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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뱀처럼 사악하고 비둘기처럼 멍청한…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두 가지 유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삶이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또한 동시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중성을 충분히 감안하신 말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현실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은 당연한 전제이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되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실주의는 적당히 때묻고 적당히 경건히 지내라는 '영적 적당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현실주의는 '경건과 세속의 어설픈 잡탕'이 아니다. 이것은 지성과 도덕성 자연과 은총 사회성과 종교성의 통합적 이해를 의미하는 '창조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영성을 보면 이 '이중성'을 잘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잡탕이 되어 '이중적' 위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모습이 아니라 '뱀같이 사악하고 비둘기처럼 멍청한 모습'이 보이는 것같아 속앓이가 제법 크다. 타락한 세상에서 구별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이탈하여 '결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순결의 의미가 있는데 세상으로부터 결별된 '별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지성적 사고와 태도는 무너지고 자기만의 오만한 세계를 구축한 채 한마디로 세상에 대해 단순 무식 과격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동시에 자기 집단 내에서 순결행진에 비해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지성보다는 잔머리 경영보다는 장삿속 세속화보다는 세속주의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환경 속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악하게 사용할 때 사악한 왕이 되었던 솔로몬처럼 지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후기 솔로몬을 향해 전력하고 있는 것을 본다.  로마서 16장 19절은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악한 데는 지혜롭고 선한 데는 미련한 모습은 아닌지. 초대교회의 변증이 능력있었던 것은 면도칼 처럼 예리한 복음증거도 있었지만 시대와 구별된 '삶의 변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그래도 아직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성공기로 가득한 간증집회를 마치고 초대받아 교회에 처음 온 불신자가 다가와 했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교회는 좀더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줄 알았기에 큰 기대를 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세상과 똑같은 성공주의를 추구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앞으로 저를 교회에서 볼 일이 없으실 겁니다." 마음이 '쿵'하고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정말 순결한가? 그리고 우리 정말 지혜로운 것인가?

2010-10-12

[변화] 성경이 안 믿어지는 이유

자식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상식적이지 않은 부모들을 많이 본다. 이런 유머가 있다.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 서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좋아서다. 남의 아들이 대회 나가서 상을 받으면 누구에게나 주는 상을 어쩌다 받은 것이고 내 아들이 상 받으면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엄마들이 많이 있다. 자기 자식이 제일 잘난 줄 안다. 사고친 아들 때문에 학교에 불려온 엄마들이 제일 많이 하는 소리가 '우리 애는 절대 그런 애가 아니에요!'란다. 잘못을 해서 불려왔으면서도 자식 문제만큼은 상식적인 잣대를 대지 못한다.  한때 상식적이지 않은 아버지들 때문에 정치권이 시끄러웠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배울 만큼 배운 유명환 외무부 장관이 능력 없는 딸을 외무부에 특채해 결국 자신이 공직에서 물러났다. 김황식 총리도 큰딸을 누나가 총장으로 있는 동신대학교의 시간강사로 취직시켜 많은 잡음을 일으켰었다. 자식 문제만큼은 상식대로 안 되는가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이해와 상식선에서 출발 하지만 관계가 깊어지면서 신뢰와 믿음이 이해와 상식의 자리를 대신한다. 남녀의 교제가 상식선에서 출발 하지만 가정이 만들어지면 곧 상식의 파괴가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해와 상식의 파괴가 자주 일어나야 행복한 가정이 된다.  얼마 전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명 여배우가 토크쇼에 나온 적이 있다. 사회자는 마냥 행복하다는 신부에게 무엇이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다. 연애할 때 점잖던 남편이 샤워를 하고는 발가벗은 몸으로 자신 앞에서 밸리 댄스를 출 때 가장 행복하다고 시청자들에게 고발(?)했다. 벌거벗고 춤을 추다니 얼마나 상식 없는 행동인가! 그렇다. 가족관계는 이해와 상식으로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믿음으로 소통하는 관계다. 성경은 이렇듯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 20:29) 기억하라! 이해와 상식에 대한 보상은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신뢰와 믿음에 보상은 상식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2010-10-12

