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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가자미식해와 낫또

“네가 이렇게 음식 솜씨가 없으니, 아비가 성인병이 없는 거야.”   나만큼이나 음식 솜씨 없는 시어머니가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고는 맛없다는 표현을 돌려서 말씀하셨다. 시어머니 말처럼 내가 만든 음식은 내 남편 이외는 아무도 먹지 못할 정도로 맛없다. 물론 설탕도 참기름도 조미료도 아예 집에 없다. 시어머니는 LA에서 오실 때마다 혼다시를 가지고 오셔서 “맛이 통 나지 않으니, 이거라도 음식에 조금씩 넣어라. 내가 뉴욕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나는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만큼 괴로워한다. 남편은 아무리 음식 맛을 불평해도 내 실력이 나아지지 않자 포기했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같은 소리를 한다.     “음식 솜씨 좋은 부인과 사는 남자들이 나이 들어서 성인병 때문에 약들을 한 움큼씩 먹는데, 나는 마누라의 희한한 요리 솜씨 덕에 건강을 유지하네. 복도 가지가지야.”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되잖아. 적게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산데요.”   음식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잘났다고 빼놓지 않고 토를 단다.   나도 잘하는 음식이 있다. 음식 솜씨 없는 함경도 시어머니가 그나마 잘하는 것이 가자미식해다. 좋아하는 음식이라 옆에서 따라 하다가 전수하였다. 나는 시어머니처럼 거창하게 식해를 만들지 않는다. 가자미를 사다가 지져 먹고 구워 먹다가 남은 가자미를 통째로 소금을 듬뿍 붓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아 놓는다. 살이 물러진 것 같으면 잘라서 소금 다시 붓고 또 냉장고 구석에 밀어 넣는다. 그러다 가자미 삭힌 것을 잊어버려 한 달이 지난 후 허겁지겁 메조 밥을 만들어 고춧가루와 다진 생강과 마늘을 넣어 가자미와 섞어 놓고 무채를 굵직하게 썰어 버무린다. 맛없는 음식만 먹던 남편과 나는 그나마 맛있다고 잘도 먹는다. 저희끼리 얽히고설켜 삭혀져 맛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나의 엉뚱한 아이디어다. 내가 만든 맛없는 김치 종류들은 냉장고 구석에서 세월아 네월아 신세가 된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면 김치찌개용으로 변신한다.   내가 또 잘하는 것이 낫또다. 겨울만 오면 만들어 냉동고에 넣어 놓고 된장국에 한 수저 듬뿍 넣어 끓인다. 남편은 콩 씹는 맛이 일품이라며 무척 좋아한다. 콩을 하루 동안 불린다. 불린 콩을 압력밥솥에 밥처럼 한다. 물기가 없는 상태의 뜨거운 콩에 볏짚 같은 재료가 없으니, 시중에서 판매하는 낫또 두 팩을 넣어 섞는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방 스팀 위에 낡은 담요 서너장을 덮고 하루 이상 처박아 두면 진이 찐득찐득 올라온다. 남편은 가자미식해와 낫또를 잘하면 요리 솜씨가 대단한 거라며 나를 띄운다. 속셈은 낫또와 식해만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수시로 만들라는 것이다.     “이제 낫또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식혜 만들 때가 지난 것 같은데?”     남편은 내 표정을 살피면서 은근히 만들라고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야만 하는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김치 쪼가리처럼 찌그러져 없는척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가자미식해 낫또 음식 솜씨 함경도 시어머니 냉장고 구석

