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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하멜 일행

1653년(효종 4년) 8월 16일 제주도 대정리 산방사 앞바다에 표류하던 네덜란드 상선이 도착했다. 헨드릭 하멜(1630~1692)을 비롯한 64명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상륙하면서 28명이 죽고 36명이 구조됐다. 조선 땅에서 14년간 노예처럼 생활하다가 8명이 1차로 탈출해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남원과 순천에 잔류했던 8명은 네덜란드가 일본 막부 정권을 통해 조선 조정에 호소해 2차로 귀국했다.   생존자 36명 가운데 16명이 귀국하고 일부는 병으로 죽었지만, 얀 클라츠 등은 귀국을 거부하고 한국인과 결혼해 처자식을 두고 조선에서 일생을 마쳤다. 물론 처자식을 두고 매정하게 귀국한 사람도 있다. 남은 사람들은 천민과 결혼했으므로 그 뒤의 혈족이 어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네덜란드 표류자들과 조선인의 자녀는 한국인과 서양인 사이에 태어난 최초의 혼혈이다. 이들은 지금 우리와 함께 섞여 살고 있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비롯해 혼혈은 한국사에 허다하다.   이민을 주제로 한 글에서 하멜 표류기를 거론하는 이유는 민족은 오직 핏줄뿐인가 하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고전파 민족주의자들은 핏줄을 민족의 첫째 구성 요소로 거론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인 2세로서 한국어 실력이 8학년의 수준에 이르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는 이들을 동포 또는 민족이라 한다.   이에 따른 구별로 보면 언어를 잊은 다른 국적의 형제는 그저 혈연일 뿐 민족이 아니며, 차라리 우리와 고락을 함께하며 같은 문화와 언어를 쓰는 사람이 동포가 아닐까.   절망적인 ‘인구 절벽’ 앞에서 근거도 없는 순혈주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단군은 역사로서 국조(國祖)일 뿐이지 학술적으로 보면 한국은 26개 민족이 이룬 사실상 다민족 사회다. 이민을 받을 것인지, 국가 쇠락의 길로 갈 것인지 결심할 순간에 왔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하멜 일행 하멜 일행 하멜 표류기 헨드릭 하멜

2024-06-23

‘골프 카트 털이’ 주의보…한인 7명 2500달러 피해

남가주 지역 유명 골프장에서 한인들이 수천 달러의 현금을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절도범은 몰래 골프장에 침입, 골퍼들이 카트를 비운 사이 귀중품 등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은 지난 30일 라하브라 지역 웨스트릿지 골프장에서 발생했다. 이모씨를 비롯한 일행 7명은 이날 오후 12시 20분부터 티타임 두 개를 예약해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이씨에 따르면 절도 피해 사실을 인지한 건 골프를 마친 뒤였다.     이씨는 “골프백 등을 정리하면서 지갑을 봤는데 현금이 하나도 없더라”며 “그때 다른 일행들도 갑자기 ‘돈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때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일행 7명이 털린 돈은 전부 약 2500달러 정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본지는 3일 골프장 측에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다.   골프장 측 한 직원(라이언)은 “일단 지난주에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매니저는 지금 없다. 나중에 연락을 다시 달라”고 말했다.   이씨 일행은 피해 사실을 인지한 뒤 골프장 측에 감시 카메라 등의 설치 여부를 물었다.     이씨는 “골프장 관계자가 ‘요즘 다른 골프장도 다 털린다’라고 성의 없게 말하더라”며 “그 말에 너무 화가 났지만 다른 골퍼들이 추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고객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해 달라고만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경찰 신고도 포기했다. 신고한다 해도 감시 카메라 파일 등 사실상 절도 피해 증거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유명 온라인 리뷰 사이트인 ‘옐프(yelp)’에도 웨스트릿지 골프장의 절도 피해 사례 등이 게재돼있다.   지난해 6월 제임스(아이디)는 “웨스트릿지 골프장 주차장에서 차량 절도 사건이 발생했었다”며 “골프장 측이 경비원을 고용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릴 이(아이디)는 “두 번이나 골프 카트에 소지품을 두고 내렸다가 물건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며 “그때마다 아무 물건도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한인 골퍼들은 “골프장 내 절도 사건은 팬데믹 이후 빈번하게 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 골프 인기가 높아지면서 골프장을 이용하는 한인들이 늘자 절도 사건 역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말 골퍼인 최윤성(49·라하브라)씨는 “근처에 프라이빗 골프장에서도 얼마 전에 주차장에서 차량털이 사건이 발생했었다”며 “사건 직후 골프장 측에서 감시 카메라 등을 더 늘렸지만 사실상 골프장 측의 책임을 묻기도 어렵기 때문에 골퍼들이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LA카운티 지역 데니 김 레슨 프로는 ▶귀중품이나 현금 등은 골프장에 가져오지 말 것 ▶골프장 탈의실의 사물함 비밀번호 등이 노출되지 않도록 할 것 ▶라운드 도중 골프 카트를 항상 시야에 들어오는 가까운 곳에 둘 것 ▶화장실 이용 등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할 경우 일행 중 1명은 골프백 등이 방치되는 상황을 방지할 것 ▶차량 뒷좌석 등 눈에 보이는 곳에 클럽 등을 놓지 말 것 등의 주의사항을 알렸다.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골프 카트 한인 일행 한인 골퍼들 감시 카메라

