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Scarlet), ‘백마 탄 왕자’ 클리셰 뒤엎는 여성 해방기
오직 주먹으로만 세상을 살다 상류층 여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한 남자의 성취와 야망을 다룬 시대물 ‘마틴 에덴’(2019)의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다시 그의 낭만적 서사를 이어간다. ‘스칼렛’은 전후 20여년 동안 펼쳐지는 한 여성의 해방기이며 음악과 판타지가 가미된 로맨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노르망디의 어느 작은 마을. 전장의 최전선에서 집으로 돌아온 라파엘(라파엘 티에리)과 어린 딸 줄리엣(줄리엣 주앙)은 외롭지만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부녀는 어느 날 한 마법사로부터 훗날 줄리엣이 하늘을 나는 주홍 돛을 단 배에 납치될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 줄리엣은 이 말을 굳게 믿으면서 왕자를 기다린다. 노래에 재능과 열정을 지닌 줄리엣은 단호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해간다. 하지만 정작 그녀 앞에 나타나는 건 왕자가 아니라 공주이고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젊은 조종사 장(루이스 가렐)을 구하는 사람도 그녀이다.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의 콩트 ‘스칼렛 세일즈’(1923)가 원작이다. 그러나 마르첼로 감독은 ‘백마 탄 왕자’의 클리셰를 뒤집어 버린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우화의 형식을 취했지만 마르첼로 감독은 과감하게 원작 파괴를 단행한다. 줄리엣은 왕자가 오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강인한 캐릭터이다. 감독은, 공주를 구하러 올 왕자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왕자를 기다리는 여자도 없다는 오늘날의 사고를 주입한다. 불굴의 용기를 소유한 자는 왕자가 아닌 공주이며 극 중 남성들은 나약하게 묘사되고 왕자의 모습은 누추하다. 시대물 ‘스칼렛’에서 묘사되는 부녀 관계 역시 다분히 현대적이다. ‘마틴 에덴’이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경계에서 몰락하는 한 개인의 딜레마를 포착한 작품이었던 것에 반해 ‘스칼렛’은 덜 정치적이지만 미래를 향한 희망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사회 계층, 계급 갈등에 대한 감독의 주제의식만큼은 여전히 견고하다. 마르첼로 감독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시네아스트이다. 그의 영화 세계는 늘 계급주의를 상기하는 아카이브 콜라주로 채워져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영화 스칼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