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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트렌드] 절대 권력과 절대 신앙

거리의 철학자로 알려진 에릭 호퍼(Eric Hoffer·1902~1983)는 미국의 철학자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깊이 있는 통찰력의 저술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책들을 읽다 보면, 그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주로 부두 노동자와 같은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독학으로 철학, 역사, 문학을 공부했다.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에릭 호퍼는 LA 지역에서도 일정 기간 활동한 이력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서부를 떠돌며 여러 도시를 전전했고,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는 LA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특히 LA 항만 지역에서 부두노동자로도 일한 경력이 있다. 호퍼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했으며, 이념이나 집단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태도를 비판했다.   에릭 호퍼는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이라는 저서를 통해 대중운동에 쉽게 휘말리는 인간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는 한 가지 공통점을 지적한다.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의 전체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등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호퍼가 경고한 ‘맹신자’의 모습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 없이 따르고, 자기 의지를 상실하며, 외부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태도이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가 신앙의 영역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성도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목회자의 말, 집단의 분위기, 전통적 습관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지으셨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다(마 16:15). 이는 각자의 신앙 고백을, 자기 판단과 책임 속에서 하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맹신이 아닌, 깊은 인식과 자발적 결단에서 나오는 믿음을 보여준다. 주체적인 신앙이란, 질문하고, 고민하고,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믿음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나 규범의 수용이 아니라, 인격적 만남이며 삶 전체를 통째로 맡기는 깊은 결단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여전히 신앙 안에서 불안하고 억눌리는 감정을 경험한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정해 준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난받더라도 질문한다.   오늘날 성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신앙, 성경을 스스로 읽지 않는 신앙, 공동체 속에서 편안함만 찾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믿는 바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고, 흔들리는 세상에서도 ‘나는 누구이고, 왜 이 길을 가는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푸드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권력 신앙 신앙 성경 신앙 공동체 신앙 고백

2025-04-07

[삶의 뜨락에서] 몸 몸 몸

지난 2월 한 달 동안 내가 맡은 환자가 4명이나 죽어 나갔다. 유난히도 추웠던 2월이었고 출근길은 날마다 전쟁이었다. 눈이 쌓였거나 얼음 빙판이거나 시베리아 바람이 볼을 후벼대는 검푸른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전사 같았다. 그 중 딱 한 번 온화한 날이 있어 오히려 안도와 불안에 떨면서 출근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2월은 회색이다’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2월은 회색의 기억이 있다.       중환자실에서만 33년째 근무를 해오고 있어 아마도 나만큼 죽어가는 환자를 많이 경험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장의사도 이미 죽어 경직된 시신을 다룰 뿐 나처럼 죽어가고 있는 환자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의 표정, 신체의 각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시시각각 살피며 지켜보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일단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면 진통제, 가래 줄이는 약과 진정제를 투여해서 환자를 편안한 상태로 유도한다. 환자가 편안해 보이면 지켜보는 가족도 편안해진다. 환자가 죽어갈 때 그들의 모습과 표정에도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이제 다 놓고 받아들이는 듯 잔잔한 미소를 띠고, 어떤 이는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억울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나면 그때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진다. 더 이상의 움직임이나 변화는 없다. 의사는 사망선고를 한다. 보통 2~3시간의 grieving time(슬퍼할 시간)을 준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장의사에게 연락하라고 알려주고 시신은 비닐백에 넣어 냉동 시체 보관실로 옮긴다. 이제 거주할 육신을 잃은 혼은 어디로 가나? 이때 개인의 종교나 믿음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간다고 믿고, 불교에서는 업보에 따른 윤회설을 믿는다. 평소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 세계로 갈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증명된 사실이 아니고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믿음으로써 내 마음에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조상숭배도 하나의 신앙으로 중국의 유교, 일본의 신도, 한국의 선교, 인도의 힌두교는 죽어서 영혼이 조상의 세계로 찾아간다고 믿는다.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장석주, 이 책은 내가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나는 이 문장을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읽은 책이 나의 우주다’라고 수정하고 싶다. 살면서 우리 내면에 축적된 경험의 깊이, 그 밑에 흐르는 무의식의 거울이 우리 몸을 통해 빛을 낸다. 한때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된 많은 서적을 구매해 읽었다. 그 결과 ‘잘 죽는 법’이라는 졸저를 출간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사람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적으로 분류해 차별해 왔었다. 다시 말하면 몸을 쓰는 사람과 머리를 쓰는 사람으로 분류해서 대인관계를 맺고 지내왔었다.     나는 이제 겨우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 살아갈 날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아질수록 삶 자체가 실존임을 실감한다. 삶을 체험하는 몸 자체가 실존이다. 탄생해서 죽을 때까지 육신을 입고 겪는 일만이 삶이고 실존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게 정신세계를 연구하는 철학자 중에서 니체의 ‘몸은 형태의 형태이자 영혼의 형태이다.’ 이 묘사는 과연 혁명적인 선언이다. ‘영혼, 정신, 몸 중에서 몸이 가장 앞선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신을 제 도구로 쓴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반란인가. 평생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고 살아온 나에게 니체의 이 사상은 큰 충격이었다. 평생 수천수만 명의 죽음을 목격해 온 나는 이제 몸, 몸만을 믿게 되었다. 사람은 평생의 경험이 몸을 통해 표출된다. 몸은 나의 존재를 표현하는 현상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총에 맞아 죽은 정대의 혼이 주위를 맴돌다가 화장당한 후 소멸하였다고 묘사한다. 우리는 죽은 자의 혼이 어디로 가는지 증명할 수 없고 추측만 할 뿐이다. 기도와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가족과 친구들의 마지막 예우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런 의식을 치름으로써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평안을 얻지만 죽은 자는 고요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영혼 정신 신앙 세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적