2023-04-03

윤석열 대통령과 징비록

윤석열 대통령과 징비록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발탁해 최전방의 요직을 맡기는가 하면 전쟁이 터지자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동양3국의 국제전을 잘 이끌어 조선에 승리를 안긴 난세의 정치인이었다. 〈징비록(懲毖錄)〉은 그가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서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정이 가장 어렵던 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이순신이 전선에서 싸운 최고의 장수였다면, 류성룡은 전시 국정을 운영한 최고의 리더였다. 류성룡은 비록 파직됐지만, 전쟁의 뼈아픈 기억을 교훈 삼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경북 안동 하회로 돌아간 류성룡은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하고 고찰해, 뒷날의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을 썼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에 좌의정, 영의정, 사도 도체찰사의 중책을 맡았던 류성룡은 전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전란사를 저술하는데, 그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징비'란 무엇인가. 지나간 날들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이다. <〈징비록〉은 1586년 일본 사신이 우리나라에 다녀간 일을 시작으로 해서 1598년 이순신 장군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소상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일본 전역을 평정하고 66주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인동(경상북도 칠곡)을 지나던 야스히로가 길가에 도열한 병사들의 창을 보고 비웃는 투로 말했다.  "당신들 창의 자루가 참으로 짧습니다그려." 그는 또 상주 목사 송응형이 베푼 주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기에 이렇게 터럭이 희어졌지만, 귀공께서는 기생들의 노래 속에서 편안하게 세월을 보내는데 어찌 머리가 희어졌소?" 대단한 비아냥이다. 그런데 송응형은 그때 부끄러운 줄이나 알았을까.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자 예조판서가 베푼 잔치 자리에서 야스히로는 호초(약재로 쓰이는 후추나무 열매)를 한 주먹 꺼내더니 자리에 뿌렸다. 그러자 기생들과 악사들이 달려들어 호초를 줍느라 잔칫상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스히로는 크게 질타했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실로 우리를 뼈저리게 하는 대사들이다.   1590년 3월, 황윤길을 상사, 김성일을 부사로 삼고 허성을 서장관으로 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사신으로 온 쇼오 요시토시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1년 봄에 돌아왔는데, 황윤길은 사신 일행이 겪은 내용을 기록한 글을 올리면서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나이다. 윤길은 공연히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의견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다. 서애 류성룡과 김성일은 함께 퇴계의 문하였다. 김성일을 만난 류성룡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대 의견이 상사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민심이 동요될까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전, 류성룡이 천거하여 종6품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은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 안에서는  이순신의 갑작스러운 승진을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애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다. 결국 이순신을 천거해 조선을 구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다. 당시 조정에 있던 무장 가운데는 신립과 이일이 가장 유명했는데, 조정은 1592년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변방에 파견해 순시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 1일,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사해온 내용이란 것은 고작 활과 화살, 창과 칼 같은 무기들의 보유 실태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군이나 읍에는 문서상으로만 무기가 갖추어져 있을 뿐 실제로 필요한 무기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류성룡이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이 대수럽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 류성룡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이 무슨 어이없는 대답이란 말인가. 이 같은 안이한 생각이 결국 적을 불러들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풍 ‘힌남노’ 대응에서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움직였다. 국민 고통에 공감했고 민첩했다. 포항 지역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명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유족을 위로한 후 곧바로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8월 서울 폭우·침수 사태의 ‘무능과 둔감’ 딱지를 떼기 위한 윤 대통령의 절박한 ‘징비’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풍 ‘힌남노’ 대응에서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움직였다. 국민 고통에 공감했고 민첩했다. 포항 지역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명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유족을 위로한 후 곧바로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8월 서울 폭우·침수 사태의 ‘무능과 둔감’ 딱지를 떼기 위한 윤 대통령의 절박한 ‘징비’다.   무한 당쟁에 매몰돼 세계 정세를 외면하다 국망(國亡)에 몰린 비극이 임진왜란이고 6·25 전쟁이다. 한국 좌·우파와 윤석열 정부도 당쟁 정치로 외치의 징비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치명적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미·중 그레이트 게임은 국제연합(UN)에 기초한 세계 거버넌스 체제를 우리 눈앞에서 붕괴시키고 있다. 상호 이익 관계가 얽힌 지구 경제가 전쟁을 막는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은 망상으로 판명됐다. 지역적 침략전이 준(準)세계 전쟁으로 비화하고 제한 핵전쟁과 자포리자 원전 재앙까지 운위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생생한 증거다. 수퍼 태풍은 앞으로도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다. 세계사적 도전과 민생 문제는 국가 존망을 결정할 정치적 태풍이다. 우리는 폭풍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눈물로 폭풍에 대비해 생명과 나라를 살릴 순 있다. 제11호 태풍 힌남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입증한 징비의 현장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실사구시 리더십으로 국민 아픔을 덜어주었다. 이젠 대통령이 자신을 버리는 처절한 징비로써 ‘윤석열의 시간’을 증명할 때다. 국난을 함께 넘는 21세기 징비록의 길이 우릴 기다린다.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임진왜란 전란사 조선통신사 일행

