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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 이야기] 이상의 나, 현실의 나

우리 안에는 두 가지의 '나'가 있다. 양심을 따라 선하고 올바르게 살기 원하는 '이상의 나'와 몸과 맘이 원하는 대로 따르기 원하는 '현실의 나'다. 그 둘이 맞서 씨름할 때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실제 삶에선 이상보다 현실이 단연 앞선다. 직설적으로 말해 '현실의 나'란 정욕에 매인 모습이다. 정욕은 달콤하지만 채우고 채워도 만족함이 없다. 믿음이 아니고는 '이상의 나'를 올바로 정의하지 못한다. 이상 자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하는 것이고 그 창조주의 뜻은 양심보다 더 높은 차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상'에 대해 맘 쓰게 되는 근원이 뭘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이상을 사모하는 기본 바탕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나'에 대한 의식이 희박할수록 믿음의 삶은 이중적이 되기 쉽다.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삶과 모습은 세속적, 정욕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의 자녀라면서도 우린 얼마든지 어둠의 세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사실을 천국 시민권 취득처럼 여길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늘 되새겨야 한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이상의 나'를 향해 이끄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현실의 나'에 집착하고 있을 순 없다. 결국, '이상의 나'의 표본은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라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가라고 말씀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자신을 다스리고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의 힘이면 극복할 수 있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믿음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포기할 일이 아니다. 나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며 힘을 불어넣어 주시려 주님이 함께하신다. '이상의 나'를 더욱 강건케 하셔서 육신의 나, 현실의 나를 밟고 일어서게 하신다. 믿음을 가진다면 그 승리를 이뤄내야 한다. shsynn@gmail.com

2016-10-03

[왕같은 제사장] 마음의 태도를 훈련하라

김남준은 그의 책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한국교회가 공적인 예배에 대해 경박하고 의무감 없이 배교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등록한 교인 수에 비하면 비참할 정도로 적은 숫자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예배를 하나의 문화행사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생명력을 잃고 타성에 빠진 예배의 현장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지적이다.   1세대 신앙의 선배들은 성수주일이라는 반복의 습관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이 유산은 이미 한국교회 115년 역사를 통해 싫든 좋든 기독교인들의 몸에 배어 있다. 안타깝게도 이 유산이 율법적인 의무처럼 화석화됐다. 왜 성수주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타성에 빠져있다.   성수주일을 재해석해야 한다. 거듭나게 해야 한다. 율법과 규범적 부활이 아닌 그 가치와 개념적인 부활을 실현시켜야 한다. 성수주일이 왜 중요한지, 성수주일의 핵인 예배에 왜 목숨 걸어야 하는지 계몽하자는 것이다. 일주일 단위로 반복되는 기독교 초유의 의식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고밀도 사건이지만 성도의 무의식에 갇혀있는 회중예배의 가치를 일깨우자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습관에서 태어난다. 존 스미스는 ‘포옹’에서 부모가 자녀의 인생에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좋은 습관이라고 했다. 좋은 습관 하나가 사람의 인생에 최고의 유산이라면 하물며 우리의 신앙 습관은 어떤가? 그 어떤 신앙습관보다 좋은 예배습관이 우선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습관이란 타성에 젖은 반복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닉 이체스는 타성의 위험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위 상황에 익숙해지면 악의 섞인 무지가 생긴다. 역사적으로는 이를 7대 죄악 중 하나로 보는데, 그 이름은 ‘실증(satiety)’이다. 싫증이 나면 세상 최고의 것도 기쁨을 주지 못한다.” 타성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싫증은 예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를 극복하는 지름길은 마음의 습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의 태도는 예배의 가장 본질적인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 문제는 한번 들여진 습관이라는 무소부재의 관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바로 이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에게 잘못 길들여진 태도나 행동 습관은 우리의 인생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문제가 만들어졌던 피상적인 수준의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스티븐은 새로운 차원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것은 개인 훈련의 효율성과 대인관계의 효과성을 달성하기 위해 원칙 중심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외적인 태도보다는 성품에 그 근본을 두고 ‘내면에서부터 변화하여 외부로 향하는’ 접근법이다. 결국 스티븐이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마음의 습관이 바뀌어야 외적 태도도 바뀐다는 것이다.   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목적은 바로 영적 습관인 좋은 마음의 태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성품이 예수 닮는 성품으로, 우리의 삶이 성령의 사람으로, 우리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배, 역동적인 예배는 결국 예배자의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예배습관이 형성되기만 하면 그가 드리는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 인격적인 만남과 지속적인 사귐이 가능해진다. 그럴 때 예배는 성도의 삶을 그 어떤 교육이나 훈련 프로그램, 양육 시스템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공적 양육의 현장이 된다.

