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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성 린 양, 사카고 바이올린 콩쿨 수상

시카고 바이올린 콩쿨(Chicago Violin Competition) 영 아티스트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번 대회는 2023년 대회가 연기되면서 훨씬 더 많은 지원자가 몰려 경쟁이 치열했던 콩쿨로 매년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리는 명망 있는 대회다.     린 양은 한국에서 한국예술영재원과 예원학교를 다니던 중 도미해, 2022년부터 명문 디어필드아카데미와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해 학업과 음악을 병행하고 있다. 린 양은 어릴 시절부터 한국에서 부암·성정·음연·스트라드콩쿨에서 1등, 음악 춘추·소년 한국 일보·KCO 등 다수의 콩쿨에서 입상했다.     또 레오니드코간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수상, 프랑스 국제 바이올린 콩쿨 1등, 줄리아드 실내악 팀 콩쿨 우승 등 세계 각국에서 열린 콩쿨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했다.     린 양은 음악만 하는 연주자가 아닌 더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공부와 음악을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매년 필리핀의 낙후된 지역에 아이들을 위해 바이올린 기부와 연주회를 열고, 또 전쟁 피해로 힘든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위해 기부금을 모아 전달하고 있다.     린 양은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종원 기자성 린 Lynn Sung 시카고 바이올린 콩쿨 Chicago Violin Competition 성 린 영 아티스트 부문 수상 디어필드 아카데미 한인 성 린 양 사카고 바이올린 콩쿨 수상

2025-02-03

[기획 진단] 애틀랜타 한인 언론 이대로 좋은가

한국일보 등 3개의 일간지와 라디오코리아, KTN 등의 방송 매체, 그리고 기독교 계열 주간지 및 인터넷 매체들이 그것이다. 이들 언론사 중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조직과 규모도 웬만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역시 신문과 방송 등 전통 매체들이다. 일간 신문은 중앙일보를 비롯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3개가 있다. LA나 뉴욕 등 대부분의 한인 밀집지역에서는 중앙일보와 한국일보가 양대 메이저 신문으로 자리 잡고 있는 데 비해 애틀랜타에서는 조선일보까지 합해 3개의 일간지가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애틀랜타 중앙일보(발행인 이종호)는 한국 중앙일보의 미주 직영 지사 중 하나다. 과거 LA, 뉴욕, 워싱턴DC, 시카고 등이 모두 직영이었지만 지금은 LA와 애틀랜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프랜차이즈로 전환되어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애틀랜타 중앙일보는 2007년 창간되었으며 매일 3~6개 섹션 48~84면씩 발행하고 있다. 조간. 앨라배마 독자들을 위해 앨라배마 중앙을 별도로 발행, 매주 금요일 몽고메리 등지에 배포하고 있다. 그밖에 전자신문과 뉴스레터 ‘미리 보는 중앙일보’ 등을 이메일을 통해 매일 발송하고 있다. 조선일보(발행인 이국진)는 애틀랜타의 유일한 석간 신문으로 다음 날짜 신문을 하루 전날 발행, 오후에 배포하고 있다. 다른 일간지보다 신문 판형이 조금 더 크다는 게 특징. 주말판으로 ‘위크엔드 조선’을 별도 발행해 ‘주간동남부’와 함께 앨라배마 등지에 따로 배포한다. 한국일보(발행인 조미정)는 애틀랜타에선 가장 오래된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조간. 1974년 애틀랜타 한국일보 지국으로 시작했으며 몇 번의 손 바뀜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말판으로 주간한국을 별도 발행, 앨라배마 등지에 배포하고 있다. #.애틀랜타 한인 신문이 타 지역과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모든 신문이 무가지라는 점이다. 이는 독자 입장에선 좋을 수 있지만 그만큼 양질의 책임 있는 기사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신문사 입장에서도 ‘공짜 신문’이라는 함정에 빠져 언론으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에 충실하기보다는 안일과 타성에 빠질 위험도 있다. 참고로 LA나 뉴욕의 일간지는 연 200~250불 구독료를 내야 볼 수 있다. 둘째는 과당경쟁에 따른 저렴한 광고비다. 언론사도 회사인 만큼 영업 매출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주 한인 미디어 시장에서 애틀랜타만큼 광고비가 싼 곳은 거의 없다. LA는 말할 것도 없고 뉴욕이나 인근 텍사스 댈러스 등에 비해서도 애틀랜타 미디어 시장 광고비는 거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이렇게 낮은 광고비는 결국 경영 압박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매체 품질 저하로 귀결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는 것이 애틀랜타 미디어 시장 환경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종이신문 환경이 이렇다 보니 디지털이나 인터넷 쪽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진작부터 있어왔다. 최근 몇 년 새 유튜브나 SNS 등을 활용한 인터넷 매체가 잇따라 생겨나고 있는 것은 그 연장 선상일 것이다. 신생 인터넷 매체들은 기자 한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창간과 동시에 디지털 특유의 속보성과 커뮤니티 친화적 기사를 바탕으로 인지도를 빠르게 높여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취재나 왜곡 보도, 과도한 상업성의 노출로 잡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폭넓게 반영하고 조명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애틀랜타K(대표기자 이상연) 같은 인터넷 매체의 적극적인 활동은 애틀랜타 한인 언론의 역할과 사명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메기 역할도 하고있다. 언론사 간 취재 경쟁, 속보 경쟁, 디지털 분야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고 동시에 정확한 보도, 객관적 보도에 대한 독자의 기대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디어는 결국 콘텐츠 싸움인 만큼 인터넷 매체는 본사와 지사로 연결된 신문이나 방송 등 전통 매체에 맞서 힘든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있다. 또 인력과 조직의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도 안고 있어 인터넷 매체의 지속적인 성장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글·사진= 권순우 기자