2025-03-24

[이 아침에] 퇴고의 길

가까이 지내는 선배가 글 두 편을 내밀었다. 하나는 본인이 쓴 신앙 간증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지 편집을 맡은 전도사가 그의 글을 퇴고한 것이다. 선배는 나이 든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쓴 간증문을 젊은 전도사가 이렇듯 몽땅 고쳐도 되느냐고 사뭇 분개했다.     평소에 지나치게 새치름한 그 교회 여전도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던 터였다. “그렇다면 그거야 그 사람 글이지 본인 글이 아니지요”라고 대충 대꾸해 가며 원문과 수정문을 훑어보다 슬그머니 맞장구 전선을 뒤로 물렸다. 선배의 글보다 전도사의 수정문이 훨씬 돋보였기 때문이다.   원문엔 BC(Before Christ)와 AC(After Christ), 즉 믿음을 갖기 이전의 세속적인 삶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의 변화된 삶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절절한 사연들에도 불구하고 절제 없는 내용 전개와 중복된 소재 인용으로 글의 주제가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뜨거운 신앙 체험은 본인 자신만의 것일 뿐 직접 경험하지 못한 독자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전도사의 글은 이런 부분들이 절도 있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었고 문장과 맞춤법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퇴고라는 것을 원고를 마무리하는 간단한 손질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 뜻이 당나라 시인 가도와 대문호 한유의 고사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말인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가도는 자신의 오언시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연에서 중이 문을 밀고 들어간다는 퇴(推)로 쓸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다는 고(敲)로 쓸지 망설였다. 그러던 중에 평소에 존경하던 한유를 만났고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다’(僧敲月下門)로 마무리했다. 여기서 유래되어 ‘퇴’ 자와 ‘고’ 자는 문장을 다듬는다는 뜻이 전혀 없는데도 그런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쓰며 수십 번을 다듬었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이상 고쳐 썼다고 한다. 퇴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낯선 문을 두드려(고) 탁발을 계속할지, 절 집 문을 슬그머니 밀고(퇴) 들어가 발 씻고 잠자리에 들어 버릴지, 그날 밤 가도의 고뇌가 내 것이 된 지 오래다.   수필을 한 편 쓰면 그때부터 긴 퇴고의 여정이 시작된다. 처음 몇 번은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보충, 첨가, 가필한다. 다음으로 문장을 압축하고 간결한 표현을 고른다. ‘-적’, ‘-의’, ‘-것’ 등의 문구를 삭제한다. 번역 작품을 많이 읽은 탓에 자주 실수하게 되는 수동형의 표현을 찾아내 능동형으로 바꾼다. 말하려던 주제나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분신 같이 여겼던 한 문단 전체도 과감히 버린다. 그 문장에 더 알맞다고 여겨지는 어휘가 떠오르면 어떤 음악가처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글을 고친다.     글 한 편은 하루에 쓰고 퇴고는 한 달가량 계속해도 뭔가 미진하다. 퇴고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은 식탁 위의 에스프레소 머신은 종일 풀가동에 지치고 내 빈한한 사유의 실꾸리는 계속되는 혹사에 비명을 지른다.   퇴고에는 뚜렷한 왕도가 없음을 글을 쓸수록 절실히 깨닫는다. 끝없는 퇴고의 길을 들메끈을 고쳐 매며 걷는다. 그 길 위에서 나의 삶도 다듬어지고 조금 더 온전해지지 않을까 꿈꾼다. 유니스 박 / 수필가이 아침에 퇴고 교회 여전도사가 신앙 간증문 신앙 체험

2025-03-20

[종교와 트렌드] 피드백 루프와 극우 기독교의 상관관계

지난 몇 년간 극우 기독교 세력의 성장과 확산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결합된 결과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가 유통되는 방식, 즉 피드백 루프의 작동 방식이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피드백 루프는 특정 정보나 신념이 순환되면서 점점 강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얼마 전 세스 고딘의 경영서적을 읽다가 현재 극우 기독교가 작동하는 방식과 너무 유사해서 신기했다. 이는 기업이 좋은 루프로 선순환되면 발전이 되고, 나쁜 루프로 악순환되면 기업이 망하는 이유이다.   먼저, 극우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특정 기독교 방송, 유튜브 채널, 소셜미디어 그룹은 지속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공격받고 있다”는 내러티브를 반복한다. 이러한 정보는 신자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외부 세계를 더욱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신념은 더욱 강화되며,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단순한 반대자가 아니라 신앙의 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와 함께, 극우 기독교 운동은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강하게 결합시키면서 피드백 루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하도록 유도하며, 반대 세력을 ‘도덕적 타락’이나 ‘신앙의 위협’으로 묘사한다. 이런 내러티브가 반복될수록 정치적 입장과 신앙이 혼합되어 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된다. 결국 신앙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특정 정치 세력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 의견을 악마화하는 현상이 심화된다.   또한, 이러한 피드백 루프는 신앙적 충성도를 사회적 보상으로 연결하며 더욱 강화된다. 극우 기독교 집단 내에서 급진적인 발언을 하거나 강경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이들은 커뮤니티 내에서 존경을 받고, 이러한 반응이 반복되면서 점점 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반면, 온건한 태도를 보이거나 다른 시각을 수용하려는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위험이 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강화된 피드백 루프는 점점 더 폐쇄적인 집단을 만들어가며, 극단적 행동을 부추길 가능성이 커진다.   마지막으로, 극우 기독교에서는 종말론적 내러티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이 타락하고 있으며, 이제 마지막 때가 왔다”는 식의 메시지는 신자들에게 긴박감을 심어주며, 강력한 행동을 유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민주적 논의나 타협을 거부하고, 더욱 강한 신념과 행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신념 구조 속에서는 타협이 불가능한 전쟁의 논리가 자리 잡게 되며,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행동이 결합된 강력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문제이지만, 그것이 정치적 도구로 변질될 때 사회적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은 더욱 세상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실력이 없으니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다른 관점을 보면 공포심이 생겨 배척과 혐오만이 유일한 도구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없고 혐오만 만드니 개탄스럽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푸드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상관관계 피드백 극우 기독교 피드백 루프 기독교 신앙

2025-03-17

[종교와 트렌드] 신앙인가, 도구인가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한다. 하지만 혹시 우리가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다가가셨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고, 특정한 계층이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신앙인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길이라 믿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히 따르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장 강하게 꾸짖으셨다.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있었지만, 그 열심이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판단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과 용서로 실천하는 대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의 이름으로 배척과 차별이 정당화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변질된다. 우리는 신앙을 정치적 무기로 삼아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한 자를 억압하는 것을 꾸짖으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앙이 정치적 도구로 악용된 사례는 많다.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종교재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교회는 신앙을 이용하여 이단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종교재판의 명분은 신앙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억압하고, 정치적으로 불리한 인물들을 제거하는 수단이었다.   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교회는 이를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그를 탄압했다. 교회의 입장에서 지동설은 단순한 학설이 아니라, 기존의 신학적 해석을 위협하는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과학과 신앙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례는 신앙이 정치적 이념이나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우리의 신앙이 정치적 이념보다 앞서야 한다. 특정한 정당이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이 곧 신앙의 실천이라 믿는 순간, 우리는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우상을 섬기게 된다. 신앙은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분열과 증오의 도구가 아닌, 사랑과 화해의 다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푸드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신앙 도구 과학과 신앙 이상 신앙 정치적 도구

