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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삶] 하나님 아버지 전 상서

사랑하는 아버지. 어느덧 11월의 마지막인 추수감사절에 들어섰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 어제가 내일을 앞지르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올 한해를 이렇게 감사하게 지냈습니다. 봄의 시작은 3월에 제인이가 뉴욕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됐어요. 아버지. 대학 4년을 집밖에서 살았어도 떨어져 산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뉴욕으로 떠나는 건 많이 달랐어요. 제인이 뉴욕으로 떠나기 전부터 참 많이 망설였습니다. 왜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두려운지요. 아주 멀리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엄마인 저는 제 스스로의 외로움이 두려워서 불안했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자식이 이사하는 것마저도 걱정과 근심인 것은 엄마인 저의 연약함이지요. 저는 아직도 제인을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그것도 미안해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제 품안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아시지요. 우리 제인이 성숙한 딸인 거요. 그래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헤어짐이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으로 사람을 만났는데 잃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봄은 매섭게 겨울의 자리를 밀어내고 저의 가슴 속 깊이 씨앗으로 들어섰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여름은 봄에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풍성했어요. 마약하는 50명의 아이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놀면서 행복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저를 회복시키고 그들 속에 머물면서 사랑을 배웠습니다. 금년 여름은 그들이 모습이 저의 일상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가을은 학교수업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 공부는 쉽지 않습니다. 11월 말이면 밀린 리포트로 한 학기를 마무리합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꿈을 꾸면서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뒷마당 감나무도 올 한 해는 쉬고 싶었나 봅니다. 10년 동안 쉬지 않고 열매를 맺던 감나무가 머리를 들고 서있습니다. 해마다 가지가 늘어져서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는데 올 해는 꼿꼿한 머리에 붉은 감 장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미안했는지 사계절의 친구들에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먹거리를 남겼더군요. 감 몇 개가 홍시로 부드럽게 물러서 새들의 긴 부리가 입맞춤하기 알맞게 익었습니다. 나무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에겐 온갖 마음을 다 들여도 힘이 들던데 그래도 자연은 하나님의 마음과 정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 토지를 적시어서 / 싹이 나게 하며 / 열매가 맺게 하여 /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이사야 55:10) 아버지. 교회는 추수 감사절 공동체 찬양연습이 한창입니다. 저희 공동체에 젊은 부부들이 함께 저녁마다 찬양하는 모습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주말 밤마다 모여서 찬양하고 모여서 식사를 합니다. 아버지. 저를 자녀 삼으셔서 이런 공동체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한국을 잠깐 다녀옵니다. 제 육신의 어머니를 뵈러갑니다. 벌써 가야했지만 바빠서 미루던 일 이었습니다. 너무 오래 병석에서 저를 기다리신 어머니입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천국의 소망을 전하러 갑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가슴이 벅찹니다. 아버지. 잘 다녀오겠습니다.

2008-11-25

[신앙의 샘] 영혼을 위한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곳 저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의 내용은 한 사람의 사랑과 헌신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리의 기분과 마음까지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산타클로스입니다. 분명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가 지금까지 우리 기억에 남는 건 이웃을 위한 그의 사랑과 나눔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게 되면 그 선물보다는 선물의 담겨 있는 사랑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좋아합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한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눅 1:31 마 1:20). 그 이름은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관해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랑의 메신저(messenger)로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십자가'입니다. '구원'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감동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꼴 보기 싫고 교회가 하는 짓이 웃겨서 교회에 안 간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해서 교회 안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처음부터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 나오는 사람 못 봤습니다.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좋아서 교회 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 때문에 교회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성실한 태도와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아픔에 동참해 주시고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를 만나면 손을 꼭 잡아 주실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없을까요? 여러분이 마음마저 훈훈하게 만드는 삶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신가요? 미국의 경제 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 위기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기회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영혼들을 주위에서 찾아 보십시오. 여러분의 작고 큰 섬김을 통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메신저로서 쓰임 받으시며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으시는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08-11-25

