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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외래어 받침의 비밀

영어 단어가 등장한 것은 13세기 무렵이다. 우리나라엔 구한말 선교사에 의해 소개됐는데 궁궐에서 커피와 함께 대접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제는 기념일에 케이크가 빠지면 허전할 정도가 됐지만 표기법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생크림케잌 주문받아요” “컵케익 만드는 법”처럼 ‘케잌’이나 ‘케익’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식품의 제품명이나 제과점 진열대에도 ‘케잌’이나 ‘케익’으로 적어 놓을 정도다. 모두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의 귀에 들리는 대로 옮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올바른 표기는 ‘케이크’이다.   왜 ‘케잌’ 대신 ‘케이크’로 사용해야 할까? 외래어 표기법에선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일곱 글자 외에 ‘ㅋ, ㅌ, ㅍ, ㅊ’ 등이나 겹받침은 사용하지 못한다. ‘커피숖’을 ‘커피숍’으로, ‘디스켙’을 ‘디스켓’으로 적어야 하는 이유다.   고유어에선 ‘부엌, 콩팥, 풀숲, 봄꽃’과 같은 표기가 가능하다. 외래어에서 쓰지 않는 받침을 순우리말에 사용하는 이유는 이들 받침소리가 모두 발음되어서다. ‘봄꽃’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만나면 [봄꼬치] [봄꼬츨]처럼 ‘ㅊ’ 소리가 난다. ‘봄꼳’이나 ‘봄꼿’으로 적지 않고 ‘봄꽃’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외래어는 다르다. ‘커피숍’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결합하면 [커피쇼비] [커피쇼베서]처럼 발음한다. [커피쇼피] [커피쇼페서]로 소리 내는 사람은 없으므로 ‘커피숖’으로 적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익’은 왜 쓰지 못할까? 외래어의 경우 이중모음 뒤의 ‘k, t, p’ 발음은 받침으로 적지 않고 ‘크, 트, 프’로 표기하도록 돼 있다. ‘브레이크(brake)’를 ‘브레익’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cake’도 이중모음 뒤의 ‘k’ 발음에 해당하므로 ‘케익’이 아니라 ‘케이크’로 적는다.우리말 바루기 외래어 비밀 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받침 모두 외래어

2025-02-06

줄리 터너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달라스 한인 차세대들과 소통

영어 이름: Christ Chang) 통일 재단 이사장의 주관으로 열렸다.   이 날 포럼은 차세대들에게 북한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릴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에 대한 차세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목적 하에 진행되었다. 포럼의 주제는 ‘북한의 인권 문제데 대해 어떻게 하면 AI, 소셜미디어, 첨단 기술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까’ 였다. 이날 포럼은 장철웅 이사장의 사회와 함께 이병규 목사의 기도로 시작했으며, 북한 이탈주민이면서 달라스 침례교 대학(DBU)에서 지도자 석사 과정을 받고 있는 한 선교사의 북한 실상에 대한 증언에 이어서 줄리 터너 특사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강연과 학생들과의 질의 응답 시간으로 진행됐다. 이날 포럼에는 달라스 침례교 대학(DBU)과 탈봇 신학교(Talbot School of Theology) 학생들이 함께 했다. 줄리 터너 특사는 각 나라와 미국 내 각 지역을 방문하며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알리고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하는 데 앞장 서고 있다. 특히, 미국 여러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지역 한인 커뮤니티와 연결해서 탈북민, 이산가족 및 차세대와의 만남을 갖고 있다. 이번 달라스 방문 동안 그는 금요일에는 남감리교 대학(SMU)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 인권문제 관련 모임과의 만남을 가졌고, 토요일에는 차세대 포럼으로 모이기에 앞서 달라스 한인 커뮤니티 내 북한 이탈주민과 이산 가족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포럼에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 현실과 탈북 경험 등을 나눈 모 선교사는 차세대와 북한 인권 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일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중국으로 탈북해서 조선족 목사님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고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그는 북한에서 8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인권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도구인데, 북한 주민들에게는 기본적인 자유와 복지는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부는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어떤 의견도 수용하지 않으며, 북한 주민들은 극도로 가혹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북한의 실상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K드라마, K영화 등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런 것들을 보면 감옥에 가고 처형된다. 전세계가 K-Pop과 K 문화에 열광하는데, 정작 같은 동포인 북한 사람들은 못 보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인권 순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권리와 생활 수준 부문에서 21년 연속으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줄리 터너 특사는 “미국은 북한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 이에 국무부의 북한 인권 특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국 난민 이주국과 협력해 탈북 난민들을 보호하고, 북한 주민의 기본적 인권 개선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총합하여 실질적 도움과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변혁을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학생들은 북한 인권 보장을 위해 미국 국무부가 진행하고 있는 일들 중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을 표출했다. 또한,  북한 주민의 생계와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 어떻게 북한 정부를 압박해서 인권 문제를 개선되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하 방안이 있느냐는 질문을 터너 특사에게 던졌다. 이에 대해 그는 “무엇보다도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다. 북한에 여러 번 접촉을 시도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밝히며, “지금 현재로서 특별히 말할 수 있는 건 없더라도 우리는 꾸준히 노력해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1-2주 마다 한국을 포함 여러 나라와 미국 내 여러 도시들을 돌면서 관계자와 차세대들을 만나 의견을 들을 뿐만 아니라, 북한 난민들에 대한 영어 교육과 다양한 학습 지원, 미국에 도착할 때 직접 공항에서 픽업해 장보기와 정착 등을 실질적으로 돕는 등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또한, 해외 노동 계약을 맺고 러시아 등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고 북한 정부로 송금되고, 올림픽 같은 행사로 타국에 나간 사람들의 가족들을 억류하고 있다가 그들이 북한으로 들어오면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는 등의 심각한 인권 문제를 설명하면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작할 것, 북한 실상과 인권 문제에 대한 뉴스를 적극적으로 전파할 것, 소셜 미디어와 자신의 전공, 기술을 활용해 유튜브, 인스타그램, 구글, Chat GPT 등 AI와 인플루언서, 웹툰, 인터넷 게임을 활용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 등을 토로했다. 이날 포럼에 참가한 학생들을 비롯 모든 사람들은 인권 문제들 표면상으로 대두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며, 이를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와 단체가 특히 온라인 소통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함께 의견을 모았다. 줄리 터너 특사와 이날 북한의 실상을 알린 모 선교사는 북한 주민들을 어려움과 곤경에 처하게 하지 않으면서 이런 참혹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전세계적으로 알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해나가야 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각인된 시간이었다.   한편, 줄리 터너 특사는 미국 북한인권 특사로 임명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 지난 20년 동안 아시아 국가의 인권 문제를 다뤄왔으며, 지난해 10월에 북한 인권 특사로 임명 됐다. 그는 커뮤니티 참여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미국 정부 고위 관리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악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터너 특사는 캘리포니아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사회정책 석사과정을 마쳤다. 터너 특사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지만 텍사스 에블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부친은 현재 에블린 크리스천대의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캐서린 조 기자북한 인권특사 국무부 인권특사 줄리 터너 인권문제 관련