2012-02-27

[영혼의 거울] 내려놓음의 훈련

사순절이 시작되던 지난 수요일 오후 저는 우리 교회 가까이에 있는, 메시아닉 쥬 교회인 ‘오헤브 이스라엘’의 랍비 마이클 루돌프(Michael Rudolf) 담임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회당에서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예배에 회의를 느끼고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로스쿨을 나온 뒤 변호사로 일할 때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방문을 받고 새롭게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후 성령님의 두번째 방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면서 그 분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현재는 오직 목회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고 계십니다. 아이들을 성경적 진리와 유대식 교육으로 가르치는 학교 설립을 우리 교회에서 추진하는 데 대해 기뻐하시면서 여러가지 실제적인 도움을 주셨지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변호사직을 내려놓으셨는데 그 결정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 분은 즉시 답하셨습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며 바로 이 일을 위해 자신이 부르심받았다는 기쁨 가운데 감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의 답변은 사실 현재의 제 삶을 말해주기도 하지요. 저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세상에서 명예롭게 보이는 직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당시 저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내려놓음’의 결정이었지만 현재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요. 그러면서 한편 생각합니다. 내려놓음은 일생에 한두 번 있는 극적인 결정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내 삶의 방식이 돼야 한다고. 주변의 성도님들이나 목회자들을 대하면서 늘 안타까운 점은 바로 ‘내려놓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성향’입니다. 더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면서 무언가에 집착하는 분들을 대할 때 꼭 드리고 싶은 충고가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자 애쓰면 하나님은 높이시고자 애쓰시고, 자신을 높이려고 애쓰면 하나님은 낮추시려 애쓰시기에 결과적으로 스트레스와 짜증이 많아집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고자 했던 성도들이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죄를 참회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자기 훈련의 기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기간에 하루 한 끼 이상의 금식을 하거나 생선이나 육식 등의 기름진 음식, 커피나 간식을 금하고 세상적인 영화나 오락 등을 삼가며 기도와 예배, 성경 읽기와 말씀 묵상, 봉사와 헌신 등에 힘씀으로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위해 큰 고통 가운데 숨지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각자의 모습을 새롭게 돌아봐야하겠지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죄였습니다. 죄로부터의 분리가 사순절 훈련의 궁국적 목적이 돼야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저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제 삶에서 더욱 내려놓아야할 영역들을 보여주세요!”.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소멸되고 가지려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는 우리의 삶…. 과연 우리는 무엇을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까? 존 앨드리지가 쓴 ‘마음의 회복(Wild at Heart)’에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비밀의 화원’이라는 노랫말이 인용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언제나 있으리라”고 약속되는 비밀의 화원은 100만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고 그는 노래합니다. 그래서 비밀의 화원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들은 사력을 다하지만 언제나 그 앞에 100만 마일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애쓰고 노력하지만 공허하고 만족함을 모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우리 모두 은밀히 바라보고 붙잡는 비밀의 화원을 주님께 내려놓읍시다. 그러면 주님은 화창한 주님의 화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 영혼은 비로소 참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sjclee@gmail.com

2012-02-27

[영혼의 거울]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1~53).  바로 이 설교는 천사같은 모습으로 순교했던 유명한 초대 교회 집사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창찬받았던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어봅시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사실 예수님의 설교는 이보다 더 강도가 높습니다. “화 있을진 저, 외식하는 서기관들아” 로 시작되는 7번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 가운데 회칠한 무덤 같다고도 하셨고,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직설적으로 힐난하시며, 교인을 만들어 너희보다 더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도 말씀하시며 얼마나 크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셨는지 모릅니다.   결국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가슴이 찔려 이를 갈고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였고,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였고, 분노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물론, 이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가진 공통점은 생명을 걸고 담대하게 해야할 말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바로 이같은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세례요한, 스데반의 설교가 가진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큰 긍휼 가운데 우러나온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만일 대제사장이나 공회원들에 대하여 미움과 분노에 차서 그렇게 강력한 책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면 당시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행 6:15). 스데반은 마지막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감동적인 중보기도를 올려드리는 이 위대한 성인은 바로 우리 주님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합니다.   진정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만이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모질게 매질을 하며, 직설적으로 야단하고 꾸짖을 수 있듯이, 진정 주님을 사랑하며 영혼을 사랑하는 설교자만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백성들과 성도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확실하게 경고하고 꾸짖고 책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에게 담대함이 부족한 이유는 성도에 대한 사랑이나 주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정직한 눈으로 볼 때, 대부분 설교자들이 그저 회중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준비하느라 골몰합니다, 통렬한 책망과 예언이 사라진 약하기만 한 메시지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개탄하실까요? 정말 제 자신을 포함해 우리 설교자들은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집요하게 이스라엘 멸망을 염원하고 있는데, 최근에, 이스라엘에서 이란을 폭격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했는데 59% 가 찬성했다고합니다. 외교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란의 핵무기 시설 훼파를 위한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은 거의 기정 사실화 되어가는데, 그렇다면 이란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란의 미사일 보복이 이뤄질 경우 이란과 미사일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시리아, 헤즈볼라, 하마스등도 동시에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고 결국 중동 전역과 유럽, 미국에도 큰 피해를 불러올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에 열방이 모여 싸우는 전쟁이 일어날 때를 주의하여 보라고 경고합니다. 정말 우리는 준비되어야겠습니다. 교회와 성도를 깨우고 준비시키는 강력하고 직설적인 설교가 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이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sjclee@gmail.com