[사목의 향기] 신앙생활이란 '믿는 사람이 믿음의 생활' 하는 것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환경이 인간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지에 대해 말하는 고사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좋은 환경이란 확실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고사를 신앙의 문제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믿는 사람이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먼저 대상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을 전제로 다음 질문인 '무엇을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를 하겠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오 17:20)라는 성경구절을 아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생각하면 '내 믿음은 겨자씨 한 알보다도 작구나…'라고 생각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을 옮기시게요? 그럼 삽을 드십시오." 이 성경구절의 핵심은 내가 산을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네! 핵심은 믿음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믿고 있는 친구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합니다. 믿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돈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은 절교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여전히 친구로 남는 경우가 진정한 친구사이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돈을 꼭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이 친구는 나를 속이지 않는다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실패를 했지만 나를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기에 친구사이의 우정은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절대명제는 '하느님께서는 항상 나에게 사랑만을 베풀어 주신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구절로 돌아가면 '너희가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했을 때 그것이 겨자씨 한 알만이라도 너희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대로 될 것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한 "신부님 미국이 더 살기 좋지요?"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민을 오셨다는 것은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삶의 자리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큰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신 분이라면 상황에 따라서 제 2 제 3의 변화를 감당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것이 좋지 않게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에서 생각하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사람 관계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봐야합니다. 그래야 영적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피하게 되면 영적 성장을 할 수 없게 되고 다른 곳에 가더라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다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로 목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목숨이 돈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의 증거로 당신 아드님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최선만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나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목숨에는 목숨으로 대답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이제 "신부님 미국이 더 살기 좋지요?"라는 질문에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세상 어디라도 천국입니다."

2010-10-12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아이가 방황하는 이유 먼저 파악해야

Q: 제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인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하던 운동을 그만두고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부모로서 고민도 많이 한 끝에 전문가와 상담해서 나름대로 좋은 결과를 보았습니다. 한동안 잘 지내다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학교를 선택해서 가기로 결정했는데 어제 아이가 너무 늦게까지 놀고 와서 제가 혼을 냈더니 집에 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아이를 찾아왔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학교도 자신이 선택하도록 도와줬는데도 어제 그렇게 가출을 하니 남편도 많이 힘들어 하고 저도 힘이 듭니다. 제가 어떻게 아이를 대해주면 좋을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A: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행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이치의 길입니다. 세상 이치를 우선 말하자면 아이와 아빠 아이와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냥 "네 마음을 말해봐라." 이래서는 아이가 마음에 있는 말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말을 하면 엄마 아빠가 분명히 반대하거나 화를 낼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거예요. 화를 내봐도 달래보아도 절대로 말을 안 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엄마 아빠를 겪어봤잖아요. 그러니 엄마 아빠가 안 좋아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볼 때에는 아이가 반항하고 방황하는 진정한 원인이 뭔지를 부모가 모르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기 마음이 오락가락하는데 전문 상담사와 상담하고 결정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이러고도 싶고 저러고도 싶은 중에 전문가와 얘기하다 보니 이래야겠다 결론을 내렸는데 그래놓고 보니까 다른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아이의 왔다갔다하는 그 마음을 다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이 문제를 풀려면 아이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지금 부모에 대한 반발심으로만 방황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뭔가 인생의 방황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것에 대한 이해가 안 되니 화가 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폭행을 하거나 도둑질을 한다면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야단치지 말고 일단 아이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부모가 아이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강력하게 야단을 치니 아이는 마음에서 승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반발이 더 커지고 상처가 되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이 자꾸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를 이해해야 하는데 아이를 이해하려면 아이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되지 그냥 이해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제 두 번째 수행의 길은 뭐냐? 내가 남편한테 참회 기도를 해야 됩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방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좋습니다. 아이는 그냥 놔두세요. 상담을 해서 아이를 이해하고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도 결국 아이를 고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는 그냥 놔놓고 내가 절을 하면서 "제가 당신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당신 마음을 이해하겠습니다." 이렇게 남편에게 참회 기도를 해보세요. 그러면 지금 아이의 그런 행동이 내가 남편에게 해온 식과 똑같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현재 아이의 저런 방황이나 이중성이 결국은 내가 그 아이를 가졌을 때나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에게 가졌던 것과 거의 같은 심리 상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10-10-12

