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마당] 백수의 왕의 착각
나는 자주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본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동물들의 생존 방식은 경이롭고도 치열하다. 어떤 물고기는 스스로 낚시질을 한다. 이마에서 낚싯줄처럼 가느다란 돌기를 뻗어 그 끝에 작은 미끼를 달고 살랑살랑 흔든다. 이 미끼를 보고 작은 물고기들이 다가오면, 기다렸다는 듯 입을 활짝 벌려 단숨에 삼켜버린다. 악어는 숨어 있다가 목마른 동물들이 물가에 다가오는 순간, 번개처럼 튀어나와 한순간에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매복 사냥의 대가인 악어를 가장 잘 잡아먹는 동물은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가 아닌, 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표범이다. 표범은 악어가 일광욕을 하기 위해 물가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 살금살금 다가가 잽싸게 목덜미를 물어버린다. 사자는 비록 ‘백수의 왕’이라 불리지만,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면 더 이상 무리에서 먹이를 나눠 받지 못하고 결국 외톨이가 된다. 그렇게 늙은 사자는 더 이상 사냥할 수 없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물로 배를 채우기도 한다. 사자처럼 왕좌에 있던 존재도 결국 세월 앞에서는 힘을 잃고, 한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문득 거울을 보니 어느새 87세가 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배가 고프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잔뜩 있지만, 정작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젓가락을 들기 어려운 날들이 많아진다. 그럴 때 나는 물을 마신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다. 그 순간, 문득 착각에 빠진다. 혹시 나도 늙어버린 사자처럼, 한때는 기세등등했지만 이제는 물로 배를 채우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자연이 그러하듯, 삶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가 살아남는다. 늙어가는 것도 자연의 일부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지혜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물을 마시며, 사라져가는 것들과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서효원 / LA독자 마당 백수 착각 악어가 일광욕 생존 방식 매복 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