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날 감방서 자고 있었다…'휴거' 그 교주의 비밀
찬양과 찬송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직 하나님 마음에 들 열망으로 가득하구나.’ 나는 주위를 힐끗대며 생각했다. 조금 전 이곳에 들어올 때 봤던 장면도 눈앞을 스쳐 갔다. 국내 모든 방송과 외신까지, 교회 앞에 몰려든 것은 취재진만이 아니었다. 신도들의 가족 수천 명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우리를 향해 고함을 치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 아이고 이 양반아! 뭔 귀신에 씌어서 이러는 거야. 정말! " " 이놈의 자식. 대학 안 갈 거야?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 " 수천 개의 사연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난 그들이 안쓰러웠다. 구원은 믿는 자만의 것이었으니까. "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자 찬양하는 목소리들이 한층 격해졌다. 밖이 소란스러워질수록 기도 소리는 더욱 커졌다. 신도들의 방언과 찬송 소리가 데시벨을 높였다. 혹시나 기도가 부족해서, 신심이 모자라서 ‘명단’에 들지 못할까 봐 신도들은 절박했다. 몸 안에 남은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냈다. 한 남자는 무릎을 꿇고 연신 절을 하며 하나님을 목청껏 불렀다. 누군가는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맞잡고 입안으로 기도문을 되뇌었다. 댕~ 댕~ 댕~ 강당의 벽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마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격렬했던 기도와 오열, 찬송 소리가 진공 속으로 빨려드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 ‘허흡’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가 그마저도 고요 속에 잠겼다. 나는 온몸에 힘을 풀고 눈을 질끈 감았다. 틱, 틱, 틱 소름 돋는 침묵 속에 초침 소리가 맥박처럼 느껴졌다. 몇 분이 지났을까. 살짝 눈을 떠 주위를 본 순간, 내 몸은 그대로였다. 옆의 언니도, 앞의 사람도 멍하니 시계만 바라봤다. 그날 우리에겐 휴거가 없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종말론 " 너 책 좋아하잖아. 요새 이 책이 난리더라? " 다섯 달 전. 집에 놀러 온 친언니가 책 한 권을 건넸다. " 책이라면 담 쌓고 살던 언니가 웬일이래? " 언니가 쥐여준 책은 표지부터 강렬했다. 새하얀 바탕 위에 커다랗게 군청빛깔 제목이 쓰여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지은이는 이장림. 출판사는 다미선교회 출판부. 언니가 돌아가고 책을 펼쳤다. 나는 두 시간쯤 저녁밥 준비도 잊고 홀린 듯 책에 빠져들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갈수록 엄청난 공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휴거 목사 이장림은 누구? 6·25 때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기독교 서적 출판사에서 번역부장으로 일하다 ‘휴거(Rapture)’를 비롯한 외국 종말론 서적들을 접했고, 일부는 번역해 국내로 들여왔다. 이 과정에서 종말론에 심취한 그는 가정 예배를 통해 휴거 전도를 시작했다. 1988년 8월 서울 마포구 자신의 집에 ‘다가올 미래’의 앞 글자를 딴 ‘다미선교회’를 설립했다. 신도였던 A씨는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출판사에서 성경 해석을 했다는 경력도 믿음직했고 달변이었다. 지위에 비해 털털한 모습을 보이는 게 존경스러웠다”고 기억했다. " 이게…. 뭐야? " 책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종말을 예언한 1999년보다 7년 앞선 1992년경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 하늘로 승천해 인류의 파멸을 피한다고 했다. 그 승천을 ‘휴거’라고 불렀다. 지상에 남은 이들에겐 제3차 대전, 아마겟돈 전쟁을 비롯한 지옥 같은 고통만 남았다는 내용…. 외국의 신학자와 예언자들의 말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며 ‘휴거’를 장담하는 책의 내용은 왠지 다 맞을 것만 같았다. 나는 책에 끼워져 있던 전단 속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금년은 휴거의 해’. 예수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왜 그 책에 몰입했는지, 그 전단 속 단언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 골똘히 생각할 때가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지만 아마도 그즈음 내 삶을 잠식하고 있던 고통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는 7남매 사이에서도 별다른 이유 없이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팠다. 특히 11살에 부모님을 따라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고는 더 허약해졌다. 음식을 거의 삼키지 못한 날도 많았다. 19살엔 툭하면 앓아누웠다. 집이 가난해 제대로 병원을 가서 진단을 받은 적도 없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라 밀가루에 사카린을 섞어서 구운 것만 조금씩 뜯어먹으며 연명했다. 어찌어찌 결혼하고 둘째까지 낳은 30대 초반에는 결핵이 와 일상 활동조차 못 할 만큼 힘들었다. 자리에 누우면 기운이 없어 땅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천장을 보며 똑같은 기도만 반복했다. " 예수님 저를 그냥 데려가 주세요. " 교회 목사의 질타와 개종 화물차 운전을 오래 한 남편은 따뜻한 심성만큼이나 어려운 사람을 못 본 체하지 않았다. 아쉬운 소리 하는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는 일이 흔했다. 형편이 어려워 아이를 낳고도 우유 하나 쉽게 사 먹이지 못했다. 