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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의 저울] 법치의 의미와 그 역사적 발전

최근 대한민국은 헌정 사상 초유의 검사 출신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하여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깊은 자괴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탄핵 자체의 충격도 크지만, 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준수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은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들에게까지 큰 실망과 함께 깊은 우려를 안겨주었다.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대통령이었기에, 이번 사태는 많은 이들에게 ‘법을 아는’ 지도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번 ‘법치’의 의미와 그 굴곡진 역사적 발전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법치를 논할 때, ‘무법천지’를 운운하며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법치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이는 단순한 법 강요를 넘어선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법치는 오히려 통치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하고, 모든 개인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법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 사회에서는 지배자들이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고 이를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법치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법은 권력자도 지배하며, 통치자도 법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정착하게 됐다.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법은 여전히 왕이나 귀족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권력자는 법 위에 군림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법의 존재 자체가 아예 없는 사회보다는 진일보한 형태였음은 분명하다.   법치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13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다. 1215년 제정된 마그나 카르타는 왕의 전횡을 제한하고 왕 또한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명문화함으로써, 권력자에 대한 법적 구속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확립했다. 비록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왕의 권력 행사를 법으로 제한한다는 발상 자체가 전례가 없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17세기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는 자연권 이론과 사회계약설을 통해 정부의 존재 이유는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으며, 정부가 이를 위배할 경우 시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몽테스키외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1748년)’에서 권력은 권력에 의해 견제되어야 하며, 법에 의한 지배만이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구체화되었다.   20세기 이후, 파시즘과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와 독재 체제의 비극적인 역사를 반성하며 법치주의는 기본권 보장과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실질적 법치주의로 심화됐다. 법의 내용 자체가 정의롭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조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치를 국민이 국가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명령 체계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법치는 오히려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시민의 방어 기제이자 자유의 보루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민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할 때, 국가가 이를 부당하게 억압한다면 법치는 ‘국가도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통해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그 권력을 행사하되, 국민의 편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헌법적 질서 안에서 행사해야 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이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국민에게 ‘법을 지켜라’ 혹은 ‘악법도 법이다’라며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질서가 아니라, 통치자의 자의적인 지배를 막기 위해 오랜 역사 속에서 시민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온 자유의 제도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통해 우리는 법치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새기고, 권력의 주체이든 일반 시민이든 모든 구성원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시민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법치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진정한 의미의 법치의 개념을 되새겨야 한다. 김한신 / 변호사니케의 저울 법치 의미 법치주의 발전 법치 개념 역사적 발전

2025-04-14

[우리말 바루기] ‘오지라퍼’ ‘오지랖’

미주알고주알 캐고 다니며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 염치없이 행동하고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켜 요즘 말로 ‘오지라퍼’라 한다. ‘오지랖’에 사람을 뜻하는 영어 접사 ‘er’을 붙여 만든 신조어다. TV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오지라퍼’라는 코너가 생기면서 이 말이 더욱 널리 퍼졌다.   신세대들에게 ‘오지라퍼’라고 하면 대부분 그 의미를 이해한다. 하지만 ‘오지랖’이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물어보면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 ‘오지랖’을 ‘오지랍’으로 적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오지랖’은 원래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뜻한다. “엄마는 오지랖을 걷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오지랖을 여미었다” 등처럼 쓰였다.   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그만큼 다른 옷을 덮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을 다 감쌀 듯이 참견하고 다니는 것을 빗대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하게 됐다. 이후 “오지랖이 넓다”는 주제넘게 간섭하는 사람을 비꼬듯이 이야기하는 관용구로 자리를 잡아 갔다.   “오지랖이 넓다”가 관용적 표현으로 널리 쓰이지만 ‘오지랖’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지랖’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요즘은 “오지랖이 넓다”에서 ‘넓다’는 표현을 떼어내고 “네가 뭔데 내 일에 오지랖이야!” “오지랖도 참…” 등과 같이 ‘오지랖’ 한 단어만으로 ‘지나친 참견’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관용구의 영향력이 강해져 원뜻이 소멸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우리말 바루기 오지랖 오지 관용적 표현 코미디 프로그램 본래 의미

2025-03-19

[우리말 바루기] ‘있음’인가 ‘있슴’인가?