2025-03-06

[글마당] 온돌방과 된장국

“어쩜 단 하루도 빼지 않고 산책해요?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갑자기 눈이 쏟아져 쌓인 날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도어맨이 말했다.   “아침에 산책하지 않으면 종일 몸이 찌뿌둥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산책한다. 눈 오는 날은 세상 소음이 눈에 덮어 고요하다. 눈 위를 걷는 내 발자국 뽀드득 소리만 들린다. 비 오는 날은 비에 젖은 숲 냄새 맡으며 빗물에 씻겨 내려간 깨끗한 인적 없는 길을 걷는 맛이 상쾌하다. 흐린 날엔 사색에 잠긴 철학자라도 되는 양 걷는다. 화창한 날, 햇볕 받은 몸은 늘어져 바람에 실려 가듯 걷는다.   일 년 중 며칠 없는 눈 오는 날은 산책 후 야외 자쿠지 사우나 탕에 들어가 푹 잠기고 싶다. 마침, 친구가 눈이 꾸무럭거리며 오려고 발버둥 치던 날, 찜질방에 가자고 했다. 40년 전 친구가 미국에 오려고 준비하던 중 이태원에 가서 쇼핑하다가 나의 친정아버지를 만났다. 내 아버지는 무척 상냥한 사람이다.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예쁜 여자에게는 더욱 친절하시다. 두 사람이 어떻게 죽이 맞았는지 미국에 가면 우리 딸에게 연락해 보라고 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도 친정아버지 닮아 상냥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싹싹하다. 한자리 떡 차지하고 앉아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 아버지가 소개해 준 친구는 어딜 가나 모두와 친해질 만큼 사교적이다.     “나 몸이 찌뿌둥해. 찜질방 가자?”   찜질방 갈 기회가 없는 나는 눈 오는 날의 사우나 탕을 상상하며 두말하지 않고 친구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찜질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차, 잘못 왔구나.’ 했다. 시설이 낙후되어 깨끗하고 산뜻한 맛이 없다. 뭔가 구질구질하달까? 이왕 왔으니 어쩌겠는가. 지저분한 곳은 시선을 피하고 대충 샤워하고 온돌방에 들어가 누웠다. 등을 지졌다. 몸이 가뿐해졌다. 배를 채우고 다시 소금방 무슨 방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방들을 친구 따라 돌아다녔지만, 온돌방이 제일 좋았다.     오래전 한국 여행길에, 사찰에 머문 적이 있다. 뜨끈뜨끈 끓는 온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오래 푹 자다 일어난 듯 겨울 여정의 피로가 다 풀려 몸이 홀가분했다. 매서운 산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눈길 위에 새겨진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된장국 냄새가 피어나는 사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심심한 간으로 고유한 맛을 그대로 살린 된장국에 감자 졸임과 고추나물의 간소한 상차림이 어찌나 맛있던지! 또 그곳으로 가고 싶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온돌방 된장국 된장국 냄새 사찰 식당 오래전 한국

2025-02-20

[글마당] 소피아 딸

오래전 일입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무언가를 보는 순간, 희미함을 뚫고 며칠 전 일처럼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 잡는 기억 말입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핍홀로 내다봤습니다. 소피아 딸 지니가 서 있었습니다.   “웬일이니?” “아줌마 집에 들어가도 돼요?”   “엄마가 찾지 않을까?” “엄마는 아침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갔어요.”   “어린 너를 두고 어딜가? 아빠는?” “어제 고모와 함께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어요. 고모가 나를 데리러 왔나 봐요.”   세상이 온통 눈으로 수북이 쌓인 어느 날,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이국적인 여자가 내가 사는 건물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불안과 초조로 방황하는 애처로운 그녀의 눈빛이 나와 마주쳤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근심으로 가득 찬 시선은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눈 덮인 시베리아를 헤매는 주인공 라라를연상시켰습니다.   “한국에 파견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미국에 와서 퀸즈에 살았어요. 신문사에서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아파서 4년 전에 시집이 있는 오하이오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시누에게 아이를 맡기고 직장을 다녔지요. 제가 싫다는 데도 부득부득 시누 부부가 아이를 자꾸 입양하겠다는 거예요. 아이를 뺏길 것 같아 겁이 났어요. 마침, 온라인으로 아파트 렌트한다는 광고를 보고 야밤에 아이와 남편을 데리고 도망치다시피 왔어요.”   이사 오자마자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네 고모가 너를 예뻐했다며.”   “아니요. 때리고 야단쳤어요. 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저는 아줌마가 좋아요.”   한숨 쉬며 말하는 아이의 큰 회색 눈이 물기로 반짝였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나도 갑자기 눈가가 젖고 목멘 소리로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다섯 살인 아이는 백인 아빠를 닮아 금발 아래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른 흉내를 내는 제스쳐와 말씨로 쉬지 않고 떠들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또 났습니다. 핍홀로 내다보니 아이 엄마 소피아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 지니를 보지 못했나요?” “우리 집에 있는데요.”   “너 여기서 뭐 하니? 얼마나 찾은 줄 알아. 말도 하지 않고 소리 없이 문 열고 나가면 어떡해.”   아이는 어른처럼 꼰 다리 위에 손으로 턱을 바치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밖에 나갔다 오셨나요? 고모가 오셨다면서요?”   “고모요? 우리가 어디 사는 줄도 모르는데 고모가 어떻게 와요? 저는 온종일 집에 있었어요.”   나는 누구 말이 진실인지 헷갈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녀를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훌쩍 이사갔습니다.   어른들의 불안한 틈바구니에서 자란 아이의 눈물 젖은 회색 눈동자가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떠오르곤 합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소피아 어제 고모 회색 눈동자 어른 흉내

