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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신호 위반했다고 비자 취소라니

나는 도로주행 시험을 다섯 번 보고 운전면허증을 땄다. 첫 시험에서는 ‘No Turn on Red’ 표지판을 보지 못하고 우회전을 했다가 탈락했다. 두 번째,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잘못된 비보호 좌회전 방식으로 탈락했다. 결국 운전학교에 등록해 도로주행 연수를 받고 나서야 다섯 번째 실기시험에서 합격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미 1995년에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1996년부터 27년간 무사고 운전을 이어왔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풍부한 운전 경험을 과신한 나머지, 미국과 한국의 교통법규와 신호체계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이런 개인적 경험을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최근 좌회전 신호 위반 등을 이유로 유학 비자가 취소된 한국 유학생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유학생 133명이 연방법원 조지아주 북부지법에 비자 취소 결정이 부당하다며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이 가운데 한국인 유학생도 5명이 포함돼 있다. 좌회전 신호 위반, 불법주차, 음주운전 등 교통법규 위반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지아주는 2013년 7월 한국 정부와 운전면허 상호인정 협약을 체결했다. 조지아주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의 한국 국민은 한국 운전면허증을 제출하고 별도의 필기시험이나 도로주행 시험 없이 운전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교통법규와 신호체계가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교통법규를 위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호 위반이 유학 비자를 취소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인가?     형법에는 ‘비례의 원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범죄와 형벌 사이에는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신호 위반은 경미한 법규 위반에 불과하지만, 비자 취소는 개인의 학업과 연구 활동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중대한 처벌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 조치를 넘어, 개인의 미래를 좌절시키는 과잉 조치다.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은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유학생 정보 관리 시스템(SEVIS)에서 신원자료를 임의로 삭제했기 때문이다. SEVIS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유학생들의 신분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으로, 9.11 테러 이후 국가안보 강화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통상적으로는 대학이 관리해왔다. 미국을 5개월 이상 떠나 있는 경우 등 명확한 사유가 있어야 SEVIS 기록이 삭제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ICE가 단순히 국가범죄정보센터(NCIC) 조회 결과만을 근거로 수천 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의 SEVIS 기록을 일방적으로 삭제했다. SEVIS 기록이 삭제되면 유학 비자도 취소된다.   미 이민변호사협회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 이후 이런 식으로 삭제된 유학생 기록은 최소 4700건 이상으로 추산된다. 최근 들어 당국은 뒤늦게 문제를 인정하고, 잘못 삭제된 SEVIS 기록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비자 취소 처분을 받은 유학생들이 전국 각지 법원에서 가처분 결정을 받아낸 데 따른 조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 비자 취소로 학업을 중단하고 연구를 포기해야 했던 유학생들에게 단순히 “기록을 복원했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다. 무너진 신뢰 역시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유학생 정책을 단순 행정 처분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유학생들은 학문적 교류의 주체이며, 미국의 교육과 연구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소중한 인재들이다. 이들을 상대로 이토록 허술하고 무책임한 조치를 내린 것은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무영 / 뉴스룸 에디터중앙칼럼 신호 위반 신호 위반 한국 유학생들 한국 운전면허증

2025-04-28

[중앙칼럼] 우리를 뿌듯하게 하는 사람들

한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독자에게 기사로 전달하면서 종종 지면이 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주백 대표와 진광석 씨의 이야기가 그랬다.     이 대표는 지난 3월 아내와 함께 만든 ‘백애재단’을 통해 한국의 용산고 학생들에게 3억 원의 장학금을 약속해 화제가 됐다. 미국에서 정착한 동문 선배들이 한국의 모교와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희사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용산고를 졸업하지 않았다. 그는 꽃다운 19살 나이에 정권의 강제 진압에 희생된 삼촌 이한수 열사를 기억하며 돈을 보낸다고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올해로 80세 중반이 된 이한수 열사의 벗들이 여전히 매년 4월 19일 모교를 방문해 손자 같은 재학생들과 기념비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지난 주말에도 용산고 캠퍼스에는 1960년 친구 이한수를 기억하는 선배들과 지금의 재학생 후배들이 함께 모였다.   이름 모를 미국의 한 가족이 큰 장학금을 보내온 사실에 재학생들도 기쁨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독자들도 동의하겠지만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미국 이민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시민의 의무도 게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50년 넘은 소망이 현실화된 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묵묵히 일하며 성실히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표의 결정과 실행은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이 여전히 뿌리를 기억하고 한국의 아픈 역사를 배우기 바란다는 소망을 내놓았다. 그가 매번 한국 방문 시 수유리 묘지를 찾을 때 아들을 동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LA에 거주하는 진광석씨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한국에서 선망받던 엔지니어로 활동하다 미국에 와서 사업을 통해 안정을 이뤘다. 그러던 중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에 암진단을 받게 된다. 그는 지난 1월 7일 팰리세이즈 화재 현장에서 살고 있던 단지 내에서 진화작업 중인 소방관을 도와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일조했다.     미담이 알려져 LA 시장이 용감한 시민상을 직접 수여했다. 그의 가족의 표현을 옮기자면 정말 ‘미친 짓’을 한 셈이다. 아내와 성인이 된 딸들은 살아 돌아온 진씨 때문에 속이 까맣게 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항암치료까지 마친 그가 대피를 포기하고 남았던 이유로 든 것은 ‘삶의 목적’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존재의 이유를 ‘남을 돕는 것’으로 규정한 그는 찰라의 순간에 ‘더 중요한 것들을 위해서라면 희생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주변 이웃들의 칭찬과 격려에도 그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사실 항암치료는 환자를 가장 외롭고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가지 않나. 당연히 남보다는 나를 더 챙기고 보호하려는 생각이 가장 앞서는 시기다. 진씨의 무모하리만큼 위험했던 용기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진 씨는 21일 LA 시의회에서 열린 배스 시장의 시정연설에도 초대받아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한인들의 가장 큰 무기는 뿌리를 기억하고 자신을 잘 돌아보는 혜안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된 2세 아이들은 종종 몰랐던 부모의 이민 스토리를 듣고 더 큰 비전과 용기를 갖게 된다. 이런 자양분이 그들이 성공하는데 더 큰 바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뿌듯하다.   이주백 대표와 진광석 씨처럼 더 멋진 이민 선배들이 나오면 좋겠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 2~3세들에게도 계속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 최인성 / 사회부 부국장중앙칼럼 뿌듯 이주백 대표 재학생 후배들 한국 방문

2025-04-22

[중앙칼럼] 위기의 한인 경제, 돌파구는 있다

경제부 부장 3년 후면 LA올림픽이 열린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LA28)가 신규 경기장을 발표하면서 2028년 올림픽이 가시화됐다.   하계올림픽 전체 50개 이상의 종목 중 2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소가 확정되며 경기장의 95% 이상 윤곽이 나왔다.     올림픽 개최가 불러오는 경제 효과는 크다. 고용 창출, 세수 증대, 관광 수입에 지역상권 활성화까지 기대할 수 있다.   2028년 올림픽 이전 2026년 월드컵, 2027년 수퍼볼 등 예정된 대형 스포츠 및 글로벌 행사는 LA, 특히 한인 상권에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   현재 LA경제는 경기 둔화와 고금리 여파로 많은 스몰비즈니스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특히 한인 기업들은 인플레이션, 소비 위축, 인건비 상승이라는 삼중고 속에 관세까지 기존 방식만으로는 더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올림픽을 비롯해 대형 스포츠 및 글로벌 행사는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에 한인업체에 돌파구가 될 수 있다.     2028년 올릭픽 경우 경기 주최에 필요한 프라임 벤더(주계약 업체)가 대부분 선정된 상태다. 캐더링, 이벤트 운영, 통역, 인력 파견 등 한인 비즈니스가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수요가 지속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한인 업체들이 서브 계약을 수주하는 것도 실현 가능한 전략이다.     이와 함께 정부조달사업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정부는 매년 연방, 주, 시 정부를 통해 수조 달러 규모의 조달 예산을 책정하고, 물품 공급, 용역, 서비스 등의 계약을 발주한다. 연방정부 조달 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6조1300억 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지방정부와 공공기관까지 포함하면 시장 규모는 더 커진다.   이러한 거대한 공공시장에 진입하는 한인 기업은 극소수다. 이는 기회 부족이 아니라, 접근성과 정보 전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LA시는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지난해 10월 비영리단체 PACE와 함께 중소기업의 정부 조달 참여를 지원하는 ‘ProcureLA’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이 프로그램은 벤더 등록, 인증 절차, 입찰 가이드, 정부 기관 정보 접근 등을 무료로 지원하며, 특히 한인 디렉터가 있어 한인 기업체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PACE에 따르면 정부 조달 사업의 강점은 분명하다. 경기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예산, 장기 계약과 재계약 가능성, 그리고 공정한 경쟁 환경은 민간 시장에서는 얻기 어려운 장점이다. 한 번 수주에 성공하면 레퍼런스를 통해 추가 기회를 연결할 수 있고, 스몰비즈니스 인증을 받은 경우 평가에서 가산점과 우선권까지 주어진다.   다만 이 기회의 문은 준비된 업체들에 열린다. 정부 조달 사업은 대금을 사업 완료 후 60~90일 이내에 지급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결국 조달 사업에 참여하려면 자체 현금을 확보한 상태에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조달 시장은 단순히 저가 경쟁만으로는 진입할 수 없다. 해당 기관이 실제로 어떤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지, 입찰 공고의 요건을 정확히 해석하고 맞춤형 제안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한인 기업들은 정보 접근의 장벽, 언어적 제약, 복잡한 행정 절차에 대한 부담감으로 공공 조달 시장 참여를 주저해 왔다. 그러나 이는 극복 불가능한 장벽이 아니다.     PACE 같은 비영리단체에서 무료 상담, 시장 조사 교육, 포털 등록 지원, 입찰 제안서 리뷰까지 다양한 실무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공공 조달 시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특히 정부 조달 사업은 민간과 달리 예산이 줄지 않고, 사업이 중단되지 않으며, 수요가 반복된다.   한인 기업이 이 시장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 더욱 많은 한인 기업들이 정보를 갖추고, 인증을 받고, 준비된 자세로 이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 공공 조달은 더는 특별한 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한인 업체 모두가 진입할 수 있는 ‘공공 시장’이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돌파구 위기 한인 비즈니스 한인 상권 한인 기업들