2022-09-14

미국 리커스토어 이 정도는 돼야 지킨다 ㅠㅠ

 미국에서 자영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범죄와 사건사고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이 처절할 수도 있는데, 지난달 31일(일) LA 동부 지역인 노스코로나에서 새벽 시간에 업소에 처들어온 강도단을 혼자 샷건으로 막아낸 올해 80세 주인이 있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코로나 경찰국에 따르면 '놀코 마켓&리커'에 SUV를 타고 업소 앞에서 소총을 들고 리커스토어에 강도가 들어선 것은 새벽 2시 47분 쯤. CC카메라를 보고 있던 주인 크레이그(80)는 샷건을 들고 업소 입구에 자동 소총을 들고 들어선 강도에게 먼저 격발했다. 이에 깜짝 놀란 강도와 밖에서 대기하던 일행은 혼비백산해 그대로 달아났다.   이후 경찰은 해당 강도들을 추격 끝에 붙잡았으며 강도들의 이름과 20대 나이까지 언론에 공개했다.   강도를 물리친 주인 크레이그는 사건 직후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가 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현재는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놀코 커뮤니티와 크레이그의 주변 이웃들은 크레이그의 용맹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 해당 지역 내 강도 사건이 빈번했는데 경각심을 주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미국 강도단 강도단 일행 코로나 경찰국 차고 업소

2022-08-02

[독자 마당] 경로 우대

얼마 전 식당에서 경험한 일이다. 워낙 잘 알려진 식당인데가 마침 주말 저녁이어서 대기 손님이 많았다. 나도 줄을 서서 20여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앞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인이 와서는 줄의 맨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식당종업원에게 가자 종업원은 줄을 서야 한다고 정중히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힘들어서 그러니  먼저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종업원은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눈치만 보면서 당황해했다. 그런 사이 노인과 일행은 웨이트리스가 식사 뒷정리를 하고 있는 테이블에 앉아버렸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불편해 했을 것이다. 노인 일행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가 아니었고 더욱이 대기 줄에는 그들과 연배가 비슷한 노인들도 있었다.     경로 우대는 확실히 필요하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로 사상이 정착된 사회는 살기 좋고 아름다운 사회다. 그리고 연장자를 존중하는 마음은 젊은이들 마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날 줄을 섰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노인의 행동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을 봐서, 그 노인이 대기자들에게 양보를 먼저 구했으면 모두가 동의했을 것 같다.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노인 공경과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은 다르다.     나도 노인이어서 공공장소에서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양보를 받는다. 그때마다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마음들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이가 벼슬이 돼서 경로 우대를 강요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처럼 생각해서도 안 된다. 대접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할 때 대접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김학도·LA독자 마당 경로 우대 경로 우대 경로 사상 노인 일행