2021-07-15

[밖에서 본 시카고, 시카고 사람들] 한 번도 못 가본 도시

시카고 베어스 경기를 자주 보며 NFL 덕후가 되기도 했다. 그때 시카고라는 도시를 정서적으로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이후 직업상 미국 프로스포츠를 자주 접하면서 시카고에 흠뻑 빠진 적도 많았다. 특히 마이클 조던, 스코티 피펜이 뛰던 NBA 불스의 경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드폴대 출신이 주축인 록그룹 ‘시카고’도 기억저장고에 아직 남아있다. 최루가스가 캠퍼스를 뒤덮던 대학 시절 아메리칸 팝은 가끔 피난처였다. 결은 다르지만 ‘블랙사바스’, ‘스콜피온스’ 등과 함께 ‘시카고’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특히 8인조 그룹이 “Everybody needs a little time away I heard her say, from each other”로 시작하는 ‘Hard to say I’m sorry’는 감상에 젖게 했다. 뿐만 아니라 ‘If you leave me now’도 애간장을 녹였던 곡 중 하나다. 특히 “And if you leave now, you’ll take away the very heart of me. Ooohh no Baby please don’t go~~~” 부분에서는 마치 내 사랑이 떠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가끔 스포츠나 예술 같은 형식이, 다른 언어들이 어떤 도시를 알게 되는데 무엇보다 큰 힘을 발휘하곤 한다. CNN에 ‘Dynamic Korea’를 수없이 광고하는 것보다 방탄소년단(BTS)이 Korea의 이미지를 수 십 배 업그레이드 하고 있듯이 말이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시카고지만 내 기억의 저장 공간 속에 시카고는 그렇게 소중하게 남아 있다. *. 필자는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다 현재 안양위너스골프클럽 총괄상무로 재직 중이다. 정연석

2018-11-27

최초 안내광고·한글제호·가로쓰기…'혁신 40년'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 이어 한국의 중앙지로서는 3번째 지사를 설립했다.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1116 W. Olympic Blvd.)에 첫 사무실을 열었다. 창간호는 1974년 11월18일 본국지와 미주판을 합쳐 8개면으로 발행됐다. 초대 편집국장은 이선주씨였고, 한국 본사에서 김건진 특파원(1999~2000 LA지사장 역임)이 파견됐다. 이듬해 7월엔 뉴욕 지사가 설립됐다. 뉴욕의 창간호는 미주판 4개면, 본국지, 광고 등을 합해 18개면이었다. 76년 LA지사는 윌셔와 버링턴 애비뉴 교차로(661 S. Burlington Ave)로 이전하면서 흑백 윤전기를 처음 구입했다. 77년에는 한인 언론 최초로 안내 광고란을 신설했다. 광고주들은 직원 모집, 아파트 렌트, 업소 매매 등을 저렴한 비용으로 실을 수 있어 좋았고, 소비자들은 필요한 정보를 한곳에서 볼 수 있어 편리했다. 2년 뒤 79년 시카고 지사가 설립되면서 'LA-뉴욕-시카고'의 미국 3대 도시 한인사회를 연결하는 중앙일보 네트워크가 갖춰졌다. 82년에는 윤전기를 5기로 확충하고 올림픽 불러바드와 후버 스트리트 인근(2380 W. Olympic Blvd.)의 자체 사옥으로 입주했다. 3년 뒤엔 샌프란시스코 지사도 창간됐다. 미주중앙일보가 현재의 사옥(690 Wilshire Pl)으로 이전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였다. 그해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이민사회에 컬러 신문의 시대를 열었다. 90년에는 한인 언론 최초로 부동산 별도 섹션을 발행했고 96년에 또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2001년 중앙일보 미주법인이 설립됐고 5번째 지사인 워싱턴 DC 지사도 세워졌다. 2004년 자매지인 일간 스포츠 USA의 창간에 이어 2007년 애틀랜타 중앙일보도 탄생했다. 2004년 LA 제 2사옥이자 인쇄공장을 세리토스에 설립하면서 초고속 윤전기 시스템을 갖추게됐다. 2009년에는 베를리너 판형을 도입해, 언론의 틀을 바꿨다. 기존 신문의 약 72% 크기인 베를리너판은 사람 팔 길이와 눈 구조 등 인체공학적 측면에서 가장 편안한 신문 사이즈로 평가받고있다. 2014년 현재 미주중앙일보는 JMnetUSA 미주법인 지주회사 아래 LA, 뉴욕, 워싱턴 DC, 시카고,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 등 6개 직영 지사와 벤쿠버, 토론토, 댈러스, 시애틀 중앙일보 4개 계약지사까지 총 10개 지역을 아우르는 한인 언론 최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4-11-13