[변화] '독대' 훈련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형태의 군중을 맞이하고 있다. 이름하여 '디지털 군중'이다.  타블로라는 한국 힙합가수의 학력 논란이 일자 학력을 의심하는 카페의 회원이 13만명을 넘어섰고 급기야 타블로는 자신이 스텐포드 출신이라는 것을 직접 학교를 찾아 증명해야만 했다. 스탠포드데일리는 '한국의 팝 스타 스탠포드 기록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안티 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믿는 사람들이라며 집단 체면에 걸린듯한 '디지털 군중'의 횡포를 꼬집었다.  광우병 사태를 지켜보던 미주 교포들은 참으로 가슴이 답답했었다. 누구말대로 개인은 똑똑하지만 군중은 미련한것인가? 한두사람의 말장난에 온국민이 집단 최면에 걸려 놀아난 느낌이다. 인터넷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군중의 힘이 잘못 기울어 졌을 때 그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단 하루만에 형성된 '디지털 여론'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고등학생 몇 명이 시작한 촛불 운동이 '디지털 군중'을 움직이면서 범국민적 운동으로 까지 번졌다.  예배나 부흥회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꾀하고자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본다. 대중 집회를 통해 회심의 일들은 많이 일어나지만 성숙은 일어나기 힘들다. 신앙의 성숙은 군중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속해있으면 공동체의 분위기가 내 신앙의 수준 같고 같이 통성으로 뜨겁게 기도하다보면 나도 어느새 기도의 사람이 된듯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사들 역시 예배한번 잘 드리면 할 일을 다 한듯한 기분을 갖는 것은 함께 모였을 때의 뜨거운 예배 분위기가 곧 개개인의 신앙 수준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군중의 분위기는 말라버린 열정의 샘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마중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주간 동안의 하나님과의 깊은 독대를 통한 성숙의 열매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통해 승화되어야 한다. 

2010-10-05

[생활 속에서] 타블로의 거짓말 논쟁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타블로라는 힙합 가수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그에게 13만 명이 넘는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안티 세력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인기를 반증하는 것이다. 타블로의 안티 세력인 '타진요'는 온라인을 통해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면서 그를 공격하고 있다. 그 결과 타블로의 '학력 위조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인터넷을 타고 무섭게 퍼지며 많은 사람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스탠포드 대학 교내신문 '스탠포드 데일리'(The Stanford Daily)는 타블로의 '학력 위조설'을 보다 못해 그의 졸업 사진과 함께 "그가 2002년 스탠포드 대학의 공동 학기 프로그램을 통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그 대학의 교무과장 톰 블랙과 타블로의 지도교수였던 토비아스 울프 교수가 여러 번 타블로의 졸업사실을 증명하는 서신 성적 증명서 등 관련 서류를 한국에 보냈다"고 하였다. 울프 교수는 "타블로(본명 이선웅)가 스탠퍼드 대학 학사 석사과정을 3년 반 만에 마치고 학위를 받았으며 '쥐'라는 글로 그에게 장려상을 준 일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많은 네티즌들은 아직도 타블로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을 거짓이라고 믿고 있다. 왜 믿지 못할까? 우선 네티즌들의 이상한 심리 현상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믿는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믿으려는 성향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불안한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또한 한국의 네티즌들은 시비를 걸었다가 그것이 잘 못 된 것임이 판정되어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상하게 연결되어 세력화 되어 있는 네티즌들의 오만한 자존심 때문이다.문제는 이런 오만한 네티즌들에 의해 선량한 사람들이 쉽게 피해를 보고 있으나 그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있다.  이민 교회 안에도 이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블랙 메일을 돌려 선의의 목회자와 교인들을 무차별로 비방하고 공격하고 그것이 잘 못된 것임이 드러나도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믿으려 하고 또한 자신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고도 그것을 반성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존심 때문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이 끝날 때 하나님 앞에 서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이라"고 하였다(로마서 14:12).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잘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말이 찾아온 후에는 그럴 수 없다. 만일 고칠 것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한다. 또한 버릴 것이 있다면 지금 버려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참 지혜이다.  

2010-10-05

[사목의 향기] 신앙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

갑자기 사목의 향기에 글을 적으라는 말을 듣고 십 여일 어떤 글을 적어야 하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만이 보는 지면도 아니고 여러 종교를 가진 여러분들이 보시는 글이니만큼 여러분들에게 생각해볼 수 있는 꺼리를 드리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이제 10개월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미국이 살기 더 좋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처음 몇 번은 으레히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서 대충 대답하며 넘겼습니다만 질문의 빈도가 많아질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 질문을 하는 것일까?'  사실 이런 질문을 한국에서도 가끔 듣는 질문입니다. 가톨릭 신부들은 자기 성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교구 안에서 발령을 받고 옮기게 됩니다. 따라서 일정 범위 안에서 움직입니다.  제가 있는 부산교구는 보좌신부는 보통 2년 주임신부는 4년 정도에 한 번 이동을 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환경을 접하는 기회가 많습니다. 한국에서 받는 "지내기 어떠세요?"라는 질문은 '사는데 혹시 불편하시거나 한 것은 없습니까?' '우리 성당은 분위기가 어떠세요?' 하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받는 질문은 뉘앙스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환경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때부터 시작된 잦은 이동(6개월에 한 번씩 방을 옮깁니다)이 그런 성격을 만든 것이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받는 질문에서 저는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면을 빌어서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사시는 많은 분들은 이민을 오셨고 고향을 떠나 고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오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은연 중에 항상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런 저런 부분은 좋지만 이런 저런 부분은 그렇게 좋지 않으니까 이 곳이 더 좋은 곳이야. 미국은 이런 저런 부분은 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부분은 역시 좋아'라고 스스로 마음에서 이 곳이 더 좋은 곳이라고 속삭이길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좀 더 좋은 환경 좀 더 행복을 찾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니 맞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내면의 속삭임이 다른 부분에도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마켓은 이런 부분이 이 가게는 저런 부분이'라는 식이죠. 한국에서도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 보다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오신 분들이나 유학을 오신 분들은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보다 큰 위험을 감수하시고 큰 변화를 받아들인 분들이십니다. 그러다 보니 환경에 순응하는 편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찾아나서는 경향이 크신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목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중요한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성당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사는 주소지로 소속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을 때 보통 다른 성당으로 옮겨 볼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신앙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을 드시겠지만 성당을 옮기는 이유는 맹모(孟母)가 옮긴 것과 다른 것입니다. 신앙이나 성당을 내 기호로 선택하는 것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말 나의 신앙과 삶을 위하는 것인지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나누어보겠습니다.