2024-09-10

"복음에 빚진 교인들"…웨일스 땅 찾는 이유

선교사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1839~1866)의 삶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은 훗날 조선 땅에 복음의 꽃을 피우고 평양 대부흥의 단초가 된다. 토마스 선교사와 한국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곳은 영국 웨일스의 하노버 교회다. 380년의 역사(1644년 설립)를 품고 있다. 현재 이 교회의 담임 목사는 한인이다. 조선땅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는데 이제는 그 땅의 후손이 목사가 되어 하노버교회를 섬기는 셈이다. 하노버교회 유재연(64) 목사가 선교 대회 참석차 LA를 방문했다. 유 목사를 만나 토마스 선교사가 오늘날 교회에 남긴 유산 등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하노버교회의 첫 외국인 목사인가.   "2014년 1월에 취임했다. 이 교회가 세워진 후 외국인이 처음으로 담임 목사가 됐다. 모로코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웨일스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영국 교단인 리폼드처치(URC)에 들어갔다. 이 교단은 사역자가 필요한 곳에 목사를 파송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하노버교회가 아무래도 토마스 선교사 때문에 한국이랑 관련이 있으니까 그곳으로 가게 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흔적이 교회에 있나.   "기념비도 있고 교회 벽면엔 사진들도 걸려있다. 예배당 자체가 1차 자료다. 1644년에 설립된 교회이지만 지금의 교회 건물은 1839년에 지어졌다.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도 하노버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다. 토마스 선교사는 17살 때 하노버교회 강단에서 첫 설교를 했다."   -토마스 선교사의 어린 시절은.   "굉장히 똑똑하고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6살 때 옥스퍼드에 합격할 정도였다. 물론 목회에 대한 꿈이 있어서 신학교로 갔다. 어릴 때부터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신혼인 24살 때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향할 정도였다."   -한국 개신교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의미는.   "지금도 한국 교회 교인들이 하노버교회를 찾아온다. 매년 1000명 정도 온다. 그만큼 한국의 교인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열매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에 순교했다. 그때까지 조선에는 개신교 신자가 없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가 처음으로 성경을 들고 들어간다. 그때 죽기 전에 준 한문 성경책이 개신교의 씨앗이 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희생 순교 피 성경책…이 모든 게 한국 개신교의 시작이 됐다."   -한국 교인들이 지금도 토마스 선교사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빚진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가 가진 복음에 대한 열정이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를 있게 하지 않았나. 그 빚을 갚기 위해 하노버교회를 와서 그분의 흔적도 살펴보고 또 웨일스로 역선교를 하러 오는 것이다."   -역선교란.   "소위 '리버스 미션(reverse mission)'이라고 한다. 현재 영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 한국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 복음을 받아 축복을 누리고 있는데 그 복음을 전해준 나라가 약하니까 다시 축복을 되돌려주기 위해 역선교를 오는 것이다."   -상황은 어떤가.   "영국은 기독교 국가였다. 지금은 명목상 크리스천이라 해도 실제 교회를 출석하는 교인들은 인구 대비 2%에 불과하다. 갈수록 교회들이 사라지고 있다. 예배당이 팔리고 문을 닫는다. 목회자도 부족하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냉담해져서 전도가 안 된다. 다시 선교지가 됐다.     -그 정도로 심각한가.   "원래 선교라고 하면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로 많이 나가지 않나. 보통 선교계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2% 미만이면 선교지라고 한다. 유럽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 다시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중 웨일스는 어떤가.   "거의 포기 상태라 할 수 있다. 냉담한 걸 넘어서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하다. 교계에서 쓰이는 말로 비유하자면 '영적 전쟁터'가 됐다. 이슬람 힌두 불교는 물론이고 이단들도 다 들어와 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기독교는 자유주의가 됐다."   -웨일스는 과거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지역 아닌가.   "웨일스는 광부들의 나라다. 광산이 많다. 그만큼 가난하고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 과거 부흥은 그러한 광부들로부터 왔다. 하나님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그 땅에 부흥을 주셨다. 그래서 부흥을 사모하고 있다. 하노버교회가 부흥을 위한 영적인 우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매년 한국에서 오는 방문객 기도팀 예배팀 등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다. 부흥을 위한 징조라고 본다."   -어떻게 선교사가 됐나.   "원래는 한국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 신앙으로 자랐다. 대학 때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바로 신학대학원을 가지 않았다. 교사로 3년 정도 일하며 사회 생활을 한 뒤 신학대학원에 갔다. 목사 안수는 1994년에 받았다. 선교사로는 1999년에 모로코로 처음 나갔다. 올해가 선교 사역을 한 지 30년째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돼있다. 그는 1863년 하노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스물 세살 되던 해였다. 결혼 직후 부인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그러나 상하이에 도착한 뒤 3개월 후에 아내는 건강 악화로 눈을 감는다. 당시 산둥성에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땅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신자들을 만나며 조선의 선교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후 토마스 선교사는 가슴에 한문으로 된 성경을 품고 조선땅으로 향했다가 불에 탄 배에서 뛰어내리게 된다. 토마스 선교사는 헤엄을 쳐서 육지에 이르렀지만 박춘권이 휘두른 칼에 찔려 생을 마감했다. 이후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가 남기고 간 성경을 보고 회개한 후 개신교인이 된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영국 웨일스 토마스 선교사 하노버교회 유재연 하노버교회 강단

