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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종림의 순국 52주년을 추모하며

을사년 새해는 미주이민 122주년이며 광복 80주년의 해이다. 공군전우회는 독립운동가 김종림의 순국 52주년 추모행사와 신년 하례 모임을 지난 9일 열었다.   특별히 잉글우드 메모리얼파크에서의 헌화와 추모 행사는 오늘날 한국공군의 기원이 되는 북가주의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 후원을 한 미주독립운동가 김종림(1886~1973)의 삶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였다.     김종림은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동지회 대표 등을 역임한 애국지사다. 하와이 이민 후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벼농사로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1920년초에는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만나 임시정부 수립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8년에는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공립신보의 인쇄원으로 동포 사회에 소식을 전했다. 또 이듬해 국민회(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협성회 통합)의 교육업무에도 관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종림은 1942년 56세의 나이에도 캘리포니아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2남1녀 자녀중 두 아들은 미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아들 진원(제임스)은 알루샨 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둘째아들 두원(돈)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서 근무했다.   광복 후 예순의 나이에도 새크라멘토 밸리에서 벼농사를 지었고,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가 창립한 한미주식회사가 임페리얼 밸리에서 1000에이커의 벼농사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농사 감독의 일을 맡아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복리증진에 힘썼고, 본인이 세운 1세대 이민자를 위한 양로원에서 1973년 1월26일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유해는 잉글우드에 있다.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목표였다. 당시 미주한인들이 항공력을 키워 일본을 공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전을 세우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조국과 동포 사회에 희망을 주었고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김종림의 둘째 아들 두원(돈)과 친구 사이였던 도산 안창호의 막내아들 랄프 안 은 생전 인터뷰에서 “김종림은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로 윌로우스 한인비행 학교의 모든 재정을 도맡아 운영했다. 이후 사업에 실패해 어려움도 있었지만 평생 위엄을 지키고 산 분으로 기억하며 존경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립항공박물관은 지난 2020년 윌로우스 비행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개관 기념조형물을 제작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으로 교육하고 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을 가능케 전폭적 재정지원을 한 김종림의 삶에 존경을 표하며, 대한민국 공군전우회(회장 이계훈)는 그의 순국 52주년을 추모하며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심인태 / 한국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김종림 순국 미주독립운동가 김종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동지회 추모 행사

2025-01-27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안중근 의거 후 망명객들 파차파로 이주

