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문예마당] 남일 같지 않은 젤렌스키 반성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자  ‘미국 우선주의’가  더욱 강하게 돌아왔다. 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3년간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원치 않는 ‘굴욕 휴전’의 압박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젤렌스키와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종전 방안을 둘러싼 두 정상의 의견 충돌로 협정 서명은 무산됐다. 이 협정은 그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매장된 희토류 등 광물자원 이익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종전 논의는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안전 보장 없는 협정에 반대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안보 보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는 고성이 오간 설전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의 협공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트럼프에게 도를 넘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도 대서양과 태평양만 믿고 안주할 수만은 없다. 전쟁이 나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며 트럼프를 자극했다.   트럼프는 “무례하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수천억 달러를 썼는데, 이게 미국 국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가?” “당신은 우리한테 고마워 해야한다” “당신은 이제 카드가 없다”며 괘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또 젤렌스키 면전에서 “멍청한 대통령이 돈을 그냥 줬잖아!”라고 했다.     유럽연합은 대출을 해 준 거였고 미국은 그냥 무상으로 돈을 줬으니 트럼프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겠다.   정상회담에서 이런 험악한 설전이 생방송으로 나가자 세계는 경악했다. 예정된 오찬도, 기자회견도 취소되고 젤렌스키는 백악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백악관 회담이 파국으로 끝나자 트럼프는 즉각 우크라이나의 군사지원을 끊었다.  자신의 종전 구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젤렌스키에게 “협상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는 지도자가 우크라이나를 이끈다면 전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오래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정권교체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약소국의 현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처지를 보며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6.25 당시 우리나라도 똑같이 미국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조기 휴전을 압박받았고 그때 이승만 대통령도 젤렌스키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은 수모를 받았다. 당시 미국은 휴전 반대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부담스러워 했다. 골칫거리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려 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겪는 설움이었다.   회담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젤렌스키는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워싱턴  DC 백악관을 찾았다. 그는 전쟁 중인 군인들에 대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그간 공식 행사에서 비슷한 복장을 입어왔다. 트럼프는 젤렌스키가 백악관에 도착하자 비꼬듯 “오늘 잘 차려입었다”고 말했다. 어느 기자는 “왜 정장을 입지 않느냐”, “정장이 있기는 한 건가”라며 젤렌스키를 조롱했다. 밴스 부통령을 비롯한 회담 배석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젤렌스키는 불편한 심기를 참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정장을 입겠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기네 대통령이 당한 수모에 분노했다. 외무부는 “우크라이나 인들에겐 우리만의 정장이 있다”면서 군장을 착용한 군인, 피 묻은 수술복 입은 의사 등 사진을 올리며 반격에 나섰다. 또 “무례하다고요? 백악관에 젤렌스키를 불러놓고 트럼프가 한 행동을 보세요”라고 항변했다.     미국내 우크라이나인들은 조국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과 그렇다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부담감이 교차했다.   젤렌스키가 당한 모욕을 보며 러시아가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그들은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터무니없이 무례했다며 트럼프와 밴스가 젤렌스키 뺨을 때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며 약을 올렸다.   굴욕을 당한 젤렌스키는 하루 만에 유럽에서 위로를 받았다. 백악관 해프닝에 국제 사회에선 유럽을 중심으로 우려가 커졌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젤렌스키를 응원하며 결집했다.   가브리엘 아탈 전 프랑스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는데 트럼프가 우방의 대통령을 잔혹하게 망신 줬다. 오늘밤 미국은 자유세계의 리더라 말할 자격을 잃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영국 의회는 트럼프에게 전한 찰스 3세의 국빈초청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트럼프는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서 “유럽의 안보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동맹국들이 안보에 무임 승차하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걸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유럽 정상들은 런던에 모여 유럽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생존을 해야한다는 ‘자강론’을 펼쳤다.     우방을 무시한 채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가 자국 이익과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패권을 추구하자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꿈틀대는 것 같다.   젤렌스키는 회담 파국 나흘만에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상 의지와 미국과의 광물 협정에 사인할 준비가 됐다”는 의사를 트럼프에게 전했다.  또한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고도 했다.     일종의 반성문으로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백기를 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소국과 강대국의 대전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약소국의 비애가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 시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멜로스의 대화’ 편이 있다. 강대국 아테네가 작은 도시국가 멜로스를 공격했을 때 벌어진 아테네 사절단과 멜로스 지도자들 간의 대화 중 하나이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당연히 할 수 있고 약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 견뎌야 한다.”     정의는 오직 동등한 힘을 가진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현실주의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젤렌스키는 이전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가 트럼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미리 공부했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줄기찬 칭찬과 경의로 트럼프의 비위를 맞춰줬다.     만약 젤렌스키가 자국의 이익을 덜 잃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트럼프의 비위를 맞췄으면 어땠을까. 또 트럼프가 강자의 아량을 조금이나마 보여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방도 적도 없는 미국 우선주의가 이렇게 가다가 혹시 자유세계의 우방들이 등을 돌리고 반미 감정이라도 품게 된다면 미국인들은 밖에서 호감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또 앞으로 우리 조국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우크라이나 사례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반성문 수필 트럼프 대통령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처지

