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6] 어머니가 10년 반찬값 아껴서 주신 1만불, 이민생활 힘들때마다 꺼내보고 용기 얻어

-가족 위해 평생을 바치신 어머니

어머니는 평생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으신 분이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는 항상 무언가를 닦고 있는 모습이다. 그만큼 정갈하고 깔끔하셨다. 어머니가 해주신 개성 특유의 담백하고 깊은 음식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성품이 온순하셔서 평생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한없는 사랑을 베푸신 헌신적인 분이셨다.

어머니는 혼자였던 시누인 고모를 끝까지 돌보셨다. 고모가 5년 넘게 치매를 앓을 때도 변함없이 묵묵히 돌보셨다. 여느 시누이와 올케 관계를 생각할 때 참 대단한 정성이셨다.

어머니는 올케인 외숙모와도 수십 년 동안 한 집에서 살 정도로 참을성이 많으셨다. 어머니라고 왜 불평불만이 없었을까마는 평생 자신의 삶을 숙명처럼 여기며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며 살다가 간 수많은 대한민국 어머니 중의 한 분이셨다.

1980년대 초 미국 이민 생활 초창기에 잠시 한국에 다니러 온 적이 있었다. 아내가 아이들 때문에 직장에 나가지 못해 나 혼자 버는 돈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방으로 부르시더니 봉투를 하나 건네셨다.

"석희야 이거 받아라."

"그게 뭐예요 어머니?"

"애들 둘 키우면서 힘들게 사는데 내가 돈 좀 줄게."

"돈요? 저희 필요 없습니다. 그냥 어머니 용돈 쓰세요."

"너희들 주려고 내가 그동안 모은 거다. 어서 받거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시면서 봉투를 얼른 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1만 달러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큰돈이었다. 어디서 난 돈이냐고 여쭈었더니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에게서 받은 생활비로 시장을 본 다음에 남은 돈에서 조금씩 떼어 적금을 들었노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건네주신 봉투를 받아드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멀리 떠나 있는 자식을 위해 10년간 반찬 값을 아끼고 적금을 부어 모은 돈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주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니 가슴이 쩌릿해 왔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귀중한 돈인가. 나는 이민 생활이 힘들어질 때마다 그 돈을 꺼내 보았고 그때마다 어머니의 한없이 큰 사랑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곤 했다.

-고아원 원장이 꿈이었던 아이

나는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서울 종로구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9남매 중 일곱째였는데 내 위로 누나 셋은 어릴 때 세상을 떴다고 했다. 딸을 연이어 넷이나 낳은 다음에 얻은 아들이 나였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우리 집은 그럭저럭 사는 편이었다. 그 당시 집에 제니스 TV 전축 세트 전화도 있었다. 아버지가 포목점을 하시면서 돈을 꽤 버셨던 모양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손에 끌려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바이올린 같은 과외 활동이 흔치 않았다. 내가 다닌 효제초등학교에는 합주단이 있었다. 거기서 개인 교습도 받았다. 바이올린 레슨은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음대에 진학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는 음대 가면 굶어죽기 십상이라며 극구 말렸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