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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선열들 누운 곳도 몰라서야

한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LA지역 독립유공자 상당수의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본지는 지난달 28일, 3일자로 LA인근 묘지에 방치된 독립유공자 묘소 실태를 집중 보도했다.   한인역사박물관 민병용 관장에 따르면 한국 보훈부가 발표한 미주 지역 독립유공자는 436명이다. 이 가운데 남가주 지역에 안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선열 160여 명 가운데 실제 묘지가 확인된 분은 60여 명에 불과하다. 조국이 독립유공자로 선정했지만 누운 곳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선열이 100여 명이나 된다는 뜻이다.   이유는 묘소 소재지를 알고 있는 유공자들의 후손을 찾기가 어렵고,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단체도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면밀한 실태 조사와 재정 지원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가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보훈부가 미주지역에 직접 나와 조사한 것은 7년 전인 지난 2018년이 마지막이다. 재정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독립유공자 묘지를 참배하고 관리하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지원금은 연간 4만5000달러가 전부다. 매달 3750달러꼴인데 렌트비와 관리비를 내기도 빠듯하다.   지난해 8월 출간된 ‘대한인국민회 100년사(민병용 지음)’에 따르면 미주 한인사회는 조국 광복사업을 위해 40년간 약 300만 달러를 지원했다. 1919년 한해 동안에만 하와이 한인들이 3만5034달러를 냈다. 현재 가치로는 65만 달러의 거액이다.   또 1941년부터 1945년까지 4년간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4만6000달러를 보냈다. 지금의 82만 달러와 맞먹는 금액이다. 당시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26일 일하고 월급 18달러를 받았다. 그 어려운 살림에 ‘21례금’이라고 해서 개인 소득의 20분의 1을 기부했다. 그 애국심의 흔적을 찾고 보존하기 위한 정부 지원금이 4만5000 달러라니 납득하기 어렵다.   추가 재정 확보를 위해 대한인국민회도 적극 나서야 한다. 지난 2021년 1월 한국 정부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국내외 산재한 유공자 묘지에 대한 체계적 관리를 약속한 바 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묘지 벌초 및 관리 비용으로 1기당 20만 원, 훼손 묘지 비석 단장은 1기당 25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묘지 관리는 대한인국민회에만 맡기기 어렵다. 이사진의 고령화로 2세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한인 비영리단체들이 팔 걷고 나선다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청소년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3.1절이나 광복절 등 기념일마다 묘역 참배와 청소를 맡긴다면 뿌리 교육을 겸한 봉사활동이 될 수 있다.   애국 선열의 묘역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나침반이다. 다시는 나라를 잃는 아픔을 겪지 않겠다는 다짐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한국 정부와 한인 사회가 함께 나서야 할 때다. 사설 선열 la지역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묘지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2025-03-05