독자에게서 e메일을 받았다. ‘있습니다’ ‘없습니다’를 명사형으로 쓸 때는 ‘있슴’과 ‘없슴’으로 표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우선 ‘~읍니다’ ‘~습니다’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은 ‘~습니다’로 쓰는 게 당연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과거의 글들을 보면 ‘~읍니다’로 적혀 있는 것이 있다. 나이 드신 분 가운데는 아직도 ‘~읍니다’를 사용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읍니다’와 ‘~습니다’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8년 표준어 규정이 바뀌었다. 모음 뒤에서는 ‘~ㅂ니다’, 자음 뒤에서는 ‘~습니다’를 쓰도록 개정됐다. ‘기쁩니다’ ‘학생입니다’는 모음 뒤에 ‘~ㅂ니다’가 붙은 경우다. ‘먹습니다’ ‘좋습니다’는 자음 뒤에 ‘~습니다’가 붙은 예다.   표준어 규정은 비슷한 발음의 몇 형태가 쓰일 경우 그 의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중 하나가 더 널리 쓰이면 하나의 형태만을 표준어로 삼도록 정하고 있다. 당시 ‘~읍니다’와 ‘~습니다’의 의미 차이가 명확하지 않고 입말에서는 일반적으로 ‘~습니다’가 더 널리 쓰인다는 판단 아래 ‘~습니다’를 표준어로 삼았다.   이제 ‘~습니다’가 자연스럽게 사용되다 보니 명사형으로 만들 때에도 ‘~ㅁ’을 붙여 ‘있슴’ ‘없슴’과 같이 ‘~슴’으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명사를 만드는 어미 ‘~ㅁ’은 항상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ㅁ’은 모음 또는 ㄹ 받침으로 끝나는 말 뒤에 붙어 그 단어가 명사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 준다. ‘끌리다’가 ‘끌림’, ‘만들다’가 ‘만듦’이 되는 것이 이런 예다.   하지만 자음으로 끝나는 말 뒤에 붙을 때에는 소리를 고르기 위해 매개 모음 ‘-으-’를 넣어 ‘-음’으로 쓴다. 따라서 ‘있다’는 ‘있음’, ‘없다’는 ‘없음’으로 적어야 한다.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서술어는 ‘~습니다’, 명사형은 ‘~음’이라고 기억하면 큰 문제가 없다.우리말 바루기 표준어 규정 의미 차이 명사 역할

2025-02-04

뉴욕한인회 3·1절 글짓기대회

뉴욕한인회가 주관하고 유패밀리재단이 주최하는 3·1절 기념 글짓기 대회가 개최된다.     뉴욕한인회 측은 “3·1절의 역사적 배경과 그 교훈을 깊이 생각하고, 3·1절의 정신과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글짓기 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대회는 초등부(2~6학년)와 중·고등부(7~12학년)로 나눠서 진행되며, 참가자들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2장 이내의 에세이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초등부의 주제는 ‘3·1절의 교훈이 현재에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이며, 중·고등부 주제는 세 가지(▶자신의 권리를 지키거나 타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용기를 냈던 경험을 3·1절의 교훈과 연결 지어 설명해보기 ▶자신의 권리뿐 아니라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3·1절의 의미를 통해 설명해보기 ▶3·1절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설명하고, 그 교훈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작성해보기)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에세이는 글자 크기 12포인트로 한국어는 바탕체, 영어는 Times New Roman 글꼴로 작성하면 된다.   참가 신청과 작품 제출은 오는 20일까지 뉴욕한인회 웹사이트(www.kaagny.org)에서 가능하며, 선착순 40명까지만 접수한다.     수상자는 오는 26일 뉴욕한인회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되며, 시상식은 3·1절 당일 개최된다.  윤지혜 기자 [email protected]뉴욕한인회 글짓기대회 뉴욕한인회 웹사이트 글짓기 대회 정신과 의미

2025-02-02

[삶의 향기] 용서의 의미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와 관련한 성경구절이다. 기독교에서 용서(Forgiveness)는 핵심적인 신앙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고, 신자들 또한 서로를 용서하도록 명령하신다는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다. 성경에서는 용서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다.   불교에도 자비와 같은 용서와 유사한 개념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접근방식과 관점이 다소 다르다. 용서는 ‘죄나 잘못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용서는 특정 행위가 벌이나 제재를 받아야 할 ‘나쁜 것’임을 전제로 한다. 반면 불교에서는 죄나 잘못을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죄나 잘못은 벌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가엽게 여기고 무지를 깨우치도록 인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기와 살해는 나쁜 행위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불교에서는 사람은 물론이고 죄나 잘못도 나쁜 마음이 아닌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애초부터 사람이든 일이든 용서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골목길에서 운전하다가 난데없이 홈리스(Homeless people)에게 심한 욕을 들은 적이 있다. 내 딴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분을 생각해서 천천히 간 것인데, 본인은 위협 혹은 조롱으로 느낀 듯 했다. 욕을 들었을 당시에는 불쾌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소음이 가시지 않는 도로변에서 잠을 자고, 적지 않은 수가 마약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다면 홈리스 상태에서 제정신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에 발길질을 하는 홈리스를 차주가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이와 비슷한 이유라 하겠다.   부처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대자대비’이다. 대자(大慈)는 말 그대로 자비심을 이르는 것이고, 대비(大悲)는 사리 분별 못하는 어린 자녀가 제 눈을 제 손으로 찌르고, 칼날을 잡아서 제 손을 상하게 하건마는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울고불고 하는 것을 보면 부모가 가엾은 생각이 나서 더욱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는 것 같이,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이 삼독심(욕심, 성냄, 어리석음)에 제 스스로 악도에 떨어질 일을 지어 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위를 원망하는 것을 보시면 크게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어 정성으로 제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홈리스는 물론 연쇄살인범에 대해서도 증오와 분노보다 연민과 제도의 마음을 내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유 없이 욕을 하고 공공기물을 훼손하는 홈리스나 연쇄살인범을 처벌하는 일은 진리적이지 않은 것인가? 사람이 범한 죄와 잘못에 대해 시비를 가리고 그 행위에 상응하는 벌을 주는 현대사회의 형법체계는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인가? 대종사께서는, “성자들은 주로는 도덕으로 자비 방편을 베풀지만, 때로는 도덕이나 법률로 중생을 제도하기도 한다.” 하셨다. 사회질서와 더 큰 죄업을 방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벌은 필요하다. 벌 역시 넓은 의미의 자비라 할 수 있다. 법률과 정치가 자비가 되기 위해서는 증오와 분노심이 아닌, 연민과 제도의 심경이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용서 의미 홈리스 상태 정치가 자비 불교 수행

