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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한류 르네상스, 깊이가 숙제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LA 킹스가 지난달 23일 홈구장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한국 문화 축제인 ‘K-타운 나이트’를 성황리에 개최하며 LA 한인 사회의 뜨거운 열기를 실감케 했다. 코리아타운 시니어 & 커뮤니티 센터의 흥겨운 사물놀이 공연과 하모니카 연주, 한인 DJ가 선사하는 K-팝의 향연은 경기장을 찾은 현지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런가하면 LA 다운타운에선 한국 미슐랭가이드에 이름을 올린 돼지곰탕 전문점 ‘옥동식’의 팝업 식당이 연일 화제다. 지난 1일부터 오는 12월까지 9개월간 운영될 예정인 옥동식 팝업 매장은 뉴욕타임스도 극찬한 한국 전통의 맑은 돼지곰탕 맛을 LA 미식가들에게 선보이며 입소문을 타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K-도넛 브랜드 ‘카페 노티드’가 오는 12일 LA에 미주 1호점을 오픈하며 디저트 시장까지 K-열풍을 이어갈 전망이다.   스포츠, 음식,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최근 LA에서는 그야말로 ‘한류 르네상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흐름이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고, LA 문화의 한 축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팬덤을 구축한 한류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시작으로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 등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의 저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현재의 한류 소비는 한국 문화를 ‘겉으로 즐기는’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콘텐츠 자체의 매력에 대한 반응은 뜨겁지만, 그 이면에 담긴 한국인의 정서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하다.   예를 들어, LA 현지인들이 한식을 맛본다고 해도 김치나 곰탕 한 그릇에 담긴 한국인의 삶과 철학, 역사적 의미까지 깊이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해 LA타임스의 저명한 음식 비평가 빌 에디슨과의 인터뷰에서 삼계탕을 메뉴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의 ‘삼복(三伏)’이라는 절기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 유래나 담긴 의미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삼복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해주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당시 에디슨은 “한식이 진정으로 타인종의 일상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음식 소개를 넘어 정통 한식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확산이 필요하며, 그 수요는 한국인들의 생각 이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열연에 매료된 시청자들은 K-드라마를 즐겨 보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나 시대적 배경, 사회상은 때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한류 소비는 콘텐츠라는 ‘결과물’에 집중되어 있을 뿐, 그 문화적 ‘맥락’까지 깊이 공유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피상적인 소비 형태가 지속된다면, 한류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고 머지않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한류를 지속 가능한 문화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한국 문화가 지닌 고유한 ‘문화 내러티브’를 적극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단순한 볼거리나 먹거리를 넘어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가치관, 삶의 지혜 등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함께 전파해야 한다. 화려한 K-팝 퍼포먼스 뒤에 숨겨진 아티스트와 스태프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 그리고 LA를 비롯한 타지에서 묵묵히 삶을 일궈온 한인 이민자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조명될 때, 비로소 감상자들은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공감과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속적인 문화 교류와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대학의 한국학 강좌나 세종학당의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처럼 언어와 역사를 함께 배울 수 있는 창구를 더욱 늘려야 한다. 이를 통해 일회성 문화 체험이 장기적인 관심과 깊이 있는 이해로 발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셋째, 전략적인 지원과 연대 또한 중요하다. 문화가 꽃피우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일본의 사례를 보자. 태미 김 전 어바인 시의원은 지난 2022년 한 인터뷰에서 “일본은 소름 끼칠 만큼 치밀한 로비로 미국 사회에서 문화 영향력을 유지 중”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민간 차원의 뜨거운 열정에 더해 한국 정부와 LA 한인 사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한류의 제도적 기반을 튼튼히 다져나갈 때, 한국 문화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미국 사회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진정한 ‘생활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LA 킹스의 ‘K-타운 나이트’ 행사장에서 뜨거운 함성, 옥동식 팝업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달콤한 K-도넛의 인기. 이 모든 현상이 단순한 유행으로 스쳐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미국 사회에 한국의 이야기를 깊이 새기는 문화의 씨앗이 될지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고민에 달려 있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르네상스 한류 한국 대중문화 한류 르네상스 한국 문화 김경준 미국 캘리포니아 가주 엘에이 로스앤젤레스 LA뉴스 한인 뉴스 미주 한인 한인 LA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2025-04-02

