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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못하는 한인 3세가 장구·가야금 만들어 화제

부모님으로부터 2008년 물려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2년 전까지 올림픽과 페도라길에 있던 가게를 정리해 악기와 공예품들을 집과 유료 사설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가야금 줄을 갈고, 공예품들의 의미와 용도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한국인의 혼이 다시 살아났어요. 이젠 행복하게도 유럽을 포함, 전세계에서 구입 문의가 옵니다.”     그의 조부모는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기 전 미국에 왔다. LA에 둥지를 틀고 윤씨의 아버지가 태어나 뿌리를 내렸다. 한인(Korean American)이라는 말 자체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의 조부모는 리버사이드에 살다 당시 아시안에게 집 구매를 허용하지 않자 LA로 옮겨왔고 이후 줄곧 LA에 거주했다.       그의 부모는 트럭 운전사와 미용사로 일했는데, 한국어가 능숙했던 어머니가 가게를 맡아 악기들을 판매했다. 실제 60년대 코리아나 기프트는 LA에서 유일한 한인 선물 가게로 기록됐다. 올림픽과 피코길에 조그만 한식당들이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다.   “60~70년대에 한국에 파견됐던 미 해병대원들이 귀국하면서 놋쇠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가져왔어요. 그들이 우리 가게에 오면 추억을 떠올렸어요. 당시 전쟁터에 쏟아진 탄피들로 만든 재떨이, 담뱃대 등 공예품들이 태평양을 열심히 건너온 탓이죠. ”     윤씨가 판매한 오래된 단일 고가품은 1만5000달러에 이르기도 한다. 오랜 단골들과 입소문이 있어서 가능한 이야기다.     그는 캘스테이트LA에서 교사 자격증을 받고 미술 교사로 20년 일했다. 거기서 배운 색과 예술의 감흥이 한국 전통 악기와 공예품을 보는 안목으로 발전한 바탕이 된 셈이다.     아직 윤씨의 집에는 자개로 만든 코리아나 기프트 간판이 남아있다. 팬데믹 후 온라인으로 판매터를 옮겼지만 추억과 전통은 여전히 놋쇠 공예 재떨이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는 한글이 익숙하지 않아 오래된 고품들에 쓰여진 한문 구절을 여기저기 주변 한인들에게 문의하기도 한다. 오래된 공예품에 설명을 붙여줄 사람도 찾고 있다.     “어머니의 한국어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고 이제는 한인 1세들을 만날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이런저런 질문도 하고 도움도 받아요. 최근엔 병풍에 적힌 오랜 글자들을 모두 해석할 수 있었죠. 고마운 일입니다.”     삼대에 걸쳐 이어진 미국 생활 탓에 그의 집에 쌓인 공예품과 전통 악기에는 60년 넘은 한인타운 역사도 깊게 녹아있다.     그는 “돈보다는 이제 일종의 사명이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한국인 가야금 가야금과 장구 la한인타운 남쪽 한인타운 역사

2025-02-20

그 우동, 끝내 세상 못 나왔다…주방서 죽은 50대 男의 수첩

부모님이 돌아가신 나이 든 남자 형제가 자주 만나진 않는다. 명절에 한 번씩들 보면 좋은 관계다. 동생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였다. 혹시나 해서 묻기를 꺼렸는데, 잘못된 선택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시신이 2주나 방치되면서 이웃들 신고로 현장이 발견됐다. 그리고 유일한 가족인 형에게 경찰의 연락이 간 것이다. 작업 절차와 소요 시간을 설명해 주고 끝날 즈음에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의뢰인은 멍한 표정으로 나서다가 문득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짐이 많긴 하지만 아마 동생의 수첩이 있을 거예요. 아주 오래된 건데. 그건 꼭 버리지 말고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랜만이었다. 고인의 유품을 꼭 집어 어떤 것을 찾아 달라고 하는 부탁이…. 그것도 돈이 되지 않는 물건을 말이다. “네, 꼼꼼히 찾아보겠습니다.” 그 수첩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질문을 삼키려 입을 꾹 닫았다. 시취를 없애려 약을 치고 부패물을 걷어내는 특수청소부터 했다. 짐은 많았지만 소위 ‘쓰레기집’은 아니었다. 최근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한 사람의 집이었기 때문에 정리의 순서는 곧 잡혔다. 함께 간 직원과 방을 나눠 작업에 들어갔다. 유족이 부탁했던 ‘수첩’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 주머니에 무언가 비죽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수첩이었다. 소중해서 감춰둔 물건이 아니라 평소 늘 소지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두꺼운 수첩에 글씨가 빼곡했다. 이미 노안이 꽤 온 나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함께 간 직원을 불렀다. “용철씨, 이거 뭐라고 써 있어? 이분은 노안이 안 왔나 보네. 난 하나도 안 보여. 글씨가 너무 작아.” “일본식 우동, 가쓰오부시 육수 내는 법….” 직원이 메모를 줄줄 읽었다. 사자(死者)의 공간에서 외람되게 시장기를 느낄 만큼, 맛깔나는 음식들의 레시피가 가득했다. 간혹 유품을 정리하다 보면 고인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는 물건들을 발견한다. 요리사라면 자기 이름이 적힌 전문적 주방 칼이 나오고, 미용사라면 멋들어진 가위 세트가 발견되기도 한다. 요리사였나 보다, 이 사람은. 정리가 끝난 뒤 다시 찾아온 고인의 형에게 동생의 요리 수첩을 건넸다. 형은 동생의 손때가 묻은 수첩을 계속 넘겨봤다. 읽는 게 아니었다. 다만 수첩에 깃든 동생의 손길을 느끼고 싶은 것 같았다. 손을 떨었다. (계속) 그 수첩 속 레시피는 맛집의 영업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집을 피우더니…” 형이 털어놓은 사연은 잔인한 현실이었습니다. 수첩이 전한 비극,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8751 〈어느 유품정리사의 기록〉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나쁜 새끼” 아내는 오열했다, 11층 아파트의 ‘피칠갑 거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7091 창고 속 비밀 공간서 죽었다, 편의점 알바생 ‘마지막 의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5433 웃음 가스는 죽음 가스 됐다, 옥탑방 청년 ‘기묘한 배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4511 그녀 시신 온전히 못 떠났다…욕조 물 퍼내자 드러난 ‘흔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8497 김새별([email protected])

2025-02-19

서울디지털대, 1학기 신·편입생 최종모집 14일 22시까지

미용사) △스포츠전공(생활스포츠지도사) △반려동물전공(반려동물행동지도사) △디자인학과(시각디자인기사) △문화예술경영학과(갤러리스트) △문예창작학과(문예교육지도사) △회화과(문화예술교육사) △실용음악학과(문화예술교육사) △웹툰웹소설전공(독서지도사)을 졸업하면 학위와 함께 관련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 첨단 신산업분야 학과 신설과 풍부한 장학제도 최근 신설된 건설시스템공학전공, 산업안전공학과, 반려동물전공 등은 공학&기술 분야, 생명과학&의학 분야, 자연과학 분야에서 융합교육을 선보이고 있다. 사회복지학과도 최상의 교육 커리큘럼으로 정평이 나 있다. 또 상담심리학과는 사이버대 최대 규모의 상담심리센터를 기반으로 실습 콘텐츠를 구축해 최상의 커리큘럼으로 주목받고 있다. 학위과정은 체계화된 고등교육의 배움을 실현하고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학과 특성화 교육, 자격증 취득 과정, 온오프라인 전문가 특강, 실무중심 학업·진로 역량을 강화하는 수업을 중점으로 운영된다. 입학생 전원 장학은 신입생에게 졸업 시까지 수업료 25% 감면, 편입생에게 1~2년간 40% 감면 혜택이 적용된다. 이외에도 본교와 위탁교육계약을 체결한 산업체 및 기관 임직원 또는 중앙부처·지자체 공무원(경찰, 소방관 포함), 공사공단 및 국내 유수 기업 등 재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업체 위탁전형, 부사관, 장교, 군무원 등 직업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군 위탁전형, 학사편입학전형, 북한이탈주민전형, 특수교육대상자를 대상으로 하는 장애인전형, 기초생활수급권자,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기회균등전형으로 전형유형에 맞게 지원할 수 있다. 올해 국가장학금 지원대상은 기초·차상위계층 및 소득분위 기존 8구간에서 9구간으로 확대돼 지원대상이 아니었던 학생도 요건을 확인하여 신청하면 교육비 부담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다. 서울디지털대 등록금은 학점당 6만 6천원으로 사이버대학 중 최저수준이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직장인부터 공무원, 전업주부, 군인 등까지 학생들이 입학시 다양한 장학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입학팀 관계자는 “직장인들은 업무 효율성을 높이거나 자신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며 “우수한 교수진과 전문가들이 직무 분야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경력발전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와 서비스로 경쟁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5학년도 1학기 입학을 희망하는 지원자는 서울디지털대 홈페이지에서 14일(금) 22시까지 온라인으로 원서를 접수하면 된다. 신입학은 고졸 학력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하고, 편입학은 학년별 학력자격을 충족하면 된다. 합격자는 2월 20일(목)에 발표될 예정이다. 이후 합격생의 등록기간은 2월 20(목)일부터 25일(화)까지다. 모집 관련 제출 서류와 전형료 등 자세한 사항은 서울디지털대학교 입학지원센터 홈페이지나 입학상담 전화, 카카오톡 ‘서울디지털대학교’ 1:1 상담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2025-02-14

"子 앞에서 무릎꿇고 욕설·폭력"..'족쇄부부' 아내 집착+통제, 오은영도 '절레'('결혼지옥')