[목회 칼럼] 탐욕의 블랙홀

얼마 전 제 아들과 함께 교회를 가며 나눈 대화입니다. "주찬아 요즘 미국의 금융회사들이 문을 닫고 미국경제가 어려운 것 아니?" 그러자 12학년인 제 아들이 금융회사들의 이름을 줄줄 대면서 대답했습니다. "너는 이번 경제 위기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러자 앞으로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제 아들의 입에서 바로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탐욕(greed)이요. 사람들이 너무 탐욕적(greedy)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이번 경제위기는 정확히 탐욕의 결과입니다. 그런 대답을 할 줄 아는 아들이 마음으로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바로 그 탐욕 때문에 천박해지고 탐욕에 더 물이 들수록 사람들의 삶의 질은 더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월스트릿의 근본정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것이었습니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Greed is good).' 하지만 그것은 틀렸습니다. 탐욕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을 불행하게 만드는 블랙홀과도 같은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 인생을 보람 있고 의미 있고 행복하게 할 만한 모든 유의미한 조건들을 삼켜버립니다. 탐욕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끕니다. 탐욕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행복도 감사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성도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삽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가 행복지수도 높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정도면 만족하고 살만한데 족함을 모르고 끊임없이 더 쥐려하고 더 벌려고 하고 더 올라가려고 하고 더 누리려고 합니다. 한번 탐욕에 빠지면 스스로를 닦달(?)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저만큼 앞서가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과 비교하다보니 자신은 실패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지요. 성경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결국 탐욕의 결과는 죽음이란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의 인생의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겠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가졌느냐 의해 갈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인생에 대한 평가는 오직 얼마나 세상적인 것을 이루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압니다. 며칠간의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가지만 실제로 한 번도 쓰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어찌 여행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벽장에 걸리고 쌓여있는 많은 옷들 집안 구석구석의 사용하지 않는 박스들이 다 우리에게 말없는 선생들입니다. 요즈음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MBA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가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탐욕'을 잠재우고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우리도 이 일을 합시다. 이 감사의 계절에 감사를 되찾기 위해 먼저 할 일은 우리가 부렸던 탐욕을 다 털어내는 것입니다. 탐욕이 떠나간 자리에 비로소 감사가 찾아옵니다.

2008-11-25

[사목의 향기] 다시 동성결혼

지난 11월 4일 이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날 여러 가지 주민결의안을 묻는 항목에도 투표가 실시되었다. 필자에게는 "동성 결혼 반대 주민결의안 8항"이 대단히 중요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올바른 정신을 가진 이들이 힘을 모아 그 결의안에 표를 던져 (yes on 8) 52%로 통과 되어 흐뭇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항의와 반대운동이 만만찮게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있어 마음이 착잡하다. 필자는 지난 6월 동성결혼 찬성안이 켈리포니아 대법원에 의해 발표된 후 "2008년 6월 16일 오후 5시 1분은 캘리포니아주가 미친 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동성 결혼이 헌법적으로 허용되는 날과 시각이기 때문이다.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더 이상 이 주에서는 미치광이나 범법자가 아니라 헌법적인 혼인을 통해 부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글을 이 신문 수요일 종교란에 쓴 적이 있다. 미쳤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개나 소가 미치면 피해를 주므로 도살해야 하고 사람이 미치면 비정상인이므로 그런 사람은 정신병동에 넣어 특별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대법원 판사라면 올바른 이성을 지닌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인들일텐데 그런 사람들이 자연법에 대한 지식도 결여되어 있거니와 윤리성에 대해서도 그 정도 사고밖에 못한다면 미국의 앞날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어둡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로마 제국 멸망 원인들 중의 하나는 윤리의 타락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결혼이 아니다. 자연법에도 어긋나거니와 변화를 추구하는 오바마의 정책에도 이런 식의 이상한 변화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본다. 동성결혼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물론 신법에도 어긋난다. 올바른 이성을 지닌 이들이 여기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데는 하느님의 법이 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윤리에 대해 가르치며 가르칠 의무가 있다. 비정상적인 윤리 규정을 그냥 방관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방관시 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미국에서 하든 말든 그냥 두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엄연히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1월 4일 투표일 오래전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교회가 앞장서서 이를 반대했다. 그리하여 전단도 만들고 현수막을 걸고 공공장소나 교회의 울타리에도 붙이면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덕분에 반대자들의 힘을 막을 수 있었다. 필자가 사목하는 성당에서도 주보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성당의 울타리에도 YES ON 8이라는 전단을 수 십장 붙여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홍보를 벌였는데 자고나면 그 전단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한 밤중에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또 붙였다. 또 사라졌다. 붙이면 사라지고 붙이면 사라지고.....이런 식으로 여러 번 숨박꼭질을 한 것은 분명히 선과 악의 싸움이었다. 창조 이후 원죄 이래 선과 악은 맹렬한 싸움을 벌여 왔다. 그러나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선이 승리했다. 예를 들면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당은 악의 세력인데 러시아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70여년이 지난 후 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크나큰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신법은 차치하고라도 자연법을 어기면 비정상이라는 것을 역설할 뿐이다.

