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7] 평범하고 내성적으로만 기억했던 동창들…시장 당선후 "재가 그때 강석희야" 놀라
지금은 실력이 많이 녹슬었지만 가끔은 어렸을 때 배웠던 바이올린을 켜며 기분 전환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인 신문사에서 '명사들의 취미 생활'이라는 코너를 위해 취재를 하겠다면서 나에게 바이올린 켜는 포즈를 잡아달라고 했다.어색하게 바이올린을 켜는 민망한 모습이 신문에 등장했는데 고백하자면 나의 바이올린 실력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 나아진 게 없다. 다만 바쁜 생활 속에서 잠시라도 여유를 찾고 싶을 때 그때 쓰던 바이올린을 가끔 어깨에 올리곤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날 과외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앞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에 싸인 갓난아기가 바로 내 방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섭게 추운 겨울밤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뛰어가 집 앞에 아기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니는 누가 아기를 버리고 간 것 같다고 하셨다. 영문을 몰랐던 나는 아기가 너무 불쌍하니 우리가 키우자고 졸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파출소에 신고한 다음 아기를 경찰에 데려다 주셨다. 사실 지금도 가끔 그 아기가 지금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날 때가 있다.
아무튼 나는 집에서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기는 했지만 불쌍한 사람을 보면 남다른 동정심을 보이며 가슴 아파했다. 누가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사회사업가나 고아원 원장이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너는 잘돼 봐야 학교 선생밖에 못 하겠다
어린 시절 나는 순하고 내성적인 편이었다. 나서는 편도 아니었고 화제를 이끌어가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다른 친구들 속에 묻혀 지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는 편이다. 나는 그렇게 평범한 아이였다.
어바인 시장에 당선되고 난 얼마 후 KBS에서 나의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일이 있었다. 방송이 나가고 며칠 후 최용성이라는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목욕탕 집 아들로 항상 우등생이었던 친구인데 40여 년 만에 연락이 닿은 것이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교수로 있다고 했다. 너무도 반가워서 바로 한국으로 전화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어릴 때 그렇게 조용하고 샌님 같았던 내가 미국의 대도시에서 치열한 선거를 거쳐 시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믿을 수가 없었노라며 놀라워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도 내가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같이 "어바인 시장이 그때 그 강석희야?" 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아버지는 대장부다운 모습이 없었던 나에게 "너는 잘돼 봐야 학교 선생밖에 못 하겠다" 하시며 자주 실망감을 내비치셨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있구나
서울사대부중 시험에 낙방한 나는 혜화동에 있는 동성중학교에 입학했다. 보이스카우트에도 가입해 활동했고 막 창설한 야구반에도 들어가 우익수를 맡았다. 서울시 야구 대회에서 경동중학교에 무참하게 졌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저명한 시인이셨던 황금찬 선생님과 박희진 선생님에게서 작문과 영어를 배웠다.
나는 처음 배우는 영어에 특별한 호기심을 가졌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축에 들지 못했던 나는 영어에서만큼은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아마도 기억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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