2025-04-20

[중앙칼럼] 지브리 열풍의 불편한 진실

일본 도쿄의 한 번화가에서 열린 통신사 프로모션 행사에 우연히 참여한 일이 있다. 전화카드를 구매하면 즉석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바로 카드에 인쇄해준다는 말에 이끌려 줄을 섰다. 몇 분 뒤 건네받은 그림 속에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닮은 또 다른 내가 담겨 있었다.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일반 프로필 사진과는 달리 특이하다는 생각에, 그 이미지를 지금까지도 내 모든 소셜미디어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얼굴이 아닌, 나를 투영한 또 다른 자아의 이미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요즘 SNS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기업 '스튜디오 지브리’의 오리지널 화풍으로 그려진 프로필 사진(프사)들이 넘쳐난다. 챗GPT나 AI 이미지 생성 앱을 통해 클릭 한 번이면 누구나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따뜻하고 익숙한 그림 스타일, 세월의 흔적 없는 미화된 용모. 현실과는 살짝 거리감이 느껴지는 감성에 사람들은 만족감을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프사들 속에서는 현실의 자기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익명의 캐릭터 하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감추는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는’ 이 모순적인 심리가 지브리 프사 열풍의 불씨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 프사 열풍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가 있다. 갈수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정교한 AI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40년 넘게 사진을 찍어온 입장에서는 그 정밀함과 기술력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위기감을 느낀다.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창조해낸 따뜻한 세계가 단 몇 초 만에 재현되는 현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지난 2016년 NHK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AI로 만든 보행 동작 애니메이션 샘플을 관람했다. 개발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것을 만든 사람은 (신체 부자유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며 “생명에 대한 모욕을 느낀다”고 불쾌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의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건, 당시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에 그쳤던 AI가 이제는 원본의 오리지널리티와 미감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가 지브리 화풍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데이터에 저작권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점은 법적, 윤리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지브리 프사 열풍을 보며 더 걱정스러운 건, 많은 이들이 이런 이미지를 무심코 사용하는 사이에 원작자의 권리 보호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AI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기존 작품과 실질적으로 유사할 경우 이는 저작권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아직도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화풍’이나 ‘스타일’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스타일이 한 예술가의 수십 년에 걸친 땀과 집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군가의 예술적 결실을 AI가 아무 제약 없이 흡수하고 재가공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창작의 의미는 물론, 창작자라는 존재감이 무색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기술의 발전이 창작자의 권리를 무시해도 될 만큼 정당한지, 빠르고 편리한 결과물이 진짜 예술보다 우선일 수 있는지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는 AI 시대인 만큼, 이제는 기술이 아닌 사람의 창의력을 중심에 두고 창작물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AI 이미지를 규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원작자의 노력이 정당하게 존중받는 환경을 지금 우리가 만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늦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브리 프사에 열광하는 우리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이상화된 자아 속으로 도피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계의 근간이 되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피와 땀, 그리고 영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지브리 열풍 지브리 애니메이션 지브리 스타일 스튜디오 지브리

2025-04-15

[중앙칼럼] ‘극우’ 남발, 언론이 문제다

지난주 한국 언론 기사들에서 ‘종말’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봇물을 이뤘다.     뭔가 해서 읽어보니 미국 시민들이 플로리다주 한 지역에서 사격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연재해, 전염병, 전쟁 등으로 인해 위기가 고조되자 종말과 같은 극단의 상황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태평양 건너의 한국 언론이 이런 스토리를 취재했을 리 없다. 출처를 보니 뉴욕타임스다. 쉽게 말해 번역 기사인 셈이다.     한국 언론들의 번역 기사는 ‘찍어내기’식이 많다. 기사 내용을 보면 사실상 문장, 논조, 순서까지 대체로 비슷하다.       흥미성은 차치하고 기사들중 공통적으로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극우 단체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총기 소유에 대한 인식이 뒤바뀌고 있다는게 뉴욕타임스의 진단이다.’     진보 진영의 캐런 배스 LA시장, 심지어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말라 해리스까지 총기를 소유하고 있는 마당에 ‘극우의 전유물’이란 용어가 뜬금없다.       뉴욕타임스의 원문 기사를 찾아봤다. 일단 기사를 읽어보면 저런 문장 자체가 없다. 게다가 원문에는 ‘극우’라는 용어도 없다. 뉴욕타임스가 ‘우파(right-wing)’라고 명시한 것을 자의로 ‘극우(far-right)’라고 번역해 보도한 것이다.     물론 기사 전반의 내용을 보면 대개 총기 소유의 권리를 옹호하는 쪽이 보수 진영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사격 훈련은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엄밀히 따지면 저 대목은 한국 기자들의 임의적인 번역이다.       맥락도 없이 ‘극우’를 남발하는 시대다. 남발은 사실을 왜곡하고 곡해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데이터 연구 과학자인 데이비드 로자도 박사가 에릭 커프먼 교수(버킹엄 대학)와 함께 ‘뉴스 미디어에서 정치적 극단주의를 나타내는 용어 사용 빈도의 증가’라는 주제로 지난 2022년에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등 54개 뉴스 매체에서 3000만 건 이상의 기사, 칼럼 등을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만해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극우’와 ‘극좌’ 용어를 거의 비슷한 비율로 사용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두 언론 모두 극우 용어의 사용이 ‘극좌(far-left)’에 비해 평균 3배 이상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심화했다. 2008~2014년 사이 뉴욕타임스에서는 ‘극우’ 용어 사용이 243%, 워싱턴포스트에서는 359%나 급증했다. 2015~2019년을 보면 각각 260%, 128%씩 더 증가했다.     논문은 극우 용어의 증가 현상이 뉴스 매체들의 편견(prejudice) 및 사회 정의(social justice) 담론과 깊이 연관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두고 언론의 이념적 중심축이 왼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진보 성향의 엘리트들이 언론계로 진입한 것을 요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뉴스룸 내부의 이념적 불균형이 결국 정치적 극단주의 용어 사용과 관련해 비대칭성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극우 용어의 남발은 뉴스 미디어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반대 진영에 대한 혐오를 자극하고 기사 확산을 극대화하면서 작용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일례로 지난 3월 열린 하원 청문회에서는 대표적 공영방송인 PBS와 NPR의 운영진들에게 내내 질타가 쏟아졌다.     팻 팰런 연방 하원의원(공화)이 폴라 커거 PBS 대표에게 “2023년 6~11월 사이 PBS 보도 중 극우와 극좌 용어 사용의 비율이 ‘96:4’인데, 이러한 편향성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물론 커거 대표는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또한 팰런 의원은 NPR 소속 기자들의 유권자 등록 현황도 언급했다. 그는 캐서린 마허 NPR 대표를 향해 “공화당원이 한명도 없는 걸 보니 민주당이 왜 그렇게 당신들을 극렬하게 방어하는지 이해가 된다”며 “민주당의 선전 부서가 됐다”고 다그쳤다.     이토록 편향적인 주류 미디어를 그나마 ‘받아쓰기’라도 제대로 하면 다행인데, 한국의 언론들은 한 번 더 비틀어 기사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 기사에 중독된 독자들이 과연 미국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심각한건 ‘극우’가 아니다. 인간의 인식을 망가뜨리고 있는 언론이 문제다. 장열 / 사회부장중앙칼럼 극우 남발 한국 언론들 극우 단체 번역 기사인