2025-01-27

[우리말 바루기] ‘체신없는’ 행동은 없다

말이나 행동이 경솔해 위엄이나 신망이 없는 사람을 힐난할 때 “체신없게 행동하지 말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거나 지위·위치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체신머리없다”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잘못된 것으로, ‘채신없다’ ‘채신머리없다’고 표현해야 올바르다.   ‘채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을 의미하는 ‘처신’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이를 ‘몸 체(體)’와 ‘몸 신(身)’ 자로 이뤄진 ‘체신’으로 잘못 이해하고 쓰는 사람이 많다.   ‘체신(體身)’은 한자 뜻 그대로 ‘사람의 몸뚱이’를 의미하며, “체신이 작은 그는 평소에도 공깃밥 한 그릇을 채 비우지 못했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체신없다’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의미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채신’은 주로 ‘채신없다’ ‘채신머리없다’ 등처럼 쓰여 부정적 의미를 나타낸다. “다 큰 어른이 채신사납게 아이의 과자를 빼앗아 먹다니!”처럼 쓰이는 ‘채신사납다, 채신머리사납다’라는 표현도 있다. 이는 몸가짐을 잘못해 꼴이 몹시 언짢다는 말로, 역시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를 ‘체신사납다’ ‘체신머리사납다’라고 쓰는 경우도 꽤 있으나 이 또한 ‘채신’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체신’이라고 쓰면 안 된다.   이제 해가 바뀌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올 한 해 나이와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해 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년에는 ‘채신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되길 소망해 본다.우리말 바루기 체신 행동 부정적 의미

2024-12-30

[우리말 바루기] 느리다, 늘이다, 늘리다

‘길이’는 한끝에서 다른 한끝까지의 거리다. 그렇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낮과 밤의 길이’에서처럼 ‘시간’을 나타낼 때도 있고, ‘글의 길이’에서처럼 ‘분량’을 가리킬 때도 있다. ‘강폭’은 “강을 가로질러 잰 길이”인데, 이때 ‘길이’는 ‘면적’도 아우른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길이’는 더 섬세하게 의미가 갈라진다.   ‘느리다’ ‘늘이다’ ‘늘리다’는 이런 ‘길이’와 연관돼 있다. 길이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뜻이 구분된다. ‘느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동작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다. 단순히 시간의 길이가 길다는 걸 뜻한다. ‘늘이다’ ‘늘리다’와 명백하고 뚜렷하게 차이가 나서 이 말들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렇지만 ‘늘이다’와 ‘늘리다’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경계가 선명해 보이지만, 이 기준을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사전은 표면적인 ‘길이’와 관련된 상황에선 무조건 ‘늘이다’를 쓰라고 안내한다. 그래서 “바지 길이를 늘이다”가 된다 ‘늘리다’는 ‘넓이’ ‘부피’ ‘분량’ 등과 관계될 때만 쓰라고 한다. ‘늘리다’는 ‘길이’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규모를 늘리다” “학생 수를 늘리다” 같은 때만 ‘늘리다’가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앞에서 밝혔듯이 ‘길이’는 단순하지 않다. ‘길이’는 면적이나 분량 같은 것들도 수반한다. ‘늘리다’도 ‘길이’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바지 길이를 늘이다”는 면적이 늘어나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바지 길이를 늘리다”가 더 적절하다. ‘훈민정음 국어사전’도 그렇다고 설명한다.우리말 바루기 바지 길이 훈민정음 국어사전 사전적 의미