2024-06-24

방대식 선교사, 선교센터 건립 등 후원 당부

선교사가 전쟁에 지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희망을 불러넣고 있다.   방대식 선교사는 6년전 씨드선교회와 메릴랜드 벧엘교회의 파송으로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방 선교사는 1997년부터 우즈베키스탄에서 12년 동안 사역했으며 씨드선교회 본부에서 8년간 사역한 후 다시 2018년부터 우크라이나로 파송됐다. 그는 전쟁 발발 직전부터 러시아의 도발로 크고 작은 피해를 입어왔다.   2022년 1월 미국 시민권자 대피령으로 인해 미국으로 입국했으나,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기 위해 폴란드로 들어가 난민 사역으로 헌신해 오다가 올해 1월부터 다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선교 거점을 재건하며 다시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현지 사정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방 선교사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당할 수 있는 물품이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그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매우 절실하다”고 전했다. 그는 씨드선교회와 파송교회에서 모아진 헌금으로 겨울철 이불프로젝트를 진행해 2천여 가정에 담요를 나누어 주었다.   피난민과 민간인의 구분이 여의치 않은 상황인데, 이들에게 1천벌의 내의와 500여개의 침낭을 배포하고 피난민, 군인들을 위한 구호품과 긴급구호 박스를 제작해 전달했다. 하지만 그는 당장의 구호작업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작지만 큰 포부를 품고 있다.   방 선교사는 장기적인 우크라이나 선교 전략의 일환으로 종전 이후를 대비해 선교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상담, 의료 등 3가지 분야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선교센터 건립을 위해서는 건물 구매 비용 17만달러, 선교센터 완공비용 16만5천달러, 기자재 비용 6만5천달러 등 40만달러가 필요하지만, 현재 씨드 머니 격으로 4만달러를 모았을 뿐이다.   방 선교사는 1차적으로 9월까지 20만달러 모금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선교센터는 전쟁으로 이미 제기능을 상실한 교육 인프라 제공을 최우선에 두고 기독교 교육을 바탕으로 난민과 자녀들에게 영어를 중심으로한 인터내셔널교육,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퍼스팩티브스-교회지도자 양성 교육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선교센터는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치유하기 위해 상담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 난민과, 전쟁 미망인, 전쟁 고아등을 위한 심리상담 지원을 위해 여러 선교단체와 한인교회의 상담자 파송을 협의하고 있다.  방 선교사는 “우크라이나는 현재 전쟁물자 조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 인프라가 최악의 상황에 노출돼 있으며 이러한 사정 은 전쟁 후에도 쉽게 개선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방 선교사는 의료사역을 통해 전쟁 난민을 도울수 있도록 한국의 의료기관과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락처 : 703-947-7209 Seed USA Ministry INC. P. O. Box 847 LA Mirada, CA 90637 ▷후원 체크 발송시 Memo : Love Ukraine (Dae-sik Bang)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선교센터 방대식 방대식 선교사 선교센터 건립 선교센터 완공비용

2024-06-23

[열린광장] 인생의 봄 5월

영어의 ‘메이(May)’는 ‘인생의 봄’ 또는 ‘봄꽃을 따다’란 뜻인 걸 보면 5월은 봄꽃처럼 아름다우니 노래할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즘 가만히 앉아서 노래만 부를 수가 없으니 참 안타깝다. 미국 대학생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중단 요구 시위를 크게 벌이고 있는가 하면,  한국에선 정부와 의사들과의 싸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봄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5월은 푸르다.  하늘도 푸르고 땅도 푸르다. 그리고 바다도 푸르다. 이 푸른 5월은 인생의 봄인 어린이의 세상일뿐만 아니라 어질고 맑은 어머니의 마음을 기다리는 달이다.     5월은 아름답다. 새도 아름답게 지저귀고 꽃도 아름답게 피어난다. 5월에 잊히지 않는 이름 ‘메이플라워(Mayflower)’. 기독교인들에겐 매우 뜻깊은 그 배 이름이 아닌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의 선조들이 아메리카 땅으로 건너올 때 타고 온 배 이름이 메이플라워이기 때문이다.     5월에는 유명인이 많이 태어났고 역사적 사건도 많다.  한국에서는 ‘어린이’란 낱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아동 문학가 방정환이 1923년부터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 ‘봉숭아’를 작곡한 홍난파는 이 곡을 만든지 4년 뒤인 1924년 5월에 중앙기독교회관에서 멋진 바이올린 솜씨로 이 곡을 연주했다.      5월과 관계있는 유명인은 누가 있을까?  종교개혁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한 장 칼벵은 156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596년 5월에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이어 한참 뒤인 1818년 5월엔 ‘자본론’으로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태어났고,  2년 뒤인 1820년 5월엔 세계 최초의 간호학교를 세운 영국의 이름난 백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출생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840년 5월엔 러시아에서 피어 차이콥스키가 태어나 우리에게 그 장엄한 6번 교향곡 ‘비창(Pathetique)’을 선물했다.     미국에서는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의 노랫말을 지은 문학가 어빙 베르린이 1888년 5월에 태어났다.  또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태어난 것은 1917년 5월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암살을 당해 마흔 여섯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영락교회를 섬기는 동안 기독교의 큰 별이 된 한경직 목사는 1963년 5월 18일 주옥같은 그의 설교문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한편 내 아내의 모교인 정신여학고를 한 알의 밀알처럼 아름답게 가꾼 김필레 교장은 1978년 5월 10일에 ‘제1회 송악봉사상’을 받았다. 이래저래 5월은 은방울꽃처럼 아름다운 달이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인생 블레스 아메리카 천사 나이팅게일 아동 문학가