미용사’라는 같은 직업을 가져 공통점이 많았던 두 사람은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연애 한 달 만에 초고속 동거를 시작했다. 게다가 아내는 남편과 동거 당시, 아버지한테 집으로 붙잡혀와도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했었다고 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현재, 아내는 “제발 이혼만 해달라고”, “죽을 것 같으니 나 좀 놔달라고”라며 남편에게 끊임없이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내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는 남편이 가족을 알아주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 이에, 남편 또한 아내가 결혼생활을 너무 힘들어해서 사연을 신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편이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었고,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바뀔 거라는 기대가 없어져 버린 상황인 두 사람. 아내와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미안해”가 습관이 돼버린 남편과, 같은 실수와 사과를 반복하는 남편에게 지칠 대로 지친 아내는 응어리가 쌓여 공격적인 행동까지 일삼는 중이었는데. 심지어 아이 앞에서까지 심한 언행과 과격한 행동을 하고 있어 오은영 박사는 더욱 따끔한 일침을 날렸다고 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과연 오은영 박사는 두 사람에게 어떤 힐링 리포트를 내렸을까. 아내는 주부로서, 남편은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내며 5살 아이를 열심히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부부. 아내는 과거에는 미용사였으나 현재는 전업주부로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고, 남편은 헤어디자이너 겸 미용실 원장이다. 큰 규모의 미용실을 운영 중인 남편은 고객 상담부터 예약, 디자이너와의 소통, 매장 관리 등 다양한 일을 해내며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일 시작하고 3시간쯤 지나자, 핸드폰에 온 신경을 쏟으며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남편. 그 이유는 어떤 상황이든 간에 아내와 3시간마다 연락해야 하는 규칙 때문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연락하는 시간이 일률적이면 “알람 맞춰놨냐”라며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의심하는가 하면, 메시지와 전화 중 하나로 통일해서 연락하면 정성이 없다고 여긴다고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내와의 다툼을 피하고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연락 규칙’들.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남편은 무릎을 꿇어야 하거나, 이혼해달라는 말과 폭언을 듣는다는데. 심지어 아이 앞에서 폭력과 욕설이 있을 때도 있다고 해 더욱 경악을 불렀다. 이에, MC 문세윤은 “연락 늦은 일이 폭언을 들을 정도까지의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라고 혀를 내둘렀고, 오은영 박사도 “이유가 뭐든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은 절대 있어서 안 될 일이다. 또한,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는 아이 앞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이 지켜야 하는 규칙은 ‘연락 규칙’ 뿐만이 아니었다.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또 다른 규칙은 바로 ‘지각 규칙’. 남편이 차가 밀려 집에 늦게 도착하면, “너 일부러 천천히 운전했지”, “아이 보기 싫어서 늦게 들어왔지”라며 남편을 들볶는다는 아내. 남편은 집에 1분이라도 일찍 도착해야 아내에게 덜 혼나기 때문에 퇴근길 운전도 평소보다 격렬하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남편의 빠른 운전에 일상을 촬영하는 제작진이 남편의 차를 놓칠 정도였는데. 미용실 정산 오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15분 늦은 퇴근을 한 남편.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 아내가 있는 방으로 가 죄인처럼 사과했다. 그러나 “일이면 늦어도 되는 거냐”라고 큰소리를 내다가 결국 이혼을 요구해버리는 아내. 이에, 남편은 아내가 본인의 삶이 사라져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어서 문제를 알아도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부부의 모습을 지켜본 오은영 박사는 “아내의 요구는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은영 박사는 아내가 본인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의외의 분석을 해 모두를 의아하게 만들었는데. 오은영 박사는 아내가 ‘사랑해’라는 말로는 사랑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아내는 누구나 도달하기 어려운 사랑의 기준을 만들고, 힘들게 기준을 통과하는 모습으로 상대의 사랑을 확인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방법은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오은영 박사는 아내가 혼란형 불안정 애착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강박적으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는 걸 불안해서 못 견디고, 이 때문에 상대에게 과도한 통제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남편에게 혼란형 불안정 애착은 떨어져 있으면 외롭고, 붙어있으면 공격을 한다고 말하며 남편은 이런 아내의 이면이 힘들겠지만, 피하지 말고 아내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야 한다고 힐링 리포트를 제시했다. 또한, 안전한 대화가 어렵다면 중재자를 놓고 대화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 휴일 맞이 나들이를 나온 부부와 5살 아이. 오전에는 승마장과 에어바운스 놀이터, 오후에는 놀이공원, 저녁에는 외식까지 가는 바쁜 일정이다. 피곤해도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려는 아내는 아이가 어릴 때 부모와 정서적 교감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승마와 놀이터, 놀이기구 등 어떠한 것도 참여하지 않고, 오직 남편만 아이를 돌봤는데. 이에 아내는 평일에 본인이 전적으로 아이를 육아하기 때문에 주말에는 아이가 남편과의 교류를 쌓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 육아를 함께하고 싶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평일에도 미용실 퇴근 후 ‘무조건 2시간 동안 아이를 놀아줘야 한다’는 규칙이 힘들다고 고백한 남편. ‘무조건 2시간 동안 아이를 놀아줘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오히려 아이가 밤 11시, 12시가 되어도 못 자는 일도 있었다고 해 MC들은 “아이가 자고 싶을 때도 있을 것 같다”라며 걱정을 쏟아냈다. 한편, 오은영 박사는 “아내는 육아를 배턴 터치 개념으로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 모습이 마치 이혼 부모가 면접 교섭하는 느낌이라고 강하게 지적했다. 이어, 오은영 박사는 육아라는 것이 5:5 비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짚어 주었다. 아내의 마음이 현재 어려운 건 알지만, 지금 이 상태가 유지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부부에게 “두 사람의 양육 방식을 계속 이렇게 둘 수 없기에 제가 더욱 강하게 말씀드린다”라며 따끔하게 조언했다. 방송 말미 공개된 다음 주 예고편에서는 ‘빈말’은 가식이라며 직설적인 표현 방식을 고수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의 표현 방식이 배려와 예의가 없다고 느껴져 괴롭다는 아내가 등장했다. 남편의 직설적인 말에 장인어른까지도 상처를 받았다고 해 더욱 궁금해지는 두 사람의 사연, 역대급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부부의 이야기는 12월 9일 월요일 밤 10시 45분 MBC '오은영 리포트 – 결혼지옥'에서 찾아볼 수 있다. /[email protected] [사진] MBC 김나연([email protected])

2024-12-02

아들 몸에 불 붙인 엄마, 징역 25년형

부모에게 연락해 아들을 돌봐줄 것을 요청했다.  테일러의 부모는 2주 동안 손자를 돌봤으나 화상이 악화되자 다시 병원에 갈 것을 요청했으나, 테일러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2주 동안 테일러는 아이를 보기 위해 부모의 거주지에 딱 한번만 방문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며 술파티를 벌였다.  레즈비언인 테일러는 저먼타운에서 미용사로 일하면서 동성 부인 차레즈 스노그래스-테일러와 함께 모두 6 자녀를 양육하고 살아왔다.     결국 아이의 조부모가 워싱턴DC 아동병원으로 손자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으나, 치료시기를 놓쳐 신체 대부분이 고름으로 뒤덮혔다.  아들은 팔과 가슴, 목에 3도 화상, 얼굴과 다른 상체는 1-2도 화상을 입었다. 병원 진단 결과 신체의 25%에 영구손상 화상을 입고 말았다. 아이는 20번 넘게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테일러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닭튀김을 하고 있었으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 아들이 튀김기름 냄비를 쏟아 화상을 입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테일러의 할아버지와 동성 부인도 아동학대 및 방임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인정했으며, 할아버지는 집행유예, 동성부인은 징역 6개월 복역 후 5년 보호관찰형을 선고받았다.   조사결과 아들은 희귀 장기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이전에도 부모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해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평생 이렇게 심한 아동학대는 처음 봤다"며 테일러에 대한 강력한 처벌에 "당연하다"고 반응했다.     김옥채 기자 [email protected]아들 엄마 조사결과 아들 엄마 징역 동안 아들

2024-04-19

"불가피한 조치" vs "발표에 욕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인들도 여럿이다. 정말 심각하다. 각성해야 한다. 때문에 이번 재봉쇄는 힘들어도 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본다. ▶이지현(주부·풀러턴) = 잘 했다. 재개장 후에도 사실상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재개장을 하나 봉쇄를 하나 지금 확산세라면 나에게는 똑같다. 한 아이의 엄마로 더 조심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빨리 이 상황이 끝날 수 있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조이 곽(학생·LA) = 감염 확산의 심각성을 모른 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야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2차 셧다운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소극적 제재로 인한 감염 확산이 계속될 경우 온라인 수업을 계속해야 하는 나 같은 학생들의 고통도 커진다. 조금 힘들더라도 강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 “겨우 회복 중인데 찬물 붓다니…” ▶이창선(요식업·랜초쿠카몽가) = 여러 개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봉쇄령 후 정말 쉽지 않았다. 수많은 음식들을 버려야 했고 직원들은 실업수당을 받겠다면 출근하지 않았다. 재개장 후 겨우 회복해 가고 있었는데 또 다시 셧다운하라는 소식에 욕부터 나왔다. 코로나가 두려운 사람은 덜 나오면 되고 그래도 나가서 일해야 한다면 조심하며 일하면 된다. 그리고 봉쇄보다는 교육을 하는 데 힘쓰는게 맞지 않겠나. ▶실비아 윤 (미용사·LA) = 다시 재개된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또 이런 조치가 내려지니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그 때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정말로 난감하다. 이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 될 지도 모르겠고…. 왜 미용실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꼽히는 지도 이상하다. 지난 번에는 그냥 손 놓고 있었는데, 뭔가 다른 대책이라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강태광(목사·LA) = 교회가 또다시 불편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간 행정 명령을 철저히 준수하며 대면 예배를 진행했음에도 ‘모이는 장소’라는 이유로 교회가 이번 명령에 포함돼 안타까운 심정. 이번 명령의 의도는 알겠으나 감염 확산에 영향을 끼친 사례가 없음에도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통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주 2차 셧다운 왜? 환자 급증 병실 부족이 직접 영향 "진정 안되면 폐쇄 확대" 캘리포니아주가 다시 셧다운(shutdown·폐쇄) 모드로 돌아가면서 셧다운 명령이 더 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19이확산되던 지난 3월 중순 자택대피령을 내리며 발 빠르게 대처했던 가주는 독립기념일 연휴를 전후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다시 셧다운 조치를 취했다. 무엇보다 입원 환자 수가 늘어나면서 병실 부족 현상이 생기는 등 의료 상황도 악화되자 취해진 조치다. 가주 보건국이 14일 발표한 코로나19 통계에 따르면 일일 확진자 수는 7346명으로 총 33만6508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망자 수는 7087명을 기록했다. LA카운티의 경우 이날 하루에만 4244명이 확진 판정을 받으며 일일 수치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입원 환자의 경우 현재 가주에 코로나19로 입원한 환자는 총 6745명이다. 이중 1886명이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예상되는 입원 환자만 1400명에 달한다. LA카운티의 경우 입원 환자 수는 2103명이며 이중 27%는 중환자실에 있다. LA타임스 14일자에 따르면 일부 병원의 경우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는 약물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주는 현재 병원 환자에 한해 먼저 감염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뉴섬 주지사는 “카운티별로 매 3일 동안의 감염률과 중환자실 입원 건수를 모니터하고 있다”며 “환자 수가 계속 늘어나는 카운티는 앞으로 폐쇄 조치를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뉴섬 주지사가 13일 발표한 행정명령에 따르면 식당, 극장, 동물원, 와인 양조장은 카운티에 상관없이 실내 운영이 중단됐다. 또 카드룸이나 볼링업소, 미니골프장 등 가족 단위로 찾는 오락 시설들도 폐쇄됐다. 술집의 경우 실내 뿐만 아니라 실외 판매도 금지됐다. 그러나 감염률이 높은 LA카운티와 오렌지, 벤투라, 임페리얼, 리버사이드 등 29개 카운티는 식당 외에 피트니스 센터와 예배당, 비필수 업종 사무실, 미용실과 이발소, 쇼핑몰까지 폐쇄시킨 상태다.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

