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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웅전] 떠날 때 아름다웠던 미셸 드브레 총리

쉴 만하면 선거철이 다가온다. 인생살이가 다 그렇겠지만, 사람은 떠나가는 뒷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끝까지 권력에 미련을 두고 기신거리는 것은 추루(醜陋)해 보이며, 지난날의 공적에 허물이 될 수 있다. 당선만 되면 5년 동안 아랍 왕자처럼 호강하고 평생 팔자 고치는 직업이니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터무니없는 인물이 정치권에 서성이는 모습은 보기에도 불편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샤를 드골(1890~1970)은 총리를 따로 두지 않고 겸직하다가 1959년에 미셸 드브레(1912~96·사진)를 첫 총리로 임명했다. 드브레는 부유한 유대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으며, 2차대전 말기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국회의원, 법무·재무·외무·국방장관을 지냈으니 총리직에 손색이 없었다.   드브레는 1959~62년 총리직을 마치자 더 이상 정치에 미련을 두지 않고 프랑스 중부의 왕실 마을 앙부아즈로 낙향했다. 거기서 시장으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앙부아즈는 면적이 350㎢고, 인구가 1만3000명이었으니 한국으로 치면 면장 정도이거나, 큰 아파트 관리소장 정도로 볼 수 있다. 정치학 이론에 따르면 고위 정치인이 현직에서 물러났을 때 건강·보람·공헌·여가를 즐기기에 가장 적절한 직업이 면장이라고 한다.   내 기억에 우리나라에서 어느 대법관이 향판(鄕判)으로 내려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떠난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95)가 50대였던 1986~88년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카운티에 있는 카멀바이더시 지역의 단체장을 역임했다. 인구 3200명의 태평양 연안의 휴양지다. 중국의 문화인류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의 말을 빌리면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쾌감’이다. 정치인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미셸 총리 고위 정치인 세계대전 이후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2025-03-10

[신영웅전] 한민족 혈통 율 브리너의 권고

1840년대 스위스인 상공업자 브리너(Brynner)가 30대 무렵에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이름을 율리(July)로 바꾸고 한민족과 동족인 부랴트족 처녀 나탈리아 쿠쿠토바와 결혼했다. 아들 보리스를 낳았다. 1880년 보리스는 부모와 헤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거기에서 거간꾼 일로 떼돈을 벌어 뮤지컬 배우 마루시아와 결혼했다.   그때는 ‘하이에나’들이 사방에서 조선에 몰려오던 때였다. 보리스는 조선 주재 러시아 외교관을 매수해 조선에 접근했다. 보리스는 조선삼림회사를 설립해 외부대신 이완용의 도움으로 압록강 일대 벌목권을 따냈다. 세금 없이 이익금의 4분의 1을 조선 정부에 바치는 조건이었다. 아관파천 시절이니 계약은 수월했다.   나무를 베어 엮어서 강물에 띄우면 물결 따라 평안북도 용암포까지 떠내려가니 누워서 돈만 세면 될 정도로 쉬웠다. 그런데 사업이 번창하다 보니 용암포를 아예 조차(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땅을 일정 기간 빌려 통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장원경 이용익을 매수해 1903년 용암포를 조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만한(滿韓) 침략을 노리던 일본이 용암포 조차 사건을 문제 삼자 없었던 일로 돌아갔다.   보리스가 떼돈을 벌자 러시아제국 황실 근위대가 벌채권을 가로챘다. 이때 보리스는 200만 루블을 받았다. 그 무렵 환율은 1달러가 1루블이었다. 1916년과 1920년에 딸 베라(Vera)와 아들 율리(Yuly)가 태어났다. 실직한 백만장자 보리스는 미모의 블라디보스토크 악극단 무용수와 바람이 났다.   오만 정이 떨어진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를 거쳐 뉴욕 브로드웨이에 정착했다. 그 뒤 아들은 이름을 율(Yul) 브리너로 바꾸고 1950년 영화 ‘왕과 나’에서 주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1985년에 숨지면서 그는 우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담배 끊으시오(Quit smoking).”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한민족 브리너 한민족 혈통 아들 보리스 백만장자 보리스