2025-02-24

2세 신앙 교육 지도자 양성한다

한인 2세 교회 교육을 위한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기독 교육사 자격 과정(Director of Christian Education Certificate Program)’이 오는 3월 17일부터 시작된다.   이를 위해 주최 측은 교육 과정에 참가할 평신도들을 모집한다. 접수 마감은 3월 5일이며, 참가 비용은 학기당 800달러다.   이 과정은 G2G-KODIA가 주관하고, 미국장로교 동부한미노회 및 뉴저지 찬양교회의 협력과 후원으로 운영된다.   G2G-KODIA 측은 “신앙 교육은 교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과제이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이끌어 갈 전문 인력은 부족한 실정”이라며 “이를 위해 1년 3학기 과정으로 구성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할 예정이며, 과정은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한국어와 영어 트랙이 각각 운영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 프로그램은 노승환 목사(뉴저지 찬양교회 담임)와 이학준 교수(풀러신학교)가 공동 디렉터를 맡는다.   강사진은 ▶티넥감리교회 담임이자 G2G-KODIA 북동부지역 디렉터인 박길재 교수(기독교 교육 및 실천) ▶풀러신학교 신웅길 교수(성서학) ▶애틀랜타중앙장로교회 부목사이자 G2G-KODIA 동남지역 디렉터인 케빈 박 교수(조직신학 및 윤리) 등으로 구성된다.   ▶ 등록 문의: (310) 404-8093   ▶ 한국어 과정 등록: https://forms.gle/Bx4TfitjxuKYaiVu6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지도자 신앙 신앙 교육 평신도 지도자 교회 교육

2025-02-19

[정호영의 바람으로 떠나는 숲 이야기] 예술과 역사가 공존하는 묘지

LA 그리피스 공원(Griffith Park) 인근에 위치한 글렌데일 포레스트론 메모리얼 파크(Glendale Forest Lawn Memorial Park)는 단순한 공원묘지가 아니다. 이곳은 예술과 평화가 공존하는 장소로 유럽 고성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웅장한 건축물과 대형 십자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원 안에는 박물관, 교회, 결혼식장, 장례식장이 어우러져 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마이클 잭슨, 월트 디즈니, 클라크 게이블 등 20여 만 명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래서 이곳에 가면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이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1906년 설립된 포레스트 론은 크리스천 사업가 허버트 이튼(Dr. Hubert Eaton)의 비전으로 새로운 형태의 공원묘지로 변모했다. 기존의 어둡고 음침한 묘지와 달리 그는 이곳을 평화롭고 밝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잔디와 나무를 심고, 유명 조각과 예술품을 배치했다. 특히 성경의 중요한 사건들을 테마로 한 작품들은 이곳의 상징적 요소다. 스테인 글래스로 원작을 재창조한 작품한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묘사한 작품들은 그 깊이와 예술적 가치를 더한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성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작품에 맞춰 건물을 설계해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이튼 박사의 비전은 공원을 단순한 묘지를 넘어 예술과 신앙의 성소로 만들었다.    또 공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스테인드글라스로 재현된 '최후의 만찬'은 이튼 박사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원작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훼손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원작을 복원하고 보존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에 주목했다. 이튼은 이탈리아의 유명 예술가들에게 의뢰해 6년간 작업 끝에 1931년 완성품을 선보였다. 빛을 통해 표현된 예수와 제자들의 모습은 원작의 감동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며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포레스트 론은 단순한 추모의 공간을 넘어선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포함해 약 1500여 점의 조각과 회화가 공원 곳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미국 독립선언회의를 주제로 한 모자이크 작품 등 역사적 사건을 조명한 예술도 다수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조각과 회화는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당시의 시대와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이곳은 예술적 감동과 역사의 울림이 조화를 이루는 특별한 공간이다.    따라서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예술과 신앙, 그리고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방문객들에게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주소: 1712 S Glendale Ave, Glendale, CA 91205  정호영 / 삼호관광 가이드정호영의 바람으로 떠나는 숲 이야기 예술과 역사 예술과 신앙 예술과 평화 포레스트론 메모리얼

2024-12-05

[삶의 향기]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것이 큰 도(道)

종교의 정의는 학자들의 정리된 것들에서부터 종교인들의 직관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크게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절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한 릴리전(Religion)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란 의미의 종교(宗敎)이다. 전자에는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의 종교들이 해당되고, 후자에는 불교와 도교 등이 해당된다. 물론 불교 신앙의 대상인 ‘청정법신불’을 기독교의 신(God)과 비슷한 개념으로 본다면 불교 역시 릴리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구분을 한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종교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고통의 원인과 해결방법 등 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의 문제이다. 특정인들만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는 법학, 의학, 물리학과는 피학습자의 범위, 선택과 필수의 문제 등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은 특정인만 배워야 하는 것이거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각국에서 의무교육 기간과 과정을 규정하듯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배워야 한다. 종교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유무식 남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하고, 신학교나 불교대학에서 ‘설교는 중학교 2학년 수준에 맞게 준비해야한다’고 가르치는 이유이다.   유튜브 방송에서 유명 스님이 불법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거라고 설명을 하니, 진행자가 묻는다. “그럼 불교 공부를 오랜 기간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용맹정진이나, 과거 부처님이 500생을 닦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태권도를 배우러 가면 지도자가 발차기 요령을 가르쳐 준다. 구분 동작도 보여주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준다. 한두 번 들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도자가 경험이 많다면 더 쉽게 이해 될 것이다. 문제는 이해한다고 해서 바로 발차기를 제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십 번 수백 번 연습을 해야 조금 흉내를 낼 수 있게 되고, 다양한 상황이 벌어지는 실전에서 정확한 발차기를 하려면 그 이상의 연습이 필요하다.     스포츠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노래 같은 분야에서도 ‘힘을 빼는 것’은 전가의 보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완벽하게 힘을 빼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고, 운동 분야에서도 은퇴를 할 때나 되어야 비로소 힘 빼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온 관념과 습관 때문에 쉽다고만 하기 어렵지만, 불법이 쉽다는 말은 이해가 쉽다는 말이지, 그것이 수행자의 삶과 하나가 되는 것도 쉽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 수행이라고 하는 ‘삼학’은 마음을 맑히고, 지혜를 얻어서, 바른 실행을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는 것과 실행이 모두 중요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행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최근 개발되어 놀라운 검색 능력을 과시하는 인공지능 기반의 쳇지피티(ChatGPT)를 보노라면 실행의 중요성은 지식의 그것과는 가히 비교하기 어려워 보인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의무교육 기간 불교 신앙 불교 공부