2024-12-18

[디지털 세상 읽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가 그럴듯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림을 그리고, 동영상까지 만드는 세상에서 시를 쓰는 AI가 있다는 건 전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카카오브레인에서 이미 2022년에 시를 쓰는 인공지능 시아(SIA)를 선보였다. 하지만 독자들이 과연 AI가 만들어 낸 시를 좋아하느냐는 다른 얘기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이 쓴 시를 선호한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까?   피츠버그 대학교 연구진은 초서, 셰익스피어, 휘트먼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인 10명이 쓴 시와 그 시인들 문체를 학습한 AI가 쓴 시를 일반인에게 보여주고 인간의 작품인지, AI의 작품인지 구분하게 했다. 놀랍게도 실험 참가자들은 AI가 쓴 시를 인간이 쓴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AI의 작품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만약 참가자들이 ‘시는 인간이 더 잘 쓴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면 인간이 썼다고 생각한 시에 더 높은 점수를 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호한, AI가 쓴 시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연구자들은 AI의 시는 좀 더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쉬웠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시를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오하고 복잡한 의미를 가진 시를 그저 AI가 만들어 낸 할루시네이션(환각 정보)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AI가 쓴 시는 심상과 감정, 주제를 모호함 없이 직설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이 가진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데 별 관심이 없는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과거 십대 청소년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던 몇몇 시인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원한 건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는 시였지, 교과서에 실린 위대한 문학작품이 아니었다. 박상현 / 오터레터 발행인디지털 세상 읽기 실험 참가자들 다층적인 의미 시인들 문체

2024-12-09

[우리말 바루기] ‘징크스’

시험을 보러 가면서 “나는 이 샤프로 문제를 풀어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징크스가 있어” “나는 시험 보러 갈 때 꼭 이 옷을 입어야 문제가 잘 풀리는 징크스가 있어” 등과 같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중요한 시험이나 경기를 앞두고 자신만의 습관이나 규칙 등을 정해 이를 지켜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이럴 때 위 예문에서와 같이 ‘징크스’라는 단어를 쓰곤 하는데, ‘징크스’가 이 같은 상황에 잘 어울리는 단어인지는 생각하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징크스’를 찾아보면 ‘재수 없는 일. 또는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으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풀이돼 있다. ‘징크스’에는 이처럼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으나 사람들이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해 긍정적 의미로 잘못 쓰곤 한다.   다시 말해 ‘징크스’는 ‘악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부적이나 습관 등의 의미로는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시험 전날 미역국을 먹으면 꼭 시험을 망친다는 징크스가 있다” “그에게는 경기 전날 손톱을 깎으면 경기에 진다는 징크스가 있다” 등과 같이 부정적인 상황을 나타낼 때 ‘징크스’를 써야 한다.   모든 이가 ‘징크스’를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말 바루기 징크스 부정적 의미 시험 전날 긍정적 의미

2024-12-05

[우리말 바루기] 두 모습의 ‘밖에’

모습은 같은데 쓰임이 다른 말들이 있다. 앞말과 띄기도 하고 앞말에 붙이기도 하는 ‘밖에’가 대표적이다.   “아침마다 대문 밖에 놓여 있던 병우유의 추억”에선 ‘밖에’를 앞말과 띄어야 한다. 이때 ‘밖’의 품사는 명사다. 안의 반대인 바깥, 일정한 한도나 어떤 정해진 범위를 넘어선 쪽을 의미한다. 여기에 장소를 나타내는 조사 ‘에’가 결합한 형태다. 조사는 체언 뒤에 붙고 명사는 앞말과 띄어야 하므로 ‘대문밖에’ ‘관심밖에’처럼 붙일 수 없다. 명사 ‘밖’은 ‘에’ 말고도 ‘이, 은, 의, 을, 으로, 에서’ 등 여러 조사와 어울린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향수”에선 ‘밖에’를 앞말에 붙여야 한다. 이때의 ‘밖에’는 보조사다. ‘그것 말고는, 그것 이외엔, 기꺼이 받아들이는, 피할 수 없는’의 뜻으로 사용된다. ‘밖에’ 자체가 조사이므로 ‘하나 밖에’ ‘2장 밖에’처럼 띄어 쓸 수 없다.     ‘밖에’의 쓰임새를 어떻게 구분할까? 먼저 의미를 따져 봐야 한다. ‘밖에’가 명사 뒤에서 ‘오로지, 뿐, 그것 말고는’의 뜻으로 사용되면 조사다. “일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뒤에 ‘없다, 모르다, 못하다’ 같은 부정을 나타내는 말이 온다는 점도 알아 두면 유용하다. “일밖에 아는 사람”처럼 긍정적 의미를 지닌 말과는 못 어울린다. ‘밖’이 명사일 때는 긍정적 서술어든 부정적 서술어든 관계없이 결합하는 점과 다르다.우리말 바루기 긍정적 의미 반대인 바깥