2012-02-21

[왕같은 제사장] 트라이앵글의 사랑

지난 주말 노스캐롤라이나 트라이앵글 지역에 있는 온누리교회를 다녀왔다. 트라이앵글은 더햄의 듀크, 채플힐의 노스캐롤라이나대, 랄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등 3개 대학과 기업들이 협력해 만든 동부의 실리콘 밸리다. 이 교회는 영생장로교회 부목사였던 지승남 목사가 6년 전 개척했다. 한인인구 6000명 정도인 이 지역에 한인교회 20여개가 오손도손 모여있다.   온누리교회는 120년 역사에 노인 10여명 남은 미국교회 예배처소를 빌려서 40~50여명의 교우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최근 이 교회의 성장에 충격을 받은 미국교회가 견제하는 바람에 예배시간도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로 옮겼다. 주인 교회는 성장을 위해 고심하다 최근 결단을 내렸다. 목회자 사례를 2배로 올려 과거 교회 부흥의 경험이 있는 60대 목사를 새로 청빙했다. 작은 한인교회의 성장에 도전을 받아 몸부림치는 유서 깊은 미국교회의 모습이 새로웠다.   주일 오후 1시 예배는 청소년, 청장년과 노년층 40~50명이 함께 드린다. 조만간 청소년 목회자를 따로 세울 예정이다. 예배 시작 전, 아담한 예배당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교우들의 몸놀림이 생동감이 넘쳤다. 이날 시편 51편 17절 말씀을 갖고 ‘예배의 가장 탁월한 재료’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2PM 박재범 예화를 들 때 청소년 몇 명이 적극 반응했다. 청장년층은 아주 작은 도전에도 아멘으로 화답했다.   오후 5시 찬양부흥회가 열렸다. 이 교회에는 찬양팀이 아직 없다. 처음에는 키보드 반주자 한 명과 기타만으로 집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웃에 있는 선한목자교회의 찬양팀이 돕겠다고 했단다. 반신반의했는데 오후 4시 연습 장소에 가보니 이미 일찍 도착해서 손수 가져온 음향 시스템과 악기들을 셋업해놓고 연습하고 있었다. 사전에 보낸 악보와 편곡보로 이미 연습해 와서 그런지 리허설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집회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예배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웃에 있는 네 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포함한 성도들이 함께 온 것이다. 이민교회에서 진짜 보기 드문 현상이다.   교회의 벽을 넘어 교우들과 함께 발걸음한 이웃교회 목회자들, 교우들의 그 수수한 모습이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세, 기뻐 뛰는 예배와 찬양, 뜨거운 눈물의 기도, 결단과 헌신, 친밀한 나눔의 교제, 이웃교회를 배려하는 코끝 찡한 사랑, 대형교회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진한 감동이다.   집회는 거의 8시가 다 되어 끝났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이어서 이웃교회 찬양팀과 온누리교회 찬양팀 관심자를 대상으로 ‘선곡이 곧 신학이다’ 세미나를 했다. 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피곤도 잊고 열변을 토했다.   다음날 오전까지 푸욱 쉬고, 지승남 목사와 선한목자교회 박일종 목사와 점심을 나눴다. 둘 다 리버티신학교 동문에 총신대원 후배들이며,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개척하여 오늘에 이른 개척자들이다. 지승남 목사는 1년이 넘도록 교우 한 명 없이 가족과 함께 예배드렸다고 한다. 그 어려운 시간 때문에 한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단다. 박일종 목사는 시작한지 3년 만에 고속 성장을 경험했지만 그 기간에 예상치 못한 성도의 배신 때문에 자신이 더욱 겸허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고 간증했다. 10년만에 디아스포라 교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 필자의 간증도 나누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찐한 오찬이었다.   이들은 나이 40을 눈 앞에 둔 한국교회 차세대 지도자들이다. 한국의 초대형교회와 비할 수 없는 미 중소도시의 작은 이민교회를 섬기지만, 한 영혼을 향한 이들의 눈물겨운 헌신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위대한 사랑임을 확신한다. 이들의 작은 섬김으로 노스캐롤라이나 트라이앵글 지역에 교회의 벽을 넘는 예수의 사랑이 조용히 번져가고 있음을 확인한 뜻 깊은 주말이었다.

2012-02-21

[지혜의 향기] 정치와 선거의 계절

미국이나 한국이나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선거의 계절이 다가온다. 정치란 무엇인가? 나라의 안팎에서 일어나 서로 부딪히는 집단 간의 이익을 잘 다스리고 조정하는 행위이다. 그럼 선거는? 그런 일을 하라고 집단에서 대표를 내세워 뽑는 일이다. 이렇듯 정치든 선거든 그 밑바탕에는 집단과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이 깔려 있고 고통과 불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 너도 당해 봐라 하는 보복심이 얽혀 있다. 자칫하면 난장판이 되기 쉬운 이유다. 세상이 아수라장이 돼서 다함께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첫째가 상대를 인정하고 협상하면서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자면 말귀 잘 알아듣고 통솔력 있는 유능한 대표자를 제대로 뽑아야 하지만 심부름꾼인 주제에 엉뚱한 짓 못하도록 늘 살피기도 해야 한다. 기죽지 않을 만치 대접도 해 줘 가면서 주인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수시로 일깨우고 부려 먹어야 한다. 채찍과 당근의 수법이다. 이게 어느 정도 되고 있는 나라가 선진 민주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이기심이나 탐욕 보복심 자체를 원천적으로 줄여 버리는 것이다. 그 원천은 우리 각자의 가슴 속에 있다. 우리의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 가지 샘물을 메우고자 스스로 노력하면 세상 괴로움의 물줄기는 그 원천에서부터 조금씩 말라 갈 것이다. 괴로움에는 생로병사라는 개인의 근본고가 있고 사회의 잘못 된 제도와 문화 역사 함께 지은 악업 등에서 오는 사회고가 있다. 근본고는 신행을 통해 해탈에 다가감으로써 줄어들지만 사회고는 혼자서는 해결이 잘 안 된다. 만약 무리를 이루는 자마다 각자의 개인고가 수행을 통하여 모조리 사라졌다면 사회고라는 것도 저절로 해결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다 성불을 한 그런 이상 사회는 아직 없다. 세상은 깨달음에 있어서도 고르지가 않으니 얼마간이라도 먼저 깨달은 이들이 나서서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이러한 사회고가 어느 정도 덜어질 수 있다. 그런데 사회를 위한 이러한 개별적인 보시도 보시지만 잘못 된 제도나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더 효과가 크다. 그러자면 미우나 고우나 다시 정치를 부릴 수밖에 없다. 우리 불자들도 신행과 더불어 투표부터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고국의 정치판은 진보니 보수니 하며 다소 어지러워 보이지만 결국 자유와 평등에 관한 얘기다. 대체로 자유를 더 중시하면 우파요 보수며 평등에 더 무게를 두면 좌파요 진보라고 하는 모양이다. 실은 두 가지가 다 소중하다. 자유는 다른 말로 해탈이요 평등이란 여래장 개유불성이다. 불교의 목표와 전제다. 누구에게나 고루 불성이 없다면 중생은 널리 포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포교의 최종 목표는 누구나 대자유를 얻는 해탈에 다가가게 함이 아니던가!

