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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퇴고의 길

가까이 지내는 선배가 글 두 편을 내밀었다. 하나는 본인이 쓴 신앙 간증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지 편집을 맡은 전도사가 그의 글을 퇴고한 것이다. 선배는 나이 든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쓴 간증문을 젊은 전도사가 이렇듯 몽땅 고쳐도 되느냐고 사뭇 분개했다.     평소에 지나치게 새치름한 그 교회 여전도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던 터였다. “그렇다면 그거야 그 사람 글이지 본인 글이 아니지요”라고 대충 대꾸해 가며 원문과 수정문을 훑어보다 슬그머니 맞장구 전선을 뒤로 물렸다. 선배의 글보다 전도사의 수정문이 훨씬 돋보였기 때문이다.   원문엔 BC(Before Christ)와 AC(After Christ), 즉 믿음을 갖기 이전의 세속적인 삶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의 변화된 삶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절절한 사연들에도 불구하고 절제 없는 내용 전개와 중복된 소재 인용으로 글의 주제가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뜨거운 신앙 체험은 본인 자신만의 것일 뿐 직접 경험하지 못한 독자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전도사의 글은 이런 부분들이 절도 있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었고 문장과 맞춤법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퇴고라는 것을 원고를 마무리하는 간단한 손질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 뜻이 당나라 시인 가도와 대문호 한유의 고사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말인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가도는 자신의 오언시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연에서 중이 문을 밀고 들어간다는 퇴(推)로 쓸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다는 고(敲)로 쓸지 망설였다. 그러던 중에 평소에 존경하던 한유를 만났고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다’(僧敲月下門)로 마무리했다. 여기서 유래되어 ‘퇴’ 자와 ‘고’ 자는 문장을 다듬는다는 뜻이 전혀 없는데도 그런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쓰며 수십 번을 다듬었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이상 고쳐 썼다고 한다. 퇴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낯선 문을 두드려(고) 탁발을 계속할지, 절 집 문을 슬그머니 밀고(퇴) 들어가 발 씻고 잠자리에 들어 버릴지, 그날 밤 가도의 고뇌가 내 것이 된 지 오래다.   수필을 한 편 쓰면 그때부터 긴 퇴고의 여정이 시작된다. 처음 몇 번은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보충, 첨가, 가필한다. 다음으로 문장을 압축하고 간결한 표현을 고른다. ‘-적’, ‘-의’, ‘-것’ 등의 문구를 삭제한다. 번역 작품을 많이 읽은 탓에 자주 실수하게 되는 수동형의 표현을 찾아내 능동형으로 바꾼다. 말하려던 주제나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분신 같이 여겼던 한 문단 전체도 과감히 버린다. 그 문장에 더 알맞다고 여겨지는 어휘가 떠오르면 어떤 음악가처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글을 고친다.     글 한 편은 하루에 쓰고 퇴고는 한 달가량 계속해도 뭔가 미진하다. 퇴고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은 식탁 위의 에스프레소 머신은 종일 풀가동에 지치고 내 빈한한 사유의 실꾸리는 계속되는 혹사에 비명을 지른다.   퇴고에는 뚜렷한 왕도가 없음을 글을 쓸수록 절실히 깨닫는다. 끝없는 퇴고의 길을 들메끈을 고쳐 매며 걷는다. 그 길 위에서 나의 삶도 다듬어지고 조금 더 온전해지지 않을까 꿈꾼다. 유니스 박 / 수필가이 아침에 퇴고 교회 여전도사가 신앙 간증문 신앙 체험

2025-03-20

[문화산책] 끝없이 고치고 손보고 다듬고

글쓰기에서 추고 또는 퇴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쓰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작업이다. 다듬고 고치고 손볼수록 작품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문호, 대작가들의 명작, 명문장도 그런 노력의 결실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는 군더더기나 수식어 없는 간결하고 힘찬 문체(文體)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53년엔 퓰리처상을, 이듬해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발표하기 전에 87차례 원고를 뜯어고쳤다고 한다. 2만6571개 단어로 된 짧은 소설을 무려 87차례나 뜯어고쳤다는 것이다. 명작은 그렇게 태어난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고치기에 공을 많이 들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초고는 생각나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써놓고, 그것을 뜯어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수없이 거듭하면서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퇴고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10차례 이상 뜯어고치는 것은 기본이고, 깎아내고 다듬고 넣고 빼는 작업은 셀 수 없이 많이 한다고 한다. 이어서 출판사 편집자와의 교정작업이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된다. 독자들의 반응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데. 특히 첫 독자인 부인이 읽고 지적한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고친다고 한다. 글이란 다듬을수록 좋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이든 반드시 개량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잘 썼다’‘완벽하다’라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퇴고 단계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던져버리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 노력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가 한 말도 의미심장하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작가는 이미 책으로 나와 있는 작품을 끈질기게 수정하기도 한다.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이 그런 작품이다. 평생에 걸쳐 여러 번 고치고 다듬어 교정판을 발간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퇴고와 수정을 전혀 안 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빼고는 장편과 단편 대부분을 퇴고를 안 하고 말 그대로 펜이 가는 대로 썼다고 전한다. 도박과 낭비벽이 심해서 다작을 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퇴고를 할 여유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유 있게 퇴고를 하고 작품의 질을 높일 수 있던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을 굉장히 부러워하며, 스스로의 처지를 지독히 한탄했다고 한다. 만약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여유를 가지고 마음에 들 때까지 글을 고치고 다듬었다면, 엄청난 명작이 나왔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고치기 다듬기는 작가의 필수 작업이다. 허구헌날 원고 마감에 쫓겨 허겁지겁 날치기로 써대야 하는 생계형 글쟁이가 아니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즐거운 고통이다. 그래서 퇴고를 산통(産痛)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다익선, 많이 할수록 좋다. 이런 고통이 있기 때문에 꾸준히 좋은 작품이 나오고 명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소설책은 드디어 나왔는데, 댄 브라운의 책은 언제나 나오려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소설가 레이먼드 명작 명문장도 퇴고 단계

202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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