2008-11-25

[지혜의 향기] 선업을 가까이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의 경우 깨치지 못한 육안을 통해서 단지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토대로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알고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세계 형이상의 세계는 전혀 알 수 없거니와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신 진여불성의 세계인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생명의 본질자리 에너지의 세계는 인연이 없는 중생과 전생에 공부를 하지 않는 미혹한 중생들은 칠흑같은 그믐 밤중에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전혀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전생에 공부와 인연이 있는 많은 불자들은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접근은 아니더라도 과학적 이치를 밝히는 전문지식을 가진 우주적 천재 아인슈타인이나 금세기 대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분들은 부처님의 뜻 우주 법계의 자연이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인간은 일단은 믿어야 한다. 무엇을 믿는가. 부처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 생명 에너지의 세계도 아울러 현상세계 또한 소상히 밝혀 설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신구의 삼업이 있다. 신 즉 몸은 남을 때리거나 치고받고 하는 것이고 구 즉 입은 욕을 하고 거친 말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의 즉 뜻은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세 가지로서 업을 지으면 언제 또는 어느 생엔가는 반드시 결과인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선업을 지으면 선업의 과보로서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고 내가 지은 만큼의 복락을 받지만 만약 악업을 지으면 금생이 아니면 다음 생 그 어느 때라도 악의 과보를 받아서 병에 걸리고 또는 빈천하게 살고 또는 어려서 죽기도 하며 지옥이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특히 어려서 죽은 사람의 영은 대부분 자기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이런 고로 다시 또 죄업을 짓게 되고 이로 인하여 삼악도에 떨어지면 언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기약은 없고 고통받는 세월은 한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중생이 지은 모든 업에는 늘 과보가 따라 붙는다고 하신 것이다. 다만 그 시기가 다를 뿐이다. 금생에 지어 금생에 받는 것을 순현업이라 하고 금생에 지어 다음 생에 받는 것을 순선업이라 하며 금생에 지은 업이 금생에나 다음 생에는 받지 않지만 언젠가는 받게 되는 것을 순후업이라 한다 요즘 세태를 보면 우리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많이 모아서 자손에게 상속시켜 주려고 한다. 이러한 재산도 모으는 과정에서 악업을 지어가며 모은 재산은 여하한 어떤 이유로든지 재앙으로 흩어져 버린다. 반면에 남을 모르게 선행을 베풀며 음덕을 쌓으면 그 집안의 자손에게 비록 재산은 물려주지 않았더라도 부모의 음덕으로 잘 살게 되는 것이다. 삼일 수삼천재보요 백년 탐물일조진이라는 말이 있다. 삼일 동안 닦은 공덕의 마음은 1000년간 보배가 되지만 100년 동안 탐욕으로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먼지로 변한다는 것이다. 위의 글처럼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재산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져지는 물질인 재물 따위는 어느 한 순간에 거품처럼 사라지는 만큼 선업(착한 일)을 늘 가까이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지녔으면 한다.

