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내 몸엔 랭어의 피가 흐른다, 창업도 연구의 연장선”
버트 랭어의 ‘피’가 흐른다. 코로나19 백신을 만든 모더나의 공동창립자인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말이다. 그는 바이오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기도 하지만, 제자들과 함께 평생 40개가 넘는 스타트업을 세운 연쇄 창업가로도 유명하다. 이해신 교수는 KAIST 생명과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의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MIT로 넘어가 랭어 교수 아래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이후 귀국해 KAIST 교수로 부임한 지 1년 만인 2010년 이노테라피를, 2014년엔 글루진테라퓨틱스, 2021년 모다모다, 2023년 폴리페놀팩토리를 창업했다. 이들의 주력 제품은 지혈제와 유전자치료제, 염색효과 샴푸, 탈모방지 샴푸 등으로 각각 다르지만, 모두 이 교수의 전공인 폴리페놀(Polyphenol)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다모다 샴푸는 출시 첫 해 5개월 만에 100만 개를 판매해 매출 600억원의 기록을 올렸다. 폴리페놀팩토리 그래비티 샴푸 역시 지난해 4월 출시 이후 수차례 완판으로 품절사태까지 겪으면서 연말까지 43만 개가 판매돼 약 100억원의 매출을 올려 화제가 됐다. 지난해 9월엔 폴리페놀팩토리의 성장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효성그룹의 전략적 투자(지분 28%)를 받았다. 이쯤 되면 창업에만 관심 쏟는 학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교수는 폴리페놀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논문 실적 순으로 KAIST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수이기도 하다. 2007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폴리페놀 관련 논문(홍합 접착을 응용한 표면화학 사례)은 최근까지 1만회 이상 인용됐다. 2018년엔 관련 연구로 피인용 세계 1% 연구자(HCR·2018년)에 오르기도 했다. 이 교수의 네 번째 스타트업인 폴리페놀팩토리가 있는 대전 KAIST 문지캠퍼스에서 그의 창업 이야기를 들었다. 교수 2년 차부터 연쇄 창업 MIT 로버트 랭어가 지도교수 폴리페놀 연구로 세계적 석학 염색효과, 탈모방지 샴푸 히트 기능성 샴푸로 연이은 화제 Q : 지난번엔 갈변을 이용한 염색 효과, 이번엔 탈모 방지. 창업할 때마다 화제다. A : “처음부터 ‘탈모 방지’ 효과를 노리고 제품을 기획한 건 아니었다. ‘폴리페놀’ 접착·코팅 기술을 이용해 모발의 강도와 볼륨감을 높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 그래비티 샴푸를 만들었다. 그런데 소비자들의 리뷰는 조금 달랐다. “샤워할 때 욕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안 남는다. 머리가 훨씬 덜 빠진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추가 연구 결과, 천연 폴리페놀의 일종인 탄닌산이 탈모를 완화하는 ‘접착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볼륨감뿐 아니라 머리카락이 덜 끊어지고, 모발 탈락도 줄어들었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머티리얼 인터페이스’ 온라인판에 최근 실렸다.” (2021년 기술출자 방식으로 공동 창업해 출시한 모다모다 샴푸는 모발에 코팅된 폴리페놀이 산소와 만나 갈변하는 것을 이용해 머리를 감기만 해도 염색 효과를 볼 수 있는 제품이었다. 출시 초기 TV홈쇼핑 등에서 연이은 완판 행진을 벌이며 화제를 모았으나, 이후 샴푸 성분을 두고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유해성 논란을 벌이면서 매출이 급락하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경영상의 악화로 인한 여러 문제와 사업 방향성의 이견으로 이 교수는 모다모다와 결별해야 했다.) ☞폴리페놀(Polyphenol)=식물에 널리 분포하는 약 1000가지 정도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분자를 총칭하는 물질이다. 