단독범 주장에 지도자들 풀려나 한국 탈출 학생들 리버사이드로 한일합방 규탄 '망국일' 행사 가져 1918년부터 여성들도 회원 자격 독립 운동의 메카로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되었으나 이 두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회원 중 상당수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가장 먼저 생긴 곳 역시 바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이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파차파 캠프 현지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 1909년초 보도에 의하면, 당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는 샌프란시스코, 레드랜즈, 리버사이드 등에 설립되었는데 지방회 보고가 가장 활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이다. '신한민보' 1909년 4월 7일 보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차정석씨의 보고를 근거하니 본월 삼일 통상회의 결안은 왼쪽과 같다. 신입회원은 백신구씨, 평의원은 5명을 상치하기로 의정 후 김인수.이치환.백신구.김기만.김윤각씨가 선발되었다고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신한민보 1909년 4월 14일 보도에 "본월 십삼일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차정석씨의 보고를 근거하니 본월 십일 특별회의 신임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차정석, 부회장 백신구, 총무 이응호, 서기 백신구, 재무 김기만, 학무 이응호, 법무 김인수, 구제 김윤각, 대의원 이치완.이응호라 한다"고 했다. 기사에 실린 인물들은 리버사이드 거주 한인들이고 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이다. 1909년 5월에는 토론회도 조직하여 활발한 지식 교류 활동도 전개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파차파 캠프 한인들이 듣게 되었고 파차파 캠프는 또 다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렌 전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파차파 캠프는 다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인 장로 선교회 건물에서 거의 매일 밤마다 회의가 열렸고 안중근 의사를 돕기 위한 기금 모금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낙청도 마차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부인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인들은 남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불평은 했지만 남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행동에 대해 한인 그 누구도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밤 모임에서 연설과 기금 모금 행사가 열렸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파차파 캠프가 그 당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에서 혼자서 한 행동이라고 주장했고 체포된 한인 지도자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리버사이드로 망명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는데 기회가 생겨 한국을 탈출해서 리버사이드까지 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듣고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더욱 고무되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망국일' 행사를 거행했다. "집회가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은 자리에 앉았다. 여성들은 자리를 떠났고 애국가로 행사는 시작되었다. 미스터 송은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참석자들도 함께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체념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 '만세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지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 눈물 때문에 기도는 우리 아버지를 시작으로 했으나 미처 다 끝내지도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양반 출신인 임씨의 차례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만약 안 선생이 여기 있다면 기죽지 말고 머리를 들고 독립운동을 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곧 돌아올 것이고 안 도산 선생도 곧 올 것입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전낙청의 딸 엘렌 전은 안창호가 1911년에 리버사이드에 돌아온 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를 돌보고 기차를 타고 LA에 도착했다. 이혜련 여사와 필립이 LA로 마중을 나갔다. 이혜련 여사는 남편에게 "내가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300불을 벌었어요"라고 남편 안창호에게 자랑했다. 안창호는 "이건 정말 기적이오. 독립운동의 동지인 이갑이 병을 얻어 함께 미국에 왔는데 다행히 병은 치료했으나 병상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고 돈도 없는 상황이오. 대한인국민회 기금도 거의 고갈 상태인데 내가 이 돈 300불을 이갑에게 보내도 되겠소? 이 돈은 그가 더욱 필요로 하오. 나도 이제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예정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혜련 여사는 이갑에게 돈을 보내는 것에 동의를 했다. 이것은 안창호의 동지애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여성 회원들의 참여와 활동 리버사이드 지방회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여성들이 대한인국민회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는 1918년에 "대한인국민회 헌장 제 1조의 동 1, 2관에 기인하여 북미 총회 관하 미주, 멕시코 각 지방의 여성 동포로서 연령 18세 이상인 자는 모두 입회를 허락하여 권리를 같이 누리고 의무를 같이 행할 것"을 지령했다. 특히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타 지역과는 달리 여성과 자녀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 중심 공동체였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파차파 캠프의 한인 여성들은 초기에는 주로 남편들의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간접적으로 동의하는 소극적인 활동을 했으나 1918년 이후부터는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1919년 9월 18일 신한민보는 "리버사이드 지방 한인 부인들은 지난 9월 16일 일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남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였다 하니 참 장려할 만하다. 특히 리운경씨의 부인은 60 당년에 병원에서 고되게 일하여 버는 돈을 우리 사회와 국가에 다 쓴다고 하니 참 그 열성은 모범할 만하더라. 또한 그 지방에서는 각각 한인들의 집에서 간장을 만들어 쓰는 고로 일인의 장을 쓰지 않고 일반 일인의 물화를 모두 배척한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여성들이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파차파 캠프에서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2017-11-05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올해 1월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을 출간한 황태연(62·사진) 동국대 교수가 지난주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잇따라 펴냈다. 