[창간 40주년 - 미주 한인사회 40년]미주 중앙일보 40년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 이어 한국의 중앙지로서는 3번째 LA지사를 설립했다.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1116 W. Olympic Blvd.)에 첫 사무실을 열었다. 창간호는 1974년 11월18일 본국지와 미주판을 합쳐 8면으로 발행됐다. 초대 편집국장은 이선주씨였고, 한국 본사에서 김건진 특파원(1999~2000 LA지사장 역임)이 파견됐다. 이듬해 7월엔 뉴욕 지사가 설립됐다. 뉴욕의 창간호는 미주판 4개면, 본국지, 광고 등을 합해 18면이었다. LA지사는 76년 윌셔와 버링턴 애비뉴(661 S. Burlington Ave), 82년 올림픽 불러바드와 후버 스트리트 인근(2380 W. Olympic Blvd.) 자체 사옥, 88년 현재의 사옥(690 Wilshire Pl)으로 3차례 이전하면서 그 역량을 차근차근 쌓았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이민사회에 컬러 신문의 시대를 열었다. 79년 시카고 지사를 설립하면서 LA와 뉴욕을 이은 한인 최다 거주지인 3개 대도시간 중앙일보 네트워크를 갖췄고, 85년 샌프란시스코 지사, 2001년 워싱턴 DC 지사, 2007년 애틀랜타 지사를 각각 세웠다. 그동안 혁신은 계속됐다. 77년에는 한인 언론 최초로 안내 광고란을 신설했다. 광고주들은 직원 모집, 아파트 렌트, 업소 매매 등을 저렴한 비용으로 실을 수 있어 좋았고, 소비자들은 필요한 정보를 한곳에서 볼 수 있어 편리했다. 90년에는 한인 언론 최초로 부동산 별도 섹션을 발행했고 96년에 또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2004년 자매지인 일간 스포츠 USA를 창간했다. 2009년에는 베를리너 판형을 도입해, 언론의 틀을 바꿨다. 기존 신문의 약 72% 크기인 베를리너판은 사람 팔 길이와 눈 구조 등 인체공학적 측면에서 가장 편안한 신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4년 현재 미주중앙일보는 미주본사를 비롯해 LA,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애틀랜타 등 6개 직영 지사와 8개의 프랜차이즈사까지 한인 언론 최대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2014-09-22

