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2] 형 음식점서 일한지 몇주후 동창이 LA행 권유···OC 사는 누나가 마중 나오면서 OC와 인연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6월인데도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쌀쌀했다. 내 신세가 날씨만큼이나 비참해 보였다. 나만 믿고 이곳까지 따라왔는데 오자마자 감자 씻고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아내는 좋은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자란 귀한 집 딸이었다. 대구에 있는 경북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려대에 합격한 재원이었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규수였다. 그런 아내를 이렇게 조그만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아내는 생각보다 참 잘 적응했다. 그럭저럭 몇 주가 지나갔다. 당시 LA에 고교 대학 동창인 조원용이라는 친구가 1년 전에 미국에 와 세븐일레븐에서 캐시어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는 반가운 나머지 그길로 밤새도록 수동식 폭스바겐 '버그'를 8시간이나 운전해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우리는 사흘 동안 형네 집 좁은 차고 방에서 자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 이야기했다. 친구는 LA에 가서 살아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캘리포니아 남부 쪽에는 일자리가 더 많고 한인들도 다소 있어서 새로 시작하기가 훨씬 쉽다는 이야기였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나는 LA로 갈 결심을 굳히고 형에게 내 뜻을 전했다. LA에 가서 새로 시작하겠노라고 여기서 형한테 폐만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고. 형은 상당히 언짢아하면서 마음대로 하라며 역정을 냈다.
이민자의 운명은 마중 나온 사람이 결정한다?
우리는 다시 비행기에 이민 가방을 싣고 LA로 향했다.
롱비치 공항에 도착해 큰누나와 친구 원용이의 마중을 받았다. 누나는 당시 오렌지 카운티의 산타아나 시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방 2개짜리 임대 아파트였다. 누나네는 아이가 넷이었는데 한국에서 우리가 떠나올 때 남아 있던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방 2개에 8명이 살게 된 셈이었다. 누나도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가 막혔으리라. 한국에서 의사였던 매형은 화학 공장에서 야간 일을 하고 있었고 누나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더부살이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에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부나 할까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형도 누나도 우리를 돌보아줄 형편이 아니었다. 다들 너무 바쁘고 자기 살기에도 벅찼으니까.
미국 가정은 대체로 맞벌이다. 혼자 벌어서는 집 할부금이나 임대료를 내고 자동차 굴리고 생활비를 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둘이 벌어야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 미국 이민자들의 평균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런 형편이니 아무리 피붙이라도 시간과 돈을 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펴줄 여유가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샌프란시스코의 형도 오렌지 카운티의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14살 위인 큰누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주어 나에게는 엄마나 다름없는 누나였고 늘 우리에게 잘해주려고 애를 많이 썼다.
미국 한인사회에는 이민 올 때 공항에 누가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직업이 결정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미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 보니 마중 나온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도움을 주는 사람이 사는 곳 근처에 살게 되고 또 그 사람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당시 누나가 한인들이 많은 LA에 살면서 한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면 나도 LA 근처에 있는 어느 한인 직장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서킷시티가 미국에서의 첫 직장이 될 일도 없었을 테고 영어는 한국에서보다 더 녹이 슬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오렌지 카운티에 살고 있는 누나가 공항에서 나를 마중한 것이 그 지역에서 시장까지 된 내 인생의 씨앗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살이란 참으로 많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그 작은 우연이 삶의 모양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에 더욱 진지해지고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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