활성산소를 잡아주는 항산화 기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특유의 접착·코팅력, 단백질을 포함한 고분자와의 결합력 등이 최근 널리 응용되고 있다. 폴리페놀로 네 차례 연쇄 창업 Q : 다시 또 폴리페놀로 창업했는데. A : “폴리페놀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폴리페놀팩토리’란 이름의 회사를 2023년 8월 직접 만들었다. 탈모를 막아주는 그래비티 샴푸가 첫 제품이다. 지난해 연말까지 네이버 등 국내 온라인 쇼핑을 통해 약 1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올리브영·이마트 등 또 다른 국내 판매망에 이미 출시했고, 다음 달부터는 미국 아마존에도 입점한다. 현재도 주문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연말까지 700억원의 매출을 전망하고 있다. 샴푸 외에도 인체에 무해한 미용 접착제와 지혈제, 다이어트를 위한 장(腸) 코팅 등도 연구·개발 중인 파이프라인이다.” Q : 창업 1년 만에 대기업 투자를 유치했는데. A : “뉴스를 접한 효성그룹 측에서 화학·소재 분야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 투자(SI)를 했다. 현재 효성이 28% 정도 지분을 갖고 있다. 효성의 참여 덕분에 생산 자동화나 마케팅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벤처캐피털(VC) 같은 기관투자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매출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현재로선 더이상 투자 유치 계획이 없다.” “세상에 실질적 변화 가져와라” Q : KAIST 교수 부임 1년 뒤부터 ‘연쇄창업’을 해왔다. 왜인가. A : “MIT에서 박사후연구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로버트 랭어 교수의 영향이 정말 컸다. 그는 연구자로서도 세계적인 석학이지만, ‘21세기의 에디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창업가로서 2조원 이상의 투자유치에 성공한 스타트업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랭어 교수는 제자들에게 ‘연구로 끝내지 말고, 세상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와라’고 늘 강조한다. 연구실 아이디어를 실생활에서 검증하고, 빠르게 피드백을 받아 개선하는 걸 좋아한다. 그 영향이 지금 제 창업 행보로 이어진 셈이다. 물론 폴리페놀이라는 연구 분야 자체가 의학, 유전자치료, 소비재까지 워낙 적용 범위가 넓다 보니, 제품화에 일찍 눈을 뜬 측면도 있다.” Q : 교육과 연구, 경영을 어떻게 병행하나. A : “연구와 교육이 우선이긴 하지만, 창업 현장도 똑같이 내 연구의 연장선상이다. 시간 관리는 주말이나 저녁에 회의·기획 업무를 하는 식으로 해결하고, 전문 경영인을 둬 실무를 맡기는 구조를 만들었다. KAIST 내부 지원체계도 도움이 된다. 교수창업을 장려하고 연구 일정과 기업 운영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연구실과 창업현장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시너지를 내는 게 오히려 재미있다.” ◆이해신=1973년생. KAIST 생명과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의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2009년 KAIST 교수에 임용됐다. 2018년 세계 상위 1% 논문 피인용 학자(HCR)로 선정됐고, 2019년 석좌교수가 됐다. 이광형 KAIST 총장 KAIST는 2022년 과학기술원법 개정을 통해 교육과 연구라는 기존 대학의 역할에 창업을 더했다. 이해신 교수는 KAIST가 지향하는 연구개발의 기술사업화에 가장 부합하는 롤모델 연구자 겸 교수라 할 수 있다. 그의 연구분야가 폴리페놀이라는 물질을 연구하는 기초학문에 해당하지만, 이 교수는 연쇄창업을 통해 실생활 속 다양한 쓰임새를 찾아 사업화까지 끌어냈다. 이건종 효성화학 대표 최고경영자(CEO)가 폴리페놀의 특성을 연구한 최고 전문가로서,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제품개발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했다. 또한 창업멤버들이 과거 기술상용화 개발과 마케팅을 통해 성공적인 판매를 이끌어낸 경험이 있다는 점도 투자를 결정하게 된 주요 이유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