2025-04-14

[중앙칼럼] K-돌풍, 한인 표심이 만든다

한인 선출직 공직자를 보유한 도시들에서 K-바람이 불고 있다.   풀러턴 교육구는 오늘(9일) 오후 5시 사상 최초의 중학생 대상 K-팝 경연대회를 부에나파크의 더 소스 몰에서 개최한다. ‘K-팝 배틀 오브 더 밴드(K-Pop Battle of the Bands)’란 이름의 대회는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교육구는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오렌지카운티 교육구 최초로 관내 중학생들이 참여하는 K-팝 배틀 오브 더 밴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한인과 타인종 학생 120여 명이 참가한 오디션에선 엄격한 심사를 통해 50명이 연습생으로 선발됐다.   이들은 한 달 동안 K-팝 노래와 댄스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최종 오디션을 대비했다. 이 단계에서 연습생들은 한국 문화와 춤, 악기 수업을 듣고 연습 후엔 한식을 즐겼다. 최종 오디션에서 심사위원단은 5개 학교를 대표할 밴드 멤버 25명을 선발했다. 각 5명으로 구성된 비치우드, 피슬러, 니콜라스, 팍스 중학교와 라데라비스타 예술중학교 밴드는 오늘 6개월간 연마한 실력을 발휘한다.   대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120여 명의 학생이 K-팝 경연대회 오디션에 몰렸다는 것, 교육구 측이 파격적으로 K-팝 경연대회를 연 사실이 중요하다.   풀러턴 교육구의 최근 행보는 한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교육구 측은 지난 2월 최수진 교사를 교육구 사상 최초의 한인 연락관으로 임명했으며, 최 교사가 한국어로 진행하는 한인 학부모 대상 워크숍 시리즈도 시작했다. 첫 워크숍은 한인 70여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이런 변화의 배경엔 로버트 플렛카 교육감의 전향적 행보와 지난해 11월 풀러턴 교육구에서 한인으로서 처음 당선된 제임스 조 2지구 교육위원의 존재가 있었다. 조 교육위원은 취임 직후부터 교육구 측에 “한인 학부모가 교육구를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교육구가 한인 학부모를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인 연락관 임명 필요성도 강조했다. 사상 첫 한인 교육위원이 배출된 후 불과 몇 달 새 벌어진 변화를 보면 한인 선출직 공직자를 늘려야 할 당위성과 각급 선거에서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풀러턴의 K-바람은 프레드 정 시장이 2020년 1지구 시의원에 당선된 이후 불기 시작했다. 지난해 재선 이후를 합쳐 통산 3번째 시장을 맡은 정 시장은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며 풀러턴과 한국 도시들이 경제, 문화,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상생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자매도시인 성남시는 풀러턴 다운타운에 관내 중소기업들의 대미 수출 전진기지인 K-비즈니스센터를 설립했다. 정 시장은 오는 8~9월 중 한국의 치맥 페스티벌을 풀러턴 주민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K-바람은 조이스 안 시장이 버티고 있는 부에나파크 시에도 불고 있다. 시 측은 한인 업소가 밀집한 비치 불러바드 일대를 부에나파크 코리아타운으로 명명했으며, 영어가 불편한 한인을 위해 코리안커뮤니티서비스와 함께 대규모 사회복지 박람회도 열고 있다. 시 측은 지난해 스미스 머피 공원을 우정의 공원으로 개명한 이후, 이 공원에 한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정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부에나파크의 K-바람 또한 시의회 1지구에서 써니 박 전 시장에 이어 안 시장이 당선된 이후 점차 거세지고 있다.     어바인의 K-바람은 한인 시의원 존재 여부에 따라 그 세기가 달라졌다. 강석희, 최석호 시장과 태미 김 전 부시장이 재임하던 시기, 어바인에선 한인 마켓 오픈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어바인 한국문화축제도 성황을 이뤘고, 김 전 부시장은 OC에서 열린 세계한인 비즈니스대회도 지원했다.   오렌지카운티의 K-바람이 돌풍이 되려면 한인 선출직 공직자가 필요하다. 로컬 교육구, 정부 차원의 뒷받침이 있어야 제대로 바람이 불 수 있다는 것을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한인 후보가 없으면 친한파 내지 지한파 타인종 후보를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떤 방식이든 투표 참여는 필수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돌풍 한인 한인과 타인종 한인 학부모 한인 선출직

2025-04-08

[중앙칼럼] 트럼프발 안보 위기

미군이 지난 15일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을 공습하기 전에 미국 정부 수뇌부가 공격 계획을 민간 메신저인 시그널 채팅방에서 논의했고, 그 채팅방에 시사주간지 애틀랜틱의 제프리 골드버그 편집장이 초대된 사실이 지난 24일자 애틀랜틱 기사로 공개됐다.   외교안보 라인 수장들이 정부 통신망이 아닌 민간 메신저를 통해 전쟁 계획을 논의한 것과 그 채팅방에 언론인을 초대한 것이 미국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유럽에선 다른 이유로 이 채팅방 대화가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정부 수뇌부가 드러낸 ‘유럽 혐오’ 속내가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J.D. 밴스 부통령은 예멘 반군 후티에 대한 작전을 거론하며 “우리가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에즈를 통한 미국 무역은 3%에 불과하다. 유럽은 40%다”라고 썼다. 후티의 위협으로 유럽이 더 큰 위험에 처했지만 정작 공격은 미국에 떠넘긴다고 비판한 것이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유럽의 무임승차에 대한 부통령님의 혐오에 공감한다. 참 한심하다(pathetic)”고 답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이 비공개 대화가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혐오’가 얼마나 깊은지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가 방위비를 GDP의 5% 수준으로 올리지 않으면, 미국은 나토를 방어하지 않겠다”고 계속 말해왔다. 유럽 안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조는 1949년 창립 이래 서방 안보를 지탱해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속력을 흔들고 있다. 유럽 각국은 미국산 무기에 대한 의존을 낮추고자 군사력 강화를 추진 중이다.   2월28일 전례 없는 ‘외교 참사’로 끝난 트럼프-젠렌스키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와 정보 지원을 일시 중단한 조치는 유럽에 충격을 줬다. 우크라이나처럼 한 순간에 모든 지원이 끊어질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자 미국에 유럽 안보를 의존하는 것이 불안해졌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보내준 F-16 전투기 편대가 미국이 군사와 정보 지원을 중단하자 비행하지 못하는 고철덩어리로 무능화됐다. 이 사건은 미국이 유럽에 판매한 미국산 전투기에 원격으로 무력화하는 ‘킬 스위치(kill switches)’를 심어놨다는 의혹으로 번졌다.   유럽도 ‘미국 없는 안보 홀로서기’에 대비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3월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8000억유로(약 8653억 달러)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다. 재무장 계획은 유럽산 무기를 우선 구매하는 것이 핵심이다. 엠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3월19일 차세대 라팔 전투기를 추가 배치해 프랑스 공군의 핵억지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군이 주둔하고 미군 무기체계를 사용하는 한국도 유럽과 같은 처지이다. 유럽 상황에서 보듯이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이라고 봐주는 일이 없다.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최근 국방부에 배포한 ‘임시 국가 방어 전략 지침’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 저지와 미 본토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명시했다. 북한 위협을 억제하는 역할은 한국에게 넘기기 위해 방위비 증액을 압박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과정에서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이라 부르며 방위비 분담금 100억 달러를 요구한 바 있다. 한미가 합의한 2026년도 방위비 분담금(약 11억4,000만 달러)의 9배에 가까운 액수다.   트럼프 대통령은 적보다 동맹이 미국을 더 수탈해간다고 생각한다. 동맹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고, 무역적자를 불공정한 무역관계의 지표로 보고 있다.   한국도 유럽의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미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주고 주한미군의 역할을 변경할 것에 대비해 독자적 대북 방어력을 키워야 한다. 동시에 조선업, 미국산 에너지, 방산 제품 구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트럼프식 거래’에 대응할 창의적 접근도 요구된다. 이무영 / 뉴스룸 에디터중앙칼럼 트럼프발 안보 유럽 안보 트럼프 대통령 외교안보 라인