2010-10-05

[지혜의 향기] 맛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해야

사람의 오랜 옛 조상은 본래 나무 위에서 살았던 영장류였다. 그렇다고 요즘 원숭이들과 꼭 같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들과 우리가 태곳적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다는 것이고 우리는 각각 같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하여 갈라져 나왔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서도 침판지나 고릴라 그리고 보르네오 말로 숲사람을 뜻하는 오랑우탄이 우리하고 가장 가까운 친척일 것이다. 이런 얘기에 거부감이 든다면 당장 LA동물원에 가 보는 것도 좋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오래 길러도 그런 생각이 좀 들겠지만 원숭이 우리를 한 시간만 들여다보며 이들이 먹고 놀며 장난치는 꼴을 지켜보시라. 우리와 저들 사이에 아무 핏줄이 닿지 않고 아무 연결 고리가 없다는 얘기가 오히려 허무맹랑하게 들릴 것이다.  이러한 직관은 DNA의 염기 서열을 확인할 수 있는 현대 과학에 의하여 객관적인 사실로 입증되었다. 우리와 더욱 닮은 영장류일수록 염기 서열이 우리와 거의 같다는 말이다. 심지어 저 연못에 떠다니는 한 떨기 물풀에 이르기까지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체는 그 세포의 성분이나 작용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든 중생은 남이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다는 동체대비 사해동포의 대상이 어찌 사람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우기겠는가. 그런데 원숭이들은 우리와는 달리 하루 종일 무얼 야금야금 먹고 있다. 그리고 우리처럼 잡식성이다. 영장류는 이렇게 야금야금 먹으면서 우거진 숲에서 살았지만 기후가 변하여 숲이 성글어지자 할 수 없이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걷게 되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거나 동굴 주위의 야생 열매나 알뿌리를 모으러 다녔지만 남자들은 집단으로 사냥을 하였으므로 점점 육식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긴장된 사냥을 하면서는 계속 뭘 씹어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냥감이 잡히면 동굴로 가지고 와 이전보다 높은 칼로리의 음식으로 하루 두 끼나 세 끼 정도만 정해 놓고 먹는 식사 버릇이 생겼을 것이다. 빌딩 숲으로 출근하는 도시의 사냥꾼들인 현대인들도 대개는 하루 세 끼 정도의 식사만 한다. 정식 끼니는 잘 거르면서도 종일 야금야금 군것질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혹시 그 옛날 나무 위의 조상님들을 못 잊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수만 년이 흐른 지금 굶어죽는 사람도 있지만 살이 너무 쪄서 고생인 사람도 많아졌다. 먹이는 풍부해져 열량은 넘쳐나는데 들판을 뛰어다닐 일은 드물어진 까닭이다. 온갖 다이어트 법은 돈 되는 산업으로 번창하지만 무조건 덜 먹고 안 먹는 방법 외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꿩 먹고 알 먹는 좋은 방법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먹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새 시대의 불자가 되는 것이다. 우선 식사를 채식 위주로 조금씩 바꾼다. 그리고 욕심내지 말고 끼니는 먹을 만치 조금씩 덜어서 남김없이 먹는다. 군것질은 아예 잊어버린다. 맛 위주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 기회를 찾아 발우공양도 해 본다. 그리고 아침저녁 마음을 가다듬어 삼배부터 시작한다. 백팔배를 하고 내키면 날을 잡아 삼천배를 한다. 그러면서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신 모든 피붙이들 피비린내 풍기며 사냥하던 조상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쫓기며 마음 졸이면서도 틈만 나면 야금야금 거친 나뭇잎을 씹으며 새끼에 젖을 주던 먼 조상들까지 그 기나긴 업을 씻어 부처님의 나라로 고이 보내 드리는 것이다.