사라지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1세 고령화, 차세대 무관심

미주 지역 독립유공자들의 역사가 잊히고 있다.   한인 역사 단체 관계자들의 노령화, 후손들의 사망 및 소재 파악의 어려움, 역사 연구에 대한 무관심 등이 맞물리면서 향후 독립유공자들의 묘소가 방치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한인역사박물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으로 파악된 LA 인근 주요 묘지에 묻혀 있는 독립유공자는 총 58명이다.   묘지별로 보면 ▶LA 로즈데일묘지(31명) ▶할리우드 포리스트론(17명) ▶잉글우드묘지(3명) ▶위티어 로즈힐 메모리얼파크(3명) ▶랜초팔로스버디스 그린힐스 메모리얼파크(1명) ▶글렌데일 포리스트론(1명) ▶LA 에버그린묘지(1명) ▶리버사이드 국립묘지(1명) 등에 독립유공자들이 묻혀 있다. 〈표 참조〉   일례로 그린힐스 메모리얼파크의 이범영(1982년 별세) 선생은 3·1운동 당시 대한인국민회 다뉴바 지방회 회장으로서 독립선언 지지문을 발표하고 독립기금을 모아 이승만 박사의 구미위원부로 보낸 인물이다.   문제는 한국 국가보훈부와 한인 단체들이 확인한 독립유공자 묘소보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묘소가 훨씬 많다는 점이다.   보훈부에 따르면 미주 지역 독립유공자(멕시코·쿠바 포함)는 총 434명이다. 지난 27일 2명의 독립유공자가 더 추가된 것이 최근 통계다.   한인역사박물관 민병용 관장은 “독립유공자가 수백 명에 이르지만 묘소가 파악된 경우는 극히 적다”고 말했다. 민 관장은 “중가주 리들리를 비롯한 가주 지역 외에도 전국 곳곳 어딘가에 묘소가 있겠지만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파악을 하려면 독립유공자 후손들과도 연락이 돼야 하는데 이제는 그들도 3~4대에 이르면서 소재를 찾는 게 어려워졌고 이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단체도 사실상 전무하다”고 말했다.   애국 관련 단체에 한인 2세 등 차세대의 참여가 저조한 것도 문제다. 이는 곧 1세대 한인들의 미주 지역 독립운동 역사와 묘소 관리의 부실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현재 LA 인근 독립유공자 묘소는 일부 후손들 외에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측이 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재단의 클라라 원 이사장은 “현재 3·1절, 광복절 등이 되면 재단 측이 묘소도 방문하고 종종 잡초 제거도 하고 있다”며 “문제는 지금 재단 이사들도 대부분 1세대인데다, 2세들의 참여가 거의 없어 앞으로 독립유공자에 대한 묘소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전했다. UC 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는 “도산기념사업회의 경우 올해 주요 사업으로 차세대 교육에 중점을 두겠다고 발표했다”며 “역사적 사실을 차세대에게 알리는 일은 지금 너무나 시급한 문제”라고 전했다.   애국 단체들의 노령화는 활동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일례로 지난 2002년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구성돼 로즈데일 묘지에서 애국선열 추모제가 개최됐었다. 이후 2007년까지 매년 추모제가 이어지다가 단체 관계자들의 고령화와 차세대 및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참여가 저조해 중단됐다.   민 관장은 “그러다가 지난 2016년부터 대한인국민회가 간간이 참배 행사를 다시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이어갈 후임 단체 등을 찾는 게 쉽지 않다”며 “소수의 초기 이민자 후손 모임이 있긴 하지만 회원이 상당히 줄었고, 한인 2~3세들은 관심이 너무 없기 때문에 (독립유공자 묘소에 대한 관리 및 추모 행사가) 이대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미주 지역 독립유공자 묘소 파악, 기록 보존, 추모 사업 등을 위해 체계적인 조사와 지원이 시급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단체 관계자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무관심은 더 넓은 의미에서 한인 이민 역사가 점점 잊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1세대가 저무는 과정에서 단체들이 지금이라도 힘을 모아 독립유공자 등 이민 역사를 계속해서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해 나갈 수 있는 2~3세 학자들을 키워낼 수 있도록 한인 사회 차원에서 지원 기금 같은 걸 만들 필요도 있다”고 전했다.   발걸음이 끊기면 묘소엔 잡초가 무성해진다. 독립 유공자들의 족적도 지금 그렇게 덮이고 있다.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유공자 독립유공자 장열 미주중앙일보 LA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로즈데일묘지 국가보훈부 한인역사박물관 민병용