[오늘 행사 안내] '뉴스타 부동산…경기전망 세미나' 외

시카고 타이틀 캄패니(6210 Stoneridge Mall Road #320)에서 북가주(알라메다, 산타클라라, 콘트라코스타 카운티) 부동산 현황 및 전망/숏세일 세미나를 갖는다. 뉴스타 부동산의 스티브 리 대표와 숏세일 전문팀이 강사로 나오는 이번 세미나 회비는 무료. 참석자들을 위한 푸짐한 경품 추첨과 간단한 다과도 준비된다. ▷문의:(510)910-2558, (925)200-3636 최진욱 법률그룹…융자조정 세미나 최진욱 합동법률그룹(대표 최진욱)은 22일 오후6시30분 서니베일에 있는 도메인 호텔(1085 E. El Camino Real)에서 융자조정과 차압방지 및 크레딧 조정에 관한 무료 세미나를 개최한다. 최진욱 법률그룹의 산호세 지사 개설 기념으로 열리는 이번 세미나엔 LA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진욱 변호사가 직접 강사로 나와 용자조정·차압방지 등에 따른 법률문제까지 자세히 설명하게 된다. ▷문의:(650)678-5432, (510)872-4124 샌프란시스코 평통…통일아카데미 세미나 샌프란시스코 평통은 22일 오후6시30분∼9시 한국일보 커뮤니티홀(8134 Capwell Dr. Oakland)에서 통일아카데미 세미나를 갖는다. 이날 세미나엔 구본운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가 강사로 참석한다. ▷문의: (510)912-8858, (408)716-8443 김태구 목사 설교집…출판 감사예배 "온전한 구원, 거룩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설교집을 펴낸 김태구 목사의 출팔 감사예배가 22일 오전11시 산호세중앙성결교회(1850 S. Winchester Bl. Campbell)에서 열린다. 이번 설교집에는 김 목사의 선지동산 서울신학대학교 말씀, 사경회 설교 등 주옥같은 글과 제자들의 설교가 실려있다. ▷문의:(408)460-0097

2009-10-21

동포문학상 대상에 신정순씨…재외동포재단 발표

시카고에 사는 신정순(52·여) 씨가 2009 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6일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신 씨는 단편소설 `폭우‘로 대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는 이화여자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4년 도미했으며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입선했다. 1998-2004년 시카고 공립학교 이중언어교사로 근무했고 현재는 아가페한글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또 올해 시 부문의 대상은 `바퀴’를 응모한 재미동포 김효남(54) 씨가 받았고, 수필 부문 대상은 `재즈아리랑‘을 쓴 재미동포 윤종범(50) 씨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미주 한인들이 소설, 시, 수필 등 3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사는 김 씨는 강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994년 미국에 이민, 현재 워싱턴D.C.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애리조나에 사는 윤 씨는 22년 전 도미해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활약하고 있다. 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신정순 씨는 ”혼자 사는 섬에 육지에서 편지가 온 기쁨“이라고 당선 소감을 전했다. 신 씨의 당선작 `폭우‘는 한국계 여성이 멕시코계 남성과 재혼을 하고, 전 동거남과 사이의 아들 등 3명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이민사회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멕시코 남편이 누군가 고의로 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지고, 아내인 한국인 여성이 응급실에 달려가 겪는 상황과 심리를 묘사했다. 경남 거창 출생인 그는 이화여자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나온 뒤 1982년 일리노이주 노스이스턴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미했다가 정착했다. 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신 씨는 미주중앙일보, 미주한국일보, 미주동아일보에 동화와 시 등을 발표해 당선됐고,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응모해 국내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신 씨는 지난 8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착한 갱 아가씨'를 제목으로 한 동화책을 국내에서 출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9-10-06