2024-05-02

열린문 교회 또다른 40년 비전 밝혀

영어권이 함께 의존하는 교회로 전환시켰다. 헌던으로 교회를 이전하면서 '한인정통장로교회'에서 '열린문장로교회'로 개명하였으며 ‘은혜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비전이 선포됐다.     김용훈 목사는 목회 기간동안 이민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으며,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해 이민교회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열린문장로교회는 1세대와 2세대 간 ‘상호의존 교회’를 지향하며 한어권 당회와 영어권 당회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를 묶는 연합 당회와 연합 공동의회를 통해 전반적 의견을 수렴한다. 담임목사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한어권 지도자들과 영어권 지도자들의 끈끈한 관계 형성이 필수적이었다.     김용훈 목사의 상호의존 교회 모델은 이미 교계뿐 아니라 신학계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피터 차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는 “열린문 장로교회가 신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루어야 할 기초를 확인해 줄 뿐 아니라 세대간 차이와 언어 및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게 하여 모든 종족의 이민 교회에 대한 신선한 목회적 적용이 된다”고 인정했다.     김용훈 목사는 은혜가 임하는 교회를 위한 예배 사역을 강조해 왔으며 ‘오이코스’라는 소그룹 모임을 비롯, 영적 성장을 도모하는 훈련과 받은 은혜를 흘려 보내, 은혜가 흐르게 하는 사역에 집중해 커다란 부흥을 이뤘다.   열린문장로교회 성도들은 교회 비전 그대로 자신들의 교회는 “은혜가 임하고, 머물고, 흐르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열린문장로교회는 지역사회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여러 사역을 진행해 왔으며 전세계 7유닛의 파송 선교사, 80 유닛의 협력 선교사, 13개 협력단체와 해외 및 국내 사역을 담당했다.  또한 아프간 난민 가정, 지역 난민 사역 등을 섬기고 있다. 김용훈 목사는 오는 28일 예정된 이취임예배를 통해 33년간의 담임목사 직분을 내려놓는다. 김용훈 목사에 이어 김요셉 목사가 5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또다른 40년을 향하여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예비하고 있다.     담임목사 이취임 예배를 앞둔 김요셉 목사는 “지난 40년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른 40년을 향해 부어지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김요셉 목사는 바이올라 대학교(B.A.)와 트리니티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했으며, 현재 덴버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중에 있다. 2001년 열린문교회에서 한어권 부교역자로 부임해 5년 간 사역한 바 있으며 이후 타 교회에서 담임목회 및 개척교회 목회를 하다 2011년 다시 열린문교회에서 17년 간 김용훈 목사와 함께 사역했다.       김용훈 목사는 지난 21일 담임목사로서 전하는 마지막 설교에서 “은혜란,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것”이며 “열린문 교회는, 때로는 공동체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드러내며 걸어왔지만 그 부족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며 걸어온 공동체 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은혜가 이끄는 자리에 동참한 성도들에게 주님의 나라에서 함께 열매 가득 안고 서자는 말로 마지막 감사와 도전의 말씀을 나누었다.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교회 목사 담임목사 김용훈 상호의존 교회 김용훈 목사

2024-04-25

[우리말 바루기] 외래어 받침의 비밀

영어 단어가 등장한 것은 13세기 무렵이다. 우리나라엔 구한말 선교사에 의해 소개됐다. 표기법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케잌’이나 ‘케익’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의 귀에 들리는 대로 옮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올바른 표기는 ‘케이크’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선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일곱 글자 외에 ‘ㅋ, ㅌ, ㅍ, ㅊ’ 등이나 겹받침은 사용하지 못한다. ‘커피숖’을 ‘커피숍’으로, ‘디스켙’을 ‘디스켓’으로 적어야 하는 이유다.   고유어에선 ‘부엌, 콩팥, 풀숲, 봄꽃’과 같은 표기가 가능하다. 이유는 이들 받침소리가 모두 발음되어서다. ‘봄꽃’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만나면 [봄꼬치] [봄꼬츨]처럼 ‘ㅊ’ 소리가 난다.     외래어는 다르다. ‘커피숍’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결합하면 [커피쇼비] [커피쇼베서]처럼 발음한다. [커피쇼피] [커피쇼페서]로 소리 내는 사람은 없으므로 ‘커피숖’으로 적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익’은 왜 쓰지 못할까? 외래어의 경우 이중모음 뒤의 ‘k, t, p’ 발음은 받침으로 적지 않고 ‘크, 트, 프’로 표기하도록 돼 있다. ‘브레이크(brake)’를 ‘브레익’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말 바루기 외래어 비밀 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받침 이들 받침소리가

2024-02-19

"바닥서 위로 올라온 교회…신분 상승하니 안주"

