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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모자 쓴 할머니

모자 쓴 게 죄인 양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게
어느 분이 다가와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옷이 날개라면 모자는 벼슬이다. 모자 하나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고 멋져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 중 가장 모자를 애용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일 것이다. 그녀가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쓴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황홀한 기분을 만끽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자는 필수품도 사치품도 아니지만 멋을 찾는 개성파에겐 중요한 의복이나 마찬가지다. 예전엔 예를 갖추거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모자를 썼고 덥거나 추울 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다. 요즘은 그 외에도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모자가 패션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자 얘기를 하다 보니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60여년 전 추억 속의 모자가 생각났다.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왕십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왕십리 똥파리라고 놀림을 받았고 이름 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보다도 힘든 시절이었다. 어느 여름 날 여학교 교복에 둥근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모교에 나타나자 수업 중이던 학생들이 교실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을 흔들며 난리가 났었다. 마치 개선 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당시 그 여학교는 다른 여학교와의 차별화로 여름이면 둥근 챙이 달린 모자를 썼다. 건빵이라는 별명이 붙은 배지를 달고 그 학교의 상징인 모자를 쓰고 다니면 자부심이 하늘에 닿을 듯 충만했다.

최근 머리 때문에 부쩍 신경을 많이 쓴다. 나이 먹으니 머리카락이 빠지고 흰 머리가 많아져 부분적으로 염색을 한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묶어도 생머리라 자꾸만 흘러내린다.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스프레이를 뿌리니 화학제품이 두피에 닿아 머리 속이 가렵다. 머리 관리로 고민하던 중에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이럴 수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모자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낮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거리나 지하철, 어디에서나 모자를 쓴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여자라고 했지만 사실은 나이 먹은 할머니들이다. 아마도 부스스한 머리 모양을 모자를 씀으로 감추고 싶어서 일 것이다.

유행에 편승해서 나도 한국에 있을 땐 자연스럽게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제는 어디를 가나 무용지물이 된 나이에 멋을 내거니 예뻐 보이려고 모자를 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애써 예쁜 모자를 고르고, 내게 잘 어울릴지 상상하며 사는 이유는 결국 돋보이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모자를 쓰는 진짜 이유는 머리 손질이 귀찮기 때문이다.

외출할 때 머리 때문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는데 모자를 쓸 경우 세수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면 그만이다. 게다가 염색도 안하고 스프레이도 뿌릴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LA 가서도 모자를 쓰고 다니리라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모자를 줄곧 쓰고 다니다가 LA에 오니 사정이 달랐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여성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외출하면 어울리지 않게 멋을 부리려는 것 같이 보일까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편하려고 쓴 모자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니 오히려 불편했다.

어느 주일날 용기를 내어 모자를 쓰고 교회를 갔다. 나 외에는 아무도 모자를 쓴 사람이 없었다.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쭈뼛거렸다. 모자 쓴 게 죄인 양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내게 어느 분이 다가와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아해 하는 내게 옆에 있던 다른 분이 암환자들이 항암 치료를 받아 머리가 빠지면 보기 흉하니까 모자를 쓴다고 설명해줬다. 맙소사! 그 후로는 교회 갈 땐 모자를 쓰지 않았다. 대신 동네서 걸을 때나 마켓 갈 때 모자를 썼다.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던 차에 코로나가 발생했다. 집안에만 갇혀 지내니 머리 모양에 관심조차 없었다. 가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마켓에 가면 캐시어가 “모자가 참 예쁘네요”라며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연구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고 한다. 내가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큼 남들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타인을 어느 정도는 의식할 수밖에 없지만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아들의 의견을 들어 보기 위해 “엄마가 모자 쓴 것이 이상해 보이니?”라고 물으니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마세요. 남들은 엄마가 모자를 썼는지 안 썼는지 관심도 없어요”라고 했다. 아들 말마따나 나는 남들 보기에 관심 밖의 할머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람.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자. 세상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모자 코디 법은 자신감이라고 한다. 모자를 쓰고 당당했던 여학교 시절의 기억을 살려 자신감 있게 다시 모자를 써야겠다.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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