2024-12-01

[사설] 가주 '최저 임금 인상안' 부결 의미

가주의 ‘최저 임금 인상안’ 부결 의미 11월5일 가주 선거에 상정됐던 ‘주민발의안 32’가 부결됐다. 기존 시간당 16달러인 최저임금을 18달러로 올리자는 내용이다. 투표 결과는 박빙이었다. 반대가 50.8%, 찬성이 49.2%로 집계됐다.     가주에서 최저 임금 인상안이 좌절된 것은 이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나왔던 인상안들은 대부분 큰 저항 없이 시행됐다. 이로 인해 가주의 최저 임금은 2010년 이후 두 배로 올랐다. 시간당 16달러인 현 최저 임금은 전국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은 20달러, 의료계 종사자는 23달러로 최저 임금 기준이 훨씬 높다. 15년째 7.25달러인 연방 최저임금과는 이미 상당히 격차가 크다.     이번 부결 결과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먼저 가주 유권자의 보수화 경향이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33과 36도 관심을 모았다. 주민발의안 33은 렌트 컨트롤의 확대, 36은 경범죄자 처벌 강화 등이 골자였다. 결과는 33은 압도적 표 차의 부결, 36은 압도적 표 차의 통과됐다. 모두 보수 진영에서 원하던 결과다. 특히 33의 통과는 최저임금 인상안이 부결된 것만큼이나 예상 밖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가주의 진보 일변도 정책의 부작용이 커지자 유권자들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습 효과’다. 최저 임금이 15년간 배로 올랐지만 생활의 질은 별로 나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저 임금이 인상되면 주거비와 물가도 함께 오르는 패턴이 반복됐다. 결국 명목 소득은 늘었지만 실질 소득은 제자리걸음인 결과로 이어졌다. 최저 임금 인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 증가라는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일자리 감소로 인한 고용 불안도 상황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인건비 증가 부담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안의 부결은 유권자들이 이런 악순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 것이다.사설 임금 인상 최저임금 인상안 부결 의미 저임금 근로자