2024-11-25

[종교와 트렌드] 양자역학과 신앙

최근 양자역학의 대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었다.     대학때 전공이 화학공학이라 물리와 열역학 등의 기본과학을 공부했지만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다. 우연히 요즘 여러 양자역학 책을 접하면서 기독교와 불교에서 얘기하는 교리들과 비슷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다.     로벨리는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이지만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일관되게 흐르지 않으며 특히 상대성 이론과 양자 중력 이론에서는 시간의 성질이 훨씬 복잡해 진다고 한다.     인터스텔라 영화에서처럼 중력의 영향으로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강한 중력장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며 이는 블랙홀 근처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현재만 존재하며 사물들은 존재했다가 없어진다. 결국 '사건'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나마 그 사건들도 사람의 인지하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 나이가 들면서 필자의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다. 그나마 기억도 없어진다면 그나마 그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불교에서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처럼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뇌에 마이크로 칩을 심어 컴퓨터에 연결해서 우리의 기억력을 올려놓으면 인간이 영생을 얻을까 생각하니 무섭다.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이루어지는데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 객관적 정량적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질적인 시간으로 주관적 정성적 시간이다.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전쟁 중에 해가 지지 않도록 기도해서 해가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카이로스처럼 일초일초가 아까웠을 것이다. 바쁜 현대인의 삶도  정신없이 시간의 노예로 쫓기듯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주체적으로 시간관리와 우선 순위를 세우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시간의 주인으로 카이로스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양자역학에서 빛의 파동설과 진동설은 아주 중요한 이슈이다. 빛은 두 개의 속성을 가졌으나 우리가 관찰할 동안에는 하나의 속성을 보여준다. 둘 다의 속성을 가졌으나 관찰자의 시점에만 보이는 것은 하나의 속성이다. 기독교 삼위일체도 연상된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두고 예정론 자유의지 등의 논쟁에서 딱 하나를 정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두 개의 속성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중요한 '연기' 개념은 양자역학에서 '얽힘'과 유사하다. 멀리 떨어진 장소 시간에서도 사건과 사물은 연결되어 있다. 심리학자 칼 융의 '동시성'의 이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런 머리아픈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결국 내일 죽을 것 같이 해야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지금 하는 것이다.     오늘에 충실하라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메멘토 모리!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 푸드 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양자역학 신앙 카이로스 시간 물리적 시간 최근 양자역학

2024-06-24

몸, 마음 지친 3040 세대…“모임 만들어 달라”

현재 30·40세대는 1975년생~1994년생을 일컫는다. 이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허리 세대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령대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와 지앤컴리서치는 기독교계 내 30~49세 사이 교인들의 신앙 의식을 조사했다. 30·40세대가 교계에서 중심을 잡아야 교회 역시 흔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의 삶과 신앙에 대한 의식들을 알아봤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3040’ 세대임에도 정작 그들의 삶은 생기가 없다.   한마디로 삶의 만족도가 연령층 중에 가장 낮다는 의미다.   지앤컴리서치측이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각 연령층에 삶의 만족도를 물었더니 40대(37%)와 30대(41%)가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60세 이상(52%), 19~29세·50대(각각 43%)보다 낮은 응답 비율이다. 그만큼 30·40세대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이 왜 녹록지 않은지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키워드만 뽑아보면 직장과 육아가 원인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스트레스 원인을 물었더니 직장에 다니는 3040 세대 중 무려 68%가 ‘직장 또는 사회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친다’고 답했다.   기혼자들의 경우 57%는 ‘가사 노동 및 육아로 몸과 마음이 지친다’고 응답했다. 특히 여성 5명 중 3명(61%)은 육아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30·40세대 응답자 3명 중 1명꼴로 직장 생활(38%)과 육아(34%)가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며 “사회와 일상에서 오는 피로 등의 문제가 결국 교회 내 봉사 활동 소홀, 온라인 예배 전환, 신앙 관심 저하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특히 30·40세대의 신앙 의식이 약화한 계기는 팬데믹이었다.   ‘코로나 이전보다 신앙적으로 약화했다’는 응답은 30·40세대(33%)가 가장 많았다. 이어 20대(31%), 50·60세대(26%) 순이다.   이러한 응답은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도 이어진다.   현재 출석 중인 교회에 대한 만족도를 물은 결과 30·40세대 중 교회에 만족한다고 답한 비율은 59%였다. 이는 50·60세대(71%)와 20대 교인들의 만족도(61%)보다 낮다.   그들에게 불만족의 이유(중복응답 가능)를 물었다. 30·40세대는 사회적으로 중심에 있다. 때문에 시대를 읽는 눈이 빠를 수 있다.   30·40세대 응답자의 30%가 출석교회가 ‘시대적 흐름을 좇아가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어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적인 태도(28%),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 불일치(26%), 30·40세대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26%) 등을 꼽았다.   스트레스가 많은 30·40세대는 신앙생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주일 예배 외 다른 활동을 하는지를 물은 결과, 30·40세대의 신앙적 활동이 가장 적었다.   예배 외에는 활동이 없다고 답한 30·40세대는 65%로 나타났다. 무려 10명 중 7명이 해당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 역시 연령층 중에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교회 내에서 예배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시간이 없어서(30%)’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대신 권유를 받으면 참여할 의향을 내비쳤다. 30·40세대 교인 중 절반 이상(67%)이 ‘하겠다(18%)’ 또는 ‘생각해보겠다(49%)’고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는 “30·40세대가 교회 내에서 활동하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지치고, 피곤하고, 귀찮다는 것”이라며 “대신 봉사를 요청할 시 수락 의향이 있다는 점은 얼마든지 활동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30·40세대는 교회 내에서 자신들을 위한 모임이 구성되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30·40세대는 ‘부부 및 육아를 위한 모임(80%)’ ‘직장인을 위한 모임(70%)’ 등이 매우 또는 약간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또, 조사에 참여한 30·40세대 중 약 60%는 관련 모임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30·40세대는 신앙 교육보다 그 외 교육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측은 자녀에 대한 교육 우선순위를 물었다.   조사 결과 응답자들은 인성 교육(63%)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지성 교육(39%), 진로 교육(25%), 신앙 교육(17%) 등의 순이다.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을 제대로 못 하는 이유에 관해 물었다.   그 결과(중복 응답 가능) 시간이 없어서(47%)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이어 신앙 교육의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서(38%), 부모인 내가 신앙이 확고하지 않아서(37%), 자녀의 학업이 우선이라서(29%)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 보고서에는 “30·40세대는 사회적으로 가장 바쁘기도 하지만 막상 신앙 교육을 하려 해도 방법을 모르고 있다”며 “삶 속에서 밀착하여 가르쳐야 하는 신앙 교육은 여러 교육 순위 중 가장 낮다는 점이 주목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물었다.   30·40세대는 ‘자녀와 함께하는 신앙 프로그램(57%)’이 필요하다고 꼽았다. 이어 부모 역할 교육(44%), 자녀와 대화법(42%), 부부 관계 및 대화법(26%), 가정 예배드리는 법(26%), 자녀 역할 교육(22%)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녀에게 신앙을 주로 교육할 주체는 역시 ‘부모(68%)’를 꼽았다. 이어 교회학교 교사(18%), 교회학교 사역자(9%), 담임목사(4%) 등의 순이다.   한편, 이번 조사는 지난해 9월 8~12일 사이에 개신교인 700명(30~49세)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신뢰도는 95%(오차범위 ±3.7%p)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마음 신앙 신앙 교육 신앙적 활동 신앙 의식

2024-04-08

'가나안 교인'<19~34세 청년층> 3명 중 1명…"다시 교회가고 싶다"