[문화 산책] 대중문화의 힘과 돈의 유혹

문화에 대해서 우리는 뜻밖에 많은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를 예술적 고급문화와 상업적 대중문화로 구분하고, 둘 사이에 높낮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대중음악, 즉 유행가나 텔레비전 드라마, 코미디, 만화 같은 대중문화를 하찮게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편견이고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매우 위험하다.   추구하는 방향이나 존재 방식이 다를 뿐이지,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깊이와 넓이의 차이, 또는 돈과 정신적 가치의 차이 같은 것이다. 개인적 취향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무엄하게 말하자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아니면 안 듣는 사람이 이미자나 조용필, 나훈아 노래를 즐기는 사람보다 훌륭하고 행복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가는 각자의 인생관이나 취향의 문제일 따름이다. 물론, 순수성과 예술성 같은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는 평론가나 학자의 시각은 존중받아야겠지만, 대중의 시대정신이나 풍속사 등은 다른 문제다.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 특히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대중음악이 클래식 음악보다 훨씬 넓고 크고 강하다. 유행가를 대중(大衆)음악이라고 한다면, 클래식 음악은 소중(小衆)음악쯤 되려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동서양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유행가의 힘은 막강하다. 대중들의 삶과 하나로 어우러져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평생 가는 아련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다른 이의 삶에 공감하도록 이끌어주고, 아주 때로는 역사의 물길을 바꾸기도 한다. 특히, 한 개인의 인생 굽이마다 마치 암각화 같은 굵은 무늬를 새긴다. 그래서 어떤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레 지난 시절 한 세월의 추억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이것이 유행가의 힘이다.   한류의 가장 앞자리에 K-팝이 있고, 가수 나훈아의 은퇴가 장안의 화제가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현대사를 살펴봐도, 문화가 도약하는 길목마다 대중문화, 유행가가 있었고, 배우나 가수 같은 광대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인류가 그동안 만들어 듣고 부르고 울고 즐긴 노래는 몇 곡이나 될까?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고 많을 것이다. 때로는 큰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속하네 퇴폐적이네 표절이네 왜색이네 등등 온갖 욕을 먹고 푸대접을 받아가며 무수히 태어나고 사라져갔다.   그 많은 노래 중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오래도록 남는 노래는 극히 일부다. 가수나 작곡가 중에 엄청난 인기를 누린 이는 제법 많아도, 예술가 대접을 제대로 받는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상품으로, 그야말로 한때의 유행품으로 소비되어 사라지고 만다. 돈의 잔인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의 생명력을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오늘날 가장 결정적인 것은 돈이다. 오늘날 세상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돈이 왕이다. 안타깝게도 예술도 마찬가지다. 대중문화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잔혹한 현실에서 돈의 유혹을 아예 뿌리치거나, 돈의 횡포를 멋지게 이겨낸 예술가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음악상을 사양하고 방송 출연을 하지 않는 조용필, 재벌의 정중한 초청에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에 표를 사서 오시라”고 응수한 나훈아, 군사정권의 실세가 내민 백지수표를 “논에 풀 뽑으러 가야 한다”며 뿌리친 김민기….   김민기의 대표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4000회로 돌연 공연을 중단했다. 계속 관객이 몰려들어 흥행이 잘 되는 공연을 왜 중단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김민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돈 안 되는 아동극에 전념했다.   “돈 되는 일만 하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 할 것 같아서….”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대중문화 대중문화 유행가 상업적 대중문화 예술적 고급문화

