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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에 미쳤다” 16년간 만화로 알린 백인

“이순신은 세계적 영웅이다.”   파란눈의 백인 만화가 온리 콤판(Onrie Kompan)은 이순신에 미친 사람이다.     지난 16년간 이순신을 알리는데 모든 것을 걸었다. 출판사도, 유통망도 없었지만 직접 만화책을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한 권씩 팔았다. 그 결과 120개 이상의 컨벤션에서 수많은 독자들과 만났고, 그가 그린 ‘이순신(Yi Soon Shin)’ 시리즈는 지금까지 25만 부 이상 판매됐다.   일리노이 출신 콤판이 이순신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04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비록 드라마를 통해서였지만 그때부터 그는 이순신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후 이순신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그를 세계적인 영웅으로 알리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콤판은 이순신을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만화에서 이순신은 끈기의 화신이다. 그는 “이순신은 수많은 난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며 “이 이야기가 절망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콤판은 지난 2015년 한국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서 ‘청소년 자살 예방’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그는 “희망이 안보이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이 끝까지 싸웠듯, 한국의 청소년들도 삶을 포기해서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한국방문을 계기로 그의 관심은 이순신을 넘어 위안부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당시 출판사의 제안으로 그는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에 동참했고, 서울 ‘평화의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렀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지만 끝까지 싸우는 모습이 이순신과 다를 바 없다”며 “그들의 목소리가 전 세계에 알려져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만약 이순신이 지금 있었다면, 분명 이들과 함께 싸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앞으로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신을 만화로 그리기 위해 그는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는 2년 동안 난중일기, 임진장초, 징비록 등 임진왜란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자료를 조사했다.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한국을 직접 방문해 여러 전장을 답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순천향대학교 정병웅 교수의 도움을 받아 한국 육군.해군 관계자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군 전문가들의 조언이 필요했다”며 “그 덕분에 만화 속 해전 장면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한국 역사를 주제로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출판사들은 하나같이 그를 외면했다. 미국 만화 시장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콤판은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했지만 이순신처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며 “어떠한 어려움이든 해결책은 반드시 있다는 신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토로했다.     현재 ‘이순신’ 시리즈는 마지막 두 편을 남겨두고 있다. 이순신을 단순한 한국의 영웅이 아닌, 전 세계가 주목해야 할 역사적 인물로 만들겠다는 게 콤판의 목표다. 그는 “이순신은 세계적 영웅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다. 절망적인 환경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살 것이요, 살기를 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는 “이순신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객관적 전력으로만 보면 이길 수 없는 전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순신은 싸웠고 결국은 승리했다”며 “나도 이 싸움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콤판의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순신을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 강한길 기자사나이 이순신 사나이 이순신 이순신 장군 한국 역사 캘리포니아 미국 LA뉴스 LA중앙일보 강한길 미주중앙일보 로스앤젤레스 위안부 onrie kompan 코믹북 만화 난중일기 임진왜란 학익진