2010-10-05

[변화] 대형교회 교인 전도

오바마정부의 중소기업의 활성화를 위한 스몰비즈니스 지원 법안이 승인되었다. 연방정부가 총 300억달러를 투입해 미국 경제의 중추가 되는 스몰비즈니스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미국경제의 미래가 중소기업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형화된 목회가 사람의 눈에는 성공적인 목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도 성공적일지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중소기업이 튼튼해야 나라의 경제가 안정되듯 하나님의 나라역시 중소형교회가 든든해야 한다. 그러나 대기업의 횡포로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겪는것 처럼 대형교회들 때문에 주위의 중소형교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다가 상처를 받으면 대형교회를 찾는다. 문제는 회복을 해도 돌아가기 보다는 그냥 안주하기 일쑤다. 사실 대형교회는 전교인의 20%정도만 사역에 몸을 담아도 성공적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나머지 80% 정도는 성전 뜰만 밟는 손님들이다. 'OO 교회 섬겨요!'라고 자랑하며 마치 대형교회가 자신의 신앙 수준이요 영적인 명품 브랜드처럼 여기면서 가장 중요한 영혼을 구령하는데 무능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의 신앙교육 문제로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가장 큰 딜레마 역시 2세교육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큰 학교에 다닌다고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듯 선생이 많고 시설이 좋다고 좋은 학생이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풍요속의 빈곤'이 될 확률이 더 높다. 불안정하게 대형화된 교회를 움직여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대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느라 본질적인 사역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불경기로 손님은 더 늘어 돈들 일은 많은데 헌금은 더 줄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형교회가 골치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수있는 대형교회의 선두주자격인 한 젊은 목사의 성추문 사실이 밝혀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평소 교회 대형화의 옹호론자요 추종자였던 그의 넘어짐이 자신이 담임하던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사뭇 궁금하다.

2010-09-28

[생활 속에서] 패거리 의식과 공동체 의식

공동체라는 말이 화두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하며 속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공동체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추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할때가 있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패거리'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미사어구로 선동해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것이 공동체가 아니라 패거리이기 때문이다. 패거리처럼 변해가는 교회의 모습. 이제는 그 불편한 진실앞에 바로서서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패거리 의식은 골목 대장식의 패싸움 정신에서 시작되어서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소위 "우리가 남이가?"하는 역사적 소명감으로 사실과 진리와 합리를 무시한채 몽상과 자기이상 그리고 고집과 억지만이 난무한다. 그리고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예화는 "오직 팔은 안으로 굽는다." 소집단 이기주의를 위해서는 더 큰 공동체의 파괴도 중요하지 않다. 소위 "나라는 말해도 우리 당(혹은 기업)이 정권만 잡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공존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다른 패거리와는 생사를 건 전쟁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패거리 안에는 항상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있고 1인 보스 중심체제로 움직인다. 자신과 패거리의 운명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모든 사람들을 1인 지도자를 위해 희생시키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강해 보이지만 폭력적이고 명령과 복종이 있을지언정 대화와 협의는 없다. 공동체 의식은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지만 혈연 지연 그리고 학연을 뛰어넘는다. 공동체의식은 '다양성'을 기초로 획일성보다는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공동체는 피콜로의 높은 소리와 더블 베이스의 깊은 소리가 공존한다. '동질감' 보다는 '이질감'을 근거로 형성되며 '원수'를 소멸시키기 보다는 '원수된 것'을 소멸시키며 살아간다. 공동체를 위해 누구도 희생시키려 하지 않지만 공동체를 위해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을때 진정한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리더십은 멤버십위에 존재하지 않고 리더십은 멤버십으로부터 나온다. 보스를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지도자가 희생하는 삶을 산다. 공동체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지만 사랑하기에 한없이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삶을 산다. 그래서 무명하지만 유명한자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가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어떤 잘못을 지어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수 없는 곳이 가정이고 교회이다. 세상에서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결혼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절대 가치인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완장 콤플렉스에 빠진 골목대장의 패거리들이 노상강도짓을 하도록 해선 안된다. 향기로운 과일이 부패할때 가장 지독한 악취를 품긴다고 한다. 지금 '향기'가 나는지 '악취'가 나는지 심각하게 질문할 때이다. 당신이 꿈꾸는 공동체 정말 공동체인가?