수년 전부터 한인 교계에서는 '가나안 성도'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가나안'은 신앙은 있지만 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을 일컫는 용어다.   특히 최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진행한 '기독 청년의 사회 인식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 중 가나안 성도는 24%다. 이 연구에서 청년은 19~34세 사이의 성인을 뜻한다. 즉, 교계의 허리 세대인 청년 4명 중 1명이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대표 지용근)는 최근 '가나안 청년의 삶과 신앙'에 대해 조사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파악은 교계 사역의 방향성과 전략 등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갈수록 젊은층과 허리세대인 청년이 줄어드는 한인 교계에도 오늘날 가나안 성도에 대한 현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회데이터연구소측은 먼저 청년층 가나안 성도들의 비율부터 공개했다.   근거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자료를 인용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따르면 가나안 청년의 비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30~34세(27%) 였다. 사회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30대 초중반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이어 25~29세(25%), 19~24세(20%) 순이다.     청년층 가나안 성도들은 최근에 교회를 이탈한 게 아니다. 오래됐다.   먼저, 가나안 성도들은 유년 시절부터 교회에 출석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 교육을 받아온 부류다.   가나안 청년 성도들에게 언제 신앙을 갖게 됐는지 물은 결과 모태 신앙(44%), 초등학교(28%) 등 대부분 유년 시절부터 신앙 생활을 해왔다.   반면, 교회를 떠난 시기는 대학교 졸업 후(42%), 대학교 재학중(31%) 등 대부분이 대학교 이후 교회를 이탈했다.   이러한 현상은 미주 한인교계도 마찬가지다.   한인 2세 사역을 하는 필립 이 목사는 "어린 시절 교회에 대한 향수와 신앙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며 "대신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되면서 평소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감 등을 느끼며 제도권 교회를 떠나게 되고 결국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가나안 청년 성도들은 '매주 교회 다니는 것이 부담스럽다(39%)'고 답했다. 이어 '신앙에 회의가 생겨서(12%)' '재미가 없어서ㆍ교인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서(각각 11%)' '사회 문제를 대하는 부적절한 태도(4%)' 등을  꼽았다.   가나안 청년들은 대부분 신앙적 의식이 약했다.   이를 위해 목회데이터연구소 측은 ▶기독교 입문 층 ▶그리스도 인지 층 ▶그리스도 친밀 층 ▶그리스도 중심층 등 4가지의 보기를 제시했다.   가나안 청년 10명 중 7명은 자신을 '기독교 입문 층'이라고 답했다. 기독교 입문 층은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것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으로 꼽히는 '구원의 확신' 역시 약했다. 가나안 청년 응답자의 28%만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했다. 반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청년 중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68%로 나타났다. 교회 출석 여부가 신앙 또는 믿음에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측은 보고서에서 "가나안 청년 10명 중 3명은 가족 때문에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답했다"며 "가족은 크리스천이 신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연결 장치이자 안전망인 셈"이라고 전했다.   교회를 이탈했어도 신앙 생활에 있어 도움을 받는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신앙 성장에 있어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답한 가나안 청년은 27%로 가장 많았다. 이어 미디어(21%), 성경 묵상(13%) 등의 순이다.   가나안 청년 중 일부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나안 청년의 33%는 교회로 돌아올 의향이 있다. 교회 재출석 의향은 여성(31%)보다는 남성(37%)이, 30대(32%)보다는 20대(36%)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청년층 가나안 성도들에게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다.   먼저, 교회에 대한 긍정 이미지는 65%로 교회에 출석중인 청년들의 긍정적 응답 비율(80%) 보다는 낮았다.   가나안 청년들은 교회가 '사람을 위로하는 곳(41%)'이라고 답했다. 이어 편향 혹은 배타적인.권위적인(각각 10%), 세상과 다른.신뢰가 되지 않는(각각 8%), 사회를 통합하는.물질적인(각각 7%) 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도 엇갈렸다.   가나안 청년들은 목회자에 대해 경건한(17%), 존경받는(15%) 이미지가 있다고 답했다. 이어 권위적인(15%), 위선적인(13%), 베푸는(10%), 위로하는(9%), 친절한ㆍ탐욕적인(각각 8%) 등의 순이다.   과거 교회에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가나안 청년들은 교회가 청년들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위로와 포용적 태도(50%)' '청년의 사회적 현실 이해(48%)' '성경에 근거한 삶의 방향 제시(40%)' 등을 했어야 한다고 꼽았다.   또, 목회데이터연구소 측은 돈과 행복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가지 질문을 통해 가나안 청년과 교회 출석 청년의 인식을 조사했다.   '돈은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답한 가나안 청년(76%)이 교회 출석 청년(64%)의 응답 비율보다 높았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측은 보고서에서 "가나안 청년은 이혼, 낙태, 음주, 흡연, 혼전 성관계 등 각종 윤리 문제 의식이 비기독교인과 대체로 비슷했다"며 "가나안 청년의 경우 4명 중 3명꼴로 '돈을 행복의 필수 조건'으로 꼽아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보다 돈을 중시하는 경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가나안 성도 교회 한인교계 목회데이터연구소 장열 미주중앙일보 LA 로스앤젤레스 신앙 기독교 신앙생활

2024-03-04

[삶과 믿음] 신앙 수행의 열매

크리스마스이브 날 한 중년 신사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과속하며 운전을 했습니다. 마침 교통경찰에게 잡혀서 티켓을 받게 되었는데, 그 젊은 경찰은 상당히 무례한 태도를 보였고 그 신사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사분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젊은 경찰관의 뺨을 때렸고 그로 인해 그분은 수갑이 채워져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그분은 친구와 가족에게 전화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경찰서 철장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분을 참지 못해서 그 날 저녁 경찰서 철장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일어난 실제 일입니다.   이분이 신앙 수행을 하는 분인가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분이 좌선 혹은 기도를 많이 하는 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분이 교회, 절 혹은 교당에 다니는 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분이 경전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포인트는 이분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크리스마스이브 날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현실 상황에서‘실다운’ 마음공부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좀 늦었다고 해도 파티에 좀 늦는 것이 무슨 대수냐 생각하며 과속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젊은 경찰이 무례한 태도를 보여도 다른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즐겁게 놀고 있을 텐데 젊은 경찰이 추운 데서고생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무례한 행동을 이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경찰서 철장 안에서 화나는 상황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차피 그렇게 된 것 내일 아침이면 나가겠지’하고 편히 마음을 돌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미래에 이가 추억, 농담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순간순간 지혜롭지 못한 ‘선택’을 했고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우리는 업을 짓습니다. 불교 용어로 이를 작업(作業)이라 합니다. 육근 작용 즉 작업(作業)에 따라 우리 인생이 고가 될 수도 있고 낙으로 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현실생활에서의 우리의 취사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취사(取捨)라는 말은 취(취할 취, 取)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버릴 사, 捨) 뜻입니다. 순간순간의 취사가 우리 운명을 좌우합니다. 여러분의 결혼 혹은 직업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와 직업은 언젠가 여러분이 과거에 선택한 것이며, 그 선택이 지금 얼마나 여러분 인생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다음을 말씀하십니다.     고락(苦樂)의 설명: 대범, 사람이 세상에 나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괴로운고요 둘은 즐거운 낙이라, 고에도 우연한 고가 있고 사람이 지어서 받는 고가 있으며, 낙에도 우연한 낙이 있고 사람이 지어서 받는 낙이 있는바, 고는 사람 사람이 다 싫어하고 낙은 사람 사람이 다 좋아 하나니라. 그러나, 고락의 원인을 생각하여 보는 사람은 적은지라, 이 고가 영원한 고가 될는지 고가 변하여 낙이 될는지 낙이라도 영원한 낙이 될는지 낙이 변하여 고가 될는지 생각 없이 살지마는 우리는 정당한 고락과 부정당한 고락을 자상히 알아서 정당한 고락으로 무궁한 세월을 한결같이 지내며, 부정당한 고락은 영원히 오지 아니하도록 행, 주, 좌, 와, 어, 묵, 동, 정간에 응용하는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명상 기도를 많이 하고 경전 공부를 많이 하여도 수행의 열매는 결국 ‘실행’입니다. 인생을 위해 신앙 수행을 하는 것이지, 수행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수행 역시 결국 우리가 고해를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 현실적인 마음공부, 신앙, 수행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신앙 수행 신앙 수행 마음공부 신앙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2024-01-18