2025-03-02

LA 한복판에서 발견된 독립운동가의 흔적… 묻힌 영웅들

독립유공자인 박혜경 선생이 LA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한 달 전 일이다. 1949년에 영면한 그를 한국 보훈부가 로즈데일 묘지에서 찾아냈다.   한국 정부가 지난 2020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한 박 선생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20년대에 가주로 이민을 왔다. 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밸리 지역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박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서기와 재무위원으로 일했다. 보훈부에 따르면 박 선생은 독립자금 모금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박 선생처럼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 많은 유공자의 마지막 흔적을 정부, 민간 모두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보훈부 통계자료(2024년 기준)에 따르면 미주 지역에서 독립활동을 한 서훈 유공자 중 아직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은 수는 243명에 달한다.   1880년대에 태어나 독립 활동을 하다 1970~1980년대에 세상을 떠난 유공 열사들의 수도 100여 명이 넘는다. 대부분은 1990년대 이후 업적이 확인돼 포상이 있었지만, 이들의 비석이 어디에 외롭게 서 있는지는 보훈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날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민병용 상임고문은 “한인사회가 가장 가까이 있는 LA 지역 인근에 80~90여 분이 안장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선열의 묘소를 찾는 것은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며 커뮤니티 차원의 노력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로즈데일, 포레스트론 할리우드힐스(위 사진 4명 포함), 잉글우드 공원묘지에서만 확인된 유공자는 현재까지 60여 명이다. 재단 측은 훨씬 더 많은 선열이 남가주와 북가주 인근에서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클라라 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은 “현재 781명의 유공자 후손의 연락처를 확보하고 있는데 응답을 받은 경우는 30%에도 못 미치는 상태”라며 “선열들이 영면하고 3~4대에 걸쳐 시간이 흐르다 보니 선조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현실을 전했다.   광복회 미서남부지회에서 자료 담당을 맡고 있는 손재호 부회장은 “후손 찾기 보도가 나가면서 문의가 늘고 있지만 결국 보훈부 자료 조사와 최종 결정에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며 “일반적으로 명확한 사료도 부족하고, 모든 게 확인돼 유공자로 확정되는 경우는 전체 신청의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왜 이런 의미 있는 일이 잘 추진되지 않았을까. 일단 재정적인 장벽이 크다.   광복회 미서남부지회와 대한인국민회 등 단체들은 적은 지원금으로 살림을 해야 한다. 행사들에 인력과 시간을 할애하고 나면 정작 유공자들과 후손들을 찾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재단은 현재 한국 보훈부로부터 연 4만5000달러의 지원을 받고 있다. 사무실 렌트비와 관리비를 내면 바닥을 드러낸다. 올해 사업 비용은 12만 달러가량이다. 결국 이사진이 갹출을 해야 할 판이다.   한인사회에서의 지원도 전무하다. 민 고문은 최소한 한인사회가 존재하는 한 묘소 확인 작업은 물론 뜻을 기리는 일들을 계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한 단체 관계자는 “한글과 역사를 배우는 한국학교, 한국학과 등 뿌리 교육과 연계해서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묘소에 조그만 꽃이라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아무래도  지금 1세들의 관심이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당부했다.   오늘도 머나먼 미국 땅 큰 공동묘지 안 조그만 묘석에서는 100년 전 독립을 외치던 선열의 이름이 먼 하늘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독립유공자 확인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유공자 후손 한국 보훈부가

2025-02-27

[중앙시론] 고추장, 간장에 담긴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평화 시위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미주 한인들은 어려운 환경 즉 저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 그리고 인종 차별 등의 악조건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 평화 시위 소식은 미주 한인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3.1 운동은 미주 한인여성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 운동의 보조에서 주체로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장 이대위는 1918년 1월 21일 여성 동포들의 국민회 입회를 허락하는 훈시를 발표하였다.     “남녀 제한 없이 모두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갖는 회원으로 입회하는 것”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여성 동포들의 입회가 허락되자, 각 지방회에서 여성 동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도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차만재 교수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지방의 한인들이 3.1 운동 소식을 접한 후 여성들의 독립 운동 참여가 활발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1) 5월 18일 한인 여성 대표들이 회의를 했다, 2) 전국 한인 애국여성 리그 설립, 3) 대한부인구제회 다뉴바 지방회 설립, 4) 일본 간장 불매 운동, 5)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도록 미 의회에 로비, 6) 한인 학생 회의가 8월 14~16일 개최됐다고 요약하고 있다.   3.1 운동 이후부터 애국 부인단은 외교 활동도 벌였는데 부인 애국단이 미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의 서두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것을 치하하면서 한인들은 비무장의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일인들의 만행도 지적했는데, 한국 부녀를 겁탈했고 예수교를 위협한다고 전했다.     ‘무삼 방책으로든지 도와주시기를 꾀하시면 각하께서 능히 오늘 넓은 세계가 다 아는 일본의 큰 죄악을 교정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마지막 발언에 이 글에 핵심이 들어있다. 이 청원서는 은근히 미합중국 대통령을 세계의 리더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이며 리더로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즉 세계의 악인 일본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왜적의 장을 먹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김자혜, 리신환, 량제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새크라멘토 지역 부인들은 합자해서 간장회사를 조직하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리버사이드 지역의 한인 여성들도 집에서 간장을 직접 만들어 먹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에 동참했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이처럼 각 지역의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간장, 고추장, 토장 등을 직접 만들거나 한인 회사를 설립하여 판매한 것이다.     3.1 운동 직후 미주 한인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첫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정식 입회가 1918년부터 허락되었고, 둘째, 부인애국단과 대한부인구제회 등의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넷째,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차세대들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에서 2025년 주요 사업의 일환으로 차세대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독립운동 고추장 미주 한인여성 한인 여성들 대한인국민회 북미