2025-04-10

[골프칼럼] <2265> 오른쪽 어깨, 오른쪽으로 처지지 않아야

만약 자신의 스윙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논리적으로 이를 정리한 다음, 행동에서는 느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느낌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스윙을 간파할 때 발전을 거듭하지만 ‘나는 나’라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자신을 묶어 둔다면 발전의 기대는 어렵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설픈 그립이나 스윙일지라도 자신에게는 편하고 감각만 확실하면 그것은 최상의 그립과 스윙이다.   문제는 평균치 즉, 비슷한 나이와 체격조건이 같지만 상대보다 형편없이 비거리가 떨어진다면 근본적인 스윙분석이 필요하다.   골프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소위 주눅이 든다는 신체적 열세와 ‘저 사람은 독종’이라는 표현에 밀려나는 정신적 열세를 들 수 있다.   투어프로들 중 단신들의 경우도 체격적인 열세를 정신력으로 바꾼 모범적인 선수들이 많다. 이들의 대다수는 한결 같이 체력의 열세에서 분산되는 스윙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주는 집결 력을 같고 있다.   이것은 다름아닌 임팩트 순간을 의미한다. 임팩트란 온몸의 힘을 어떻게 클럽헤드에 모아 볼에 전달시키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은 곧 구심력의 임팩트냐 아니면 원심력의 힘인가이다.   일반적으로 볼을 치는 순간에 힘을 분산시키는 첫 번째 원인은 왼쪽 팔꿈치가 벌어지거나 몸 뒤쪽으로 끌어당기는 이른바 양팔이 원형상태로 임팩트를 맞을(구심력) 때, 비거리와 방향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임팩트 시 머리를 들지 말라. 이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으로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심 축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과 우측에서 좌측으로 넘겨지는 체중을 순간적으로 포착, 강력한 임팩트를 만들기 위함이다.   임팩트 순간 볼 뒤에 머리를 남겨둔(behind the ball) 상태에서 팔로스루(follow through)를 마쳐야 한다는 뜻이다.     대다수 골퍼들의 실수는 다운스윙 도중 힘이 분산, 정작 필요한 임팩트에는 밀거나 밖으로 향하던 클럽헤드를 몸 쪽으로 당겨, 볼에 파워를 전달시키지 못하는 경우다.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스윙이란 백 스윙으로 올라간 길(궤도)보다 다운스윙은 몸의 안쪽에서 내려지며 올라간 같던 길로 다시 내리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함께 탄력을 받은 다운스윙의 상태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배꼽 쪽으로 살짝 밀어 넣는 기분만 있으면, 좌측으로의 체중이동도 쉽고 양손의 돌림도 쉬워 인사이드 아웃의 스윙을 창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다운스윙 과정에서 임팩트 순간까지 오른쪽 어깨가 오른쪽으론 처지지 않도록 다운스윙을 유도해야 한다.   ▶ThePar.com에서 본 칼럼과 동영상, 박윤숙과 동아리 골프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박윤숙 / Stanton University 학장골프칼럼 어깨 처지 다운스윙 과정 다운스윙 도중 임팩트 순간

2023-11-02

[아름다운 우리말] 벗아!

