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韓ㆍ三國의 성립과 對倭관계
이번 제21회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 제3장 삼한ㆍ삼국의 성립과 대왜관계 제4편 백제(百濟), 그 발전과 대왜(對倭)관계(IV)에서 백제의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제21회 연재내용>
三. 三韓ㆍ三國의 성립과 對倭관계
4. 백제(百濟), 그 발전과 대왜(對倭)관계(IV)
백제의 문화: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A.D. 372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 5호 16국 가운데 하나.
351~394년)에서 승(僧)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전을 전해온 것에서 시작됐다.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진 것은 고구려보다 12년 늦은 A.D. 384년인 침류왕(枕流王) 원년, 동진(東晋: 265~420년)으로
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중이 와서부터의 일이다. 고구려·백제 모두 왕권강화를 꾀하는 체제정비에 여념이 없던 시기라서 국민 사상통일
과 국가수호라는 정책목표에 부합한다고 보아서, 적극 보호하기에 이르러 한산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마라난타로 하여금 열명의 승려를 기
르게 하였다. (《삼국사기》권24 침류왕 2년 조(條).)
당시 동진의 불교는 이미 대승불교 경전을 중요시했던 시기였고 백제로 전해진 것도 이 대승불교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불교가 백제 안
에서 융성해진 것은 웅진시대 말기부터 였다. 지난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의 부장품들이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성왕(聖
王, 523~554년)때가 되면 백제불교는 전성기에 들어선 느낌이었고, 중국대륙과 일본과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교류도 활기를 띄우기 시
작했다.
성왕때에는 백제의 고승인 겸익이 천국(天竺:인도)에 유학해서 율종(律宗)을 배운 뒤 돌아와서는 경전번역에 종사했다. 이 시기는 중국 양
(梁)나라 무제(武帝)때 인데, 백제나 신라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양의 문화섭취에 적극적이었다.
성왕 대에는 일본으로 불교가 전해진다. 이에 관해선 《일본서기》의 552년 임신설(壬申說)과 긴메이(欽明) 7년-무오(戊午)년,
A.D. 538년에 일본으로 불교가 공식으로 전파(佛敎公轉)된 것으로 일본학계에서는 공인되고 있다.
그 뒤 위덕왕(威德王, 554~598년)대-일본의 스이코조(推古朝)-에는 율사(律師), 선승(禪僧), 비구니(比丘尼)도 일본으로 건너갔
고, 일본조정은 이들 승니(僧尼)를 위해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오사카시와 그 주변)에 절(大別王寺)을 지어 그곳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584년 갑진(甲辰)에는 일본에서 백제를 찾아온 사신 중 가노후카노오미가 미륵석불을, 사에키노무라지(佐伯連)는 금동불상을 일본으로 갖
고 돌아갔다. 588년 무신(戊申)-일본은 요오메이(明用)조-에는 성왕은 절을 짓는 사공(寺工)과 가와라노하카세(瓦博士), 화공(畵
工), 노반박사(?盤博士), 즉 탑공(塔工) 등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또한 일본 스이코조 5년인 597년 정사(丁巳)에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요오메이왕의 아들이
며,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숭앙을 받는 쇼오토쿠타이시(聖德太子: 574~622년)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쇼오토
쿠가 죽은 뒤에 제작된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 일본 국보) 또한 백제에서 간 화공의 디자인이었다. 이는 쇼오토쿠태자와 그 생모(皇后)
가 왕생한 극락, 즉 천수국의 모습을 수놓은 만다라이다. 본래는 나라 호오류우지(奈良 法隆寺)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쥬우구우지(中宮寺)
에 소장돼 있다.
역시 스이코 여왕때, 일본에 역서(曆書), 천문·지리서, 병법책을 가져간 것도 백제의 승인 관륵(觀勒)이었다. 스이코여왕은 그를 아스타
의 간고오지(元興寺)에다 살게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른바 삼론학(三論學)에 통달했던 학승(學僧)이
기도 했다. 후일 삼론으로 흡수된 성실종(成實宗)에서는 백제승인 도장(道蔣)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 가운데 하나
로 알려진 나라 성실종의 개조(開祖)가 됐다.
《일본서기》권22에는 스이코 3년에는 고구려승인 혜자(惠慈)와 백제승인 혜총(惠聰)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쇼오토쿠타이시를 가르쳤다는 기록
이 있다.
또 권21에는 스슌(崇峻)조 3년 춘삼월(590년)에 일본의 젠신(善信 ), 아니(阿尼) 등 비구니 둘이 백제로 유학, 3년동안 율학
(律學)을 배우고 돌아가서는 일본 율종의 개조(開祖)가 됐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와 같이 백제불교는, 특히 열반(涅槃), 율(律)·삼론(三論) 및 성실(成實)론은 일본 불교의 방향 설정을 했던 것이다. 이른바 임신
의 난(壬申之亂) 후 성립된 텐무(天武)·지토오(持統)조에서는 비로소 천황의 권위가 확립됐고 율령이 제정됐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기기
(記紀)의 편찬, 곧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의 편찬이며 한편 불교미술이 성행한다. 《고사기》를 편찬했던 인물은 바로 백제계
학자인 ‘오오노아손야스마로(太祖臣安萬侶)’로, 그 관직은 미부쿄오(民部卿)에 이르고, 겐메이(元明)조의 칙명(勅命)에 따라서 구전된 자
료(帝紀, 舊辭 등)를 필록해서 《고사기》 세권을 찬진(撰進)했다고 전해왔다.
그런데 그 오오노야스마로는 실재(實在)했던 사람임이 그의 유골과 묘지가 발견됐다. 지난 1980년 정월, 가시와라(檀原) 고고학 연구소
의 발굴조사 결과였다. 장소는 헤이죠오쿄오(平城京), 곧 지금 나라시의 동교(東郊), 나지막한 산(高原山) 뒤 (奈良市比瀨町)였다.
그 고장사람들이 톤보야마(山)라고 부르는 구릉의 가파른 남쪽 사면에 오오노야스마로(太安方侶)의 묘는 있었다. 한변이 약 2미터인 토광
이 있었고, 그 바닥엔 숯을 깔고 그 위에 묘지가 엎어져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야스마로의 유골을 안치한 관을 놓고 그 둘레에 숯을
쌓아서 관을 덮었다. 그 위에 봉토를 했고 토광묘 둘레를 도랑으로 둘렀다. 관속에는 화장된 유골과 치아 외에 진주 네알과 회반죽과 쇠조
각 등이 있었다.
묘지는 얇은 동판이고 도금은 없었다. 거기에 아래와 같이 묘지명이 새겨져 있었다.
左京四條四坊從四位下勳五等太朝臣安万侶以癸亥
年七月六日卒之 養老七年十二月十五日乙巳
계해년(癸亥年)은 요오로오(養老: 元正朝연호) 7년(A.D. 723년)이며 쇼쿠니혼기《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의하면 같은 해 7월조에
야스마로의 사망기사가 보인다.
안만려(安万侶)묘 발굴조사보고(奈良縣立檀原考古學硏究所의 「太安万侶墓發掘調査槪報」1978년)는 더 상세한 발굴보고이기는 하나 이 정도로
그친다.
주.
1. 남도육종(南都六宗): 奈良時代 佛敎宗派. 三論·法相·華嚴·律
·成實·俱舍 등 여섯 宗派
2. 《속일본기(續日本記)》六國史의 하나. 40권. 《日本書紀》의 뒤를 이어서 文武朝에서 桓武朝(791년)까지의 編年體史書. 797년
편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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