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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젊은 엄마의 초상

젊은 엄마를 기억한다. 나는 아마 다섯 살, 엄마는 스물다섯.  신작로, 늘 흙바람이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는 곳. 공주에서 올라오는 버스가 멀리서 콩알만 하게 나타났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관방 차부 앞. 다른 한 손에는 눈깔사탕 두 알.     새벽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채 실눈을 뜨니 엄마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안아주었다. 다른 날보다 더 꼭꼭. 차부에 가서 사탕을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혹해서 그런 일이 전에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엄마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우리 집 식구 모두 따라나섰다. 할아버지만 빼놓고. 할아버지는 엄마와 내가 싸리문을 나설 때도 안방 문을 빼꼼히 연 채 헛기침만 하셨다. 작은아버지 그리고 새색시 작은 엄마도 따라나섰다. 바로 아랫집에 사시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도 같이 나섰다.   우리 동네 삼바실에서 관방까지는 외길, 겨우 소달구지 하나가 다닐만한 좁은 길이었다. 아랫말 끝자락 동네 고사 지내는 모새독고리를 지나, 행상집, 서낭당, 애장터를 지나면 학교가 보이고 곧 관방. 어린애 걸음으로도 이십 분도 안 걸리는 길이었지만, 한 번도 혼자 와본 적은 없었다.     서낭당을 지나며 엄마가 돌을 하나 주워 이미 내 허리 높이의 돌무더기에 올려놓았다. 외할머니는 작은 소리로 “관세음보살”늘 부르셨다. 우리 식구는 원래 별말이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신작로 가에 옹기종기 서 있는 그들의 숨소리에 하얀 김이 서린다.  겨울이었던 듯. 멀리서 보이던 버스가 갑자기 다가온다. 스르륵 차가 멈춘다. 차 문이 열린다. 차부라는 말이 버스 정류장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엄마가 손을 놓는다. “엄마,” 내가 자지러지게 소리친다. 엄마는 차에 오르며 나를 살짝 민다. 뒤에서 이모가 나를 받아 안는다. 둘이서 오랫동안 연습을 한 듯.  차가 부르릉 떠나버린다.     나는 발버둥 치며 이모의 품을 벗어난다. “엄마아 ~~” 울며불며 차가 가버린 북쪽으로 뛰어간다. 버스는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버스 뒷바퀴에서 잔돌들이 튕겨 나왔다.   엄마는 일 년 후에 돌아오셨다. 시골에서 볼 수 없었던 멋진 세일러복 한 벌이 엄마의 선물이었다. 그 옷보다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은 것은 엄마의 사진 한장. 유리문이 달린 부엌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흑백 사진.  20대 어린 엄마의 얼굴은 그 사진 속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엄마의 서울살이는 식모살이였다. 아무도 내게 직접 말을 해주지 않았지만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 조각을 맞추어 보고 내가 철이 든 다음에 깨달았다. 그때 엄마가 벌어온 그 돈은 그 후 우리 집의 경제적 기반의 원천이 되었다.     거의 70년 전 일이었다. 90이 넘은 엄마의 기력과 기억이 소실점을 향해 빠르게 흘러간다. 평생을 외아들로 살아온 나에게 엄마는 “어제 네 형은 왔다 갔어”하고 말한다.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애장터에 뭍인 첫아들이 멀쩡하게 장성하여 살아있다고 착각하시는지.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엄마 초상 그때 엄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버스 뒷바퀴

2024-11-21

[살며 생각하며] 미국의 흑역사, 흑인 노예

쿤타 킨테! 1976년 출판된 알렉스 헤일리(1921~1992)의 소설, 뿌리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드라마 및 영화로도 나와 세계인들을 전율케 한 뿌리는 작가 자신의 외할아버지 쿤타 킨테가 1767년 서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납치되어 미국 땅에 노예로 끌려와 뿌려놓은 후손들의 삶을 역으로 더듬어 가는 한 일가의 고난사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것조차 언감생심 분에 넘친다고 보았던지 ‘메릴랜드 애나폴리스’ 부둣가에 설치한 쿤타 킨테 기념 명패를 설치 이틀 만에 탈취한 뒤 아직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니 미국에서 유색 갈등은 끝난 이야기가 아닌성싶다.   외할아버지 흑인 노예 무역의 시작은 9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제국이다. 그들은 아프리카 부족장들과 짬짜미하여 럼주, 의류, 총 같은 것들을 주고 대신 흑인들을 상품으로 받아 유럽 각국에 팔아 왕국재정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보셨던지 왕국 자체가 소리소문없이 망했고 대신 그 사업은 해양강국 포르투갈이이어받았다. 그러다 1640년 로마 교황청이 노예무역을 금하는 칙령을 선포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사업은 영국으로 넘어가 북미 신대륙에서 만개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영국은 1534년 헨리 8세가 교황청과 관계를 단절한 뒤 영국에서의 교권은 국왕에게 있다는 수장령을 제정하면서 명실상부 교황 칙령의 치외법권국이었다.     이제 영국의 노예상들은 왕실의 묵인하에 럼주 및 무기, 옷감 등을 실은 선박을 아프리카 해안에 정박, 사냥꾼들이 잡아 온 흑인들과 바꿔치기한 뒤 바하마, 쿠바 등 서인도제도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에 노예로 넘기면서 상품값으로 금은보화 같이 귀한 설탕, 당밀을 받아 영국의 럼주 생산업자들에게 파는 삼각무역을 통해 영국왕실의 재정을 배를 불리게 하였다.   노예무역이 신대륙에 안착한 계기는 1619년 8월 하순, 남미 쪽으로 항해하던 네덜란드 상선이 19명의 흑인 청년들을실은 채 부족한 식량을 구할 셈으로 버지니아 제임스 타운에 불시착하면서다. 1616년부터 1699년까지 영국식민지의 수도 역할을 했던 제임스 타운은 신대륙 개척의 중요 거점이었다. 광활한 대지를 갈아엎어 담배 및 면화농사를 짓던 농장주들에게 인력이 곧 돈이었다.     초창기 인디언이나 가난한 영국인들을 계약노동자로 활용해왔었는데 여러 이유로 채 2년을 못 버티고 죽어 나가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판국에 19명의 흑인이 계약 없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 채 굴러들어온 셈이었고 아! 흑인 노예라는 악한 영감이 그들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결국 1622년 버지니아주가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합법화하였고 향후 400년 동안 1250만~1500만명의 아프리카인이미국 땅에서 사고 팔리는 흑역사의 희생물이 된다.   성경에도 노예라는 말이 나온다. 전쟁 중 포로로 잡혔거나 이웃 간에 진 빚을 못 갚을 경우 자신 또는 자녀를 노예로 넘김을 허용하고 있다. 노예로의 삶이 억울한 죽음보다 낫다는 선하신 하나님의 배례에서다. 대신 기한을 최대 6년으로 하고 7년째는 몸값을 물지 않은 채 자유인이 된다고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흑인 노예는 전쟁 중 포로도 아니고 빚 대신 잡혀 온 담보물도 아닌데 6년은커녕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고통 속에 죽어감은 성경은 물론 천륜을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미국 흑역사 노예 무역 서아프리카 감비아 외할아버지 쿤타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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