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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의 저울] 법치의 의미와 그 역사적 발전

최근 대한민국은 헌정 사상 초유의 검사 출신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하여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깊은 자괴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탄핵 자체의 충격도 크지만, 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준수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은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들에게까지 큰 실망과 함께 깊은 우려를 안겨주었다.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대통령이었기에, 이번 사태는 많은 이들에게 ‘법을 아는’ 지도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번 ‘법치’의 의미와 그 굴곡진 역사적 발전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법치를 논할 때, ‘무법천지’를 운운하며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법치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이는 단순한 법 강요를 넘어선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법치는 오히려 통치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하고, 모든 개인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법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 사회에서는 지배자들이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고 이를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법치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법은 권력자도 지배하며, 통치자도 법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정착하게 됐다.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법은 여전히 왕이나 귀족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권력자는 법 위에 군림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법의 존재 자체가 아예 없는 사회보다는 진일보한 형태였음은 분명하다.   법치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13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다. 1215년 제정된 마그나 카르타는 왕의 전횡을 제한하고 왕 또한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명문화함으로써, 권력자에 대한 법적 구속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확립했다. 비록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왕의 권력 행사를 법으로 제한한다는 발상 자체가 전례가 없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17세기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는 자연권 이론과 사회계약설을 통해 정부의 존재 이유는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으며, 정부가 이를 위배할 경우 시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몽테스키외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1748년)’에서 권력은 권력에 의해 견제되어야 하며, 법에 의한 지배만이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구체화되었다.   20세기 이후, 파시즘과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와 독재 체제의 비극적인 역사를 반성하며 법치주의는 기본권 보장과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실질적 법치주의로 심화됐다. 법의 내용 자체가 정의롭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조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치를 국민이 국가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명령 체계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법치는 오히려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시민의 방어 기제이자 자유의 보루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민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할 때, 국가가 이를 부당하게 억압한다면 법치는 ‘국가도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통해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그 권력을 행사하되, 국민의 편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헌법적 질서 안에서 행사해야 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이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국민에게 ‘법을 지켜라’ 혹은 ‘악법도 법이다’라며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질서가 아니라, 통치자의 자의적인 지배를 막기 위해 오랜 역사 속에서 시민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온 자유의 제도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통해 우리는 법치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새기고, 권력의 주체이든 일반 시민이든 모든 구성원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시민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법치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진정한 의미의 법치의 개념을 되새겨야 한다. 김한신 / 변호사니케의 저울 법치 의미 법치주의 발전 법치 개념 역사적 발전

2025-04-14

[니케의 저울] 관세 전쟁사는 현재의 거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전 세계가 관세 전쟁에 돌입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캐나다, 멕시코, 중국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고, 이에 맞서 3개국 역시 미국 제품에 보복 관세를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한국을 직접 언급하며 한국의 관세가 미국보다 네 배나 높다고 지적했고, 이로 인해 한국 역시 관세 정책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통적인 동맹국조차 예외가 아닌 보호무역 강화 흐름 속에서, 주식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국제사회도 관세 전쟁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관세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미국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주제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차법(Tea Act)’으로 촉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에 특별 세금이 부과되자,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과세(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구호를 내걸며 영국이 자신들의 의회 동의없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시민들이 동인도회사의 차 상자들을 바다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초기 미국 정부는 관세를 주요 세수원으로 활용했다. 당시 연방 정부 수입의 90% 이상이 관세에서 나왔으며,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선진국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노예제 폐지가 주요 이슈로 기억되는 남북전쟁에서도 관세 정책은 중요한 갈등 요소였다. 농업 중심의 남부는 자유무역을 지지한 반면, 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유럽산 제품으로부터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원했다. 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1890년 맥킨리 관세법과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시행되었지만, 이로 인해 각국이 보복 관세를 부과하면서 세계 무역이 위축되었고, 소비자 물가 상승 등 경제적 부작용이 심화되었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보호무역 강화는 경제 회복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GATT 체제’로 대표되는 자유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1947년 체결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는 최근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질서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다양한 무역협정을 통해 자유무역 기조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트럼프 집권 1기 당시인 2017년부터 보호무역으로의 회귀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한 25% 이상의 고율 관세 부과로 촉발된 미·중 무역전쟁이다. 트럼프의 집권 2기에는 전통적인 우방들도 가리지 않는, 더욱 확실한 보호무역 강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관세 부과 권한은 원칙적으로 의회에 있다. 미국 헌법 제1조 8항에 따르면 의회가 무역 및 관세 관련 입법 권한을 갖지만, 국가안보나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대통령이 관세를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최근에는 오히려 이러한 대통령의 예외적 권한이 일반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2기에서는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고 행정명령을 통한 관세 정책이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관세로 촉발된 미국독립전쟁을 통해 탄생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을 오가는 역사적 경로를 살펴보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 시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특히 2차 대전 직전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이 경제에 미친 영향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을 주도하며 세계 경제 질서를 구축한 만큼, 보호무역으로의 회귀가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김한신 / 변호사니케의 저울 전쟁사 관세 보호무역 강화 홀리 관세법 보호무역 기조