2024-10-10

[열린광장] 나와 대중의 경계에서

한국의 수도권 전철인 양재역, 신분당선과 3호선의 환승 통로에 이어지는 이 곳의 인파는 개울물 흐름 같다. 입술은 침묵하고, 기린처럼 펭귄처럼, 혹은 오리 떼처럼 양방향으로 가쁘게 순행한다. 이따금 귀따가운 조잘거림이 거슬리지만 곁가지로 제쳐지기 마련이다. 개울은 그렇게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전동차에 올라서도 침묵은 계속되고, 서서도 앉아서도 각자도생, SNS에 몰입하거나, 시선의 피난처를 찾거나, 혹은 수면의 늪에 빠져 있다. 바로 옆의 승객과도 눈길 한 번 나누지 않는다.     거리에 나가서도, 상가에서도 유리벽을 친 듯이 서로 무관심하고 매정하다. 세상이 묵언고행(默言孤行)의 도가니이지 싶다.  누구나 집을 나와 떠돌더라도 보이지 않게 가정과 친지들, 동료들, 그리고 일터 같은 사회적 얼개와 제도에 연결돼 있다. 항공모함을 떠난 전투기들이 모함과 불가분의 관계인 점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흩어져 있으면 개성을 품은 시민이고, 모이면 고기압의 군중이 되곤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습관처럼 신문과 TV 뉴스를 잠깐 들여다본다. 지하철역까지 나오는 동안에는 아직 따끈한 뉴스의 내용과 그와 연관된 세상사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맴돈다. 매스 미디어는 몰려오는 소식 만이 아니라 생활과 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적인 요인과 현상을 두뇌 깊숙이 쏟아붓는다.     21세기의 대중은 대중문화를 포식하며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 대중문화를 입고, 대중문화를 숨 쉬고, 대중문화 속을 헤엄치고 있는 나도 대중인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음을 빤히 알면서도 때때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이유는 대중의 양면성 때문이리라.         지구촌이 현대에 이르러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의 기세는 온 누리에 걸쳐 팽창 일로를 걸었다. 조직화하지 않은 상태지만 뭉치면 엄청난 위력으로 폭발할 잠재력을 내장하고도 있다. 시민사회의 보편주의를 전통사회의 권위주의보다 우위에 견인했고, 인본을 신장시킨 사회변동의 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회사이다. 반면에 대중은 구체적인 상수 개념이 아니고 비조직적이다가 일단 군중으로 모이면 대중심리를 타고 고도의 휘발성을 띄기 때문에 위험하고 무섭다.       민주 국가에서 정당한 민의가 국정과 사회 경영에 효율적으로 반영되는 일이 최우선적 과제임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사사로움이나 불순함이 개재되는 일은 오랜 걱정거리였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 지적한 대로 원자화되고, 불안정하고, 무기력하게 흩어져 있는 대중은 소수의 엘리트나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권위주의에 의해 조작, 오도되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 대중 스스로에게도 독약이 아닐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금과옥조이다.  광화문과 시청 앞에 운집하는 격정적이고 유동적인 대중의 중심을 이성과 합리성으로 순화된 건실한 공중이 지탱해 줄 수는 없을까? 나와 대중의 경계에서 대중사회의 어렵고 예민한 테마, 그 좌표와 미래를 부둥켜안고 고뇌에 빠지곤 했다.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열린광장 대중 경계 입고 대중문화 대중 스스로 파시즘 공산주의