2008-11-25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종교는 뱀이다

#풍경 1 : 중국의 마조(馬祖.709~788)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었죠. 이를 본 회양(懷讓.677~744) 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은 좌선해 무얼 하려고?" 그러자 마조 스님이 답했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회양 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쓱싹 쓱싹' 갈기 시작했죠. 그걸 본 마조 스님이 물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회양 스님이 답했죠.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이 말을 들은 회양 스님이 받아쳤죠.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그러자 마조 스님이 물었죠.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이 말을 들은 회양 스님이 말했습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때려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풍경 2 :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간다(마태복음 7장21절)." 예수님은 또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쫓고 기적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경고했습니다. #풍경3: 원불교 이선종(64.서울교구장) 교무에게 "종교가 뭡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교무는 "종교는 뱀이다"라고 답하더군요. 깜짝 놀랐죠. '엥? 뱀이라니?' 눈을 크게 떴더니 이 교무는 설명을 보탰죠. "뱀을 잡을 때 어디를 잡아야 합니까? 허리를 잡나요? 꼬리를 잡나요? 아닙니다.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물리지 않죠. 허리나 꼬리를 잡으면 되려 물리고 맙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죠." 그렇습니다. 종교는 '뱀'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나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똬리를 틀고 있는 저 뱀(종교)의 머리가 어디인가.' 그걸 오차 없이 정확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회양 스님은 마조 스님을 꾸짖었죠. '좌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벽돌만 갈고 있느냐?'는 거죠. 다시 말해 '뱀의 꼬리'를 잡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죠. "주여! 주여!"만 목놓아 외치는 것은 '뱀의 허리'를 잡은 거죠.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 때'라야 '뱀의 머리'가 잡힌다는 얘기입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죠. 그 순간 '뱀의 머리'가 잡힌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예수의 뜻대로 살 때 비로소 '뱀의 머리'를 틀어쥐는 겁니다. 종교는 그냥 뱀이 아닙니다. 맹독을 품은 독사죠. 뱀 중의 뱀입니다. 왜냐고요? 머리를 잡을 땐 '약'이 되지만 꼬리를 잡을 땐 '독'이 되기 때문이죠.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생명을 죽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늘 살펴야죠. 내가 잡은 곳은 어디인가. 뱀의 꼬리인가 허리인가 아니면 머리인가.

2008-11-25

[신앙의 샘] 무릎으로 하나님을 보자

주위를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나 어떤 자리에 필요한 사람을 찾고자 하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신문의 구인란과 구직란을 보다 보면 어떤 때는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서로들 모자르다고 난리들 입니다. 회사는 사람이 모자르다고 하고 사람들은 마땅한 직장이 없다고 합니다. LA의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학교가 근처에 몇 개 있고 학교마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이 다닙니다. 아닌게 아니라 근처 신학교 재정은 한국 사람이 다 채워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있이 있습니다.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그것을 보며 반농담으로 이러다간 LA 전체가 성도는 하나도 안 남고 목회자로 꽉 차겠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많은 교회에서 전도사 또는 목사다 부족하다고 아우성 입니다. 예전에 하인을 많이 부리던 어떤 상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매우 총명하고 지혜있는 하인을 불러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 하인은 "예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하인의 상전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과연 세상에서 제일 흔한 것이 사람이라 우선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물어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이번에도 그 하인은 "예 그것도 사람입니다"'라고 서슴치 않고 대답했습니다. 상전은 이를 이상히 여겼으나 곰곰히 생가해 보니 과연 세상에 사람이 많기는 하되 정말 필요한 곳에 알맞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치면서 이말이 옳다고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도 사람이고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람이듯이 요즈음 우리 기독 사회에 가장 흔한 것도 기독교인이요 가장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기독교인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은 사역을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와야 사람이지!'라는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말을 조금 바꾸어서 우리에게 적용해 보아도 전혀 어색치 않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 기독교인이냐 기독교인다와야 기독교인지이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 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을 하늘 위에 두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꿈을 먹고 사는 그런 크리스천들이 가득찬 세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너도 아니고 그들도 아닙니다. 바로 '나'부터 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상에 필요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한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세상 모든 면에서 '확실' 한것을 찾을 수 없는 지금.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는 지금이 하나님을 위해 이땅을 위해 무릎으로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새의 눈을 가진 민족은 흥하지만 벌레의 눈을 가진 민족은 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앞의 것만 바라보고 자기만 생각하는 자들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안에서 보다 높은 꿈을 가지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릎으로 사는 자라야 정말 세상에 필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을 엽시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릎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모세처럼 예수처럼 말입니다.