2025-03-16

이미 시작된 전쟁

이미 시작된 전쟁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앞선 과오를 뒤돌아 성찰하고 뼈아프게 반성한다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반성하지 않는다면 지난 모든 과오가 그대로 되살아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 반성 없는 역사의 반복을 염려한 나머지 온몸으로 징계와 성찰의 붓을 든 인물이 서애 류성룡이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발탁해 최전방의 요직을 맡기는가 하면 전쟁이 터지자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동양3국의 국제전을 잘 이끌어 조선에 승리를 안긴 난세의 정치인이었다. 〈징비록(懲毖錄)〉은 그가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서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정이 가장 어렵던 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이순신이 전선에서 싸운 최고의 장수였다면, 류성룡은 전시 국정을 운영한 최고의 리더였다. 류성룡은 비록 파직됐지만, 전쟁의 뼈아픈 기억을 교훈 삼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경북 안동 하회로 돌아간 류성룡은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하고 고찰해, 뒷날의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을 썼다. '징비'(懲毖)’란 무엇인가. 지나간 날들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이다. 〈징비록〉은 400여 년 전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오늘도 살아 있는 역사로서 읽히는 우리 기록문화의 보물 같은 자산이다. 1592년(선조 25년)~1598년까지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하고 당시 최고위층에 있으면서 전쟁의 실상을 겪은 저자가 후일에 있을지도 모를 더 큰 우환을 경계하고자 집필한 책, 〈징비록〉은 현재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징비록)〉은 가슴을 찌른다. ‘쓰러지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다’는 서애 유성룡의 말이 통렬하다. '지난 잘못을 징계해 미래의 환란을 경계함'이 징비(懲毖)다. 선조가 명나라로 내부(內附·귀순)하려 하자 유성룡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민심 수습과 산업 장려, 명과의 교섭, 군비 강화도 서애의 몫이었다. 명·왜의 조선 분할 획책을 온몸으로 저지한 것도 서애였다. 유성룡은 '징비록' 맨 앞에 그 100여 년 전 외교·국방 전문가인 신숙주의 유언을 인용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1443년 27세에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로 일본을 분석한다. 나라의 길을 묻는 성종에게 신숙주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징비록〉을 능가할 임진왜란 기록물은 없다.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국정과 군무(軍務)를 총괄한 서애는 난의 근본을 밝힌다. 국가 리더십 붕괴가 부른 총체적 위기와 비정한 국제정치를 낱낱이 해부한다. 〈징비록〉은 1633년 처음 출간된 후 1695년 일본에서도 간행됐고 중국에서도 읽혔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이겼던 기록보다는 패했던 기록의 내용이 더 상세하게 적혀 있다. 누가 잘못해서, 무엇이 부족해서 패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충정이었다.   17세기 초반 간행된 〈징비록〉이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빛을 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류성룡이 보인 솔직한 고백과 통렬한 자기반성 때문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서 “나같이 불초한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시국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몸을 낮춘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과오와 무능을 사실대로 서술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보다 더 예민하게 〈징비록〉을 주목한 것은 일본이었다. 〈징비록〉은 1695년 일본에서 간행된다. 초판 〈징비록〉의 서문에서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은 이렇게 썼다. “조선인이 나약하여 빨리 패하고 기왓장과 흙이 무너지듯 한 것은 평소 가르치지 않고 방어의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은 전쟁을 잊은 것이다.” 날카롭고 뼈아픈 지적이다.     최근 국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중국 문제 전문가 이철 박사의 〈이미 시작된 전쟁〉. 제목부터 눈에 확 들어온다. 저자는‘중국의 대만 침공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그는 중국은  대만을 치기 전에 주한 미군을 묶어두기 위해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을 치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지난 3월 19일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전의 도발과 달리 최초로 한국 전역과 일본 일부에 핵 타격을 염두에 둔 시험 발사이었기에 우리나라에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2월 4일 미국 본토 상공에서 중국의 정찰 풍선이 격추됐다. “내 직감으로는 2025년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미 공군 기동사령부 마이클 미니헌 장군의 말처럼,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과 북한, 중국과 미국 사이에 예기치 못한 물리적 충돌이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중국이 대만 공격을 결정하는 순간, 북한의 남한 공격이 시작된다.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에는 수백 발의 방사포와 미사일의 강철비가 쏟아지고, 한국이 응전하면 북한은 수도권 전 지역으로 미사일 공격을 확대할 것이다. 이때 중국은 대만 침공을 시작한다. 응전을 위해 미국은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대만으로 보내고 결국 대만 내륙에서 시가전이 벌어진다.