지난해엔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도 냈다. 내년엔 『한국 근대화와 정치사상』(이상 청계출판사)을 펴낼 예정이다. 황 교수는 한때 마르크시즘 철학자였다. 1974년 서울대 외교학과 입학 이후 학생운동을 하며 마르크시즘을 접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 유학해 마르크스 이론을 분석한 ‘지배와 노동’(91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랬던 그가 대한제국에 꽂힌 이유는 뭘까.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까 마르크스의 황금기가 더 이상 아닌 점도 작용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를 하다 보면 막스 베버를 하게 되고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관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동양관이 ‘동양 전제주의’로 같습니다. 이를 두고 강의 때 독일 교수와 논쟁도 벌였습니다. 동양에서 온 나는 그 테제가 맘에 들지 않았어요. 우리 역사를 봐도 신하들이 왕의 말을 따르기만 했나요? ‘전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가 얼마나 빈번했는데…. 서양에서는 좌파나 우파 모두 동양을 보는 시각이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학위를 마쳐야 했기에 그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죠.” ‘동양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의 시도는 94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화됐다. 공맹 철학을 중심으로 동양사상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의 근대사 관련 자료도 모아 나갔다. 동양과 서양의 고금(古今)을 가로지르며 문명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한 연구 결과물이 『공자와 세계』(전 5권·2011),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전 2권·2015)이다. 그리고 동양 속에 위치한 한국의 특수성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 대한제국 관련 저서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Q :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고 조선시대와의 차이점은 뭔가요. A : “대한제국 연구자에게 공히 인정되는 바는 조선은 전(前)근대 국가이고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라는 것입니다. 근대국가는 신분이 철폐된 사회이고 대의제가 실시된 사회죠. 서얼제도와 노비상속제는 고종 때 철폐됩니다.” Q : 대한제국에 대의제가 있었나요. A : “중추원이 대의제 기능을 했죠. 이 중추원이 일본 침략으로 더 발전을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르는 게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중추원에는 과거 상놈들도 많이 들어갔어요. 황국협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다 보부상 출신입니다. 당시 주요 정치세력인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세력이 중추원의 주축이었죠. 50명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정도, 황국협회 계열이 28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나이가 들어 대우해야 할 인물들이었습니다. 중추원이 고종의 제안으로 설립되지만 고종의 말을 들을 근왕파는 홍종우 등 서너 명뿐이었죠. 서양 말로 하면 ‘왕당파’는 줄인 것입니다.” Q :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A : “독립협회는 처음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로 출발하는데 고종의 조직이었습니다. ‘독립협회’란 명칭과 현판 모두 고종과 왕세자가 내려준 겁니다. 건립 자금의 17%는 고종과 세자가 내려준 내탕금이었고, 범국민적 모금운동을 하게 한 것도 고종이었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종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출발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1898년 7월부터 성격이 변질됩니다.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에서 자기 세력인 이규완·황철·이정길 등을 한국으로 잠입시켜 왜인 거주 지역에 은거하게 하면서 독립협회를 배후 조종해 반(反)대한제국, 반(反)고종 변란단체로 바꿉니다. 그때부터 반러·친일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중심 의제가 됩니다. 이 정치결사들은 1898년 11월부터 1899년 1월까지는 암살과 폭란을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변질돼 대한제국에 대한 변란세력으로 전락합니다.” Q : 고종의 리더십 문제는 없나요. A : “폭력으로 대하는 독립협회에 고종은 끝까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당해 자멸합니다. 고종이 독립협회를 탄압한 것이 아닙니다. 황국신문·제국신문·매일신문 등 거의 모든 언론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Q : 독립협회의 일반적 이미지와 다른데요. A : “독립협회를 잘 알지 못하면서 띄우는 이들이 있고, 혹은 친일적 실체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존에 독립협회를 애국적 단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의 친일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오고 서재필·윤효정 등이 일제 밀정 역할을 한 사료가 나타나도 그런 사료들을 무시하고 감춰 버리기까지 합니다. 사료로 본 독립협회의 모습은 교과서에 나온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보면 됩니다.” Q :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뒤집어졌나요. A : “해방 후 최초 연구자들이 잘못한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로 이어지는 프레임은 교과서에서 어떻게 설명되나요? 개화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다고 하죠. 이것이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입니다. 우리 근대사를 기술하는 기본 프레임이죠. 해방 이후 많은 사가들이 식민사관 극복을 외쳤지만 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부지불식간에 ‘은근한’ 친일적 기술로 끝났습니다. ‘노골적’ 친일은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Q : 한국 근대사를 직접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충격적 경험이 있다면. A : “말씀드렸듯이 우선 사료로 보는 한국사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운 한국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시작을 대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는데 대개 고종이 동학을 탄압한 것으로 알고 있죠. 그런데 실제 사료를 보면 그렇지 않아요. 동학의 1차 봉기는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삼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곧 이어 2차 봉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고종의 밀명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 밀지가 남아 있어요. 일본군이 그걸 빼앗아 일본공사관 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를 무시하고, 또 이 밀지의 누설을 막으라고 당부하는 전봉준의 친필 지시문도 무시해 왔습니다. 또 서재필의 일제 밀정 기록이 일본공사관 공식 기록에 나오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서재필을 애국지사로 만들어 놨죠. 윤효정도 일제 밀정임을 정교가 『대한계년사』에 정확히 기록해 놨는데 오히려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움직였다는 점도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7-08-12