선교사들은 맨 처음에 사회 하층민들에게 다가갔다. 나중에 그들이 신분 상승을 하면서 성공을 하게 되니까 현실에 안주해버린 거다. 게다가 기독교가 엄청난 성장을 하는 가운데 목회자 양성 과정 자체가 매우 안 좋았다. 아무 목회자나 양산했다."   오늘날 교회들은 어떤가.   "예를 들면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한국에서는 그 기간에만 1만여 개 교회가 없어졌다. 교인까지 감소했다. 과거에는 교회가 국가의 발전을 선도했는데 지금은 반지성주의로 인해 질적으로 하락했다. 사회는 지금 기독교를 외면하고, 기독교는 대처 기능을 상실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요즘 기독교는 정신을 차리고 있는 중이다."   왜 이런 상황이 됐나.   "한국 교회는 그동안 좋은 세월을 오래 누렸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좋은 세월을 보내면서 방심했다. 이 모든 건 기독교 본질에서 떠난 결과다. 지금 교회들은 병에 걸렸다고 봐야 한다. 대신 병은 치료할 수 있다. 우리에겐 신약과 구약, 성경이 있지 않나."   정치와 종교는 어떤 관계여야 하나.   "일단 교회는 정치 자체를 하면 안 된다. 좋은 정치가를 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정치 일선에 나서는 건 기독교의 본질과도 어긋난다. 오늘날 현실에도 맞지 않는다. 교회는 본연의 일에 충실하면서 인재를 성경적 가치관으로 키워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예를 들면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좋은 야당이 돼야 하지 않겠나. 여당도 엉터리 여당 말고 제대로 된 인재들이 모여 일을 해야 한다. 기독교 용어에 빗대자면 정치권도 '본 어게인(born again)'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키워낸 유능한 인재들이 사회 각 영역에 필요하다."   평소 통일을 위해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지금 국제 정세는 통일에 유리한 분위기로 조성되고 있다. 통일은 박자가 맞아야 한다. 국내적으로 먼저 정비가 돼야 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북한과 통일이 될 경우 이를 흡수할 수 있는 준비를 지금부터라도 미리 해야 한다."   통일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현재 동두천에 시니어타운인 '꿈꾸는 마을'을 준비중이다. 총 235세대다. 한국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인 65세에 정년 퇴직을 하는 전문가도 많다. 그들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계속 활용해야 한다. 꿈꾸는 마을에 연구소도 만들 예정인데, 뜻있는 사람들이 와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이런 마을을 또 세우고 싶다."   평소 교육의 가치를 중시하는데.   "현재 한국 사회는 공교육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문에 대안학교인 두레국제학교를 만들었다. 토론을 통한 교육, 스포츠, 성경 큐티 등을 강조한다. 영어 수업도 병행하고 있다. 학생을 중학생 때부터 영어로 발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최근에는 뉴저지 지역에서 진행된 창의력 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금상을 수상했다."   교육 이슈는 왜 중요한가.   "예수님은 사역을 할 때 모든 걸 제자와 대화를 통해 하셨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걸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벤치마킹하지 못하고 있다. 무조건 '일방적으로 믿어라' 식으로 했다. 이는 한국 교회에 반지성주의라는 폐해를 낳았다. 교회 내에서도 지성이 왕성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다. 아마 이 부분을 해결 못 하면 교회는 영원히 퇴출당할 것이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다."       두레마을은 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데.   "땅은 정말 중요하다. 오염 문제가 심각하지 않나. 우리가 창조된 때로, 우리 조상이 살았던 그때의 상태로 회복하자는 것이다. 노년층이 많을 것 같지만 이러한 가치 때문에 두레마을에는 젊은층도 많다. 20~40대까지 골고루 있다. 두레마을을 세운 건 13년 전이다.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 새 책을 냈다.   "'내 삶을 이끌어 준 12가지 말씀'이라는 책이다. 나의 80년 삶을 이끌어 주었던 12가지 말씀을 통해 살아온 지난 세월을 정리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고비마다 나에게 영향을 미친 성경말씀으로 글을 썼다."   건강은 어떤가.   "나는 역경을 거치면서 살아남는 법, 한마디로 생존법을 몸으로 익혔다. 그러면서 건강을 관리하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나보고 건강 나이가 50대라고 하더라."   관리 비결은.   "일단 소식(小食)을 한다. 뷔페를 가도 마찬가지다. 딱 정해진 양만 먹는다. 그리고 천천히 먹고, 정해진 시간에만 먹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음식에 대한 절제를 익혔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한다. 건강 관리에 자신감을 갖게 되니까 요즘은 하나님께 90세가 넘어도 계속 설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교회 안주 오늘날 교회들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