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 캐나다, 호주, 영국, NATO가 참전을 선언하면 중국은 러시아에 참전을 요청한다. 이 상황이 우리가 목도하게 될 양안 전쟁에서 한반도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 시나리오다. 중국은 대만 침공과 동시에 한반도에 제2전선을 만들어 태평양 미군을 한반도와 대만으로 양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이 아니다.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것은 동서 양면에서 두 전선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군에도 양면 전선은 힘겹다. 더구나 중국엔 한반도 제2전선을 대신 만들어줄 북한이 있다. 북한이 이 역할을 맡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이것은 한국의 대중국 정책에 따라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군사 작전상 필요에 따른 것이다. ‘설마’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민주당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도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중국이 우리를 대만 전쟁에 끌고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 지역 중 수년 내에 전쟁이 또 발발하는 곳이 있다면 대만일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대만 침공은 가능성이 낮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만약 중국이 국가 운명을 걸고 대만을 침공하는 대도박을 감행한다면 대만과 동시에 중국 미사일이 떨어질 나라가 둘 있다. 한국과 일본이다. 두 나라에 모두 미 공군기지가 있다. 중국 입장에선 한일 기지에서 출격하는 미 전투기들이 대만에 상륙하는 중국 해군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한미 동맹이 없어지지 않는 한 중국의 한반도 제2전선 시도는 막을 수 없다. 한국 입장에서 우리 땅에 대만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중국이 대만 침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순간 그 불길은 한국에 옮겨붙는다. ‘중국은 힘으로 현상을 바꾸려 말라’는 것은 국제사회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지만 잠재적 피해국인 한국민에겐 절실한 요구다. 대만해협문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사회는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표현을 쓴 것에 대해 민주당이 마치 윤 대통령 언급 내용 자체가 잘못된 듯이 공격하는 것은 대만 문제의 필연적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어차피 남의 땅에 불 지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그에게 잘 보이면 불을 안 지를 것’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 민주당은 북핵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입장을 취해왔다. 류성룡이 감당한 현실은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어 길가에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진” 현장이었다. 성리학 이념에 대한 맹종이 망친 나라를 현실주의 시무(時務) 리더십이 살렸다. 〈징비록〉은 통치자가 선악 이분법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현실을 외면하면 국가에 환란이 닥친다고 외친다. 외교 안보와 경제를 이념과 도덕근본주의가 망친다고 고발한다.     한국수뇌부의 대만해협 발언에 대해 중국 당국은 즉각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국 당국은 부용치훼(不容置喙)라는, 거의 욕설에 가까운 용어를 썼다. 부용치훼는 직역하면 ‘말참견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지만 이 용어가 극히 드물게 쓰이는 이유는 그 참뜻이 ‘주둥아리 닥치고 있으라’는 막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중국의 오만함과 한국 무시를 언제까지 참고 있을 것인가. 우리의 과거는 우리가 그렇게 대접받아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약한 나라였다. 조선의 문화는 중원에 종속됐을 때 가장 선진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사대의 극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제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의 문턱에 올라서고 있다. 세계가 우리의 의견과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더 이상 중국 대륙에 붙어있는 ‘껌딱지’ 같은 존재가 아니다.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나라의 기둥이 되고 법치가 생활이 되는 나라로 발돋움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의 체제에 언급하지 않는다. 중국이 어떤 이념과 사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지 우리의 직접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문제다. 또 중국이 미국과 또는 다른 나라와 어떤 관계인지, 무엇으로 대립하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안위에 관한 것일 때, 그것이 한국의 국격과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때 ‘할 말은 하는’, 존재감 있는 이웃으로 살기를 원할 뿐이다. 과거 세계 역사에서 약소국이 살아남는 길은 어느 한쪽의 강대국에 빌붙어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중진국으로 올라서고 있는 한국이 행세하는 길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한국을 속국시하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전략적 동맹으로 삼는 미국일 수밖에 없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다가올 미래를 알기 위함이다. “천하가 비록 편안하여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사마양저의 말은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처럼 들린다.     김지민 기자시작 전쟁 임진왜란 기록물 한국 전역 임진왜란 정유재란