‘시카고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2화>-29

시카고에 학교 설립 “우리가 악기 제작 학교를 세워보는 게 어떻겠나” Kenneth Warren씨 제의로 커리큘럼 등 준비 ‘The Chicago School of Violin Making’ 세워 정경화는 1974년 8월 뿐 아니라 1980년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위해서 시카고에 왔을 때도 반드시 내게 들르곤 했다. 한 번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약속한 협연 날짜보다 먼저 온 일도 있었다. 자신의 바이올린을 미리 내게 점검받기 위해서였다. 시카고에 와서 Kenneth Warren & Son에서 일하면서 5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1975년 어느 초 봄 Kenneth Warren 이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악기를 제작해서 판매하다보니 전부터 ‘혹시 시카고에 악기를 만드는 제작 전문학교가 있느냐’는 문의가 아주 많아지고 있네. 미국에 아직 이런 학교가 없는 데 이 참에 이곳에서 한 번 우리가 그런 학교를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나?” 하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은 솔트 레이크와 보스턴 등지에도 악기 제작 전문학교가 세워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같은 학교는 없었다. 이에 나는, “사장님, 저는 이 때까지 악기를 제작하는 일에만 몰두해왔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경영한다는 경영자적 입장에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 그 쪽 노하우는 아직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학교 경영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는 독일에서 배운 대로 학사 커리큘럼을 만들고 학장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면 될 것 같은데….”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면야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의견일치를 보아 곧 바이올린 제작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8월 설립된 것이 바로 ‘Kenneth Warren & Son School of Violin Making, INC’였다. 학교 위치는 당시 시카고 다운 타운 Jackson Boulevard의 Kenneth Warren 가게 바로 옆 건물로 정했다. 모든 커리큘럼은 내가 공부하던 독일 Mittenwald 악기제작 전문학교의 것을 그대로 도입했다. 그러나 전문학교니 만큼 학사 일정과 수업과목에 수업시간 등 커리큘럼을 짜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론 뿐 아니라 실습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갖추고 주 정부에 학교 설립 인가를 받으며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거의 6개월이 걸렸다. 정말로 힘들었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1975년 8월 드디어 학교를 세우고 학생모집을 시작해 9명의 신입생을 맞아들였다. 당시 9명 중 우리 동포 학생도 2명 입학했는 데 김성상·임주택씨가 그 들이다. 김성상씨는 현재 서울에서 악기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임주택씨는 아깝게도 지병으로 작고했다. 이듬 해에는 16명이 입학했고, 그 다음 해부터는 30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학교도 거의 완전하게 자리가 잡혀 제대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이들을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서 또한 많은 것들을 깨우치게 됐다. 공자도 논어(論語) 첫 머리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 하지 않았는가. 나 자신 더 배우고 익히는 데 정말 큰 보람과 희열을 느끼게 됐다. 나는 후진들을 양성한다는 보람으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사실 학교의 운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Kenneth Warren 측에서는 회사와 학교 경영을 병행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교육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것 저것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처럼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되자 1981년 Kenneth Warren 측에서는 학교 경영까지 모두 내게 맡기고자 했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Kenneth Warren & Son의 경영 실권자로 나섰던 며느리가 더 이상 학교를 경영할 수 없다며 손을 떼버린 지경에 이르렀다. 나 역시 ‘학교 행정과 경영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손을 떼려 하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학생 대표자들이 몇 명 찾아와서는 “학교 운영은 어떻게든 우리들이 해볼 테니 선생님께서는 오로지 가르치시는 데만 힘을 써주십시오. 부탁입니다.”하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놓였다. 나도 빠진다면 이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를 믿고 배우던 학생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나도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만은 없게 됐다. 이래서 하는 수 없이 1981년 그 해 내가 명목상으로는 책임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는 학교 이름을 ‘The Chicago School of Violin Making, INC’로 개명하고 다시 경영에 들어갔다. 정말로 어려운 시기였다. 학교 운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우리 속담에 “눈·코 뜰 새가 없다”라는 말이 있는 데 당시 내가 그랬다.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독일 Mittenwald 에서 공부할 때보다 훨씬 힘든 시기였다. 바이올린 제작 전문학교 일로 그 바쁜 와중에도 한 편으로는 ‘시카고 한인 음악인 협회’를 조직하게 됐다. 이 협회를 만들게 된 동기는 당시 한국일보 김용화 지사장으로부터 비롯됐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찾아 와 “지금 한국은 물론 미국 전 지역 동포 사회에서도 이주호라는 음악적 장인(匠人)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요. 그런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매우 궁금하게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카고에는 과거 한국에서 이른 바 한가락씩 했던 음악인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니 시카고에서 이 분들에 대한 모임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의해온 것이다. 그의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으로 들렸다. 그래서 1875년 8월 경 나와 박정윤·최동수·안소겸(작고)·임주택(작고)·김성상·원영희씨 등을 비롯해 여러 인사들이 모여 이 협회를 시작하게 됐다. 부득이 내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됐다. 이 모임은 음악인들의 친목 뿐 아니라 정기 음악 연주회 개최 등으로 동포들의 정서 생활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당시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강신성(비올라)씨나 뉴 올리언즈 심포니의 이휘룡(바이올린)씨 등이 시카고까지 와서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이었다. 김봉현 변호사의 작고하신 형님 김호현(바이올린)씨도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중 지난 1981년 12월5일 스코키의 센터 이스트 오디토리엄에서 송년 대음악회를 개최한 것은 큰 성과 중 하나일 듯 싶다. 이를 위해 우리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단원과 합창단원을 선발했다. 이 날 40여 명으로 조직된 오케스트라는 박정윤씨의 지휘로 로시니의 ‘세빌리아 이발사’ 클루크 아울리스의 ‘이프제니아’ 서곡 등을 힘차게 연주하면서 막을 열었다. 이어 테너 박인수(뉴욕 메트로 오페라 단원), 소프라노 김성자씨의 곡이 이어졌다. 또한 강신성·이희룡·마원기 씨 등에 의한 피아노 삼중주 등이 연말의 겨울밤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날의 송년 대 음악회는 800여 명이 운집한 동포사회 최대의 성황을 이뤘다. 나는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회’의 회장을 3회 연임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시카고에 ‘교회 음악인협회’가 따로 생기면서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회’는 점차 위축돼 가기 시작했다. 그 뒤 점차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없어진 상태가 되고 말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글=이기준 고문 ==================================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 오케스트라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회’가 1975년 8월 결성된 이후 클래식 음악인들의 정기 연주 모임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1년 10월 24일 ‘시카고 한인 커뮤니티 오케스트라’ 및 ‘성인 합창단’을 조직하기 위한 단원 모집 공고를 냈다. 당시 오케스트라 모집 분야는 바이올린·비올라·첼로·베스·목관·금관·타악기 등이었고 합창단원은 소프라노·앨토·테너·베이스 등 모든 분야였다. 여기에서 합창단원 외에도 4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선발해 바로 그 해 연말인 12월 5일 ‘송년 대 음악회’를 개최했다. 당시 이 오케스트라는 아주 순수한 음악 동호인들만의 모임으로 경제적인 문제와 관계없이 정기 연주회를 여는 등 음악인들은 물론 동포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2009-04-19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라”