[삶과 믿음] 정성의 위력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정성을 다음으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성(誠), 성이란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   정성을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원동력이란 ‘근본이 되는 동력’이라는 뜻입니다. 세탁기, 선풍기, TV 등 전자제품이 있어도 전기가 없으면 이들이 무용지물입니다. 전기라는 ‘원동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 수행하는 데 있어서신분의성이라는 근본이 되는 동력, ‘원동력’이 있나 내 마음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 수행을 상당 기간 했지만 별로 진척이 없으면 그것은 신분의성이라는 원동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만사를 이루려 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만사란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기에 수행뿐 아니라 어떤 인생 목표를 이루는데도 신분의성이라는 원동력이 없으면 성공을 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성이란간단없는 마음”이라 하셨습니다. 수행에 있어서나 혹은 인생의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힘든 상황을 종종 마주칩니다. 예상치 못하게 힘든 일이 생길 때 혹은 어떤 일에 진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많은 사람이 중간에 포기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를 새 옷을 입다가 처음에는 무엇이 묻을까 조심하다가 좀 더러워지면 조심성을 놓게 된다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시작하여 한 가지도 그르침이 없을 때는 그 일을 잘 해보려는 성의가 계속되다가도 중간에 혹 한 두번 실수하고 보면 그만 본래 마음을 다 풀어버리고 되는대로 하는 수가 허다하나니, 이것은 마치 새 옷을 입은 사람이 처음에는 그 옷을 조심하여 입다가도 때가 묻고 구김이 지면 그 주의를 놓아 버리는 것과 같나니, 모든 일을 다 이처럼 한다면 무슨 성공이 있으리오. 오직 철저한 생각과 큰 경륜을 가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하다가 혹 어떠한 실수를 할지라도 그것을 전감 삼아 미래를 더욱 개척은 할지언정 거기에 뜻이 좌절되어 당초의 대중을 놓아버리지는 아니하나니, 이러한 사람에게는 작은 실수가 도리어 큰 성공의 바탕이 되니라.” (대종경인도품 38장)   내가 인생을 이끌기 위해 ‘간단이 없는 마음’ 즉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정성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즉 “정성이란 하늘의 도(道)요, 성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 유교의 최고 고전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말씀입니다.   대승불교를 크게 부흥시킨 무착(Asanga 300~390 AD)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수많은 불교의 선지식 중 보살의 칭호를 받는 분은 세친, 용수, 마명 등 몇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착은 젊은 나이에 불교의 교리와 수행을 마스터했고 아라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핵심 ‘모든 것이 환영이며 마음이 짓는바’라는 가르침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 동굴로 들어가서 그 진리를 확실히 깨치고자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포기하고 동굴을 떠나려 했습니다. 동굴을 나서는데 우연히 동굴 입구 위에 있는 바위가 유난히 닳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동굴 속의 박쥐가 수없이 나가고 들어오고 해서 수많은 세월 동안박쥐 날개가 바위에 부딪혀서 바위가 닳은 것이었습니다. 무착은 자기의 성급함을 반성하고 다시 더 3년을 공부하겠다고 다짐하고 동굴에서 들어와 정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행의 진척이 여전히 없자 다시 동굴을 떠나려 했습니다. 동굴을 나서려는 순간 이번에는 동굴 입구 밑에 있는 바위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위에 어떻게 구멍이 깊게 파여있는지 궁금해서 위쪽을 보니 동굴 입구 위의 바위에 습기가 고여서 가끔 물이 한 방울씩 바위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세월 동안 한 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져서 그 자리가 파여서 구멍이 난 것입니다. 무착은 다시 한번 큰 교훈을 얻고 다시 동굴로 들어와 수행했고 결국 대도를 성취합니다.     어떤 일에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에는 지혜와 요령도 필요하지만 결국 목적에 달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노력이 결정적입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혹은 아무리 해도 진척이 없다고 생각될 때 무착과 같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성공의 열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 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위력 동굴 입구 방울씩 바위 신앙 수행

2023-11-16

[기고] 바른 종교란?

지난달 애틀랜타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란 단체의 한인 신봉자들이 한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단체는 종교집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이비 집단에 불과하다.     나는 목회하는 동안 종교에 대해 설교도 하고 토론도 많이 했다. 그때 종교에 관해 얘기했던 기초적인 내용이 생각나 소개한다. 어느 시골 사람이 산골짜기를 넘다 큰 나무를 보고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  넓죽 엎드려 나무를 향해 큰절을 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것은 산신령이 도와준 덕분이라 믿었고 한 번도 산신령을 본 적은 없지만 큰 나무를 통해서 산신령의 존재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시골 사람이 산신령의 존재를 느낀 것도 곧 종교 행위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냉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비는 어머니의 행위도 또한 종교의식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이 인간 이상의 능력자를 발견할 때’ 시작된다. 인간이 인간 이상의 능력자를 발견하게 되는 형태는 무속신앙을 비롯하여 종교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우상숭배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돌이나 나무와 같은 것으로 잡신의 상을 만들어 종교의 대상으로 삼는 원시종교는 그렇다 쳐도 불교의 불상을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거의 모든 종교는 그 신앙의 대상을 가시적 물질을 통해서 찾고 있다. 불교의 불상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붓다의 모습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만들어 거기에다 절을 한다. 조각이나 그림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붓다의 모습을 떠올리고 붓다의 교훈을 되새긴다.  그러니까 사람이 만들었을지라도 그 불상은 신성하고 고귀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 큰 나무에 절을 하는 것도 그 나무는 비록 자연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인간 이상의 능력자를 찾게 될 때 그 나무는 종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형적 행위보다 유형적 행위에서 정신적 소산을 즐겨 찾는다. 종교 행위도 그렇다. 종교의 참 대상은 무형이다. 신은 무형이다. 이 무형의 신을 유형의 대상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인간은 유형의 신상을 만든다.  그런데 유형의 신상을 만들지 않는 종교에서는 이 같은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어떤 고위 인사가 우상숭배 발언으로 논란이 됐었다. 통상적인 우상숭배 발언이 아니라 한국의 반만년 역사가 우상숭배의 죄 속에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틀림없이 한국 역사가 불교를 중심으로 흘러왔다는 뜻일 게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불교의 불상을 우상이라 일컫는 것은 종교의 형태에 대한 인식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함부로 말하는 일은 인간 정신 유산의 산물을 너무도 모르는 몰지각한 일이다.      방향을 조금 바꿔 보자.  우리는 국기에 경례를 한다. 태극기도 사람이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태극기에 경례를 하는 것은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과 물질의 상관관계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정신의 산물은 반드시 물질을 통해서 나타난다. 불상에 대하여 예를 갖추는 것은 불심을 나타내는 행위일 뿐이다. 기독교의 교회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다. 교회의 설교단 뒤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죽은 예수를 상징한다. 비록 이 십자가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아닐지라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를 떠올린다면 이 십자가도 우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종교는 무형의 절대자나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만 거의 모든 종교가 유형의 형태를 갖추고 그것들을 통해서 절대자나 신을 경배하고 있다.  절대자에 대한 근본 원리를 무형인 마음으로만 추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 이상의 능력자를  찾는 행위가 올바르게 이뤄질 때 비로소 바른 종교생활을 할 수가 있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기고 종교 종교 행위 종교적 신앙 동안 종교