2024-11-20

[추수감사절 유래와 의미] 한 해에 감사하며 가족의 소중함 되새겨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미국인이 가장 중요시하는 명절이 돌아왔다. 도시던 시골이든 추수감사절은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거대한 미국 땅에 흩어진 가족들도 이날만큼은 장거리 비행을 마다치 않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칠면조, 으깬 감자, 고구마, 호박파이, 옥수수’ 등 추수감사절 전통음식을 나누며 삶의 의미와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미국에 사는 이들이 추수감사절을 진심으로 대하는 이유는 뭘까. 연방 국무부는 웹사이트를 통해 ‘추수감사절은 온 가족이 한 해 동안 받은 수확 등 결과물에 감사하며, 나이 든 연장자와 이웃을 대접하는 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꼭 기려야 하는 사연이 담긴 날이라는 의미다.   추수감사절의 역사와 이야기가 곧 ‘미국의 건국정신’ 자체를 상징한다. 추수 감사절에는 박해와 폭력을 피해 자유의 항해를 나섰던 ‘순례자의 시조들(Pilgrim Fathers)’의 고난과 개척정신, 낯선 이방인을 가족처럼 반겨준 ‘원주민(Native American)’의 환대가 담겨 있다.       ▶원주민, 굶주린 이민자를 품다   1600년 전후 시작된 미국 역사는 ‘영국 이민자 중심으로 미 동부에 정착해 13개 식민지를 건설, 원주민을 내쫓고 영토를 서부까지 확장했다’로 요약되곤 한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은 당시 영국 등 유럽발 이민자가 겪은 혹독한 정착기와 낯선 이민자를 대한 원주민의 포용 정신이 깃들어 있다. 서로 다른 두 문명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초기에는 적대와 대결 대신 ‘포용과 통합’을 추구한 셈이다.     특히 당시 원주민이 굶어 죽어가던 영국발 이민자에게 생존의 방법을 알려준 역사적 사실은 추수감사절이 지닌 의미와 상징을 한층 깊게 한다.   연방의회 도서관과 국무부에 따르면 가장 잘 알려진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 열렸다. 1620년 9월 16일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출항한 메이플라워호에는 청교도로 알려진 순례자의 시조 102명이 승선했다. 이들은 당초 목표로 한 미국 허드슨강 하구 버지니아주가 아닌 북쪽으로 600마일 떨어진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11월 21일 닻을 내렸다. 종교적 박해와 폭력을 피해 자유를 찾고자 이민 길에 오른 이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 ‘메이플라워 서약’을 작성, 자치·민주·평등의 원칙에 기반해 독립된 식민정부를 세우자고 약속했다. 1607년 4월 26일 버지니아주에 당시 국왕 이름을 딴 정착촌 제임스타운이 건설됐지만, 이민자가 자체 규약을 맺고 공동체를 이뤄 새로운 세상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미국 이민 선조로 꼽힌다.     하지만 신대륙에 도착한 순례자의 시조들은 낯선 땅에서 정착하는 데 어려움에 부닥쳤다. 겨울을 나면서 46명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국부무 웹사이트는 “이들에게 첫 겨울은 힘들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었고, 식량도 부족해 절반이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당시 역사를 전한다.     이들의 생명을 구한 은인은 현지 ‘이로쿼이(Iroquois), 왐파노그아(Wampanoag)’ 원주민이었다. 이듬해 봄 원주민들은 물고기 뱃속에 씨앗을 넣어 옥수수를 재배하는 법을 알려줬다. 또한 이민자들이 낯선 땅에 적응해 재배할 수 있는 여러 작물, 사냥법, 낚시법도 선입견 없이 공유했다.     국무부 웹사이트는 “1621년 가을 이주민들은 옥수수, 보리, 콩, 호박 등 풍성한 작물을 수확했다. 이주민들은 첫 수확물 등 감사할 일이 많아 잔치를 계획했고, 원주민 추장 등 90명의 원주민을 초청했다. 원주민은 칠면조, 사슴을 구웠고 이주민은 원주민에게 크랜베리, 호박 요리법을 배웠다”며 가장 널리 알려진 추수감사절의 시작을 설명한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은 수확기 사흘 동안 먹고 마시던 원주민 전통과 이주민의 미국 개척사가 모두 담겨 있다. 원주민은 전통에 따라 낯선 이민자를 호의로 환대했다. 하지만 늘어난 이주민들은 원주민을 배척하고 정복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아이러니한 미국 역사는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추수감사절을 통해 미국의 참된 아메리칸 드림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민자의 후손들이 새로운 이민자를 배척하는 모습은 지양해야 한다. 순교자의 시조들과 원주민들이 서로를 보듬고 함께 감사할 줄 알았던 지혜가 미국의 건국정신이다.       ▶추수감사절은 연방 국경일   추수감사절은 연방 국경일이다. 연방 의회와 정부가 11월 네 번째 목요일에 기념한다고 수정했다.     추수감사절을 연방 공휴일로 처음 선포한 이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다. 워싱턴 대통령은 1789년 11월 26일을 ‘국민 추수감사의 날(Day of Publick Thanksgivin)’로 선포했다. 앞서 연방 의회는 1789년 9월 28일 추수감사절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마지막 목요일을 지정하면서 날짜도 고정됐다. 하지만 11월에 네 번째 목요일, 다섯 번째 목요일이 있는 해는 혼선을 빚었다.     결국 1941년 연방 의회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며 공휴일 날짜를 못 박았다.         ▶원주민의 상처도 치유해야   순교자의 시조들 등 건국 초기 유럽발 이민자에게 원주민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이주민은 경작지를 넓힌다며 원주민을 총으로 학살했고, 원주민 수백만 명은 이주민이 옮겨 온 감염병 세균에 면역력이 없어 몰살됐다.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서명한 ‘원주민 강제이주법(Indian Removal Act)’은 폭력의 역사다. 정부 차원에서 당시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던 원주민을 강 서쪽의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원주민은 1970년부터 추수감사절을 ‘국가 애도의 날’로 삼고 있다. 매사추세츠주 왐파노아그 부족을 중심으로 유럽인의 원주민 학살, 노예화 등 참상을 잊지 말자는 취지의 연례행사다.     원주민들은 1975년부터 추수감사절에 반추수감사절(Unthanksgiving Day) 행사를 열어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2005년에는 원주민 강경파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1969년 11월부터 19개월간 점거농성을 벌였던 샌프란시스코 앨커트래즈섬을 찾아 기념식을 치르며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아니라 추수강탈절(Thankstaking Day)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 원주민에게 추수감사절이 기쁘지만은 않다. 유럽계 이주민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미국 역사의 주인공을 편향되게 서술해서도 안 된다는 문제 제기다. 미국에 뿌리내린 이민자와 자손이라면 진지하게 공유해야 할 안목이기도 하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추수특집 추수감사절 의미 추수감사절 전통음식 원주민과 감사 건설 원주민

2024-11-17

[우리말 바루기] ‘운명’을 달리하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엄숙하다.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교계에선 승려가 죽었을 때 ‘입적(入寂)’이라 한다. ‘고요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 ‘번뇌나 고뇌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란 표현을 쓴다. 가톨릭에선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란 의미로 ‘선종(善終)’이라 한다. 천도교에선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환원(還元)’이라 부른다.     언론 매체의 부음 기사에서는 ‘사망’ 외에 ‘별세(別世)’ ‘타계(他界)’ ‘서거(逝去)’ 같은 말들이 흔히 보인다. 이 가운데 ‘사망’을 빼면 다 죽음을 높인다. ‘별세’의 사전적 의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다. ‘타계’는 “인간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서거’는 “죽어서 세상을 떠남”이란 말이지만, 대통령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만 쓴다. 언론 매체는 마음대로 이 말들에 서열을 정해 놓았다. 사망, 별세, 타계, 서거 순으로 높아진다.   일상에서는‘숨지다’ ‘돌아가시다’ ‘작고(作故)하다(고인이 되다)’ ‘영면(永眠)하다(영원히 잠든다)’라고 한다. ‘운명(殞命)하다’도 ‘목숨이 끊어지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운명을 달리하다’는 어색하다. ‘달리하다’는 ‘유명(幽明)’과 어울린다. ‘유명’은 저승과 이승을 가리킨다.우리말 바루기 운명 사망 별세 언론 매체 사전적 의미