2020-07-14

프레디 머큐리의 남과 여…진짜 사랑은 누구였을까

부모에게 오스틴을 소개했고, 자신의 마음을 담아 오스틴을 위한 곡을 작사·작곡했다. 불후의 명곡 'Love of My Life'다. 하지만 결혼식은 결국 취소됐다. 2013년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오스틴은 "머큐리가 양성애자임을 털어놓은 뒤 결혼식이 취소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운 서로의 '소울 메이트'로 평생 교류했다. 머큐리는 공공연히 오스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왜 자신이 메리를 대신할 수 없냐고 나의 연인들이 묻곤 하는데, 그건 그냥 불가능하다"는 식이었다. 1985년 어느 인터뷰에선 이렇게 말했다. "나의 유일한 친구는 메리이며, 다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내게 그녀는 관습법상 아내이고, (우리 관계는) 결혼생활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그걸로 충분하다." 오스틴은 훗날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머큐리와의 관계는 그가 에이즈 진단을 받고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머큐리는 유언장을 통해 오스틴에게 자신이 거주하던 영국 런던 부촌인 켄싱턴에 있는 방 28개짜리 저택 '가든 로지'와 900만 파운드(약 132억원) 상당의 자산을 상속했다. 머큐리는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동성 연인 대신 오스틴에게 저택을 남기면서 "나의 아내가 됐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 집은) 너의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데일리메일 보도에 따르면 현재 2000만 파운드(약 294억원)의 가치를 가진 이 저택을 오스틴은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이곳은 지금까지 '퀸 '팬들의 성지(聖地)로 여겨진다. 머큐리가 묻힌 곳이 그의 유언에 따라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다. 허튼은 머큐리가 91년 11월 24일 45세로 사망할 때까지 가장 오래 함께 한 연인이었다. 영화 속에선 허튼의 직업과 두 사람이 만난 시기 등이 실제와 다르게 묘사돼 있다. 두 사람은 1983년에서 1985년 사이, 런던의 게이클럽 '헤븐'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튼은 당시 사보이호텔 소속 미용사였다. 허튼이 2006년 영국 타임스오브런던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머큐리가 사망할 때까지 약 7년간 연인 관계를 이어갔지만, 첫눈에 서로에게 반하지는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머큐리는 허튼에게 술을 한잔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가 수퍼스타라는 걸 알아채지도 못했던 허튼은 거절했다. 그렇게 끝났을 관계는 1년 반 뒤 또 다른 클럽에서 다시 마주치면서 이어졌다. 두 사람은 데이트를 시작했고, 1년 뒤 허튼은 머큐리의 저택 '가든 로지'로 이사했다. 외부에 사생활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렸던 머큐리는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허튼은 외부에 연인이 아닌 전속 미용사로 소개되곤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이로 오랜 시간 함께했다. 허튼은 인터뷰에서 두 사람의 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와 함께 소파에 누웠다. 그는 내 발을 마사지해주면서, 하루가 어땠는지 묻곤 했다" 87년 머큐리가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뒤엔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병색이 완연해지면서 알리지 않고 싶어했던 에이즈 감염설이 퍼졌고, 마지막 1년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허튼은 투병 기간 내내 머큐리 옆에 있었다. 허튼은 머큐리가 숨지기 며칠 전 나눈 마지막 대화를 기억했다. "새벽 6시 그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계단을 내려갈 수 있을까' 물은 그는 혼자 난간을 붙잡고 걸었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내가 앞서 걸었다. 의자에 그를 앉히고 조명을 켜 각각의 그림을 비췄다. '오, 정말 멋져' 그의 말이었다." 머큐리의 사망 후 '가든 로지'가 오스틴에게 상속되면서 허튼은 갈 곳을 잃게 됐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머큐리는 허튼이 머무는 조건으로 오스틴에게 저택을 상속했지만, 쫓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튼은 자신 대신 오스틴에게 저택을 상속한 머큐리를 탓하지 않았다. "(머큐리가) 50만 파운드(약 7억3000만원)를 남겨준 덕분에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서다. 허튼에 따르면 머큐리는 그가 선물한 결혼반지를 낀 채로 숨을 거뒀다. 두 사람과의 이야기를 담은 책 '머큐리와 나(Mercury and Me)'를 펴낸 허튼은 2010년 사망했다. 그 역시 90년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홍주희 기자

2018-11-16

아르헨티나의 하늘 물들인 ‘청소년 꿈 발표’ 제전 성황리 폐막

부모 등 100여명이 참여하여 경청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개회식에서 최경옥 아르헨티나한글학교협의회장은 한국계 청소년들이 그들의 꿈을 정립할 수 있는 이 대회가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어 나의 꿈 국제재단에 감사를 표했다. 손창현 이사장은 격려사에서 “꿈을 가지려면 그 꿈에 대한 열정,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 그리고 꿈의 성취를 위해 편안함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꿈을 계속 추구하라”고 말했다. 이날 심사에는 박영 재아르헨티나 문인협회장과 맹하린 작가가 손창현 이사장이 함께 심사를 하였으며 11명의 학생이 자신의 푸른 꿈을 발표했다. 참가자들의 꿈을 살펴보면, 한사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사(노현수),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학생을 돕겠다는 자선사업가(이성경), 헤어스타일을 잘하여 행복을 줄 수 있는 미용사(윤쁘리실라), 사랑을 나누는 선생님(최은별), 빈곤층이 많은 나라의 어린이를 돕는 사람(신다현), 손톱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에 대화로 healing을 하겠다는 Nail Artist(김수은), 스포츠 분야 기자(김민주)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옷을 만들겠다는 패션 디자이너(윤연아)가 되겠다는 등의 여러 훈훈하고 창의로운 꿈들의 잔치가 이어졌다. 대회 1등은 ‘나누면 커진다’는 뜻을 마음에 담고 있으며 약사가 되어 사랑의 대화와 함께 노숙자를 위한 비타민 나눔도 실천하겠다고 사회를 밝히는 꿈을 발표하며 약사 가운을 입고 발표한 중3 윤혜나 양이 수상하였다. 2등에는 외교관이 되어 온 세계의 어려움을 풀겠다고 전한 고2 홍성현 양이 수상하였고, 3등에는 신경과 의사가 되어 치매 등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치료하겠다고 밝힌 고2 배정아 양이 수상했다. 손창현 이사장은 심사평을 통해 “수준급의 꿈들과 열띤 발표였고 계속 꿈을 향하여 정진하라”고 당부하고 1등 이외의 추후 대회에 재도전을 해도 되고 1-3등 수상 학생들은 나의 꿈 국제재단의 글로벌 장학생에 지원을 하여 꿈을 향한 후원을 받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나의 꿈 국제재단은 현재 44개 국가에서 동포 2세들의 꿈의 정립을 위하여 청소년 꿈 발표제전을 시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장학금으로 그 꿈의 실현을 후원한다. 이덕용 기자

2018-08-30

[이 아침에] 막무가내로 세상 살아가기

미용사 측의 딱한 심정을 이해했기에 나는 모처럼 식당에서 딸과 식사를 같이 하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했다.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미용실을 떠나야 했던 나는 하는 수 없이 김밥을 사 왔다. 미용실 의자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던 나와 딸, 그저 웃고 말았다. 진상 고객은 자신의 뜻이 관철됐으니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그 진상 고객은 늘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억지를 부려도 한 사람이라도 놓칠 수 없는 업주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것이고 떼를 쓰면 누군가는 양보할 것이라는 방법을 터득했을 테니. 사실 살아남기 위해 억척은 기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먹고 사는 것부터 해결해야 했던 그때는 누구나 그러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시절, 쓰러진 집 더미를 헤집고 빈곤의 터널을 맨발로 걸어야 했기에 눈치는 300단쯤 되어야 했다. 돈 몇 푼 집어주면 눈감아주는 불법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으니 순서를 지키라는 고함이 먹힐 리 만무다. 짐짝처럼 실려 버스를 타야했던 무지막지한 등굣길이 용납이 되고 큰 목소리가 법 앞에 우선이던 시절에 배려는 교과서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에 불과했었다. 특히 노인의 막무가내는 꽤 효과가 크다. 지금도 지하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 틈을 헤치고 들어가는 여든 넘은 노모의 뒷모습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몇 번을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노모는 이미 경험으로 터득했다.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면 통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억지를 부려도 대개는 나이 든 사람의 편의를 봐준다는 것까지. 새치기를 하는 노인과 입씨름을 해봐야 부모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비난받을 게 빤해서 침묵하는 젊은이들의 경멸은 알 턱이 없겠지만. 빈한한 시절을 보고 배우고 자란 나도 어쩔 수 없다. 줄을 설 때 앞사람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어야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어느새 바짝 앞사람 뒤에 붙어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발을 내미는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노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예의는 보고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억척이 오늘날의 성공을 만들었다면 이쯤에서 멈춰야 하지 않을까. 이제 먹고살 만하니 조금 손해를 봐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녀도 될 것 같았다. 대기실에서 김밥을 먹는 나는 흐드러지게 꽃이 핀 나무 아래 도시락을 먹는 상상을 했다. 화를 내기엔 너무도 화창한 봄날이지 않은가. 권소희 / 소설가