2023-10-29

[등불 아래서] 나보다 아래는 없다

어릴 적 부모님들의 관심은 성적이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공부에 한이 맺히신 분들도 많았고, 자식의 성공으로 자신을 찾으려는 분들도 있었다. 아이도 덩달아 공부를 잘하는 것이 벼슬이었다. 자라 보니 세상은 더 조건을 찾았다. 결국, 나를 인정받고 빛내기 위해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해졌다. 좋은 스펙을 쌓는 일이 왜 나쁘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나와 내 조건이 한 인격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스펙이 인간에 앞섰다.   애석하게도 신앙도 그런 조건처럼 되지 않았나 싶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조차도 필요하면 쓸 수 있는 나를 위한 '아빠 찬스'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가진 여러 조건 중 하나가 아니다. 내 인생을 위한 뒷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심지어 성숙시키기 위한 능력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환경이나 선물 혹은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이시며 우리 인생의 의미가 되시고 내 기쁨이며 나의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우리의 만족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한 시인은 기도하고 노래했다.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신학자 본 회퍼는 유혹의 본질을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우리와 피조물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 보았다. 반짝이는 금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하면, 별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기쁨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신앙은 나를 빛내려는 장식물이 되었다. '믿음이 좋은 나, 기도 잘하는 나, 잘되는 나, 성경을 많이 아는 나'가 되었다. 겉으로 그럴 듯 빛나 보이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자기 부인이 아니었던가. 내가 만든 사과나, 가게에서 사 온 배를 달아 놓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화려한 이력들을 더덕더덕 더 붙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 이력과 신념, 자랑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이웃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다. 나보다 아래는 없다. 이 겸손이 자기를 낮추사 제자들의 발을 만지며 씻으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마음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통계가 아니다. 업적도 능력도 아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며 정의를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당신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오늘날 신앙 업적도 능력 아빠 찬스

2023-10-02

충현 '화요사랑방' 모임…기독교·신앙 궁금증, 대화로

대화를 통해 기독교를 배워가며 이민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함께 나누는 '화요사랑방' 모임이 오는 29일부터 11월 7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50분 LA에 있는 충현선교교회(5005 Edenhurst Ave.)에서 열린다.   총 11주 동안 진행되는 화요사랑방에서 참가자들은 함께 식사를 나누며 ▶예수님은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등 11가지 관심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며 그룹별로 토의를 하게 된다.   화요사랑방을 이끄는 서태희 디렉터(집사)는 "코로나19팬데믹으로 느슨해진 신앙을 새롭게 세우고 싶은 분들 새롭게 기독교 신앙을 배워나가고 싶은 분들 그리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며 기독교를 배워나가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라며관심 있는 분들의 참가를 부탁했다.    한편 화요사랑방은 새로 기독교를 알고 싶어하는 비기독교인들은 물론 신앙의 기본을 새롭게 다지기를 원하는 교인들과 타 교회 교인들도 참석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열린 프로그램으로 참가비는 교재를 포함해 20달러다.     참가를 원하는 한인은 온라인(www.chmcsarangbang.org) 또는 전화(818-549-9191)로 등록할 수 있다.   ▶문의:(818)549-9191 교회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화요사랑방 게시판 화요사랑방 모임 기독교 신앙 교회 교인들

2023-08-22

[삶과 믿음] 의문의 주요성

신앙 수행에 있어서나 어떤 세상에서인생 목적을 향해서 나갈 때 큰 믿음을 가지고 열정으로서 전진해 가는 것이 주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주요한 것은 머리를 잘 사용해 지혜롭게 문제 해결을 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려고 가는데 현관문이 잠겨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문을 망치로 용감히 부수고 들어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만, 우선 화분 밑 등 주변에 혹시 열쇠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연구를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좌선할 때 망념이 너무 많고 잠이 너무 많이 오는 경우 그냥 열심히 지속해서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때론 멈추어서 “내가 왜 이렇게 좌선 때 잠이 오지 혹은 왜 망념이 많지?” 하며 자기 생활을 한번 반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좌선 전에 과식한다거나 정신적, 육신적으로 너무 피로하다거나, 생활에서 마음을 흩트리는 습관이 지속한다거나 (예를 들어 SNS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거나, 평상시에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등) 등 돌아보아 내가 망념과 졸음을 제공하는 환경을 많이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체질과 근기를 잘 살펴보아 좌선이 잘 안 되면 행선, 독경, 기도, 절 수행 등 여러 가지 다른 수행으로 대처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사업을 하거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힘들 일이 생길 때 기도 등을 하는 것도 주요하지만, 멈추어 서서 그 해결책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 수행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할 때 우리 수행과 인생을 돕는 아군을 신(信), 분(忿), 의(疑), 성(誠)이라고 하시며,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를 ‘진행사조(進行四條)’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믿음, 분발, 의심, 정성이 우리 수행과 인생길을 진행, 진척시켜 주는 아군입니다.     또한 수행과 인생 성공을 방해하는 적군을 ‘사연사조(捨捐四條)’라고 하시고, 이는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믿음이 약하거나 없는 것, 헛된 욕심, 나태심, 어리석음이 바로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사연(捨捐), 즉 버려야 하는 네 가지 적들이라는 것입니다.   “의(疑)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 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관계의 해결에 있어서, 사업 혹은 마음공부의 성공에 있어서 잘 안되면 안되는 이유 즉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아는 것’이 바로 ‘의(疑)’입니다.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왜 밀물과 썰물이 생기며, 왜 달이 지구를 돌며, 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가 등 수많은 자연 현상을 중력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완벽히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한 지인이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었냐고 뉴턴에게 물었습니다. 뉴턴이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전 수년 동안 그것만을 항상 생각, 연구해 왔습니다.” 연마하고 궁구하지 않고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부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로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요? 우주와 인생의 비밀, 즉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우주 자연 현상에 대한 많은 의문이 걸려서 이를 해결하고자 산신에게 물어보기 위해 수년간 어린 시절 산에서 기도도 했고, 도사를 찾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 고에 대해 고민을 했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생로병사의 근원적 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어떻게 해야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서 구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대종사이건 부처님이건 우주와 인생의 의문으로 구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주요성 의문 대종사이건 부처님이건 신앙 수행 인생 성공