2025-03-31

[중앙칼럼] 시의회 발언대의 막말, 이젠 막아야 한다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길거리 주먹 싸움에서나 듣던 말이었니 그렇다.   10여 년 전 처음으로 LA 시의회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400만 시민의 목소리가 모이는 정치의 중심지라고 하기엔 그 모습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때로는 무기력해 보였다.   LA 시의회 본회의장은 시민들에게 자유로운 발언 기회를 제공한다. 시의회의 결정과 발의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누구든 공개적으로 개진할 수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때로 혹독하다. 시의회 발언대에 선 일부 시민들은 온갖 욕설과 인신공격,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남루한 차림의 이른바 ‘상습 욕설자들’은 의회가 열리는 화요일, 수요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방청석을 차지한다. 그리고는 시종일관 귀에 거슬리는 표현들을 동원해 특정 정치인들과 시의회를 싸잡아 조롱하고 괴롭히는 데 여념이 없다.   그 괴롭힘의 수위는 심각하다. 만약 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길거리에서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공개적으로 듣는다면, 주먹을 쥐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다. ‘뚱뚱하다’, ‘천박하다’, 심지어 ‘성매매 여성’이라는 발언은 물론,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담은 표현까지 서슴없이 사용된다. 피부색을 이용한 인종적 멸시는 이제 놀랍지도 않은 ‘단골 메뉴’가 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원들과 주변 보좌관, 심지어 경찰관들조차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 발언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은 차치하더라도, 혐오 발언에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나중에 만난 보좌관과 의원들은 이러한 광경이 “이미 오래전부터 관행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LA 시의회 내 발언에 대한 명확한 제재 규정은 없다. 간혹 고성을 지르거나, 논의 주제와 벗어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경우 의장이나 시 검사가 발언을 제지하는 정도에 그친다. 사실상 대부분의 혐오 발언은 여과 없이 방청석을 통해 의회 내부로 전달된다.   마퀴스 해리스-도슨 LA 시의장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직접 질문했다. 이처럼 과격하고 무례한 발언과 표현들이 시의회 공식 석상에서 허용되는 것이 ‘헌법적 권리’ 보호라는 명목하에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는 “발언권과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들과 달리,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자유 발언 기회가 정부 기관과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이자 시간일 수 있다”면서 “단순히 욕설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발언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하에 인내하고 있다”고 답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때로는 ‘이유 있는 분노’가 욕설이라는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다. 시민이자 납세자로서 부당함에 항의하고 울분을 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LA 시의회의 상황은 이러한 허용이 사실상 방종을 조장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는 스스로 정화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관행에 맞서, 마침내 시의회 여성 의원들이 특정 수준을 넘어서는 혐오 표현을 퇴출시키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7명의 시의원은 지난주 흑인 비하 표현(N-word)과 여성 비하 표현(C-word)을 명시하고, 이를 포함한 성적, 인종적 멸시 및 비하 발언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조례안을 공동 발의했다.   발의안의 내용은 해당 표현을 사용하는 발언자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될 경우 해당 시의회 회기에 3일 동안 출입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물론 이 조치가 시민의 참여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법적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명백한 혐오 표현으로부터 시의회 구성원들과 정상적인 시민들의 참여를 보호하기 위한 시의적절하고도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시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선출된 시의원들과 수많은 보좌관들이 정당한 비판이 아닌, 길거리 싸움꾼들이 주고받는 수준의 저열한 언어로 고통받는다면, 이 또한 명백한 폭력과 다름없다. 시의원들의 가족들이 회의를 방청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그 고통은 더욱 극명하게 와닿을 것이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 시의회 여성 의원들의 용기 있는 움직임이 LA 시의회 방청석을 조금 더 건전하고 품격 있는 공론의 장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최인성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시의회 발언대 시의회 발언대 시의회 공식 la 시의회

2025-03-24

[중앙칼럼] 포비가 떠난 자리

새벽에 집안을 울리는 고통스러운 비명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반려견 ‘포비’가 괴로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간혹 변비가 생기면 불편해 했었기에, 이번에도 단순히 변비가 아닐까 싶어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그런데 병원서 수의사가 보여준 엑스레이 사진 속 포비의 상황은 심각했다. 의사는 대형견에서 간혹 나타나는 GDV(위염전) 증후군으로 치명적 응급상황이라며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다.   가족 모두는 순간 패닉에 빠졌지만 서둘러 수술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포비를 좀 더 살펴본 의사가 이미 장기 괴사가 진행된 듯하다며 수술 중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높고, 성공하더라도 평생 약을 복용하며 후유증을 겪게 될 수 있어 고통을 줄여주자며 안락사를 권했다. 고심 끝에 의사의 권유대로 포비를 떠나 보내야 했다.   팬데믹 직전인 2019년 가을에 태어난 풍산개 포비는 지난 5년 반 동안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우리 집 막내로 늘 기쁨과 웃음을 선사했던 존재였다. 가족들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못 가고 우리 부부도 병가를 내야 했을 정도였다.   한동안 포비가 사용하던 장난감, 밥그릇, 잠자리가 눈에 띌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다. 떠나보낸 지 한 달이 돼 가는데도 포비의 흔적과 존재감이 집안 곳곳에 남아, 마치 언제라도 꼬리를 흔들며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가족들은 여전히 포비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힘들어하고 있다.   동물을 사랑하던 할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많게는 한번에 5마리의 반려견을 키워 보기도 했지만 포비처럼 급작스럽게 이별을 한 것은 처음이라 마음으로 떠나보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싶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펫 로스(Pet Loss)’라는 용어가 생겼다고 하는데 더는 낯설지 않게 됐다.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 중 90%가 우울증과 유사한 증상을 경험하고, 이 중 절반 이상이 심각한 수준의 상실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애완동물을 떠나보낸 슬픔이 아니라, 가족을 잃은 것과 같은 깊은 정신적 상처가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불안, 무기력, 식욕부진, 수면장애 등도 겪는다는데 심지어 이런 증상이 1년 넘게 지속돼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반려동물과 정서적 유대감이 강할수록 상실감의 크기와 지속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은 경우 “동물인데 뭐 그렇게까지…”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펫 로스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닌, 실제로 전문적인 접근과 지원이 필요한 심리적 현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펫 로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싶어 구글링해 본 결과를 펫 로스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아픔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가족이나 친구와 충분히 대화하며 슬픔을 표현해야 한단다.   반려동물과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추억을 사진이나 글로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포비의 사진들을 보며 함께했던 시간 동안 느꼈던 사랑과 고마움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슬픔을 받아들이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에는 펫 로스 전문 상담이나 치료 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만큼 만약 혼자서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포비를 통해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얼마나 큰 상심을 초래할 수 있는지 체험했다. 동시에, 이런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모든 생명은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 이별도 동반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헤어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곁에 있을 때 잘해주자는 말이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로스 전문 가족 모두 수술 결정

2025-03-18

[중앙칼럼] 초부유층 급증, 서민에 미치는 영향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자산 4194억 달러를 보유한 일론 머스크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초부유층, 즉 ‘수퍼빌리어네어’ 계층이 등장하며 경제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 현재 수퍼빌리어네어 24명의 총자산은 3.3조 달러로, 이는 프랑스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들 중 상위 16명은 ‘센티빌리어네어’(1000억 달러 이상 보유)에 해당한다.   1987년 첫 포브스 억만장자 리스트에는 140명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의 총자산은 2950억 달러에 불과했다. 2014년까지만 해도 전체 억만장자 자산의 4%만이 수퍼빌리어네어에게 집중되었으나, 현재 이 비율은 16%까지 증가했다.   경제는 점점 더 부유층 소비에 의존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무디스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0% 소득 가구가 전체 소비 지출의 49.7%를 차지하고 있다. 주식 및 부동산 자산 가치 상승이 이들의 소비력을 더욱 확대하며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부유층의 급증은 서민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글로벌 부의 50% 이상이 상위 1%에게 집중되면서 계층 간 이동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부동산 가격 급등, 교육 격차 확대, 노동 시장의 양극화는 부의 대물림을 가속하며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에서 부의 양극화를 설명하는 대표적 개념은 ‘파레토 법칙’이다.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부의 80%가 상위 20%에 집중된다는 경험적 법칙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보다 더욱 심화된 상황으로, 글로벌 부의 50% 이상이 상위 1%에게 집중되고 있다.   현재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자산 가격 상승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자산과 소비는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주식·부동산 가격 상승은 부유층의 순자산을 증가시키고 소비력을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한다.   부유한 가구는 일반적으로 저축보다는 소비 성향이 강하다. 이에 따라 부유층 소비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경제는 더욱 이들의 소비 패턴에 영향을 받게 된다. 문제는 주식 시장 하락이나 부동산 가격 조정이 발생할 경우, 소비가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경기 침체를 가속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 자산 가격이 고평가되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경제 정책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시장 조정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부유층의 소비가 지속될 경우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지만, 주식 시장 폭락이나 부동산 경기 둔화가 발생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누진세 강화를 통해 초부유층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도록 하고, 이를 저소득층 지원과 교육 기회 확대에 투자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 보조, 학자금 대출 부담 완화, 공공 주택 확대 등의 정책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강화해 경제 구조를 보다 균형 있게 재편해야 한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지만, 이를 방치할 경우 경제적·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초부유층의 등장과 소비 격차 확대는 단기적으로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구조다.   지금이야말로 부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공정한 기회 제공과 재분배 정책 강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경제적 성장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절실하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초부유층 급증 부유층 소비 경제 성장 경제 구조