2008-11-18

[기독교인의 삶] 종은 울려야 종이다

계절의 변화를 보는 11월달입니다. 쌀쌀해져가는 가을에 감사를 표현하므로 추워지는 계절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음이 기쁨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식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자들은 '심는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원리'를 적용하며 풍부하게 살아가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경험하면 할 수록 '표현'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축복을 더 알아가고 싶습니다. '생명의 삶'에서 '노래는 부를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종은 울릴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때까지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할때까지 축복이 아니다.'라는 글을 보며 표현을 해야만 표현하고자 하는것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고 소원을 기도를 통해 표현할때 하나님께서 일하셨음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다윗의 시편이 있다면 교회와 영적인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의 심장을 가지고 표현한 사도바울의 서신들을 생각해봅니다. 고린도전서 큐티를 통해 저는 사도바울이 표현한 '사랑'을 배워갑니다. 그의 일생은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입술에서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그의 마지막 생애의 순간까지도 보여줍니다. 제가 생각했던 사도바울은 감정보다는 이성이 더 강해서 따뜻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신들을 보면 볼 수록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또한 영적인 자녀들에 대하여 사랑하였는지를 부끄러움 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표현'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사랑에 대한 글 중에서 '사랑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지만 진실한 사랑은 힘이 있고 지혜와 동행합니다' 라는 글이 좋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참 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고린도전서의 첫 장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보기엔 미련하고 약해보이지만 그 진실한 사랑 안에 힘이 있고 지혜가 동행하기에 그 어떤 사랑보다 강합니다.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때 하나님은 기쁨을 주기 위해 일하신다는것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저의 일상 속에서 가족들 친구들과 동역자들에게 '사랑해요' '감사해요' '기쁩니다' 라는 표현을 하려 합니다. 표현할때 그 관계가 더 친밀해지고 서로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표현의 능력' 책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며 살리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표현을 통해 풍성해집니다. 표현하면 감동을 줍니다. 힘을 주고 용기를 줍니다. 표현하면 사라졌던 감정이 생기고 상실되었던 느낌이 새롭게 찾아오기도 합니다.'라는 글이 기억납니다. 표현이 부족했던 제가 조금씩 표현의 능력을 배워가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힘과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전병욱 목사님 설교중 '사랑은 혀 끝으로 시작해서 손 끝으로 끝나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쁜 일상속에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못해 아쉬움으로 한해가 마무리 되기 쉬운 11월달입니다. 요일 3장18절 말씀처럼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표현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08-11-18

[목회 칼럼] 성도가 뿔났다?