2012-02-20

[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지난 12일 코너스톤 교회에서 열린 간증집회를 통해 프로골퍼인 최경주 선수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들었다. 최 선수는 PGA 투어에서 8번이나 우승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라고 말했다. 굴곡 많은 인생에서 최 선수가 붙잡은 것은 기도와 성경말씀이었다. 매번 피 말리는 박빙의 승부에서 '말씀'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솔깃했다. 마치 힘든 순간마다 하나님께 매달리면 다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난 2002년 최 선수는 애리조나 투산에서 열린 PGA 오픈 경기 당시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티오프시간에 정확히 '3초' 늦었다. 경기위원은 여지없이 최 선수에게 2벌타를 매겼다. 누가봐도 억울했다. 이 때문에 결국 최종 순위는 35위로 밀려났다. 최 선수는 "그때부터 남들보다 5분 빨리 가고 5분 늦게 나오는 시간 관념을 갖게 됐다"며 "이는 연습시간도 마찬가지였는데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연습하고 1시간 늦게 나오는 습관을 길렀다"고 말했다. 그렇게 1년 2년이 흘러 가다 보니 남들보다 연습하는 시간이 자연스레 배로 늘어났다. 다른 선수들과 목표는 같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최 선수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별도 많았다. 영어도 안됐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짜증나고 힘들지만 사람들을 미소로 대했다. 라운딩을 마치면 함께 한 선수들을 안아줬다. 최 선수는 "사람을 정말 진실하게 대했더니 6년 정도 지나니까 그때야 비로소 인간관계에 대한 열매가 맺어지더라"며 "이제는 그들이 나를 대변하고 나를 안아주며 나를 존중해준다"고 했다. 최 선수는 정상의 자리를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본인의 노력이 밑바탕 되고 기도와 성경 말씀이 그를 이끌었다. 유명 인사의 간증은 하나님이 이룬 '현실적 역사'에만 눈길이 가기 쉽다. 더 높아지고 더 소유하길 원하는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을 기복(祈福)의 대상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2012-02-20

[환경신학] 해수면 상승이 가져올 전 지구적 재앙

빙하(氷河)와 빙산(氷山)의 차이는 영어로 빙하는 'glacier'로 빙산은 'iceberg'로 각각 표현한다. 이 둘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빙산'은 육빙(陸氷)으로부터 분리되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큰 얼음산이고 '빙하'는 만년설이 응결해서 육지 상에 생성된 빙체(氷體)이다. 즉 히말라야 산맥같이 육지 위에 존재하는 큰 얼음덩어리를 빙하라 한다. 물에 떠 있는 빙산이 녹으면 해수면의 높이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지만 빙하가 녹으면 엄청난 재해를 일으킨다. 머지않은 미래에 지구온난화가 가져올 전 지구적 재해는 빙하의 해빙으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직결된다. 가히 전 지구적 재해라고 할 수 것은 전 세계 인구의 41%가 해안가에 살고 있고 인구 1000만 명 이상의 대도시의 2/3도 바다와 인접한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빙하가 차지하는 면적은 현재 약 1억 5000만 평방킬로미터로 전 육지의 약 10%에 해당한다. 그 중 98%는 남극대륙과 그린란드에 존재하고 그 밖에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각 대륙의 고산과 북극에 산재하는 섬에 분포한다. 현존하는 빙하를 수량으로 환산하면 약 1650만 입방 킬로미터에 이르며 해양을 포함한 지구상의 물의 1.1%에 해당하고 육지의 물 가운데에서는 75%를 차지한다. 기후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2100년까지 해수면이 최소 1미터에서 최대 4미터 상승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구온난화에 의해 지구 전체 담수량의 약 90%를 가두고 있는 남극의 빙산이 일 년에 약 1조 톤이라는 엄청난 양의 얼음 덩어리를 방출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빙하가 전부 녹는다고 가정하면 해면은 현재보다 60미터 정도 상승할 것으로 추산한다. 엄청난 양의 담수가 녹아 바닷물의 염분 농도를 바꾸게 되면 해류 순환이 느려지게 되어 정지되거나 역류할 수도 있다. 또한 바닷물의 산성화와 산호초의 떼죽음과 독성 해조류의 증가로 인하여 해양 생물의 대량멸종을 초래할 수 있다. 현재 해수면 상승으로 18개국 이상의 섬나라가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수많은 다른 해안지역들도 계속 위협을 받고 있다. 해수면이 1미터 상승하면 1억 명 이상의 기후 난민을 발생시키고 방글라데시 같은 저지대 지역은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이며 세계 경작지의 1/3 이상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런던 카이로 방콕 베니스 뉴욕 상하이 같은 주요 도시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자신의 물질적 욕구와 자국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사고체계와 생활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인류는 전 지구적 재앙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수면의 상승과 해양생태계의 파괴를 초래하는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구시민이라는 자의식을 굳건히 가지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다. (골 3:5) 공동체를 생각지 않는 탐심과 이기적 욕망이 바로 전 지구적 재앙의 원인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것이다. 계시록의 저자는 역사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일곱 심판 시리즈를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16:3)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무자비한 무력으로 주변세계를 평정한 당대의 로마제국을 향해 격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기적 탐심으로 인하여 생태계를 신음케 하고 황폐케 하는 우리를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볼 때이다.

2012-02-13

[성경의 심리학] 고갈되는 자제력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가 그의 동료들과 자제력 고갈 실험을 했다. 굶주린 대학생들 앞에 쿠키를 놔두고 대신 무(radish)를 먹게 하였다. 또 한 그룹은 무(radish) 대신 쿠키를 먹게 하였다. 잠시 후 두 그룹을 모아 답이 없는 퍼즐 문제를 풀게 하였더니 쿠키를 먹지 못했던 그룹은 8분 후에 문제 푸는 것을 포기하고 쿠키를 먹었던 그룹은 19분 동안 문제를 풀다가 포기했다. 쿠키를 먹지 못했던 그룹은 이미 자제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의 결과는 우리의 자제력과 의지력은 고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에 세운 결심과 의지력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갈돼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지속적인 새로운 결심과 의지 대신에 삶의 그릇을 바꾸기를 제안한다. '스위치'의 저자 '칩히스'(Chip HJeath)는 그의 책에서 코넬대학의 '브라이언 윈싱크'의 연구결과를 말하였다. 영화관에서 큰 용기의 팝콘을 받은 자가 작은 용기의 팝콘을 받은 자보다 더 많이 섭취한다는 연구 결과였다. 이는 다이어트를 하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의지력과 자제력이 고갈되어 다시 원래의 식생활로 돌아가지만 만약 집안의 그릇을 작은 그릇으로 바꾸면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내 삶의 환경을 내 목적에 맞게 바꾸는 것이다. 고갈되어가는 의지와 결단으로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없기에 내 삶의 사이클 안에 자연스러운 환경을 조직이나 또는 누군가와 함께 만든다면 내 의지의 고갈 없이 나는 내 목적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집에서보다 밖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을 '동조 효과'라고 하는데 집에서 아무리 "공부를 해야지" 하고 결심을 해도 내 의지와 자제력이 고갈되어 학습을 지속하는 데에 여러 장애물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에 나를 공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성경은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덧입으라고 말한다.(골 3:9-10) 새 옷을 입으면 내 생각도 삶의 양태도 그 옷에 맞게 변화될 것이다.