2010-09-28

[사목의 향기] 작은 것도 고유한 가치 있어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 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1850년경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추장 시애틀(워싱턴주의 시애틀은 이 추장 이름을 딴 것)이 당시 미국 대통령 피어스에게 보낸 메시지 안에 들어 있는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땅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어머니'였다. 어머니 품 안에서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하나 같이 다 신성한 것이며 사슴 말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등과 더불어 한 형제였다. 만물이 가족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은 가톨릭 교회가 생태학의 수호자로 선포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도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형님이라 불렀던 태양과 누님인 달 물과 불 그리고 지구 그 자체를 향해 지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실로 피조물을 통하여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을 관조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시각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경배하듯이 다른 피조물도 하느님을 경배하고 있었다. 피조물을 향해 이같이 성인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이 열릴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복음 말씀의 묵상과 실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모습을 깊이 깨달으면서 부터였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 세상 가운데로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말씀은 이 지상 세계에 함께 하시며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뒤섞이시면서 우리 인간적 삶의 방식을 사셨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리고 겸손하게 오셨다는 점에 큰 감명을 받았다. 또 한센병 환자에게서 소외되고 모욕받는 사람들 속에서 강도같은 범법자나 교회로 부터 파문 당한 이들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겸손하신 현존과 그들 각자를 향한 놀라우신 사랑을 경험했다. 성체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감추시리만치 그토록 겸손하신 하느님의 현존은 강도나 도둑질한 형제 교회에서 조차도 손가락질 받는 자매 나아가 파괴되고 있는 '산림' 형제 오염되는 '강' 자매에게로 까지 이어진다. 감추이시며 겸손되이 우리 가운데로 내려 오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관련된 영성은 중세 프란치스칸 학자였던 둔스 스코투스에 이르러 한층 더 심화된다. 이를 위해 그는 라틴어로 '헥체이타스'(thisness 개체성)라는 용어를 따로 만들었다. 포도 송이를 한 번 살펴보자. 같은 가지에 달린 포도 송이라 할지라도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this) 포도송이는 바로 옆이나 위에 달리 포도 송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어떤 것(직업 가족 인종)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각자 만의 고유함을 지닌다. 우리 각자는 통틀어 창조된 인류 안에서의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개별적으로 원해졌고 개별적으로 사랑 받는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창조되었다. 한 가지 더 예를 보자. 하느님께서는 미사 때 성체 성사를 통해서 바로 그 고유한 성사적 순간에 이처럼 각기 유일하고 개별화된 각 사람과 함께 하나되면서 우리 창조된 세상의 구체적인 영적 장소(마음)에 현존하신다. '헥체이타스'는 포도 송이 혹은 각 포도알처럼 아주 작은 것까지 에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시애틀 추장이 그것 없이 인생에 뭐가 남겠냐고 했던 쏙독새의 울음소리라든지 숲속의 안개 더욱 놀랍게는 모래 기슭에서 반짝거리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에서도 즉각적으로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듯 느끼게 되는 것은 이 구체적 피조물들 안에서의 하느님의 거룩하고 겸손하며 신비스러운 현존 때문일 것이다. 평범하거나 대수롭지 않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해서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2010-09-28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자신의 입장·생각에서 벗어나야