2025-02-06

[글마당] 날 좀 내버려 둬

“3시에 나갈까요.”   내가 모처럼 남편과 함께 가야 할 모임이 있어서 말했다.   “뭘 그렇게 일찍 나가. 일찍 가서 길바닥에서 기다리려고. 3시 30분에 나가자고.”   남편이 대꾸했다.   “또 시작이군. ‘알았어’라고 대답하면 간단할 일을 항상 뒤틀어 일을 어렵게 만든다니까. 그럼, 각자 나가고 싶은 시간에 나가서 모임에서 만나요.”   나는 항상 부정적으로 뒤트는 남편의 대답을 듣느니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하다.     초대받은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자고 눈치를 준다. 모임에서 남편 옆에 있으면 빨리 가자고 쿡쿡 찌르며 재촉하기 때문에 나는 남편을 피해 다닌다.     “아니 오자마자 가? 집에 그리도 가고 싶으면 먼저 가. 나는 더 놀다 갈 거야.”     될 수 있으면 남편과 멀리 떨어져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편은 내 주위를 뱅뱅 돌다 다가와서 “이젠 그만 가지.”   “왜 먼저 가라는데 가지 않고.”   “답답해서 그래. 그러면 집 문밖에서 기다릴게. 천천히 이야기하다가 나와.”   “나는 오래 있다가 갈 거야. 왜 밖에서 기다린다는 거야. 기다리지 말아. 나 좀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   친구들과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조용하다 싶어서 둘러봤다. 남편이 집에 갔는지 없다. 느긋해진 나는 마음 놓고 수다에 푹 빠졌다. 모임이 거의 끝나갈 즈음 “선배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헤어지기에 섭섭해요. 우리 카페 가서 더 이야기해요.”   “나야 좋지. 그렇게 하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남편의 큰 얼굴이 문밖에서 떡하니 버티고 나를 반긴다.     “아이 깜짝이야. 아니 집에 가지 않고 왜 여기 서 있는 거야.”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마누라 내려오길 기다렸지.”   후배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내가 집에 가지 않으면 저 사람 계속 길바닥에서 서 있을 것 같아.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남편과 집 방향으로 걸었다. 좀 미안한 감이 들었다.   “고마워 기다려줘서.”   “밤늦게 마누라 혼자 집에 오다가 무슨 일 날까 봐 기다렸지.”   “길바닥에서 기다려 주지 말고 함께 가야 할 때, 내가 나갈 시간을 말하면 그냥 ‘알았어’라고 말해주면 좋겠어.”   나는 남편의 부담스러운 애정 표현과 내가 말하는 것마다 부정적으로 뒤트는 일상으로 40년을 시달렸다. 한편으론 싱글의 자유로운 삶이 부럽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애정 표현 우리 카페 선배님 오랜만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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