2025-02-24

[신영웅전] 한민족 혈통 율 브리너의 권고

1840년대 스위스인 상공업자 브리너(Brynner)가 30대 무렵에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이름을 율리(July)로 바꾸고 한민족과 동족인 부랴트족 처녀 나탈리아 쿠쿠토바와 결혼했다. 아들 보리스를 낳았다. 1880년 보리스는 부모와 헤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거기에서 거간꾼 일로 떼돈을 벌어 뮤지컬 배우 마루시아와 결혼했다.   그때는 ‘하이에나’들이 사방에서 조선에 몰려오던 때였다. 보리스는 조선 주재 러시아 외교관을 매수해 조선에 접근했다. 보리스는 조선삼림회사를 설립해 외부대신 이완용의 도움으로 압록강 일대 벌목권을 따냈다. 세금 없이 이익금의 4분의 1을 조선 정부에 바치는 조건이었다. 아관파천 시절이니 계약은 수월했다.   나무를 베어 엮어서 강물에 띄우면 물결 따라 평안북도 용암포까지 떠내려가니 누워서 돈만 세면 될 정도로 쉬웠다. 그런데 사업이 번창하다 보니 용암포를 아예 조차하는 것이 유리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장원경 이용익을 매수해 1903년 용암포를 조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만한(滿韓) 침략을 노리던 일본이 용암포 조차 사건을 문제 삼자 없었던 일로 돌아갔다.   보리스가 떼돈을 벌자 러시아제국 황실 근위대가 벌채권을 가로챘다. 이때 보리스는 200만 루블을 받았다. 그 무렵 환율은 1달러가 1루블이었다. 1916년과 1920년에 딸 베라(Vera)와 아들 율리(Yuly)가 태어났다. 실직한 백만장자 보리스는 미모의 블라디보스토크 악극단 무용수와 바람이 났다.   오만 정이 떨어진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를 거쳐 뉴욕 브로드웨이에 정착했다. 그 뒤 아들은 이름을 율(Yul) 브리너(사진)로 바꾸고 1950년 영화 ‘왕과 나’에서 주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1985년에 숨지면서 그는 우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담배 끊으시오(Quit smoking).”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한민족 브리너 한민족 혈통 아들 보리스 백만장자 보리스

2025-02-23

[신영웅전] 맬서스의 역설

인구학자 토머스 맬서스(1766~1834·사진)는 본디 성공회 신부였다. 부유한 가정의 7남매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성품이 고결한 사람’(묘비명)이었다. 케임브리지대 신학부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그는 구도자였지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혼을 위로해야 하는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발전이 하층 계급에 더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초기 산업사회에서 기계 문명이 식량을 증산하고 그것이 인구 증가로 이어질 때만 해도 자본주의는 축복일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의술도 발달하지 않고 피임에 대한 인식도 없던 당시로선 많은 자녀가 축복이 아니었다.   가난과 불결함에다 의료 혜택의 부족으로 열악했던 초기 자본주의가 영혼의 구제보다 현실적 삶의 구원에 더 마음 쓰게 만들었다. 당시 식량 증산은 산술급수적인 데 비해 출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아녀자 노동, 고한(苦汗) 노동, 영아 살해, 심각한 빈곤은 맬서스를 더 이상 신부로 묶어두지 않았다.   맬서스는 경제학을 공부해 『인구론』(1798)을 출판했다. 그가 보기에 폭증하는 인구 앞에 기껏 질병·굶주림·전쟁만이 인구를 감소시킬 수 있다면, 인구 증가는 재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구 감소를 위해 어떤 구체적 대책을 내놨는지 뚜렷한 논거를 찾을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맬서스의 역설에 함몰돼 있다. 인구 증가가 고민이 아니라 인구 감소가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안채 며느리 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고, 사랑채에서 손주들 책 읽는 소리가 들려야 하고, 담 넘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야 번족(繁族), 즉 일족이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이제 낭만일 뿐이다. 그나마 올해부터 출산율이 바닥을 찍고 증가한다니 국가의 축복인 듯 기쁘지만, 향후 30년이 걱정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맬서스 역설 인구 증가 인구학자 토머스 인구 감소

2025-02-10

[신영웅전] ‘역사 업자’의 시대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90)은 한무제 시대의 사관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사관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불운이 다가왔다.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인 이릉(李陵)이 흉노에 패전하고 그 죄를 문책당했다. 사마천은 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형을 받았다.   첫째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고, 둘째는 돈 50만 냥을 벌금으로 내는 것이고, 셋째는 남근을 자르는 부형(腐刑)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재산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형을 받았다.   사마천이 죽지 않은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역사를 집필하라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으려는 것이었으니 이 점에서 그는 위대한 역사가다. 물론 지난 2000년 동안 36명의 왕이 시역(弑逆)당하고, 52개 나라가 멸망한 역사를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기록하고 싶은 소명 의식이 있었다. 그의 역사 인식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충절인가, 결국 인간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가를 고뇌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수양서이자 경세서다.   지금 한국사회는 철 지난 ‘역사 전쟁의 시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역사의 정론(正論)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싸운다는 점이다. 이제 역사는 역사학자의 몫이 아니라 ‘역사 업자’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킨 무리는 사관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관은 ‘영혼의 노숙자(spiritual homeless)’로 세대교체가 끝났다.   선거철이 되면 관변 단체의 기관장 자리 하나 얻으려고 5·6공 시대부터 지금까지 기신거리고 있다. 그렇게 살다 끝내 한자리 얻는 것을 보면 그들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이미 역사학과 정치는 공생의 유대가 굳어졌다. 그것이 걱정스럽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역사 업자 역사 업자 역사 전쟁 역사 인식