2018-04-10

"젊어서 고생 사서하러 왔어요"…

부모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돈을 모아 경비(170만원)를 충당했다"며 "12명 제각각 다른 개성과 다른 배경, 다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갖고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인도하게 돼 보람있다"고 말했다. 윤지수 단장은 "몇몇 팀원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팀이 꾸려진 지난 9월부터 펀드레이징에 힘을 모았다. 아르바이트부터 모금까지 생전 처음 경험해본 일이 많다"며 "우리 같이 평범한 학생들도 봉사에 나서기 위해서 팀워크를 다지고 우정까지 쌓고 있다. 우리 한국 대학생들의 진심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황명길 단원(서남대 간호학과 3학년)도 "말도 안통하는 멕시코 어린이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같다"며 "TV나 인터넷으로만 보던 세상이 아닌 곳을 보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더 넓은 세상을 볼 것같다"고 기대했다. 이들중 유일하게 대학생이 아닌 고교생 조진희 단원(효양고 2학년)도 "어리지만 오빠, 언니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정말 알게 된 것이 많다"며 "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배웠고 이제는 전혀 모르던 곳에 방문하게 돼 걱정도 되지만 새로운 만남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LA와 라스베이거스에서 간단한 연수를 마치고 바로 애리조나의 아메리칸 원주민이 거주하는, 또한 물과 전기가 없는 곳을 방문해 사전에 요청받은 세 트럭 분량의 땔감을 전달하고 2일간 체류한다. 뒤이어 LA인근 르벡에 있는 '나눔농장'에서 3일간 유기농 야채를 재배하는 것을 배우며 전원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멕시코 캄포지역을 방문해 농장에 거주하는 원주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봉사에 나선다. 말이 안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어렵지만 체류하는 6일간 임시학교를 개설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만들기도 같이 하는 등 다양한 봉사 체험을 한다. 특히 남가주에서 합류한 미용사와 봉사자들의 봉사활동을 돕게 된다. 김 센터장은 "15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어 아쉽지만 참가 학생들에게 너무 좋은 경험과 배움이 될 것"이라며 "특히 멕시코 체류 봉사에는 남가주 한인 대학생 2~3명이 더 합류할 수 있다. 희망자는 연락해달라"고 밝혔다. ▶문의:(213)447-8726 글·사진=장병희 기자

2017-02-05

유급 병가 절반, 가족 위해 사용 가능

부모, 형제, 손자, 손녀 등 가족들을 돌보는데 사용할 수 있다. ▶가정 폭력 방지 면허가 있는 헤어 디자이너, 이용사(barber), 미용사(cosmetologists)들은 가정 폭력 방지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가정 폭력 피해자를 식별해내기 위한 목적이다. ▶직원 사생할 보호 일리노이주 고용주들은 피고용인(예정자 포함)에게 개인 온라인 어카운트의 사용자 이름(username)과 암호(password)를 공개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과거에는 이 조항이 소셜 미디어 어카운트에만 국한됐으나 내년부터 모든 온라인 어카운트로 확대된다. ▶요가 강습 규제 완화 학교 등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요가 강사들은 일리노이 고등교육위원회(Board of Higher Education)로부터 면허를 취득할 필요가 없어진다. ▶의료 행위 과정 공개 의료진들은 환자가 원할 경우 낙태 수술을 포함 시술 과정을 정확히 공개해야 한다. 의료진들은 종교적인 이유로도 이 의무 조항을 피할 수 없다. ▶운전자-자전거 이용자 권리 동등 자전거 이용자들도 차량 운전자와 똑같은 우선통행권을 갖는다. 그리고 차량 운전자들은 긴급경고등(hazard lights)을 켠 차량에 접근할 경우 차선을 변경해야 한다. ▣세금 ▶자동차 표준 마일리지 공제율 업무용 차량에는 올해의 마일당 54센트에서 0.5센트 줄어든 53.5센트의 공제액이 적용된다. 의료나 이사 목적으로 사용된 차량의 공제액은 기존 19센트에서 17센트로 내려간다. ▶은퇴 플랜 적립 한도액 변경 직장 은퇴 플랜 가입자가 IRA에도 적립할 경우 그 적립금에 대한 소득 공제 대상 소득 상한선이 올해보다 1000달러 인상된다. 이성중 기자

2016-12-26

[살며 생각하며] 노우지독

부모의 사랑을 이를 때 쓰는 고사성어인데 중국 위나라 조조의 부하였던 양수의 부친 양표가 아들을 죽인 조조에게 했던 말이다. 조조가 한나라 유비와 한중을 놓고 싸울 때 사용했던 암호명 중에 계륵이 있었다. 휘하 장수 하후돈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툭 던져 놓은 암호인데 부하 중 한 명이었던 양수가 듣고는 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영문을 묻자 "닭갈비는 먹을 만한 살은 없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위다. 결국 이곳을 버리기는 아깝지만 무리수를 둬서 지킬 땅은 아니라는 뜻이니 곧 승상께서는 철수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그의 총명함에 감탄하면서도 자기의 뜻을 알아차린 양수를 시기하여 조조는 군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죽이고 만다. 전장에서 돌아온 조조는 양수의 부친 양표를 만나는데 그의 수척한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물으니 양표는 '노우지독'이라 하며 슬픔을 토로하였다. 최순실을 알려면 그의 부친 최태민을 알아야 한다. 항간에 알려진 대로 그는 사이비 교주이며 1974년 어머니를 흉탄에 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딸이었던 박근혜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면서 40여 년 후에 벌어질 민족 대비극의 씨를 뿌리게 된다. 당시 박근혜 영애를 이용하여 치부를 하며 권력의 맛을 보게 된 그는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전념하며 그의 딸 최순실에게 바통을 물려주고 1994년 세상을 떠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의 비리 사실을 알았지만 어미를 잃은 딸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서일까, '노우지독'의 심정으로 최태민을 묵인하고는 유신헌법 등 장기 독재의 틀을 쌓다가 측근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죽음으로 살벌했던 군사통치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전두환이라는 더 큰 괴물을 만들어 내며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는 계속되었고 그의 심복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1996년 12.12와 5.18 관련 수사로 구속 수감되어 석방과 동시에 전두환에게 찾아가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조직폭력배성 발언으로 의리(?)를 과시한다. 몇 년 후 자기도 대통령 한 번 해 보겠다고 출마했다가 전두환의 반대로 둘 사이는 서먹서먹하게 된다. 샤머니즘과 조직폭력배적인 권력의 맥은 결국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극치를 이루게 된다. 유신의 잔재인 김기춘을 다시 청와대로 불러들여 거짓과 불통 정치를 부활시키고 사이비 종교 교주의 딸을 국정에 참여시켜 온갖 비행을 저지르며 눈과 귀, 그리고 생각까지도 마비된 채 304명의 어린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에 미용사를 불러 '올린 머리'를 하는데 90여 분을 허비하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7시간 후에야 현장에 나타나 동문서답과도 같은 엉뚱한 질문을 던져 국민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국가의 참담한 비극과는 무관한 듯 국민을 위해 앞장서야 할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되라는 말이냐'는 터무니 없는 이율배반적인 비유로 또 한번 장세동식 의리(?)를 과시하며 국민을 외면하고 기독교의 예수까지 모독하기에 이른다. 왕과 같은 권력의 대통령과 그 밑에서 충성하며 기생하는 무리들은 국민을 한낱 바람이 불면 꺼지는 촛불로 보는 것일까? 권력의 손에서 나오는 공직자의 '노우지독'은 자기 자식은 물론 국민들까지도 망치는 '패가망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2016-12-12