2024-11-07

[중앙칼럼] 내가 던지는 한표의 의미

우리는 어떤 이유로 정치인에게 주머니를 열고 어떤 근거로 표를 줄까.     다음 주 민심의 심판을 앞둔 많은 후보의 재정보고를 보면 법적으로 허용된 최고액을 기부한 사람들도 있지만 20~30달러의 소액 기부자도 많다. 아니면 지지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거나 집 앞에 선거 홍보용 팻말을 설치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것을 알면서도, 그의 당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게 흥미롭다. 왜 그럴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믿음과 신뢰를 갖고 군소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그들의 기부나 활동, 그리고 한표의 행사가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것이다. 표를 많이 받아 당선되는 것도 정치지만 숫자는 적어도 의미 있는 표를 받는 후보도 분명히 던지는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11월5일 선거에서 LA 한인타운이 포함된 가주하원 54지구에 출마한 존 이 후보의 후원금 모금 상황은 형편없다. 상대 후보가 100만 달러 가까이 모금하며 세를 과시하는 동안 이 후보가 모은 돈은 그와 같은 또래 직장인의 1년 치 연봉 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후원자 가운데는 20달러 기부자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이 후보는 예선에서 돌풍에 가까운 표를 얻었다. 같은 당 소속의 경쟁자를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경쟁 후보가 1만9600여 표를 얻을 때 그는 1만4900여 표를 얻었다. 미시간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비영리단체 직원으로 일하던 신출내기 정치인이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경쟁 후보는 이 후보가 한인이라는 사실을 감안, 발 빠르게 한인 인사들의 지지 확보에 나섰다. 선거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다. 하지만 이 후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공법을 택했다. 그는 유세 막바지인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유권자를 만나고 있다. 그와 잠깐 만날 때면 항상 땀방울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전화 통화를 하면 길거리 소음이 들려왔다.      한인이라고 무조건 한인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억지일 수 있다.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소위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제시한 정책과 정치적 소신에 공감한다면 ‘낙선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그를 후원하고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유권자들은 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 미국 선거판에서 보석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한인 정치력 신장을 표방하는 단체에 이 후보 지원 여부를 물었더니 ‘될 사람에게 얼굴도장을 찍는 것이 낫지 않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식의 접근이라면 한인 사회는 항상 얼굴도장만 찍고 돈만 주는 ATM을 자처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후보에 대한 한인들의 지지는 어떻게든 한인 정치인이 가주 의회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열망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모인 에너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당선이 안 되면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커뮤니티 밖에서는 강력한 결집력과 구심점으로 여기며 주시한다. 앞으로도 선거는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같은 목적으로 모이는 한인표는 한인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된다.     선거 때면 한인 유권자들은 또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이다. 뭔가 용기 있게 바꿔보려는 사람들이 새크라멘토와 워싱턴 DC에 더 필요한 것 아닐까.     세상에 ‘사표(死票)’는 없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지 후보의 당락만큼이나 한인 사회 일원으로 내가 던진 한 표의 의미도 되새겨보면 좋겠다.     최인성 / 사회부 부국장중앙칼럼 한표의 의미 한인 정치력 지지 후보 한인 사회

2024-10-31

[우리말 바루기] ‘회자(膾炙)’의 뜻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걸 이를 때 자주 쓰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회자되다’라는 낱말이다.     ‘회자되다’는 언론 매체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보도할 때도 “그의 악행은 여전히 많은 이에게 회자되고 있다” 등처럼 종종 등장한다. 앞 문장에 잘못된 표현이 숨어 있다고 하면 많은 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듯하다.   ‘회자되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면 안 되는 단어다. ‘회자되다’를 이렇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회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자(膾炙)’는 ‘회 회(膾)’ 자와 ‘구울 자(炙)’ 자로 이뤄진 낱말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음식인 ‘회’와 ‘구운 고기’를 뜻한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맛있는 음식처럼 칭찬받을 일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뜻으로 ‘회자되다’의 의미가 변화해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노래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 사이에 널리 회자되는 명곡이다”와 같이 긍정적 의미를 담은 표현으로는 ‘회자되다’를 쓸 수 있지만, “그의 악행은 여전히 많은 이에게 회자되고 있다” 등처럼 부정적 의미를 담은 표현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   부정적 의미를 나타낼 때는 ‘회자’ 대신 ‘구설’을 쓰면 된다. ‘구설’은 시비하거나 헐뜯는 말로, 긍정적 의미에는 쓸 수 없다. 우리말 바루기 회자 부정적 의미 긍정적 의미 언론 매체