2023-10-03

한국영화의 미학·대중성 다진 기념비적 시대

1960년대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진 절망의 시기였지만, 희망을 갈구하는 대중들의 욕망이 분출된 변혁의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는 1960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르였다. 이 시기에 ‘작가주의 감독군’들에 의해 이른바 한국형 모더니즘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미학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갖춘 기념비적인 영화들이 대거 발표됐다. 영화법이 제정·시행됐고 연간 100~200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관객수도 1961년 5800만명에서 1969년 1억7300만 명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오발탄(Aimless Bullet, 유현목 감독, 1961년)   전후 재건 한국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1961년 상영 금지를 받았지만 가장 위대한 한국 영화 중 하나로 널리 칭송받고 있는 유현목의 대표작. 전쟁이 지나간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해방촌에서 살아남은 가족의 암울한 생존기를 다룬다. 정신이상자 어머니, 영양실조에 걸린 만삭의 아내, 상이군인 동생 그리고 양공주가 된 여동생이 등장하는 스토리를 누아르 형식으로 그렸다. 두 형제의 비극적 관계, 증오와 공포로 산산이 부서진 한 가족과 국가의 초상화. 한국영화의 진정한 영상시대는 ‘오발탄’ 이후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진규, 최무룡, 문정숙, 윤일봉 출연.     ▶여판사(A Woman Judge, 홍은원 감독, 1962년)   한국의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의 데뷔작. 사법고시에 성공,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된 진숙(문정숙)은, 여판사라는 아내의 사회적 지위에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 규식(김석훈)과 이에 편승하여 며느리를 오해하는 계모 시어머니, 그리고 시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나 한 가정의 아내와 며느리로서, 그리고 판사의 임무에 충실하던 중, 살인사건에 연루된 시어머니의 변론을 맡아 무죄판결을 끌어낸다. 1961년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 황윤석의 의문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다.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는 평. 분실되었다가 50년 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됐다.   ▶맨발의 청춘(The Barefooted Young, 김기덕 감독, 1964년)   음악다방과 댄스홀, 트위스트 등 이전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확연히 구별되는 청년 문화를 반영한 새로운 영화 장르 ‘청춘영화’의 대표작. 부유한 대사의 딸 요안나(엄앵란)와 사랑에 빠진 사창가의 폭력배 청년(신성일)의 이야기를 실패한 사랑, 낭만적 사랑, 비극적 사랑의 신화로 그려냈다. 극심한 계급 분열, 불안한 세대 갈등으로 거칠어지는 청년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작품. 검열에 의해 금지될 뻔했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획기할 만한 25만 관객을 동원, 최고 흥행을 이루며 주연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을 60년대의 대중 스타 커플로 떠오르게 한다. 최희준의 주제가도 크게 히트했다.     ▶갯마을(The Seashore Village, 김수용 감독, 1965년)     오영수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문예 영화 대표작. 문예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입증한 최초의 영화로 전후 한국의 분열된 정체성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해순(고은아)은 남편과 함께 갯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어느 날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간 남편이 폭풍을 만나 죽게 된다. 해순에게 관심을 보이던 떠돌이 상수(신영균)를 그녀는 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온 마을에 소문이 나고 상수는 해순을 데리고 갯마을을 떠난다. 해순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사내들을 피해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가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힘겨워지기만 한다.     ▶황혼의 검객(A Swordsman in the Twilight, 정창화 감독, 1967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에 영향을 주었던 홍콩영화 ‘죽음의 다섯손가락’(King Boxer, 1972)을 연출한 정창화 감독의 독특한 한국식 검술 영화. 한국의 풍경과 궁궐 건축, 짧고도 치명적인 검의 만남을 다룬다. 조선시대 민비와 장희빈의 알력을 배경으로 무법 마을에 홀로 등장한 검객 김태원(남궁원)은 건달 오기룡(허장강)에 의해 아내(윤정희)와 딸이 처단되자 음모 세력에게 복수할 날만을 손꼽는다. 곡예적인 홍콩 무협과는 대조적으로 한복을 입은 검객들이 대결하는 우아하고 절제된 액션 시퀀스들과 치밀한 편집이 돋보인다.   ▶안개(Mist, 김수용 감독, 1967년)     김수용 감독의 공간과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짜임새 있고 세련미 넘치는 연출로 60년대 한국 영화의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에 상처받은 인간의 내면을 영화적 풍경으로 그려낸 ‘안개’는 김승옥의 모더니스트 소설 ‘무진 기행’이 원작이다. 장인 회사에서 상무로 있는 회사원(신성일)이 어린 시절의 고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음악 교사(윤정희)를 만나 욕정을 불사른다. 그러나 전무로 승진됐다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실리를 좇아 서울로 떠난다. 윤정희의 대담한 베드신이 화제가 됐다. 이봉조의 색소폰 연주를 따라 안개 속에서 인간의 건조하고 암울한 내면세계와 조우한다.     ▶휴일(A Day Off, 이만희 감독, 1968년)     1968년에 제작되었으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37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겨울의 끝자락의 어느 일요일. 교회 종소리와 함께 빈털터리 허욱(신성일)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지연(전지연)의 낙태 수술을 위해 친구의 돈을 훔친다. 지연은 병에 들고 실의에 빠진 허욱은싸롱에서 만난 여자와 주점을 전전한다. 수술 도중 지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와의 행복한 한때를 회상하며 거리를 내달리는 허욱, 씁쓸한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시적 표현에 담긴 사랑과 60년대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청년의 시점에서 고발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내시(Eunuch, 신상옥 감독, 1968년)   감각적 에로티시즘과 폭력이 주를 이룬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다. 궁궐 내에서 벌어지는 대립 상황이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러온다. 궁궐의 권력 다툼과 불운한 로맨스를 다룬 신상옥의 사극. 조선 시대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욕구를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왕비와 궁녀들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심한다. 노출 없이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한 신상옥의 연출 스타일이 60년대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다. 신성일, 윤정희, 박노식, 남궁원, 도금봉 출연.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한국영화 기념비 한국 영화 여성 감독 한국 대중문화