2023-12-04

[수필] 7월에 만난 인디언 어린이

선교사 가족이 찾아왔다. 몇 년 만인지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 했다. 7월 초가 되면 구글 OneDrive 사진과 함께 떠오르는 뜻깊은 날이 있다.     “미국에 웬 선교사?” 10년 전 대한감리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올 때 들은 질문이라고 했다. 미국 땅이지만 미국이 아닌 곳, 바로 호피 인디언 보호지역(Hopi Native Indian Reservation)이다. 미국 연방법이나 주법보다 ‘호피 법’이 위에 존재하고 그 위에 ‘마을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아직도 영어가 아닌 자기네 부족 언어인 호피어를 사용한다.     1000년을 이어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어 딸이 없으면 유산을 받을 수 없고 대가 끊긴다고 하니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만큼 무 개방, 무 문명을 고수하고 있단다. 자연 개발이나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사진을 찍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가장 보수적인 종족이다. 수시로 부족의 신을 위한 축제를 열기에 선교가 어려운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에 한국인 장두훈 선교사의 순교로 인해 선교가 시작됐다.     원주민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총과 무력을 피해 풀 한 포기 없는 돌산 위 편편한 메사(Mesa)로 숨어들었다. 최고 기온 화씨 110도의 뜨거운 기후, 해발 6500 피트 고지대에 생활 터전을 이루고 있다. 언덕 위에 세워져 이젠 폐허가 된 옛 성당을 통해 백인들에게 착취를 당했던 원주민의 아픔을 보았다. 오히려 한국 선교사의 노고와 헌신이 이 지역 주민에게 사랑으로 닿았다. 2대 이상혁 선교사에게 감화받은 원주민이 자기 집을 기증함으로써 Soongopavi Halayki 교회가 설립되었고 5대 박영진 선교사에 이르렀다. 선교는 열정(passion)만이 아닌 연민(compassion)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기념일 연휴에 그 교회를 방문해 선교사 가족에게 작은 격려를 하고 힘을 보태고자 했다. 더불어 그 지역 어린이를 위한 여름성경학교(V.B.S)를 개최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새벽 2시에 출발하여 애리조나 주의 I-40 프리웨이 동쪽 방면으로 플래그스태프(Flagstaff), 윈슬로우(Winslow)를 지나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달렸다. 선인장밭을 지나 황야로 접어들어 총 10시간 반을 달려갔다. 그랜드캐년의 동쪽 나바호 인디언 지역보다 더 깊숙하고 외진 거주지에 다다랐다.   첫날 정해진 시간, 교회엔 우리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린 찬양을 시작했다. 어린이가 한두 명씩 오기 시작했다. 나이별로 두 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지만 나중엔 네 그룹으로 55명이 참석하였다. 아이를 따라온 10대 엄마도 있었다. 그들과 청소년을 따로 그룹으로 만들었다. 마약을 접한 젊은 엄마의 고백과 재활 결심도 들을 수 있었다. 이어서 미술, 게임, 미니 올림픽 등 신나는 프로그램으로 즐거워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았다. 푸짐한 간식, 점심, 상품을 나누며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었다. 사흘 동안 더 많은 어린이가 모여들었다. 감동적인 체험을 통해 힘 있는 역사는 진행되었다.     문명을 외면하는 열악한 이 지역에서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이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안다. 잠시 머물고 가는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왔다. 한국 친구가 좋다며 서운해하는 선교사의 두 아들을 꼭 안아 주고 헤어졌다.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의 눈길은 두 아이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두 아들은 낯선 곳, 타 문화 속에서 인디언 아이들과 친구로 지내야 했다. 몇 년 만인가. 인디언 보호지역을 벗어나 한국 친구를 만나러 왔다. 선교사 자녀가 겪는 어려움이 고스란히 몰려와 콧등이 시큰해지고 뭉클해지는 이 마음을 어쩌랴.   이희숙 / 수필가수필 인디언 어린이 인디언 보호지역 한국 선교사 지역 어린이

2023-07-13

"이민교회 미래 밝지 않지만…연합해서 힘 모아야"

영어권 목회도 시작했다. 이중언어 사역을 시작했더니 어느덧 주일학교 학생들만 1500명 이상 모였다.   1000만 달러 장학기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1세대에서 끝나는 한인사회가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차세대 한인들을 위해 씨앗을 심는 게 필요했다. 장학기금을 모았더니 매해 30만 달러가 나왔다. 그 장학금으로 목회하는 동안 3000명 이상 학생을 도왔다.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만 100여 명 이상이었다. 지금은 그 학생들이 곳곳에서 대학 교수, 목회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나성영락교회는 그때 모인 기금으로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사람을 키운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부교역자의 성장도 필요했다. 함께 동역 하면서 그들을 최대한 많이 격려했다. 그때 부목사로 있었던 진재혁 목사, 박형은 목사, 양춘길 목사 등 많은 교역자가 이후 교계 곳곳에서 자기 몫을 다하는 목회자가 됐다. 그야말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성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27가정에 매월 2000달러씩 지원하며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지 현지 목회자 160명도 도왔다.     IMF때 한인 선교계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 KAMSA라는 기관을 조직해서 500명의 선교사에게 매월 200달러씩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그렇게 나성영락교회에서 16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70세가 정년이었지만 나는 68세에 은퇴를 결심했다. 전임인 김계용 목사님도 정년을 채우지 않았었다.     나는 참으로 받은 게 많은 목회자다. 목회를 하며 이렇다 할 위기도 사실 없었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을 보면 사실 마음이 아프다. 목회 환경이나 상황이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신학을 하겠다는 젊은이도 줄고 있다. 주변을 보면 택시 기사를 하는 목사들도 있다. 특히 중고등부 같이 차세대를 담당하는 사역자들이 그렇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한인 교회도 팬데믹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다.   인간적으로 이민교회 미래를 생각하면 사실 밝지 않다. 그럴수록 소형 교회들은 오히려 연합 운동 등을 통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중언어가 가능하고 합리적인 젊은 목회자들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갖고 임하면 그래도 한인 교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관련기사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고 박희민 목사가 남긴 이야기 정리=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이민교회 미래 나성영락교회 김계용 훗날 나성영락교회 후임 목회자

2023-05-29

선교도 이젠 '플랫폼 시대'