2025-03-16

[중앙칼럼] 스페셜올림픽 선언문의 교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지난 8일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세계 최대 규모의 지적 발달장애인 스포츠 축제인 ‘2025 토리노 스페셜올림픽 세계동계대회’가 열린 것이다. 100개국에서 1500여명의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참가해 15일까지 축제의 장을 만든다.   스페셜올림픽은 지난 1968년 시카고에서 첫 대회를 시작으로 동계 대회는 이번이 12회째라고 한다. 2017년 오스트리아 대회 이후 8년 만에 열리는 대회인 만큼, 개막식 분위기는 과거의 그 어느 대회보다 뜨거웠다고 한다.   스페셜올림픽은 발달 장애인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사회 진출을 유도하자는 취지로 열리는 대회다. 경쟁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참가 선수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동등한 실력의 선수나 팀을 한 조에 묶어 조별로 순위를 가린다. 또한 경기에 참가한 선수 전원이 시상대에 오르고, 국가별 등수는 가리지 않는다.   스페셜올림픽을 페럴림픽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페럴림픽은 뇌성마비, 절단장애, 시각장애 등 신체 및 감각장애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인 반면, 스페셜올림픽은 지적 발달장애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올림픽이다.   분위기상, 두 대회는 많은 차이가 있다. 패럴림픽은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선수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경쟁하는 대회다.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출전 선수들에게는 순위에 따라 메달이 수여된다.   반면 스페셜올림픽은 순위보다는 스포츠를 통해 선수들이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가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참가 선수들 전원이 순위에 관계없이 모두 시상대에 오른다.     페럴림픽과 스페셜올림픽이 서로 분위기는 다르지만, 장애인 선수들이 대회를 통해 당당히 세상 앞에 나서는 축제라는 점에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토리노에서 스페셜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던 8일, 댈러스에서도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재미대한 장애인 체육회(회장 남정길) 선수권 대회 및 재미대한 장애인 볼링협회(회장 정성일) 선수권 대회가 개최됐다. 스페셜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회에 지적 발달장애를 가진 한인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번 대회는 내년 6월5일부터 7일까지 댈러스에서 열리는 제3회 전미주 장애인 체육대회를 앞두고 일종의 ‘예행연습’ 형식으로 치러졌다.   댈러스를 비롯해 애틀랜타, 캔자스, 네브래스카, 시카고, 그리고 멀리 경기도에서도 선수들이 참가했다. 선수들은 볼링, 한궁, 콘홀, 탁구, 보치아 등의 종목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폐막식에서는 축제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종목별 메달 수여식도 열렸다. 순위에 들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기념품이 수여됐다. 지난해 메릴랜드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 안면을 텄던 탓일까. 선수들은 타지역 선수들과 허물없이 웃고 즐기며, 그야말로 축제 그 자체를 즐겼다. 선수들과 함께 나온 보호자들도 흐뭇해 했다.   메달 수여식에 앞서 사회자가 ‘스페셜올림픽 선수 선언문’을 낭독하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나는 승리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길 수 없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하겠습니다.” 그날 현장을 취재하면서 스페셜올림픽 선수 선언문을 처음 들었다. 뭔가 강력한 것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런 각오로 매사에 임하지 않았을까”하는 뉘우침이랄까.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하는 자체만으로 이들은 이미 도전에 성공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비장애인들은 자신이 장애인들을 ‘배려’ 한다고 생각하지만, 용기로 삶에 도전하는 이들에게서 비장애인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게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년 6월 댈러스에서 열리는 제3회 전미주 장애인 체육대회 역시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의 자리가 아닌, 지역사회가 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삶의 교훈을 얻는 자리다.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하는 그대들의 모습을 그리며, 내년 댈러스에서 그대들과의 재회를 기다려 본다. 토니 채 / 댈러스중앙일보 편집국장중앙칼럼 스페셜올림픽 선언문 토리노 스페셜올림픽 스페셜올림픽 개막식 선수권 대회

2025-03-13

[중앙칼럼] 세대교체 가로막는 세대 차이

“이젠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인 단체 관계자들이 25년 전부터 하던 말이다. 한때는 오렌지카운티 한인 단체마다 앞다퉈 ‘세대교체’를 슬로건처럼 내세우던 시절도 있었지만, 제대로 결실을 봤다고 할 곳은 매우 드물다.   지금도 여러 단체가 세대교체의 당위성을 주장하긴 하나, 이젠 공허한 구호처럼 들린다. 이민자 커뮤니티 단체에서 세대교체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경험칙은 오렌지카운티 한인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OC한인회가 2007년 출간한 ‘오렌지카운티 한인 이민사’에 따르면 OC에 한인 사회가 태동한 시기는 1970년대 초반이다. 1975년 이후 가든그로브에 많은 한인이 모이게 됐다. OC의 첫 한인 단체인 오렌지카운티 한인상공인친목회가 설립된 것이 1976년의 일이다. 이듬해인 1977년엔 OC한미노인회(현 OC한미시니어센터)가 발족했으며, 1979년엔 OC한인회가 출범했다.   당시 이민 1세대가 모여 한인 단체를 구성한 지 어림잡아 50년이지만, “우리 단체는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었다”고 말할 만한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세대교체를 단순히 나이 든 이들이 물러난 자리를 상대적으로 젊은 인사들이 채우는 것으로 본다면 OC 한인 단체들은 세월의 흐름을 거슬렀다고 볼 수 있다. 과거 한인 단체를 이끈 이들은 30~50대가 많았다. 빈손으로 태평양을 건너와 험한 일을 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이들은 패기와 도전 정신, 한인끼리 뭉쳐야 하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한인 사회를 위한 봉사에 나섰다. 이후 한인 단체 회원, 특히 단체장의 나이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고 있다. 현재 많은 한인 단체의 중추 역할을 60~80대가 맡고 있다. “대다수 한인 단체들이 노인회가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세대교체를 나이가 아니라 이민 1세대에서 1.5세, 2세로의 전환으로 본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일부 직능 단체를 제외하면 한인 단체에서 이민 1세대와 젊은이들이 공존하며 발전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단체가 한국어에 서툰 젊은 1.5세, 2세를 여럿 영입하는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영어가 익숙한 젊은이들은 한국어로 진행되는 회의에서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말을 제대로 못 해 침묵을 지켜야 했다. 간혹 어른의 말씀에 토를 달면 버릇없다는 말을 듣기 십상인, 이른바 꼰대 문화도 젊은이들에겐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으로 느껴졌다.   1세들도 할 말은 있다. 1.5세, 2세를 바라보며 느끼는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 온 한 1.5세 인사는 “1세들은 투박해도 추진력이 있어 뭔가를 해낸다. 반면, 1.5세와 2세는 자신과 가족 외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이고 관심사도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며 1세의 시각에 동의했다.   결국 이민 1세로 구성된 단체의 세대교체를 세대 차이가 가로막는 형국이다. 박진방OC한인회 초대 회장은 이를 두고 “거의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는 처음 형성되고 35~40년쯤 지나 이민 1세대가 전면에서 퇴장하고 나면 급속히 미국화된다”고 늘 말해왔다. 그런 박 초대 회장도 한인 단체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늘 역설해왔다. 맞는 말이다. 세대교체를 포기하면 한인 단체들의 명맥을 이을 길이 없다.   OC 한인 사회 역사가 반세기에 이르렀고 한인 단체들이 세대교체 방안을 고민한 지도 25년째다. 지금이 세대교체를 고민할 마지막 기회인지 모른다. 언제까지 세대 차이가 세대교체를 가로막게 놓아둘 순 없다.   설립 목적에 따라선 세대교체가 필요 없는 단체들도 있다. 단, 세대교체가 절실한 단체라면 1세들이 1.5세, 2세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역량을 발휘하도록 무대 전면에서 물러나 뒤에서 지원한다는 결심을 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세대 간 공존은 과정일 뿐이고, 애초 목적은 세대교체이지 않은가.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세대교체 한인 단체들 오렌지카운티 한인상공인친목회 세대교체 방안