2023-08-17

[중앙시론] 연방대법원의 문화전쟁

흔히 미국을 청교도가 세운 기독교 국가라고 한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초기 이민자들이 전부 영국 출신도 아니었고 많은 사람이 청교도 이외의 다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특히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은 청교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계몽철학이었다. 계몽철학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로 들어가는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파고든 인본주의 사상을 뿌리로 한다.     개인적으로 계몽철학은 기독교 신앙과 조화되는 면도 있지만 충돌하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독립전쟁 때 만들어진 모든 정치 및 법률 서류들은 계몽철학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헌법이다. 연방헌법에선 기독교 신앙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정교분리에 따른 신앙의 자유를 못 박았음으로써 기독교 신정 국가 체제를 거부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를 핍박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인본주의 계몽철학의 핵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계몽철학자였고 헌법이 계몽철학에 근거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건국 시기부터 미국인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이 청교도가 건국한 기독교 국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세기 중반부터 개신교 복음주의가 중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라 오히려 건국 초기보다 더 기독교적인 나라로 변했다.  건국 초기 대통령들은 겉으론 기독교 신자고 정신세계는 계몽철학자였다면 19세기 중반부터는 신앙심이 깊은 대통령들이 배출됐다.     다양성이 제한되던 20세기까지만 해도 개신교 복음주의에서 많은 표가 나오니 정치인들은 신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인 개신교 복음주의는 미국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같은 기독교지만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나 주지사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이혼을 하면 대통령이 되거나 정계 입문조차 어려웠던 것을 보면 그 벽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벽도 점차 흔들리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내려앉기 시작한다. 역작용으로 양 진영의 ‘문화전쟁(culture war)’이 거세게 진행된다.  한쪽은 다양성을 앞세워 기존의 문화를 부숴버리려고 하고 다른 쪽은 과거로의 회기를 시도한다.     현재 문화전쟁의 뜨거운 이슈가 종교의 자유다.  이 와중에  종교와 관련된 두 건의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나왔다. 하나는 직장 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거다. 종교적 이유로 일요일 근무를 거부한 직원에 대한 해고는 부당해고이고 고용주는 직원의  이런 요구에 대해 무리가 없다면 맞춰져야 한다는 판결이다.  진보 보수가 3대6으로 나뉜 대법원에서 만장일치로 직원 편을 들어준 것이다. 종교의 자유에 대해선 해석이 틀려도 작업장에서의 개별 직원의 신앙 보호가 고용주의 권리에 앞선다는 데는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다른 케이스는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동성애자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거부한 한 웹디자이너의 차별금지법 위반 문제였다.  종교의 자유란 같은 이슈를 놓고 이번엔 보수와 진보 판사가 각각의 색채를 명확히 드러냈다. 결과는 6대 3으로 동성애자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거부한 웹디자이너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판결이었지만 보수 판사들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근거해 판결을 내렸다.  동성애자에게 서비스 금지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표현의 자유에 위반한다는 논리였다. 지난해 낙태권 판결에 이어 이번 판결까지 앞으로도 대법원은 문화전쟁의 최전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론 연방대법원 문화전쟁 기독교 신앙 현재 문화전쟁 건국 초기

2023-07-16

[기독교와 사회물리학] 인간의 노동이 곧 하나님의 일

하나님은 스스로 즐겁고, 보람되게 일하시는 분이시다.     직접 우주와 지구의 생태계를 만드시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나서 즐겁고 기뻐하셨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사람이 해야 할 '맡아서 돌보게 하는 일'의 동사는 히브리 동사 '아바드(abad)'로서 '섬기다 봉사하다(serve)'의 의미가 있다. 돌보고 섬기는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로서 노예의 속박이 아니라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다. 노동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결과가 아니라 섬기는 일이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다. 선악과 때문에 생긴 불순종의 결과로 노동이 새롭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 노동이 힘들어지게 되고 생존의 굴레가 되어버렸다.     앙드레 비엘레는 인간의 타락으로 노동이 죄로 오염되면서 타락 이전에 노동을 통해 누렸던 즐거움이 수고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동의 즐거움과 노동이 제공하는 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노동 자체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기에 사람도 일하는 것이다.     인류가 공동체 사회를 이루게 되면서 다양한 노동은 서로를 생존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홀로 생존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현대인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자본과 생산물을 이용해야 하고 본인도 노동함으로써 공동체의 필요를 제공하며 공존한다. 노동이 다양화되면서 노동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지배 군이 생겨나고 노동을 제공하는 피지배 군이 생겨나면서 노동의 보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성경은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줘야 함을 보여준다. 노동을 제공한 야곱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자 고용주인 외삼촌 라반과 갈등이 일어났으며 결국에는 안 좋게 떠나게 된다. 구약은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게 지급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아 노동자를 억울하게 한 자를 심판하라고 가르친다.   초대교회 시대 헬라 문화는 육체와 정신을 구별하여 육체적인 노동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고 정신적인 일을 더 존중하였다. 그래서 노예가 육체적인 일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수고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을 정도로 일을 하라고 강조한다.   중세 교회는 이분법적으로 성과 속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영적 계급과 세속 계급을 구분하고 영적 계급에 속한 교황, 주교, 수도사 등은 직업을 통한 노동을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는 모든 직업의 일은 하나님의 일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세속사회 속에서 직업을 갖고 행하는 모든 노동이 사회적 책무를 공동으로 지는 일이며 거룩한 소명이라고 밝힌다. 칼빈은 노동자들의 땀의 결정체로 재화가 제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보상으로서, 노동자들의 품삯이 제공되지 않는 현상은 부당한 일이라고 일갈하였다. 그리고 노동의 비보상에 대한 심판은 노동자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앙드레 비엘레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얻은 재화는 사회구성원으로서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재화를 얻기 위한 인간의 노동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육체적 노동이든 정신적 노동이든 사람의 일은 공동체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현대교회 안에 숨겨진 직업의 편견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가진 이를 성공한 신앙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노동직업을 가진 이들을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존경해야 한다. 교회는 헌금이나 바치는 물건의 양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건전한 직업을 하나님의 일로써 존경해야 한다. 즐겁고 기쁘게 노동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직업에 임하며 공동체에 포함된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존경받는 이민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mail protected] 조철수 / 목사·맥알렌세계선교교회기독교와 사회물리학 하나님 노동 노동 자체 공동체 사회 신앙 공동체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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