'안창호는 공산주의자' 모함 투서 최초 발견

도산 안창호 선생을 공산주의자(볼셰비스트)로 모함한 투서가 미 이민국에 접수된 사실이 최초로 확인됐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가 북가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영문 투서 원본을 발견했다. 안창호 선생의 세 번째 미국 체류와 추방 과정을 확인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9일 장태한 교수에 따르면 1924년 12월 15일 '콩 왕'과 '찰스 홍 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투서가 노동부 산하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 교수는 최초의 한인타운인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집단 이주한 한인들의 입국 경로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북가주 샌브루노(San Bruno)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우연히 이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샌타바버라 시 알링턴호텔 전용 편지지에 총 4장의 영문으로 작성된 이 투서에는 "볼셰비스트(사회주의자) 지도자가 (하와이) 호놀룰루를 거쳐 곧 도착할 예정이니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은 창호 안(Bolshevist leader your office look out…his coming via Honolulu…The person name is Chang Ho Ahn)"이라고 기재돼 있다. 투서에는 이어 "그는 미국에 여러 해 살았으며 그의 가족은 LA에 거주하고 있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6년 체류하면서 볼셰비스트 정부 관계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가 지금 미국으로 오고 있다(connected with Bolshevist Government…he is coming to U.S now)"라고 이민국 관리에게 경고하는 내용이 쓰여있다. 말미에 "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특별히 조사하고 그(안창호)를 중국으로 조속히 추방하길 희망한다(best way to sending back to China quite as possible)"라는 문구도 들어있다. 투서에 연명 서명한 '콩 왕(Kong Wong)'과 '찰스 홍 이(Charles Hong Lee)'라는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장 교수는 이민국 자료와 당시 관련 사료를 뒤졌지만 이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당시 대한인국민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계 추종 세력이 투서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장 교수는 추정했다. 이 투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접수됐지만 이민국 담당자에게는 미처 전달되지 않아 도산 선생은 당시 미국으로 입국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5년 6월 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은 시카고 노동부 산하 이민국에서 J.B 브래키 이민국 검사관으로부터 미국 입국 경위와 체류 행적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장 교수는 당시 검사관과 안창호 선생의 직접 심문 기록을 전문 공개했다. 검사관은 심문에서 안창호 선생에게 '소련 정부 또는 러시아에 관심이 있는가' '강연 내용 중에 미국 정부가 과격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나' 등의 심문 문항을 제시하며 캐물었다. 이 점에 비춰 도산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투서가 이민국에 접수된 이후 안창호 선생에 대한 심문 파일이 작성됐고 그에 따라 직접 심문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7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엔젤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 선생에게 8개월 체류 연장을 허가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미 이민국은 안창호 선생의 체류 연장을 허락하면서도 볼셰비스트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고 장 교수는 주장했다. 1926년 2월 6일 엔젤섬 이민국 문서에는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혀 있다. 또 1926년 2월 23일 이민국 문서에는 "중국인 도산 안창호가 S.S.소노마에 승선한 것을 사진과 함께 확인했다"고 돼 있다. 이민국이 사실상 도산의 강제 추방을 마지막 순간까지 확인했음을 방증하는 자료다. 안창호 선생은 결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로 추방됐다. 도산은 하와이에서 6시간 체류하며 감리교회에서 150명의 한인동포를 상대로 연설하고 바로 호주로 떠났다. 이후 안창호 선생은 중국으로 돌아간 뒤 1932년 가족이 있는 미국을 다시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거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후 풀려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된 뒤 1937년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3월 타계했다. 이번 투서를 포함한 사료 발견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 이민국에 접수된 투서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을 받고 요주의 대상으로 조사를 받다가 강제 추방된 과정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찾아낸 것이라고 장 교수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안창호 선생의 세 번째 미국 체류 행적(1924~1926년)에 대해서는 방문기간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미주 교민들을 규합한 정도로만 기록돼 왔으나 이번 사료 발견에 따라 미 이민국의 조사와 체류연장 서류 처리, 추방 조처 등의 구체적 행적이 드러난 것으로 평가된다.