2012-02-13

[생활 속에서] 기능주의의 위험

최근 이민사회에서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있다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이용가치가 있을까"라고 한다. 또한 "이 사람을 만나면 무엇을 뽑아낼 수 있을까"를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났을 때 이용 가치가 별로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그 관계를 끊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기능주의의 위험성이다. 기능주의는 사람을 지정 의를 가진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기능으로만 보는 것을 뜻한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황혼 이혼'도 사실은 어떤 면에서 기능주의가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생각된다. 한평생 결혼 관계를 유지해왔던 부부가 갑자기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평생 일하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이제는 집에서 할 일 없이 소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 그 기능이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남편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뒷바라지를 해오던 아내가 어느덧 나이가 많아 병들고 약해질 때 아내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능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피하고 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기능으로만 보는 무서운 사상이 평생 동안 삶을 같이해온 동반자를 쉽게 버리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을 단지 기능으로 보는 사상과 철저하게 싸운다. 예수님은 사람을 기능이 아니라 인격체로 보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세상이 보는 것처럼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보셨다면 모든 면에서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들은 모두 버림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만나 주셨던 사람들 가운데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사마리아 여인 돈밖에 모르는 민족의 배반자 삭개오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창녀 막달라 마리아까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버림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인정해주시고 받아 주셨던 것이다. 뉴욕 지하철에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여학생 둘이 타서 자리에 않았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한 흑인이 그 여학생들 옆에 앉으려 하였다. 그때 여학생들은 "야 깜둥이다. 다른 데로 가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흑인이 갑자기 그 여학생들에게 "나는 깜둥이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라고 한국말로 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군으로 한국에 파견 나간 일이 있었는데 한국인을 보자 너무 반가워 다가갔다가 오히려 인종 차별적 언어를 듣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종 차별적인 사고도 사실은 사람을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기능으로 보는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점점 기능주의적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이때에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사고의 중심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인격으로 대하는 자세를 키워주는 것이다. 기능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사는 자들은 자신도 결국 기능주의적 사고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나와야 한다.

2012-02-13

[삶과 깨달음] 아름다운 동행

얼마 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던 호텔 로비에서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걸어가는 중년 부부를 보았다. 그 부부가 유난히 눈에 띄었던 이유는 '팔짱을 낀 중년'(?) 이어서가 아니라 두 분 모두 검은색 색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경의 색상이나 모양으로 보아서는 영락없는 시각장애인이었지만 걸음걸이가 왠지 여유로워 보였다. 카운터에 이르자 남자 분은 색안경을 벗는데 여자 분은 그대로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자 분의 손에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가 들려 있다. 그제야 사정을 짐작했다. 어색해 보이는 남편의 색안경이 시각장애인인 부인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나누어 갖기 위한 세심한 배려라는 것을. 이 부부를 보며 지난 달 언론에 보도되었던 '세르벨 부부'의 순애보를 떠올렸다. 아내인 니콜의 회갑을 맞아 나선 크루즈 여행은 3시간 만에 악몽으로 끝이 났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남편은 하나뿐인 구명조끼를 마지막 키스와 함께 부인에게 남긴 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아내는 수십 분을 허덕이다 남편의 '사랑'이 담긴 구명조끼 덕에 섬 주민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부부사이의 신의가 무너짐으로 인해 세계 1 2위를 다투게 된 한국의 이혼율은 이 곳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선전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는 미주 한인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가정의 바탕은 부부이며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 또한 부부의 도로서 서로 경애하고 알뜰한 벗이 되는 '화합' 정조를 존중하고 세상에 드러난 대악이 아니고는 어떠한 과실이라도 관용하는 '신의' 자립하는 정신 아래 부지런히 생활하여 넉넉한 가정을 이룩하는 '근실' 국가나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는 '공익'을 말씀하다. 이 중에서도 '대악이 아니고는 어떠한 과실이라도 용서하는 신의'를 특히 새겨보셨으면 하고 이는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LA에 둥지를 튼 지 이제 열흘 남짓 아직 갓 전학 온 학생의 심경이다. 세상의 학문을 많이 공부하지도 못했고 타종교의 교리에 정통하지도 못한다. 다만 훌륭한 성직자란 '몸담고 있는 종교의 본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스승님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찌하면 지식이 넓어지겠습니까?"라는 다른 종교인의 물음에 대종사님께서는 "그대를 대할 때는 당신 종교의 지식을 얻게 되고 또 다른 교인을 대할 때에는 그 교의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여러분과의 만남이 지견(知見) 교환을 통해 서로가 공부하고 성장하는 특히 종교가 다른 미주한인사회의 신앙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2012-02-13