2022-06-16

메모리얼 데이 단상

 메모리얼 데이 단상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은 북한군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그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주에 있는 자택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이날 새벽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급거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이틀 후인 6월 27일 미국의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청했다. 미국은 유엔군 작전의 전권을 위임받아 극동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맥아더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6월25일 그는 워싱턴의 승인이 나기도 전에 워커 8군 사령관에게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탄약, 박격포, 소총 등을 실은 배를 즉시 한국으로 출발시키도록 지시했다. 워싱턴엔 7함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맥아더는 28일 새벽 6시 맥아더는 C-54 기(바탄 호)를 타고 폭우 속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 4시간 후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북한 전투기가 활주로에 있던 비행기를 공격한 직후였다. 맥아더는 수원의 한 학교 건물에서 이승만 대통령, 무초 대사와 함께 전황 보고를 들었다..맥아더와 부관 수행원 등 4명이 탄 지프는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 방어선에 이르는 동안 수없이 적의 공습을 받았다. 맥아더가 간신히 한강에 이르러 보니 한국군이 한강 다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맥아더는 영등포 쪽 강둑에 올라서서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북한군이 쏘는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영등포의 한 진지에서 맥아더는 한국군 일등병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나?”“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것이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감동받은 맥아더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 맥아더의 약속대로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은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는 그에게 연막탄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주었다. 수원으로 돌아온 맥아더 일행은 바탄 호에 타고 오후 6시15분 하네다를 향하여 출발했다. 출발 직후 비행장에 대한 북한 공군기의 공습이 있었다. 워싱턴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른 노장들이 수뇌부에 포진하고 있었다. 한국전 초기 대응의 주역인 트루먼, 애치슨, 브래들리, 맥아더가 6월25~30일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세계사적 영향을 끼치게 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였는가 뒤돌아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이런 신속 대응이 없었더라면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북한군이 부산항을 점령하였을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1950년 7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수도 대구에서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약자를 지켜주려고 이 땅에 와서 잔인한 침략자들을 상대로  해방과 자유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생명을 내걸고 싸우고 피 흘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은 매일 기도합니다. 한미군의 승리를 위하여, 날씨가 맑아져 미 공군 전투기가 적을 발견하고 파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하루  빨리 도착하여 공세로 전환,  강고한 적군의 진영을 돌파,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본인은 우리의 대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이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인명 피해도 컸다. 전쟁에 참전한 미군 등 유엔군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들은 그 전에 한 번도 가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와 그 국민을 위해 약 1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밴플리트 대장의 아들 짐도 여기에 포함된다.  6.25 남침 때 유엔군의 주력이던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짐은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굳이 자원하여 아버지가 싸우고 있는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사랑하는 어머니에게 , 눈물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위해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짐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4월 4일 아침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 지미 밴플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되었고,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지시했다.“지미 밴플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업은 무모하다.”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아들 잃은 아버지의 비통한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한국전쟁에서 미군 장군의 아들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경우는 이밖에도 많다. 마지막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 지구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차례나 부상을 당해 전역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2명이 전사했다.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관에는 19명의 미군들이 비 오는 날 판초 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조각상들이 서있다. 긴장되고 무거운 표정에서 이국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조각상 입구 바닥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와 그들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추모한다.”라고 음각돼 있다. 우리는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어찌 그뿐인가. 지금 우리는 자유의 나라 미국 땅에 와서 살고 있다. 인종차별이니 부당대우니 이런 저런 말도 많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지구상에 이만큼 관대하게 이민자들을 대우해주는 나라는 미국 외에 없다. 며칠 후면  메모리얼 데이다.           김지민 기자메모리얼 데이 초대 유엔군사령관 메모리얼 데이 맥아더 일행