2017-08-09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

미주에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된지 올 해로 꼭 30년째다. 윤경학 회장이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미주 한인들에게도 심어주겠다며 지난 1987년 LA에서 기념사업회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 됐다. 윤경학 회장이 2012년 작고하고 지금은 딸인 윤자성 회장이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대를 이은 안중근 의사 사랑이다. 매년 안 의사 순국일이면 북가주에서 추모식이 열리는 건 그래도 알려진 일이지만, 윤자성 회장이 매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홀홀단신 행사를 개최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윤 회장의 안중근 사랑은 친조부인 애국지사 의암 윤능효(사진) 선생으로부터 시작됐다. 윤능효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의거 자금을 지원했던 애국지사다. 1882년 함흥남도 함흥 출생인 윤능효 선생은 1904년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된뒤 탈옥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연락책으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대동공보 이강 주필과 함께 안중근 의사를 도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일을 도왔다. 당시 의거 자금 2백원(현재가치 약 2억원)을 지원했다. 윤능효 선생의 애국활동은 생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 아들인 윤경학 회장의 노력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19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는 윤경학 회장은 한국은 물론 미국으로 건너와서도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과 평화사상을 한인들에게 심어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윤경학 회장은 1987년 LA에서 미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를 설립했고 매년 안 의사 순국일과 거사일에 맞춰 기념식을 열어왔다. 선뜻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20년간 사비를 털어가며 행사를 개최했다. 윤경학 회장이 작고하기 4년 전부터는 서니베일에 거주하는 딸 윤자성 회장이 기념사업회를 이어받았다. 윤자성 회장은 기념사업회를 이어받은 뒤에는 매년 추모행사를 여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한국학교도 설립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서만 자라나는 한인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년 전부터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도 열고 있다. 올해도 안중근 의사의 역사관, 애국정신, 평화사상 등을 주제로 지난 25일 대회가 열렸다. 오는 4일에는 107주년 안중근 의사 순국 추모식도 쿠퍼티노 퀸란 센터(10185 N Stelling Rd, Cupertino)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열린다. 윤자성 회장은 “매년 행사를 준비하며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나라 잃고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할아버지와 목숨을 던진 안의사를 생각하면 내가 하는 일은 100분의 1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매년 행사를 개최할 때마다 한 분이라도 더 찾아오면 그만큼 기쁘고 보람있는 순간은 없다”며 안 의사 추모식에 많은 한인들의 참석을 당부했다. 윤자성 회장은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바쳐 의거를 했던 것은 지금 분열된 한민족을 원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라며 “어서 빨리 통일이 돼 하나 된 대한민국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소망을 전하기도 했다. 최정현 기자

2017-02-28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 되새겼다

북가주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자긍심은 물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세계평화사상을 심어주기 위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미주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윤자성)가 주최로 열린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25일 샌호세 임마누엘 장로교회에서 13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윤자성 회장은 대회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오늘 대회에 참석한 학생들은 원고를 준비하고 연습하며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이 배웠을 것으로 안다”며 “안 의사가 보여줬던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 그리고 평화사상은 여러분들이 이국땅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고 또한 한인 커뮤니티와 대한민국의 발전,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희망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이날 말하기 대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삶을 통해 자신이 배우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이찬서(다솜한국학교 4학년) 군이 영예의 대상인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군은 안중근 의사가 강조한 동양의 평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안 의사의 희생정신을 통한 나라사랑의 교훈과 다짐을 나누고 싶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이외에도 우소라(모퉁이돌한국학교 1학년) 학생이 애국상을, 홍성범(몬트레이한국학교 5학년), 김연준(트라이밸리한국학교 5학년) 학생이 민족상을 각각 수상했다. 장려상에는 조유리, 조유빈, 김예원, 이시유 학생이 선정됐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최철순 SF교육원장은 심사평을 통해 “참가 학생 모두가 안중근 의사의 생애, 역사관 및 애국정신, 평화사상 등을 호소력과 설득력 있게 잘 표현해 말하기 대회라기보다는 역사공부의 장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모든 학생들이 표현력은 물론 발표 태도도 자연스럽고 자신감에 넘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평화상, 애국상, 민족상 등 수상자 4명은 오는 3월 4일 쿠퍼니토 퀸란 센터에서 열리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에서 다시 한 번 발표를 하게 된다. 최정현 기자