2025-03-12

[니케의 저울] 수정헌법 14조의 역사적 역설

최근 한국의 정치 사회적 갈등 상황이 내전에 가깝다는 우려까지 제기될 만큼 양극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도 내전이 있었고 그 상처는 아주 깊고 오래 지속되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흔히 ‘남북전쟁’이라고 불리는 노예제를 지키려는 남부와 이를 철폐하려는 북부간의 4년간의 전쟁, 그리고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령으로 기록되는 그 역사가 내전(U.S. Civil War)이었다.     그 상처는 아주 깊었다. 75년 전 발발한 동족 간의 전쟁을 경험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내전의 아픔과 긴 후유증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는 패했지만 흑인들에게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고 저항하는 남부에서는 ‘흑인차별법’ (Black Codes)을 제정하여 흑인들의 재산권과 투표권을 제한하였다. 이에 연방정부가 소위 ‘재건 수정헌법(Reconstruction Amendments)’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수정헌법 13조는 노예제 폐지, 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고, 15조는 모든 시민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헌법 개정안들이다. 이 수정헌법으로 인해 해방된 흑인 노예들도 법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소위 ‘속지주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이 수정헌법 14조가 또 한 번 큰 격랑을 거치게 되는데, 아시안아메리칸이 사건의 중심이었던 1898년의 ‘웅 킴 아크 재판’ (U.S. v. Wong Kim Ark)이다.   187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웅 킴 아크가 21세 되던 1894년 중국을 방문하고 미국으로 귀국할 때 미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국이 거절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웅 킴 아크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중국 국적이어서 미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14조에 의해 미국내 출생한 사람은 부모의 국적과 무관하게 미국 시민이라고 판결했다. 이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인들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정헌법 14조가 다시 소환되어 미국의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내린 여러 가지 행정명령(Executive Order) 중 하나가 미국 시민 혹은 영주권자가 아닌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면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수정헌법 14조는 물론 연방대법원 판례와 상충하는 것으로 보여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필두로 한 강경파 공화당들이 주장하는 행정명령의 근거는 수정헌법 14조에 포함된 미국 관할권에 속하는지(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 of)에 대해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법의 관할권에 속하지 않는 외교관의 자녀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서류미비자나(합법 체류라 하더라도) 학생 비자, 취업 비자 소지자등의 비영주권자 외국인들은 미국 법의 관할권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수정헌법 14조가 보호하려고 했던 의도는 해방된 흑인 노예지 외국인이 아니라거나, 이민법을 관장할 권리가 전적으로 행정부에 있다는 논리 등이 트럼프 대통령 측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다.   다수의 헌법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논리들은 ‘웅 킴 아크 사건’의 대법원 해석과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연방대법원은 이미 부모의 국적과 상관없이 미국 내 출생자는 미국인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수많은 주들이 연방법원에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고 이미 워싱턴주 시애틀 소재 연방지방법원에서 이 행정명령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는 판결을 낸 바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까지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현재 연방대법관들 대부분이 공화당 대통령들이 임명한 점을 고려할 때 궁극적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수정헌법 14조가 오늘날 사회를 갈라 놓은 논쟁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또한 수정헌법 14조를 강력히 채택했던 주체가 당시 공화당 강경파였고, 2025년에 수정헌법 14조를 제한하려는 주체가 트럼프 대통령을 필두로 한 공화당 강경파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김한신 / 변호사니케의 저울 수정헌법 역사 재건 수정헌법 수정헌법 14조 수정헌법 13조