2025-02-27

“한인 사회의 영원한 스승이자 애국자”…랠프 안 3주기 추모식

“당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3남인 랠프 안 선생의 3주기 추도식(추모위원장 배국희)이 열렸다.     광복회 미서남부지회, 대한인국민회 등 관련 단체 회원 20여 명은 3·1절을 4일 앞둔 26일 오전 LA 소재 포레스트론에서 안 선생의 추모식을 열고 고인의 뜻을 기렸다.     1926년생인 랠프 안 선생은 부친과 큰 형 필립 안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일제 강점기부터 LA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등에서 활동하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과 한인사회 역사를 알리는데 일조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안 선생의 부인 앤 안 여사와 두 딸이 함께 자리해 추모객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지난해 100세가 된 안 여사는 “한인들이 나보다 남편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뿌듯하다”며 안부를 묻는 참석자들에게 “딸들과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안씨는 두 아들이 하와이와 아이다호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아들은 암 투병 중이라며 “기도해달라”고 말했다.     추모식을 진행한 민병용 한인역사박물관장은 “이들 열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조국도 없을 것”이라며 “동포 후세들이 독립지사들을 기억하고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클라라 원 대한인국민회 이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랠프 안 선생님의 환한 웃음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됐던 것을 기억한다”며 “진정한 친구이자,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그와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고 전했다.     김영완 LA총영사는 박 철 영사가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독립 유공자들의 거룩한 희생과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며 “랠프 안 선생의 3주기이면서 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서 더욱 뜻깊다. 우리 후세들도 오늘을 뜻깊게 기억하자”고 당부했다.     추도식 후 안 선생의 차녀인 새리 안씨는 “기억해주신 분들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아버지는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며 반가워하실 것 같다”고 인사했다.     한편 추모객들은 포레스트론 안에 있는 안창호 선생의 장남 필립 안(1905~1978) 선생 등 10여 명의 독립지사 묘소를 방문하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랠프 추도 3남 랠프 la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이사장

2025-02-26

[기고] 김종림의 순국 52주년을 추모하며

을사년 새해는 미주이민 122주년이며 광복 80주년의 해이다. 공군전우회는 독립운동가 김종림의 순국 52주년 추모행사와 신년 하례 모임을 지난 9일 열었다.   특별히 잉글우드 메모리얼파크에서의 헌화와 추모 행사는 오늘날 한국공군의 기원이 되는 북가주의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 후원을 한 미주독립운동가 김종림(1886~1973)의 삶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였다.     김종림은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동지회 대표 등을 역임한 애국지사다. 하와이 이민 후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벼농사로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1920년초에는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만나 임시정부 수립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8년에는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공립신보의 인쇄원으로 동포 사회에 소식을 전했다. 또 이듬해 국민회(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협성회 통합)의 교육업무에도 관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종림은 1942년 56세의 나이에도 캘리포니아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2남1녀 자녀중 두 아들은 미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아들 진원(제임스)은 알루샨 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둘째아들 두원(돈)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서 근무했다.   광복 후 예순의 나이에도 새크라멘토 밸리에서 벼농사를 지었고,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가 창립한 한미주식회사가 임페리얼 밸리에서 1000에이커의 벼농사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농사 감독의 일을 맡아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복리증진에 힘썼고, 본인이 세운 1세대 이민자를 위한 양로원에서 1973년 1월26일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유해는 잉글우드에 있다.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목표였다. 당시 미주한인들이 항공력을 키워 일본을 공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전을 세우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조국과 동포 사회에 희망을 주었고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김종림의 둘째 아들 두원(돈)과 친구 사이였던 도산 안창호의 막내아들 랄프 안 은 생전 인터뷰에서 “김종림은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로 윌로우스 한인비행 학교의 모든 재정을 도맡아 운영했다. 이후 사업에 실패해 어려움도 있었지만 평생 위엄을 지키고 산 분으로 기억하며 존경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립항공박물관은 지난 2020년 윌로우스 비행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개관 기념조형물을 제작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으로 교육하고 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을 가능케 전폭적 재정지원을 한 김종림의 삶에 존경을 표하며, 대한민국 공군전우회(회장 이계훈)는 그의 순국 52주년을 추모하며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심인태 / 한국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김종림 순국 미주독립운동가 김종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동지회 추모 행사