2017-02-27

도산 선생 업적 통해 정체성 조명

북가주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과 업적을 조명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한인 단체인 ‘북가주 공감’이 도산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를 초청해 개최한 강연회를 통해서다. 이날 강연회는 지역 한인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은 가족 참가자들이 많았다. 필립 커디씨는 이날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정진사상과 교육개조를 주장한 사회사상가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이라며 “특히 안창호 선생은 교육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등 안창호 선생의 4대 정신을 배양하도록 했다. 흥사단을 설립한 것도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커디씨는 “미국에서도 도산 선생의 뜻을 기려 LA에 우체국과 인터체인지에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명명했다”며 “절반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앞으로 그의 사상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커디씨는 그동안 보관해온 안창호 선생과 관련된 사진들을 하나 하나 보여주며 미주 한인들의 역사를 설명했고, 특히 샌프란시스코 오크 스트리트에서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와,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 등 북가주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들도 자세히 소개했다. 또 안창호 선생의 큰 아들이자 할리우드 배우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던 필립 안은 물론 자신의 어머니인 안수산 여사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필립 커디씨는 또, 한국정부가 안창호 선생과 관련돼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커디씨는 “이승만 정권이 남한에 들어서며 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활동을 축소 왜곡했다”며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미주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공개된 국정교과서에서도 관련 내용이 잘못 기재되는 등 한국정부는 이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필립 커디씨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서 한국으로 떠나며 가족들에게 좋은 미국 시민이 되라,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뿌리는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며 “이 말은 우리 가족뿐만이 아닌 미국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도산의 사상을 연구하며 살 것”이라고 밝혔다.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와 아일랜드계 이민자인 프랭클린 커디씨 사이에서 태어난 필립 커디씨는 LA 미주한인 역사박물관 사무총장,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의 독립기념관에서 도산 선생 연구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학교 등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도산의 업적을 기리는 디지털 도서관 구축 활동도 펼치고 있다. 최정현 기자

2017-02-06

도산 안창호 선생 건립 최초 한인촌 사적지 지정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4년 세운 리버사이드 한인촌 '파차파 캠프'가 사적지(Historic Site)로 지정됐다. 리버사이드 시의회 산하 문화위원회는 6일 시의회 회의실에서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리버사이드 시는 남가주 최초 한인촌인 파차파 캠프 건립 장소에서 내년 3월23일 사적지 지정 기념식을 열고 한인 이민역사를 기념할 예정이다. 파차파 캠프는 1904년 도산 선생이 리버사이드다운타운에 세운 한인촌이다. 당시 오렌지농장에서 인부로 일하던 한인 10여 가정의 50여 가족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당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지역은 1880년대 중국계 철도 노동자 이주를 시작으로 한인들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곳에서 도산 선생은 한인 노동자와 함께 근면성실을 실천하고 조국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이날 시의회 회의실에서 도산 선생의 막내 아들 랄프 안(91)과 미주도산안창호 기념사업회 홍명기 총회장이 사적지 지정을 지켜봤다. 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은 "도산 선생은 리버사이드 한인촌에서 신민회와 흥사단 활동 등 미주 독립운동 초석을 다졌다"라며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은 미주 한인사회의 자랑스러운 날"이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

