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 1992년 4·29 폭동 충격···톱 세일즈맨서 정치입문 결심
사실 나는 미국에 온 이후 일과 가족밖에는 모르고 살았다. 정신없이 일했고 그 덕분에 첫 직장이었던 전자제품 유통 회사 '서킷시티'에서 유일한 동양계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실적이 좋아서 상도 많이 받았고 아내와 눈코 뜰 새 없이 맞벌이를 하면서 다른 한인 이민자들보다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경제적 안정도 이룰 수 있었다.
내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그해 4월 29일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의 아비규환 속에서 한인 사업체들이 약탈당하고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한인 타운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정치력이 없어서였다. '운명적인'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할까 나는 우리 동포사회의 힘을 키우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를 계기로 자신과 가족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개인 강석희'는 하루아침에 '사회인 강석희'가 되었고 에이그런 시장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애초부터 정치에 목표를 두고 그것을 향해 디딤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나를 보고 정치에 나서보라는 동포들도 있었지만 흘려들었다.
미국에서 정치를 하려면 적어도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해야 하고 미국적인 사고와 행동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본적인 배경을 갖추고 거기에 더해 정치적인 야망과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치인이 되기에는 여러 면에서 자격 미달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만 24세에 미국에 온 1세 이민자인 데다가 가장 내세울 이력이란 게 톱 세일즈맨뿐이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민 1세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모국어로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영어는 어쩔 수 없이 한국식 액센트가 담긴 외국어일 뿐 모국어 수준과는 역시 거리가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휘력이나 구사력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인맥이라고는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생들이 전부였다.
그러니 미국에서 정치인을 꿈꾼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한인사회를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는 나를 보면서 선.후배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치 입문을 고려해 보라'고 권유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러나 베테랑 지역 정치인 그것도 내가 흠모하던 에이그런 시장에게서 정치 입문을 생각해 보라는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가 뭘까 혹시 나는 스스로를 너무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라는 게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도전할 수 있는 분야일까 내가 정치인이 된다면 어떤 보람이 있을까 정치인 강석희는 과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인물이 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정치' '정치인'이란 단어가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정치에 관심없다'던 강석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계속>
글.사진 제공=올림픽출판사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