[단편소설 부문/가작] 나무들, 짐승들

부모님을 도와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지나치게 씩씩하고 무엇이든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는 바쁜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듯한 이질감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우수나 이유 없는 상실감 같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아이들이 나의 친구들이 되었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 아이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었다. 나의 겁쟁이를, 그 비겁함을 기막힌 순수함이라고 말해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가끔 소피아가 보고 싶었다. 아주 하얀 얼굴과 커다란 눈을 가진 그 애는 완벽한 현실주의자였다. 아홉 살이나 많은 부유한 사업가와 그 애가 결혼했을 때 그 애의 베스트 프렌드였던 에린은 눈물을 흘렸다. 프랑스 식당을 빌려 피로연을 하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웃었던 소피아는 내게 들려주었다. 사라의 이야기를. 소피아의 하나뿐인 언니 사라는 정말 귀엽게 생긴 키가 큰 선배였다. 나는 한번 그녀의 결혼식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같이 슬픈 가녀린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스물두 살. 너무나 이른 나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신부는 어쩐지 가슴을 저리게 하는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피아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동생 친구들을 보고 그녀는 똑같이 서글픈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귀여운 머리에는 귀여운 왕관이 반짝였다. 소피아는 말해 주었다. 숲이 많은 워싱턴 주로 시집을 갔던 언니는 아이를 갖기 위해 약을 끊었었다고. 깊은 숲, 비가 오는 날마다, 밤마다 숲의 정령들이 그녀를 불렀다. 결혼하기 전에도 햇빛이 비쳐드는 맑은 유리창 앞에 서 있거나 흐린 구름이 머리 위에 머물거나, 별빛 아래에 서 있을 때, 아니 아무 때라도 땅 속 깊이깊이 빨려드는 듯한 절망감은 언제나 비염처럼, 두통처럼 사라의 곁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정령들은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끊임없이 서걱거리며 우우 사라를 불러댔다. 비가 내리던 날, 사라는 차를 타고 숲으로 갔다. 숲의 정령들이, 나무속에 숨어 살고 있는 서글프고 교활한 영들이 그녀를 감아 안았다. 축축하고 음울한 빗소리 속에서였다. 길고 어둡고 슬픈 손을 뻣어 사라의 늘씬한 허리를 날렵하게 감싸안는 팔들… 휘감기고 늘어지는 그런 팔들…… 사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의 차 안에서- 밖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춥고 음산한 밤. 그날의 나무들은 이상한 기운에 차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 휘감겼다 던져진 듯 기대어 있는 그녀와 피… 그가 서랍 속에 늘 호신용으로 두었던 권총. 그리고 흐느끼듯이, 히히 웃어대듯이 불길하고 불온한 나무들의 소리가 빗소리와 섞이고 있었다. 그날 세상이 조금 기울어졌다. 예쁜 사라를 가져간 그 세상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친화할 수 없었다고 형부는 소피아에게 말했다고 했다. 후에, 형부는 평범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언니의 친구들도 소피아를 더 이상 찾지 않았을 때, 소피아는 그 공원에 갔었다고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머리를 풀어헤친 나무들을 보고 있었다. 나무들은 살아 있었다. 언니가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런데 말이야 혜인아. 소피아는 잠시 물기가 어린 눈으로 빈 공간을, 어떤 정적인 동물체의 다음 행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까만, 아주 까만 눈동자였다. 나도 그래. 혜인아. 나도. 언니에게 가고 싶다고 생각해. 1초마다 생각해. 나도 살고 싶지않아. 혜인아. 진아는 플로리다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소심하고 마음 여린 남친에게 이별을 통보한 다음이었다. 내가 그 애를 보러 갔을 때, 처음에는 그 애의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형태로 감지되지는 않았다. 그 애는 다시 엄청 살이 쪄 있었고 아주 짧게 자른 머리에 파마를 하고 있었다. 그 애의 아파트는 유학생이 혼자 살기에는 너무 컸다. 커다란 침대와-이상하게 나태하고 저급해보이는 핑크색의 커버를 씌운, 감각 없는 신혼부부의 그것 같은 침대였다.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커다란 TV, 그리고 제대로 된 냉장고가 있는 방이 두개나 되는 아파트였다. 문을 열면 밖에서 벽을 큰 발로 기어다니는 모기들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습기 찬 오월의 구십도의 미국 동남부, 악어들이 썩어가는 듯한 검푸른 녹색 물 안에 떠도는 그곳에서 내 친구는 눅눅한 공기 중에 부유하듯이 공중에 떠 있었다. 땅은 늪이었다. 그녀의 모든 세상은 늪지대였다. 진아는 나를 데리고 그녀가 잘 간다는 아주 낡은 성당으로 갔다. 잡초들이 누운 그곳은 프랑스의 성당을 떠올리게 했다. 오래된 돌로 쌓은 조그만 탑이 있고 연못도 하나 있고 바랜 흰 건물이 서 있는, 슬픈 연인들이 함께 돌 계단에 누워 죽어갔을 것 같은 비극적인 느낌이 드는 성당이었다. 그 마당에서 진아는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죄가, 그녀의 외로운 삶을 온통 찬란히 물들이고 있다고. 죄의 이야기라면 나는 싫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다고 생각했다. 진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입은 웃고 있는데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는데,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맑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였다. 조금 살이 찐듯한 –마른 체구보다는 고급스런 느낌이 있으니까.- 잘 자란 허연 반장 같은 느낌. 진아가 웃고 있었다. 결혼 한 지 일주일 된 그 약간 통통한 남편 옆에서. 플로리다의 아파트가 그 남자의 호텔보다 나았다. 준수한 호텔을 가지고 있다던 남자. 푸른 늪지대의 악어와 같은 죄악의 모습이 차라리 그리웠을 그 애가 견딜 수 없이 불쌍했다. 그 눈동자. 그애가 관계를 했을까. 그런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커다란 침대의 느낌이라니. 그 말도 안 되는 핑크라니. 선배는 눈썹이 아주 길었어. 속눈썹 말이야. 진아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는 것도 같았다.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캠퍼스를 보여 주러 갔어. 차를 타고... 바닷가며 좋은 바나 음식점. 그리고 내게 말했지. 결혼하기 전에 널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지금의 아내와는 거의 정략결혼이었다고, 부모님이 원했기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루한 이 삶에서 그딴 거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라고. 그리고 내 친구는 잠시 바닥 어딘가를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의 이상형이라고 했어. 언제나 꿈꾸었던. 진아는 내게 그 당시의 자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라고 해야 이년 전이었다. 굵은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가 바람에 조금씩 날리는 아주 날씬해진 그녀는 에티켓 학교에서 배운 대로 멋진 색조화장을 하고 있었다. 슬픈 듯 촉촉해진 눈빛과 밝은 빛깔의 아이 셰도우, 촌스럽지 않은 상큼한 입술빛깔 그리고 연한 볼 터치도 그 애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 애는 아주 여성적이고 상냥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나는 새삼 진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도로 살이 쪄 버린, 짧게 잘라 귀 바로 밑에서 곱슬거리는 파마머리와 동그란 얼굴. 피부도 상해 있었다. 이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옐로우 스톤을 보러 떠났던 건 언젠가 보았던 나무들과 뜨거운 유황 온천수가 흐르는 바위 위에 나와 앉아 있는 버팔로들과 사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에메랄드빛의 뜨거운 물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그 시가 생각났다. 가슴 속에 뜨거운 물을 출렁거리며서… 라고 하던 시가. 나는 함께 있는 것이 고통이 되어버린 나의 애인을 생각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진흙탕을, 그 머드 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검고 짙은 머리를 내려뜨린 아름다운 내가 보였다. 사랑한다. 라고 그가 말하는 입술이 보였다. 유난히 하얀 윗니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보였다. 짧은 머리를 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그 여자애가 그 마음의 바닷가 카페에서 걸어나갔다. 그날, 파도가 셌다. 유리창을 깨뜨릴 듯이 부딪혀 왔다. 그 여자애와 그 카페에서 유리창에 부딪히는 파도를 맞으며 그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하고 나는 조용히 끓고 있는 진흙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러자 고통이 왔다. 정오의 햇빛이 무섭게 내려와 꽂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기온은 화씨 120도를 넘어섰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그 땅과 더위는 신체적인 괴로움으로 그 땅의 짐승들을 집어삼켰다. 그늘도 없는 그곳에서 가까스로 찾은 조그만 나무 밑에 엎드린 캥거루-동물의 왕국에서 본 그 캥거루가 온몸을 태우는 열기 속에서 자신의 혀로 발을 닦아 침으로 서늘하게 하는 모습이, 짐승의 고통이, 그 괴로운 더위와 태양이 내 것이 되어 나를 덮쳤다. 내게로 와. 나는 고통의 일그러진 얼굴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곧 가줘. 이제는 가줘. 나는 또 그렇게 말했다. 그가 한 말과 비슷했다. 나도 힘들어.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어. 나, 그 여자애를 봤어. 파도가 유리벽에 부딪는 바닷가 카페에서. 그 애를 보는 너의 얼굴을 봤어. 넌 근무중이라고 했었지. 오랜만에 만난 영은이랑 바다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 너와 그 애가 있었어. 나는 말하지 않았다. 옐로우스톤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촘촘히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무들. 전나무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일만년전의 여름이나 겨울, 빙하기의 끄트머리에서 인디언들이 바라보았을 숲, 오래된 숲 속에 서 있는 느낌은 어쩐지 슬펐다. 유한한, 거기에 짧기까지 한 인간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까. 나무들은 말없이 떨어지는 오후의 황금빛 속에 거룩한 의식의 일부분처럼 머리를 고정시키고 서 있었다. 나무들의 정령들이 조용히 멈춰있었다. 진아를 둘러쌌던 주위의 시선들은 생각보다 힘들었다고 진아는 말했다. 유학생들은 곧, 고급스럽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진아의 다듬어진 자태와 어울리지 않으려 들었다. 다정하고 세심한 그녀의 선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진아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쳐다보고 그녀의 빨간색 스포츠카를 염오하면서 수군댔다. 선배의 키 작은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거의 7개월 째였다. 그녀는 ‘진아 언니가 예뻐.’라고 말하는 딸아이를 흘겨보았고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손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진아라는 그 애를 찔러 버리고 싶어. 죽여버리고 싶어. 라고. 더 이상 참지 못한 임산부는 진아를 불렀다. 진아의 얼굴이 분명하게 상기되었다. 엄마에게 말하겠다고 협박했어. 그래서 그 여자가 말하는 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수밖에 없었어. 절대로 엄마가 알아서는 안되었어. 진아의 얼굴이 점점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의 수치가 그대로 되살아나는가 보았다. 우유부단한 남자야. 그 선배. 정말 견딜 수 없어졌지. 서울에서 그와 만나기 바로 전에 짧게 머리를 잘라버렸어. 그를 기다리면서 길에 서 있었는데-왜 길에서 만나기로 했는지는 생각이 안나.- 낙엽이 조금씩 떨어지고 해가 검은 아스팔트를 하얗게 반사하고 있었던 것 같아. 갑자기 상실감 때문에 난 그 자리에서 해체되어 버리는 것 같았어. 나는 미용실 앞에 서 있었더라. 그래서 그냥 들어가서 짧게 커트해 달라고 했어. 남자 미용사가 –좀 뚱뚱하고 낡은 청바지를 내려 입었었어.- 와서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지. 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견딜 수 없이 허전했어. 너무나 슬펐어. 그 슬픔의 모습은 거의 다 기막힌 상실감으로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허공에서 더 이상 아무것에도 지탱할 수 없었어. 웃기지. 지금도 그 사람을 생각해. 자꾸 생각이 나.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런데 또 그래. 난, 죽어도 그 사람과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 귀여운 얼굴과 이마에 내려오는 머리칼이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난,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 그는 결혼했고 아이가 생겼는데도 나를 사랑한다잖아. 아내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곧 아이를 나을 텐데. 여자는 한국으로 가 버렸어. 아이가 너무나 커 버려 수술을 했대. 선배는 다음달에 한국에 들어가 군대를 갈 거야. 그 집은 완전히…박살이 나 버렸어. 그런데 왜 진아가 더 그렇게도 처절하게 외롭고 버려진 듯이 보이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꿈도, 소망도 사라져 버려서 자신도 돌보지 않고 망가져 버린, 내 친구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또, 가이저를 보러갔다. 그랜드 가이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 마른 모랫더미 같은 땅 위에서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점점 거세고 높아지면서 분수처럼- 아주 두꺼운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걸 바라보는 게 위로가 되었다. 내 마음의 방, 문을 닫으면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창 밖으로 하얀 물줄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인다. 공기는 차고 내 방엔 펭귄이 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걸을 수 없던, 눈을 뜰 수 없던 밤이었다. 캄캄한 남극의 밤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수천 마리의 펭귄들은-그것들은 사이즈도 크지 않았고 모두 수컷이었다.- 추위와 대적하기위해 촘촘히 몸을 붙이고 머리를 묻었다. 배 안에 감춘 알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신체적인 어떤 구속보다 더 고통스런 추위 속에서 그저 참았다. 바람과 칼날보다 날카로운 눈가루가 몰아쳐 왔다. 캄캄한 남극의 얼어붙은 땅에 우리의 무언가 소중한 것이 꽁꽁 언 채로 버려져 있었다. 바보. 그가 울었다. 내 생애를 통하여 넌 다시 내 이렇게 허름한 방에 들어와 주지 않겠지. 너를 잃은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데 그는 그 바닷가에서 유리창에 부딪는 파도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의 허름한 방에 두 번 다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여자애의 귀여운 커트 머리가 보였었다. 날렵하게 그곳을 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댄서의 그것처럼. 신비스럽고 고급스럽다던 나의 얼굴보다는 많이 평범했지만 그 애는 귀여운 작은 눈과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날씬한 그 애가 자꾸만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우주를 그렇게 가로질러 갔다. 나는 괜찮았다. 그는 이미 나의 우주도 아니었고 나는 그곳을 떠도는 행성 따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통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내 친구를 이상하게 만들었던 고통과 비슷한. 둔중하고 비오는 날의 나무들처럼 머리를 숙인 축축하고 음습한 그런. 진아는 결혼을 했다. 두 번째로 모든 살을 다 뺏다고, 신혼여행 온 LA에서 만난 그 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남편은 내가 그렇게 쪘었던 걸 몰라. 하고 속삭였다. 그 남자.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멀쩡하고 고급스럽게 살이 쪄 있기까지 했다. 