2025-02-02

[신영웅전] 인간관계에 교훈 준 미자하와 위왕 고사

중국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신하가 있었다. 위나라 왕은 미자하의 재주를 아껴 남달리 대했다. 어느 날 미자하가 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다급한 마음에 왕명이라 속이고 왕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위나라 국법에 따르면 임금의 수레를 타는 무리는 다리를 자르게 돼 있었다. 미자하가 거짓말을 해서 왕의 수레를 탔다는 소문을 들은 위왕은 “어머니를 위해 중벌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효자”라고 칭찬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왕을 모시고 과수원에 나갔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따서 먹어보더니 유난히 달고 맛이 좋아 먹다 남은 반쪽을 왕에게 권했다. 미자하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였다. 그러나 위왕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자기 입맛을 잊고 나에게 먹였으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칭찬해줬다.   그러나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옛말처럼 위왕의 마음도 쉽게 변했다. 어느 날 미자하는 대수롭지 않은 죄를 지었다. 그런데 지난날에 미자하를 그토록 감싸주던 왕은 갑자기 “너는 일찍이 왕명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훔쳐 탄 일이 있으며,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일이 있다”고 꾸짖고 벌을 줬다.   위왕과 미자하 고사를 인용하면서 나는 위왕을 교활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뜻도 없고, 미자하를 가리켜 불운하다고 동정할 뜻도 없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처음에 미운 짓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착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처음에는 착한 일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배신하고 도망가는 일도 흔히 있다.   그러므로 사랑받을 때 겸손하고 삼가야 하며, 사랑할 때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미움을 주고받을 때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잘못된 미움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가.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신영웅전 인간관계 교훈 위나라 국법 자기 입맛

2024-12-18

[신영웅전] 구텐베르크의 인생 유전

1440년대 어느 날 프로이센 마인츠의 한 집에 귀족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있었다. 30대 청년 구텐베르크는 도박판에서 연신 돈을 잃고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온 그는 돈을 딸 궁리는 하지 않고 도박용 골패(骨牌)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도장처럼 만들면 글씨를 대량으로 박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나무에 알파벳을 새겨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서구 최초로 만든 목판활자다. 그러나 그는 자금이 없었다. 휴머리라는 이웃집 부자 금은 세공업자를 찾아갔다. 이 사람은 사업 두뇌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휴머리는 구텐베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무 활자가 마멸되자 그들은 세공 기술을 이용해 구리 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기 시작했다.   최초로 만든 성경책은 양피지에 36행에서 시작해 42행을 거쳐 46행을 찍은 것인데 이를 마자린 판이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휴머리의 배신이었다.   자금주가 배신하자 방법이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낙심해 있을 무렵 낫소의 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 시장으로 부임해 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구텐베르크를 찾았다. 아돌프 2세가 성서 제작과 판로까지 도와줘 구텐베르크는 영화를 누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 성경이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구텐베르크의 일생을 보노라면 한 인간의 성공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먼저이며, 세상살이에 한때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줄 곡예사의 보호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씁쓸할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화인 인쇄술이 도박판의 골패에서 연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기까지 기만·배신·좌절, 그리고 인정가화(人情佳話)가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낙심할 것 없다. 그대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 테니까.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구텐베르크 인생 청년 구텐베르크 인생 유전 나무 활자가

2024-01-07

[신영웅전] 구텐베르크의인생 유전

1440년대 어느 날 프로이센 마인츠의 한 집에 귀족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있었다. 30대 청년 구텐베르크는 도박판에서 연신 돈을 잃고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온 그는 돈을 딸 궁리는 하지 않고 도박용 골패(骨牌)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도장처럼 만들면 글씨를 대량으로 박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나무에 알파벳을 새겨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서구 최초로 만든 목판활자다. 그러나 그는 자금이 없었다. 휴머리라는 이웃집 부자 금은 세공업자를 찾아갔다. 이 사람은 사업 두뇌도 비상한 인물이었다. 휴머리는 구텐베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무 활자가 마멸되자 그들은 세공 기술을 이용해 구리 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기 시작했다.   최초로 만든 성경책은 양피지에 36행에서 시작해 42행을 거쳐 46행을 찍은 것인데 이를 마자린 판이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휴머리의 배신이었다.   자금주가 배신하자 방법이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낙심해 있을 무렵 낫소의 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 시장으로 부임해 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구텐베르크를 찾았다. 아돌프 2세가 성서 제작과 판로까지 도와줘 구텐베르크는 영화를 누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 성경이 지금 미국 의회도서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구텐베르크의 일생을 보노라면 한 인간의 성공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먼저이며, 세상살이에 한때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줄 곡예사의 보호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씁쓸할 것이다. 인류 최고의 문화인 인쇄술이 도박판의 골패에서 연유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기까지 기만·배신·좌절, 그리고 인정가화(人情佳話)가 두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낙심할 것 없다. 그대에게도 그런 행운이 올 테니까.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영웅전 구텐베르크의인생 유전 구텐베르크의인생 유전 청년 구텐베르크 나무 활자가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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