2025-01-27

100년사 발간한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는 한인사회 이민 역사의 시작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입니다. 차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다함께 알립시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사장 클라라 원)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발간 및 115주년 창립’을 기념하는 기금모금 갈라 행사를 연다.  29일 오후 5시 LA한인타운 옥스포드 팔래스 호텔에서 열리는 갈라 행사에서는 1세기 전 미주 한인사회 구심점으로 뭉쳤던 대한인국민회 역사와 의의를 되새길 예정이다.     클라라 원 이사장은 “100년 전 이민 선조들이 미 전역에서 대한인국민회로 뭉쳐 애국애족 정신으로 뭉쳐 이민생활 정착에 힘쓰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며 “대한인국민회를 이끈 도산 안창호 선생 정신은 오늘날까지 한인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한인사회가 차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다함께 주인의식을 갖고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초기 이민사회 구심점 역할을 한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USC 인근에 자리한다. 지난해에만 4000명 이상이 방문해 초기 이민사회와 선조들의 독립활동 역사를 둘러봤다. 한국에도 독립운동 산실로 알려져 매년 방문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지난 2021년 기념관을 재단장하고 역사교육 등 전시물도 확충했다. 현재 기념재단은 사적지인 기념관 관리, 차세대 뿌리교육, 이민역사 세미나, 독립유공자 발굴 등 역사지키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발간도 한인사회 역사인식을 고취하기 위해 진행됐다. 이번 기금모금 갈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115년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 ▶AI를 활용한 도산 안창호 축사 ▶기념재단 주요 활동 및 신규회원 모집 등 여러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미셸 윤 사무총장은 “100년사 발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라며 “차세대 청소년 뿌리교육이 중요한 시기다. 기념재단은 대면행사를 확대하고 애국단원도 모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50~60대 이사 16명이 참여해 이사회를 쇄신했다.     권영신 상임고문은 “1세대는 대한인국민회를 잘 알고 있지만, 2~3세대에게 역사를 교육하지 않으면 우리의 이민역사와 민족정신 계승이 어렵다. 우리 모두 뜻을 모아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지켜나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문의: (323)733-7350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대한인국민회 게시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 역사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2024-08-26

