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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5] "뭐 이런 사람이 세일즈를 한다고…" 고객 입장에서 파니 '판매왕' 등극

여러 번 촌극을 빚으면서도 어쨌든 열심히 하다 보니 가스레인지 같은 조금 비싼 제품을 담당하는 코너로 배정받았다.

한번은 50대 중반의 여자 손님이 오븐의 '벤트'(vent)에 대해서 물었다. 벤트? 벤트?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내가 벤트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손님은 입으로 바람을 훅훅 불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제야 벤트가 환풍기를 뜻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손님은 웃으면서 나의 등을 툭툭 치며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

무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속 넓은 손님들은 너그럽게 봐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손님도 많았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뭐 이런 사람이 세일즈를 한다고…' 하는 표정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적도 많았다. 그럴 때면 옆에서 지켜보는 동료들의 비웃음 섞인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한국에서 내가 배우고 익힌 영어는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보잘것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언제 전자제품의 부품 명칭 같은 단어를 써보기나 했던가. 전자제품을 사러 찾아오는 손님들은 처음 듣는 부품 이름이나 용어를 써가며 기능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에도 진땀이 날 정도였다.

하루하루 쩔쩔매면서 일하는 내 모습을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매니저 '델 데리고'라는 이탈리아계 노인이었다. 그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체크하고 있었다. 내가 손님들에게 휘둘려 어리벙벙해 있으면 그는 어김없이 나를 불러 등을 두드려주며 "수키 잘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앞으로 잘해낼 거야" 하면서 힘을 북돋워주곤 했다. 내가 석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정말로 석 달은 참아주기로 한 것 같았다.

강석희 판매왕이 되다

한 달 정도 지나니 매장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고 손님을 맞는 일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이름도 다 외웠고 편안하게 인사를 나눌 여유도 생겼다.

하루는 데리고 매니저가 나를 부르더니 시간외근무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푼이 아쉬운데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당장 그러겠다고 했다. 시간외근무를 하면 정규 근무 시간보다 1.5배의 시급을 주기 때문에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매니저는 나에게 또 하나의 숙제를 안겼다.

연말에 전체 세일즈맨을 대상으로 판매왕 선발 대회가 있으니 열심히 해보라는 것이었다. 세일즈 콘테스트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사 두 달도 안 된 풋내기가 섣불리 욕심을 낼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해 크게 관심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매니저는 각 분야별로 1등을 선발하는데 나는 신참들끼리 경쟁하는 주니어 세일즈 분야에서 성적을 매기겠다고 했다. 1등상은 1월에 발표하고 상품은 부부 동반 하와이 여행이라고 했다. 귀가 솔깃했지만 언감생심 하나같이 경력이 쟁쟁한 동료들을 제치고 내가 어찌 1등을 차지하겠나 싶었다.

11월은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쇼핑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가 연이어 있기 때문에 소매업소들로서는 11월 12월이 대목이다. 이 시즌에 맞춰 업소들이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할인 행사를 하기 때문에 이 시즌을 기다렸다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11월이 되자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줄 선물을 고르러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어서 덩치 큰 가전제품보다는 내가 맡고 있는 소형 제품 코너에 유독 손님이 몰렸다. 나는 부지런히 설명하고 팔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날마다 실적이 쑥쑥 오르니 신이 나고 살맛이 났다.

아무래도 언제나 반듯하고 겸손해 보이는 나의 자세가 큰 장점으로 작용한 듯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임하니 정말 친절하다며 고마워하는 고객이 늘었다. 나의 세일즈 방식이 고객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고객에게 물건을 팔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객이 가장 합리적으로 구매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매자의 입장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이 되어야 했다. 고객은 자신이 세일즈맨의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세일즈맨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 부담없이 물건을 구입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세일즈맨의 기본 자세였고 부친을 도우며 터득한 세일즈 정신이기도 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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