Q: 직장에서 제가 싫어하는 유형의 직장 동료들을 대할 때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금방 싫은 표정이 나타나면서 말수를 줄이게 됩니다. 특히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뭐 상종도 못 할 사람인 것처럼 얘기하다가 그 사람이 있는 데서는 행동이 바뀌는 사람이 싫습니다. 또 하나는 회사에서 일 년에 두 번씩 직원에 대한 업무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평가를 할 때 상사에게 아부하는 직원 때문에 일의 잘잘못이 바뀌어 버리고 평가 결과가 뒤바뀌는 걸 보면서 억울하고 분하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A: 첫째 어떤 직원은 말이 많고 어떤 직원은 능력이 없고 어떤 직원은 남 험담하고….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직원들은 다 본인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질문자는 그들보다 먼저 승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나보다 못한 사람하고 같이 일을 한다는 건 내가 승진할 수 있어서 참 좋은 일입니다. 다른 동료가 나보다 일도 잘하고 인격도 고상하고 나보다 저런 면에서 더 낫고…이렇게 나보다 나은 사람만 있다면 내가 승진할 기회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두 번째 나는 승진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이 승진이 된다면 '내가 잘못 봤구나. 아 내 생각이 틀렸구나. 직장 동료들도 나를 보고 말도 잘 안 하고 또 잘난 척한다고 나쁘게 평가하겠구나' 하고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남 없으면 험담을 하다가 남 있으면 험담을 안 하고 얘기를 잘하더라. 그럼 이게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사람들이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 사람이 있으면 안 하는 것이 나쁘다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나마 그렇게 예의를 지켜주고 자제해 주니 그래도 이세상이 요만큼이나마 웃으면서 지나가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업무 평가는 업무 평가자의 일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평가입니다. 그것은 저 사람의 평가다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화가 난다고 화를 팍 냈을 때 사람들의 평가는 저마다 다 다릅니다. 겉과 속이 같으니 솔직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감정도 자제하지 못한다고 나쁘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 평가가 내 마음에 들면 좋은 평가고 내 마음에 안 들면 나쁜 평가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좋은 평가도 아니고 나쁜 평가도 아닙니다. 회사 제도상 그 사람에게 평가의 책임을 줬기 때문에 그 사람의 평가를 따르는 것이지 그것이 꼭 객관적으로 옳다든지 나쁘다든지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할 때 글씨 모양하고 시 쓰는 것으로 평가를 했어요. 시 쓰는 재능만으로 그 인간이 평가가 됩니까? 안 되지요. 오늘날의 평가는 주로 경제가 기준이지요. 그럼 이것이 인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평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기준이 다른 데서 발생한 것일 뿐입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평가가 잘못됐고 또 몇 사람의 아부 때문에 평가에 혼란을 가져왔다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질문자의 얘기를 보면 첫째 질문에서도 본인도 남의 험담을 하고 있는 수준이면서도 자기가 제일 잘났고 딴 사람은 다 문제가 있고 두 번째는 동료도 평가하는 상관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고 그저 아부하는 사람 말을 듣고 '줏대 없이 평가를 잘못하는 인간이다'라는 사고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 내 입장 내 편견 내 생각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니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내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 생각일 뿐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이렇게 계속 108배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직장에서도 사랑받고 가정에서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겁니다.

2010-09-28

[변화] '인생의 미소 예수 그리스도'

토머스 길로비치(코넬대) 교수팀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메달 수상자들의 시상식 표정 을 분석해 '메달의 심리학'이론을 발표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차라리 동메달 선수가 은메달 선수보다 더 행복하다는 결론이다. 동메달의 경우 '노 메달'을 벗어난 것 자체에 만족하지만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감사는커녕 금메달을 놓친 억울함 때문에 잠을 못잔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2등을 해도 만족을 못하니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 여자들은 나이에 따라 한가지씩 평준화가 된다고 한다. 40대는 많이 배웠거나 못배웠거나 지식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50대는 예쁜 여자나 미운 여자나 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60대는 자식 잘둔 여자나 못 둔 여자나 같은 처지고 70대는 남편있는 여자나 과부나 다를 바가 없고 80대는 돈있으나 마나 재산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90대는 집에 누워있는 여자나 산에 누워있는 여자나 수명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스티그마(낙인)효과'라는 것이 있다. 나쁜 첫인상이 박히면 그 인상을 지우기 매우 힘들다는 이론이다. 나쁜 첫인상은 여러모로 불리한 결과를 낳는다. 첫인상은 많은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면접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전문가들은 첫인상을 개선하는 핵심요소로 '미소'를 꼽는다. '미소'는 모든 인상의 평준화를 가져온다. 생각해보라 꽃미남이 웃을 때는 별 반전이 없지만 험상궂은 얼굴이 미소를 머금을 때는 그야말로 백만불짜리 인상이 되지 않는가. 인생의 출발이 남보다 불리한 경우를 많이 본다. 지독히 가난한 출발을 한 사람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출발을 하는 사람 지능이 남보다 떨어지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억울해 한다. 그러나 모든 인생에도 평준화가 이루어질 때가 있다. '인생의 미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이다. 아무리 불리한 출발을 했고 험한 인생을 걸어왔어도 '인생의 미소 예수 그리스도'를 머금은 사람은 백만불짜리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인생은 공평한 것이다. 만약 '인생의 미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여전히 자신의 출발을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은메달을 따고도 잠을 못 이루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다.