2025-03-11

[중앙칼럼]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종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3월4일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이미 10% 관세를 부과받은 중국에는 10%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불법이민과 합성마약인 펜타닐의 미국 유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3월 12일부터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동맹이건 적국이건 예외를 두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친구와 적들로부터 두들겨 맞고 있었다. 외국 땅이 아닌 미국에서 철강과 알루미늄을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겠다며 모든 무역 파트너를 대상으로 한 ‘상호 관세’ 부과 방침도 발표했다. 4월 1일까지 미국의 무역상대국의 관세와 비관세 장벽 모두를 조사하여 미국 경제에 손해를 끼치는 국가에 정도에 따라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4월 2일부터는 자동차에 대한 고율 관세를 예고하며 전방위적인 ‘관세전쟁’을 시작했다.   브라질, 인도, 유럽연합(EU), 캐나다, 프랑스 등 주요 교역국들이 불공정 무역 상대로 지목되었으며, 미국의 동맹국들마저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더 이상 이용당하게 두지 않겠다”며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미국 주도로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관세와 비관세 장벽 철폐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트럼프의 일방적 관세 정책은 미국이 구축했던 자유무역 시스템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전쟁’ 배경에는 미국이 처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2023년엔 사상 최대인 9184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그 해 재정적자는 GDP의 6.3%인 1조833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초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흔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우선주의’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2024년 11월 발표된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위원장 스티븐 미란의 보고서(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조화를 위한 가이드)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강달러, 막대한 무역적자, 제조업 공동화를 초래했다”며 “관세와 환율 정책을 통해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국제 무역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세계 GDP의 50%를 차지했던 미국의 경제력은 현재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2024년에는 미국의 국채 이자 총액이 국방 예산을 넘어서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 의회예산처에 따르면 미국의 국채 이자는 8700억 달러에 달하며, 국방 예산(8500억 달러)을 초과했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과도한 군사 개입과 재정적자가 미국 패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신고립주의’는 단순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이 쇠퇴를 피하려 몸부림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서 “유럽 안보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며 기존 동맹 관계의 변화를 시사했다. NATO 방위비 분담금을 GDP의 최소 5%까지 올릴 것을 요구하며, NATO 탈퇴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동맹국들이 안보 무임승차하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걸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제 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 시대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해상 무역로를 보호하며 자유무역 시스템을 정착시킨 미국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으며, 이는 불확실성과 충돌 가능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이무영 / 뉴스룸 에디터중앙칼럼 아메리카 팍스 트럼프 대통령 비관세 장벽 대통령 경제자문회

2025-03-03

[중앙칼럼] ‘훈민정음 회원’ 많아져야 할 이유

주요 정부 기관과 정치권에서 일하는 2~3세들을 만나면 그들 스스로 내세우고 싶어하는 일종의 자기검증 과정이 있다. 바로 한국어 실력이다.   모국어 구사 여부는 2세들은 물론 한인 문화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사다.   지난달 LA카운티 검사장과 검사, 경찰서장들이 모인 기자 회견이 있었는데 외국어 통역이 가능하다고 해서 한국어 질문을 해봤다.   검찰 수사관 중 한 명이 나서서 기자의 한국어 질문을 발언자에게 영어로 전달해줬다. 1분이 넘는 한국어 질문이었지만 두 문장으로 축약해주는 친절함(?)도 잊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따로 만난 그 수사관은 한국어를 상당히 유창하게 했지만, 현장에서 바로 통역으로 투입되면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고 전했다.   우리 2~3세들에게 한글은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어렸을 때 좀 더 배워둘 걸 그랬다”는 애증도 따른다.   게다가 70~80년대 태어난 2세들이 어릴 때 부모들은 대부분 ‘영어 실력’을 더 강조했다. 주말 한국학교보다 미국인 친구들과 더 어울리고 1세들에게 한계였던 언어의 장벽을 넘어 주류사회로 진출하기를 바랐던 ‘부모 마음’ 탓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의 위상은 올라갔고 국제사회에 한국 문화와 언어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 ‘한국에 방문해 한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소셜네트워크 메시지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우리 2~3세들에게 유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LA 카운티 검찰의 아이린 이 검사는 한인사회에 대한 애정의 근원을 어릴 때 다녔던 주말 한국학교에서 찾았다.   그는 한 회견 자리에서 “비록 공식적인 행사라 영어로 하지만 한인이라는 자존감은 어릴 때 주말에 늦잠 자려는 나를 열심히 한국학교에 데려가 주신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털어놨다.   반면 가야금과 장구를 만들어 전 세계에 팔고 있는 빌리 윤씨는 “한국어를 잘하셨던 2세 부모님이었지만 이를 물려받지 못해 한스럽다. 조금 더 신경 쓰고 시간을 할애했다면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더 많은 한인 친구를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전했다.   교사로도 활동한 그는 언어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어서 앞으로 소수계 사회에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미주중앙일보는 이민 역사 120년 중 50년 동안 한글 신문을 만들어 소통해왔다. 개인적으로 독자들이 주말 한국학교, 교회 한글학교 프로그램, 세종학당에 애정을 가져주길 바란다. 앞으로 미국에서 큰일을 하며 리더가 될 우리 아이들에게 더 많은 한글을 가르치면 좋겠다.   한글학교에 대한 더 많은 재정적인 지원과 기부도 이어지길 바란다. 자원봉사로 유지되는 한글학교 시스템은 이제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상태다. 따라서 지역 독지가들과 한인 기업들이 더 도움의 손길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프로그램도 더 풍성해지고 아이들이 더 큰 자긍심을 갖게 되면 좋지 않을까.   한국학교 연합체인 미주한국학교총연합회는 1만 달러 이상 기부자에 ‘훈민정음 회원’, 5000달러 이상에는 ‘신사임당’, 1000달러 이상에 ‘세종대왕’의 이름을 부여해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후원이 많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유창하지는 않더라도, 혹여 외국어처럼 치부되더라도 우리 3~4세 아이들까지 한국어를 마음껏 배우고 가르치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바란다. 최인성 / 사회부 부국장중앙칼럼 훈민정음 회원 주말 한국학교 한글학교 프로그램 한국어 질문

2025-02-24

[중앙칼럼] 붕괴의 질문, ‘넌 어느 쪽인가’

지난해 개봉한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Civil War)’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화는 미국 사회의 불신과 대립을 극대화한다. 세 번째 임기에 성공한 대통령이 파시스트적 극단주의로 치닫고, 헌법 대신 군대를 앞세운다. 그는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인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습을 감행하고, 결국 내전을 촉발한다.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방 충성파(Loyalist States)는 이 정권을 옹호하며, 이에 맞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서부연합군(Western Forces)을 결성해 전쟁을 벌인다.   영화는 서부연합군이 워싱턴 D.C. 백악관으로 진격하는 과정을 종군 기자의 시선을 통해 담아낸다. 관객들은 시종 “내가 미국 시민이라면?”이라고 자문하게 된다. “같은 미국인끼리 이러면 안 되지 않나?”라고 반문할 때 즈음, 영화 속 대사 “어느 쪽 미국인이냐?(What Kind of an American Are You?)”라는 질문은 머리를 띵하게 만든다. 미국이라는 공고한 정치적 공동체가 언제든 붕괴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순간이다.     최근 한국에서 이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헌법 1조와 2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무시한 사건이 현실이 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탄핵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계엄법 제2조)를 근거로 계엄을 선포했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반국가세력’을 주장해왔고 결국 선을 넘어섰다. 국회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로 규정하고, 여야 대표의 체포까지 시도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계엄 포고령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국회 및 지방의회, 정당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하에 둔다. 포고령 위반자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이 조항들은 몇 번을 곱씹어도 믿기 어려울 만큼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를 뒤흔드는 내용이었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앞두고 있다. 검찰은 그를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측은 “비상계엄은 거대 야당의 입법 폭주로 행정이 마비될 위기 상황을 알리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또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검찰측의 기소를 ‘호수 위 달 그림자를 쫓아가는 느낌’에 비유했다.   법과 원칙을 강조해온 윤석열 대통령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국민은 계엄 선포 긴급 담화, 특수작전 병사들의 국회 진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병력 투입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10차 변론 동안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거의 심리적 내전에 가까울 정도로 쪼개졌다.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하고, 야당은 정권 교체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 19일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에 반발한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탄핵 정국에서 앞으로 우리가 지켜봐야 할 본질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 여부가 아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심리적 내전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의 현실과 닮아있는 시빌 워 영화 속에서 “어느 쪽 미국인이냐”는 질문은 한인들에겐 가슴 철렁한 질문이다. “넌 어느 편이야, 진보? 보수?”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영화 속 극한의 장면들을 지켜보다 보면 “우리가 저런 상황까지 가면 안 되는 데…”라는 불안감이 들다가 “우리도 저들처럼 하고 있진 않은가”하는 섬뜩한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어느 쪽도 진정한 승리자는 없다. 역사속에서 우린 이미 경험했지 않은가. 김형재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붕괴 윤석열 대통령 헌법재판소 변론 현재 윤석열