선교사가 소개한 '브링업 인터내셔널(Bring Up Internationalㆍ이하 브링업)'도 그 중 하나다.   브링업은 한국의 사단법인이자 국제 NGO 단체로 국제구호, 개발, 교류 등 '선교 플랫폼' 활동을 자처하고 있다. 선교지와 후방의 교회, 단체, 기업들이 플랫폼에서 선교를 위한 자원이나 노하우를 나눌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고 지원한다. 1998년부터 세계 3대 빈민가로 꼽히는 필리핀의 바세코에서 사역을 담당해 온 신승철 선교사가 지난 2015년 설립했다.   신 선교사는 "30여 년 선교사로 일하면서 현장의 필요와 후원 단체의 지원 사이에 큰 공백이 있음을 종종 보았다"면서 "브링업은 선교사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인적, 물적 자원은 물론, 네트워크를 통해 선교지와 후원처 활동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게 지원합니다"라고 밝혔다.   한번은 캄보디아 선교지에서 2주간의 영어 캠프를 위해 학교 시설과 기숙사를 무상으로 확보했지만 영어 교사와 제반 비용이 모자라 걸림돌이 된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이 브링업을 통해 전해지면서 필리핀인 10명이 흔쾌히 교사 동역자로 자원했고 교사들의 항공료는 중국에서 보내온 선교비로, 영어 교재는 미국의 한 교회에서 제공됐다고 한다.   그는 "브링업이 있었기에 자원이 쉽게 모이고 분배되고, 연결되었고 결국 현지에서의 선교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브링업에는 전 세계 24개 국에서 사업본부 또는 협력국가가  다양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신 선교사는 브링업과 같은 새로운 선교 유형은 보다 효과적인 선교 방법론을 갈망하는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강조했다. "오지에서의 희생과 헌신만이 선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 다양한 영역의 인재들이 모여 전체로서 하나가 되는 선교가 이뤄져야 합니다. 선교의 본질을 회복하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선교방법이 필요한 때입니다."   브링업은 선교지와 교회, 후원 단체들을 연결하고 교육과 리소스를 제공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나 후원단체의 이름으로 일하게 한다.   ▶웹사이트:bringupi.org   ▶문의:[email protected] 서정원 기자선교도 플랫폼 선교 플랫폼 신승철 선교사 플랫폼 사업

2023-04-21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만남들!

선교사로 가실 부부와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남편 D 선교사님은 일본 오사카에서 생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플로리다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50세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겠다고 친구와 약속을 했었다고 합니다. 약속이 생각나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사직서를 냈습니다. 사표를 낸 날 2군데에서 지금 연봉보다 2배를 주겠다는 편지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내 S 선교사님은 조선족이라고 합니다. ‘연변’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법대를 가라고 종용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2학기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최연소 검사라고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습니다. 일본에 가셨을 때 양질의 나무들을 본 후 이 나무들을 수입할 생각을 하셨습니다. 이 나무로 고급 가구를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했습니다. 딸이 일본에서 국제무역에 대한 법률공부를 더 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 법률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D와 S는 지인의 소개로 오사카 대학에서 만났습니다. 두 분은 결혼을 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D 선교사는 교수로 근무를 했습니다. S 선교사는 집에서 스시와 롤을 만들어 SAM’S에 납품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기숙학교의 과학 선생님으로 가실 예정입니다. 교수 연봉에 비해 사례비(월급)도 적고 할 일도 많지만 빨리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낮12시경에 만나서 밤 12시 넘어서 헤어졌습니다. 12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신학대학원의 분교가 일본과 대만에 생기면 두 분이 통역을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D 선교사님은 한국어, 일본어 그리고 영어가 가능한 분입니다. S 선교사님은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러시아가 가능한 분입니다. 두 분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습니다. 탬파에 왔으니 덴버에서 볼 수 없는 바다를 보러 해변으로 갔습니다. 물고기를 낚으면 돌고래가 물고기만을 빼내어 먹는다고 합니다. 돌고래에게 물고기를 주면 10만 불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물고기를 많이 잡았지만 돌고래는 보지 못했습니다. 새들이 작은 물고기를 바다로 던지면 채갔습니다. 구시가지에 나갔습니다. 미국 옛날 도시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시가지를 순회하는 전차가 있었습니다. 특이한 광경은 공원에 닭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탬파 시에서 보호하는 닭들이라고 합니다. ‘유령 작가’의 저자 ‘로버트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훌륭한 책은 모두 다르지만 형편없는 책은 완전히 똑같다. 이런 일을 하면서 나쁜 책을 수도 없이 읽은 후에 내린 결론이다. 너무나 형편없어서 출간될 수도 없는 책들. 소설이든 회고록이든, 나쁜 책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거다.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좋은 책이 반드시 진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읽는 동안만큼은 사실처럼 느껴져야 한다.” 좋은 소설은 진실을 위해 허구를 차용할 뿐, 사실을 감추려고 거짓을 꾸미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소설이 허구라는 걸 알지만 좋은 소설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이번 플로리다 여행에서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사신 분들을 만났습니다. ‘만남은 인연이지만, 관계는 노력이다!’라는 말과 ‘꽃보다 할배!’라는 TV의 여행 프로그램이 생각났습니다. 목회칼럼소설 에콰도르 돌고래가 물고기 집사님 부부 목사님 부부

2023-02-17

"하나님 은혜로 성장한 한인사회, 미래 향해 나가야"