빼앗긴 조국, 타국에서 피땀흘렸던 그들의 기록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빼앗긴 들에도 결국 봄은 찾아왔고, 7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날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이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제의 핍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앞장서 싸웠다면, 그 뒤에는 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한인들이 있었다. 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만큼은 더없이 간절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미주의 독립투사들. 오늘은 그들의 행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 뉴욕한인교회 맨해튼 115스트리트에는 당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미주 한인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공간이 있다. 바로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로 사용됐던 뉴욕한인교회다. 1921년 3월 2일 맨해튼 웨스트 43스트리트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서재필 박사를 필두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대회 개최를 계기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뉴욕한인교회가 탄생했다. 뉴욕은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들이 많지 않았지만, 국제사회에 한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주요 도시였기에 이승만·서재필·안창호 등 뉴욕한인교회의 문턱을 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라를 잃고 해외살이를 하는 동포들은 이곳에 모여 서로의 향수를 달래고 독립정신을 북돋아주며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살구 농장에서 생긴 일   1910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본은 해외에 사는 한인들까지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은 1913년 6월 뉴욕의 살구농장에서 드러났다. 당시 살구 따는 일을 하러 갔던 100여명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주민들의 배척을 받았다. 당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배일사상(일본인 배척 사상)이 팽배했는데,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영사는 한인들을 찾아가 미국정부와 교섭해 배상금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한인들은 분노하며 해외 한인들까지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통보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당시 유일한 해외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일본의 음모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항의했고, 이에 국무부는 “한인은 일인이 아니며, 이제부터 재미한인과 관련된 일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교섭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뉴욕에서는 ▶18명의 한인들이 규합해 결성된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신한회’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 뉴욕지부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등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독립 염원을 외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는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미주의 한인들도 전세계에 독립 염원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14일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한인들은 서재필 박사의 주도하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를 폭로하고, 한인의 자유 독립 의지를 담은 결의문과 호소문을 미국 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뉴욕에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했는데, 1921년 3월 2일 맨해튼 타운홀에서 개최된 제2주년 기념식에는 100여명의 한인들과 1200여명의 친한파 미국인들이 비를 뚫고 참석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   1945년 8월 15일, 뉴욕에 울려퍼진 뜨거운 함성     피 같은 돈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3·1운동 후 10년간 18만불 전달   조국 독립 위해 미군 자원하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들의 모금 운동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했다.     나라를 뺏기고 타지에서 생활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같은 돈을 내놨다. 기록에 따르면 미주 한인들은 3·1운동 이후 10년 동안 약 18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바쳤다. 10년 넘게 뉴욕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온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전 담임목사는 “당시 뉴욕 한인들의 유일한 소원은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의 뉴욕 도착   1932년 3월호 〈Korean Student Bulletin〉(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된 북미유학생총회가 미국에서 발간한 영문잡지) 1면에는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컬럼비아대학에서 뉴욕 한인들과 찍은 사진이 실렸다. 이승만이 뉴욕에 온 것은 미국 NBC방송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연설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자 이승만은 위협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시 뉴욕시경(NYPD) 커미셔너가 이승만의 신변을 염려한 나머지 형사 2명을 파견해 이승만을 보호할 정도였다. 2분 남짓한 연설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 자행해 온 갖가지 불법행위를 밝혔다. 〈K.S.B〉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전역으로부터 방송국으로 온 축하편지가 홍수를 이룰 만큼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이후에도 이 박사는 뉴욕에 머물며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규약 16조에 있는 대로 경제적인 보이콧을 할 것”을 역설했다.    ◆실낱같은 희망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처음으로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자 한인들은 1942년 2월 워싱턴에서 ‘한인자유궐기대회’를 열고 미국 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유엔가입을 도와줄 것 등 5개항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은 이때 연설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적인 이상 한인들이 미국을 도와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미주의 한인들은 이미 이전에 미국을 지원하는 뜻으로 6만 달러에 달하는 방위채권을 샀다. 젊은 한인들은 자원해서 미군에 지원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총 110명으로 구성된 한국인 예비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동단결한 여성들   정치 문제는 남성에게 일임하는 것이 상례였던 시대였지만, 뉴욕의 여성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과감히 나섰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의 여성들은 ‘미주동부대한부인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주말마다 한복을 입고 뉴욕의 중심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모금운동을 했고, 그 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기도 하고, 뉴욕 지역에서 미군으로 출전한 한국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날   1945년 8월 15일, 뉴욕에서도 뜨거운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는 “마침내 그날이 오자 뉴욕시는 사방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종일 요란했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의 날이 왔음을 고하는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뉴욕 시민들의 고막을 울렸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뉴욕중앙일보는 1920~1950년대 뉴욕한인교회 교인명부를 통해서 동부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뉴욕한인교회 60·70년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가나다 순)     김경(상해임시정부에 재정 보조)     김도연(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에 모여 독립선언 논의)   김마리아(뉴욕에서 한인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조직. 악랄한 일본 식민정책 미국에 알림)     김준성(뉴욕한인교회 목사로 일하며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후원에 큰 역할)     김헌식(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김형린(뉴욕 조국광복사업추진회 회장)     박용만(한인 대표해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참석한 독립운동가)   박인덕(1919년 3·1운동시 학생들 선동. 미국 돌며 3·1운동 관련 강연)   배민수(‘국민회’라는 단체 만들어 독립운동하다가 체포)   신성구(1910년대 김헌식과 함께 독립운동)     송종익(도산 안창호와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 물질적으로 협조)     윤병구(이승만과 뉴욕 오이스터베이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루스벨트대통령 찾아가 청원서 제출)     윤헬렌(1921년 뉴욕 타운홀대회 참가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실정 전달)     이봉수(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   이병두(서재필 박사 도와 미주의 학생운동, 독립운동 주도)     이승만(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이원익(1919년 상해임시정부 요원)     임창영(뉴욕 한인들을 규합해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항의 시위)     임초(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작성한 3인 중 하나. 뉴욕 흥사단의 주요 인물)   정애경(3·1운동 당시 한국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상해로 탈출. 뉴욕한인교회 부인회 회장)     조병옥(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와 투옥. 흥사단 주요 인물)   한승인(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조병옥과 투옥.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한인학살 모면 후 일본의 만행 폭로)   허정(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보좌)     천세헌(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윤지혜 기자기록 타국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미주 독립운동