2025-02-06

[디케의 저울] 보수의 가치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후보가 곧 취임한다. 전임 대통령이 4년 만에 재집권을 하는 미국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할 예정이다.     미국의 양당 제도에서 보수적인 공화당과 진보적인 민주당이 번갈아 집권을 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다당제로 유지되는 국가가 더 많은 실상이지만, 미국과 한국 등 몇몇 국가들은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국가 정치가 유지되고 있다.   양당제로 운영되는 국가들의 대부분은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으로 나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영국의 보수당, 노동당 등이 그 예이다. 실제적 양당제로 움직이고 있는 한국도 일견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계엄, 탄핵 등의 과정에서 한국에서 보수정당이라고 불리는 집권여당이 보여주는 모습이 과연 보수의 가치를 추구하는지 의문이 들고 우려가 된다.     보수란 기존 사회 질서와 가치 및 제도를 유지하거나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정치적 이념이다. 근대적 개념의 보수주의의 뿌리는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의 급진적 변화와 사회질서 붕괴에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기존 질서와 가치를 옹호하면서 태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나,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보수주의, 그리고 20세기 공산주의, 사회주의와의 대립 속에서 발전한 보수주의 모두 공동적인 특징으로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이념을 가지고 있다.   ‘법과 질서(Law and Order)’가 보수주의의 상징인 셈이다. 그러한 선상에서 필자와 같은 법조인들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보수주의적이라는 측면이 있다.   한국의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가짜뉴스’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뜬금없다는 반응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굳이 헌법학을 공부하고 복잡한 법리를 따지지 않아도 이 뜬금없다는 반응 자체가 계엄의 반헌법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헌법 제77조 제1항에 따르면 대통령은 ‘전시(외국의 침략이나 전쟁 발생 시)’ 혹은 그에 준하는 ‘사변’ 발생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대통령의 주관적 판단으로 계엄을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었던 과거 유신 시대나 제5공화국 시대와 달리 1987년 헌법하에서는 계엄 선포의 요건이 구체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국민 대다수가 ‘전시’나 ‘사변’이라고 인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포된 ‘뜬금포’ 계엄은, 절차상 하자와 같은 내용들을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가 반헌법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온국민이 생방송으로 지켜 본 계엄군의 국회의사당 진입은 헌법기관인 국회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목적 이외에는 달리 해석이 불가하다.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헌법을 수호하고’라고 선서를 한다. ‘짐이 곧 국가’라는 절대 왕정시대의 군주가 아닌 다음에야 반헌법적인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헌법기관들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헌법을 수호’한다는 선서와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정당이라고 하는 여당이  ‘법과 질서’의 유지를 우선적 가치로 추구하고 있는지 상당히 의문이 든다.     자당 출신의 현직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법과 질서를 파괴했다면, 그에 대한 응징을 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만 보수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수정당이 ‘계엄은 잘못되었지만 탄핵은 반대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전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계엄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그 계엄이 반헌법적이라 잘못된 것이고, 반헌법적 행위를 저지른 대통령은 헌법 수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헌법질서를 파괴한 것이기 때문에, ‘법과 질서’의 보수정당이 보호할 대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특정 야당 유력 정치인이 너무 싫어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탄핵 반대 혹은 지연의 이유를 들기도 한다. 그 야당지도자가 싫으면, 헌정질서가 회복된 후 치러질 선거에서 그보다 뛰어난 후보자를 세워 국민을 설득시키면 될 일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요 법과 질서다. 설사 당장의 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이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수주의의 원칙을 지켜야 장기적 성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공학적으로, 당장의 이익에 급급할 일이 아니다.     집권여당이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고 회복시키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다. 자칭 보수정당에 의해 보수적 가치가 무너지는 것 같은 현실에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다. 김한신 / 변호사디케의 저울 보수 가치 보수주의 모두 보수당 노동당 계엄 선포