최근 한국 연속극 중에서 '엄마가 뿔났다'란 이름을 보았다. 드라마는 단 한편도 보지 못했고 줄거리에 관해서 듣기만 했다. 화를 낼 것 같지 않는 사람이 내는 화에는 묘한 힘과 정당성이 있다는 주제를 다룬 것 같다. '성도가 뿔났다'는 표현은 어떤가? 성도는 원래 뿔낼 수 없는데 의로운 일에는 분을 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너무나 자주 하찮은 일에 뿔이 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원어에는 '뿔났다'를 표현하는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있다. 각각 의로운 분노와 그렇지 않는 성냄을 표현한다. 성도가 내고 있는 '뿔' 중에 의로운 것이 몇 가지나 있을까? 별로 없다고 보면 된다. 시작은 의로운 분노였다 할지라고 이 분을 간직하는 동안 하잘 것 없는 '성냄'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뿔'은 자신을 통제 불가능의 상태로 만들며 급기야는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대개 나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다. 가족 직장의 동료 혹은 주님의 일을 위한 동역자들이다. 요즘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에서 발표된 한 통계에는 전국민의 2/3가 엄밀하게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 보아야할 것이 적잖은 사람들의 우울증이 누군가로부터 무방비로 당한 화가 남겨준 손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절제 되지 않은 화'의 문제는 수많은 '점잖고 얌전한 사람'들 안에도 잠재되어 있다. 야고보서는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을 세우기 위한 지혜의 책이다 (약 1:4). 이런 목표를 위해 야고보사도는 화 다스리기에 대해서도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람이 화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선포이다(약 1:20). 이 진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성도는 '뿔남'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선언하고 있는 문맥을 보면 화 다스리기를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더 배울 수 있다. '뿔'이 나면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맘에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 뱉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명령 후에 화 다스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약 1:19-20). 하지만 야보고가 궁극적으로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셨다고 쓴다(약 1:18). 그리고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라고 교훈한다(약 1:21). 이 두 가지 '말씀'에 대한 교훈이 화 다스리기에 대한 가르침을 앞 뒤로 감싸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온유한 심령'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실 때 내 안에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놓으셨는데 이 말씀은 온유한 마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어떤 세상의 힘보다 강하다. 나를 '뿔'나게 하는 어떤 이유보다 더 선명하게 나에게 진정한 진리에 대해서 말해준다. 삶이 참 어려워졌다. 주변에 짜증나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성도는 온유한 마음으로 내 안에 이미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08-11-18

[사목의 향기] 삐라야 날아라

60년 대 말 군대생활을 할 때 춘천에서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연병장이나 사무실 옆 소나무 숲속에 떨어져 있던 북한의 삐라(전단)를 본 적이 있다. 삐라라는 것을 그 때 처음 보았다. 내용은 유치했다. 지루한 군생활이라 한번 보고는 던져버리는 주간지 같은 것이었다. 마침 옆 사무실이 보안부대 분실이라 그쪽으로 넘겨주면 그들은 무슨 진귀한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좋아들 했다. 그러나 중대장과 정훈 장교는 중대한 것으로 여기고는 이북의 선전에 현혹되지 말라는 훈시로 엄포를 놓곤 했지만 그런 말에 넘어갈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로마에서 공부할 때는 불란서 빠리에서 출판된 이북 신문이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배달되곤 했는데 수신인은 60년 대 유학하신 은사님의 존함으로 되어 있었다. 역시 조잡한 내용들이라 바쁜 우리에게는 그런 것에 눈 돌릴 시간이 없었다. 최근 우리나라의 뉴스를 보니 남북군사회담에서 이북이 제시한 의제 중의 하나가 남한의 전단을 중지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 쪽에서 보내는 전단이 이북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는 모양이다. 우리 정부 측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단속하겠지만 신문을 보니 탈북자들과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이 이북 사람들의 인권을 위하여 그런 활동을 한다고 한다. 이북의 "요덕"이라는 곳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 모양인데 그곳을 탈출한 사람이 직접 증언한 내용이니 사실일 것이다. 1985년이면 23년 전인데도 그 때 삐라를 통해 남한 실상의 일부를 보고 놀랬다고 하니 요즈음의 남한 실상을 보는 북한 사람들의 놀램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수용소를 탈출한 이들과 기타 탈북자들은 북한의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투철한 각오로 하고 있다고 하니 대단한 분들이다. 자유를 위해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들의 심리적 상태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단지에는 탈북자들이 보고 느낀 자유민주주의와 남한의 실상이 적혀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이북의 독재자 김씨에 대한 실상이 적혀 있고 그 정권에 대한 실상들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고 하니 외부와 차단되어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놀램이 어떠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는 최근 김씨의 건강 이상에 대해서는 이북 사람들이 대부분 모르고 있을텐데 이를 상세히 알릴 뿐 아니라 다른 소식들도 알려주고 있다고 하니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수로를 열어주는 셈이다. 최근 남북군사회담에서는 전단이 계속해서 살포되면 개성공단과 관광사업까지도 문제를 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하니 그 전단들이 북한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모양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미 통일은 시작되었다 다만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민족과 언어가 살아있는 한 통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만 하면 되지 않을까?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하고 생명보다 귀한 자유를 빼앗기고 봉건노예상태에 있는 북한 동포를 위하여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그들은 러시아 공산당을 대항하여 싸운 사란스키나 티벳트의 성자 달라이라마에 버금가는 이들이다. 삐라야 날아라. 그리하여 진실이 드러나게 하라.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2008-11-18