2025-02-23

[중앙칼럼] 페니 퇴출 조치가 남긴 질문

샌프란시스코 유학 시절, 거리 곳곳에 1센트짜리 동전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국에선 IMF 사태로 환율이 두 배 이상 급등해 1센트는 20원 상당의 가치가 있었는데 아무도 줍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수업을 같이 듣던 타인종들에게 왜 아무도 동전을 안 줍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줍는 데 드는 칼로리를 돈으로 환산하면 손해야” “여긴 언덕이 많아서 줍기 귀찮아” 등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최근 불경기 탓인지 동전을 줍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데이터 분석업체 유고브가 지난해 2977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8명은 길에 떨어진 동전을 줍겠다고 답했다. 단돈 1센트를 줍기 위해 기꺼이 몸을 굽힐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도 50%나 됐다. 사람들이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그동안 무시했던 동전의 가치를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페니(Penny)로 불리는 1센트 동전은 1793년 처음 발행된 이후, 230년 넘게 미국 경제의 일부로 자리 잡아 왔다. 특히 1909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초상이 새겨진 이후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화폐로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그러나 지금은 대다수가 페니를 거스름돈으로 받아도 잘 사용하지 않고, 주머니나 서랍 속에 방치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에 따르면 지난해 주조된 31억7200만 개를 포함해 약 1140억 개의 페니가 전국에 유통되고 있다. 조폐국은 2024 회계연도에 페니 하나를 생산, 유통하는데 약 3.69센트의 비용이 투입돼 853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들어 낼수록 적자가 발생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경제적 비효율성을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 재무부에 페니 생산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결정은 경제학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벤틀리대 경제학과 데이비드 걸리 교수는 “페니 하나를 만드는 데 추정비용이 3센트로 경제적 부담이 되고 매년 수백만 개가 사라지기 때문에 조폐국은 지속해서 대체 동전을 공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1센트 동전을 폐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페니가 사라질 경우 소액 상품의 가격 증가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최소 화폐 기준이 5센트로 되면 9.96달러짜리 제품 가격이 10달러로 반올림돼 소비자 부담이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체들이 가격을 반올림할지, 반내림할지는 불분명하지만, 비즈니스 목적이 이윤 추구에 있으므로 반올림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페니 퇴출은 현금 의존도가 높은 저소득층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국내 현금 사용 비율은 20% 이하로 줄었지만, 여전히 은행 계좌가 없거나 카드 결제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동전이 중요할 수 있다.   웨이크 포레스트대 경영대학원 아자이 파텔 교수는 디지털 결제가 보편화된 계층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현금 거래에 의존하는 계층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와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페니의 주조 중단이 바로 사용 중지가 되는 것은 아니나 시대가 바뀌면서 그 역할이 점점 미미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5센트 동전인 ‘니클(Nickel)’의 주조 중단도 논의될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니클을 제조하는 데 11센트가 들기 때문에 페니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비효율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페니의 운명은 사실상 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여파는 단순한 비용 절감 이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소비자 물가 상승이 고착화되고 서민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작은 동전 하나가 주는 상징성과 경제적 여파를 고려할 때 페니 퇴출이 과연 현명한 결정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언젠가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겠느냐는 질문조차 사라질 날이 올 수도 있을 듯싶다. 박낙희/경제부장중앙칼럼 퇴출 조치 경제적 비효율성 경제적 불확실성 페니 1센트 니클 5센트 동전 주조 조폐국 폐지 #koreadailyus #California #Korean #한인 미주중앙일보 로스앤젤레스 가주 미국 OC LA

2025-02-18

[중앙칼럼] 한인 교계 존속의 고민, 모두의 숙제

한인 교계의 대표 얼굴들이 바뀌고 있다.   1세대 목회자들의 은퇴 시기와 맞물려 최근 여러 교회가 40대를 담임 목회자로 새롭게 세우는 중이다.   이는 단순한 리더십 교체가 아니다. 이면에는 한인 교계의 정체성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한인들의 이민은 196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붐을 이뤘다. 당시 목회자들의 사역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 교인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목회자들이 직접 발로 뛰던 시절이었다. 교회가 종교적 목적뿐만 아니라 친목 또는 사회적 공동체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이민 1세대와 미국에서 성장한 2세대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으로 점점 분리되고 있다.   재외한인학회 조사에 따르면 미주 한인 2세의 절반 이상이 이미 타인종 또는 타민족과 결혼하고 있다. 이는 곧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정체성이 희석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다 보니 타인종과 결혼한 3세 또는 4세까지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은 과거와 달리 방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어느 정도 경제력이 갖춰진 상태로 자리를 잡는다. 손에 달랑 ‘200불’만 쥐고 미국에 왔다는 무용담이나, 목회자가 공항에 마중 나가 교인들의 정착을 돕던 일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패러다임이 변했다. 일례로 오늘날 이민 교회는 ‘한 지붕 두 가족’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언어와 문화적으로 확연히 갈리는 시점에서 1세대가 2세대를 위해 영어 예배를 개설해 주거나, 따로 영어권 공동체를 만들어 일부 공간을 내주고 재정 지원을 해주고 있다. 하나의 공동체로 유지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나온 대안이다.   한인 교계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왜 꼭 ‘Korean Church’여야 하는가. 다음 세대는 국적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기보다 다양한 인종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들에게 ‘한국인(Korean)’은 뿌리이자 정체성이긴 하지만, 삶의 영역까지 구분 지어야 할 개념은 아니다.   한인끼리 모여야 한다는 명제로 다음 세대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소위 ‘백인 교회’, ‘흑인 교회’들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종과 관계없이 다민족, 다인종 교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민족이나 인종으로 구분되는 교회는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있다. 한인 교회 역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한인 교회가 왜 필요하며,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폭넓은 논의와 방향 설정은 이민 교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다.   한인 가정 내에서도 언어적, 문화적, 가치관적 괴리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래에 ‘한인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교계는 한인 사회의 축소판이다. 교회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민 사회의 흐름이 보인다. 이민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곧 한인 사회가 마주한 현실이다.   예전에는 ‘LA=한인타운’이라는 공식이 명확했다.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LA에는 한인이 많지만, 거주 반경은 상당히 넓어졌다. 과거 LA와 뉴욕이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였다면, 이제는 한인 인구가 여러 주에 걸쳐 골고루 분산되는 추세다. 교회뿐만 아니라 한인의 정체성을 뿌리로 두고 있는 은행, 기업, 비즈니스, 학교, 단체 및 기관 역시 존재 이유와 역할, 방향에 대한 재설정이 시급하다.   민족적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럴수록 한인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정체성이라는 뿌리 없이 존속할 수 있는 민족은 없지 않나.   한인 이민 교계는 이미 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40대 목회자들이 하나둘씩 세워지는 것은 ‘한인 교회’가 새로운 형태로 존속하기 위한 다급한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리더들이 떠안은 책임은 막중하다. 단, 이러한 부담은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들이 풀어나갈 숙제는 향후 한인 사회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해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인 교계의 행보와 변화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장열 / 사회부장중앙칼럼 한인 교계 한인 교회 한인 교계 재외한인학회 조사

2025-02-17

[중앙칼럼] 한인 경제 침체 탈출구는 엑스포

충북 청주 육거리 시장의 50년 전통 만두전문점 ‘육거리소문난만두’.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원하는 강한 소상공인 성장지원 사업 프로그램으로 지난 2023년 10월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1차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 참가했다.   현지 바이어와 미팅한 후 두 곳과 미국 수출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시작됐다. 그 후 수출 건에 대해 본격적인 협의를 거쳐 불과 3개월여 만인 2024년 1~2월 수출용 비건 만두 샘플을 제작했다.   한 달 후 정식 수출 계약서를 작성했고 5월 말 40피트 컨테이너 선적을 마쳐 시온마켓, 한남체인, 가주 마켓 등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대회 참가부터 실제 시판까지 불과 7개월 만에 결실을 이뤘다.     ‘육거리소문난만두’는 2023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애너하임에서 개최한 이 대회에 바이어 234개사, 참여업체 438개사, 총 상담 건수는 1만7227건, 총 상담금액은 7억5643만 달러의 역대 최고 성과를 냈다.   애너하임 대회는 미국에서 열린 첫 행사였다. 이 때문에 올해 애틀랜타에서 4월17일부터 20일까지 열리는 두 번째 미국 개최 대회에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LA·OC상공회의소가 한인 경제인들의 글로벌 진출 기회 확대에 나섰다.   지난 13일 LA한인타운 내 LA한인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정동완 LA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윤만 OC한인상공회의소 회장, 노상일 제23차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조직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3자 업무협약(MOU) 체결식이 열렸다. 업무협약 골자는 ‘캘리포니아공동전시관 운영’이다.   LA·OC상의가 협력한 첫 프로젝트인 ‘캘리포니아공동전시관’은 한인 기업들이 수출 상담 성과 등 시너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 참가 한인 기업들은 각 상공회의소로부터 부스비 2000달러를 지원받고 나머지 4000달러는 자비 부담으로 참가할 수 있게 돼 재정적 부담을 크게 줄였다. 대회 조직위는 20개 한인 기업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조직위가 이번 엑스포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한 기업당 5차례 이상 1:1 수출 상담 기회를 갖는 것이다. 미주한인상공회의소 총연합회의 바이어 유치팀이 참가 기업을 분석해서 한인 기업과 바이어를 매치한다. 조직위원회는 1년 넘게 바이어 400개사 유치를 위해 발로 뛰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한인 기업들은 400개 기업을 대상으로 마케팅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갖게 된다. 이달 초 기준 부스는 지자체 220개, 기관 100개 등 총 355개 부스를 유치한 상태다.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는 참가 기업에 주로 시선이 집중되고 있지만 사실 개최지의 지역사회가 같이 움직인다.  2023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의 참가 인원 공식 집계는 7825명이었다. 올해 애틀랜타 대회를 비롯해 향후 미국 개최 대회에 참가하는 인원은 더 늘어날 것으로 조직위원회는 전망하고 있다. 대회기간 동안 참가자들이 지역사회 호텔, 식당, 쇼핑 등 이용으로 한인 상권은 특수를 넘어 지역 경제 활성화까지 기대할 수 있다. 조직위는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 기간 동안 만찬을 컨벤션센터만 고집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한국 기업들이 미주지역 수출을 넘어 현지 진출로 이어지면 한인 경제계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더욱 늘어 날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주지역 물건을 판매하려는 한국 기업들이 협업하고 미주지역에 안착하기에 한국 경제와 문화를 잘 아는 한인 상공인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대리점, 총판 등 한인 상권에 많은 기회가 열릴 것이다.   또 법인으로 들어오면 회사 설립과 주재원, 현지 직원 채용에 따른 은행, 보험, 변호사, 회계사, 교육 등 서비스 이용으로 한인상권이 누릴 수 있는 비즈니스 기회가 많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LA 한인 상권은 최고의 개최지다.     최근 자바, 요식업, 소매업, 부동산 등 거의 모든 한인 업종이 침체기다.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처럼 지역사회 상권이 같이 움직이는 엑스포가 열린다면 LA 한인 상권의 제2 전성기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탈출구 엑스포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조직위원장 정동완 la한인상공회의소 la한인상공회의소 사무실

