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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첫 공군장교 배출…한국 공군의 효시

[윌로우스 비행학교 창설 100주년]
노백린 장군 요청에 백만장자 김종림이 후원
70명 비행교육…OSS 한반도 침투작전 참가

1919~1920년 윌로우스 비행학교에서 한인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왼쪽부터 장병훈, 오임하, 이용선(식),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독립기념관 제공]

1919~1920년 윌로우스 비행학교에서 한인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왼쪽부터 장병훈, 오임하, 이용선(식),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독립기념관 제공]

1920년 당시 윌로우스 비행학교 모습. 성조기가 게양된 학교 교사와 한인 학생들이 기숙하던 막사(뒤쪽). [독립기념관 제공]

1920년 당시 윌로우스 비행학교 모습. 성조기가 게양된 학교 교사와 한인 학생들이 기숙하던 막사(뒤쪽). [독립기념관 제공]

한인들의 독립 염원이 서려있는 비행학교 자리에는 현재 윌로우스 공항이 들어서 있다. [윌로우스 항공기념재단 제공]

한인들의 독립 염원이 서려있는 비행학교 자리에는 현재 윌로우스 공항이 들어서 있다. [윌로우스 항공기념재단 제공]

대한민국 공군 효시는 1920년 7월 5일 캘리포니아주 북부 농촌도시 윌로우스에 창설한 ‘윌로우스 비행학교’다. 창설 직후 한인 70여 명은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비행교육을 받았다. 100년 전인 1921년 7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서 훈련받은 한인 박희성과 이용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최초의 비행장교로 임명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공식 문서로 박희성·이용근을 참위(현재 소위)로 임명했다. 훈련생들은 훈련받던 비행기 앞에서 조국독립 열망을 바라는 사진을 남겼다. 잊혀질 뻔한 한인사회 독립운동 노력은 역사가 됐고, 대한민국 대통령과 공군은 100년 전 한인 이민선조들의 활약상을 대한민국 공군 효시로 공표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선구안과 미주 한인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1886~1973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애국지사의 통 큰 후원으로 창설됐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노백린 장군은 1907년 군대가 해체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0년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했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초대 군무총장에 임명됐다. 노 장군은 독립전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중시한 ‘무장투쟁론자’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비행기가 등장하자 공군력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노백린 장군의 의지에 적극 화답한 사람은 김종림 선생이다. 100년 전 캘리포니아 한인사회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갈 무렵, 김종림 선생은 북가주에서 ‘최초의 한인 백만장자’, 쌀의 왕(Rice King)으로 불렸다. 노 장군은 김 선생에게 조국독립을 위한 비행학교 창설 필요성을 논의했다. 이미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 선생은 흔쾌히 비행학교 부지 40에이커와 비행 훈련기 구매자금 5만 달러를 내놨다. 100년 전 5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 1000만 달러에 달한다. 김종림 선생이 후원한 5만 달러(비행학교 창설자금 2만 달러에 운영비 월 3000달러)는 비행 훈련기 3대 구매,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 출신 프랭크 브라이언트 수석교관과 정비사 2명 채용, 한인 1~1.5세 훈련생 교육비로 쓰였다.

대한민국 공군과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전 이사장 등에 따르면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1920년 3월부터 문을 열었다. 당시 교사는 1918년 폐교된 ‘퀸트학교’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다.(이 건물은 현재 다른 곳으로 옮겨져 일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학생, 전도사, 실업가였던 한인 청년들은 파일럿이 될 준비에 나섰다. 1920년 6월 22일과 24일 J-1 훈련기 2대가 비행학교에 도착했다. 비행학교 부지와 시설, 한인 훈련생, 교관, 정비사, 비행기(총 3대)가 모두 준비됐다. 1920년 7월 5일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한인사회 염원을 담아 공식 개교했다.

이날 행사에는 재미동포 200여 명이 모였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재정지원 김종림, 비행학교 감독 곽임대, 조종사 오림하 등은 한인사회 역량을 모아 조국 독립운동에 나서자고 강조했다.

한국 국방일보에 따르면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군사학, 비행훈련, 무선전신학, 비행기수선학(정비), 영어, 민족교육’을 가르쳤다. 한인 훈련생은 김종림 선생의 농장에서 기숙하며 군사교육과 공중전 등 비행술을 배웠다.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이미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던 우병옥, 오림하, 이용식, 이초가 첫 졸업생이 됐다. 이들은 곧바로 비행학교 훈련 교관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비행학교가 개교한 뒤 한인 청년 70여 명이 비행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개교 첫해 10월 100년 만의 대홍수가 캘리포니아주를 덮쳤다. 김종림 선생의 농장이 수해를 입었고 재정지원에 큰 문제가 생겼다. 다른 한인 재력가, 한인단체, 한인 일반인도 십시일반 후원에 나섰지만 대홍수 타격은 심했다. 그만큼 김종림 선생의 후원은 비행학교 운영에 절대적이기도 했다.

결국 비행학교는 1921년 4월 폐교됐다. 학교는 폐교됐지만 한인 훈련생 활약은 계속됐다. 1921년 7월 7일 국제항공연맹(FAI)의 비행사 자격증을 받은 박희성과 이용근은 7월 18일 임시정부 ‘육군 비행병참위(현 소위)’로 임관해 비행장교 1호가 된다. 이초는 미국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한반도 침투작전에 나섰다. 다른 훈련생도 미군에 입대하거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항공대 창설에 기여했다.

대한민국 공군은 2020년 7월 김포공항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윌로우스 비행학교 기념 조형물 제막식을 열었다. 공군은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의 위대한 첫걸음을 기억하고, 항공독립운동가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인사회는 이민선조가 남긴 정신적 유산인 ‘애국애족’ 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을까. 우리의 역사란 과거를 기억하고 사료를 보존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관심을 가지면 뿌리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부심까지 생긴다. 차세대에게 우리가 누구였고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공유하고 싶은 바람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이민선조들은 미국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인사회 결속과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2021년을 사는 우리가 되새겨야 하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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