[지혜의 향기] 불교의 밤과 낮

오래 전에 우리 어머니가 무슨 얘기 끝에 남편은 잃었지만 자식이 있는 사람과 남편은 있으나 자식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그래도 더 나을까를 얘기하신 적이 있다. 말인즉슨 여인이 갑자기 남편을 잃으면 캄캄한 밤중에 하늘이 무너진 듯 어둠과 절망 속에 내던져질 것이지만 어린 자식이 남아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 혼자서 이를 살려서 키우기가 몹시 괴롭겠지만 살이 터지고 뼈가 닳더라도 어쨌든 키워 놓으면 아주 조금씩 동녘 하늘이 트이듯 나이 들어 늙어 가면서는 차차 인생이 밝아 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남편은 멀쩡하게 살아 있되 자식이 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은 편하고 환한 대낮이겠지만 해가 기울어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고 밤이 찾아오듯 인생은 마침내 점점 더 캄캄해지는 한밤의 어둠 속에서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유교적인 가족주의가 깊이 배어 있는 얘기로서 요즘 세상에 어디서나 꼭 들어맞는 얘기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만약 이 얘기에서 '자식'이란 말을 '꿈'이나 '희망'이란 말로 바꾸어 놓고 음미해 보자면 요즘 세상에도 널리 보편성이 있는 얘기가 될 것이다. 꿈과 희망이 없는 인생이란 결국 캄캄한 밤 어둠 속에서 끝나고 말 테니까. 그 보편성이란 불교 특히 미주의 한국 불교를 얘기할 때도 무리 없이 적용될 것이다. 우선 미주한국불교가 어린이 청소년을 기르지 않고 어른이나 노년층 위주의 불교로 갈 때 지금 당장은 그게 편하고 실속이 있을지라도 해가 갈수록 차차 어둠이 찾아와 마침내 캄캄한 밤중 막다른 골목의 수렁에 빠져 불교는 사망신고를 할 것이다. 반면에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우선순위를 주는 불교를 한다면 처음에는 성과도 빨리 오르지 않고 귀찮은 일만 많을 것이며 돈 쓸 곳은 많아 늘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법당은 소란스럽고 어지러워서 일일이 챙겨 주려니 골머리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한 해 두 해 다섯 해 열 해를 내 자식 키우듯 뒷바라지 하며 버티고 나면 그 아이들 중에 자라서 집 찾아 들여다보는 기특하고 듬직한 이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고 절 살림도 날이 새듯 조금씩 펴질 것이다. 어느 날 장성한 형제자매들이 왁자지껄 모여들어 낡은 오막살이를 허물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튼튼한 새 주춧돌을 놓는 것이 정해진 순서다. 둘째의 갈림길은 불교를 언제까지나 켸켸묵은 한문 위주로 하고 신도들에게는 내용도 잘 안 가르쳐 주면서 눈치로만 깨치게 하느냐 아니면 쉬운 요샛말로 된 한글 경전을 가지고 제대로 부처님 말씀을 가르쳐 가면서 하느냐다. 입에 익고 귀에 익고 가락도 구성진 한문 염불만 읊고 앉았으면 누가 보기에도 그럴 듯하고 일일이 답해 줄 일도 머리 쓸 일도 적어 우선은 좋을 것이다. 제 멋에 겨워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선. 대신 불경을 요샛말로 바꾸어 하자면 경망스럽고 박자도 잘 안 맞는데다가 일일이 찾아보고 확인해 볼 일도 많아 성가실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그리 하다 보면 가슴이 어느새 부처님의 말씀으로 환하게 밝아질 것이고 어색했던 가락에도 어느덧 흥겨운 곡조가 붙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기복 불교 제식 불교 위주로 곧장 가느냐 포교에 온 힘을 쏟느냐가 밤과 낮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냐 생존과 번영의 골짜기냐의 갈림길이다. 때맞추어 재 지내고 등 달고 온갖 제사 지내기만 되풀이하다 보면 우선은 질긴 목숨을 이어가겠지만 이는 결국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맞을 나 자신의 쓸쓸한 임종을 위한 예행연습이 될 뿐이다.