시카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의 권유로 매월 대학생 칼럼을 쓰면서 글쓰기 훈련을 받은 바 있다며 언론과의 첫 인연에 대해 소개했다. 그는 “야베스가 형제 간에 존귀한 자가 된 것은 인생의 과제가 거룩하고 위대했기 때문”이라면서 “야베스 출생 당시에는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보잘 것 없었을 지 모르지만 그의 인생의 열매는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화상이라며 거룩한 자화상을 가지면 하나님 때문에 거룩하게 되고 뭍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는 “특히 이민사회 속에서 인종차별 등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며 “지금은 교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하다는 소리를 듣는 자신도 자라면서 열등의식에 휩싸였었고 지금도 열등의식을 치유하는 과정에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러나 누구나 예수를 제대로 만나면 거룩한 자화상이 회복되고 사람이 변화된다”면서 “지금은 힘겹고 수고로울 지 모르지만 독을 품고서라도 하나님이 주신 기운으로 살아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자포자기했을 정도로 낙담했던 신학교 1학기 때 백인 교수의 기대와 격려로 인해 최고 졸업생의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들어 타인의 꿈을 뺏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꿈을 격려해 주고 세워주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나에 대해 기대해 주는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1980년대 미주판 한겨례 신문을 창간하며 쏟았던 열정을 예로 들면서 “야베스의 기도가 기복신앙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려는 능력있는 기도이고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는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의 확장”이라며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거룩한 아픔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설교를 마치면서 “애틀랜타 중앙일보가 지역언론으로 입지가 좋은 지역에 있는 만큼 애틀랜타 동포사회를 바르게 세워줄 수 있도록 거룩한 아픔과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역사에 쓰임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의로운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고 거듭 당부했다. 김수영 기자 [email protected]

2008-06-20

[J칼럼]오순도순 ‘문인방’