나는 모르겠다. 사악한 것은 평범한 것과 구별하기 힘든 건지. 약간이라는 건 이미 무너진 거라는 것. 농담처럼 자기 자랑과 그다지 선하지 않은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다. 약간씩 말이다. 나는 조금도, 그 약간이 치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아둔함은 이제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나는 그 남자가 재수 없었다. 진아하고도 이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나를 용서해 줘. 하고 나는 꿈 속에서 말했다. 너무나 늦어버렸다. 그러니까, 이미 나는 그런 걸 요구할 수 없게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던 거다. 고대. 그것들의 흔적을 바라본다. 인류학자들이 찾아낸 소돔과 고모라의 흔적. 사해 가까운 곳에서 고대의 유적들이, 그 도시들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경건한 모습으로 보고 있다. 아니 내 모습은 사실 매우 불경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그 여름, 나는 편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잔잔하고 서늘한 즐거운 느낌이 언제나 함께 있었다. 행복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찰리의 삶에서 충일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여름. 나는 고대의 외계인들이 타고온 우주선을 그린 벽화나 우주복을 입은 그림 따위를 보고 있었다. Ancien, 이라고 해설자가 말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불 비가 쏟아졌다고 했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후에 딸들과 동침했던 롯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는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그때 전화를 받았다. 유학중이던 영은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애가 진아의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진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서 어느 여자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불의의 불을 피워댔는지 관심없었다. 그러나 그가 한 행위가 왜 그녀의 죽도록 괴로운 수치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교활하고 주도면밀한 그 남자는 뻔뻔했다. 그와 밤을 보내는 그 여자들도 같을 거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우리 이혼했으면 좋겠어. 진아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두 손이 차가와져 있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런 것들이 그녀는 싫었다. 대답이 없어서 그녀는 돌아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넥타이를 풀고 마치 시름에 잠긴 사람처럼 작은 장식용 테이블 앞에 있는 장식용 의자에 앉았다. Off white의 고급스런 프렌치 세트는 진아의 엄마가 사 준 것이었다. 잎사귀 모양의 역시 프렌치 스타일의 침대와 매치되는 것으로 이제 그녀는 그 모양과 색깔, 로코코까지 생각만 해도 구토가 올라왔다. 그 남자가 누워 자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그의 눈빛이 비열하게 빛났다. 물기가 어린 듯도 했다. 그리고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리듯 하면서 웃었다. 미쳤냐. 누구 좋으라구.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지 분별치 못할 것 때문에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네가 더러워. 진아가 말했다. 그가 벌떡 일어나며 그의 웃옷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야 이 더러운 년아! 니가 더 더러워! 그가 그렇게 소리질렀다. 나는 열 일곱살때 Jesus Christ Superstar- 뮤지컬을 보았고 곧 빠져버렸다. 신을 믿지않았던 나는 그 사람, Jesus에게 빠졌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목요일 날 밤, 고통에 가득 차서 기도하던 너무나 인간적인 그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은 Ted Neeley와 그의 crew를 이스라엘로 데려가 모든 영화를 그곳에서 찍었다. 유다를 향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조용히 돌진하는 탱크라든지, 검은 옷을 입은 바리새인들이 나무와 철로 만든 사막 한가운데의 조형물 위에 서 있는 음산한 모습이라든지, 꿈을 꾼 빌라도라든지,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의 바위산…나는 그런 것들을 바라보았다. 거기 그 나무가 있었다. 죽은 나무. 이파리도 없고 그다지 높지않고 한쪽 팔을 펴듯 구부러진 그 나무, 가롯 유다가 목을 매어 죽은 나무였다. 나는 그 나무를 생각했다. 진아의 남자가 진아가 알거나 모르는 많은 여자들과 만들어내는 더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진아의 선배가 생각났다. 우유부단하고 귀엽게 생겼다는 그 선배와 진아가 뒹굴던 진창을 생각했다. 짧은 머리의 댄서 같은 발걸음의 여자가 그 바닷가 카페에서 진창으로 걸어나가는 게 보였다. 진아의 우울증은 어떤 발병처럼 온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피아노 위에 인형들을 늘어놓고 혼자만의 콘서트를 열던 세상에서 떠밀려 나온듯한 꼬마 때부터 아니면 더 전부터 어떤 기운처럼 감돌던 force였다. 수면제를 삼켰던 그날도, 긴 머리칼을 잘라 버렸던 오후, 혼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찾아갔던 그 낡은 성당의 낮은 탑이 있던 자리, 의식을 행하듯 탑 주의를 자꾸만 돌던 그런 날에 자욱하고 낮게 깔려 있던, 머리를 숙인 나무들이 촘촘히 서 있는 그곳을 메우던 안개처럼 그녀의 생에 서려 있었다. 일주일, 한달, 육개월, 일년…진아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얕은 잠에 잠깐 빠졌다가 깨어나 정신이 맑은 계곡의 물보다도 맑았다. 절대로 절대로 잠들 수 없는 매일의 밤은 지옥처럼 끝없이 길었다. 새벽 2시부터 5시는 있는 그대로의 지옥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그 밤과 새벽 내내 이어졌다. 너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실패가 되어버린 거야. 너는 절대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 더러운 남자는 지금도 더럽게 진창을 뒹굴며 여자들과 섞여 있을 거야. 아니 그 불길한 얼굴의 여자와 살을 비벼대고 있는 거야. 더러워. 너의 더럽혀진 삶도, 죽음도 모든 것도. 그 소리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진아는 무엇이든지,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아기. 아가. 짐승. 어린 사슴이 미친 듯 도망친다. 늑대 두 마리는 전술을 쓴다. 아주 잘 계획된 전술이라고 해설자가 말한다. 일단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는 미친 무리로부터 어린 사슴을 따돌린다. 이 team이 좌우에서 밀어붙이면 너무 어려서 빠르지 못한 작은 사슴은 대열에서 떨어진다. 그러면 한 늑대가 사슴을 쫓기 시작한다. 패닉 상태가 된 사슴은 미친 듯이 육지로, 산 위로 내달린다. 정신없이 쫓길 때 다른 쪽에서 달리던 다른 늑대가 갑자기 옆에서 달려든다. 사슴은 꼼짝 못하고 주저앉는다. 얌전히 앉은 어린 사슴의 목을 늑대가 물어뜯을 때, 사슴의 눈동자는 아직도 뜨거운 열기에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초 만에 인형의 유리알 눈처럼 생명이 떠나간 공허한 눈이 되어있다. 생명으로 꿈틀대던 적나라한 짐승성은 이제 고요한¸ 살아 있으나 오래도록 조용했던 나무들보다 더 한없이 먹먹한 비생명이 되어있다. 이것이 존재일까 비존재일까 짐승의 몸뚱이의 존재 안에 생명이 부재하는 것 나무들이 보고 싶다 온 세계를 덮은 멋진 침엽수림이 보고 싶다. 엘로스톤에는 돌이 되어버린 나무가 있다. 나중에 보니 돌이 되어버린 짐승들도 있었다. 용암이 흘러와 나무와 짐승들을 덮었을 때 본질은 변화되었다. 성질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본질이. 마치 빛이 어둠으로 변질되고 사악한 그 사내가 진실해지듯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진아의 절망이 전해져 왔다. 너무나 너무나 기분이 안 좋아서, 땅 밑으로 깊고 깊은 속으로 꺼지는 것 같아서, 그런 너무 안 좋은 기분이 새벽에도 아침에도 오후와 깊은 밤에도 끊임없이 영혼의 말랑말랑한 그곳을 먹어가는, 더 이상은 그것도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공허의 상태로 끌고 가는 – 너는 그런 것을 알 수 있니? 나는 말이지. 혼자서 사막을 횡단했다. 빛이 모래를 먼지처럼 날리는 사하라의 살인적인 뙤약볕, 터어반을 두른 낙타 위의 사람들, 모래바람. 길고 으슬한 낙타의 늘어진 목. 그 그림자. 그 밑으로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검은 귀신의 뒷모습 같은 것. 과거가 탱탱한 바로 지금, 그 현재와 섞이고 나의 현실이 몽롱하고 나른한 비현실과 섞이고 너와 내가 같은 넓은 그릇 안에서 말려지는 그런 사막에서 나는 현재의 꿈을 꾸었다. 귀신들이 나무의 정령들을 오염시켰다. 나는 이제 산에 사는 짐승들과 작별하였다. 사막은 산과 바다와 푸른 들을 덮었다. 진아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을 리가 없다. 밤, 그 애는 캄캄한 절벽 위에 단 혼자 남겨져 있는 듯한 외로움 속에 갇혀 있었을까. 더럽혀진 그 무엇,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소중한 그 무엇을 그 애는 혼자서 지킬 수 없었다. 엘로스톤으로 오는 길에 나는 사막을 횡단했다. 낮은 풀들이 있고 바위가 있고 도마뱀과 벌레들이 있는, 또 선인장들이 있는 생명이 있는 사막이다. 데스밸리를 지나 라스베이거스를 향한다. 여름, 데스밸리는 119도를 넘어선다. 이글거리는 땅. 이글거리는 바위와 모래. 뜨거운 물. 차에서 내려서면 모래 바람이 조금씩 불어온다. 어떤 고행이 주는 즐거움 안에 있는 것처럼 나는 잠시 서 있다. 열기와 따가움과 햇빛을 나는 견딘다.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그렇게도 그려내고 싶었던 건 어떤 무모한 그림이었던 건가보다. 아무도 모르게 그 세상과 노을과 뛰는 황소 같은 거라도 그려내고 있었던 내 글들이 처음으로 그 사막의 한가운데서 폭염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아무도 모르게 써왔던 건 부끄러워서였는데, 그에게도 이런 가벼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던 거였는데 왜 꼭꼭 감추어 두었던 적의를 품은 전갈 같은 글자들이 내 가식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걸까. 메뚜기 떼처럼 그 까맣고 징그럽고 버글거리는 것들이 나를 뒤덮었다. 햇빛과 벌레들과 소리와 sorrow……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나는 블라인드를 내린 흰 꽃들이 핀 화분이 놓인 내 스튜디오 안 앤티크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친구들 모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시작한 후에도 한참을 나는 무언가 쓰려고 했다. 바닷가, 떠밀려 온 어떤 몸체에 대해서. 달빛의 잔인한 각도에 대해서. 나는 쓸 수 없었다. 그때 그 여자가 내 빈곤한 바닷가를 발레리나처럼 가볍게 걸어갔다. 진아는 그 방에, 혼자 있었다. 바람이 조금은 불었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흰 벽지를 바른 방, 조그만 꽃무늬가 우아하게 새겨져 있는 오프 화이트의 벽지와 천장, 고급스런 가구들과 흰 새틴의 살짝 흔들리는 것 같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녀는 슬프지도 괴롭지도 억울하거나 분노에 가득 차지도 않았다. 아무 느낌이 없는 텅 빈 그 어떤 힘 안에 무방비였다. 그녀는 이제 낯설은, 어떤 냉기로 가득할 뿐인 세상을 일별했다. 그리고 손 안에 쥐고 있었던 하얀 알갱이들을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물을 마셨다. 식도를 타고 분해되어가면서 알갱이들이 넘어가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떤 기억이 되살아 오는 것 같았다. 스무 살 때, 약을 먹고 거실로 걸어나오던 희뿌연 한 전등불빛 같기도 하고 바람이 불던 길거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을 보면서 느꼈던 온몸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상실감 같기도 했다. 아니면 조금 더 옛날, 아주 어렸던 날 인지되기 전의 불빛들 같기도 했다. 영원한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의 슬픈 투영 같기도 했다. 어느 것이던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것과도 어떤 관계와도 상관없는, 그런 무감각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고통이든, 숨막힘이든, 미칠듯한 그리움이든- 초조하거나 기대 따위는 없었다. 이제 세상이 끝나고 그녀도 끝나는 것, 그것을 기다렸다… 나무들이 발을 내리고 서 있다. 펼쳐진 침엽수림은 끝없이 뻣어 있어 지구를 덮고 있다. 그건 우주로 나아가 금성에까지 닿아 있다. 아니 은하수를 지나 다른 유니벌스까지, 무한에까지, 그래서 그건 존재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 상관이 없는 곳에까지 가 있다. 이제 진아가 그 우주로 스며드는 것을 그 애는 기다리고 있다. 우주에는 나무들이 서 있다. 진아의 짐승이 우주의 나무와 섞인다. 여름날, 햇빛이 내려오는 운동장은 비현실적인 무엇으로 가득했다. 천명이 넘는 아이들이 가득 서 있는 어린 정기 같은 것으로. 나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햇빛은 내장으로 간으로 가슴으로 심장으로 들어왔다. 진아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조용히 그 애의 곱슬머리가 햇빛 아래에서바람 속에서처럼 흔들거렸다. 그리고 더 조용하게 그 애의 몸이 운동장의 고운 흙 위로 쓰러져 내렸다. 그는 아기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캄캄한 숲으로 길게 팔을 뻣어 아기를 데려갈 때에도 그는 발레리나와 같이 가벼운 걸음걸이의 여자애와 함께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불쾌감은 나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몸을 더욱더 심연으로 끌고 들어갔다. 차가운 수술대 의자에 누워 눈을 멀어 버리게 하는 강렬한 빛 아래에서 눈을 감았을 때 나는 알았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데스밸리를 지나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호텔에서 일박한다. 나는 가볍고 흥분된 마치 자잘한 매일의 축제와 같은 죄의 도시가 좋았다. 최신 유행의, 그것을 입으면 발걸음과 자태까지 경쾌해지는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반짝거리는 고급 백화점의 대리석 위를 걸어가는 것이 좋았다. 입 안에 감기는 달콤한 칵테일의 그 맛이 좋았다. 그리고 그 여자들. 새벽이나 이른 아침, 허벅지를 다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 그 여자들을 쳐다본다. 스물 두세살의 젊은 처녀들과 서른이 훨씬넘은 여자들. 그 밤을 구역질나는, 머리가 허연 남자들과 보낸 그 여자들. 돈을 번 여자들. 그래도 그들의 진창은 진아 남편이나 그 애 자신의 것과는 다른 걸까. 그렇다면 나는. 아기에 대해, 숲의 서걱거리는 납치사건에 대해 모르는 그의 진창은. 그래도 진아가 깊숙히 빨려드는 그 수렁에서 몸을 일으켰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나는 핑크와 연보라와 형광의 불빛들 속에서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꿈. 진아와 나는 맑은 물이 가득 차 출렁거리는 풀 가장자리를 함께 걸었다. 우리가 나눈 얘기는 어린 시절과 젊은 날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축축하고 반짝거리고 정교하게 아름다운 슬픈 물결같이 아련한 느낌이었다. 가벼운 하늘색 풀과 그 물과 어떤 그립고 슬픈 느낌 안에서 진아가 깨어져 내렸다. 무너지는 그 애를 나는 꽉 껴안았다. 살과 살이 맞닿는 가슴 아픈 공감과 설명하기 힘든 애정 안에서 나는 울고 싶었다. 진아도 울고 싶다는 걸 너무나 확실하게 느꼈다. 그 깊은 껴안음 안에서 나는깨어났다. 호텔 밖은 잔디가 깔려 있는 능선이다. 가끔 밤을 거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깊은 밤엔 조용한 바람뿐이다. 진아가 누워있을 것만 같은 그 옆, 조그만 동산 같기도 하고 우윳빛 달빛 같기도 한 비탈 끝자락에 누워본다. 살아있는 것이 죽어있음과 조금도 차별되지 않는 이런 느낌을 그는 알까. 진아는, 진아는 그걸 느꼈을까.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고 눈이 보이지 않아지고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하면서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고통스런 구토가 올라올 때 그 애는 아마도 알았던 것 같다. 이제 내가 그걸 느낄 차례다.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테두리처럼 나와 잔디밭을 둘러싼 어둠은 너무 두꺼워서 검은 덩어리를 향해 숨을 내쉬어도 자꾸만 가슴을 덮쳐왔다. -남 아메리카의 재규어, 플로리다의 검은 표범, 깊은 숲 속 그늘에 짐승들은 몸을 묻히고 이쪽을 내다본다. 토실한 밤색 털을 뚫고 귀여운 아기사슴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고 싶은 처절하고 정직한 본성의 충동으로, 튀어오르고 흘러내리는 새빨간 피를 핥고 싶은 목마름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생의 늘어진 지루한 목덜미를 한순간에 물어뜯기 위해 나무숲 깊숙이 몸을 숨기고. 나무들이 또 머리를 내려뜨리고 있다. 그들이 행하는 의식을 나는 경건한 신도처럼 바라본다. 거대한 나무들의 그늘이 가만히 내려와 은은하게 나를 감싼다.