선교사들 지원과 교회 건축 등 복음 전파에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반기독교적(동성애, 낙태 등) 사회이슈가 들끓는 미국에서 기독교가 비난을 받고 있는데, 교회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위기라고 한다. 한국,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를 말하지만 영적 위기 즉, 교회위기 현상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는 현실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 ‘위기’라는 말이 없었을 때는 거의 없었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님은 늘 비난의 대상이었고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핍박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최대 위기였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시절 흥왕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그 배경에는 순교의 제물로 바쳐진 제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위기를 뚫고 일어난 부흥의 역사인 것이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다. 카톨릭이 지배했던 중세 천년의 역사를 마친 후 기독교가 새롭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을 때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던 때였다.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마틴 루터, 영어 번역을 한 위클리프, 모두 예수를 바르게 믿는 것 자체가 죄목이 되는 위기를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지만 그 위기를 뚫고 종교개혁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위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이 위기를 뚫고 새로운 장을 펼쳐낼 것이다. 바다에 태풍이 몰아친 후, 바닷물이 맑아지고 잠잠해지듯, 현재 상황에 교회가 해야 할 사명과 원색적 복음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성도들은 팬데믹 위기와 사회적 공격의 위기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신앙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뇌해야한다.   하나님은 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지는 않는다. 광야의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만나’를 맛 볼 수 있는, ‘위기는 기회’인 것이다.           - 목사님께서는 버지니아 주의회, 연방하원에 초청돼 개원기도를 했다. 이때 ‘특정 종교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공문을 받았으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으로 마쳤다. 이같은 소신 행보가 많은 기독교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됐다. 미국 사회는 여러 민족이 사는 만큼 여러 종교가 있고 그 가운데 목회를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일것 같은데...   (웃음)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 보통 정부에서 보내오는 공문서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으므로 기독교적인 민감한 용어는 사용하지 말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맺지 말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목사이므로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껏 어느 한 사람도 “왜 지침을 어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라는 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대부분 “목사님, 그렇게 기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주의회에 갔을때는 기도 전, 부지사가 조용히 부르더니 “오늘 기도는 평소 목사님이 믿는 하나님께 그대로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비록 공문서에는 특정 종교이름 호명을 자제할것을 요구하지만 사람들이 목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목사답게’ 기도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소리쳐도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인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점점 기독교가 문화화 되어가고 있지만 ‘(영적으로)아직 미국이 살아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 목사님께서는 미 정치권에서부터 총회를 비롯, 부흥회라던가 몇해전 강연했던 다니엘 기도회 등 기독교 단체에서 초청하고 싶다는 요청을 많이 받는것으로 알고있다. 목사님께 목회란 어떤 의미가 있으며 목회철학은 무엇인가   올해로 목회를 시작한지 10년이 됐다. 제 목회의 가장 핵심은 바로 ‘한사람’이다. 목회라는 것은 영혼을 돌아보는 일이라 생각한다. 교회 규모에 걸맞는 목회를 기대한다면, 공적으로는 ‘설교하는것’, ‘대중앞에 서는 일’ 등 이겠지만 저의 목회 방향은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적 목회라고 생각한다. 즉,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셨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겨우 열두제자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셨다. 소수의 사람들이 변화됨으로 가정, 사회를 넘어 전 세계가 변화되는 세상변혁을 바라보셨을 거다. 이것을 두고 저는 ‘한사람 목회’라고 부른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38년 된 병자 등 힘없고 낮은 사람들의 한 영혼을 향해 주님의 삶을 드리셨다. 저 역시 목회를 하는 살아있는 날 동안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를 하고자 한다. 누군가 “어떤 목회자로 기록되고 싶은가”를 물어오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류응렬 목사는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목사였으며 언제든지 곁에 있어주었던 목사였다”로 남길 소망한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가 올 새해부터 특별한 사역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소개를 좀 해달라   올해는 KCPC가 50주년을 바라보는 해 이다. 50주년을 준비하며 교회 내, 지역사회, 지역 교회 및 목회자들, 미국 내 2천 8백개 한인교회들과 함께 할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역은 온라인교회인 KCPC ON이다. 단순히 온라인예배 참석을 넘어 여러 사정으로 교회를 다니지 못 하는 사람들, 가령, 공산주의 나라 혹은 이슬람국가에 거주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우들, 흔치 않지만 가정의 배우자가 원하지 않아 교회를 나오지 못 하는 경우, 한인 교회가 없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 등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다니지 못하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을 위한 특화된 예배를 준비한다.   원하는 경우 훈련과 소그룹 모임도 가능하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정해진 시간에 온라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온라인을 통해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KCPC ON의 목적이다. 이를 통해 바라는 것은 신앙과 예배가 회복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교회로 연결되어 교회를 다닐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 기독교는 ‘행함의 종교’라고 한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는데, 기독교가 기독교답고,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중요하고 목사로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오직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만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생명 바쳐 사랑하셨기에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이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살아내었다.   수많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기에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복음이 전해져 올 수 있었다. 부족하지만 대다수의 신자들은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깨끗한 태양빛에 먼지가 선명히 보이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태양보다 빛나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므로 더 높은 윤리의식, 신전의식을 갖게 된다면 세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보지 않을까. 세상의 가치관에 비교적 우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우선 저부터 그래야겠다(웃음) “그리스도인 답게 굴어야지”라는 말에 “왜 그리스도인에게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가”하며 격분할 것이 아니라 외려 그말은 굉장히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말이다. 그만큼 기독교인에게 기대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워싱턴 20만 한인들의 절대 다수가 기독교인 일 정도로 워싱턴 이민사회는 기독교가 그 출발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의 이런 선한 영향력을 한인사회 저변에 확대시키는 목사님의 행보는 교계뿐 아니라 한인들에게도 모범이 되고 있다. 계묘년 새해, 한인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가정에 특별히 ‘건강’으로 찾아오셔서 가족 모두 건강하기를 기도한다.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가정 가운데 흘러 넘치길 기도하며 특히 사랑하는 자녀들, 다음세대 아이들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부모님의 헌신적인 땀과 눈물을 아이들이 가슴에 잘 새겨 자랑스런 자녀로 자라나길 기대한다.   한인사회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걸어왔지만 과거의 찬란한 역사보다는 미래에 더 소망을 두고 다음세대를 키워내는 한인사회가 되길 바란다. 우리는 한 동포이며 한 형제다. 곁에있는 사람 중 어두운 곳에서 눈물 흘리는 동포가 한 사람도 없도록 온 동포가 한 가족이 되는 해가 열리길 바란다.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가정이 되길 축복한다.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한인사회 하나님 교회위기 현상 지역사회 이웃들 초대교회 시절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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