시카고 문인회(회장 명계웅)가 개최한 ‘문학의 밤’에서 회원중 한 분이 작품 발표 전 읊은 노래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겼지만 마음은 어느 새 틴 에이저 문학 소녀가 아니랴. 문학은 이처럼 순수무구(純粹無垢)의 세계로 열어주고 있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문학세계에서 만큼은 문학 모독설일 성 싶다. “황금빛 숨결 일렁이는 가을 들녘/∼갈잎 자락에 시어들을 엮어/ 바람결에 띄우고 싶어라/무르익은 오곡처럼∼(영그는 가을)” 깊어가는 이 가을의 고즈녁한 절기를 토해놓는 듯 하다. 그의 싯귀처럼 ‘가을 마당의 알곡들’이 절귀 절귀 맺혀 있다. 어느 새 우리 곁을 훌쩍 떠나려고 하는 그 풍만했던 가을을 내내 잡아두고 싶은 마음 또한 아닐까. “∼잿빛 하늘에/ 추공들 합창은 멈추고/ 붉었던 사랑의 그림자 뒤로/∼빈 가슴 허물을 벗듯/ 가을 빗속을 맴돈다(가을 빗소리)” 애틋함이 절로 배어나오는 듯 하다. 가슴 절절이 맺혀 있는 아쉬움과 회한, 두근거리던 설렘조차 한 줌 남은 이 가을, 애타는 빗소리에 젖어가는 것은 아닐까. “옛날 소꿉 친구들/ 여고 시절 그 친구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만 홀로…(보고 싶은 친구들)” 싯귀마다 진한 향수(鄕愁)가 그윽하다. ‘회귀(回歸)’의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듯 하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남녀노소가 다를 리 없다. 귀중한 작품들에 대해 주제넘은 감상을 적어봤다. 굳이 변명이라면 시카고 문인회를 참관할 때마다 느끼는 그 ‘오순도순한 분위기’에 취해서다.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 할 만큼 ‘문학의 계절’이 아닌가 싶다. 회원들은 ‘오순도순한’ 작품들을 오순도순한 ‘문인방’ 에 가득 쏟아놓았다. ‘가을 여행’ ‘수박’ ‘얼마나 멀리 갔기에’ ‘거기 그 소나무’ ‘Young Lions’ ‘빈틈있는 즐거움’ ‘거시기’ 등이다. 한 줄, 한 줄에 나름대로의 정성이 가득하다. 설령 아직은 덜 다듬어져 있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도탑고 살가운 귀절들이다. 그러니 더 ‘순수무구’한 것이다. ‘격(格)’을 따짐은 세속적이요, 구태의연이 아니고 무어랴. 이 작품들이 갈고 닦이는 가운데 ‘흙 속의 진주’가 될 날이 머지 않을 성 싶다. 이 날 초빙된 소설가 송상옥씨야말로 ‘시카고 문인회’에 큰 자부심과 함께 한층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1983년 창립된 시카고 문인회는 1989년 만들어진 뉴욕보다 역사가 깊다. 그만큼 유서깊은 문인회다. 좋은 작품을 위해 서로 자극을 주고 의욕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미주 한인문학의 앞날과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 강연에서다. 그는 “매년 중앙일보ㆍ한국일보를 비롯한 문예작품 응모 수도 시카고가 LA를 중심으로 한 서부와 워싱턴 등 동부와 함께 3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입상자 수에서도 시카고 문인들의 괄목할만한 실적도 좋은 예다. 우리 고국에서도 미주 문학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도 그만큼 미주 문학 수준이 높아진 증거라고 한다. 각 대학 국문학과ㆍ문예창작과 교수들이 미주 문학 연구를 위해 부지런히 내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여 곳의 대학에서 똑같은 자료요청도 있었다니 그만큼 위상제고는 분명한 일이다. ‘시카고 문인회’에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정진할 일이다. “작품을 쓸 때는 자신의 모든 것, 혼을 불어넣는다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 그만큼 중노동이다”고 하는 그의 충언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007-11-05

[뉴욕 25시]열살 생일 맞는 라디오 코리아

시카고 등지에도 방송사가 생겼으나 대개가 2년을 못버티고 무너졌다. 87년엔 엄호웅.엄호택 형제가 경영하는 뉴욕한국일보가 방송사업에 참여하면서 뉴욕엔 두개의 서브케리어 방송이 생겼다. 당시 라디오 가격은 150달러로 고가였으나 고국이 그리운 동포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그러나 한계는 뻔했고 89년 중앙방송은 뉴욕에서의 방송을 접었다. 또 1993년 AM방송시대가 열리면서 서브케리어에 의존하던 뉴욕한국일보의 방송도 사라졌다. 이렇듯 AM방송시대는 개막됐지만 혼돈의 연속이었다. 전문 방송인 부족과 자금난에 시달렸고 경영권 분쟁도 잇따랐다. 권영대 사장이 경영을 책임지면서 대충 정리됐지만 씁쓸한 기억들이 초창기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997년2월 AM930kHz 시절의 방송사 이름은 AM KOREA. 지금의 R-KOREA 전신이다. 코네티컷 일부까지를 가청권으로 했다지만 들쑥날쑥이었다. 채널 소유주가 야구경기 중계방송을 한다고 시간을 뺏는 등 지금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흔했다. 1998년2월 채널을 1480kHz로 이름을 라디오서울로 바꾸면서 24시간 종일방송시대가 열렸다. IMF로 고통받는 조국 돕기 캠페인 등 기념비적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2001년12월엔 AM740(WGSM)을 매입 한인이 소유한 최초의 라디오방송 기록도 세웠으나 1480kHz 임대권을 1년 먼저 반환하는 고통의 시기를 맞는다. 셋방설이 설움을 톡톡히 맛본 것이다. 대신 2002년3월 AM1430과 AM740 동시방송에 들어갔다. 1430은 1480과 같은 5Kw였고 740은 25Kw로서 로드아일랜드.매사추세츠까지를 가청권으로 하는 등 가청범위는 3배로 늘어났으나 한인밀집 지역 방송이 제대로 안됐다. 여기에 9.11 후유증으로 인한 불황과 고가의 전파료는 경영난을 심화시켰다. 1430방송시간을 오전7시에서 정오까지로만 하는 등의 악순환도 거듭됐다. 이같은 암흑기를 거친 2004년 2월4일 라디오서울은 뉴욕 라디오코리아로 이름을 바꾸면서 AM1660으로 다시 태어났다. 35개월만이다. 그러니까 AM1660 R-KOREA만의 나이만 따지면 열살은 커녕 두살에 불과하다. 동포사회 소식을 구석구석 전하고 애환을 함께하는 공중파 매체로서 우뚝 선 R-KOREA의 실상은 그렇다. 당당한 모습이 든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한참 더 물을 주고 키워야 하는 아기에 불과하다. R-KOREA나 케이블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힘을 받는 TV 전통의 신문 등 모든 언론매체들을 특정인의 상업적 수단으로 치부할 게 아니다. 동포사회가 지켜야할 소중한 자산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성장한 R-KOREA의 생일을 동포들과 더불어 축하한다. 15일 생일축하 잔치가 전체의 화합을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현일 논설주간