2025-02-16

[중앙칼럼] 미국이 샐러드 보울인 이유

청소년기였던 80년대 후반,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다. 미국행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선택이었기에 미국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다만 주워들은 풍월로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미국에 와 처음 정착한 곳은 오클라호마였다. 인종의 용광로와는 거리가 약간 있는 곳이었다. 어린 나이에 처음 겪은 미국사회가 오클라호마다 보니 미국은 의례 백인이 주도하는 사회라는 관념을 갖게 됐다. 어떻게든 영어를 배워야 했고, 백인문화에 빨리 익숙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미국생활에 적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더 넓은 미국이 보였다. 대학 졸업 후 댈러스(텍사스)로 이주하면서 한인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오클라호마에서는 구경도 못했던 수많은 히스패닉계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일부 지역에서는 영어는 몰라도 스패니시를 알아야 장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히스패닉계 사람들이 많았다. 오클라호마에서 백인들 사이에서 주눅 들어 살다가 유색인종들이 큰소리치며 사는 곳에 와보니 뭔가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 뒤에 뭔가 찜찜함이 있었다. 히스패닉 밀집지역을 지나다 보면 “내가 지금 미국에 와 있는 거야, 멕시코에 와 있는 거야”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인타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미국은 어쩌면 ‘용광로’가 아니라 ‘샐러드 보울(Salad Bowl)’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종류의 재료가 한 곳에 섞여 있지만, 각각의 재료가 고유의 맛을 간직하고 있는 샐러드 보울 말이다.  더 나아가 미국사회 전체가 샐러드 보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50개 주와 워싱턴 D.C.가 한 국가를 이루지만 각각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특성이 뚜렷하니 말이다.   미국의 50개 주를 흔히들 공화당이 주도하는 레드 스테이트(red state)와 민주당이 주도하는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로 구분한다. 레드 스테이트의 대표적인 주로 텍사스를 꼽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는 대표적인 블루 스테이트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성향으로 본다면 이 두 개의 주가 동일한 국가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르다. 마치 남한과 북한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지난 2일 텍사스 공화당의 맹주라 할 수 있는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의 2025 주정연설이 방영됐다. 올해 시작되는 제89회 주의회 회기에서 공화당이 추진해줬으면 하는 7가지 긴급 과제를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파격적인 이민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터라 애벗 주지사 자신이 굳이 논란이 될만한 입법 과제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정연설 내용은 뼛속까지 공화당이었다.   애벗 주지사의 주정연설 직후 사전 녹화된 텍사스 민주당의 반응이 방영됐다. 길베르토 히노요사 텍사스 민주당 의장은 “애벗 주지사는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억만장자들에게 알랑거리느라 먹고사는 데 여념 없는 주민들을 생각할 틈이 없다”며 “공화당이 텍사스에서 30년간 집권했지만,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반응했다.   객관적인 데이터만 놓고 보면 텍사스 민주당의 이 같은 반박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텍사스 부동산중개인협회에 따르면 지난 2024년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이주한 인구가 10만 2000명이 넘어, 그 어떤 주보다 많은 인구가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유입됐다고 한다.     대표적인 블루 스테이트에 살던 사람들이 대표적인 레드 스테이트로 이주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30년간 텍사스 공화당의 정책이 실패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미국이 미국답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레드 스테이트는 더욱 붉게, 블루 스테이트는 더욱 파랗게 가는 것이, 미국을 가장 미국답게 만드는 것이다. 샐러드 보울에 섞인 재료들처럼. 토니 채 / 달라스 중앙일보 편집국장중앙칼럼 미국 샐러드 샐러드 보울 텍사스 공화당 텍사스 주지사

2025-02-13

[중앙칼럼] 멕시코기와 소리없는 아우성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청마 유치환 시인의 작품 ‘깃발’의 도입부다. 펄럭이는 깃발은 예나 지금이나 그 존재 자체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타향에서 고국의 국기를 보며 느끼는 벅찬 감동, 전장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며 느꼈을 병사들의 투지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모두 깃발에서 비롯됐다.   최근 연방 정부의 고강도 불법 체류자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깃발이 있다. 바로 멕시코 국기다.   중남미에 여러 나라가 있지만, 멕시코 출신 이민자가 워낙 많기 때문인지 시위 현장에 나부끼는 깃발은 주로 멕시코기다.   이 멕시코기가 최근 레딧을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멕시코기에 반감을 드러내는 이들 중 다수는 “미국에서 살겠다면서 왜 멕시코기를 들고나와 시위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멕시코기를 두고 ‘미국에 살긴 하지만, 미국에 동화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는 “미국 시민이 된 후에도 멕시코를 사랑하고 미국에 반감을 품은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반면, 고강도 불체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에 공감을 드러내는 이들은 “문화적 유산과 미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상호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다”란 말로 멕시코기를 옹호한다. “만약 중국 정부가 현지의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추방을 할 경우, 시위대가 성조기를 들지 오성홍기를 들겠는가”라며 반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시위 현장의 멕시코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개 불체 단속에 대한 찬반에 따라 갈리는 편이지만, 깃발의 의미와 그 존재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최근 불체 단속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는 한 네티즌은 “시위 참여 경험 중 대부분은 좋았지만, 멕시코기가 주로 눈에 띄는 것은 시위를 바라보는 외부인들의 시선에 부정적일 것 같다. 성조기를 함께 지니고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글을 올린 이의 요지는 불체 단속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도 성조기가 없는 가운데 멕시코기만 존재하는 시위 현장을 보면 부정적인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대해서도 많은 댓글이 달렸다. 어떤 이는 공감을 표시했고, 어떤 이는 ‘성 패트릭 데이에 아일랜드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누가 뭐라고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의 인종, 문화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들며 멕시코기의 의미를 확대해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멕시코기에 관한 논쟁은 불체 단속에 대한 찬반 입장이 명확한 이들 사이에선 승패가 갈릴 만한 이슈가 아닐 뿐더러 논쟁을 벌일 의미도 없어 보인다. 그저 불체 단속에 관한 기존 입장의 연장 또는 찬반 논리의 강화 과정에 불과해 보인다. 단, 불체 단속에 관해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에겐 멕시코기에 관해 느끼는 감정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부에나파크 고교의 교사 보조원은 소셜 미디어에 멕시코계의 화염에 휩싸인 멕시코기 사진을 배경으로 “만약 너희가 멕시코기를 든다면 내가 너희를 위해 그것들(멕시코기)을 불태울 것”이란 글을 올렸다. 또 “여기는 미국이다. 그들(연방 정부 불법체류자 단속 요원)은 범죄자들을 추방하고 있다”는 글을 썼다.   멕시코계가 다수인 부에나파크고 약 100명 학생은 학교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학부모들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부에나파크고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과하고 교사 보조원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유치환 시인이 맞았다.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발산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아우성이 사실은 깃발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멕시코 아우성 멕시코 출신 가운데 멕시코 시위 참여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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