2023-05-04

윤석열 대통령과 징비록

윤석열 대통령과 징비록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발탁해 최전방의 요직을 맡기는가 하면 전쟁이 터지자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동양3국의 국제전을 잘 이끌어 조선에 승리를 안긴 난세의 정치인이었다. 〈징비록(懲毖錄)〉은 그가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서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정이 가장 어렵던 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이순신이 전선에서 싸운 최고의 장수였다면, 류성룡은 전시 국정을 운영한 최고의 리더였다. 류성룡은 비록 파직됐지만, 전쟁의 뼈아픈 기억을 교훈 삼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경북 안동 하회로 돌아간 류성룡은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하고 고찰해, 뒷날의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을 썼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에 좌의정, 영의정, 사도 도체찰사의 중책을 맡았던 류성룡은 전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전란사를 저술하는데, 그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징비'란 무엇인가. 지나간 날들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이다. <〈징비록〉은 1586년 일본 사신이 우리나라에 다녀간 일을 시작으로 해서 1598년 이순신 장군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소상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일본 전역을 평정하고 66주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인동(경상북도 칠곡)을 지나던 야스히로가 길가에 도열한 병사들의 창을 보고 비웃는 투로 말했다.  "당신들 창의 자루가 참으로 짧습니다그려." 그는 또 상주 목사 송응형이 베푼 주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기에 이렇게 터럭이 희어졌지만, 귀공께서는 기생들의 노래 속에서 편안하게 세월을 보내는데 어찌 머리가 희어졌소?" 대단한 비아냥이다. 그런데 송응형은 그때 부끄러운 줄이나 알았을까.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자 예조판서가 베푼 잔치 자리에서 야스히로는 호초(약재로 쓰이는 후추나무 열매)를 한 주먹 꺼내더니 자리에 뿌렸다. 그러자 기생들과 악사들이 달려들어 호초를 줍느라 잔칫상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스히로는 크게 질타했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실로 우리를 뼈저리게 하는 대사들이다.   1590년 3월, 황윤길을 상사, 김성일을 부사로 삼고 허성을 서장관으로 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사신으로 온 쇼오 요시토시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1년 봄에 돌아왔는데, 황윤길은 사신 일행이 겪은 내용을 기록한 글을 올리면서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나이다. 윤길은 공연히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의견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다. 서애 류성룡과 김성일은 함께 퇴계의 문하였다. 김성일을 만난 류성룡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대 의견이 상사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민심이 동요될까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전, 류성룡이 천거하여 종6품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은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 안에서는  이순신의 갑작스러운 승진을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애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다. 결국 이순신을 천거해 조선을 구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다. 당시 조정에 있던 무장 가운데는 신립과 이일이 가장 유명했는데, 조정은 1592년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변방에 파견해 순시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 1일,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사해온 내용이란 것은 고작 활과 화살, 창과 칼 같은 무기들의 보유 실태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군이나 읍에는 문서상으로만 무기가 갖추어져 있을 뿐 실제로 필요한 무기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류성룡이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이 대수럽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 류성룡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이 무슨 어이없는 대답이란 말인가. 이 같은 안이한 생각이 결국 적을 불러들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풍 ‘힌남노’ 대응에서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움직였다. 국민 고통에 공감했고 민첩했다. 포항 지역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명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유족을 위로한 후 곧바로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8월 서울 폭우·침수 사태의 ‘무능과 둔감’ 딱지를 떼기 위한 윤 대통령의 절박한 ‘징비’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풍 ‘힌남노’ 대응에서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움직였다. 국민 고통에 공감했고 민첩했다. 포항 지역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명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유족을 위로한 후 곧바로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8월 서울 폭우·침수 사태의 ‘무능과 둔감’ 딱지를 떼기 위한 윤 대통령의 절박한 ‘징비’다.   무한 당쟁에 매몰돼 세계 정세를 외면하다 국망(國亡)에 몰린 비극이 임진왜란이고 6·25 전쟁이다. 한국 좌·우파와 윤석열 정부도 당쟁 정치로 외치의 징비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치명적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미·중 그레이트 게임은 국제연합(UN)에 기초한 세계 거버넌스 체제를 우리 눈앞에서 붕괴시키고 있다. 상호 이익 관계가 얽힌 지구 경제가 전쟁을 막는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은 망상으로 판명됐다. 지역적 침략전이 준(準)세계 전쟁으로 비화하고 제한 핵전쟁과 자포리자 원전 재앙까지 운위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생생한 증거다. 수퍼 태풍은 앞으로도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다. 세계사적 도전과 민생 문제는 국가 존망을 결정할 정치적 태풍이다. 우리는 폭풍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눈물로 폭풍에 대비해 생명과 나라를 살릴 순 있다. 제11호 태풍 힌남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입증한 징비의 현장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실사구시 리더십으로 국민 아픔을 덜어주었다. 이젠 대통령이 자신을 버리는 처절한 징비로써 ‘윤석열의 시간’을 증명할 때다. 국난을 함께 넘는 21세기 징비록의 길이 우릴 기다린다.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임진왜란 전란사 조선통신사 일행

2022-09-14

[역지사지(歷知思志)] 김시민

에도 시대 일본에선 ‘모쿠소 호간’이라는 괴물이 일본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유행했다. ‘모쿠소’는 임진왜란에서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에서 유래된 단어다. 당시 진주 목사였기 때문이다. (김시덕 ‘동아시아, 대륙과 해양이 맞서다’)   김시민 장군은 일본에 악몽 같은 존재였다. 1592년 가을, 전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초조해진 왜군은 진주성을 치기로 했다. 진주성은 일본이 장악한 경상도 남부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의 거점이었다. 즉, 이곳을 함락하면 손쉽게 호남까지 뻗어갈 수 있었다. 1592년 10월 일본군은 진주성에 3만 명을 투입했다.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은 3000여명.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은 육로를 통해 호남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고, 조선은 곡창지대인 호남 내륙을 보호했다. 충무공의 해군도 후방의 위협을 덜고 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화 ‘한산’의 누적 관객 수가 600만명을 넘어섰다. 충무공과 임진왜란 관련 서적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다루는 대중문화에서 충무공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현상이 반복되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미국에선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내세운 뮤지컬 ‘해밀턴’이 큰 히트를 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주역이면서도 그동안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 등에 비해선 주목을 덜 받아왔다. 임진왜란은 7년간 동아시아를 흔든 대전이었다. 조명받을 만한 인물이 과연 ‘한 명’뿐일까.역지사지(歷知思志) 김시민 김시민 장군 호남 내륙 임진왜란 관련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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