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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도깨비 나라

버지니아주 소도시 ‘Falls Church’ 가는 길에 폭우가 왕창 쏟아진다. 차들이 꽉 막히고 윈드쉴드 와이퍼가 끽끽 요동치고 짙은 안개가 장대비에 합세한다. 날씨가 도깨비 같다.   2025년 재미 서울의대 컨벤션 길. 내가 맡은 강의에 ‘귀신(鬼神)’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귀신 鬼는 그렇다 치더라도, ‘귀신 神’은 좀 난처하다. ‘하느님’을 귀신이라 부르는 것은 불경스럽다. 신을 도깨비라 할 수도 없는 노릇.   민속설화에 「혹부리영감」, 「도깨비방망이」가 있지. 전자는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는 관용어가 나올 지경으로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스토리.   도깨비들이 사는 집에 무단 투숙한 혹부리영감은 자기의 구성진 노래가 목에 달린 혹에서 나온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영감의 혹을 떼어주고 방망이의 요술로 재운(財運)도 준다. 이 소문을 듣고 다른 혹부리영감이 똑같은 수법을 시도했지만 이미 사태를 파악한 도깨비들은 혹을 떼어 주기는커녕 전에 입수한 혹까지 붙여준다.   「도깨비방망이」는 혹을 거론하지 않지. 주인공은 육체적으로 건전할뿐더러 정신적으로 이기성(利己性)보다 애타성(愛他性)이 돈독한 나무꾼. 나무를 하는 중, 첫 번째로 굴러온 개암 열매를 아버지에게, 두 번째 개암은 어머니에게 드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것을 자기 몫이라며 주워 넣는다.   그는 날이 저물어 도깨비들이 외출하고 없는 집에 들어가 자려 한다. 집에 돌아온 그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요술을 부리는 광경을 숨어 본다. 그가 개암을 딱! 하고 깨물자 그 소리에 놀라 방망이를 놓고 도망치는 도깨비들. 나무꾼은 도깨비방망이를 하나 얻어 곧 부유해진다.   다른 나무꾼에게도 개암 열매가 굴러온다. 그는 첫 개암을 자기 것, 두 번째를 자기 아내에게, 세 번째를 부모 몫으로 할당한다. 각본대로 개암을 딱! 깨물자 도깨비들은 방망이로 그를 실컷 두들겨 팬다.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하지 않는 도깨비들.   어릴 적 부르던 ‘도깨비 나라’가 떠오른다. -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들기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와라 뚝딱/ 은 나와라와라 뚝딱. - 한국이 도깨비 나라라는 생각, 이 순간에도 많은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 숱한 나무꾼들이 도깨비방망이를 차용해서 재운(財運)을 타기도 하지만, 이기성과 애타성이얽히고설킨 대인관계의 우선순위가 비틀어진 흉내쟁이 나무꾼들이 흠씬 두들겨 맞는 시나리오를 예감한다.   영어로 도깨비는 ‘goblin’이라 하지. 고대 영어로 ‘화내다, 짜증 내다’라는 뜻이었단다. ‘goblin’은 방망이 대신 초승달 모양의 고대 무기로서, 길이 2m 정도의 ‘scimitar 언월도, 偃月刀’를 들고 다닌다는 기록.   내 첫 시집 『맨해튼 유랑극단』(2001)에 「도깨비 하나」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 // 내가 좋아하는 친구 하나 있더니/ 사실은 이 친구가 도깨비다/ 낮에 자고 밤에 찾아온다/ 초승달 등 넘어 내 옆에 온다/ …(중략)… 잔뜩 눈알만 부라리다가/ 이윽고 키득키득 웃어대는 도깨비 자식/ 그때 밤하늘 별무리 금싸라기가/ 온통 내 눈까풀 위에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아도 그냥 뜬 채로 였다//   도깨비는 참 외로운 존재로 보인다. 도깨비는 내 친구. 서구적 도깨비보다 우리의 도깨비가 마음에 든다니까.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 욕심으로 혹부리영감의 거짓말에 한 번쯤 슬쩍 넘어가는 우리의 얼떨떨한 도깨비들이.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도깨비 나라 도깨비가 방망이 도깨비 나라 도깨비가 마음