2024-10-23

[사설] 가주의 ‘레거시 입학’ 금지 의미

가주 대학들의 ‘레거시 입학(Legacy Admission)’ 제도가 전면 금지된다. ‘레거시 입학’은 동문이나 주요 기부자의 자녀 등에게 입학 특혜를 주는 제도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레거시 입학’을 금지하는 법안(AB 1780)에 서명하며 “대학 교육의 문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주는 이미 1998년부터 주립대학의 ‘레거시 입학’을 금지한 바 있어 새 법은 주요 사립대학으로 이를 확대하는 의미가 있다.     ‘레거시 입학’은 아이비리그 등 이른바 명문 대학들이 주요 기금 확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제도다. 즉, 부모가 특정 대학에 많은 돈을 기부하면 자녀의 해당 대학 입학은 보장되는 셈이다. 이를 통해 부는 물론 학벌의 대물림 현상도 나타나게 된다. 연방 교육부 산하 교육통계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600개 가까운 대학에서 레거시 입학 사례가 있었다.      ‘레거시 입학’에 대해 비판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지난해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 이후다. 연방대법원이 형평성을 이유로 ‘어퍼머티브 액션’의 위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수계에 혜택을 주는 ‘어퍼머티브 액션’을 없앴으면, 부유층 백인이 주 수혜자인 ‘레거시 입학’도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탠퍼드와 USC의 지난해 레거시 입학생 비율이 14% 정도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국의 ‘레거시 입학생’은  적지 않은 숫자일 것이다.        특혜 폐지는 물론 대학 내 다양성 확대를 위해서도 ‘레거시 입학’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 레거시 입학 제도를 금지한 주는 가주 외에 콜로라도. 메릴랜드, 버지니아, 일리노이 주 등에 불과하다. 더 많은 주 정부와 대학들이 관심을 갖고 동참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최대 규모인 가주에서의 AB1780 시행은 의미가 크다. ‘어퍼머티브 액션’이 위헌이면   ‘레거시 입학’도 위헌이다.   사설 가주의 레거시 레거시 입학생 금지 의미 현재 레거시

2024-10-02

[사설] 학교 폭력 30년 만의 폭로 의미

토런스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인 여성이 30년 만에 학교 폭력 피해를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이 여성이 폭로한 내용은 한인 여고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녀는 본인과 친구 1명이 2년간 5명의 한인 선배 학생들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가해자들은 졸업파티를 한다며 이들을  4시간 넘게 감금하고 폭력을 휘두른 적도 있다고 한다. 더구나 가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신고할 경우 집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다. 조폭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이 여성은 아직도 당시의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가해자 중 한 명과 우연히 마주쳤고 조금의 미안한 기색도 없는 모습에 화가 나 폭로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5명 가운데 일부는 아직 토런스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한인 학생이 많은 학교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특히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한인 학생이 많은 학교가 심했다. 미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가 어울려 다니며 잘못된 한국식 선후배 문화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려 했던 것이다. 토런스 학교 폭력 가해자들도 90도 인사를 요구했다는 것을 보면 이런 부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피해자가 겪었을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정신적으로 버텨온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 정도다.   그녀는 최근 용기를 내 경찰 신고를 마쳤다고 한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어려움은 있겠지만 최선의 수사를 기대한다. 범죄자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지금이라도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은 한인 학부모들이 자녀를 살펴보는 계기도 되었으면 한다.  사설 학교 폭력 학교 폭력 토런스 학교 폭로 의미

2024-09-04

[우리말 바루기] 닻을 올리나, 돛을 올리나?

“희망의 닻을 올렸다” “재도약의 닻을 올렸다”처럼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닻을 올리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희망의 돛을 올렸다”와 같이 ‘닻’ 대신 ‘돛’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일까?   ‘닻’과 ‘돛’은 표기가 비슷해 헷갈리기 쉬운 단어다. ‘닻’은 배를 한 곳에 멈춰 있게 하는 기구다. 닻을 내리면 배가 멈춰 서고 반대로 닻을 올리면 배가 출발하게 된다. 그래서 ‘닻을 올린다’가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이게 됐다.   ‘돛’은 배 바닥에 세운 기둥에 매어 펴 올리고 내리고 할 수 있게 만든 넓은 천이다. 배가 출항하려면 일반적으로 접혀 있는 돛을 잡아 올려 편다. 그래야 바람을 받아 배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돛을 올린다’는 표현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돛은 출항할 때만 펴는 것이 아니라 운항 중에도 올렸다 내렸다 한다. 그래서 ‘돛을 올리다’가 ‘시작하다’는 의미의 관용구로 지정되진 않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닻을 올리다’만 관용구로 올려 놓고 있다.   따라서 “순풍에 돛을 올렸다”에서와 같이 돛을 올린다는 사실 자체를 언급할 때엔 ‘돛을 올리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희망의 닻을 올렸다”처럼 ‘어떤 일을 시작하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할 때엔 ‘닻을 올리다’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우리말 바루기 관용적 표현 표현 자체 비유적 의미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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