2022-05-25

국가부도 위기로 내몰리는 러시아

 국가부도 위기로 내몰리는 러시아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인생무상.. 영원한 권력은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무소불위 독재자의 말로는 항상 비참하다. 24년간 루마니아를 철권통치 했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최후 역시 그랬다. 차우셰스쿠는 집권 초반에는 나름 개념 있는 공산 지도자라는 평을 받다가, 1971년 북한을 방문하고 난 뒤 달라졌다. 김일성의 우상화에 크게 감명을 받고 이를 벤치마킹하여 자신과 그의 아내 엘레나를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생가를 성지로 만들어 순례하게 하고 자신과 아내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했으며, 국민들을 동원해 대규모 행사를 열곤 했다. 곳곳에 도청기와 비밀경찰을 배치해 반정부 인사들을 학살했다.     1989년 12월 중순, 티미쇼아라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 차우셰스쿠는 해외 순방 중이었는데 급히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티미쇼아라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부쿠레슈티로 돌아온 빅토르 스탄쿨레스쿠 장군은 22일 아침 일과를 왼쪽다리에 깁스를 하면서 시작했다. 그의 왼쪽 다리는 멀쩡했지만, 그는 부상을 핑계로 앞으로 다가올 혼란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소박한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차우세스쿠 정권의 국방장관 바실리 밀레아는 시위군중에게 발포하라는 차우셰스쿠의 명령을 거부한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차우셰스쿠는 그가 외국과 내통한 반역자였고, 그 혐의가 드러나자,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차우세스쿠는 그의 아내, 엘레나의 추천을 받아 바실리의 후임으로 빅토르를 임명했다. 결국 빅토르는 깁스한 왼쪽 다리를 질질 끌고, 당 중앙위원회 빌딩에서 차우셰스쿠를 만났다. 그가 신임 국방장관으로 차우세스쿠 서기장 내외를 만났을 때, 차우셰스쿠의 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그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빅토르, 우리 아이들을 부탁해요."   한편 당 중앙위원회 밖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중은 해산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 앞 광장에서 독재자의 퇴임을 요구했다. 차우셰스쿠는 전국에 5인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은 계엄령을 무시했다. 그제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차우셰스쿠는 민중에게 포위당한 중앙위원회 빌딩을 탈출하기 위해 헬기를 호출했다. 바실리 마루탄 중령이 조종하는 헬기가 차우셰스쿠 일행을 탈출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도착했다. 헬기가 착륙하자, 차우셰스쿠 내외와 두 명의 경호원, 두 명의 고위관료가 서둘러 헬기에 올라탔다. 4인용 헬기에 무리하게 6명을 태웠으니 좌석이 비좁았다. 차우셰스쿠는 마루탄에게 지시했다. "당장 완전무장한 병력을 태운 헬기 두 대를 불러서 이 반역자들을 쓸어버리라!" 차우셰스쿠 일행은 우선 여름 별장이 있는 스나고프로 향했다. 그곳에서 엘레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옷가지와 보석을 챙겼다. 마루탄 중령은 4인승 헬기에 6명을 태우는 것은 무리라고 난색을 표했다. 결국 차우셰스쿠를 수행했던 관료 2명을 스나고프에 내려놓았다. 그들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생각도 들었겠지만, 이후 차우셰스쿠 일행이 겪은 불운을 생각하면 차라리 행운인지도 모른다. 스나고프를 출발한 뒤, 마루탄은 그의 상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혁명이 발생했다. 이제 귀관이 알아서 행동하라. 행운을 빈다." 바실리는 이 독재자 무리와 함께했다가 탈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이들을  떼어놓는가였다.  더구나 무장한  2명의 경호원이 있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기체를 상하좌우로 심하게 흔들었다. 기체가 요동치자 놀란 차우셰스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대공 사격을 받고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 차우셰스쿠는 겁에 질려 당장 착륙하라고 지시했다. 바실리는 차우셰스쿠 일행을 인근 언덕에 내려놓은 후 기지로 귀환했다.   부쿠레슈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신임 국방장관 빅토르는 독재자의 마지막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인들에게 막사로 귀대할 것을 명령했다. 군은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내 곳곳에서 끊어져가는 차우셰스쿠 정권의 숨통을 이어가려는 세큐리다트와 교전이 벌어졌다. 