2025-04-15

백발의 영화!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농사나 어업에 관한 경험적 지식이 많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노인들이 도서관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일본 후쿠시마 앞 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나 바다에 인접한 수많은 마을들이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중 한 마을은 노인 한 사람이 고집을 세워 마지못해 쌓은 방파제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노인은 100년도 훨씬 전에 일어났던 쓰나미로 인해 바닷물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던 높이를 가리키면서 방파제는 그 이상 쌓아야 한다고 우겼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 마을 사람들은 한 노인의 고집 때문에 쓰나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예전부터 나는 노인이라는 단어에서 종종 현자(賢者)의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필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 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 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서 있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예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듬다가 치기를 잘 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위의 수필을 읽다보면 노인이라는 단어는 연륜에서 오는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노인’이라는 말을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노인이라는 단어보다는 '어르신’ 또는 '시니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인에 대한 호칭이 대체되었지만 노인은 '비적응’과 '돌봄의 대상’이라는 의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버린다!’는 식 접근이 개인과 사회의 잠재력, 즉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다치바나다카시’는 지적했습니다. 나는 불필요한 것과 잉여, 비축 속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문화와 역사가 꽃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노인은 영화를 누릴 것입니다! 목회칼럼 / 에콰도르 임동섭 선교사백발 영화 노인장 외고집 방망이 하나 동대문 맞은편

2024-05-1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산이 막혀 앞을 볼 수 없었다 / 버티고 누운 산이 답답했다 / “너 눈을 감았잖아” / 보이지 않는 건 영원히 볼 수 없는 걸까? / 마음의 눈을 떠 보라 했다 / 마음의 창을 여니 깊고 푸른 산// 하늘은 내게 쉬어가라 했다 / 바람이 불고 있었고, 새소리가 들렸고 / 흐르는 땀을 훔치고 귀를 여니 물소리가 맑았다 / 들꽃이 피어 있었고, 나비의 눈이 애잔했고 / 정상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보였다 / 하늘은 이리로 오라 손짓했다 // 산이 막혀 갈 수가 없다는 말은 공허하다 / 오르지 못할 대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 한마디 말, 손짓 하나 만으로 충분한 것을 / 나에게서 벗어나는 걸 어처구니 없어했던 시간 / 다시 꽃이 나비를 부르지 않아도 / 비가 폭포가 되어 부서지지 않아도 // 코스타리카 기암 절벽 아래서 / 눈을 뜬 채로 마음을 열었다 / 두 개의 풍경과 두 개의 시간이 만든 얼굴 / 하늘은 내게 스승이 되었다     살다 보면 앞뒤좌우가 막혀 진퇴양난일 때가 종종 생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괴로워한다. 그때는 누구의 조언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아마 희망을 찾아가는 길을 그린 지도를 보여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우리의 머리 속에는 안 된다는 결론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길이 없는 것일까. 이렇게 머리를 움켜 쥐고 고통만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상의 선택인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아무 쓸모 없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우둔한 태도 임이 분명하다.     우리 앞에 산 같은 거대한 몸집을 한 장애물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쳐다보는 순간 기가 질리고 말 것이다. 그 장애물 앞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얼어 붙어 버리든지, 뒤돌아 줄행랑을 칠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옛 말이 있다. 장애물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는가? 그 장애물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정면승부란 말이 있다. 부딪쳐 보지 않으면 해결은 없다. 머리를 감싸 쥔 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그 어려움은 오래 더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혹자는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선택하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폐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미로 같지만 분명 출구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길을 찿아보기로 하자.   성경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고 골리앗은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한 구척 장신의 장군이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싸움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돌팔매로 사자를 때려잡았던 다윗의 눈에 골리앗은 한 마리의 짐승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윗은 골리앗의 이마에 단 한 번의 돌팔매로 그를 꺼꾸러트렸다. 골리앗은 창검을 사용하기도 전에 다윗이 겨냥한 작은 돌멩이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풍경을 대하는 태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거침돌을 디딤돌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전환으로 가능할 수 있단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에 입력된 세상적 가치관 그 고정 관념을 제거해야 되지 않을까?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 우리는 한 발자국도 행복의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들, 언덕 위에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들을 보라. 누가 그들을 키우고 다듬고 있는지?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지 않아도 봄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단풍 질 것이다. 누가 이 사실을 근심으로 두려움으로 받아 드리겠는가? 내 안에 자라고 있는 두려움의 존재도, 살아가며 겪어야 할 모든 어려움도 내가 눈을 감아버리고 직면하지 않으려 했기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두려움의 안으로 들어가보자. 생각만큼 두려움의 속은 어둡지 않다. 그리고 두려움에 갇혀 있는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자. 해결의 방법은 어디서 뚝 떨어진 요술 방망이가 아니고, 요술 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나에게 허락된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며 가꾸고 다듬은 바로 나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를 만드신 당신 안에서 나를 발견한 순간 이미 거침돌은 디딤돌로 바꾸어져 있을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트린 그 자신감은 바로 나를 나답게 만드신 당신 안에서 의심 없이 적용되기 때문인 것이다.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 보는 것이다. (화가, 시인)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대상 장애물 태도 우리 요술 방망이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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