[지혜의 향기] 몸의 사리와 법의 사리

다른 이야기에는 꾸벅꾸벅 졸다가도 어느 스님한테서 사리가 몇 알 나왔다는 이야기에는 눈을 반짝 하는 이들이 있다. 불교에는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기적 얘기 같은 게 흔치 않아서인가? 입적하신 스님이 남기신 거룩하신 가르침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다비를 한 그 몸에서 정말로 영롱한 구슬이 나왔나 신비한 빛을 띠는 유리 조각 같은 것을 몇 알이라도 남겼느냐만 관심거리다. 본래 사리란 거룩한 이의 주검을 뜻하는 사리라에서 온 말로 유해 그 자체를 가리켰다. 곧 전신 사리다. 그러다 이 주검을 다비하면 즉 불태우면 알맹이 뼈만 남는데 이 불타고 남은 뼛조각을 잘게 빻은 것을 사리라고 일컫게 되었다. 말하자면 쇄신 사리다. 우리 누구나 죽어서 화장이 된다면 이런 뼛조각 즉 쇄신 사리가 안 나올 리 없다. 혹시 화장을 했는데도 빻아서 뿌릴 아무 사리가 없다면 조상을 탓할 수밖에 없다. 뼈대도 제대로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얘기가 될 테니까. 어쨌든 전신 사리든 쇄신 사리든 영롱한 유리구슬 따위와는 본래 관계가 없는 말이고 그런 얘기는 다 나중에 생긴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그 전신 사리는 향나무 더미 위에 뉘어져 다비가 되었다. 그런데 다비가 끝난 후 부처님의 뼛조각 가루 곧 쇄신 사리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당시의 정치 세력들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다. 예나 이제나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유명인사의 장례식만큼 본의 아니게 세속의 권력 판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도 드문 것이다. 다행히 중재가 되어 부처님의 사리는 여덟 나라에 고루 나뉘어졌다. 이 나라들은 각기 큰 탑을 세워 이 사리를 모시니 사람들이 찾아와 부처님을 우러르고 기리는 믿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몇 백 년이 지나 인도를 통일한 전륜성왕인 아쇼카 왕이 나타났다. 왕은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의 탑만 남겨 두고 나머지 일곱 곳을 헐어 사리를 꺼내어 온 인도 땅과 해외에까지 골고루 나누어 보내 수많은 불탑을 만들게 하였다. 전세계에 불법을 퍼뜨리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보내진 불사리의 일부가 중국을 거쳐 저 멀리 한국에까지 닿았고 이렇게 전래된 불사리는 다섯 군데에 모셔져 한국 불교의 5대성지가 되었다. 영취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그리고 설악산 봉정암이 그 곳인데 모두 적멸보궁으로 일컬어져 신심 깊은 불자들의 순례 코스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불사리뿐만 아니라 고승들의 사리도 챙겨져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근래에 효봉 스님에게서 많은 사리가 나온 일을 즈음하여 이러한 경향이 심화 되었는데 요즘은 이러한 육신 사리의 신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부작용까지 일부 나타나게 되었다. 부처님이나 고승들의 사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전신 사리든 쇄신 사리든 결국 몸의 사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의 몸이란 법을 잠시 담아 두고 가두어 둘 그릇이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러한 방편이요 그릇일 뿐인 몸 그 몸의 한 부스러기인 몇 조각 사리에 너무 혹하여 그 그릇에 담아야 할 본래의 음식마저 잊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무엇이 그 음식인가? 우리에게 불멸의 빛을 주신 부처님의 진리 육신의 사리가 아닌 그 법신의 사리야말로 우리가 쉼 없이 찾아나서야 할 구도의 참 대상인 것이다.

2011-06-07

[발우에 핀 꽃] 늦게 배워도 30년은 사용한다

사미계를 받을 때, 처음으로 광목에 먹물 들인 승복과 장삼을 받은 이후 그 옷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옷 한 벌 사주는 사람이 없었다. 법주사 강원을 거쳐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도 옷이 없어 애를 먹었다. 가끔 공양주나 채공(菜供), 혹은 바느질 하는 보살님들의 방을 가보면 스님들이 입다 버린 옷들이 한쪽 구석에 정리돼 쌓여 있었다. 거기서 내가 쓸 만한 것을 골라 기워 입으며 해인 강원을 졸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장삼(長衫) 한 벌 해드리겠노라고 하면서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로터리에 사시는 관음심 보살님이 오셨다. 너무나 뜻밖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음심 보살님과 인연이 된 것은 부군께서 세상을 뜨신 이후다. 관음심 보살님께서는 개운사에 오셔서 49일 천도도 드렸고, 그리고 나에게 장삼 한 벌을 해 주셨다. 그러나 장삼 기지를 사는 흥정을 하는데 차마 나는 얼굴이 뜨거워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을 지켜본 후 아무래도 보살님을 공부시켜야 할 것 같아 내가 “공부 좀 해보시죠. 보살님!” 했다. 그랬더니 보살님께서 “스님, 이 나이 먹어서 무슨 공부를 합니까?”하시며 사양 하시기에 “보살님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를 가르쳐 드릴 터이니 한번 해보십시오!”하고 재차 권하고 헤어졌다. 이후에 어느 날 보살님으로부터 마음을 내어 공부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신설동 보살님 집을 일주일에 2~3번을 오가며 우선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명심보감까지 가르쳤다. 한문 공부 시작할 때 아주 작고 간단한 옥편을 드렸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너덜너덜 떨어진 옥편을 한번 본 일이 있다. 이후로 내가 선방에 갈 때 공부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신문의 한문은 다 읽고 경전도 한문이 섞여있는 해석된 글을 모두 읽었다. 뿐만 아니라 가끔 전화를 해서 어려운 한자를 묻기도 하였다. 본인이 “아니, 보살님께서 어떻게 그런 글자를 다 물으세요?”하면서 “다 이것이 누구 덕분인데요. 법장 스님 참말로 감사합니다. 나 같은 늙은이에게 눈을 뜨게 하여 사는 맛이 납니다” 하는 소리를 들은 지가 엊그제인데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세상을 뜨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53세에 한문을 배워 30년 이상을 사용하고 몇 년 전 86세로 운명하셨다. 공부란 끝이 없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공부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런지.