권력 공백도 빠른 속도로 메워졌다. 12월 24일 루마니아의 반정부 시인 미르치아 디네스쿠는 부쿠레슈티의 스튜디오 4 TV중계국에서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군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독재자는 도주했다. 신은 그 자비로운 얼굴로 다시 루마니아에 비추고 있다. 우리는 승리했다!." 차우셰스쿠 일행은 루마니아 남부의 티투로 가기 위해 일반 차량을 정지시켜 올라탔다. 처음 차량 운전사는 엔진이 고장났다면서  중간에 차를 세우고 그 다음에 얻어 탄 차량으로 그를 티르고비스테 지역의 농업기술연구소로 데려갔다. 연구소 직원은 이들을 방으로 안내한 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신고했다. 곧 무장한 민병대와 경찰이 달려와 차우셰스쿠 부부를 체포했다. 민병대가 말했다. “이제 당신은 민중의 수중에 있소!" 차우셰스쿠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라고?" 이온 일리에스쿠는 구국전선 의장의 최초의 공식 업무로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특별재판을 시작한다는 명령에 서명했다. 군사재판의 판사와 검사,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처형을 집행할 부대가 헬기로 티르고비스테의 병영에 도착했다. 스탄쿨레스쿠는 처형을 집행할 64공수연대의 병사들을 막사 뒤쪽에 집합시켰다. "여기 누가 있는지 아나? 차우셰스쿠가 있다. 그는 이제 곧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만약 그가 사형을 선고받는다면 누가 집행하고 싶은가?" 병사들 중 8명이 지원했고, 스탄쿨레스쿠는 그중 3명을 선발했다. "자동소총으로 30발이다."   12월 25일 군사재판은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이 선고되자, 엘레나는 울부짖었다.  "우리 중에 반역자가 있었어! 이제 그게 누군지 알겠어..." 재판이 끝난 지 2시간 뒤 곧바로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이 집행되었다. 형장으로 끌려나온 차우셰스쿠는 처형자들을 노려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역사가 우리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그리고는 ‘인터네샤알레’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형자들은 차우셰스쿠를 벽 쪽으로 밀어 붙인 후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성탄절에 90발의 총탄을 맞고 처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총을 맞고 하늘로 향한 채 드러누운 그의 시체는 사진과 TV화면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이번 전쟁은 ‘푸틴의 전쟁’이다.. 지난 2월 21일 푸틴이 주재한 국가안보회의는 한편의 블랙코미디였다. 무대 배치부터 이색적이다. 원형기둥으로 둘러싸인 백색 공간 한쪽 편에 푸틴이 책상 앞에 앉아있다. 아득한 반대편에 고위관료들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고, 그들 앞쪽에 연단과 마이크를 설치했다. 푸틴은 관료를 한명씩 호명하여‘돈바스 지역 친러시아 국가 독립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고 지시했다. 마치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처럼..답은 정해져 있었다. 찬성.. 푸틴은 지루한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날카롭게  말을 끊고 들어간다. 해외정보책임자가 ‘지지할 겁니다’라고 어물어물 말하자 곧바로 ‘지지할 거라는 거야, 지지한다는 거야, 정확하게 얘기해’라고 질책한다. ‘지지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알았어 . 들어가 앉아.’라고 말한다. 결론은 ‘오늘 중 결정한다.’였다.     푸틴은 국제사회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전세계가 러시아 경제를 봉쇄하는 고사작전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을 ‘국제적 외톨이’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제재는 문화 스포츠 분야로도 번져 러시아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퇴출됐다. 푸틴의 정적인 전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자살행위이며 수도 키예프와 제2도시 하리코프를 점령하더라도 푸틴은 이길 수 없고 단지 그의 종말을 앞당길 뿐”이라고 전망했다. 푸틴은 진퇴양난이다.  전쟁의 전개방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푸틴이 장기전을 펼칠 수 없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이다. 러시아는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면서 국가부도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아직 가능성은 낮지만, 푸틴의 축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역사는 오만한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생생하게 웅변한다.       김지민 기자국가부도 러시아 차우셰스쿠 일행 차우셰스쿠 내외 이후 차우셰스쿠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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