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5] 개성상인 출신 아버지 40년간 포목점 '한길' 평생 신용 최고덕목 강조…정치 밑거름 돼
◇ 제2장 대한민국 나의 조국-개성상인의 둘째 아들
나는 못 말리는 '강씨 고집'으로 유명한 진주 강씨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 두 분은 모두 개성 토박이다.
아버지는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일찍부터 가장 역할을 하느라 초등학교만 마친 후 집 앞에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면서 장사를 배우셨다. 정미소에서 품팔이 일꾼도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개성상인의 상도를 배우신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전쟁 중 북한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친 이야기 죽음을 피해 월남했다는 사연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월남한 아버지는 청계천 다리 근처에서 노점 포목상을 하다가 서울 광장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한자리에서 40여 년간 포목점을 하셨다. 가게 이름은 '특일상회'였다. 수백 개의 가게 중 번호가 특1호였기 때문이다. '특일상회 강 사장'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신용이 철저한 상인으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얼마든지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고 아버지가 쓰는 당좌수표는 시장과 은행에서는 보증수표로 통했다.
-석희야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다
"신용을 지켜라. 사람과의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 신용이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라.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신용을 강조하셨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나는 장사를 하는 아버지에게 신용은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덕목이었고 자식들이 평생 동안 지켜 나가야 할 가훈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셨다. 오직 한길만을 우직하게 걸어가셨다. 다른 사람들이 포목점에서 번 돈으로 점포를 확장하거나 더 유망한 다른 업종으로 바꾸는 것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한 번도 곁눈질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장사를 하시던 그 자리는 지금은 외가 친척이 지키고 있다.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면 정장을 하신 모습만 떠오른다. 항상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이셨다. 집에서도 양복을 입은 모습을 더 자주 보았다. 1980년대 중반쯤 미국 이민 초기에 부모님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도 넥타이에 양복 차림이셨다.
심지어 디즈니랜드에 갈 때도 똑같은 차림을 하셨다. 그날 디즈니랜드 관광객 중에 넥타이를 맨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날씨가 더우니 넥타이도 풀고 윗도리도 벗으시라고 말씀드렸건만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예의를 지키고 단정하게 보여야 한다며 굳이 정장 차림을 고수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렇듯 매사에 강직하고 한 우물을 파는 그런 분이셨다. 신용을 생명같이 여기고 옳다고 믿는 일은 뚝심을 갖고 저돌적으로 실천하는 분이셨다.
나는 정치인은 신용을 파는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결국 자신을 파는 일이다. 정치인이 유권자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신의를 지킬 때 정치인은 비로소 진정한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신용을 중시하는 아버지를 보고 배운 때문이 아닌가 싶다.〈계속〉
글.사진=올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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