2011-06-06

[왕같은 제사장]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최근 멕시코 휴양지인 캔쿤 인근의 리비에라 마야를 다녀왔다. 섬기는 교회의 평신도 워십리더들과 후배 가족이 9년 동안 수고했다며 모든 비용을 지원해 함께 휴가를 다녀온 것이다. 10여년 만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시계도 없이 4박5일을 지냈다. 처음엔 적응이 안됐지만 차츰 원시적인(?) 삶에 익숙해졌다. 핸드폰이 없으니 오히려 상대방을 더 생각하고 미리 챙기고 묵묵히 기다렸다. 인터넷이 없으니 세상사는 어둡지만 눈앞의 사람과 관계에 더 집중했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루가 더 여유로웠다.   돌이켜보면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빠른 정보소통은 없어도 느긋한 여유로움에 사는 맛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 편안함이 문명의 편리함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한켠에 자녀들이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은 흔한 일이다. 저녁 식사 마치고 가족이 함께 대화할 시간에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인터넷 검색과 페이스북 하는 모습은 일상사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 방에서는 TV, 컴퓨터를 아예 못쓰도록 못 박았다.  최근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 게임, 텍스팅(texting) 같이 점차 그 양이 늘어나는 테크놀로지의 자극이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테크놀로지 세대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멀티족(multi-tasker)이다. 이들은 노트북에서 영화를 보며 공부하고, 인터넷 검색하며 커피를 마시고 텍스팅하는 등 동시에 두 세 가지 행동에 능숙하다. 요즘 청소년, 젊은 세대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멀티태스커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 지만 지난 2009년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스탠퍼드대의 연구는 이 상식을 뒤집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멀티태스커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산만한 사람들”이었다. 즉 멀티태스킹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주위가 산만하고 맡겨진 일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가설을 뒤엎는 충격적인 결과다.  UC 샌프란시스코대의 한 연구 결과도 멀티태스킹의 해악성을 지적했다. 스마트폰이나 쇼셜 네트워크에 의한 주의산만이 두뇌활동과 장, 단기기억(long-term, short-term memory)에 장애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빈번한 자극과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두뇌를 손상시키며, 더 나아가 다양한 최신 테크놀로지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든다. 그 결과는 테크놀로지 중독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테크놀로지 다이어트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휴가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발걸음은 바닷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밑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각박한 문명에 짜든 영혼에 안식을 주었다. 그 자연의 소리들이 내 심장에 그림을 그렸다. 이때 떠오른 시상이다.  “이른 아침 넘실대는 파도 소리 / 지저귀는 열대 새소리 / 귓가에 오가는 바람의 여유로움 /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 / 파라솔에 홀로 누워 / 흐르는 소리에 심취한다 / 아무런 조직도 프로그램도 / 편곡 악보도 없이 / 다양한 피조물이 저마다 노래하지만 / 불협화음 하나 없는 자연의 향연 / 그 신비에 묻어있는 / 창조의 DNA가 보이듯 하다 / 그 노래에 실려 있는 / 태초의 소리가 들리듯 하다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훌륭한 시는 아니더라도 등 떠밀려 떠난 이번 휴가의 가장 값진 깨달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리까지 들었으니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4일의 효과가 대단하다. 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테크놀로지가 진화해도 인간의 행복은 결국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친밀함에 있다. 올 여름, 휴가를 계획할 때 ‘테크놀로지 다이어트’를 해봄직하지 않겠는가? 혹 휴가를 꿈꿀 처지가 못 되더라도 이 새로운 다이어트로 단절된 가족 간의 대화를 회복해보길 강력 추천한다.  ▷이메일: unplugw@gmail.com

2011-05-24

[영혼의 거울]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

저는 네팔 현지 목회자 컨퍼런스를 은혜 가운데 마친 뒤 한국 여의도순복음교회 제37차 선교사 대회에 참여한 뒤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지난 1958년 시작된 순복음교회는 초지일관 성령충만을 강조하며 우리나라에서 성령운동을 주도함으로 한국 기독교를 세계적 영향을 주는 수준에 이르게 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실수와 잘못이 있을지라도 목회의 중심에 근본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기에 오랜만에 방문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최근 안팎으로 어려운 시간을 통과했음에도 지난 3월 역사상 가장 많은 새신자가 등록하여 한달동안 약 3000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가족과 함께 모든 공적 직함을 내려놓은 후 한 조찬기도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팡이를 내어던지고 신을 벗은 맨발의 모세에 비교하셨습니다. 자기가 의지했던 지팡이를 내어던지고 자신이 믿고 소중히 생각하던 모든 직함들을 벗어버리고 보니 자신은 그저 가시떨기같은 무능하고 무가치한 늙은이에 불과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을 때 그 불을 받아 모세는 당시 최강의 바로의 압제 속에 300년이나 매여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듯이 자신도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고 남은 세월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하셨을 때 장내는 감동과 은혜 가운데 숙연해졌습니다.  한세대에서는 ‘영산 조용기 목사의 십자가 신학’이라는 주제로 신학 심포지엄이 있어 모든 선교사들이 참여했습니다. 국내외 훌륭한 신학자들이 참여해 조 목사님 설교의 신학적 정립을 시도했는데 영산 신학의 포인트는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구원과 희망으로 요약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포지엄의 마지막에 사회자가 참석한 발제자 중 한 분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조 목사님의 지난 50년 목회의 키워드는 희망신학이었는데,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는 무엇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때 그 목사님은 잠시 망설이신 후 “희망신학은 예수님 재림 때까지 지속돼야할 십자가의 근본 메시지”라고 답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묻고 있는 이 질문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여겨졌기에 제 자신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키워드는 무엇이 돼야 할까요?”  조 목사님께서 목회를 시작하신 지난 세대에는 한국 땅에 진정 희망신학이 필요했습니다. 그 희망신학 때문에 한국은 살아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조 목사님의 그 위대한 메시지가 얼마만큼 한국 기독교에 성령의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인들을 살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개인적으로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켜왔으며 제 자신의 목회에 적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희망신학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키워드라기보다는 삶과 목회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본질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국 기독교가 추구해야할 키워드는 희망의 메시지보다 더 급한 메시지, 즉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마침 그 심포지엄이 있던 날 저의 말씀 묵상은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게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엘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너무나 엘리 제사장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식만 남았고, 외형적으로 비둔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쓰나미와 원전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이 들어야 했던 메시지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더 무서운 심판의 쓰나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분명 희망의 메시지지만 한편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가난과 궁핍을 벗어난 한국 기독교는 종말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같아 보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복음을 전하며 거룩한 신부로 단장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겠습니다. ▷이메일: sjclee@gmail.com

2011-05-24

[변화] "어크-하이어"