요즘 저는 월요일마다 옛글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관련 내용인 월인석보도 읽고,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도 읽고, 최초의 한글 성경(1887년) 중에서 마태복음도 읽고 있습니다. 시대와 종교를 넘어 공부하기에 기쁨이 큽니다. 특히 책에서 모르는 말이 나오거나 독특한 표현이나 쓰임이 나오는 경우에는 기쁨이 배가 됩니다. 공부가 점점 재미있는 이유일 겁니다. 모르는 기쁨이 호기심을 통해 아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최근에 최초의 한글 성경의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께서 자신을 판 유다를 부르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를 잡아갈 사람에게 그가 예수임을 알리기 위해서 입맞춤을 한 유다를 예수는 ‘벗’이라고 부릅니다. ‘벗아!’(마태복음 제26장) 하고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를 벗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른 복음에는 혹시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학자는 이 장면에서 유다를 벗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도 알고 싶어집니다. 공부하다 보면 궁금한 것 천지입니다.   벗이라는 말은 친구라는 말과는 달리 더 정이 갑니다. 아무에게나 벗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요즘 자주 쓰는 친구라는 말은 이미 타락을 해서 ‘이 친구, 저 친구’라는 말은 때로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는 말을 하대하는 장면에서 사용하니, 친구가 진짜로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벗이라는 말은 쓰임 자체가 드물어졌습니다. 내 벗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벗이여!’하고 부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허나 벗은 여전히 가슴 찡한 따뜻함입니다.   저는 요즘 아침에 연구실에 오면 제일 먼저 사전을 봅니다. 정확히는 두 권의 사전을 봅니다. 1942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어사전(문세영)’의 수정 증보판과 1975년에 나온 ‘새 우리말 큰 사전(신기철, 신용철)’에서 동일한 항목을 찾아봅니다. 시대의 변화를 언어에서 몸소, 오롯이 느끼는 기분 좋은 과정입니다. 아침마다 말의 기쁜 세례를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최근에 찾았던 ‘보람, 곱다, 사랑, 화’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시대의 간격만큼 사고의 틈도 벌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두 사전에서 벗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조선어사전에서는 두 번째 항목에 ‘숯불을 피울 때에 불씨에서 불이 옮기어 닿는 숯’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설명을 보면서 벗은 가까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같은 사회적 처지’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연히 다른 처지임에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말이나 친구처럼 대한다는 말은 모두 가족과 친구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 친구’라고 하는 말이 기분 나빴을 겁니다.     벗을 한자로 하면 붕(朋)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에 나오는 말이지요. 붕은 같은 몸이 두 개 있는 모습의 글자입니다. 내가 또 하나 있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해 줄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을 겁니다. ‘벗이 있어 멀리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해석입니다. 이 말에서 가장 핵심은 ‘벗이 있다’는 겁니다. 벗이 없다면 이런 표현은 성립이 안 됩니다. 비슷한 처지에 가깝게 지내던 벗이 멀리서부터 나를 만나러 찾아와 주었다면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즐거움은 기쁨과 달리 함께하여야 더 커지는 감정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판 유다를 벗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말을 들은 유다는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벗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해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곧 후회하고, 판 돈을 모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비참한 결말입니다. 저는 종종 유다에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예수께 벗이라는 말을 들은 유다의 후회입니다. 벗은 참 좋은 말입니다. 제 글을 기쁘게 읽는 글 벗이 보고 싶네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글 성경 사회적 처지 신기철 신용철

2023-09-17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