2008-11-18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나의 화살이 향하는 곳

#풍경 1 : 얼마 전 몽골에서 잠시 귀국한 이용규 선교사(베스트셀러 기독교서적 '내려놓음'의 저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올해 마흔한 살입니다. 젊더군요. 그런데 그의 지향은 놀라웠죠. 그는 "'나'라는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렇게 '자아'가 죽은 빈 공간에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활시위는 '밖'을 향하지 않더군요. 한치의 오차 없이 '안'을 향했습니다. 이 선교사는 "그렇게 내 안의 집착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만지시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풍경 2 : 중국에 '석공'이란 사냥꾼이 있었죠. 사슴을 쫓던 그는 마조(709~788)선사의 토굴까지 갔습니다. 마침 휴식을 취하던 마조선사와 마주쳤죠. 석공이 물었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도망가던 사슴을 못 봤습니까?" 마조는 태연하게 되물었죠. "그대는 뭘 하는 사람인가" "보시다시피 사냥꾼입니다" "그럼 활을 잘 쏘겠구먼" "잘 쏘는 편입니다"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는가" "한 마리 밖에 잡지 못합니다" "그럼 활을 쏠 줄 모른다고 해야지." 발끈한 석공이 되물었죠. "그럼 스님은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나는 한 무리를 잡는다네" '옳거니!'하면서 석공이 받아쳤죠. "아니 스님이 어찌 산 생명을 무리로 잡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마조선사가 석공의 가슴을 가리키며 답했죠. "자네는 그런 것까지 알면서 왜 이쪽을 쏘지 못하는가." 석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리고 출가해 마조의 제자가 됐습니다. 크리스천이든 불자든 마찬가지죠. 인간은 끊임없이 다가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부처를 향해서 또 예수를 향해서 말입니다. 왜냐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겠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겠죠.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깨달음의 세계로." 그런데 두손을 모은 채 "할렐루야!"만 외친다고 '하나'가 되진 않겠죠. 불공을 올리며 "부처님"만 찾는다고 '하나'가 되진 않겠죠. 그럼 어찌할까요. 나와 부처님 나와 예수님 사이의 간격을 봐야겠죠. 우린 활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겨눌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무엇이 예수를 가리나 내 안의 무엇이 부처를 가리나. 그게 보일 때 '과녁'도 보입니다. 쉽진 않습니다. 왜일까요?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움켜쥐는 방식'에만 익숙할 뿐 '놓아주는 방식'에는 익숙치 않기 때문이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그걸 알고 시위를 당겨야겠죠. 단 하나의 화살로 "쿵!"하고 쓰러지는 '자아'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쏘고 쏘고 쏘고 또 쏘아야죠.그러다 '퍽!'하고 '자아'가 고꾸라지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절하게 느껴지겠죠. '난생 처음 맛보는 생명력 이게 바로 부처의 숨결이구나' '밀물처럼 밀려오는 온유함 이게 바로 주님의 어루만짐이구나.' 그러니 물어야죠. 나의 화살은 지금 어디를 겨누는가.

200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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