2023-09-08

[문화산책]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올해는 한국과 일본 대중문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다.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함께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 지 25주년이자, 한류(韓流)의 시발점이 된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의 국영방송인 NHK를 통해 방영되어 선풍적 인기를 끈 지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 25년 동안에 대한민국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한국문화가 일본문화를 훌쩍 뛰어넘어 세계 정상을 향하고 있다. 개방 당시의 걱정과 위기감, 열등감 등을 말끔히 날려버린 것이다. 참 대단한 저력이다. 자랑스럽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깔끔해진 건 아니다. 정치적으로, 당장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 문제로부터 독도, 위안부, 강제노역 등등 갈등의 골이 깊어, 사이가 몹시 나쁜 상황이다. 좋아질 기미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한일 관계의 건전한 미래를 위해서는 폭넓은 대중문화의 교류가 대단히 중요하다. 두 나라 국민이 서로를 알고, 마음이 통해야 이해도 하고 협력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간의 문화교류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이들의 인적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고, 코로나가 지나면서 양국의 관광이 활기를 되찾고 있는 것도 반가운 현상이다. 미래에 희망을 걸게 한다.   하지만, 정신과 문화적 면에서도 우리 앞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산처럼 쌓여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 남아있는 일본말 찌꺼기, 친일파 척결 논쟁 등이 대표적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한이 없어서 서글퍼진다. 이 짧은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특히, 친일파 논쟁은 대단히 예민한 문제다. 친일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매우 차갑고 비정하다. 일단 친일파로 찍히면 끝장이다. 용서도 없고, 제대로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무자비하다.   그런데, 친일(親日)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 친일파냐를 구분하는 기준은 애매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는 각도나 역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정권에 따라 친일파의 기준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현재 친일파 규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인데, 여기에 수록된 사람은, 여러 분야에 중복으로 수록된 인물 431명을 포함하면, 총 5207명이 된다. 사회 각 분야의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즐비하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총 165명이 친일파로 수록되어 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문학 40명, 음악·무용 43명, 미술 24명, 연극·영화 58명 등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리 현대사 개척기의 중요한 선구적 인물로 배웠던 훌륭한 예술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런 큰 인물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친일파로 몰려 사라져 버린다.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학문적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이 사람들을 빼면 역사를 제대로 말할 수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마땅할 텐데, 친일파로 찍힌 작가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매우 혼란스럽다.   물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들의 고뇌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고 총대를 멘 용기와 나름대로 기준을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쓴 노력도 인정한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을 제대로 아는 진정한 의미의 친일파가 많이 필요한 시기다. 특히, 젊은 세대의 지일(知日), 친일파(親日派)… 알아야 이길 수 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역사 대중문화 역사 친일파 논쟁 찌꺼기 친일파

2023-08-10

"새롭게 떠오르는 문화강국"…영국 잡지 모노클 한국 특집

젊고 세련된 고소득 전문직이 주 독자층인 영국의 한 주요 월간지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주제로 한국 특집을 게재했다.   영국 월간지 모노클은 최근 발간한 7/8월호에 8쪽에 걸쳐서 한국 특집을 싣고 청와대와 부산 등을 알리는 한편 디자인, 패션, 요리, 문학 등 한국 문화 전반을 소개했다.   모노클은 ‘한국, 다음 목적지’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한국은 한 세기 넘는 시간에 미국, 유럽과 영향을 자유롭게 주고받아 왔다”며 “국제무대에서 책임감 있는 행위자이자 문화 강국으로서, 건축부터 음식, 패션까지 모든 것에 관한 새로운 발상이 피어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청와대 사진을 올리면서 개방 후 대중을 위한 공원이 됐다고 안내했다.   ‘도시 디자인’에선 한옥 등 풍부한 건축 유산과 현대 기술을 잘 결합하는 신진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가볼 만한 도시 정비와 재생 공간으로는 서울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열린 송현동, 청주 동부창고 등을 제시했다.   ‘공유되는 문화’에선 K팝과 K드라마 외에도 다양한 한국 문화가 세계를 조용히 사로잡고 있다면서 패션, 한식, 문학, 한국어 등을 다뤘다.   서울 강남과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는 부산, 제주도, 양양을 꼽았다.   모노클 한국 특집은 한영 수교 140주년 협력사업이다.   주영한국대사관은 28일(현지시간)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한국 대중문화는 이미 널리 알려졌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조망된 한국을 부각하겠다는 것이 모노클 측의 기획 의도였다”고 말했다.영국 문화강국 모노클 한국 한국 특집 한국 대중문화

