 김광섭, 「수필문학소고」(인용자강조) 이 두 수필은 재미한국수필에 기대되는 천편일률적인 소재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감, 향수 어린 추억 혹은 이민생활의 고된 노동과 박탈감 등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내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정옥희의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보자. 정옥희는 자신의 심산했던 이민생활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하지 않는다. 다만, 굵은 손가락 마디가 부끄러워 의사에게조차 보여주기 싫어하는 마음의 표현을 통해 그녀의 고되었던 생활을 독자가 느끼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박봉진의 글에는 아이들이 타 도시로 떠나 부부만 남은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새를 잡느라 분주한 한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하는 독자는 어느새 그 빈 공간의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정옥희와 박봉진의 수필집에 수록된 다른 글들에는 물론 고향의 이야기, 흔한 이민생활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필집을 다 읽은 독자라면 두 수필가가 다루는 소재의 폭과 깊이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수필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도 이 두 편의 수필에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것들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 수필이 우리의 마음에 깊게 울림을 준다. 행간을 통해 우러나오는 의미는 수필가의 필력에 달려있다. 두 수필가는 주제를 내세우는 대신 대상과의 부딪침이라는 사건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전달한다. 사연은 달라도 각자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 미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온 이민 1세대 정옥희와 박봉진의 글은 이미 갈등과 상처를 겪어 지나온, 세월의 풍파를 거쳐 온 사람들의 표면적으로 정적인 삶에도 여전히 부딪침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을 이룬 인간의 삶에도 부딪침은 일어난다. 사건은 중단되지 않는다. 두 수필작가는 안정된 삶의 표면장막을 찢고 파이어프레스를 통해 집안으로 날아드는 새들과 평안한 교외의 아침 산책길에 의도하지 않게 목격하는 색다른 정체성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섬세한 감수성과 성찰적 사유로 이민주체의 문학적 성취를 한 단계 높여주었다. 이로써 이 두 수필은 ‘사건’이 되었다. 1) ‘부딪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또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힘있게 닿아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부딪다’의 능동적 형태이다. ‘부딪히다’는 이와 달리 수동적 형태이다. 주어의 행위에 따라 능동인지 수동인지 구별해서 사용된다. 김광섭의 글에서 능동적 의미의 ‘부딪치다’가 사용된 것은 따라서 수필작법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2) ‘사건’의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발전시켰다. Alain Badiou, Being and Event (Continum: 2005). 3) 주체’와 ‘타자’의 이론적 개념에 대한 대략적 이해는 현대철학, 특히 정신분석이론에 따른 것이다. 4) 박봉진 수필집, 『언제나 내 마음 바다에 살아』 (2004: 선우미디어)에 수록됨. 이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5) 정옥희 수필집, 『로우링힐스의 여인들』 (2000: 동화서적)에 수록됨. 이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6) 직접 인용하면,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素性)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성(天性)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상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김광섭, 「수필문학소고」) 라고 했다. 수필작가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수상소감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독자가 찾지 않는 글은 메아리를 동반하지 않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읽는 사람도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수필평론이라는 낯선 곳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재미 원로수필가 두 분의 수필을 읽으며 보낸 시간은 제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을 이루어 아직도 흐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도 그 물결이 닿기를 바랍니다. 제 평론을 읽은 독자가 이 두 작가의 글을 찾아 읽게 되면 좋겠습니다. 재미한국수필을 오랫동안 일구어 온 많은 작가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척박한 이민생활에서 ‘스스로 붓을 들고’ 글을 써오신 분들이 있어 제 글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4-05-20

[릴레이 목회칼럼]흩어진 나그네

일본? 한국에? 우리 한국은 예로부터 단일민족임을 자랑 해 왔었는데 2007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이 너무 단일민족임을 강조하는 것은 인종차별 우려가 있으므로 그것을 너무 앞세우지 말고 다른 인종 국가 출신을 품어야 한다'고 한국정부에 권고한 적이 있었다. 건전한 민족주의는 옳지만 배타적 민족주의는 매우 위험하며 인류 역사에 큰 해악을 끼쳐 왔다. 성경 신명기 26장 5절에 보면 유대민족 지도자 모세는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팔레스타인에서 살다가 애굽에 내려간 소수 이민자'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애굽 사람들로부터 학대받고 중노동으로 착취당하며 겪은 이민생활의 아픔을 말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Exodus)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미국이 이만큼이나 인종적 관용성이 많은 이유는 이민의 나라 나그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이민에 대해 완전히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한 구석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미국 경제가 좀 어려워질 때면 반이민 감정이 증가하기도 한다. 고로 이민생활이라는 것은 항상 고국의 집을 떠난 나그네의 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대중가요 속에도 나그네 설움을 주제로 한 노래가 많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하며 '하숙생' 인생을 노래했던 최희준 '타향살이 몇해 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했던 고복수의 노래 등이 대중들의 마음에 오랜동안 어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는 '흩어진 나그네'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는 성경 원어인 헬라어로 '디아스포라'이다. 영어성경(NASB)은 이를 'Reside as Aliens' 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미국 영주권(Alien Resident)에 표기된 말과 같다. 즉 미국 영주권자도 결국 나그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당시 베드로 사도는 흩어진 나그네 곧 이민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편지를 썼다. 그것이 베드로전서이다.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점령하자 유대인들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등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나그네 처럼 살았다. 그때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그들은 그냥 나그네들이 아니었다. 예수를 믿는 나그네들 이었다. 이들은 신앙때문에 폭군 네로의 박해를 받아 뿔뿔이 흩어져 어려움 속에 살았다. 그 고난 속에서도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했던 금보다 더 귀한 믿음"(7절)을 가졌던 이민자들이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크게 칭찬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시련당할 때 아프지 않겠는가? 박해때문에 흩어진 당시의 성도들도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산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승리 하였다. 성경에서 '디아스포라'는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흩어진 유대인들이요 둘째는 영혼의 본향인 천국을 향해 가면서 이 세상에서 잠시 나그네와 같이 사는 순례자(Pilgrim)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빌 3장 20절)고 했다. 우리도 육적으로 모국을 떠나 미국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이다. 영적으로는 이 세상에 잠시 살며 천국 본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순례자들이다. 나그네의 특징은 늘 고향 소식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해외 동포들이 본국 뉴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천국을 본향으로 삼는 신자들이 천국소식을 사모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천국에 대한 이런 강한 믿음과 소망이 있을 때 이민생활을 개척해 가면서 '흩어진 나그네'로서 겪는 그 어떤 역경도 능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황현조 커네티컷비전한인교회 담임목사

2014-02-18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