2016-08-31

입양 한인 '60년 만에 시민권'

부모가 그렇게 얘기했다. 그는 그동안 선거에서 투표도 하고 배심원으로 재판에도 참여했다. 전기기사와 미용사 면허도 땄다. 하지만 2014년 그의 남편이 사망하고 두 달 후 그의 신분 상태 때문에 남편의 소셜시큐리티 연금을 수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와 함께 양부모가 그를 위해 시민권 신청을 한 적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퍼키스는 뒤늦게 시민권을 신청했고 13개월 만인 지난 1월 배우자 사망에 따른 소셜시큐리티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오는 15일이면 미국에서 산 지 60년 만에 시민권도 받게 된다. 퍼키스가 시민권을 쉽게 취득한 건 아니다. 처음엔 혼자 문제를 해결해보려 이민국과 사회보장국 등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민국과 사회보장국 등은 서로 "우리 소관이 아니다"며 그를 자꾸 다른 기관으로 보냈다. 퍼키스는 변호사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을 관할하는 연방상원 사무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끝에 시민권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엘라 퍼키스처럼 황당한 일을 겪은 입양인은 미국 내 수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인 입양인 아담 크랩서도 마찬가지다. 시민권이 없는 크랩서는 추방위기에 놓여있다. 해외에서 입양된 18세 이하 어린이 및 청소년은 2001년 발효된 입양아 시민권 법(Child Citizenship Act·CCA)에 따라 시민권을 자동 취득할 수 있게 됐지만 퍼키스처럼 당시 18세가 넘어 CCA 혜택을 받지 못한 입양인은 시민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해외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자동 부여하도록 한 입양인 시민권 법안(Adoptee Citizenship ActACA)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상정된 상원 법안(S2275)과 지난달 발의된 하원 법안(HR5454) 모두 상·하원 산하 법사위원회에 계류 중으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 민족학교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등은 연방의원을 대상으로 법안 촉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캠페인 참여 방법 및 자세한 내용 확인은 웹사이트(adopteerightscampaign.org)에서 할 수 있다. 이재희 기자

2016-07-11

"꿈꾸던 대학 붙었지만 꿈 깨져 슬펐다"

부모와 함께 이민 온 조정빈(19)군. 포스트는 그가 일반적으로 '불체자'하면 떠올리는 멕시코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온 라티노가 아닌 아시안이라면서 비자를 발급받고 미국에 왔지만 나중에 그것이 무효가 된 경우라고 전했다.  포스트에 따르면 조군의 부친은 한국서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고, 모친은 물리치료사였다. 미국에 온 후 각각 주유소 직원, 미용사로 일하고 있으며, 조군은 스프링필드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텍에 진학했다. 하지만 주내 학비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집안 형평상 진학을 포기했다.  "꿈꾸던 대학에 들어갔지만 비싼 학비 때문에 포기해야 했어요. 슬펐습니다."  좌절을 겪은 후 그가 선택한 것은 버지니아 드림법안(서류 미비 학생에 주 내 학비 적용) 통과를 위한 활동이었다. 조군은 미주한인교육봉사단체협의회(NAKASEC)에서 일하며 비슷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중남미 출신 학생들을 만났고,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는 약 1100만 명의 서류 미비자가 있으며, 이중 3분의 1은 여행객으로, 혹은 취업생으로 미국에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지난 2012년 8월 15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통해 서류 미비 학생의 추방을 유예해주는 DACA가 시행됐다. 이를 통해 50만 명의 학생들이 미국 내 합법 거주자격을 얻어냈다. 한인은 조군을 포함, 약 7000명이다.  조군은 추방 유예 조치 후 홈디포에서 일하며 북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틈틈이 수업을 듣고 있다.  포스트는 버지니아주가 추방 유예 학생들에게 주 내 학비를 적용함에 따라 조정빈군처럼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는 학생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유승림 기자