2023-06-29

[J네트워크] 심심한 사과

한국신문협회는 매년 NIE(신문활용교육) 워크북을 제작해 전국 초·중·고교의 신청을 받아 무료 배포한다. 워크북은 주요 시사 이슈를 주제로 정하고, 관련 기사 읽기를 통해 사고력을 기를 수 있게 구성됐다. 월드컵·전염병 등 시의성과 흥미, 학습 가치가 고루 있는 주제가 선정된다.   올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세계의 선거 등 굵직한 이슈가 많아 ‘전쟁’이나 ‘선거’를 다룰 거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문기사 밑줄 치며 즐겁게 읽기’였다. 이슈가 아닌 ‘읽기 활동’ 자체를 다룬 거다.   신문협회에 주제 선정 기준이 바뀐 이유를 묻자 “요즘 학생들에겐 읽기가 가장 시급하다”고 대답했다. 초·중은 물론 고교에서도 짤막한 기사 하나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학생이 드물다는 것이다. 시사 이슈에 대한 통합적 사고활동을 유도하던 워크북이, 충실한 정독과 사실적 이해를 돕는 교재로 바뀐 연유다.   최근 불거진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은 워크북의 달라진 편제에 공감하게 한다. 깊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사과를 전한다는 의미를 가진, 매우 공적이고 정중하며 관용적인 이 표현이 어쩌다 ‘지루한 사과’로 오독돼 일부 네티즌이 분노 버튼을 누르게 됐을까.   문해력 논란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해엔 ‘금일(今日)’이 오늘이냐 금요일이냐를 두고, 2020년엔 ‘사흘’이 3일이냐 4일이냐에 대해, 2019년엔 대중문화 평론가가 ‘명징과 직조’란 고급 어휘를 써도 되느냐 마느냐에 대해 논쟁이 불붙었다.   이 논란은 종종 “누가 옳으냐”의 격한 다툼으로 번진다. “금일의 뜻은 오늘입니다”란 설명에 “오해 소지가 있는 단어를 쓰면 어떻게 하냐”고 쏘아붙이고, ‘명징과 직조’란 표현을 사용한 평론가를 향해 “대중을 상대로 한 글로 먹고살면서, 대중이 모르는 말을 쓰는 건 문제”란 힐난하는 식이다.   베스트셀러 『역행자』에선 이런 태도를 과잉 자의식이라 부른다. 자신의 문제는 회피하고 상대의 잘못으로 돌려 위안을 얻는 ‘무한 합리화’이자 발전을 가로막는 자기모순이라 설명한다. 부족한 문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많다. 한자 학습, 독서, 사전 검색 등이 대표적이다. 과잉 자의식의 해결법은 탐색과 인정이다. “내가 그걸 몰랐네”라는 단순한 인정에서 발전이 시작된다. 박형수 기자J네트워크 사과 대중문화 평론가 시사 이슈 신문기사 밑줄

2022-08-26

K문화로 본 한국 발전상…온라인 교육자 세미나 개최

LA 총영사관(총영사 김영완)은 ''한국 대중문화를 통한 한국 발전상 이해(Understanding Korean Society through Popular Culture)''를 주제로 K-12 온라인 교육자 세미나를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USC 미-중 연구소(USC US-China Institute)와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세미나는 오는 8월 매주 화요일(2.9.16.23.30일) 5회에 걸쳐 진행되며 참석을 원하는 교사는 세미나 참가 전에 제공되는 동영상 강연자료 등을 학습해야 한다. 등록은 웹사이트(https://china.usc.edu/k12/seminars)에서 할 수 있다.   세미나 주제는 2일 ''한류의 시작과 한국 영화의 국제화'' 9일 ''K팝과 한국 음악의 또 다른 유전자: BTS와 그 너머'' 16일 ''세계 시청자를 위한 K드라마와 한국 텔레비전'' 23일 ''K뷰티 K패션 그리고 한국 음식: 글로컬과 글로벌'' 30일 ''웹툰 K스포츠와 K-e스포츠: 옛것에서 새로움으로'' 등이다.   해당 세미나 과정을 수료하면 3단위의 평생교육 크레딧(Continuing Education Units)이 주어지며 모든 과제를 완료한 30명에게는 105달러 상당의 수수료가 면제된다.   강연을 맡은 제니퍼 정 김 교수(UCLA)는 "최근 한국 대중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받는 시점에 교사들이 한국의 역동적인 발전상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한국의 발전상이 K-12 학교 수업까지 퍼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발전상 온라인 한국 발전상 한국 대중문화 온라인 교육자

202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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