2010-09-21

[생활 속에서]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

지금부터 약 100여 전 한 과학자가 자신의 개를 상대로 끔찍한 생체 해부를 시도했다. 개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생체 실험 중에도 그 개는 여전히 주인의 손을 핥았다고 한다. 심지어 마취 없이 눈알을 빼는 등의 잔혹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는 주인에게 끝까지 충성했다고 한다. 그 실험 대상이 되었던 개로 알려진 '스파니엘'은 아주 영리하고 착하게 생긴 개이다. 그 중에서도 '코카 스파니엘'이라는 개는 두부가 둥글며 주둥이가 짧고 아주 귀엽게 생겼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스파니엘' 개 보다 더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이 존재했었다. 그들은 로마 제국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원형 경기장에 끌려와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어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면서도 신앙을 지켰던 초대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끝까지 고백하다가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이렇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철저하게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있다면 바로 교회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순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따라서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려는 충성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에 출석해도 진정한 교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민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 많지만 그중 한 가지를 지적한다면 무슨 단체를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LA에만 해도 수백 개의 한인 단체가 존재한다. 출신 고향을 따라 모이는 향우회 같은 학교 출신들이 모이는 동창회 등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이제 해외 동포들에게도 본국 선거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국 국회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앞으로 본국을 향한 정치적인 야욕이나 이해관계로 인해 많은 정치 단체가 만들어 질 것이다. 다만 이런 단체는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이나 이익을 따라 모이기 때문에 충성심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이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태를 보면 마치 이 세상의 단체와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마치 세상의 단체처럼 어떤 특정한 목적을 따라 교회를 세웠다가 조금 있으면 사라진다. 또 교회를 시작할 때만해도 그 구성원들이 의기투합하여 뭔가 큰일을 할 것처럼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인간의 야망과 욕심으로 인해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교회는 재산이 없어도 괜찮고 건물이 없어도 괜찮다. 만유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신 곳이면 그 어떤 곳이든지 영원히 교회가 존재한다.

2010-09-21

[사목의 향기] 인내심 있게 제 몫 해나가야

기도의 '양'인가 아니면 '질'인가? 최근에 열린 남가주 성령대회에서 어느 신부님께서 던지신 질문이다. 이 날 모인 3000여 명의 청중은 주저함없이 '기도의 질'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똑 같은 질문을 본당에 가지고 와 교우분들께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양'과 '질' 둘 다라고 답했다. 이어진 질문이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실까?"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질문이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나중 질문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에게로 초점이 옮겨져 있다. 응답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편에서 결정하실 문제이지 기도의 양이나 질 그 정도나 방식 등이 자동적으로 기도의 결과까지 산출해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성되이 지속적으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리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기도의 응답은 하느님 고유의 몫으로 남아있다. 하느님 고유의 이 신성한 영역을 독특하게도 하느님의 자유로우심으로 이해했던 학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성 보나벤투라와 함께 중세 프란치스칸 학파를 꽃 피운 요한 둔스 스코투스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장중하게 기술되고 있듯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그 홀로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스코투스는 하느님의 이 같은 권능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느님의 무한성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하느님께는 일체의 제한이나 한계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한계가 없으신가? 스코투스의 대답은 명료하다.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절대적 자유가 무한하시고(철학적으로) 또한 절대적 사랑이 무한하시다(신학적으로). 과연 그렇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와 사랑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자유로우신 행동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의 행동일 것이며 또한 하느님 사랑의 행동은 언제나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동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억압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자유 속에서 행동하시지만 선택은 언제나 어김없이 사랑과 선을 향하므로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를 기실 사랑과 하나로 봐도 좋을 것이다. 스코투스의 독창성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절대적 자유(사랑)로써 세상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터 나온 선물이자 은총이다. 한층 더 중요한 통찰은 오직 이 절대적인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만이 무한하고 필연적이라는 관점이다. 거꾸로 말해 창조된 것 유한한 것 한시적인 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거나 상대적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절대적 자유로 머무시는 한 하느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필연적이라 불릴 수 없다. 돈도 명예도 건강도 가족도 내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삼라만상 모든 것을 다 합친다고 해도 필연적일 수 없다.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마찬가지다. 소중하다 하겠지만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유와 사랑만이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참된 기도는 바로 이 사랑을 향해 나아 간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이끌리고 열망하고 의존하고 감사하고 그러면서 차츰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원하게 되는 것이기도 이다. 기적같은 기도의 응답 감동적이고 힘찬 성령의 체험을 주위로 부터 듣곤하지만 꼭 그런 체험이 없다 한들 또 어떤가! 우리의 기도는 이미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 속에 남겨졌고 하느님다운 방식으로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다만 우리는 조급하지 않게 겸허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몫을 해나가자. 크고 작은 우리 일상의 청원을 뛰어 너머 거듭 하느님의 자유와 사랑만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탕자의 형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기도를 생각하는 내내 벌써 반나절이 다 가도록 저 햇살과 함께 빛 부시게 맴돌고 있다.

201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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