2025-01-02

[열린 광장] 큰 도끼 작은 도끼, 그리고 저울 추

나는 ‘왕’이로소이다. 임금 왕(王), 바로 그 글자란 말이외다. 서기 100년경 허신이란 자가 나(‘왕’자)에 대해서 해설을 한 적이 있지요. 세로로 그은 세 줄은 하늘, 사람, 땅을 나타내고, 가로로 내리 그은 한 줄은 천, 인, 지를 관통하는 권위를 나타낸다고. 그럴 듯하지요. 임금이란 자리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하늘의 뜻을 아우르는 고상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허신은 한(漢)나라 사람입니다. 1만여 한자의 유래, 뜻, 발음 등을 설명한 중국 최초의 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었습니다. 오늘의 중국 글자를 한자(한나라 글자)로 부르게 된 것은 물론 한나라가 생기고 난 후의 일이지요. 나 ‘왕’자를 비롯한 많은 글자들은 그 전에 천년 이상 쓰였었죠. 그런데 그 글자들 앞에 턱 하니 자기 나라 이름을 갖다 붙여서 마치 제 것인 양 만든 것은 한나라의 터무니없는 자랑질이지요. 글자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한족(漢族)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런데 19세기 말 거북 등껍데기에 새긴 글자들이 발견되고 나서 나 ‘왕’자의 기원에 대한 직설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문자가 새겨있는 갑골은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 지방에서 많이 출토가 되었지요. 처음에는 용골(용의 뼈)로 알려져서 한약재로 팔렸습니다. 1899년 어느 눈 밝은 사람이 옛 문자를 알아보고 나서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되었습니다.     한자는 원래 사물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상형문자이지요. 그러면 ‘왕’자의 상형 그림은? 도끼입니다. 그것도 큰 도끼. 허신의 설명은 왕이 제도화된 다음의 이야기이고 원래 고대 사회의 왕은 큰 도끼 휘두르는 놈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끼의 영역이 점점 커져서 고을이 되고, 나라가 되고, 제국이 되면서,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끼 그림은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숨어버린 것이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복잡해지면 큰 도끼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지요. 그래서 작은 도끼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 새끼 도끼를 표시하는 그림이 ‘사(士)’ 자가 되지요. 우리는 ‘선비 사’라고 새기죠. 허신은 ‘선비 사’를 십(十)과 일(一)을 합한 글자라고 해석합니다. 시작(일)부터 끝(십)까지 전체를 아우른다는 해석입니다. 고상하죠? 그런데 갑골문자에서는 ‘사’자는 작은 도끼 그림입니다.     큰 도끼가 똘마니 도끼를 데리고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힘을 ‘권력(權力)’이라 하지요. ‘권(權)’은 원래 저울의 추를 나타내는 그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도끼를 가지고 찍고 까고 하던 일들이 세상이 제도화되면서 판단의 기준을 정하고 집행하는 힘으로 바뀌죠. 옛 저울을 보면 저울대에 눈금이 있고 저울추를 옮겨 가면서 평형점을 찾아 무게를 재게 되어 있지요. 그 눈금을 읽는 일이 왕의 권위이지요.     왕권이 사라지고 근대 국가가 되면서 큰 도끼의 이름도 바뀌고 큰 도끼가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많아졌지요. 그러나 왕, 수상, 대통령, 총통, 이름은 바뀌어도 한 나라를 운영하는 큰 틀은  큰 도끼, 작은 도끼, 저울추 그대로입니다.     고귀한 ‘왕’자가 ‘하찮은’ 민초들에게 말을 하면서 또박또박 존댓말 쓰려니 밸이 꼴리네. 요새 어느 나라에서 큰 도끼 뽑기 대회가 열린다는데. "내가 큰 도끼로 뽑히면, 늬들 다 죽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왕’자에 딱 어울리는 도끼 시대의 도끼 말.   김지영 / 변호사열린 광장 도끼 저울 도끼 저울추 도끼가 똘마니 도끼 그림

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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