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 체면 세워주고 실리는 물밑 협상서 챙겨야" [월간중앙]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북베트남을 압박해 파리 평화회담을 조속히 타결하고자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했다. 당시 닉슨은 공산주의 진영을 향해 자신이 충동적·비이성적이며, 목표를 위해서는 핵을 포함해 어떤 극단적 선택도 불사할 인물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해 10월에는 전 세계 미군에게 핵전쟁 경계령을 내리고 대규모 무력시위도 병행했다. 그러나 소련과 북베트남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전략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트럼프가 닉슨과 다른 점이라면 적과 동맹국을 구분하지 않고 이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최종 목표는 美 국내 승리 주장” ‘미치광이 전략’과 같은 강압 외교에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독창성과 유용성을 갖춘 창의적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단일 의제를 이익 균형 관점에서 안보와 경제가 융합된 복수 의제로 전환해 패키지 딜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에 대해서는 확장 억제 강화와 물자와 용역의 현물 제공, 미국 제조업과 공급망 복원에 대해서는 우리 기업의 참여 방안 확보 등 복수의 제안을 연계함으로써 통합적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 외에도 우회적 보상, 파이 늘리기, 상대편의 비용 절감 등 다양한 선제적·창의적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적 연대도 필요하다. 예컨대 북·미 협상, 북한의 비핵화와 한·미·일 안보 협력에 대해 일본과 공조가 가능하다. 경제적 압박에 대해서는 우리 기업이 진출해 있는 주의 상·하원 의원, 협력기업, 시민사회 등 주요 이해 관계자를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협상 스타일을 이해하는 것은 협상 성공의 지름길이다. “인사가 정책이다”라는 금언처럼 내각이 ‘충성파’ 중심으로 구성된 점에 비춰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스타일이 특히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진 실용주의자다. 거래 중심적 접근을 하는 그에게 이념이나 가치는 의미가 없다. 전통적 외교 규범이나 관행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는 접근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첫 제안을 공격적으로 함으로써 협상을 주도한다. 닻 내리기 효과(anchoring effect)를 노리는 것이다. 높은 기준점에 닻을 내리게 함으로써 자기 페이스로 협상을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즉, 트럼프의 최초 제안은 결코 최종 제안이 아니다. 안보를 위해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를 미국이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방위비 분담금으로 한국이 100억 달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 NATO 회원국들의 GDP 5% 국방비 지출 주장이 예이다. 이런 경우 조급하고 감정적인 대응은 금물이다. 상대방 제의에 신경 쓰지 말고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우리 제의를 마련해 제시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를 선과 악,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고 직관적·본능적 성격의 소유자다. 이를 고려해 메시지는 간결, 명확하게 하고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미국이 얻게 될 단기적·가시적 이익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대통령 공백기 한국, 트럼프 학습 기회”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대화와 공개 협상을 선호한다. 대립을 피하고 트럼프가 국내적으로 승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가시적 이익과 명분을 양보하되 실리를 챙기는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에 대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신임 멕시코 대통령의 대응은 주목할 만하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25% 관세 부과 위협에 공개적으로 맞대응하는 대신 신중하고 절제된 접근 방법을 택했다. 자국의 보복 조치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았고 국경 보안을 강화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자신의 성과로 내세우도록 교묘히 방치했다. 관세 부과는 한 달간 유예됐고 셰인바움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등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 지도자를 신뢰한다. 그가 시진핑, 푸틴, 김정은 등 스트롱맨들과의 개인적 유대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 중에서는 약속을 행동으로 실행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가진 사람을 존중한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 부재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지속하고, 정상외교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은 한국에 불리하다. 그러나 초조해하고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최종 의사 결정권자의 부재를 이유로 주요 문제에 대해 시간을 벌고 결정을 늦출 수도 있다. 한국이 미국보다 국력은 열세이나, 협상력은 반드시 국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역사에는 협상력을 활용해 약소국이 강대국에 협상 우위를 차지한 사례가 많다. 협상력은 최상의 대안(BATNA), 자원에 대한 통제, 협상가의 지위, 전문 지식, 윤리성, 선례, 끈기, 설득력, 합법성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다. 시간과 정보도 협상 성패에 영향을 미친다. 약소국이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이유는 협상력이 객관적 실체가 아닌 주관적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협상력은 상황과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미국의 대외정책도 여론, 중간선거, 의회 등 여러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진화한다. 비전통적 협상가인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의 우선순위와 협상 스타일을 고려한 맞춤형 전략을 마련하고냉철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어려운 협상 상대는 자기 자신이다. 박희권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학사, 스페인 마드리드 자치대 법학박사(국제법), 영국 전략문제연구소(IISS) 연구원, 유엔 차석대사, 페루·스페인 대사를 역임했다. 세종 우수 교양도서 〈쉘 위 니고시에이트?〉 저자 박희권 한국외대 LD학부 석좌교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