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1] 형이 하는 식당에서 감자 깎으니 만감교차···"고작 이런일 하려고 영어공부 했나" 서러움
미국에는 약 200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없다. 중국 커뮤니티나 일본 커뮤니티는 박물관 문화 센터 등 자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려주는 '랜드마크'를 이미 여러 곳에 세웠다.지금 내가 시장으로 있는 어바인에는 21세기 미국 내 최대 공원이 될 '그레이트파크'가 조성되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설 다문화 센터에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릴 수 있는 한국문화센터를 건립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시장 임기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내 모든 정력을 쏟을 생각이다. 우리 한인사회의 미래를 위한 위대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센터는 이번 세대뿐만이 아니라 다음 또 그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어쩌면 나의 미국 생활의 피날레를 장식할 마지막 꿈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문화센터는 인간 강석희로서 어바인 시의 시장으로서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귀중한 꿈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시의원으로서 '그레이트파크' 계획을 수립할 기회를 주셨고 또한 시장으로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셨다. 어바인 주민들은 물론 미국인들의 오아시스가 될 소중한 공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막중한 기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50년 100년 후를 바라보면서 나는 오늘도 '그레이트파크' 공사 생각에 마음이 설레 잠을 설친다.
3장. 내가 미국에서 배운 것
큰형은 원래 약간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머리는 비상했다. 10대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겠다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고3 때 연예인의 길을 가겠다고 공부를 거의 하지 않다가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벼락공부로 17대 1의 경쟁을 뚫고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해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이러한 형의 강한 면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형처럼 '한다면 한다'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모범생 스타일인 나와는 딴판으로 형은 항상 도전 정신이 넘쳤다. 형제라고는 해도 12살 차이가 나다 보니 함께 어울릴 기회도 서로를 알 기회도 별로 없었다.
남들은 한창 대학 생활을 즐길 즈음인 대학 2학년 때 형은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두더니 훌쩍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62년이었으니 유학을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때였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간다고 갔던 형은 그냥 미국에 눌러앉았다.
우리 부부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형이 마중을 나왔다.
"형님 저 왔습니다."
"응 그래 온다고 고생했지?"
형은 그저 덤덤했다.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반가워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약간 서먹서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과 형수님은 함께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을 파는 미국 식당이었다.
일단 형 집에 짐을 풀었다. 형은 당분간 차고를 개조한 방에서 지내라고 했다. 며칠 후부터 우리 부부는 형이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서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는 감자를 씻고 써는 일을 도왔고 아내는 손님들에게 서빙하는 일을 도왔다. 성격이 좋아서인지 아내는 형수님과 금세 친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린 첫날부터 좀 불편한 기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대하는 형의 냉랭한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형이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닌 데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해 한국식의 잔정 표현에 익숙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이해했다.
그때는 형님이 우리를 마치 짐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감자를 씻고 써는 일을 며칠간 도와주면서 '내가 미국에 와서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그토록 영어 공부를 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실망스럽기도 했다.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형은 내게 가까운 직업 센터에 가서 직장을 잡아보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직업 교육도 무료로 시켜주니까 마땅한 것이 있으면 배우라고 했다. 나는 직업 센터에 가서 보험회사나 일반 회사의 평사원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니 갑자기 미국에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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