2016-12-06

도산 우체국, 주상복합 호텔로 바뀐다

LA한인타운의 상징 중 하나인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10층 주상복합건물로 바뀌게 생겼다. 로컬 부동산 개발업체 어반 커먼스(Urban Commons)는 6가와 하버드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3751 W. 6th St·사진) 자리에 주거용 유닛 44개와 객실 200개를 갖춘 10층 높이 주상복합건물로 개발하겠다는 서류를 LA시 개발국에 최근 접수했다. 이 개발안에 따르면, 44유닛 아파트는 1·2베드룸으로 구성되며 1층과 2층에는 1만8000스퀘어피트 크기의 상가도 들어선다. 또 지하 3층 규모의 주차장도 지어진다. 하지만 이 계획은 현존하는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신축하는 프로젝트라서 승인될 경우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현 건물 소유주는 UCCH LLC로 올해 5월 한인 소유주로부터 14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우체국 건물의 면적은 1만6854스퀘어피트이며 대지는 3만4589스퀘어피트 규모로 현재 연방 우정국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2017년 8월이 지나면 우정국과의 임대계약도 종료되는 데다 조닝도 상업용인 C2여서 인수 업체가 주상복합건물을 개발할 것으로 예상해왔다. 하지만 현 소유주가 우체국 건물을 철거하고 상업용 건물을 개발하려면 우정국이 장소 이전에 대해 동의해야 하고 우체국 폐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과 시정부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재개발 추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진성철 기자

2016-11-24

인랜드한인회, 도산 '온라인 홍보' 지원한다

인랜드한인회(회장 데이비드 곽)는 한국 독도를 알리고 동해 표기에 앞장서 온 민간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단장 박기태)와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어와 영어 동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유튜브를 통해 홍보하는 데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인랜드한인회에 따르면 한인회측은 리버사이드를 방문한 반크 21세기 신헤이그 LA특사팀과 만나 이러한 내용에 대해 협의했다. 또 미국 교과서는 물론, 세계지도와 웹사이트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됐거나 한국의 역사가 왜곡된 내용을 공동으로 조사 및 발굴하여 시정 노력을 하는 등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미국의 한인 차세대들과 반크 회원들이 함께 한국 홍보 캠페인을 공동으로 전개한다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이날 업무협력 간담회에 함께 했던 미주한인총연한인총연합회측도 10월에 열리는 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전세계 한인회장들을 대상으로 독도와 한국을 홍보하는 세계지도, 한국지도를 반크에서 제공받아 알리는 캠페인 추진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반크 21세기 신헤이그 LA 특사팀은 지난달 LA에 도착한 후 리버사이드시에 있느 도산 선생의 동상을 참배했으며, 마틴 루터킹, 간디 동상과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이 리버사이드시에 설치된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황인국 기자

2016-08-31

[추모의 글] 도산의 딸 안수라 여사를 추모하며

도산 안창호의 둘째 딸로 태어나 LA에서 한 세기를 자랑스럽게 살아온 안수라 여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9세를 일기로 지난 6월 18일 별세, 오는 7월 10일 장례식 후 그렇게 존경하던 큰 오빠 안필립(영화배우·도산의 장남) 곁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안수라 여사는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 사이에 3남 2녀 중 둘째 딸로 1917년 다운타운 흥사단 단소에서 출생했다. 아름다움에 조용한 성품을 지녔고, USC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가 순국한 후 어려서부터 집안의 경제문제를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효녀로 가장 가깝게 모셨다. 무엇보다도 안수라 여사는 1954년 오빠와 언니, 동생과 마음을 모아 파노라마시에 중국식당 문게이트(Moongate)를 오픈, 40년 동안 성공적으로 경영을 했다. 어머니 이혜련 여사의 생일 때마다 흥사단, 국민회, 여자애국단 단우를 초청해서 자주 잔치를 베푼 곳이 바로 문게이트였다. 한국의 흥사단 임원들이 LA를 방문할 때마다 꼭 찾았고, 파노라마시의 최고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수라 여사는 미국 방송인과 결혼, 행복한 가정을 꾸몄고, 무엇보다도 5남매와의 우의를 가장 중요시했다. 항상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안수라 여사는 말수가 적었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따뜻한 마음에다 늘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 했다. 도산 안창호가 빙그레 웃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항상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인 딸이 바로 안수라 여사였다. 한인사회 주요 행사 때에는 막내동생 안필영씨와 자리를 함께 했다. 아버지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한인국민회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 옛 친지들을 반갑게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2014년에는 어머니가 평생 사용하던 재봉틀과 고이 간직해온 아버지의 서신, 책, 사진 등을 한국 도산기념사업회에 영구 기증했다. 안수라 여사는 천수를 누리고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도산의 딸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삶은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버지 도산이 돌아가신 후 가정의 경제를 책임졌던 자랑스러운 둘째 딸. 언제나 빙그레 웃던 안수라 여사를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201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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