애플은 최근 온라인 음악 서비스 '랄라(Lala)'를 인수하자마자 랄라 서비스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애플이 탐이 난것은 회사가 아니라 몇 명의 인재들이었다. IT 회사들이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신종 기업 인수를 일컬어 '어크-하이어(acq-hire.인수고용)'라고 부른다. 인수를 뜻하는 '어콰이어(acquire)' 그리고 고용한다는 뜻의 '하이어(hire)'를 합한 말이다. 모자라는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예 벤처 기업들을 인수해 쓸만한 신규 IT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초대형 IT 기업들의 선두에 서서 인재 사냥을 위한 신생 회사인수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엊그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재선 캠프의 정치자금 모금 책임자에 매튜 바전(Barzun) 스웨덴 주재 미국 대사를 기용했다고 한다. 오바마 캠프의 이번 대선 모금 목표는 역대 최고인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다. IT기업 최고경영자로 재직하던 바전은 2008년 오바마 캠프에 합류해 '1인당 25달러 풀뿌리 모금운동'을 도입해 50만달러 이상을 거둬들였다. 그 공로로 2009년에 그는 만 38세에 스웨덴 대사에 임명되었다. 오바마는 그를 1년반 만에 다시 불러 들인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반증해주는 사례다. 현대 교회도 인재 영입 전쟁에 한창이다. 인재를 키워내는 일 보다는 준비된 인재를 담임목사로 부사역자로 영입하는데 더 많은 투자와 관심을 쏟고 있다. 세상 기업과 마찮가지로 소모적인 스카우트에만 열을 내고 있는 느낌이다. 주변의 괜찮은 신학교를 방문해 보면 1.5세 2세 젊은 예비 사역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영어권 사역자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교회의 주 업무는 영혼구원 해서 평신도 일꾼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연말에 한 해의 삶을 정리해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어디에다 체크를 가장 많이 썼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한다. 교회 예산이 어디에 제일 많이 투자되고 있는지를 보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인재를 길러내는 교회인지 현상유지만하는 미래가 없는 교회인지 답이 나올 것이다.

2011-05-24

[생활속에서] 책임감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대로 그리고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핑계와 변명'을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잘못된 행동이나 결과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책임 밖의 영역 언저리에 분명하게 금을 긋고 습관적인 '무죄선언'을 반복합니다. 항상 자신에게 부여할 '면죄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옛말에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처럼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추하기 보다는 먼저 남을 탓하고 비난합니다. '팔자타령'이나 '애매한 운명론'은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벗어나려고 하는 대표적인 책임 회피의 모습입니다.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도 자신의 결함과 오류를 유전자(DNA)의 탓으로 돌립니다. 소위 '못된 유전자'때문에 자신의 현재 모습이 산출되었다고 넋두리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결단의 부족을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인 결함으로 돌리려는 교묘한 술수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사기를 치고 강도 짓을 하고 심지어는 강간 행위를 한 것도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나쁜 유전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이 게으른 것도 불평 분만을 하는 것도 그리고 화를 잘 내는 것도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유전자의 결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예레미야 31: 29)고 말하는 무책임한 구약 백성들의 모습을 반복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합리화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책임 회피를 위한 치명적인 유혹의 순간이 있었음을 성경은 말해 줍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태 26:39)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예수님의 두려움이 한껏 베어 있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다른 핑계거리를 대며 그 '죽음의 그늘'을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전자는 남 다르고 독특해서 쉽게 고난의 잔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에 포기하는 마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힘든 결단과 영적인 싸움의 결과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수동적인 운명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겠다"는 그 분의 '능동적인 결단'이 만들어낸 구원의 역사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당신의 죄로 끌어 안고 십자가를 통해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려 하신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십자가는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어진 인생을 책임 있게 사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2011-05-24

[사목의 향기] '적의 적은 아군이다'

"너 만일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네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내 마음 속에 담겨진 말씀들이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고 말했다. 오늘 그분을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며 벙어리를 치유하는 그 분을 만난다. 벙어리가 말을 하면서 그 분을 찬미한다. 그 분을 체험한 사람의 생활은 변한다. 변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그 분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목소리의 울림이 가슴에 벅차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성대를 울려 소리 내는 소음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행동이 아닐까?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란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지칭되는 말이다. 믿는 이들은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분의 이름으로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그 분의 증인이어야 한다. 오늘 아침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들었던 화답송의 후렴이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다. If today you hear his voice harden not your hearts! (너 만일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는 기적사화는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오늘의 벙어리는 내게 큰 예언자로 다가온다. 그의 말로 사람들을 놀래키는 것은 그저 말 못하던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 이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시대의 지도자들과 힘 있는 자들에게 반대 받던 자였다. 정의를 말하며 힘없는 자들 편에 서 있어 선동하는 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선동하는 예수님은 힘있는 그들의 입장에선 분명 적이고 그 적이란 그들의 입장에서 악마이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악마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 이제 예수님을 체험한 벙어리가 말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말 같은 정의 평화 사랑 해방 그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며 그 분의 가르침을 말하기 시작한다. 너 만일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던 시편의 말씀처럼 마음을 열고 대담하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해서 그들은 예수님께 말한다. 당신은 베엘제불의 힘으로 저 사람을 고쳤다고 그렇지 않다면 왜 저사람 하는 짓이 베엘제불 같은 당신과 같겠냐고 묻는다. 본 사람은 보여줘야 하고 들은 사람은 들려줘야 하고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체험 시켜야한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 놓치고 싶지 않아 내 놓을 용기가 없어 그저 입 다물고 있으며 그렇게 실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악마라고 뒤집어씌우는 마음속의 술수를 그분은 날카롭게 끄집어 내신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음을 열어 입을 열게 하였으면 악마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쉬운 설명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닫힌 그들의 마음 아니 닫힌 내 마음이다.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행동도 악마가 된다. 돼지 눈에 무엇만 보이겠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악마가 아니라고 소리쳐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슬픈 현실인가? 예수님을 만난 벙어리가 말하게 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듯 예수님을 만났다고 믿고 있는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가? 그 분을 뵈옵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 사람들처럼 나도 그 분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악마인가 아니면 그 분인가? 적의 적은 아군인데 나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201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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