2014-05-07

WP, 한인 서류미비 학생 사연 소개

부모와 함께 이민 온 조정빈(19)군. 포스트는 그가 일반적으로 ‘불체자’하면 떠올리는, 멕시코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온 라티노가 아닌 아시안이라면서, 비자를 발급받고 미국에 왔지만 나중에 그것이 무효화된 경우라고 전했다.  포스트에 따르면 조군의 부친은 한국서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고, 모친은 물리치료사였다. 미국에 온 후 각각 주유소 직원, 미용사로 일하고 있으며, 조군은 스프링필드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텍에 진학했다. 하지만 주내 학비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집안 형평상 진학을 포기했다.  “꿈꾸던 대학에 들어갔지만 비싼 학비 때문에 포기해야 했어요. 슬펐습니다.”  좌절을 겪은 후 그가 선택한 것은 버지니아 드림법안(서류 미비 학생에 주내 학비 적용) 통과를 위한 활동이었다. 조군은 미주한인교육봉사단체협의회(NAKASEC)에서 일하며 비슷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중남미 출신 학생들을 만났고,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는 약 1100명의 서류 미비자가 있으며, 이중 3분의 1은 여행객으로, 혹은 취업생으로 미국에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지난 2012년 8월 15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통해 서류 미비 학생의 추방을 유예하는 DACA가 시행됐다. 이를 통해 50만 명의 학생들이 미국내 합법 거주 자격을 얻어냈다. 한인은 조군을 포함, 약 7000명이다.  조군은 추방 유예 조치 후 홈디포에서 일하며 북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틈틈이 수업을 듣고 있다.  포스트는 버지니아주가 추방 유예 학생들에게 주내 학비를 적용함에 따라 조정빈군처럼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는 학생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했다.  유승림 기자

2014-05-05

“새해에는 정말 이랬으면 좋겠네”

미용사로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 온 권수경씨는 2월 말 3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는 활기찬 젊은 주부다. 남편과 두 아이 돌보랴 태교에 힘쓰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권씨는 쾌활한 목소리와 긍정적인 에너지로 주변을 환하고 활기차게 해 주는 역동적인 말띠의 여인이다. Q. 새해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A: 태안의 아기를 ‘순산’하는 것이 새해가 밝자마자 임박해 있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웃음)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라고 있고 또 역시 새해에도 가족들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이 가장 우선이다. 모든 일은 건강해야 이룰 수 있지 않은가. 부모님들도 모두 연로하시다 보니 가족 구성원들이 두루두루 건강한 것이 가장 큰 새해의 소망이다. Q. 새해에 이루고픈 소망 A: 출산 후 산후조리를 끝내고 나면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해 보고 싶다. 미용 전문가로 지난 10년간 재미있게 일 해 오면서 울트라사운드촬영기사라는 전문직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동안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미루고 미뤄 왔던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새해에는 일단 시작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다. 또 아이들을 데리고 아빠의 나라인 홍콩과 엄마의 나라인 한국을 방문해 문화를 접하게 해 주고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이제 가족이 더 늘어나게 돼 비행기값이며 경비문제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새해에든 수년내에 꼭 이루고픈 소망이다. Q. 새해에는 이랬으면 좋겠네 A: 16세때 처음 캐나다에 이민와 지난 20년간 생활을 하면서 늘 블루어 한인타운이 고향과 같은 느낌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방도 있고, 전통찻집도 있고, 한지, 하회탈, 부채 등 한국 고유의 전통물건들을 판매하는 곳도 많아 한국 문화를 구경하고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런데 최근 블루어 한인타운이 여러모로 퇴색돼 가는 느낌이고 제1의 한인타운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 위기감이 들어 너무나 안타깝다. 다운타운은 수많은 외국인들이 오고가는 곳이고 그 곳에 위치한 블루어 한인타운은 캐나다에 살고 있거나 캐나다를 방문하는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입지다. 경기가 어려운 탓이겠지만 새해에는 블루어 한인타운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으로 다시 회복돼 보존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66년생 말띠 김희준(토론토 거주) 항상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희준씨. 인간관계를 소중히 하는 사교적인 그녀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며, 매일매일 확인하는 ‘구글가족달력’에 좋은 소식, 즐거운 이벤트들이 가득 계획되기를 소망하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멋진 중년의 여성이다. Q. 새해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A: 새해에는 ‘좋은 관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우선 올 한해를 지내면서 본의 아니게 서로 문제가 생겼던 사람들, 그 전부터 관계의 문제는 해소됐으나 마음에 앙금이 남아 미처 풀지 못했던 관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다 풀고 좋은 관계를 회복해 볼 생각이다. 또 나이가 들수록 가족보다 친구가 소중하다는 말처럼, 주변의 소중한 이웃들과 인간적으로 한 발자욱 더 나아간 따뜻하고 깊은 인맥 만들기에 힘쓸 계획이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지인들의 생일이나 뜻깊은 기념일을 꼼꼼히 달력에 표시해 놓고 꼭 기억해 축하 문자 메세지나 카드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일들에 더 정성을 쏟아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한다. Q. 새해에 이루고픈 소망 A: 인간 관계에서 타이밍을 잘 맞춰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족이든 친구든 소중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아무런 대가없이 기쁜마음으로 적절할 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또 새해 여름, 한국에서 방문하는 친지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별다른 변경없이 꼭 여행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Q. 새해에는 이랬으면 좋겠네 A: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이 한 살 더 먹는 만큼 스스로 더 솔직해 지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 잘난척, 괜찮은척, 안그런척, 놀리는척 등 관계를 껄끄럽게 할 수 있는 표현과 행동들을 자제하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해주는 표현과 행동들을 많이 한다면 경기침체로 움츠려든 사회 분위기가 그나마 밝고 힘차게 변화되지 않을까? 그리고 새해에는 토론토한인사회의 영사관, 한인회 등 대표적 한인단체들이 고국의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연계해 더 풍성한 문화예술공연을 개최하는 일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42년생 말띠 권정웅(미시사가 거주)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역사의 한파들을 몸으로 겪어 온 인생 여정이었다고 고백하는 권정웅씨는 새해를 맞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전한다. 인생을 차분히 돌아보며 의미있는 시간들, 덕이되는 모습들을 위해 노력하는 새해가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은발마의 새해를 잠시 엿본다. Q. 새해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A: 새해라고 올해보다 더 특별한 무엇인가를 꿈꾸겠는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 주어진 삶을 귀하게 여기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것을 다짐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 세상을 살면서 이름이나 업적을 남기는 것을 큰 일로 생각하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덕을 세우고 이 세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새해에도 하루하루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Q. 새해에 이루고픈 소망 A: 요즘 손주들을 돌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웃음) 가장 가까운 내 자손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진실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 건강하게 가족에게나 섬기는 교회에나 계속 돕는자로 할일을 충실히 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Q. 새해에는 이랬으면 좋겠네 A: 초기 이민자로서 지난 세월 한인사회의 변천을 바라보며 최근 느끼는 것은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똑똑한 것은 좋은데 단체나 사회를 화합해 도약하게 하는 건설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자신의 주장만을 앞세워 결국 불란만 일으키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새해에는 한인사회의 모두가 온화함으로 화합하고 서로 인내하며 모두의 힘을 한데 모아 다른 소수민족 단체들에게 여러모로 모범을 보이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 이안나 기자 [email protected]

2014-01-02

[문예마당]신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새 옷 입고 새 신발 신고 어른들께 세배하며 용돈도 얻었던 기쁜 날이었다. 12월 마지막 날 새 옷과 새 신발을 머리맡에 놓고 자며 몇 번씩 깨어 확인해 보고 흐뭇해하던 기쁨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다. 신발은 우리 발을 보호해 주고 몸 전체의 모양새를 마무리해 준다. 왕족과 귀족들의 신에서부터 새색시가 신던 꽃신이 있는가 하면 민중이 신던 짚신과 고무신이 있고 비가 올 때 신는 나막신도 있다. 지금은 신발 모양도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 계절과 행사에 따라서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정도로 신발 문화가 발달했다. 어디 그뿐이랴! 발 미용사도 있다. 50~60년 전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우리 몸에서 발이 제일 등한시되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옷을 먼저 챙기고 신발은 그 후에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는 옷은 입고 살지만 신발을 신지 못해서 발에 생기는 상처로 온몸에 병균이 감염되어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구 다른 편에서는 열악한 기후와 식량과 물과 생필품 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6.25전쟁 후 서울에서 고등학교 유학 시절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풍부하여서라기 보다 어머니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삼 남매가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공부하던 때였다. 언니와 내가 다니던 학교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개성을 존중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청소년 불가' 영화 관람도 슬쩍 눈 감아 주었으니 말이다. 교복이 있었지만 신발은 서울에 있는 많은 여학교 중 유일하게 구두 착용이 허용되었던 학교였다. 운동화의 불편한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듯싶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도 구둣방이 몇 안 되었고 아직 기술이 미약하여 신다 보면 늘어나고 또 무겁기도 하여 발이 불편하고 걷는 자태가 예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운동화와 구두 그리고 미국제 구두 중 한 가지 상표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미제(Made in U.S.A)이기 때문에 값이 비싸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신고 다녔다. 목 짧은 하얀 양말에 자줏빛 구두가 교복과 어울려 공주와 같이 예뻤다.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 신을 사 달라고 졸랐다. 언니와 나 두 켤레를 사려니 값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가 궁리하셨는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구둣방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구두를 맞춰 주셨다. 고이 모셔 놓았다가 개학 후 신나는 마음으로 새 구두를 신고 서울로 올라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차츰차츰 가죽이 늘어나면서 무게까지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신발 중간에 끈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질질 끌어야 했을 것이라 싶었다. 나는 하교할 때는 시간도 많고 교통비도 절약할 겸 정동에서부터 을지로 4가에 있는 나의 하숙집까지 친구와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 다녔다. 무겁고 큰 구두가 나의 걸음걸이를 칠떡거리게 했다. 혹시라도 남학생이 뒤따라오면서 웃고 있지나 않을지? 얼마나 조심스럽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 구두 뒷굽이 벗겨지지 않도록 발목에 힘을 주고 걸었고 집에 도착하면 기진맥진하였다. 객지 생활에 용돈으로 운동화를 사기도 어려웠고 메이드 제품인 구두를 사려면 다음 방학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방학에 집에 내려가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다음 학기에는 미제 신발을 샀다. 뛸 듯이 기뻤다. 가볍고 편해서 내 걸음걸이도 사뿐해졌다.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내 공주병이 싹트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나는 신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신발에 막중한 비중을 두며 경제가 허락하는 한 발에 맞고 모양도 좋은 것을 고르다 보니 이탈리아제 구두를 애용하였다. 아마 30년은 그랬나 보다. 언젠가 남편은 내 구두 수를 세어 보며 '이멜다' 여사를 들먹이기도 했다. 지금은 나이 탓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여건 때문인지 나의 마음도 바뀌었다. 신어서 편하면 내 것으로 알고 사 신는다. 교회 바자회에서 1불20센트 준 한국산 '에스콰이어' 신발을 즐겨 신고 다닌 지 오래되었으니 말이다. 신발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도 치유되었나 보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로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콤플렉스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환경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치유도 받아 나도 불편하지 않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리라. 어릴 때 뛰놀던 설날은 아직 한참이나 멀었는데 아침부터 집 앞 감나무 가지에 까치가 "깍깍" 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늘 손자가 놀러 오려나.

201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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