2007-02-13

[뉴욕 25시]공익광고 전역에 송출…심화되는 한인의 얼

한국일보 등 미동부지역을 커버하는 여타 한인 언론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에 요구되는 자양을 충분히 공급했느냐고 묻는다면 답이 궁해진다. 인적.물적 역량 부족으로 인해 제한적이어서다. 때문에 감성이 우선하는 젊은 세대들을 흡인하고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감성 자극에 좀 더 효과적일 전파매체들은 네트워킹상 제약과 쇼나 드라마 같은 오락프로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고 그래서 이들에 대한 무작정의 요구는 곤란했다. 이런 터에 아주 흥미있는 변화가 생겨 낳다. 2세들의 정체성 확립에 일조할 법한 '전파 광고'가 미주 전역으로 송출되고 있다. 본지의 경우처럼 뉴욕과 LA.워싱턴DC.시카고.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미국.캐나다 전역을 상대로 신문을 발행하는 활자매체의 노력에 더한 '전파 광고'의 홍보효과는 일단 눈여겨 볼 만하다. 일반 보도보다 설득력과 파급율이 뒤지게 마련인 광고에 일정 기대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일반적 광고가 아닌 '공익 광고'인 탓이다. 지난 3월 TKC-TV와 wmbc- TV tvK24에서 시작한 공익광고가 지난주부터는 미주 전역의 한인 운영 전파망을 타는 중이다. 새로 참여한 방송사들 상당수는 기독교계와 유관하며 이들을 합치면 모두 19개 방송사가 된다. 방송되는 광고내용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예절 자랑스런 한국인 태극기 사랑 가정의 소중함 환경보전 미래에 대한 도전 봉사 정신 등을 주제로 한 30초 짜리 17가지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방송에 대한 선입관을 씻어 줄 정도로 주제 선정이 잘돼있다. 화면 구성은 일류 수준이며 나레이터는 2세들의 얼을 일깨우기에 손색이 없을듯 싶다. 영어 자막도 선명하다. 미주 전파망 소유.관리자들을 설득 무료 광고 송출이 있도록 한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뉴욕지사측은 '조국에 대한 일체감 조성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라는 취지를 설명했더니 쾌히 응하더라고 했다. 한해 광고를 비용으로 환산하면 6백50만달러가 된다는 얘기다. 이 멋진 사업에 협조한 미주 방송사 관계자들의 마음이 더할 나위없이 고맙다. 그렇다고 무료 송출 불참 방송사들을 시비할 여지가 없으니 아이러니도 이만저만하지가 않다. 라디오코리아 권영대 사장은 "민족 자존과 자긍을 일깨우는 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사업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선 우리다. 그간 한국 정부가 공영방송사가 수백만 달러를 들여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왔다. 비싼 방송자산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런데 한국이 어려운 처지도 아니면서 계속 빈 손을 내미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고 일갈한다. 사실 한국내 방송광고를 전담하는 KOBACO의 1년 수주액은 2조4500억원(2006년 기준)에 이른다. 일각으로부터 흥청망청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넉넉한 씀씀이에도 불구하고 3백억원대의 당기순익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공익광고는 무료라는 관례에 대한 반론이 성립할 여지가 생긴다. 다른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일정액을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는 것이다. 어쨌거나 1.5세 2세들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한 모든 이들이 한결같음을 재확인하게 돼 기껍다. 그런 소망과 노력에 부응하는 결실이 차츰 구체화될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김현일 논설주간

200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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