2024-08-14

[중앙시론] ‘파차파 캠프’ 미국 순회 전시회 여는 이유

커뮤니티 활동 지원 단체인 멜론재단의 도움으로 파차파 캠프 미국 순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전시회 첫 번째 장소는 샌프란시스코로 지난 6월 29일 개막식에 특강 차 다녀왔다. 요즘 여러 곳에 강연을 많이 다닌다. 지난 5월에는 서울대에서 개최된 다문화 학회에서 기조 강연을 했고,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7월 필라델피아, 10월엔 버지니아·워싱턴 DC를 다녀와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전시회는 최근 리모델링 한 샌프란시스코 코리아센터 (전 한인회관)에서 열리는데 개막일부터 성황을 이뤘다. 임정택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부부, 최점균 샌프란시스코 평통 회장 등 약 100여명이 참석했다. 임 총영사는 축사 이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필자의 특강을 끝까지 경청해 인상적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초기 한인 독립운동의 성지다.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도 1902년 10월14일 이곳에 도착했으며,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다. 대한인국민회 본부가 있었으며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한 한인 대부분이 이곳에 정착했다.       특히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한 이대위 목사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많은 활동을 했다. 이 목사는 1913년 리버사이드 헤멧 지역에서 발생한 ‘헤멧 밸리 사건’때 당시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얀트에게 ‘한국인은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 인물이다. 이를 통해 일본 정부가 미주 한인 사회에 간섭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헤멧 밸리 사건’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던 11명의 한인이 근처 헤멧 밸리 복숭아 농장에 취업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들이 기차로 헤멧역에 도착하자 당시 아시안 배척이 심했던 분위기에서 백인 노동자 200여명이 “돌아가라고” 위협했고, 한인들은 리버사이드로 쫓겨오게 된 사건이다.      당시 일본 측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국 내 한인들도 ‘일본 식민국민’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대사가 미국 정부에 공식 항의하면서 외교 문제로 번졌다. 브라얀트 국무장관은 사태 파악을 지시하고 문제 해결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목사의 전보를 받게 됐다. 이에 브라얀트 장관은 “미국 거주 한인은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일본 정부에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로써 미국 거주 한인은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라 당당히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한인들은 지속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한인 대표 단체로 부상했다.     파차파 캠프는 한인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했던 곳이며,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본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파차파 캠프이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주공화정을 선포했는데, 그 전인 1911년 12월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실험한 곳이 파차파 캠프다. 이는 파차파 캠프가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역사적 장소’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내용의 특강에 만족스러워하는 참석자들 반응에 필자도 보람을 느꼈다. 다음날 이번 전시회를 총괄한 김한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7월 말까지로 예정된 전시회를 9월 말까지 연장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다음 전시회는 10월19일 버지니아·워싱턴DC에서 예정되어 있어 일단 연장이 가능하다고 답을 했다.   전시회는 뉴저지·뉴욕 (2025년 1월 18일), 시카고 (2025년 6월 1일), 그리고 리버사이드(2025년 8월 3일부터 11월 23일까지)로 이어질 예정이다.  미국 내 다른 도시와 한국에서도 전시회가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전시회는 미주 한인 사회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재 리버사이드에 추진 중인 도산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차세대들에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동참할 필요가 있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미국 전시회 샌프란시스코 전시회 대한인국민회 회장 대한인국민회 본부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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