태어난 지 보름 만에 급성 폐렴에 걸렸고, 이후에도 응급실에 실려 다니는 일이 반복됐다. ‘제발 누가 나 좀 편하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늘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날부터 ‘휴거’란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책에 나온 다미선교회의 전화번호를 적어뒀다. 며칠 후엔 성산동 다미선교회까지 가는 버스 노선을 찾아 놨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찾아갔다. " 목사님, 저는 휴거를 받고 싶어요. 다미선교회로 가겠습니다. " 담당 목사와 전도사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부었다. 본 적도,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다미선교회 생활이 시작됐다. 이미 많은 이가 휴거를 받기 위해 모여 있었다. 챙길 가족이 없는 미혼자들은 교회에서 숙식도 했다. 휴거 피해자 실태 당시 언론들은 종말론 신봉 교회와 단체의 합이 국내 70여 곳이라고 보도했다. 추종 신도는 2만여 명, 이 중 5000여 명은 가정이나 생업, 학업을 등진 것으로 봤다. 휴거론자들은 “국내외 160개 조직, 10만여 명의 신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관, 동사무소 직원, 역무원, 국내 굴지 대기업 사원 등이 직장을 그만두고 휴거를 기다렸다. 일부 청소년은 학업을 포기하고 가출까지 했다. 휴거를 앞두고 자살하거나, 신도를 구타하는 등 끔찍한 사건도 잇따랐다. “다미선교회, 여기가 지상 천국” 구원받을 날짜를 받아놓은 이들인 만큼 현생의 욕심도, 시기도, 분노도 없었다. 모두가 환히 웃고, 서로서로 친절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음식을 싸 와 함께 먹었다. 화장실 앞에선 서로 먼저 쓰시라 양보했다.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특히 신도 중에 부자가 많다는 점도 안심이 됐다. " 나처럼 힘들어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만 모인 게 아냐. 잘사는 사람까지 올 만큼 휴거는 가치 있는 일이야. " 우리 집 면목동에서 버스를 타고 성산동 다미선교회를 오가는 여정은 삶에서 처음 느껴보는 설렘과 즐거움이었다. 그때쯤이었다. 휴거를 믿지 않던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 꿈쩍 않던 남편은 나의 한마디에 못 이기는 척 넘어왔다. " 당신 내가 애들 데리고 휴거했다고 생각해 봐. 혼자 이 땅에 남을 거야? " 휴거를 하루 앞두고 우리 식구는 짐을 쌌다. 교회에서 명한 대로 위아래 흰옷을 입었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좋은 옷 몇 벌은 곱게 비닐에 싸서 대문 앞에 뒀다. ‘깨끗하니 입어도 됩니다.’ 메모지 한 장을 붙였다. 저녁 8시 아이 둘을 안고 남편과 함께 성산동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휴거는 없었다. 28일 자정이 됐을 때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몇 시간 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도 나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실신하다시피 2~3주는 그냥 누워서 지냈다. 남편은 나를 질타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삶의 거대한 해프닝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을 찾아갔다. 물론 그 뒤로 힘든 일이 없던 것은 아니다. 휴거 신도라는 주홍글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마음의 안정도 찾았다. 그러나 꼭 한 번은 이장림 목사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정말 휴거를 믿었던 것이냐고. 목사 딸도 휴거에 빠져 90년대에 휴거 사태를 가까이서 바라봤던 종교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국 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대표회장인 진용식 목사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이 휴거론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 목사 딸이 휴거론에 빠질 정도면 말 다한 거죠. " 전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던 진 목사는 어느 날 딸이 집에 와서 휴거에 대해 물어봤다고 한다. 자세히 들어보니 휴거 신도였던 담임교사가 매일같이 비디오를 틀어주며 아이들을 세뇌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휴거가 해프닝으로 끝난 뒤엔 곧장 일상으로 돌아왔다. " 그때 느꼈어요. 순수한 아이들이 저렇게 빠져들 정도인데, 어른들이 작심하고 믿게 되면 설득의 여지가 없겠구나. " 이후 진 목사는 이단·사이비 신도 2000여 명을 개종시켰다. 앞서 다미선교회 신도였던 박선숙씨가 일상을 회복하는 데도 진 목사가 큰 힘이 됐다. (계속) “휴거 한 달 전 이장림은 이미 감방에 있었어요.” 당시 언론에선 수감 중이던 이장림이 “휴거의 그날, 자정이 되기 전 이미 잠들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또 그가 갖고 있던 3억짜리 채권에 신도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채권엔 무슨 내용이 있었을까요. 수많은 종교 중 하필 사이비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요.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2847 그랜저 탄 부부 팔다리 잘랐다…“부자 증오” 지존파 살인공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9348 “대통령, 그리 드럽겐 안한다” 하나회 3시간 만에 박살 낸 YS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6572 “난 포르노 주인공이고 싶다” 그 후 25년, 서갑숙의 지금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2556 유서 써놓고 매년 고쳐 쓴다, 19살 ‘삼풍 알바생’의 그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5812 윤석만.김나한([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